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 신학자들 13

블라디미르 로스키 3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 앞에서 무기력해지신다. 인간의 자유가 그분 자신의 전능하심에서 흘러나오는 까닭에 그분은 그것을 침범하실 수 없다. 분명코 인간은 하느님의 의지만으로 창조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의지만으로 신화(神化)될 수는 없다. 창조를 위해서는 하나의 의지만 필요했으나, 신화를 위해서는 두 의지가 필요하다. 형상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하나의 의지가 있었으나, 형상을 닮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의지가 있어야한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중이 없으면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신적인 의지는 자유로운 동의와 승낙을 얻기 위해 언제나 더듬어서 찾기, 에둘러가기, 심지어는 인간의지의 저항과 반발도 달게 받을 것이다. 이런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며,..

요한 지지울라스 5

페르가모의 요한 대주교는 ‘여성은 정교 전통 안에서 인격중심의 도덕성에 대한 탁월한 표현’이라고 매우 적절하게 강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밖의 다른 어떤 사람 이상으로, 그리고 아마도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는 어머니로서 여성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 말하자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관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 요한 지지울라스 페르가모의 대주교(1931-2023)

요안니스 지지울라스 4

이제 만일 역사가 ‘되는’ 것(또는 역사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성부 하느님의) 경륜(經綸) 속에서 성자의 특수성이라면, 성령의 공헌은 무엇인가? 글쎄, 정확하게는 정반대이다. 곧, 역사의 굴레에서 성자와 경륜을 해방하는 것이다. 만일 성자가 십가가에서 죽고, 그러므로써 역사적 실존의 굴레에 굴복한다면, 성자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은 역사를 ‘넘어선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활동할 때, 성령은 마지막 날들, 곧 ‘종말’(에스카톤, ESCHATON)을 역사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론의 첫 근본적인 특수성은 그것의 종말론적 성격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종말론적 존재, 곧 ‘마지막 아담’으로 만든다.  - 요한 지지울라스(1931-2023), ‘..

요안니스 지지울라스 3

인격은 친교 안의 타자성이며 타자성 안의 친교이다. 인격은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정체성이다. 그것은 ‘나’의 실존과 타자성을 확인하는 ‘너’와 관계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나’이다. 만일 ‘나’를 ‘너’에게서 분리시킨다면, 우리는 단지 ‘나’의 타자성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잃는다. 다른 사람이 없이 ‘나’는 그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격은 자유이다. 그것의 인간론적 중요성 안에서 인격은 자유가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른 존재의 자유이다. 나는 (두 사람 중에서 두 번째 사람을 가리켜) (나머지) ‘다른 한(사람)’(other) 대신에 ‘각각 다른, 차이가 나는, 각양각색의’(different)라고 말하길 망설인다. 왜냐하면 ‘각각 다른’(different)은 (영리하다. 아름답..

요안니스 지지울라스 2

"감사의 성사, 곧 성찬예배 안에서 우리는 친교의 모든 차원을 발견할수 있다. 즉,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우리는 그분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고, 성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서로서로 다른 이들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며, 창조세계 전체가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간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데, 성자와 성령은 마지막 때를 역사 안으로 가져오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볼수 있게 한다." - 요한 지지울라스 페르가모의 대주교(193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