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30

+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7

17세기 러시아: 불화(不和)의 시기 17세기에 러시아는 ‘불화의 시기’(time of troubles)에 접어들었습니다. 1598년부터 다스렸던 보리스 고도노프(Boris Godonov)가 1605년에 죽었습니다. 바실 쉬스키(Basil Shuiskii)가 1610년까지 다스리고 나서 폴란드인인 황제가 즉위했습니다. 정치, 사회적인 대변동이 있었던 이 시기에 폴란드인들이 나라의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라의 지도자인 게르모겐(Germogen) 총대주교는 투옥되어 1612년에 굶어 죽었으며, 나중에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이반 3세의 통치가 끝나고 나서부터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과 기근, 국가적 재난에 휩싸였습니다. 성 줄리아나 오소르기니(St. ..

정교회의 역사 2024.02.23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2장 비잔티움 I)4

겨우 2년 뒤인 451년, 마르키아노스 황제는 칼케돈에서 새로운 주교회의를 소집하였는데, 비잔티움의 교회와 서방은 이것을 제 4차 세계공의회로 여겼다. 이제 추는 안티오키아 학파쪽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디오스코로스의 단성론적인 견해를 거부하면서 공의회는, 그리스도는 혼자이고 분리되지 않는 인격인 반면에 그분은 두 본성으로부터 오실뿐 아니라 두 본성 안에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공의회의 주교들은 로마의 교황인 성 대 레오(461년 안식)의 ‘토모스’(Tome: 문자적으로는 잘라낸 한 부분이라는 뜻. 교회사적으로는 어떤 주제에 대해 특정한 교회의 수장 이름으로 발행하는 결정문 또는 그것을 기록한 두루마리, 작은 책자, 문서를 가리킨다.)를 칭송하였는데, 그 안에는 비록 그리스도의 인격의 일치가 또한 강조되긴 ..

정교회의 역사 2024.02.12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6

16세기 공포의 이반 통치하의 러시아 러시아에서는 16세기에 ‘제 3의 로마’ 이론이 정치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프스코브(Pskov)의 수도자 필로테우스(Philotheus)는 다니엘서를 근거로 해서, 러시아의 황제국가(tsardom)가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마지막 세속통치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모스크바의 황제 바실 3세(Basil III)에게 전했습니다. 첫 로마는 이단(heresy)으로 말미암아 멸망했습니다. 둘째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은 죄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제 3의 로마인 모스크바가 굳건히 서있습니다. 더 이상 제 4의 로마는 없을 것입니다. 공포의 이반 3세(Ivan III the Terrible) 황제는 이런 기초 위에 자신의 통치권을 세웠습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로서 15..

정교회의 역사 2023.12.06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2장 비잔티움 I) 3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주된 과제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단죄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를 분리하는 선을 그으면서 성자를 피조물에 속한 것으로 여겼다. 곧, 그가 우수한 피조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심할바 없이 그가 이렇게 주장한 동기는 하느님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 그리고 초월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느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그의 가르침이 가져온 결과는 우리 인간의 신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하느님일 때에만 그는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아니라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인간..

정교회의 역사 2023.07.04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5

15세기 교황권 15세기에 서방은 교황권과 교회공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황의 지위가 최상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교회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당시의 공의회 가운데 하나인 페라라-플로렌스(Ferrara-Florence 1438-1439) 공의회는 교황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습니다. 터키인들에 대항해 싸우는 일에 대해 도움을 구하려고 동방교회의 대표자들이 다시 한 번 이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라틴인들과 ‘동등한 관계’로 공의회에 받아들여진 동방교회의 대표자들 가운데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요한 8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셉, 그리고 그리스어로 이시도르(Isidore)라는 이름을 가진 키에프(키이우)의 대주교가 있었..

정교회의 역사 2023.05.20

+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2장 비잔티움 I)2

6차에 걸친 첫 공의회들(325-681) 초기 비잔틴 시대에 교회의 삶은 일곱 차례의 세계공의회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공의회들은 두 가지 과제를 완수하였다. 첫째, 이들 공의회는 알려진대로 다섯 개의 큰 교구 또는 총대주교구의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교회의 가시적인 조직에 대해 명확히 하고 설명하였다. 둘째, 더욱 중요하게 공의회는 성삼위(삼위일체)와 육화(성육신)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정적으로 규정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이 인간의 이해와 언어를 넘어서 있는 ‘신비들’로서 여겨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주교들은 공의회에서 (교리에 대한) 정의와 규정을 만들 때, 자신들이 신비를 설명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교리에 대해 말하고 생각..

정교회의 역사 2022.08.16

+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4

* 해설: 세르기우스 성인(세례명: 바르톨로메오)은 어릴적에 지적인 아이였으나 읽기를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영적인 원로(스타레츠)가 나타나 프로스포라(정교회에서 성찬예배를 위해 봉헌하는 축복받은 빵)을 주며 먹으라고 하였고, 그날 이후로 어린 바르톨로메오는 읽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천사가 찾아온 것으로 해석합니다. 위의 그림은 그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18세기 사로프의 세라핌 성인(1754-1833)과 함께 가장 높이 공경받는 성인 가운데 한 분입니다. 14세기 그레고리 빨라마스 14세기는 동방교회에서 빨라마스의(Palamite) 논쟁이 있던 때입니다. 그레고리 빨라마스(Gregory Palamas 1359년 안식)는 아토스산..

정교회의 역사 2022.06.17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2장 비잔티움 I) 1

2장 비잔티움 I: 일곱 공의회의 교회 “일곱번의 거룩한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있으며, 이것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지탱하는 일곱 기둥이고, 그 위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집, 곧 보편적이고 에큐메니칼한 교회를 세우셨다고 모두가 공언합니다.” - 요한 2세 러시아의 대주교(1080-1089) 제국 교회의 설립 콘스탄티노스는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분수령이다. 그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순교자들과 박해의 시대는 끝났으며, 지하무덤(카타콤)의 교회는 제국의 교회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가 보았던 환상의 첫째로 위대한 효과는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콘스탄티노스와 그의 동료 황제 리끼니우스가 313년에 발표한 것인데, 곧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공식적인 관용을 ..

정교회의 역사 2021.10.05

+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3

13세기 제 4차 십자군 13세기는 동방과 서방의 분열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4차 십자군운동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204년에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제단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성물(聖物)들을 훔쳤습니다. 토마스 모로시니(Thomas Morosini)라는 한 라틴인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불려졌고, 어떤 한 프랑크인은 황제라고 불려졌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라틴의 서방은 그리스 백성들의 마음 속에 분명한 적이 되었습니다. 여러 저술들은 교황제와 마찬가지로 라틴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통치는 미카엘 빨레올로고스(Michael Paleologos) 황제가 도시를 되찾은 1261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리용 공의회 미카엘 ..

정교회의 역사 2021.07.30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1장 시작) 3

정교 역사에서 많은 시기에 붉은 순교의 가능성은 상당히 적었으며, 푸르고 하얀 형태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이 세기(20세기)에 정교인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한번 붉은 순교를 겪도록 부름을 받은 시기가 있었다. 키프리아노스가 강조했듯이 하나의 주교직을 공유하는 주교들이 한 공의회에 함께 모여 자신들이 직면한 공동의 문제를 의논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교는 교회의 삶에서 공의회들의 위치에 언제나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공의회는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선택하신 주된 도구라고 믿어지며, 보편적인 교회는 바로 근본적으로 ‘함께 의논하는’(conciliar) 교회라고 여겨진다.(실제로 러시아어에서 형용사 ‘소보르니’[soborny]는 ‘보편적인’[ca..

정교회의 역사 2021.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