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2장 비잔티움 I) 1

ttoza 2021. 10. 5. 19:26

 

콘스탄티노플(현재의 터키 이스탄불) 도시의 모형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노스 황제(성 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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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I: 일곱 공의회의 교회

 

일곱번의 거룩한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있으며, 이것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지탱하는 일곱 기둥이고, 그 위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집, 곧 보편적이고 에큐메니칼한 교회를 세우셨다고 모두가 공언합니다.”

 

- 요한 2세 러시아의 대주교(1080-1089)

 

 

제국 교회의 설립

 

콘스탄티노스는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분수령이다. 그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순교자들과 박해의 시대는 끝났으며, 지하무덤(카타콤)의 교회는 제국의 교회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가 보았던 환상의 첫째로 위대한 효과는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콘스탄티노스와 그의 동료 황제 리끼니우스가 313년에 발표한 것인데, 곧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공식적인 관용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비록 처음에는 콘스탄티노스가 관용 이상의 것을 베풀지는 않았지만, 그는 곧 로마 제국 안에서 허용된 다른 어느 종교들보다도 더 그리스도교에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콘스탄티노스가 죽고나서 50년이 못되어 테오도시오스 (황제)는 이런 정책을 밀고나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 법률의 제정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단지 가장 선호하는 종교인 것만이 아니라 제국내에서 유일하게 인정받고 허용되는 종교가 되게 하였다. 이제 교회가 설립되었다. 로마 당국은 한때,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은 존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교신앙이 탄압받을 차례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가 십자가를 본 사건은 또한 그의 일생을 통해서, 나중에 전체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발전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두 가지의 또 다른 결과를 낳았다. 첫째로 324년에 그는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 동쪽에 있는 보스포로스 해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도시인 이 자리 위에 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자신의 이름을 따라서 콘스탄티누폴리스’(콘스탄티노스의 도시라는 뜻. 역자주)라고 이름지었다. 이 천도(遷都)의 동기가 부분적으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또한 종교적인 것이기도 했다. , ‘옛날의 로마는 이교적인 것과 관련되고 너무도 깊이 더럽혀진 까닭에 자신(콘스탄티노스 황제)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중심이 될수 없었다. ‘새로운 로마안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야만 하였다. 330년에 정식으로 도시가 (수도로서) 장엄하게 출범한 뒤, 콘스탄티노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그 어떤 이교적인 의식도 행해져서는 안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노스의 새로운 수도는 정교의 역사적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둘째로, 콘스탄티노스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세계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만일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제국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때는 하나의 정교 신앙 위에 굳건히 기초하길 원했다. 그런 신앙의 내용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의무였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니케아의 회합과 같은 외적인 의식과 정황보다 더 분명하게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공의회에 참석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게사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가 표현하였듯이, 황제 자신이 마치 하늘에서 온 하느님의 전령(傳令)처럼회의를 주재하였다. 공의회가 끝날 무렵 주교들은 황제와 식사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같은 일에 큰 인상을 받은 유세비우스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잔치의 분위기는 글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대단하였다. 황제의 근위병 부대와 다른 군대가 칼을 뽑아든채 황궁의 정문을 에워쌌으며, 이들 한 가운데로 하느님의 사람들(주교들)이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황제의 저택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식탁에서 황제 자신의 친구같았으며, 다른 이들은 양쪽으로 놓여져있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있는 풍경이며,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생각했을수도 있다.”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불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삼아 밤에 자신의 정원을 밝히려고 했던 때 이후로, 상황은 확실히 바뀌었다. 니케아는 일곱 공의회 가운데 첫 공의회였다. 그리고 이 공의회들이 콘스탄티노스의 도시처럼 정교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세 가지 중요한 사건들, 곧 밀라노 칙령과 콘스탄티노플의 건립,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는 다가오는 교회의 시대를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