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4

ttoza 2022. 6. 17. 19:27

 

'어린 바르톨로메오(세르기우스 성인의 세례명)에게 나타난 환상'(미하일 네스테로브의 작품, 1890)

* 해설: 세르기우스 성인(세례명: 바르톨로메오)은 어릴적에 지적인 아이였으나 읽기를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영적인 원로(스타레츠)가 나타나 프로스포라(정교회에서 성찬예배를 위해 봉헌하는 축복받은 빵)을 주며 먹으라고 하였고, 그날 이후로 어린 바르톨로메오는 읽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천사가 찾아온 것으로 해석합니다. 위의 그림은 그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18세기 사로프의 세라핌 성인(1754-1833)과 함께 가장 높이 공경받는 성인 가운데 한 분입니다.  

 

 

14세기

 

그레고리 빨라마스

 

14세기는 동방교회에서 빨라마스의(Palamite) 논쟁이 있던 때입니다. 그레고리 빨라마스(Gregory Palamas 1359년 안식)는 아토스산의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헤시카즘(hesychasm[여기서 hesychia침묵을 뜻한다.]} 이라고 불리는 기도방법을 실천하는 이였습니다. 이 방법에 의해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엄격한 신체적 훈련을 하는데, 그것은 보통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예수기도(Jesus Prayer)의 형식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되뇌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런 방식의 기도를 함으로써 헤시카스트(hesychast)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하기를 바랬고, 또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그리고 타볼산(Mt. Tabor)에서 주님의 변모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비추었던 창조되지 않은 신적 빛에 대한 영적인 환상을 보기를 바랬습니다.

 

1330년 이탈리아계 그리스인으로서 이태리 남부의 정교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새로이 나타나는 서방 르네상스 인본주의 전통의 대표자격인 깔라브리아인 발람(Calabrian Barlaam)이 콘스탄티노플에 왔습니다. 발람과 서방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크게 영향받은 몇몇 비잔틴 인본주의자들은 헤시카스트적인 기도를 하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느님과 참으로 일치하게 될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1333년에 그레고리 빨라마스는 발람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헤시카즘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다는 정교의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본질과 에너지

1341년의 지역공의회는 그레고리의 가르침을 지지했습니다. 이 거룩한 수도자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본질(Essence) 또는 초()본질(Superessence)과 참으로 창조되지 않고 신성한(, 신적인 빛과 같은) 하느님의 행위, 작용, 또는 에너지 사이의 유명한 구분을 시도했습니다. 이 에너지는 신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전해지며 인간의 참여와 지식, 그리고 경험 앞에 열려있습니다.

 

몇 년 동안의 정치적 혼란과 신학적 논쟁이 있은 뒤, 1347년과 1351(이 해는 그레고리가 데살로니끼의 대주교가 된 해이다.)에 열린 지역공의회는 성경과 정교회 전통의 입장에 정확히 맞는 것으로서 그레고리의 주장을 다시금 지지하였습니다. 그 때 이후로 신적인 초()본질과 신적인 에너지 사이의 신학적 구별은 정교회 교리의 공식적인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리 빨라마스는 1368, 그러니까 그가 안식하고 난 뒤 꼭 9년만에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습니다.

 

요한 5세 빨레올로고스와 로마

14세기의 지도자격인 비잔틴 황제 요한 5세 빨레올로고스(John V Paleologos 1341-1391)는 동방에서 매우 증대되는 터키의 압력 앞에 놓인 그리스인들을 서방이 와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계속해서 갖고 있었습니다. 1369년 요한은 교회의 일치를 향한 정식의 시도도 없이, 개인적으로 로마교회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런 행동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 또는 정치적 운명과 관련해서 어떤 지속적인 결과도 낳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러시아인들은 계속 남쪽에서 타타르의 멍에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러시아(Muscovy)의 북쪽 삼림이 우거진 지역에서 요한 칼리타(John Kalita 1341년 사망) 왕자와 그의 섭정자(攝政者)인 대주교 알렉시스(Alexis 1353-1378)의 인도를 받던 북부 러시아인들은 자유로이 있으면서 계속 번영해 나갔습니다. 이 당시 북부에서 진짜 러시아의 건설자는 라도네즈의 성 세르기우스(St. Sergius of Radonezh 1392년 안식)였습니다.

 

성 세르기우스

성 세르기우스는 1314년에 로스토브(Rostov)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334년에 수도자가 되어 홀로 숲에 들어가서 금식하며 기도했고, 자신의 수도원 성당을 성 삼위일체 성당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 세르기우스를 따랐으며, 어떤 이들은 그와 함께 수도자적인 삶을 살았고, 다른 이들은 그의 수도원 공동체 주위에서 살면서 개척자와 정주자(定住者)로서 있었습니다. 성 세르기우스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는 매우 초라한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남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는 먼저 본을 보임으로써만 가르쳤고, 수도자들이 자신의 지도를 거부한다고 느꼈을 때 대주교 알렉시스의 강요로 맡아보던 수도원장의 지위에서 서슴없이 물러났습니다. 그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였고, 침묵의 기도를 잘 실천한 이였으며, 놀라운 신적 환상을 보며 하느님과 함께 살았던 신비가였습니다.

 

정기적으로 대주교 알렉시스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조언을 해주던 성 세르기우스는 1380년에 타타르인들과 전투를 벌이게 된 디미뜨리 돈스꼬이(Dimitri Donskoi) 왕자에게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디미뜨리의 승리로 말미암아 러시아 영토에 대한 타타르의 지배가 그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와 정교회에 남은 성 세르기우스의 유산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의 제자 11명은 북부 러시아에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그 둘레의 땅들은 사람들이 정착해 살면서 개발되었습니다. 후대에 교회와 러시아 국가의 정치, 사회적 생활 사이의 상호관계뿐 아니라 러시아 교회의 신비적이고 영적인 삶은 라도네즈의 세르기우스라는 인물과 그의 업적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페름의 성 스테핀

성 세르기우스와 동시대인인 페름의 성 스테핀(St. Stephen of Perm 1396년 안식)은 학식이 많은 주교로서 지리안(Zyrian) 부족 속에 들어가서 선교사역을 펼쳤습니다. 비록 그의 사역이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성 스테핀은 지리안 문자를 만들고 교회의 책들을 토착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잔틴 전통을 새로이 양육하는 지역교회의 생활과 결합했고, 장래에 러시아 교회가 시베리아 부족들과 일본, 알리스카 등지에서 선교를 할 수 있도록 영적인 토대를 놓았습니다.

 

성 안드레이 루블료프

가장 위대한 러시아 성화작가이면서 아마도 정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화작가인 성 안드레이 루블료프(St. Andrew Rublev 1430년경 안식)14세기의 끝과 15세기의 시작 무렵에 자신의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의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성화작가인 그리스인 테오판(Theophanes the Greek)의 예술적 추종자였으며, 자신의 친구 다니엘 코르니(Daniel Chorny)와 함께 일했습니다. 루블료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삼위일체-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위해 그린 성 삼위일체 이콘으로서, 그것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를 색과 선의 완벽한 조화 속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이 무렵 비잔틴 제국에는 교회 예술의 르네상스가 있었고, 많은 유명한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세르비아인들과 불가리아인들

세르비아인들은 스테핀 두샨(Stephen Dushan, 1331-1355 재위)의 통치 속에서 자신들 역사 가운데 번영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 교회는 1345년에 총대주교청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에 오크리드의 성 끌레멘뜨(St. Clement of Ochrid 1375년 사망)는 민족 계몽을 이끈 지도자로서 불가리아인들 속에서 살면서 일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조그라포(Zoographos)의 불가리아 수도원이 아토스산에 세워졌습니다.

 

예식의 발달

예식면에서 14세기에는 오늘날과 거의 똑같은 교회예배의 순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성찬예배 해설’(Commentary on the Divine Liturgy)이 니꼴라스 까바실라스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Life in Christ)이라는 대중적인 작품을 썼는데, 이것은 오늘날 여전히 교회 안에 실제로 남아있는 의식의 상세한 부분들을 보여주면서 예배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말씀의 예배에 앞서 따로 분리된 예식으로서 성찬예배 준비예식(prothesis, 쁘로스꼬미디 proskomedia)이 예식서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예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데살로니끼의 시메온(1429년 안식)이 쓴 예식해설서들은 이 시대에 쓰여진 것입니다. 시메온의 작품 속에 있는 흥미로운 주()는 결혼성사 속에서 거룩한 성찬예배가 정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었던 사실과 함께 한편으로는 축복된 공동의 잔이 교회에서 성체성혈을 받도록 허락 받지 못한 이들에게만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서방

 

14세기의 서방은 로마 교황이 아비뇽(Avignon)에서 바빌론의 포로처럼 있는 것을 보았고,(1303-1378) 서방의 교회 안에 교황의 직위에 대한 여러 다양한 요구를 하는 이들 사이에 커다란 분열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시에나의 캐더린(Catherine of Sienna)은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영국의 신비적인 작가 월터 힐튼(Walter Hilton), 놀위치의 줄리아나(Juliana of Norwich)처럼 이 시대에 살았습니다. 14세기의 끝과 15세기의 시작 무렵에 비천한 시골에서는 공동생활의 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이 발달하였습니다. 이 운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로서 그는 유명한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의 저자였습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321년 사망)가 쓴 신곡(神曲 Divine Comedy) 작품과 지오토(Giotto 1337년 사망)의 회화들은 이 시대에 이루어진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