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2장 비잔티움 I) 3

ttoza 2023. 7. 4. 16:30

 

(왼쪽부터) 성 대 바실리오스, 성 요한 크리소스톰,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주된 과제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단죄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를 분리하는 선을 그으면서 성자를 피조물에 속한 것으로 여겼다. , 그가 우수한 피조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심할바 없이 그가 이렇게 주장한 동기는 하느님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 그리고 초월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느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그의 가르침이 가져온 결과는 우리 인간의 신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하느님일 때에만 그는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아니라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하느님과 연합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공의회는 대답하였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질이 같다.’(오모우시오스 homoousios) 그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거나 우수한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가 하느님이시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이다. ,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다라고 공의회는 자신이 작성한 신앙의 신조에서 선포하였다.

 

니케아 공의회는 또한 교회의 가시적인 조직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 세 개의 중요한 중심지를 선정하여 발표하였는데,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이다.(까논 6) 그리고 예루살렘 교구를 케사리아의 대주교에게 종속된 것으로 두면서도 명예로서 앞의 세 곳(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다음의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고 규정하였다.(까논 7) 콘스탄티노플은 당연히 언급이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도시가 5년뒤까지는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서 아직 공식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계속해서 이전처럼 이라클리아 대주교에게 속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과업은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2차 세계공의회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이 공의회는 특별히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발전시키면서 니케아 신조를 확장하고 조정하였는데, ,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하느님인 것처럼 꼭같이 하느님이라고 확증하였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신다.” 공의회는 또한 니케아 공의회의 까논 6조의 조항을 바꾸었다. 이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지위는 더 이상 무시되어서는 안되며, 따라서 로마 다음이고 알렉산드리아 위의 둘째 자리에 배치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로마의 주교 다음에 오는 영예의 특권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이다.”(까논 3)

 

공의회가 내린 정의(定義)의 뒤에는 공의회가 채택한 단어들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제공해준 신학자들의 노고가 있었다. 니케아 신조의 핵심 단어에 담긴 의미를 온전하게 끄집어 낸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296-373) 성인이 이룬 최고의 성취였는데, 그것은 곧 오모우시오스(homoousios)로서 본질(실체)에서 하나인, 또는 동일본질의(...와 동체의)’라는 뜻이다. 그가 수행한 과업을 보충해주는 것은 가파도키아의 세 교부, 곧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정교회에서는 신학자 그레고리오스라고 알려진. 329-390)와 대 바실리오스(330-379), 그리고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오스(394년 안식)가 행한 것이다. 아타나시오스가 성부와 성자는 본질(우시아 ousia)에서 하나이시라고 하며 하느님의 일치를 강조한 반면에, 카파토키아의 교부들은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휘포스타시스 hypostasis)으로 이루어진 삼위이심을 강조하였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와 일체성의 미묘한 균형을 보존하면서,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하나의 본질 안에 있는 세 인격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고전적인 개요에 완전한 의미를 해설하였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로는 교회가 한 세대 안에서 이토록 대단한 위상을 지닌 네 명의 신학자들을 결코 다시 갖지 못하였다.

 

381년이후로 아리우스주의는 서유럽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일중 논쟁적인 측면이 까논 3조 안에 있었는데, 이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모두에서 똑같이 분개의 대상이 되었다. 옛 로마는 새 로마의 주장이 어디에서 끝날 것인지 궁금하였다. 오래지않아 콘스탄티노플은 첫 자리를 주장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하여 로마는 불쾌하게 여겨지는 까논을 무시하기로 하였으며, 라테란 공의회(1215)때까지 교황은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는 콘스탄티노플의 주장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당시에 십자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라틴 총대주교의 치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까논(3)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에게도 하나의 도전이었는데, 그것은 이래저래 알렉산드리아가 동방에서는 첫 자리를 차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70년동안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에는 날카로운 갈등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잠시동안은 알렉산드리아가 승리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주된 승리는 테오필로스 총대주교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황금의 입성 요한 크리소스톰을 총대주교좌에서 물러나게 하여 유배를 보내도록 확정한 오크(Oak) 시노드에서였다. 유창하고 웅변적인 설교가인 요한 성인은(그의 설교는 흔히 한 시간이나 그 이상 계속되었음에 틀림없었다.) 아타나시오스와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 제안한 신학적 개념들을 대중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엄격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로서 요한 성인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회적인 의로움을 향한 불타는듯한 열정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모든 교부들 가운데서 아마도 그가 정교회 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며, 그의 저작들은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둘째 주된 성공은 테오필로스의 조카이며 계승자인 끼릴로스 성인(444년 안식)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에페소에서 열린 3차 세계공의회에서 또다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네스토리오스가 몰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에페소에서는 두 위대한 교구의 경쟁보다도 더 위태로운 것이 있었다. 381년이래로 잠잠했던 교리적인 문제가 이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집중하면서 다시 한번 더 나타났다. 끼릴로스와 네스토리오스는 그리스도가 성삼위 가운데 한 분으로서 완전한 하느님이시라는 데는 동의하였으나, 그분의 인성에 대한 묘사와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서로 달랐다. 그들은 신학의 서로 다른 전통 혹은 학파를 대변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자란 네스토리오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닌 온전함을 옹호하였으나, 인성과 신성 사이를 너무 강하게 구별함으로써 같은 몸 안에 있는 한 인격이 아니라 두 인격으로 끝을 맺는 위험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반대되는 전통의 옹호자인 끼릴로스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다양성보다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지닌 일치에서 출발하였으나, 안티오키아 학파의 사람들보다는 덜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말하였다. 만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양쪽의 접근법은 모두 이단에 이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교회는 전체적인 그리스도의 균형잡힌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양쪽이 다 필요하였다. 두 학파가 서로 균형을 이루는 대신에 갈등으로 치달은 것은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비극이었다.

 

네스토리오스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부르길 거부함으로써 논쟁을 일으켰다. 이 호칭은 일반적인 대중들의 기도 속에서 이미 받아들여졌으나, 네스토리오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혼동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의 안티오키아 학파적인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분리주의가 분명한데 그는 주장하기를, 마리아는 오직 사람의 어머니또는 기껏해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려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오로지 인성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공의회에 의해서 지지를 받은 끼릴로스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라는 글로써 대답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낳았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낳은 것은 하느님과 느슨하게 결합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며 동시에 사람인 단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인격이다. 테오토코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 인격의 일치를 보장한다.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 칭호를 부인하는 것은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둘로 분리시키는 것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부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을) 분할하는 중간 담을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지 신자들이 기도하는데 쓰이는 호칭만이 아니라 다름아닌 구원의 바로 그 메시지가 관련되어 있음을 볼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에서 오모우시오스라는 단어가 차지하는 최고의 자리를 똑같이 육화의 교리에서는 테오토코스라는 단어가 차지한다.

 

알렉산드리아는 449년에 에페소에서 둘째로 열린 공의회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대부분이 느끼기에 이 회합은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을 너무 멀리 밀고나간 것이었다. 끼릴로스의 계승자인 디오스코로스는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하나의 본성(피시스 physis)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구세주는 두 본성으로부터 오셨으나 그가 육화하신 뒤에는 오직 하느님이며 말씀이신 분의 육화한 본성 하나만이 있다. 이것이 보통 단성론자라고 일컬어지는 이의 입장이다. 끼릴로스 자신이 이런 용어를 써온 것은 사실이나 디오스코로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대한 양보로서 433년에 끼릴로스가 만든 균형감있는 진술을 빠트렸다. 이제 비록 거의 확실하게 디오스코로스의 견해에 대한 부당한 해석이라 할찌라도 많은 이들에게는 디오스코로스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닌 온전함(무결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