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1장 시작) 3

ttoza 2021. 7. 10. 20:18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 형상을 바라보는 콘스탄티노스(312년)

 

 

정교 역사에서 많은 시기에 붉은 순교의 가능성은 상당히 적었으며, 푸르고 하얀 형태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이 세기(20세기)에 정교인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한번 붉은 순교를 겪도록 부름을 받은 시기가 있었다.

 

키프리아노스가 강조했듯이 하나의 주교직을 공유하는 주교들이 한 공의회에 함께 모여 자신들이 직면한 공동의 문제를 의논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교는 교회의 삶에서 공의회들의 위치에 언제나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공의회는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선택하신 주된 도구라고 믿어지며, 보편적인 교회는 바로 근본적으로 함께 의논하는’(conciliar) 교회라고 여겨진다.(실제로 러시아어에서 형용사 소보르니’[soborny]보편적인’[catholic]협의체의’[conciliar]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명사 소보르’[sobor]교회공의회둘 다를 뜻한다.) 교회 안에는 독재도, 개인주의도 없으며 조화와 만장일치가 있다. 그 구성원들은 자유롭지만 고립되어 있지는 않은데, 그것은 그들이 사랑과 신앙, 그리고 신비의 성사적 친교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 안에서는 이같은 조화와 자유로운 전원일치의 생각이 실제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볼수 있다. 참된 공의회 안에서는 어떤 한 사람도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제멋대로 강요하지 않으며, 도리어 각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의논하고, 나아가서 이런 식으로 그들 모두는 자유로이 공동의 정신을 갖게 된다. 공의회는 교회의 근본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생생한 전형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있었던 첫 공의회는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되어 있다. 사도들이 참석했던 이 공의회는 많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어떻게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만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마침내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 때 사도들은, 다른 상황이였다면 주제넘거나 불손하게 보일수도 있는 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성령과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였습니다...”(15:28. 한글 공동번역에는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라고 되어있다.) 나중에 공의회들은 같은 확신을 가지고 대담하게 말하였다. 고립된 개인은 성령과 나에게 옳은 것같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머뭇거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로 모였을 때, 교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는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권위를 함께 주장할수 있다.

 

전체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랬던것처럼 함께 모인 예루살렘 공의회는 특별한 회합이었는데, 이는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가 있기까지 어떤 비슷한 공의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프리아노스의 시대가 되기까지 로마제국의 특정한 민간인 지역에 있는 모든 주교들이 참석하는 지역공의회를 여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런 형태의 지역 공의회는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라는 칭호를 지닌 중심도시의 주교가 의장으로서 보통 그 지역의 수도에서 소집되었다. 3세기가 지나면서 공의회들은 그 범위가 넓어졌으며, 한 곳만이 아니라 여러 지방의 주교들을 포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더 큰 회합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같은 제국의 중심 도시들에서 열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런 큰 도시의 주교들은 다른 지방의 메트로폴리탄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가지기 시작하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얼마동안은 이런 큰 도시의 주교가 지닌 지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아무런 결정도 없었다. 3세기 자체 동안에도 공의회의 이같은 지속적인 확대가 그에 상응하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위에서 말한 사도들의 공의회와 달리) 크던 작던 오직 지역 공의회만이 있었으며, 전체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교들로 이루어지고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말할 것을 요청하는 보편적인공의회는 없었다.

 

312년에 교회의 외적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한 사건이 일어났다. 자기 군대와 함께 프랑스 지역을 통해 진군하던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고, 그는 태양 아래 빛을 발하는 십자가 형상을 목격하였다. 십자가와 함께 거기에는 이것으로 승리(정복)하라!’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콘스탄티노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용하는 첫 로마 황제가 되었다. 바로 그날 프랑스에서는 교회 역사의 첫째 주요한 시기가 끝을 맺고, 비잔티움의 그리스도교 제국이 탄생하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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