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리아 에집트의 수녀(4월 1일)
방탕한 삶
성녀께서는 에집트에서 태어나셨다. 열두 살에 부모 곁을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간 성녀는 이후 십칠년 동안 퇴폐와 방탕의 삶을 살아갔다. 아마포(亞麻布, linen)로 천을 짜거나 자선금에 의지해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몸을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팔았던 성녀의 욕망의 불길은 그 어느 것으로도 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무리의 리바아인들과 에집트인들이 항구로 가는 것을 보고 성녀는 무작정 그들을 따라 나서게 되었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배 안에서 자신의 육체를 그들에게 제공한 대가로써 배삯을 지불하였다. 성도(聖都)에 도착한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성당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날이 바로 십자가 현양축일(9월 14일)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성녀께서 성당의 문턱에 다다르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성녀를 밀쳐내어 도저히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른 순례자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잘들 들어가는데 성녀는 아무리 애를 써도 허사였다.
변화의 순간
성당 바깥의 한 쪽 구석에 홀로 남겨진 성녀는 그 순간, (성당 안에 모셔져 있는) 거룩한 십자가에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불결한 삶 때문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와락 눈물을 쏟아내며 가슴을 쥐어 뜯던 성녀께서는 눈을 들어 성모님의 성화를 바라다 보았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 즉시로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떠나 구원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자신을 붙들어 맸던 힘으로부터 자신이 자유로와졌음을 느꼈다. 이내 성당 안으로 들어가 거룩한 십자가에 경배한 성녀에게 한 음성이 들려왔다. ‘요르단 강을 건너면 쉼을 얻게 될 것이다.’
금욕과 고행으로 얻은 평화
그 다음날 요르단 강을 건너 사막에 다다른 성녀는 사람이나 그 어떤 동물과도 맞닥뜨림이 없이 그곳에서 47년을 보냈다. 성녀가 입고 있던 옷은 해질대로 해졌고 얼굴은 햇빛과 차가운 바람에 몰골로 변해갔다. 성녀의 음식은 오로지 향내 나는 풀(herb)과 야생의 뿌리들뿐이었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이상으로 성녀를 괴롭힌 것은 인간적인 욕정(passions)이나 자신이 저지른 죄의 기억들과 직면해야만 할 때였고, 그럴때마다 성녀는 몸을 땅에 던지며 성모님의 도우심을 간청하였다. 이처럼 극한 환경에서 각고의 금욕적 삶을 살아간 성녀는 마침내 삭막하기만한 사막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 거룩한 조시마(Zosimas, 4월 4일) 원로에게 발견된 성녀는 성체성혈을 영한 뒤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암피아누스와 성 에데시우스 순교자(4월 2일)
개종한 법률가
암피아누스 성인께서는 3세기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리끼아(Lycia: 소아시아 남서쪽의 해안가 지역)에 있는 한 도시에서 부유한 부모님을 두고 태어났다. 베리투스(지금의 베이루트 Beirut)에서 법률을 공부한 성인께서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성인께서는 자신에게 보장된 모든 세속적인 장래를 뒤로 하고 곧바로 다시 팔레스틴의 케사리아로 가 순교자 팜필루스(2월 16일)의 제자가 되었다.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미덕(美德, virtues)에 대해 팜필루스의 가르침을 들은 젊은 성인의 가슴은 그리스도께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칠 열정으로 가득 찼다.
참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
막시미누스 2세(306년) 치하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나자, 성인께서는 호위병들의 감시를 피해 케사리아의 통치자 우르반(Urban) 앞에 나타나셨다. 우상에게 제물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 통치자의 오른 손을 붙잡고 식의 진행을 막은 성인께서는 정중하지만 확신에 가득찬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참된 하느님에게서 돌아서 생명이 없는 우상과 악마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허락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던 군인들은 야수처럼 달려들어 성인의 얼굴을 때리고, 땅바닥에 집어 던져 발로 짓밟은 다음, 성인의 입과 입술을 찢었다. 그뒤 계속되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던 성인께서는 화형(火刑)의 고통도 견뎌내셨으며, 결국 고문자들이 성인의 두 다리에 바위를 묶어 바다에 던짐으로써 순교하셨다. 그런데 성인께서 바다에 던져지자마자 강력한 폭풍우와 지진이 일어나 도시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성인의 몸을 건져 올렸고,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성인에게로 몰려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영광을 돌렸다.
형의 뒤를 이은 순교
암피아누스 성인이 순교하고 오래지 않아 형제이며 아주 오래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팜필루스 성인의 제자가 된 에데시우스 또한 법정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다. 에데시우스 성인은 고문을 당한 다음, 팔레스틴의 구리광산으로 보내졌다. 모든 고난을 견디며 인내하던 성인은 풀려나자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리고 그 도시의 통치자 히에로클레스(Hierocles)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통치자에게 달려들어 그를 한 방에 때려 눕혔다. 성인은 곧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형과 마찬가지로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셨다.
성 요셉 성가작가(4월 3일)
출생과 수도생활
성인은 816년에 시실리(Sicily)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성경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였던 성인은 827년에 아랍인들이 고향마을을 점령하고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열다섯 살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펠로폰네소스로 이주하였고, 그후 다시 데살로니끼로 옮겨갔다. 데살로니끼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된 성인은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고, 마른 빵과 물로 끼니를 대신하며, 낡아빠진 옷을 입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였다. 성인은 특별히 여러 사본(寫本)들을 필사(筆寫: 옮겨 베껴 씀)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이로써 그 수도원이 아름답고 우아한 수사체(手寫體, calligraphy: 손으로 베껴 쓴 글씨)로 명성을 얻는데 공헌하였다.
투쟁과 고난의 시기
서른 살이 되기전 사제서품을 받은 성인은 수도원을 방문한 데카폴리스의 성 그레고리(11월 20일)를 만나 영적인 친교를 나누게 되었다. 그후 그레고리 성인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가 한 성당에 머무르던 성인은 성화(icon)를 공경하는 이들을 폭력적으로 박해하는 무리에 맞서 참되고 바른 정교회의 신앙과 가르침을 지키는 일에 헌신한다. 그런데 후에 교황 그레고리 4세(827-844)에게 가서 성화에 대한 박해상황을 알리고 서방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항해하던 성인은 아랍 해적들에게 붙잡혀 크레테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성인은 함께 사로잡힌 동료들을 격려하여 사라센인들(Saracens: 십자군시대의 아라비아인 또는 이슬람교인. 지중해 서쪽의 섬들과 이탈리아, 프랑스등을 침략함.)의 고문을 견디면서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한 성탄절 밤, 발은 나무족쇄에 묶이고 목에도 쇠고랑을 찬 채 성인은 ‘의로우신 태양’ 그리스도가 오심을 찬송하고 있었는데, 이때 니콜라스 성인이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나 한 양피지(羊皮紙)를 건네주셨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애로우신 이여, 우리를 도우러 어서 오소서. 당신은 자비로우시나니, 당신께서 뜻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나이다’(성탄절 전, 주님 선조들의 주일 콘다끼온의 후렴구)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 니콜라스 성인은 황제가 죽은 뒤 요셉 성인이 자유를 얻어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성가작가로서의 명성
그후 니콜라스 성인의 말씀대로 다시 제국의 수도로 돌아온 성인은 먼저 안식한 (데카폴리스의) 그레고리 성인을 이어 참된 신앙의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도원을 세워 영적인 삶을 갈망하는 이들의 거처로 만들었고, 그 수도원에 성 바르톨로메오스 사도를 기리는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바르톨로메오스 사도의 축일 전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던 성인에게 축일 전날 성 사도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성 사도께서는 제단 위에 있던 복음경을 들어 요셉 성인의 가슴 위에 놓고는 축복을 해주셨다. 그로부터 성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수많은 성가들을 작사,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성인은 마침내 자신보다 앞선 작곡자들의 작품들을 (보완하여) 완성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8음조의 ‘빠라끌리띠끼’(Paraklitike: 주중의 만과, 조과, 심야과에서 부르는 성가)를 작곡하는 동시에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이 만든 8음조의 부활성가를 보충하여 완성하였다. 또한 연중 매일 순환되면서 많은 성인들을 기리는 성가곡들을 완성하기 위해 까논과 스티히라(stichera)를 작사하였다.
성 포티오스 총대주교(2월 6일)의 재위기간 동안에 성인은 교회일과 관련하여 총대주교의 조언자가 되었고, 고위성직자들의 고백사제 역할도 수행하였다.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온 것을 안 성인은 총대주교에게 사직서를 내고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886년 4월 3일 일흔의 나이로 평안히 안식하셨다.
성 에프티히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4월 6일)
할아버지 손에 자란 아이
성인께서는 512년경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ia) 지방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난 성인께서는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가 공부를 계속하셨다.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고 생각한 성인께서는 수도생활을 할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도록 성인을 부르셨고, 그래서 성인께서는 나이 서른 살에 아마시아의 대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본래 대주교는 성인께서 라지카(Lazica)의 주교가 되길 바랐었으나 다른 사람이 그곳의 주교로 선출되었고, 그러자 성인께서는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대로 아마시아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곳의 수도원장이 되셨다.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서
유스티니아노스 황제(527-565) 시대에 네스토리오스 이단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기 위해 지역공의회가 열리자, 건강이 나빠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아마시아의 대주교를 대신하여 성인께서 참석하셨다. 그리고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은 성인의 깊은 성경지식과 이단자들의 주장을 논박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나스 총대주교(8월 25일)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로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 오르자마자 성인께서는 황제를 설득하여 553년에 제 5차 세계공의회를 개최하셨다. 성인께서 주재한 이 공의회에 참석한 165명의 주교들은 앞서 네 차례의 세계공의회에서 결정한 가르침들을 확증함과 더불어 네스토리오스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오리겐, 에바그리오스를 단죄하였다.
고난과 승리
그러나 그뒤 성인께서는 새로운 이단적 가르침(단성론 Monophysite)에 빠진 황제가 옹호하는 교리에 반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565년 1월 25일 성찬예배를 집전하는 도중에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끌려나와 칼케돈의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이후 총대주교직을 박탈당한 성인께서는 아마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12년의 유배생활이 끝나고 576년에 신도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다시 총대주교직에 복귀한 성인께서는 때로 도시를 휩쓴 전염병을 기도로 물리치기도 하셨고,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성찬예배를 드린 뒤에는 여섯 시간동안 안티도로를 나누어주기도 하셨다. 참된 신앙과 기적의 힘으로 교회를 굳건히 하시던 성인께서는 582년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 성 사바스 깔림노스의 신부(4월 7일)
* 성인에 대한 공경은 1992년 세계 총대주교청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인의 어린 시절
성인은 1862년 동부 스라키(Thrace) 지역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인들의 삶에 대해 잘 들어 알고 있던 성인이 수도자가 될 생각을 하고 있은 반면, 부모님들은 초급학교를 마치는대로 작은 가게를 그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열 두 세살 무렵?)에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집을 떠나온 성인은 곧 아토스산의 성 안나 스키티(Skete: 수도원과 비슷하나 수도자들이 주로 농사짓는 일이나 손으로 성물을 만드는 일등에 열중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곳)에 도착하여 예비 수도사가 되었다.
수도사가 된 성인
그리고 십이년이 흐른 뒤인 1887년에 성인은 성지(聖地)들을 순례하며 경배하였고, 이어 그곳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1890년) 다시 성 안나 스키티로 돌아와 두 번째 기간을 보내게 된 성인은 성화작가로서 열심히 수련하였고, 그뒤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일년동안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에 속한 학교의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성인은 1907년 무렵에 자신이 수도서원을 한 수도원 가까운 곳의 한 작은 동굴에 거할 수 있게 되어, 그곳에서 오로지 기도와 성화작업만을 진행하면서 지냈다. 이때 성인이 하루의 식사로서 취한 것은 약간의 밀과 동굴 가까이 있는 계곡물이 전부였다.
넥타리오스 성인과 나눈 교제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거하는 땅을 다시 강탈하려는 이슬람교도들의 위협을 견디다 못한 성인은 마침내 그리스로 되돌아왔고, 이후 파트모스섬을 거쳐 다시 아토스산으로 갔다.(1916년) 그런데 어느날 성인이 아테네에 잠시 머물렀을 때 성 넥타리오스(11월 9일) 펜타폴리스의 주교가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알고, 곧바로 에기나섬으로 가 넥타리오스 성인과 친교를 나누고 안식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후로도 수년동안 성인은 에기나의 수도원 가까운 곳에 거하였으며, 넥타리오스 성인과 나눈 교제는 이후 성인의 영적인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도와 희생과 헌신
침묵과 고요, 정적(靜寂, hesychia)을 사랑했던 성인은 많은 방문자들로 말미암아 에기나의 수도원이 붐비자 다시 그곳을 떠나 깔림노스 섬의 한 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다.(1926년) 그곳의 한 수녀원 가까운 곳에 작은 거처를 마련한 성인은 이후 이십이년 동안 규칙적으로 예배를 집전하고, 수녀들의 고백성사를 담당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 과부등을 보살폈다. 그러면서 성인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지 성찬용 포도주나 로즈마리 액즙(液汁)을 조금 적신 ‘프로스포라’(prosphora, 성찬예배용으로 만든 빵) 몇 조각만으로 만족하며 끼니를 대신하였다. 또한 성인은 낮에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은채 단 두 시간만을 잤고, 2차 세계대전의 고통스런 기간 동안에는 백성들을 위해 밤새도록 선 채로 기도하곤 하였다.
지상에서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성인은 사흘동안 문을 걸어 잠근채 온전한 회개의 시간을 보내며 홀로 지냈다. 그리고는 1948년 4월 7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계명들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을 베풀고 나서, 갑자기 손을 두드리면서 ‘주님, 주님, 주님!’하며 외치며 안식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수녀는 성인의 영혼이 황금빛 구름에 둘러싸인채 천상의 음악과 함께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57년 성인의 무덤을 열자, 그 곳에서 아름다운 향내가 퍼져나와 그 마을의 끝까지 가 닿았다.
성 아가보스, 루포스, 이로디온 외 2인 사도(4월 8일)
예언자 사도
아가보스 성인께서는 70인 사도 가운데 한 분으로서 예언의 능력을 받으셨다. 루가 사도께서 쓰신 사도행전에 따르면, 아가보스 사도께서는 바울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를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가셨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시대(44년-48년)에 로마 제국에 닥칠 큰 기근(饑饉)을 예언하셨다.(사도행전 11:28) 수년이 흐른 뒤, 사도께서는 당시 케사리아의 필립 보제사도 집에 머무르던 바울로 사도를 다시 찾아 가셨다. 그리고는 바울로 사도의 허리띠로 자신의 손과 발을 묶고서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이 허리띠의 임자를 이렇게 결박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넘길 것이다.’”(사도행전 21:11) 이 예언은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가보스 사도께서는 그후로도 계속 복음을 전하시다가 마침내 평안히 안식하셨다.
키레네 사람의 아들
루포스 사도께서는 마르코의 복음서에 나오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이었다.(마르코 15:21) 바울로 사도께서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계시다. “주님 안에서 선택을 받은 루포스, 그리고 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그의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사도행전 16:13) 사도께서는 후에 그리스 테베(Thebes)의 주교가 되셨다.
베드로 사도의 제자
이로디온 사도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서 그 분의 선교여행에 함께 하셨다. 그리고나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이로디온 사도를 아카이아(Achaia)에 있는 이파타(Hypata) 곧, 새 파트라(New Patras)의 주교로 서품하셨다. 사도께서 굳건한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셔서 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되셨을 때,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은 이교도들이 사도를 붙잡아 포악하게 매질을 가하였다. 어떤 이들은 몽둥이로 때렸으며, 또 어떤 이들은 돌을 던져 사도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기도 하였다. 마침내 사도께서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아싱크리토스와 플레곤 사도께서는 바울로 사도의 서신에 나온다.(로마서 16:14) 두 분 사도 또한 서로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셨고, 수많은 이교도들을 참된 진리로 이끄셨다. 나중에 붙잡혀 온갖 고문을 겪은 두 사도 또한 같은 순교의 왕관을 받고 안식하셨다.
성 라파엘, 니콜라스, 이리니 순교자들(4월 9일)
미틸리니 섬의 기적
1959년 그리스 미틸리니(Mytilene) 섬의 한 작은 성당 안에서 이루어진 작업 도중 한 성인의 성해가 발견되었다. 이후 그 작업을 하던 인부뿐 아니라 그의 아내 그리고 그 마을의 여러 주민들에게 성해의 주인공인 성인이 여러 차례 나타나 성인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 성인은 성모님과 함께 또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나 당신 자신의 순교에 관해 말해주었는데, 각기 따로이 성인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로 모두 완벽하게 일치하였다.
오백년 전에 순교한 사제
라파엘 성인은 이타카(Ithaca) 섬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이 오토만 터키인들에게 함락되던 15세기에 생존하셨다. 성인은 어려서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은 다음 수도사가 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의해 선교사로서 프랑스로 보내졌다. 성인이 니콜라스 보제를 만난 것은 바로 그곳에서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토만인들의 손에 넘어간 뒤, 두 성인은 마케도니아를 거쳐 미틸리니 섬으로 갔으며, 그곳의 한 성모님 수도원에 머물렀다.(바로 이곳에서 성인들의 성해가 발견되었다.) 1463년 성 대 화요일에 수도원을 포위하여 공격하던 터키인들은 수도원장인 라파엘 성인을 붙잡은 다음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부활절 주간의 화요일인 4월 9일 밤 터키인들은 성인을 곤봉으로 때린 다음, 성인의 수염을 잡아 언덕 위에서 아래로 무참히 끌고 다녔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성인을 나무에 매달아 그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턱을 톱으로 잘라버렸다. 이런 고통을 겪은 뒤 성인은 안식하셨다.
성인들의 수는 계속 증가한다
이후 니콜라스 보제 성인도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 당신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주었고, 1960년 6월 13일 신도들은 성인의 성해를 발견하였다. 신도들은 이미 라파엘 성인을 통해 니콜라스 보제 성인도 그 당시(1463년) 함께 붙잡혀 고문을 당하다가 안식하셨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한 소녀는 열두 살 된 이리니 성녀의 환상을 보았다. 이 어린 성녀는 1463년 당시 그 도시(Thermie 테르미)의 시장이었던 바실리오스의 딸로서 수도원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피해 있다가 붙잡혔다. 시장을 위협하여 그리스도인 전사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밝혀내려는 터키인들은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성녀의 두 손을 자른 다음, 토기항아리에 집어넣어 불태워 죽게 하였다. 이후 성녀의 성해도 항아리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성인들을 통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라파엘 성인은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의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과 성인들의 수가 늘어나는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 안티파스 주교순교자(4월 11일)
뻬르가뭄의 주교
성인께서는 첫 사도들과 같은 시대에 사신 분으로서 사도들에 의해 소아시아 뻬르가뭄(Pergamum)의 주교로 임명받으셨다.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대(83년 무렵)에 성인께서는 이미 매우 연로(年老)하셨음에도 이교도들에 의해 붙잡히셨는 데, 당시는 성인의 기도로 말미암아 악마들이 그 도시에서 모두 쫓겨난 까닭에 더 이상 그 도시민들이 이교적인 희생제사의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 도시의 통치자 앞으로 끌려간 성인께서는 우상들에 대한 예배가 죄인들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전파하는 새로운 종교(곧,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래되었고 더 존중될만하다는 핑계아래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셨다.
새롭고 완전한 진리
이때 성인께서는 성서에 나오는 카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아주 오래전 인류의 조상으로서 그는 형제를 살해한 죄로 말미암아 매우 혐오(嫌惡)스럽고 경멸(輕蔑)당할만한 처지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오랜 옛날에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신념과 종교적인 실천들 또한 ‘마지막 때’에 완전한 진리의 계시를 받은 이들(곧,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역시 부끄러운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성인의 대답을 들은 통치자와 이교도들은 분노하며 성인을 뜨겁게 달궈진 청동 가마 속에 집어던졌다. 그 속에서 성인께서는 죽음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강함을 증거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나의 충실한 증인’
또한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모든 질병, 그중에서도 치통(齒痛)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실 것과 모든 죄를 용서받고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의 자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나서 성인께서는 당신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바치셨다. 성인의 시신은 뻬르가뭄의 성당에 묻혔으며, 그곳으로부터 오랫동안 병을 치유하는 기름이 흘러나와 그 도시의 그리스도인들과 성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찾아오는 많은 이들을 위로하였다. 성 사도 요한께서는 당신의 묵시록에서 성인에 관해 증언하고 계시다.(묵시록 2:12-13참조)
성 아까끼오스 수사(4월 12일)
가난한 집안의 소년
성인께서는 16세기 오토만 제국의 지배기에 아그라파(Agrapha) 지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무엇인가 일을 해야만 했던 성인께서는 별다른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고, 다만 거룩한 것들에 대해 알고싶은 간절한 열망을 지닌채 성당에서 행해지는 예배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가 정한 결혼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도망친 성인께서는 올림푸스의 성 디오니시오스(1월 23일)께서 세운 자고라의 성삼위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거룩한 덕을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투쟁한 성인께서는 자신의 의지를 단념함으로써 특별히 겸손을 배우고자 노력하셨다.
극한의 영적인 투쟁
하느님을 향한 열망과 영적인 목마름이 강해져옴에 따라 성인께서는 아토스산으로 가셨고, 남쪽 지역의 한 곳에 정착하여 20년동안 오로지 약간의 빵과 야생의 열매들에 의지하며 사셨다. 그리고 그 뒤의 수 년 동안은 바닷가의 한 동굴에서 지내며 극도의 영적인 투쟁기를 보내셨다. 이같은 수련의 결과로 성인께서는 분별과 예언의 은총을 받으셨으며, 이로써 찾아오는 이들에게 영적인 조언을 베풀기 시작하셨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자리잡은 성인의 거처이었지만 하느님 은총의 빛이 너무도 강렬하게 비추는 탓에 도리어 방문자들에게 평화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주는 곳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의 제자가 되어 동굴 주위에 머무르며 하나의 스키티(Skete 집단적인 수도생활의 한 형태)를 형성하였고, 이곳이 후에 캅소칼리비아(Kavsokalyvia)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도자들의 영적인 아버지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 성인께서는 한 샘이 터져나오게 하여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게 하셨지만, 언제나 엄격한 금식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육체가 쾌락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치셨다. 근대 순교자인 니코디모스(7월 11일)가 찾아와 성인에게 조언을 구하자 성인께서는 그를 위해 기도하셨으며, 당신의 지팡이를 주시면서 파샤(Pasha: 오토만 제국의 고위관리) 앞에 나아갈 때 가지고 가도록 하셨다. 당시에 아토스산 남쪽의 수많은 수도자들은 성인을 자신들보다 뛰어난 분이며 영적인 아버지로서 존경하며 따랐다. 고령에도 지팡이 없이 지내시던 성인께서는 1730년 4월 12일에 평화로이 안식하셨으며, 아토스산의 모든 수도자들로부터 눈물어린 애도(哀悼)를 받으셨다.
성 마르티노 1세 로마의 주교(4월 13일)
진리의 파수꾼
정교성(Orthodoxy)의 초석이 된 성인은 콘스탄스 2세 포고나토스(641-68) 황제의 재위시절에 살았다. 649년 성인이 주교직에 오른 뒤 겨우 석달 뒤, 105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한 공의회가 열렸고, 이 공의회에서는 이른바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 이른바 ‘단성론’[單性論] 이단의 새로운 형태로서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을 가지셨지만 한 인격이시므로 그 분의 의지[will] 또한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 680년의 제 6차 세계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시므로 그분은 신적인 의지 뿐 아니라 인간적인 의지도 가지셔야만 한다고 공표함으로써 이 이단을 정죄하였다.) 이단과 황제가 정치적 기회주의를 통해 진리와 오류를 뒤섞은채 발행한 문서(Typos)를 단죄하였다. 이 당시 교황 테오도로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어 있던 성인은 황제와 그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의지(곧, 신적인 의지)만이 존재한다고 선포함으로써 정도(正道)를 벗어난채 동방의 단성론자들을 자신들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고난의 여정
공의회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제는 자신의 대리인을 이탈리아로 보내 교황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에게 간 황제의 대리인은 공의회에 관하여 조사하였다. 성인은 자신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앙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비난하는 이들에 대응하면서 그들을 파문하였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두려워 한 황제의 대리인은 짐짓 거짓으로 꾸미면서 성인의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사흘 뒤인 월요일 아침, 황제의 대리인은 무기를 찾는다는 구실을 앞세워 성당 안으로 쳐들어갔고, 함께 한 군인들은 성물(聖物)들을 집어 던지면서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성인을 붙잡았다. 653년 6월 19일 화요일에 황제의 대리인과 군인들은 사로잡은 성인을 배에 태운채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석 달이나 걸린 길고 힘겨운 항해기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성인은 모든 권리를 빼앗긴채 씻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항구에 닿자 군인들은 병든 성인을 배에서 끌어내렸고, 성인의 몸에 온통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는 신도들이 성인에게 가져온 식량을 몽땅 빼앗아 버렸다.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마침내 9월 17일 콘스탄티노플에 다다르자 초라한 침상에 누운 성인은 사람들의 온갖 욕설을 들어야 했고, 나중에는 감옥에 갖힌채 아무도 모르게 93일동안 지내야 했다. 12월 20일, 전차 경주장에서 형식뿐인 재판을 받은 성인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성인의 제의(祭衣)를 찢어버리고나서 성인의 목에 무거운 쇠사슬을 채운 다음 시내 곳곳으로 끌고 다녔다. 병들고 영양이 부족한 노인인 성인은 거의 걷기조차 힘들었으나 다만 얼굴에서만은 빛이 났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한 고난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성인은 사형자들이 머무는 방에 갖혔다.
다음날, 병약한 바울로 2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641-53)는 성인에 대한 사형선고를 추방(유배, exile)으로 감형하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나 바울로 총대주교가 죽고 피루스(Pyrrhus) 총대주교가 승계한 뒤로도 성인은 85일동안이나 더 감옥에 갖혀 있어야 했고, 그뒤 아무도 모르게 크리미아(Crimea)의 한 지역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지독한 배고픔과 학대를 견뎌야 했던 성인은 656년 9월 16일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손에 맡긴채 안식하셨다.
성 끄리스껜또스 미라의 순교자(4월 15일)
우상숭배를 거부함
성인께서는 3세기 중반 리끼아(소아시아 남서쪽의 지역으로 낄리끼아의 서쪽에 위치함)의 미라(Myra)에 살던 중년의 유력한 시민이었다. 어리석은 우상숭배가 행해지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하던 시절, 성인께서는 체포되어 두 손이 등뒤로 묶인 채 그 지역의 통치자 앞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다. 통치자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신들(gods)을 모욕한 자가 바로 너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끝까지 나의 하느님께 충실한 것이다. 당신이 믿는 신들은 잘못된 우상(偶像)이며,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자기를 믿는 이들을 구원할 힘이 없다’라고 대답하셨다.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
성인은 곧 채찍질을 당하고 나무에 붙들어 매졌다. 그리고나서 사람들은 성인의 몸을 쇠못으로 잡아 찢었다. 몸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으나 성인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이 났으며, 성인은 계속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오셔서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외쳤다. 고문하는 사람들이 성인의 몸을 불로 그을리며 고통을 주려하자 성인께서는 이교도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위해 기도하였다. 이때 갑자기 고문하던 이들이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땅에 떨어 뜨렸는데, 그것은 찬란히 빛나는 네 명의 천사들이 성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위대하십니다!’
불가마 속에서 순교하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것을 두려워한 통치자는 고문을 담당하던 이들을 모두 물에 빠뜨려 죽게 하였다. 그리고는 성인을 다시금 뜨거운 화로(火爐) 속에 집어 넣었다. 불꽃이 이는 한 가운데 똑바로 서있던 성인은 두 팔을 하늘로 향한 채 이렇게 기도하였다. ‘믿음을 잃지 않았던 세 젊은이를 바빌론의 용광로 속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신 주님이시여, 저를 구원하소서. 당신께로 향한 사랑으로 제 몸을 이곳에 던집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그 화로를 연못[露池 노지: 이슬이나 안개의 수분을 저장하는 인공 못]으로 변하게 하였다. 그리고나서 성인은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사형집행자들이 성인의 몸을 화로 밖으로 던져버렸으나, 그리스도인들이 거두어 안전한 곳에 매장하였다. 그후로 성인의 성해 위에서 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성 아가삐, 이리니, 효니아 세 자매 순교자들(4월 16일)
성 아나스타시아 대순교자와 세 자매
세 자매 성인은 데살로니끼의 부유하고 유력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안 황제 시절, 가정에서 성경사본을 소유하는 것을 금하는 칙령이 발표되자(304년경) 세 자매는 도시를 떠나 호수 가까이 있는 높은 산 위로 올라갔으며, 그곳에서 질로스라는 이름의 경건한 수도자와 함께 기도생활을 해나갔다.
성 아나스타시아(12월 22일)의 영적인 아버지인 크리소고노스 성인이 박해자의 칼에 의해 순교를 당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질로스에게 크리소고노스 성인의 몸이 있는 곳을 계시해 주셨고, 이에 따라 질로스는 성인을 합당하게 장례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질로스의 꿈에 크리소고노스 성인이 나타나, 아흐레(9일) 뒤 세 자매가 붙잡혀 아나스타시아 성인과 함께 자신들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치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나스타시아 성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세 자매가 숨어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따뜻하게 세 자매를 껴안았으며,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끝날 때까지 참고 견디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자신이 마지막까지 함께 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총독 앞에선 세 자매
운명의 날이 되었을 때, 황제의 군사들은 세 자매가 있는 곳을 찾아내서는 난폭하게 세 자매를 붙들어 마케도니아 지방의 총독인 둘케티오스 앞으로 끌고 갔고,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세 명의 젊은 여자 그리스도인들인 카시아, 필립빠, 에프티히아와 아가톤이라는 젊은이가 끌려와 있었다. 황제와 시이저(caesar)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라는 총독의 요구를 세 자매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물리쳤다. 그러자 총독은 굳건한 신앙을 보인 에프티히아를 임신한지 일곱 달째인 관계로 그냥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아가삐와 효니아는 화형(火刑)에 처하고,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은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감옥에 가둬두라고 말했다.
신랑 그리스도를 위한 세 자매의 순교
아가삐와 효니아가 처형된 날, 간수들은 집에서 성경이 발견되었다는 구실을 붙여 다시금 이리니를 총독의 재판정 앞으로 끌고 갔다. 총독은 성인을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과 우상 앞에 제물을 바치고 그 고기를 먹을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심문(審問)하고 위협을 해도 성인이 흔들림 없는 용기와 굳센 신앙을 보여주자 총독은 성인의 옷을 모두 벗겨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보호를 받았고, 그 누구도 감히 성인에게 다가가거나 욕설조차 내뱉지 못했다. 다시금 총독 앞으로 끌려온 성인에게 ‘이 바보같은 짓을 계속할 것이냐?’하고 묻는 둘케티오스 총독이 다그치자 성인은 ‘바보짓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총독은 다음과 같이 선고하였다.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물도 바치지 않은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주장한 이리니를 그의 자매들처럼 화형에 처하도록 하라.’
다음날 군인들은 성인을 다른 자매들이 순교한 높은 장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다음 뛰어내리라고 명령하였다. 성인은 시편을 낭송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다음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져 향기로운 제물로 자신을 봉헌하였다.*
* 304년 4월 1일. 그 뒤 성인들이 순교하였거나 매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데살로니끼의 성벽 가까운 곳에 세 자매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이 건립되었다.
성 사바스 고트인 순교자(4월 18일)
우상숭배의 강요
성인께서는 4세기중엽에 고티아(Gothia, 흑해 연안의 크리미아 반도에 있는 한 지역)에 사셨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성인은 온화하고 평화로우며 겸손한 성품이었으나 우상숭배의 관습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370년경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고트인 지도자들은 동족 중에서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에게 박해를 피하기 위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으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박해자들에게 복종하는 척 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쳤다. 이 말을 들은 성인은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그리스도인인 아니다.’ 그러자 성인은 그 즉시 마을에서 쫗겨나고 말았다.
두려움이 없는 신앙으로
372년 부활절이 지난 몇 일 뒤 이교도 무리들이 성인의 거처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옷을 입을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성인을 붙잡아 밖으로 끌어내서는 가시덤불이 잔뜩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회초리와 나무 등으로 마구 때렸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그들의 그런 야만적인 폭력 앞에 굴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에는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몸으로 그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이교도들은 다시 전차(戰車) 바퀴를 하나 가져와 성인의 어깨에 지우더니 성인의 두 손을 그것에 붙들어 맸다. 그리고 성인의 두 발은 또 다른 바퀴에 매달았다. 성인은 이런 상태로 한 밤중까지 온갖 빈정거림과 학대를 당하였다. 나중에 성인을 지키는 사람들이 잠든 사이 한 여인이 성인을 풀어주었지만 성인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순교로서 구원을 이루다
이튿날 아침 박해자들은 성인을 다시 집 대들보에 붙들어 맸다.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가지고 와 먹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 이를 거부하자 창을 들어서 성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성인께서는 놀랍게도 소리 하나 지르지 않았고 실제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면서 성인께서는 ‘그것은 마치 양털 다발을 던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박해자들의 우두머리는 즉시 성인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강으로 끌려가는 도중 성인께서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강가에 이르른 박해자들은 성인의 목에 긴 나무를 매달아 강에 던지고는 그 한쪽에 기대어 있음으로써 성인의 몸이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인께서는 겨우 서른 여덟 살의 나이에 구원의 상징인 나무(십자가)와 물(세례)에 의해 순교하셨다.
성 테오도로스 순교자와 그의 어머니 필리파(4월 19일)
18세의 젊은이
테오도로스 성인께서는 소아시아 남부의 팜필리아 지방에 있는 페르가(Perga)란 곳에서 태어나셨으며, 그 당시 열여덟 살의 젊고 활기에 찬 젊은이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138-161)의 통치기에 그 지역의 통치자인 테오도투스가 젊은이들 중 가장 힘이 센 청년들을 로마로 보내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하려고 소집하였다. 그런데 군인을 징집하는 모병관(募兵官)이 성인의 용모가 뛰어남을 보고 즉시 징집병(徵集兵)이라는 표식을 붙이려 하자 성인은 자신의 몸을 땅에 던지며 소리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하늘과 땅의 오직 한 분이신 임금의 군대에 이미 지원하였고, 거룩한 세례성사를 통해 그 분의 군인이라는 표식을 이미 받았다!’라고 하였다.
고난과 이적(異蹟)
곧이어 성인께서 어리석고 미신적인 행위들을 비웃으면서 우상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기를 거절하자, 통치자는 성인을 땅에 반듯이 누이게 하고는 황소의 힘줄로 된 채찍으로 잔인하게 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도 결코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교의 관습을 따르느니 차라리 당신 자신을 한 분이신 참 하느님께 희생제물로 바치겠노라고 선언하셨다. 다시 성인께서 벌겋게 달아오른 석쇠 위에 놓여졌을 때, 갑자기 땅이 진동하더니 샘물이 터져나와 타오르던 불길을 완전히 꺼버렸다. 이 놀라운 일로 말미암아 디오스코루스라는 한 이교사제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순교하였다.
페르가(Perga)의 수호자
밤이 되자 페가수스(Pegasus) 주교는 성인을 감옥으로 찾아가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또 다시 통치자 앞으로 끌려나온 성인이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던져졌으나, 차가운 이슬이 성인의 주위를 감싸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성인께서 열렬히 기도하시자 이미 삼년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던 성인의 어머니 필리파(Philippa)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성인 앞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자신이 받는 고난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이 고난은 영원한 영광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성인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흘 동안 매달린 채 고통을 겪은 뒤, 안식하셨다. 그뒤 페르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인이 묻힌 곳에 성당을 세워 성인을 그 도시의 수호자로 공경하였다.
성 아타나시오스와 성 요아샆 수도자(4월 20일)
철학교실의 청강생(聽講生)
아타나시오스 성인께서는 1302년경 네오파트라스(Neopatras/ Hypatia)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모를 모두 여의게 되어 삼촌의 보살핌으로 자라나셨고, 나중에는 데살로니끼로 이주하셨다. 안드로니꼬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인께서는 타오르는 배움의 열정으로 철학과 고전문학의 강의를 들으려고 그 도시의 유명한 교사가 가르치고 있는 교실 창문에 기대어 듣곤 하셨다. 후에 아토스산으로 가신 성인께서는 그곳에서도 가장 자연적 조건이 거친 곳 중의 하나인 밀레아(Milea: 춥고 높은 곳임)로 가셔서 모세와 그레고리 두 원로의 영적인 가르침을 받아 생활하기 시작하셨다.
메테오라의 수도자
30세가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아타나시오스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도사가 되셨다. 그러나 터키인 해적들이 자주 나타남에 따라 정적(靜寂 hesychia)을 사랑하는 성인께서는 하는 수 없이 거대하고 우람한 바위들이 수백미터 높이로 깎아지른 듯이 솟아있는 테살리(Thessaly 그리스 중북부지역)의 깔람바까(Kalambaka)로 수도처를 옮기셨다. 성인께서 이곳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이내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영적인 조언을 구하였으며 그들 중 더러는 수도사가 되기도 하였다. 성인께서는 바위의 갈라진 틈에 있는 공간에 머무르시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한편 게으름과 싸우기 위해 양모(羊毛 wool)를 땋는 일을 하셨다. 나중에 성인께서는 바위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두 개의 동굴에 다른 두 수도사와 함께 머무르시면서, 그곳을 ‘메테오르’(Meteor)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세워 성인의 지도를 받으려는 많은 신도와 수도자들이 몰려들자, 그들로 하여금 먹을 것과 의복, 심지어는 바늘 하나도 사적(私的)인 소유물로 삼지 말도록 가르치셨다. 특별히 기도에 온 정성과 힘을 기울이고, 분별력과 예언하는 능력으로 수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던 성인께서는 1380년 78세의 나이로 평안히 안식하셨다.
귀족출신의 계승자
아타나시오스 성인에 의해 계승자로 지명된 요아샆 성인께서는 부계(父系)쪽으로 세르비아 왕가의 혈통을 지닌 집안이었다. 137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직위를 이어받기를 거부한 성인께서는 수도사가 되셨고, 아타나시오스 성인과 친교를 나누는 한편 많은 값진 보물들을 수도원에 기부하셨다. 아타나시오스 성인처럼 사제가 아닌 메테오라의 ‘아버지’(Father)로 불려지던 성인께서는 1423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테오도로스 아나스타시오폴리스의 주교(4월 22일)
하느님의 선물
성인께서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통치)가 비잔틴 제국을 다스리던 때에 갈라티아(소아시아 중부지역)의 앙키라(Ancyra)에 있는 시께온(Sykeon)이라는 마을에서 황제의 궁정 시종(侍從)과 마리아라는 이름의 창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 수도자로부터 아기가 위대한 하느님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뒤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부정한 직업을 버리고 경건한 삶을 살기 시작했으며, 아이가 ‘하느님의 선물’(테오도로스라는 이름의 뜻임.)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나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온힘을 다 쏟아 돌보았다. 아들이 여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아들을 황제의 궁정에 들여보내 일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게오르기오스 대순교자 성인이 나타나셔서 ‘하늘의 황제(곧, 하느님)께서 그(곧, 테오도로스 성인)를 필요로 하신다’하고 말씀하셨다.
영적수련의 생활
게오르기오스 성인의 인도를 받으며 가까운 마을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에 가곤 했던 성인께서는 조용히 기도하면서 성경말씀을 묵상하였다. 저녁시간에도 성당에 가던 성인께서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밀빵을 끓여서 한 끼의 식사로 삼곤 하였다. 아들이 늦은 밤 성당에 있고 또 밤을 새워가며 철야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안 어머니 마리아는 이것을 못하도록 말리려고 하였으나 게오르기오스 성인께서 나타나신 뒤로는 아들이 추구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하도록 놔두었다. 열다섯 살이 되자 성인께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에서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지성소의 제단 밑에 구멍을 판 성인께서는 그곳에서 신현축일부터 성지주일까지 머무르며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조금 과일을 먹곤 하였다.
하느님의 충복(忠僕)으로 사시다
병고치는 능력과 악령을 쫓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던 성인께서는 맨발로 걸어서 예루살렘까지 성지순례를 하곤 하였다. 이후 성인의 명성이 점차 알려지자 성인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수도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성인의 기도는 힘이 있어서 가뭄에는 비가 내리게 하고, 홍수가 질 때는 강물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으며, 농작물 위로 내리는 메뚜기떼와 재난들을 물리쳤다. 아나스타시오폴리스의 주교가 돌아가시자 성직자들과 유력한 시민들이 앙키라의 대주교에게로 가서 성인을 주교로 임명하도록 요청하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주교직을 받아들인 성인께서는 이후 봉사와 희생 그리고 헌신의 삶을 살면서 황제를 축복하고 총대주교에게 조언을 하시다가 613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엘리자벹 수녀(4월 24일)
고아소녀
성녀께서는 5세기초 스라키(Thrace) 지역의 이라끌리아(Heraclea)에 살던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며 귀족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이는 글리게리아 순교자(5월 13일)를 통한 기적적인 은총에 의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들의 생애에 관해 외워서 알고 있던 성녀께서는 성인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복음적인 삶을 날마다 모방하며 실천하였다. 열두 살에 고아가 된 성녀께서는 물려받은 모든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데리고 있던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주어 풀려나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숙모가 관장하던 콘스탄티노플의 성 요르고스 수녀원에서 수도자가 되셨다.
거룩한 덕을 쌓다
열정을 가지고 수도원의 금욕적인 생활에 정진(精進)한 성녀께서는 오래지 않아 거룩한 덕을 많이 쌓게 되었다. 소박한 옷을 입고, 금식하며, 심지어 겨울에도 맨발인 채로 걸으면서도 성녀의 가슴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활활 타올랐고, 시편을 읽는 성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향유처럼 흘러내렸다. 수녀원장이 안식할 무렵 성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자, 겐나디오스 총대주교(458-471, 11월 17일)는 성녀를 수녀원장에 임명하였다. 그후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가득히 받은 성녀께서는 악마를 몰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미래를 예언하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리고 465년에는 제국의 수도를 덮친 가공(可恐)할 화재를 미리 알려서 더 큰 손실을 막게 하셨다.
자선치료성인
자선치료자로서 성녀의 명성은 그 도시에 널리 퍼졌고, 성녀에게로 다가오는 병자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이 땅에서 자신의 삶이 다 되어감을 안 성녀께서는 고향인 이라끌리아로 돌아가 그곳의 성지들을 찾아 경배하였다. 이때 글리게리아 성녀께서 나타나셔서 어릴 때부터 보호해 오신 것을 상기(想起)시키고, 성 요르고스 축일 이후에 하늘나라로 불려갈 것임을 또한 미리 알려주셨다.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온 성녀께서는 수녀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리고 지정된 날에 성체와 성혈을 영한 다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치고 의로운 시메온처럼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나이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나이다!’하고 말씀하신 다음 안식하셨다. 성녀의 성해는 부패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어서 오래도록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었다.
성 마르코 사도(4월 25일)
최초의 복음서 저자
사도께서는 예루살렘에 살던 경건한 부인 마리아의 아들이었고 요한이라고도 불리어졌다. 마리아 부인은 자신의 집을 사도들의 제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로 제공하였다. 성 베드로 사도께서는 이 집에 자주 들렀으며, 그곳에서 만난 젊은 마르코를 마치 자신의 아들인양 사랑하여 그에게 신앙을 가르쳤고 세례도 받게 하였다.(베드로 1서 5: 13) 또한 마르코 사도께서는 성 바르나바 사도의 사촌이기도 한데, 바르나바 사도께서는 성 사도 바울로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갈 때 마르코를 데리고 가기도 하였다.(사도행전 12: 25) 마르코 사도께서는 성 바울로 사도께서 로마에 붙잡혀 있을 때 그를 돕기 위해 함께 하였다.(골로사이 4: 10-11) 또한 성 베드로 사도께서 순교할 무렵인 65년경에도 로마에 있으면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짧고 단순한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북아프리카의 선교사
복음서를 기록한 다음, 마르코 사도께서는 에집트로 가 복음을 전하셨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니아누스(Anianus)라는 구두장이와 그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았으며, 이 구두장이는 자기 직업도 내팽개치고 사도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가 되었다. 이교신앙과 헬라적인 문화로 가득찬 이 대도시에서 성 사도의 단순한 가르침은 마치 천둥처럼 큰 울림을 가져왔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풀자 하루에만도 거의 삼백명에 달하는 이교도들이 몰려와 세례를 받았다. 복음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하자 사도께서는 에집트 교회의 첫 예식 집전을 구성하셨고, 세 명의 사제, 일곱 명의 보제와 함께 아니아누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사도께서는 아프리카 서쪽으로 계속 선교여행을 가셨다.
순교로써 완성된 사도직
펜타폴리스의 키레네에서 많은 이교도들을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사도께서는 리비아에도 가셨다. 그런데 어느날 밤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라고 이르셨다.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와 부활절 예배를 드리던 사도에게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날이 바로 이교도들의 세라피스(Serapis) 신 축일(먹고 마시고 춤추는 주신제[酒神祭]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원형극장의 통치자 앞으로 끌려온 사도를 이교도들은 마술을 행한 죄로 고발하였다. 사도께서는 차분하게 답변하셨다. 그뒤 가혹하게 매질을 당하고, 밧줄에 묶인채 온 도시를 끌려다닌 사도께 천사가 나타나 위로하였다. 다음날 아침 전날처럼 발이 밧줄에 묶여 끌려다니던 사도께서는 부콜리아(Bucolia, 지금의 아부 키르[Abu-Quir])라는 바닷가에서 안식하셨다. 이때 사도의 나이 57세였다.
성 요한 수사증거자(4월 27일)
순종을 잘 하는 미덕
771년 이레노폴리스(Irenopolis in Isaurian Decapolis)에서 태어나신 성인께서는 아홉 살에 수도원에 들어가셨다. 성인께서는 영적인 아버지에게 순종을 잘 하기로 유명하셨으며, 그와 함께 787년의 제 7차 세계공의회(니케아)에 참석하셨다. 영적인 아버지께서 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신 뒤, 니키포로스 황제(802-815)는 성인으로 하여금 비티니아(Bithynia: 니케아에 가까운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올림포스 산에 있는 카싸라(Kathara) 수도원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10년쯤 흘러 레오 5세(Leo V the Armenian)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수도사들을 한 데 모은 다음 동요하지 말고 평온을 유지하도록 격려하셨다.
성화(Icon)와 관련한 박해
이때 갑자기 황제의 사절단이 수도원 안으로 들이닥쳐 수도사들을 해산시키고는 성물(聖物)들을 약탈한 다음, 성인을 쇠사슬로 묶어 콘스탄티노플로 끌고 갔다. 벌거벗은 채로 황제 앞에 끌려나왔으나 성인께서는 황제를 가리켜 불경(不敬)한 무뢰한(無賴漢)이라고 부르면서 거침없이 꾸짖으셨다. 심하게 매질을 당한 뒤, 성인께서는 수도원에 딸린 건물에서 석 달을 보내셨고, 그후에 프리지아(Phrygia)와 피시디아(Pisidia) 국경의 람피(Lampe) 가까이에 있는 한 요새로 추방당하셨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그곳의 불결한 감옥에서 1년 6개월 동안 지내시면서도 다른 신앙고백자들과 접촉하기를 중단하지 않으셨고, 더구나 성 테오도로스(St Theodore the Stoudite)와도 연락을 주고 받으셨다.
진리의 증거자
그뒤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된 성인께서는 이단자 테오도토스 총대주교에 의해 갖은 곤욕을 치르신 다음, 또다시 갈라티아(Galatia: 소아시아 중부지역)의 다른 요새로 유배를 당하셨다. 두 해 동안의 엄격한 감금상태로 말미암아 성인의 몸은 쇠약해졌지만 진리를 위해 겪는 고난에서 오는 기쁨은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았다. 레오 황제가 암살되자 미카엘 황제(Michael II 820-829)에 의해 풀려나 칼케돈에 머물렀던 성인께서는 테오필로스 황제(829-842) 시대에 다시금 한 섬으로 추방되었으며, 그곳에서 요한(John the Grammarian 834) 총대주교로부터 더 심한 시련을 겪으셔야 했다. 그리고 2년 반 정도가 흐른 뒤 성인께서는 안식하셨다.
성 이아손과 소시파드로스 70인 사도(4월 29일)
바울로 사도의 친척이라 불림
이아손 사도께서는 성 사도 바울로와 같은 고향인 타르소스(Tarsus) 출신이지만 바울로 사도를 만난 곳은 데살로니끼에서였다. 그 곳의 유다인들이 사도 바울로를 대항하면서 이아손 성인의 집으로 쳐들어왔을 때 바울로 사도를 찾지 못하자 대신에 이아손 사도를 붙잡아 카이사르(Caesar)의 법을 어기고 있다는 죄목으로 시 치안관들에게 고소하였다.(사도행전 17:5-9 참조) 그뒤 풀려난 이아손 사도께서는 바울로 사도께서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로 선교여행을 다닐 때 아카이아(Achaia)에서 온 소시파드로스와 함께 동행하였다.(사도행전 20:4절에 따르면 소시파드로스 사도는 그리스의 베레아 출신인 피루스[Pyrrhus]의 아들이다.) 두 사도께서는 바울로 사도와 매우 친밀한 영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로께서는 두 사도를 가리켜 ‘나의 혈족(친척)들(kinsmen)’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로마서 16:21) 바울로 사도께서는 타르소스 교회의 관리는 이아손 사도에게, 그리고 이코니움(Iconium: 소아시아 남부, 낄리끼아의 위쪽 지역) 교회의 관리는 소시파드로스 사도에게 위임하였다.
코르푸(껠끼라)섬에서 이룬 기적들
위의 두 지역(타르소스와 이코니움)에 그리스도 교회를 튼튼히 기초한 다음, 두 사도는 복음을 전하러 서쪽으로 떠났으며, 마침내 그리스의 코르푸(Corfu: 그리스 서쪽 이오니아해에 있는 섬으로서 껠끼라[Kerkyra]라고도 함.)에 도착하여 첫 보제순교자 성 스테파노스에게 봉헌된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두 사도의 가르침과 지혜에 이끌린 많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자, 그 섬의 왕은 불안을 느낀 나머지 두 사도를 체포하여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도리어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일곱 명의 강도들과 간수(看守)마저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열다섯 살된 왕의 딸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아버지를 꾸짖었다. 이같은 대응에 이성을 잃은 왕은 딸과 간수 그리고 일곱 죄수들을 모두 고문한 뒤 죽이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순교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결국 이 개종자들마저 죽이려던 왕과 그 군인들은 그들을 쫒는 과정에서 물에 빠져 모두 몰사(沒死)하였다. 그 뒤를 이은 새로운 통치자 다띠안(Datian)에 의해 소시파드로스 사도가 순교하였으나, 순교때 일어난 기적에 놀란 통치자는 회개하고 세바스티안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제 섬의 모든 우상을 다 때려 부순 이아손 사도는 그곳에 여러 성당을 세웠으며, 많은 기적을 베푼 뒤 60세가 되어 평안히 안식하셨다.
성 이그나티오스(브리앙카니노프) 주교(4월 30일)
제국의 장교에서 수도자로
성인께서는 1807년 볼로그다(Vologda) 지역에 사는 옛 러시아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셨다. 세례를 받을 당시의 이름이 디미뜨리였던 성인께서는 특별한 재능과 고귀한 성품을 타고 나셔서, 어린 시절에도 성당에 가거나 복음경을 읽는 것 그리고 특별히 성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은 다음 성 피터스버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간 성인께서는 그곳에서 장래에 니콜라스 1세 황제가 되실 니콜라스 대공(大公)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찬 그 도시에서 도리어 영적인 배고픔을 느꼈던 성인께서는 교부들의 가르침 속에서 참된 만족을 경험하였고, 이때부터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26년 이래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성인께서는 이미 군대의 장교 신분이셨으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레오니드(10월 11일) 신부의 영적인 지도를 따라 옵티나(Optina) 수도원에서 예비수도자가 되었다.
겸손과 자기부정의 삶
수도원의 식당에서 일했던 성인께서는 겸손과 자기부정(self-abnegation)을 실천하셨다. 한번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병을 가장하여 성인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곧 성인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드디어 1930년 이그나티오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다. 이어서 보제가 되고 다시 사제가 된 성인께서는 거듭되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여러 수도원을 거치면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그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였다. 1847년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해진 성인께서는 일시적으로 한 수도원에 물러나 있으면서 깊이 있는 영적 가르침을 담고 있는 여러 편지들을 썼으며, 이 글들 중에는 특별히 예수기도에 관한 것들이 많이 담겨 있다.
주교로서의 헌신과 사랑
성인께서는 예수기도를 할 때 무엇보다도 진실한 회개와 겸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고 이로써 우리는 자기만족과 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기도의 한 단어 한 단어에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영(곧, 교부들이 ‘마음’이라고 불렀던 것)과 일치(sympathy)하게 된다고 하셨다.
1857년 코카사스와 흑해지역에 있는 스타브로폴(Stavropol)의 주교가 되신 성인께서는 당시까지도 러시아에 적대적이었던 이 곳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특별히 이곳 젊은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1861년 다시 찾아온 심각한 질병으로 말미암아 수도원으로 물러난 성인께서는 찾아오는 그 지역 농부들을 위해 영적, 육적 조언을 아끼지 않다가 1867년 4월 30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