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러시아: 불화(不和)의 시기
17세기에 러시아는 ‘불화의 시기’(time of troubles)에 접어들었습니다. 1598년부터 다스렸던 보리스 고도노프(Boris Godonov)가 1605년에 죽었습니다. 바실 쉬스키(Basil Shuiskii)가 1610년까지 다스리고 나서 폴란드인인 황제가 즉위했습니다. 정치, 사회적인 대변동이 있었던 이 시기에 폴란드인들이 나라의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라의 지도자인 게르모겐(Germogen) 총대주교는 투옥되어 1612년에 굶어 죽었으며, 나중에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이반 3세의 통치가 끝나고 나서부터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과 기근, 국가적 재난에 휩싸였습니다. 성 줄리아나 오소르기니(St. Juliana Ossorgine 1604년 사망)는 고난받는 이들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 사랑과 돌봄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의해 시성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러시아: 옛 신자들의 분열
‘불화의 시기’ 뒤에 북러시아에서는 옛 신자들의 분열(Old Believer Schism)이 뒤따랐습니다. 미카엘 로마노프(Michael Romanov 1645년 사망)가 1613년에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필라렛(Philaret 1633년 사망)이 1619년에 교회의 총대주교가 되었고,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1645년부터 1676년까지 매우 독실하고 경건한 신자인 알렉시스 로마노프(Alexis Romanov)가 황제로서 통치했습니다. 1652년에 알렉시스는 매우 대중적이고 재능이 많은 노브고로드의 대주교 니콘(Nikon)을 러시아 교회의 총대주교로 뽑았습니다. 니콘은 처음에 그 직위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로부터 그들이 복음과 교회법과 교부들께, 그리고 개인적으로 자신을 러시아 교회의 ‘주임 사목자요 가장 높은 아버지’(chief pastor and supreme father)로 여겨 변함없이 복종하겠다는 정식 서약을 받고 나서 그 직을 받아들였습니다. 1653년의 사순대재 중에 니콘은 교회와 국가를 서로 따로이 떼어놓으려는, 교회의 (종교적) 실천들에 대한 자신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니콘의 개혁들은 현대적 기준에서 보아 합리적이었고 급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러시아의 전례적 실천들이 다른 동방 정교회의 것들과 일치하도록 조정되길 바랬습니다. 그것들은 예배를 통한 검증 속에서 자구(字句) 표현(wording)과 철자법(spelling)을 바로 잡도록 요구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개혁으로 말미암아, 그 뒤 러시아인들은 두 손가락 대신에 세 손가락으로 십자 성호를 그어야 하고, 성가를 부르는 동안에 알렐루야(alleluia)를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불러야 하며, 비슷한 다른 변화들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니콘의 시대동안 러시아에서 이루어진 이같은 개혁들이 오늘날 보면 온건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급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개혁들은 러시아 교회와 국가의 ‘제 3의 로마’ 이론과 실천을 직접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그 개혁조치들로 말미암아, (러시아인의 생각에 따른다면) 자신들의 죄 때문에 현재 터키인들 밑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동방의 총대주교청들에 러시아 정교가 종속되게 되었습니다.
1657년에 황제 알렉시스는 폴란드인들과 싸우던 전선에서 돌아와 혼란에 빠져 있는 자신의 교회와 국민들을 발견했습니다. 니콘에 대한 반대는 스스로 ‘개혁자들’이라고 여겨지는 지역교구의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백성들 속으로 돌아가서 러시아 교회의 전통적인 의식과 관습들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요청받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제가 없는 동안 그의 섭정자로서 행동한 니콘은 러시아 교회의 ‘주임 사목자요 가장 높은 아버지’인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이들을 알렉시스가 벌함으로써 자신의 행동들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니콘의 행동들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자 총대주교는 1658년에 공적으로 황제를 비난한 뒤 자신의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때부터 1666년까지 러시아에는 현직(現職)의 어떤 총대주교도 없었습니다.
알렉시스는 니콘과 화해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1666년에 동방의 총대주교들은 자문을 요청받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이 주관한 공의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습니다. 그 공의회는 무절조(無節操)한 가자(Gaza)의 대주교 빠이시오스 리가리데스(Paisios Ligarides)에 의해 조종되었습니다. 공의회는 처음에 니콘의 교회개혁을 반대한 수백만의 신자들을 파문했습니다. 대주교 아바쿰(Avvacum)에 의해 이끌려진 이들 반대자들은 옛 신자들(Old Believers) 또는 옛 의식주의자들(Old Ritualists)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공의회는 자신의 직위를 버리고 황제에 대해 무례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니콘의 성직을 박탈했습니다. 공의회는 가장 존경을 받는 러시아 교회의 소보르(sobors: 주교회의를 가리키는 슬라브어)인 1551년의 ‘일백 장의 공의회’를 공식적으로 논박했습니다. 따라서 1666-1667년의 공의회는 ‘제 3의 로마’ 이론과 다른 모든 교회들에 대해 꾸며낸 러시아 정교의 수위권을 정식으로 포기했습니다.
니콘은 1681년에 죽기까지 붙잡힌 채로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입장을 결코 바꾸지 않고, 1666-1667년의 공의회에 대한 자신의 반대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온전히 총대주교로서 존귀함을 지닌 채 교회 안에 묻혔습니다. 니콘의 반대자들, 곧 의견을 달리하는 ‘옛 신자들’은 공의회를 거부하고, 공식적인 러시아 교회와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바쿰과 같은 그들의 지도자들은 색출되어 무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그들은 추방되어 거친 노동을 하도록 처해졌으며, 그들의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양보를 모르는 정신을 나눠 가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애정을 느끼도록 하는 상태에 놓여졌습니다. 아바쿰 대주교는 1682년, ‘황제와 그의 황실에 적대적인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자신의 지지자들 세 사람과 함께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러시아 문학의 한 고전이 되었습니다.
1682년 피터 대제(Peter the Great)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를 서구화하려는 그의 극단적이며 과격한 시도와 전통적인 러시아적 방식에 대한 그의 맹렬한 반대로 말미암아 반대자들은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생각하였습니다. 러시아의 순수한 정교 신앙과 예식들을 보존하려는 열망 속에서 ‘옛 신자들’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옛날의 러시아적 형태를 지닌 성화와 예배 성가를 계속하여 보존하였습니다.
우니아
17세기에 러시아의 남쪽에서는, 비록 많은 영토가 러시아인들에 의해 다시 되찾아졌지만 그래도 우니아(unia: 동방정교회의 전례를 행하면서 로마의 교황을 수장으로 따르는 교회)가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와 갈리시아(Galicia)에 있는 평신도 형제회들이 이 시기 동안에 우니아적인(uniate) 운동을 강력하게 거부함으로써 정교회를 잘 지켜냈습니다. 이들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는 콘스탄틴 오스트로쯔스키(Constantine Ostrozhskii 1608년 사망)와 1610년에 자신의 ‘동방교회를 위한 애가’(Lamentations of the Eastern Church)를 쓴 밀레티 스모트리쯔스키(Mileti Smotritskii)가 있었습니다.
피터 모길라
1615년에 키에프의 신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620년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테오파네스(Theophanes)는 정부로부터 비밀리에 있는 정교인들을 위해 일곱 명의 주교를 축성하였습니다. 1633년에 시기스문트(Sigismund)의 계승자인 블라디슬라우 4세(Wladyslaw IV)는 기에프의 정교 대주교를 허락했습니다. 키에프 신학교의 지도자인 피터 모길라(Peter Mogila, 1647년 사망)가 선출되었습니다. 모길라는 맹렬하게 반로마적(anti-Roman)이었으나, 그 자신은 라틴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라틴의 스콜라적인 학습을 깊이 존경하였습니다. 예수회원인 카니시우스의 교리문답과 사제의 예식서 따위의 슬라브어 번역을 포함해서 그의 많은 책들로 말미암아, 교리의 형성과 예식의 실천 등에서 라틴의 영향이 정교회 안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모길라의 작품들은 키에프에서 열린 공의회(1640년)와 다시 몰다비아의 야시(Jassy)에서 열린 공의회(1643년)에서 정교회 주교들에 의해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판정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터 대제의 강력한 서구화 정책과 함께 모길라의 책들은, 정교인들의 신학과 경건에 미친 서구의 영향에 거의 200년 동안이나 포로로 붙잡혀 있게 된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끼릴 루카리스
끼릴 루카리스(Cyril Lukaris, 1638년 사망)는 터키인들이 끝내 자신을 물에 빠뜨려 죽게 하기 전까지, 터키인들 밑에서 일곱 번의 서로 다른 경우들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의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은 피터 모길라의 교리문답과 예식서들의 정교성(orthodoxy)을 지지했던 키에프와 야시(Jassy)의 똑같은 교회 공의회들에 의해 곧바로 정죄되었습니다. 끼릴의 ‘신앙고백’은 완전히 칼빈적인 신앙선언이었습니다. 16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동방의 총대주교들의 공의회에서는 야시(Jassy) 공의회의 결정들을 확증하고, ‘동방 총대주교들의 신앙고백’을 발행하였습니다.
동방
17세기에 터키인들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분쇄하였습니다. 그들은 두 교회를 콘스탄티노플에 직접적으로 종속시켰고, 그럼으로써 터키 제국 안에서 비(非)그리스적인 정교인들에 대한 그리스의 ‘파나리옷’(phanariot: 콘스탄티노플 안에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는 주요 거점을 파나르[Phanar]라고 하며, 이 곳에 세계 총대주교청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그리스 정교인들이 파나리옷인 셈이다.) 통치를 확립하였습니다. 이 때 러시아에서는 주교인 로스토브의 성 디미뜨리(St. Dimitri of Rostov 1709년 사망)가 12권짜리의 성인전이 포함된 자신의 영적 작품들을 출판하였습니다. 포차에브(Pochaev) 수도원의 경건한 수도원장인 성 욥(St. Job, 1651년 사망) 또한 이 시대에 살았습니다.
서방
서방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개혁과 역(逆)개혁의 종교적 격변으로부터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는 영국으로부터 건너간 비국교도(非國敎徒, dissenter)들인 청교도들(Puritans), 회중교회파(Congregationalists), 침례교인, 그리고 조지 폭스(George Fox, 1691년 사망)에 의해 세워진 친우회(Society of Friends)의 회원인 퀘이커들(Quakers)이 정착중이었습니다. 1611년 영국에서는 성경의 제임스왕 역본(King James Version)이 발행되었습니다. 이 때 로마 교회는 얀세니즘(Jansenism) 운동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겼었는데, 이것은 은총이 하느님께 선택된 이에게만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교리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빈센트 드 폴(Vincent de Paul, 1660년 사망)이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봉사에 헌신하는 자신의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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