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5

ttoza 2023. 5. 20. 14:16

 

에페소의 대주교 성 마르코스 에브게니코스(1392-1444)

 

15세기

 

교황권

15세기에 서방은 교황권과 교회공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황의 지위가 최상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교회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당시의 공의회 가운데 하나인 페라라-플로렌스(Ferrara-Florence 1438-1439) 공의회는 교황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습니다. 터키인들에 대항해 싸우는 일에 대해 도움을 구하려고 동방교회의 대표자들이 다시 한 번 이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라틴인들과 동등한 관계로 공의회에 받아들여진 동방교회의 대표자들 가운데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요한 8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셉, 그리고 그리스어로 이시도르(Isidore)라는 이름을 가진 키에프(키이우)의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플로렌스 공의회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동방의 대표자들은, 비록 깊이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교황권에 대한 강력한 교리와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연옥(purgatory)의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비잔틴 황제는 (교회의) 일치를 완성시키려는 바램을 갖고 신학적 논의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에페소의 주교 마르코 에브게니코스(Mark Eugenikos)를 빼고는 모든 정교회 주교들이 일치를 위한 성명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플로렌스의 일치는 공적으로 발표되지 않다가 1452년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 공표되었습니다. 1453529일 모함메드 2(Mohammed )의 지휘를 받은 터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는 이스탄불(Istanbul)이라고 다시 이름 지었으며, 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스꼴라리오스(Gennadios Scholarios)가 취한 첫 행동은 플로렌스의 일치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총대주교는 이 행동을 취하면서 에페소의 주교 마르코(에브게니코스) 성인에게서 강한 압력을 받았습니다. ‘정당하지 못한 일치라고 불려지게 된 것에 대항해서 정교(Orthodoxy)의 굳센 수호자가 된 마르코 주교는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러시아

비잔틴 제국이 회교도들에게 멸망당하는 바로 그때 새로이 나타나는 러시아 제국의 씨앗은 모스크바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군주 대 이반 3(Ivan III the Great 1462-1505)는 노브고로드(Novgorod)를 무찔러 합병하면서 계속해서 북러시아인들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는 비잔틴의 공주 소피아 빨레올로고스(Sophia Paleologos)1472년에 결혼하여, 짜르(Tsar, 옛날 로마 황제의 칭호인 케사르[Caesar]의 슬라브어 형태)라는 칭호와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의 상징을 받아들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뒤를 잇는 3의 로마인 모스크바의 이념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15세기의 러시아에서는 교회가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생활과 관련해서 해야만 하는 역할에 대한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논쟁의 두 지도자는 둘 다 성 세르기우스의 유산을 나누어 받았으며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된 소라의 닐루스(Nilus of the Sora[Nil Sorsky, 1433-1508])와 볼로쯔크의 요셉(Joseph of Volotsk 1439-1515)이었습니다.

 

성 닐루스는 볼가강 건너에 살던 무소유자들’(non-possessors)의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볼가강 건너의 사람들’(transvolgans)이라고 불려졌습니다. ‘무소유자들은 교회, 그 가운데서도 수도원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과 통제를 가하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수도자들을 위한 관상적(觀想的 contemplative)이고 조용한 생활을 지배하는 겸손, 영적 자유와 함께 주된 덕목으로서 가난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성 세르기우스와 초기의 키에프적(Kievan) 영성의 신비적이고 헤시카스트적(hesychastic)이며 자기겸비적인(自己謙卑的 kenotic)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었습니다.

 

소유자들’(possessors)은 성 요셉에 의해 인도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때때로 요셉파’(Josephites)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는 가능한대로 가장 밀접한 관계 속에 있어야하며, 교회는 새로이 나타나는 러시아 국민들의 사회,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유자들의 이상은 교회, 특히 수도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전적이고 제의적인 의식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금욕적인 훈련과 사회적 봉사의 삶을 백성들 속에 배양시켜야만 합니다. 이런 경향 속에서 소유자들또한 성 세르기우스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성 세르기우스와 알렉시우스 대주교는 초기 키에프의 시작 때부터 있었던 러시아 교회와 국민들의 본래적인 비잔틴 유산을 계속 이어갈 뿐 아니라, 14세기 러시아인들의 정치, 사회적 삶에서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습니다.

 

비록 무소유자들의 정신이 언제나 러시아인들의 영성 속에 남아있긴 했지만, 그 다음 세기에 러시아의 교회와 민족적 발달을 지배한 것은 바로 소유자들의 방식이었습니다.

 

비잔티움의 몰락

세르비아는 1459년에, 그리스는 1459-60년 사이에, 보스니아(Bosnia)1463년에, 그리고 끝으로 에집트는 1517년에 터키인들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그 뒤 400년 동안 회교도인 터키인들이 동방에 있는 이전의 비잔틴 제국 안에서 정교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했습니다.

 

서방

서방에서는 15세기에, 이미 말한대로 공의회적인(conciliar) 운동과 여러 다양한 서유럽 국민들 사이의 민족의식의 생성에 의해서, 또한 종교개혁 시대에 앞서서 나타난 종교운동과 고대의 로마와 헬라적인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통하여 자연적인 인간에 대한 강조가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인 운동에 의해서 교황직의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점과 관련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1519년 사망)와 라파엘(1520년 사망) 같은 예술가와 과학자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1536년 사망)의 이름을 말해야만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체코의 지도자 얀 후스(Jan Hus)를 말해야만 하겠는데, 그는 교황과 로마 교회의 (종교적) 실천들을 반대했기 때문에 1415년의 콘스탄스(Constance) 공의회에서 정죄되고 말뚝에 묶여 화형당했습니다. 또한 플로렌스의 열렬한 도미니꼬 수도회 수도자인 사보나롤라(Savonarola)는 교회의 사악함과 죄를 비난하고 정죄한 이유로 교황의 부추김에 의해 1498년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플로렌스의 화가인 프라 안젤리꼬(Fra Angelico 1455년 사망)가 있는데, 그의 많은 명작들은 플로렌스의 산 마르꼬에 있는 사보나롤라 수도원에 걸려있습니다. 또한 도나텔로(Donatello 1466년 사망), 프라 필리뽀 리삐(Fra Filippo Lippi !469년 사망), 보티첼리(Botticelli 1510년 사망) 등도 이 시대의 인물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