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2장 비잔티움 I)4

ttoza 2024. 2. 12. 18:57

 

제 6차 세계공의회(콘스탄티노플)를 묘사한 이콘

 

겨우 2년 뒤인 451, 마르키아노스 황제는 칼케돈에서 새로운 주교회의를 소집하였는데, 비잔티움의 교회와 서방은 이것을 제 4차 세계공의회로 여겼다. 이제 추는 안티오키아 학파쪽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디오스코로스의 단성론적인 견해를 거부하면서 공의회는, 그리스도는 혼자이고 분리되지 않는 인격인 반면에 그분은 두 본성으로부터 오실뿐 아니라 두 본성 안에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공의회의 주교들은 로마의 교황인 성 대 레오(461년 안식)토모스’(Tome: 문자적으로는 잘라낸 한 부분이라는 뜻. 교회사적으로는 어떤 주제에 대해 특정한 교회의 수장 이름으로 발행하는 결정문 또는 그것을 기록한 두루마리, 작은 책자, 문서를 가리킨다.)를 칭송하였는데, 그 안에는 비록 그리스도의 인격의 일치가 또한 강조되긴 하였지만 두 본성(신성과 인성)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신앙에 대한 선언 속에서 교부들은 하나이고 동일한 성자,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인성에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진술하고 있었으며, 두 본성(신성과 인성)은 혼동되지 않고, 바뀔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고, 나누이지 않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연합 때문에 두 본성 사이의 다름이 없어질 수는 없으며, 도리어 각각의 본성이 지닌 특유의 자산은 보존되고, 두 가지 것은 하나의 인격과 하나의 위격(휘포스타시스) 안에서 결합된다. 우리가 주목하건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단성론자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두 본성 안에서 혼동되지 않고, 바뀔 수 없으며‘) 또한 네스토리오스의 추종자들도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하나이고 동일한 성자는... 분리될 수 없고, 나누이지 않는다.‘)

 

그러나 칼케돈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패배 이상이었다. 그것은 동방에서 최고로 높은 지위로 다스린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장에 대한 패배였다. 칼케돈의 까논(교회법) 28조는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로마로 선임하여 영예로서는 옛 로마 다음 자리에 있게 하는 까논 3조를 확증하였다. 교황 레오가 이 까논을 거부하였지만 동방은 그이후로 그 유효함과 정당성을 인정하여왔다. 공의회는 또한 예루살렘을 케사리아의 관할권에서 해방하였으며, 예루살렘이 대교구들(5) 안에서 다섯째 자리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정교인들 사이에서 5개의 대교구(Pentarchy, 펜타르키)로 알려진 제도가 이제 완성되었으며, 이로써 교회 안에서 5개의 대교구는 특별한 영예를 지니게 되었고, 그들 안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자리를 잡은 질서가 확립되었는데 그 순서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다. 5개의 대교구 모두는 사도적인 토대와 기반을 주장하였다. 처음 4개의 대교구는 로마제국 안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며, 다섯째 예루살렘은 그곳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에 더해졌다. 각기의 도시에 있는 주교들은 총대주교(Patriarch, 빠뜨리아크)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들 사이에서 5개의 총대주교청은 키프로스만 빼고는 알려진 전체 세계에 대한 관할권의 영역으로 나뉘어지는데, 키프로스는 에페소 공의회에 의해 독립교회로 인정되었으며 그 이후 자치하는 지위를 누려왔기 때문이다.

 

5개 대교구(펜타르키)에 대한 정교의 개념을 말할 때, 피해야만 하는 두 가지 가능한 오해가 있다. 첫째는 총대주교(Patriarch)와 대주교(Metropolitan)로 이루어진 체계는 교회적인 조직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교회적인 질서가 아니라 신적인 권리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본다면, 그때 우리는 각각의 주교가 관장하고 있는 도시가 제아무리 크고 화려하거나 또는 작고 초라할찌라도 모든 주교는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말해야만 한다. 모든 주교는 사도적 계승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으며, 똑같은 신비의 성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느님에 의해 신앙의 교사로 임명되었다. 만일 교리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면, 총대주교들만이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지역을 관할하는 모든 주교는 보편공의회에 출석하여, 말하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5개 대교구(펜타르키)의 체계는 모든 주교들의 본질적 동등성을 해치지 않으며,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 성인이 부여한 각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요성을 박탈하지도 않는다.(이에 대해서는 앞서 올린 1부 역사, 1장 시작의 둘째 부분[2021615일 포스팅한 것]을 참조하라.)

 

둘째로 정교인들은 다섯 총대주교들 가운데 특별한 자리가 교황에게 속한다고 믿는다. 정교회는 1870년 바티칸공의회의 결정문 속에서 진술되었고,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황의 권위에 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정교회는 거룩하고 사도적인 로마 교구가 영예로서는 첫째(primacy)이며, (어떤 조건 속에서는) 그리스도교 전체 세계의 모든 부분들에서 나오는 호소와 진정(陳情: 실정이나 사정을 진술함)을 들을 권리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가 최고, 상위’(supremacy)라는 단어가 아니라 첫째, 우선’(primacy)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음에 주의하라. 정교인들은 교황을 사랑으로 주재(主宰: 중심이 되어 일을 맡아 처리하는)하거나 관장하는주교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그나티오스 성인(안티오키아의 주교)의 말을 적용한다면, 로마의 잘못은 이런 첫째이고 우선적인 것 또는 사랑으로 주재(또는 관장)하는 권리를 외적인 힘과 관할권의 상위 개념으로 바꿔온 것이라고 정교인들은 믿는다.

 

로마가 누리는 이런 첫째인(우선하는) 권리는 원래 세 가지 요소에서 비롯된다. 첫째, 로마는 베드로 사도와 바울로 사도가 순교를 당한 도시이고, 베드로 사도는 그 도시의 주교였다. 정교회는 베드로 사도를 사도들 가운데 첫째로서 인정한다. 비록 정교 신학자들이 현대의 로마 카톨릭 주석가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정교회는 복음서에 있는 유명한 베드로 본문들’(마태오 16:18-19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 루가 22:32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 요한 21:15-17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많은 정교 신학자들이 로마의 주교만이 아니라 모든 주교들이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들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중 대부분은 로마의 주교가 특별한 의미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둘째로, 로마의 주교구는 그 첫째이고 우선하는 권리를 제국 안에서 로마 도시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힘입어 또한 누리고 있는 것이다. 로마는 수도이고, 고대 세계에서 최고의 도시이며, 어떤 척도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세워진 이후조차도 여전히 그렇게 존재하였다. 셋째로, 교황들이 이단에 빠진 경우들이 있었을지라도, 교회 역사의 첫 8세기를 통틀어서 로마의 주교구는 그 신앙의 순수성으로 잘 알려졌다. 교리적으로 큰 논쟁이 있는 동안 다른 총대주교좌들은 불안정하게 흔들렸지만, 로마는 대부분의 경우 굳건하게 서있었다. 이단들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강한 압박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확신을 갖고 교황에게로 돌아설 수 있다고 느꼈다. 로마의 주교만이 아니라 모든 주교는 신앙의 교사가 되도록 하느님에 의해 임명된다. 하지만 로마의 주교구가 실제로 진리에 대한 뛰어난 충성심을 가지고 신앙을 가르쳐왔기 때문에, 교회의 초기 수세기 동안 모든 사람이 안내와 인도를 바라면서 호소하고 진정했던 곳은 무엇보다도 로마였다.

 

그러나 총대주교들처럼 로마의 교황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에 주어진 우선권은 모든 주교들의 본질적 동등성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교황은 교회의 첫째 주교이지만 그는 동등한 가운데 첫째’(first among equals)인 것이다.

 

에페소와 칼케돈 공의회는 정교의 굳건한 바위였으나, 또한 위법행위의 중대한 암초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지속적인 분열없이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무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에페소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일수 없으며, 동정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기는 동방의 교회(Church of the East, 또는 동방의 아시리아 교회. 비록 오해의 소지가 있고 잘못된 표현이지만 흔히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이라고 불려진다.)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까지 있다. 그리고 또한 지금껏 디오스코로스의 단성론적인 가르침을 따르면서 칼케돈 공의회의 정의와 (로마 교황) 레오의 토모스(Tome)를 거부하는 비()칼케돈파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동방의 교회는 거의 전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바깥에 놓여있었으며, 비잔틴 역사 속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히 이집트와 시리아에 있는 상당한 수의 비칼케돈파 사람들은 황제가 관심을 갖는 대상이었고, 비록 비잔틴 교회와 다시 친교를 이루려는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지라도 계속해서 시도하였다. 자주 그러는 것처럼, 신학적인 차이는 문화적이고 민족적인 긴장에 의해 더 격렬한 것이 되었다. 언어와 배경에서 압도적으로 비그리스적인 이집트와 시리아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 모두에서 똑같이 그리스적인 콘스탄티노플의 힘에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적인 분열은 정치적인 분리주의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런 비신학적인 요소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 양측은 신학적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비칼케돈파칼케돈파사이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신학이 아니라 용어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양측은 본성’(physis, 피시스)이라는 단어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였고, 하지만 둘 다 같은 기본적 진리를 확증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고 완전한 사람이지만, 그분은 한 분이시고 두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케돈의 정의는 그후에 모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차례의 공의회에 의해 보완되었다. 5차 세계공의회(553)는 칼케돈의 결정들을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으며, 칼케돈이 사용한 것보다는 더 건설적인 용어로써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어떻게 연합하여 한 인격을 형성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6차 세계공의회(680-681)는 단의론자(單意論者, Monothelites) 이단을 단죄하였는데, 이들은 주장하기를 비록 그리스도는 두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인격이기 때문에 그는 오직 하나의 의지만을 갖는다고 하였다. 공의회는 만일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또한 두 가지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고 응대하였다. 단의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함을 손상시켰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인간적 의지가 없는 인간 본성은 불완전한 것이며, 단지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면서 참 사람인 까닭에 그분은 신적인 의지뿐 아니라 인간적인 의지도 지녀야만 한다.

 

6차 세계공의회가 개최되기 이전 50년 동안 비잔티움은 급작스럽고 놀라운 발달을 만나게 되는 데, 그것은 곧 이슬람의 발흥(發興: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일어남)이었다. 회교도의 팽창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 속도였다. 632년에 마호메트 예언자가 죽었을 때. 그의 힘과 영향력은 헤자즈(Hejaz: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에 있는 지방. 홍해에 면한 헤자즈 산맥을 배경으로 한 아카바 만[]의 돌출부로부터 북위 20° 부근까지를 가리킨다.)를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 15년 안에 그의 아랍 추종자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50년 안에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까지 다다라 거의 그 도시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100년 안에 그들은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휩쓸었으며, 스페인을 통해 진격하였고, 서부 유럽을 압박하여 푸아티에(Poitiers: 프랑스 중서부 지역 클랭 강에 위치한 도시)에서 생명을 건 전투를 하게 하였다. 아랍인들의 침략은 이른바 원심력의 폭발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음식과 약탈, 정복을 추구하면서 말을 탄 침입자들의 작은 몸들을 모든 방향으로 몰아대는 것이었다. 늙은 제국들은 그들에게 저항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살아남았으나 오직 어려움을 안고였다. 비잔틴 제국은 자신들의 동쪽 소유권을 잃었으며,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세 총대주교청은 비기독교도들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동방의 그리스도교 제국 안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청은 이제 다른 경쟁자가 없게 되었다. 그이후로 비잔티움은 아주 오랫동안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였으며, 또한 비록 어려운 상황에서 800년을 더 버텨냈지만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