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3

ttoza 2021. 7. 30. 14:14

 

13세기 러시아인들의 영웅 성 알렉산더 네프스키

 

 

13세기

4차 십자군

13세기는 동방과 서방의 분열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4차 십자군운동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204년에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제단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성물(聖物)들을 훔쳤습니다. 토마스 모로시니(Thomas Morosini)라는 한 라틴인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불려졌고, 어떤 한 프랑크인은 황제라고 불려졌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라틴의 서방은 그리스 백성들의 마음 속에 분명한 적이 되었습니다. 여러 저술들은 교황제와 마찬가지로 라틴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통치는 미카엘 빨레올로고스(Michael Paleologos) 황제가 도시를 되찾은 1261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리용 공의회

미카엘 3세는 동쪽으로 터키인들의 공격을 당하면서, 서방의 라틴인들이 다시금 되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이유에서 그는 1274년 리용(Lyons)에서 열린 서방교회의 공의회에 주교로 구성된 대표단을 보내 동정을 구하면서, 무너져가는 자신의 제국을 위한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얻기를 바랬습니다. 서방인들은 다음 세기에 교회 일치의 고전적 방식이 될만한 것을 미카엘의 사절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동방이 그 전례예식을 지킬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 ‘신앙의 신조에서 말하는 교리가 이단적인 것으로서 부정되지 않는 한 필리오케라는 말을 쓰는 것은 선택적일 수 있다. 교황은 최상의(supreme) 신분으로서 인정되어야만 한다.‘

 

리용의 공의회에 참석한 미카엘의 사절들은 자신들이 요청받은 것 이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교황제에 대한 로마의 방식과 역사상 처음으로 요구받은 필리오케에 대한 로마의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미카엘이 바랬던 서방으로부터의 평화와 도움은 1282년에 그가 죽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미카엘이 죽자 리용에서 이루어진 일치의 행동들은 동방의 주교들에 의해 곧바로 거부되었습니다. 황제는 교회의 장례예식 없이 묻혔습니다.

 

세르비아

1217년 사바(Sava)는 세르비아인들의 독립적인 민족교회를 위해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축복을 얻으려고 니케아로 갔습니다. 1219년에 사바 자신은 황제 떼오도르가 있는 자리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마누엘(Manuel)에 의해 세르비아 영토의 첫 대주교로서 축성되었습니다. 1220년 주님의 승천축일에 지트카(Zitcha) 수도원에서 열린 세르비아인들의 집회에서 새로이 축성된 사바 대주교는 자신의 동생 스테판(Stephan)전 세르비아 영토의 첫 왕으로 삼아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뛰어난 지도력을 지닌 채, 크나큰 시련과 어려움들을 많이 겪으면서 동방 그리스도교 지역을 두루두루 널리 여행한 뒤, 1235114일에 사바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바의 직은 아르세니오스(Arsenios)가 이어 받았는데, 그는 사바 자신에 의해서 주교직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설립자이며 아버지이고 정교회 역사에서 참으로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사바 대주교는 자신의 아버지 성 시메온, 자신의 동생인 최초의 왕 성 스테파노스, 자신의 후계자 성 아르세니오스와 함께 교회의 성인으로서 시성되었습니다.

 

불가리아

13세기에는 불가리아 영토 안에 있는 교회의 수장으로서 뜨르노보(Trnovo)의 대주교가 인정됨과 함께, 불가리아인들을 위한 민족교회의 재설립이 이루어졌습니다.

 

러시아

러시아는 13세기에 몽골의 침략에 의해서 정복되었습니다. 1237년에 러시아인들을 대항해서 칸 바투(Khan Batu)40만의 군사를 지휘했을 때 타타르(Tatar)의 멍에가 그 땅 위를 덮쳤습니다. 키에프의 국가는 1240년에 멸망했습니다.

 

1231년에 알렉산더 네프스키(Alexander Nevsky)가 노브고로드(Novgorod)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북쪽의 도시공화국(city-republic)은 그곳만의 특별한 영적, 건축학적, 성화적(iconographic) 전통과 함께 그 자신의 독특한 공화제인 정부형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1240년에 알렉산더는 러시아인들을 이끌고 로마 카톨릭인 스웨덴인들에 대항해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242년에 그는 다시 한번 러시아 백성들을 이끌어서 러시아 땅을 공격하는 튜튼의(Teutonic) 기사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알렉산더는 1247년에 칸 바투의 본부를 찾아가서 타타르의 멍에 아래 있는 러시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도록 청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 백성의 평화를 위해 칸에게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는 키에프의 대군주라는 칭호를 받고서 몽골로부터 돌아왔습니다. 그는 1263년에 42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1380년에 그는 개인적인 거룩함과 군사적인 용맹성, 그리고 그의 실제적인 지혜와 외교술로 말미암아서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정치가로서 이기심 없이 이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 대한 봉사로서 바쳤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아들 다니엘은 타타르의 멍에 너머에 있는 북쪽의 모스크바로 가서, 1263년에서 이 세기의 끝까지 그곳에서 군주로서 봉직했습니다. 모스크바 공국에 재위하는 키에프의 대주교들인 성 끼릴(St. Cyril 1242-1281)과 성 피터(St. Peter 1281-1326)는 이 당시에 두드러졌던 고위성직자들이었습니다.

 

서방

서방교회에서 13세기는 가장 위대한 세기로 불려왔습니다. 이노센트 3세는 계속해서 교황직의 특권과 권력을 지지하였습니다. 1215년의 제 4차 라테란 공의회는 서방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를 확정하였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1226년 사망)는 맨 처음의 위대한 동료들인 파두아의 안토니오스(1231년 사망)와 신학자 보나벤뚜라(1274년 사망), 둔스 스코투스(1308년 사망)와 함께 자신의 프란치스꼬 수도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스페인 사람 도미니끄는 위대한 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80년 사망)와 그의 유명한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74년 사망)와 함께 설교자들로 이루어진 도미니끄 수도회를 설립했으며, 특별히 아퀴나스는 20세기 후반의 제 2차 바티칸공의회 때까지 공식적인 로마 카톨릭의 신학을 지배했던 숨마’(summae)를 썼습니다. 신비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339년 사망) 또한 도미니끄 수도회 회원이었습니다. 이 당시 서방교회에서는 여러 작은 종교적인 집단들과 함께 깔멜(Carmelite) 수도회가 생겨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