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1

ttoza 2021. 5. 31. 10:12

 

우크라이나 키에프의 동굴수도원(Kievo-Pecherskaya Lavra)

 

 

동굴수도원 내부

 

11세기

대분열

11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에는 중요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당시 갈등의 직접적 원인은 남()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적인 예식을 행하는 것을 교황이 탄압한 것과 동방에서 라틴적인 예식을 행하는 것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탄압한 것이었습닌다. 1053년에 교황은 두 교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Michael Cerularius)는 그들이 정치적 목적을 띠고 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교황의 사절단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1054716일 교황대표단의 수석인 추기경 훔베르트(Humbert)는 기다리는 데 지쳤습니다. 그는 로마의 사절들에게 보여준 무례함에 화가 났고, 그래서 오직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에게만 적용하는 아나테마’(anathema: 파문이라는 뜻)와 파문의 문서를 성 지혜(Holy Wisdom,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놓았습니다. 동시에 추기경은 매우 조심스럽게 콘스탄티노플을 가장 정교적인 도시라고 칭찬하였습니다.

 

훔베르트가 케룰라리오스를 아나테마하고 파문한 공식적 이유는 신앙의 신조에서 필리오케를 없앤 것과 혼인한 성직자가 예식을 행하는 것, 그리고 예식의 잘못 등이었습니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716일의 사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훔베르트를 파문함으로써 그의 행동에 대해 응수했습니다. 그는 라틴의 잘못들(abuses)을 적은 긴 문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여러 가지의 예전적 의식에 관한 것으로서 성만찬식을 위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쓰는 것 따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록 훔베르트 추기경이 오로지 총대주교와 그의 동조자들의 인격만을 향해서 행동했고, 또한 총대주교도 훔베르트 자신만을 향해서 반응했다 할지라도 1054년에 동방과 서방 사이의 일치를 회복시키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두 교회 사이의 영속하는 분열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1966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아데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에 의한, ‘1054년의 아나테마를 해제하는상징적 행동과 같은 여러 가지 화해의 몸짓들이 있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습니다.

 

교황권

11세기 중반에는 또한 교황권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흔히 이 운동은 그레고리안 개혁이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그 운동의 가장 유명한 지지자가 바로 교황 그레고리 7(1073-1085), 또는 힐데브란트(Hildebrand)였기 때문입니다. 그 운동은 어떤 세속의 권위로부터도 교회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황권의 요구들을 엄청나게 늘렸습니다. 이것이 동방과 어떤 화해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1089년에 두 교회 사이의 좋은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노력의 한 부분으로서, 동방은 교황 우르반 2(Urban II)에게 신앙의 고백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그 요청에 응하기를 거절했는데, 이는 그같이 응한다면 로마의 주교가 다른 주교에 의해 교회 안에서 판단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콘스탄티노플의 니콜라스 3세 총대주교(1084-1111)교황으로 하여금 정교 신앙을 고백하게 하자. 그러면 그가 첫째가 될 것이다하고 말했지만, 그런 일은 역사상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군

1095년의 첫 십자군 때까지 서방 사회에서 교황의 지도자적 위치는 잘 확립되었습니다. 두 교회 사이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확인한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군이었습니다. 십자군은 1099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회교도들을 몰아냈으며, 그 지역에 현존하는 교회 질서를 대신하여 라틴 성직제도를 세웠습니다.

 

키에프 러시아

11세기에 키에프 러시아에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이 꽃을 피웠습니다. 성 안또니(St. Anthony, 983-1073)는 키에프에 있는 동굴에 수도원(Kievo-Pecherskaya Lavra)을 세웠습니다. 그 수도원의 가장 위대한 성인인 성 떼오도시오스(St. Theodosius, 1009-1074)러시아 수도원 제도의 설립자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성 떼오도시오스는 영적인 삶의 복음적 형태 속에서 복음경에 나타난 겸비(謙卑)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다. 이 형태가 자기를 비우는 겸손과 형제에 대한 사랑의 삶을 뜻하는 러시아적인 케노티시즘(kenoticism)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필립비 2:6을 참조하시오.) 키에프의 동굴 수도원은 영적이고 지적인 노동과 계몽활동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자선과 사회적 관심의 중심지였습니다.

 

보리스와 글렙

키에프의 성인들 가운데는 성 블라디미르의 아들인 보리스(Boris)와 글렙(Gleb)도 들어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자신의 형제인 스비아또뽈끄(Sviatopolk)와 싸우기를 거부했습니다. 전투에서 이길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되자 그 두 젊은 형제는, 만일 자기들이 싸웠다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고야 말았을 자신들의 충성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무저항의 수난자로서 성 보리스와 글렙은 1020년에 처음으로 러시아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들은 순교자나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가 아닌,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내놓은 이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신학적 저술들

이 시대에 동방에서 불가리아의 테오필락토스(Theophylactus)는 성경에 대해 수많은 주석을 썼습니다. 서방에서는 캔터베리의 안셀름(1109년 사망)이 자신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신학적 논문들을 써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과 필리오케 교리에 대한 변호, 그리고 이른바 속죄에 대한 만족설’(satisfaction theory)입니다. 특히 만족설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성부 하느님의 정의와 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방

11세기에 서방에서는 오늘날 트라피스트회’(trappists)라고 알려진 베네딕트 수도회의 시스터션 개혁(Cistercian reforms)이 있었습니다. 이 개혁운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인 끌레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금욕적이고 신비적인 신학자이며 교회 활동가였다. 그는 십자군 운동을 장려했으며, ‘네 또는 아니오’(Sic et Non)의 유명한 저자인 아벨라르(Abelard)와 싸웠습니다. 또한 이때에 은둔적인 수도원 제도인 카르투지언(Carthusian)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