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은 친교 안의 타자성이며 타자성 안의 친교이다. 인격은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정체성이다. 그것은 ‘나’의 실존과 타자성을 확인하는 ‘너’와 관계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나’이다. 만일 ‘나’를 ‘너’에게서 분리시킨다면, 우리는 단지 ‘나’의 타자성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잃는다. 다른 사람이 없이 ‘나’는 그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격은 자유이다. 그것의 인간론적 중요성 안에서 인격은 자유가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른 존재의 자유이다. 나는 (두 사람 중에서 두 번째 사람을 가리켜) (나머지) ‘다른 한(사람)’(other) 대신에 ‘각각 다른, 차이가 나는, 각양각색의’(different)라고 말하길 망설인다. 왜냐하면 ‘각각 다른’(different)은 (영리하다. 아름답다 등등의) 질적인 면에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어떤 특정한 인격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은 단지 어떤 자질을 갖는 자유가 아니라 주로 그저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함축(含蓄)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보아왔듯이 하나의 인격은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자유이다. 따라서 자유는 ‘사랑’과 동일한 것이 된다. 오직 우리가 인격일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곧, 만일 다른 사람이 참으로 타자이면서도 또한 우리와 친교를 나누도록 허용한다면 말이다. 만일 단지 우리와 다른 그 또는 그녀의 존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만이 아니라 그 또는 그녀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또는 도리어 우리 자신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랑으로서의 자유와 자유로서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격성은 창조성이다. 자유는 우리 자신과는 다른 누군가 또는 무엇‘으로부터’가 아니라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인격을 ‘열광하게’ 만든다. 곧, 자아의 경계 밖으로 그리고 너머로 가게 한다. 하지만 이 황홀감이 알려지지 않고 무한한 것을 향한 운동(즉, 그것 자체를 위한 제멋대로의, 추상적인 타자화)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도리어 그것은 타자에 대한 긍정의 운동이다.
타자에 대한 긍정을 향한 인격성의 충동은 매우 강해서 이미 존재하는 ‘타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격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은총(의 산물)인 ‘타자’를 긍정하길 원한다. (전적으로 자유로운 은총에서 비롯된) 인격은 그 자신의 ‘타자’를 창조하길 원한다. 이것이 예술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참된 의미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인격이다. 곧, 자유와 친교의 행위로서 전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생성하는 것은 바로 창작자이다.
그러므로 타자성이라는 주제는 그것의 절대적으로 존재론적인 중요성 안에서 생겨난다. 타자성은 일치에서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라는 바로 그 개념에서 주된 것이며,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다. 타자성에 대한 존중은 (단지) 윤리만이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이다. 만일 타자성이 사라진다면, 존재들은 그저 존재하길 그치고 만다. 존재론적 전체주의를 위한 공간은 그야말로 없다. 모든 친교는 첫째이고 필수적인 구성요소로서 타자성을 포함해야만 한다. 자유를 존재에 대한 개념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유는 그저 ‘의지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존재론적 의미에서 타자가 되는 자유이다.
- 요한 지지울라스(1931-2023), ‘친교로서의 존재: 인격성과 교회에 대한 연구’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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