정교회의 역사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8

ttoza 2025. 6. 19. 11:30

 

그리스의 에똘리아 출신인 꼬즈마 성인(1714-1779)

 

18세기

18세기에는 7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을 차지한 사람이 마흔 여덟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다섯 번이나 총대주교직을 차지하였습니다. 이것은 터키인들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이 처했던 처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세르비아인들은 어떻게든 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옮겨가 거기에서 자신들의 교구(dioceses)를 부여받기도 했지만, 터키의 지배 아래 놓인 채 남아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는 바로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들 가운데 세 분이 살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성 꼬즈마스 에똘로스

성 꼬즈마스 에똘로스(St. Cosmas Aitolos, 1779년 안식)는 현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현대 그리스 국가의 아버지라고 불려집니다. 성 꼬즈마스는 아토스 산의 수도자였는데, 터키의 압제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산(聖山, 아토스산)을 떠났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설교자요 교사였으며, 그의 말들은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또한 이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성 꼬즈마스는 터키인들의 손에 순교하였습니다.

 

고린토의 성 마카리오스

고린토의 성 마카리오스(St. Macarios of Corinth, 1805년 안식)는 성 꼬즈마스보다 조금 젊은 동시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아토스 산에 있으면서 정교의 예식적 실천들을 엄격하게 지켜나갔습니다. 그는 고린토의 주교로 뽑힌 선교사요 설교자였으나, 그 직을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정기적으로 자주 받는 성체성혈 성사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강조한 것으로서 가장 유명합니다. 성인은 많은 영적 작품들을 썼으며, 그 가운데 많은 것은 교인들이 신비의 성사들(성례전, sacrament)에 참여해야 할 필요를 주제로 하여 쓴 것입니다.

 

성 니코데모스

성 니코데모스(St. Nicodemos the Hagiorite, 1809년 안식)는 성 꼬즈마스, 성 마카리오스와 같은 정신 속에 있었습니다. 그도 또한 아토스 산의 수도자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터키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 정교의 영적 부흥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린토의 성 마카리오스가 쓴 것들을 포함해서 영적인 작품들을 편집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업은 필로깔리아(Philokalia)인데, 이것은 동방교회 교부들의 영적이고 금욕적인 저술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러시아: 거룩한 치리(治理)의 시노드

18세기는 러시아의 정교회에 매우 중대한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피터 대제가 황제의 칭호를 갖고 1725년까지 다스렸습니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요구와 바램에 복종시키면서,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교회를 다스렸습니다. 1700년에 총대주교인 아드리안(Adrian)이 죽자, 피터는 노브고로드의 야심 많은 주교 스테판 야보르스키(Stefan Iavorskii 1772년 사망)에게 선출을 약속하면서 그 직책을 맡도록 지명하였습니다. 1721년에 피터는 교회의 규범’(Ecclesiastical Regulation)을 공포했습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화한 우크라이나인 테오판 프로코포비치(Theophan Prokopovich 1738년 사망)에 의해 쓰여졌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교회의 총대주교 직위는 공식적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거룩한 치리의 시노드’(The Holy Governing Synod)가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거룩한 시노드는 황제가 임명한 주교,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의 세속적 책임자, 곧 오버-행정장관(ober-procurator)이라고 불려지는 정부의 관리를 통하여 황제에게 종속되었습니다. ‘거룩한 시노드는 피터가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서방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행정체계와 일치하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교회법을 따른 정교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치는 이런 조치, 곧 황제에 의해 교회에 지워진 이 요구는 동방의 총대주교들에 의해서 정식으로 재가를 받아 인정되었습니다. 그같은 체제는 다시금 총대주교가 러시아 교회를 위해 선출되고 비정교회적인 교회행정의 방식이 사라지게 된 1918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거룩한 시노드의 첫 의장으로서 피터 대제에 의해 임명될 이는 라틴화한 우크라이나인 스테판 야보르스키였습니다. 이미 본 대로 그런 계획을 꾸민 이는 서구화한 남부 출신으로서 프로테스탄트적 성향을 지닌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그리고 터키 지배 아래서, 신학과 경건과 교회행정 면에서 라틴 또는 개혁교회적 입장을 지지하며 친로마적이거나 친프로테스탄트적이게 된 정교회 지도자들의 이런 상황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 있는 전통은 역사적 환경 속에서 상실되었습니다. 정교회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교부적, 공의회적 정교성(Orthodoxy)의 정신과 내용에 낯선 입장들을 선택하여 수호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러시아: 뻬쩨르스부르크 제국시대

20세기까지 계속된 러시아의 뻬쩨르스부르크 제국시대의 쇠퇴기는 교회가 영적으로 재생하는 때였습니다. 이것은 수도원의 범주 안에서 전통적인 정교의 자료들을 처음으로 재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몰도바의 수도사인 빠이시 벨리치코프스키(Paisii Velichkovskii 1794년 사망)는 아토스산까지 여행을 하고서, 귀중한 필로깔리아를 갖고 러시아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작품을 교회의 슬라브어로 번역했습니다. 그가 시작한 뒤부터 스타르찌(startsi) 또는 장로라고 부르는 영적 인도자가 있는 러시아 교회의 전통이 발달됐습니다. 이런 발전이 가장 하려하게 꽃을 피운 것은 19세기의 옵티나(Optina) 수도원에서였다.

 

18세기에 러시아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은 짜돈스크의 성 티콘(St. Tikhon of Zadonsk 1783년 사망)이었습니다. 티콘은 보로네즈(Voronezh)의 유력한 주교였는데, 아마도 좋지 않은 건강만큼이나 크게 낙담하고 좌절감을 느낌으로써 수도자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주교직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들에 깊이 몰두했으며, 특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게 열중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가장 경건한 작가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 티콘은 참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를 포함해서 많은 책을 썼으며, 영적인 지도와 사목적인 상담 사이의 뛰어난 조화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세기의 탁월한 러시아 고위성직자로는 신학 교과서의 저자인 모스크바의 대주교 플라톤(1812년 안식)이 있다. 그는 역사적 연구를 증진시켰으며, ‘옛 신자들이 정교회로 돌아와 함께 친교를 나누도록 계획을 세운 입안자였습니다.

 

알래스카 선교

18세기 동안에 러시아 선교사들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794년 러시아의 핀란드에 있는 발람(Valaam)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이 알래스카의 코디악(Kodiak) 섬에 도착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해안에 다다른 이 첫 선교사 무리 가운데서 알래스카의 성 허먼이 미국 정교회의 첫 성인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서방

서방에서 18세기는 부흥과 선교적 확장의 시기였습니다. (1791년 안식)과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88년 안식)는 영국교회 안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고, 이것은 미국에서 첫 대각성이 일어나도록 영향을 끼쳤습니다. ‘각성’(awakening)은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사이에 놓여있는 분열을 극복하는데 헌신하는 부흥사들의 운동이었습니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일치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58년 안식)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70년 안식)는 미국에서 일어난 이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유행했습니다. 이신론은 계몽운동과 낭만주의의 자연적인 결과로서, 스스로를 계시하거나 사람의 일에 끼어듦이 없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채로 있는 최고의 존재(Supreme Being)의 실존을 주장했습니다.

 

영국의 데이비드 흄(1776년 안식)과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1804년 안식)는 인간 이성의 범위로부터 하느님과 자유, 불멸(不滅) 등을 없애버린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개인적인 신앙과 경건한 헌신, 그리고 윤리적인 행동의 종교로 축소되었습니다.

 

이 계몽철학은 19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 신학의 직접적 선구자였습니다. 이 신학은 그것의 아버지라 할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834년 안식)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는 그 시대의 교양있는 비신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그들을 감정’(feeling)의 종교, 그리고 그것의 가장 위대한 표현인 예수의 종교로 불러들였습니다.

 

이 세기에 서방의 그리스도교권에서 이루어진 가장 영감있는 영적 성취는 바하(1750년 안식), 헨델(1759년 안식), 모짜르트(1791년 안식), 베토벤(1827년 안식)의 음악이었습니다.

 

18세기의 로마교회는 위대한 선교적 확장과 함께 유럽과 미국에서 교회와 국가를 거스르는 혁명으로 이끈 계몽운동의 정신과 큰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1773년에 예수회(Jesuit order)는 세속적인 압력 아래 교황에 의해서 해산되었습니다. 많은 예수회원들은 캐더린 2세 대제의 러시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정신을 열렬히 따르는 인물이어서,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 수도원들의 절반을 문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행정적이고 법적인 수단을 써서 교회의 수도 서원자의 수를 심각하게 제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