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칼리스토스 웨어 대주교의 정교회 역사(1장 시작) 2

ttoza 2021. 6. 15. 23:28

이그나티오스 성인의 순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2:2-4) 이렇게 첫 성령강림절인 오순절 축일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같은 날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3,000명의 남자와 여자가 세례를 받았으며,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만들어졌다.

 

오래지않아 스테파노스 보제가 돌에 맞아 죽은뒤 이어진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흩어졌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마태오 28:19)라고 말씀하셨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교인들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복음을 선포하였으며,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이방인들에게도 설교하였다. 이런 사도적 선교여행의 이야기들이 루가 사도가 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으며, 다른 것들은 교회의 전통 안에 보존되어있다. 놀라우리만치 짧은 시간 안에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요 지역에 불쑥 생겨났으며, 심지어는 로마의 경계선 너머에 있는 지역에도 만들어졌다.

 

이들 첫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여행을 한 제국,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제국의 동쪽 부분은 도시들의 제국이었다. 이것이 초기 교회의 행정적 구조를 결정하였다. 기초적인 구성단위는 각 도시에서 그 지역의 주교가 치리하는 공동체였으며, 주교를 돕기 위해 사제와 보제가 있었다. 도시 주변의 시골지역은 도시의 교회에 의존되어 있었다. 주교, 사제, 보제로 이루어진 삼중의 사역과 같은 형태는 어떤 지역에서는 1세기말에 이미 확립되었다. 우리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그나티오스 성인이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던 107년 무렵에 쓴 일곱편의 짧은 편지에서 이런 것을 볼수 있다. 이그나티오스 성인은 특별히 주교와 감사의 성찬예배를 강조하였으며, 교회를 계층적(위계적)이면서도 신비의 성사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쓰기를, “각 교회의 주교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있습니다.” “주교가 없이 교회에 관련된 것을 어느 것도 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 어디든지 보편적인 교회가 있는 것처럼, 주교가 있는 곳 어디든지 사람들이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불멸의 약인 감사의 성찬예배를 거행하는 일은 주교의 첫째이면서 특별한 임무입니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각 지역의 조직이 더 크고 포괄적인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루는 전세계적인 기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그나티오스 성인에게는 지역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는 교회를 감사의 성찬예배로 모이는 모임으로 생각했으며, 이 모임은 신비의 성사 안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 성만찬을 거행할 때 그 진정한 본질을 실현한다. 그러나 감사의 성찬예배는 지역적으로 행할수 있는 어떤 것이다. , 각각의 특정한 공동체 안에서 주교를 중심으로 모이며, 지역에서 행해지는 모든 감사의 성찬예배에 함께 하시는 분은 단지 일부분이 아닌 온전한 그리스도 자신이다. 따라서 각각의 지역 공동체가 주일마다 감사의 성찬예배를 거행할 때 그것은 완전한 교회이다.

 

이그나티오스의 가르침은 정교 전통 안에서 영구적이며 불변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정교는 여전히 교회를 감사의 성찬예배로 모이는 단체로 생각하며,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교회의 외적인 기구와 조직은 내적이고 신비의 성사적인 삶 다음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교는 여전히 교회의 구조 안에서 지역 공동체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교가 집전하는 정교의 성찬예배에 참석하는 이에게는 예배의 시작부분에 성당 한 가운데서 교인들에게 둘러싸여 주교가 서있을 때, 지역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는 중심에 주교가 있다는 이그나티오스 성인의 생각이 특별히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 말고 또한 더 광범위한 교회의 일치가 있다. 이 둘째 측면은 또 다른 주교순교자인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노스 성인(+258년 안식)의 저술에 의해 발전되었다. 키프리아노스는 모든 주교가 하나의 주교직을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보았으며, 하지만 이것은 각 주교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소유하는 방식의 나눔이다. 그는 쓰기를, “주교직은 하나인 전체이며, 그 안에서 각각의 주교는 완전한 소유권을 누린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더 멀리 그리고 더 폭넓게 다수의 교회로 퍼져나간다 할찌라도 교회는 하나인 전체이다.”라고 하였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다. 많은 주교가 있지만 오직 하나인 주교직이 있다.

 

교회의 첫 300년동안 키프리아노스와 이그나티오스 성인처럼 자신들의 삶을 순교로서 마감한 이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사실상 박해는 그 성격에서 흔히 지역적이었으며, 보통 제한적인 기간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비록 로마의 정부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큰 관용을 베푼 오랜 기간이 있었다고 할찌라도, 박해의 위협은 언제나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위협이 언제든지 현실화될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교에 대한 생각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삶에서 중심에 놓여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만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들,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보았다. 후세기에 교회가 확립되고더 이상 고통스런 박해가 없게 되었을 때에도 순교에 대한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다른 형태를 취하였다. 이를테면 수도생활은 흔히 그리스 교부들에 의해 순교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동일한 생각이 서방 교회에서도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7세기 아일랜드의 설교와 같은 켈틱 문서를 보면 여기서는 금욕적인 삶을 순교의 길로 비유하고 있다.

 

이제 사람에게 십가가로 여겨지는 세 가지 종류의 순교가 있는데, 곧 하얀 순교, 푸르른 순교, 붉은 순교입니다. 하얀 순교는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푸르른 순교는 금식과 노동에 의해서 사람이 자신의 악한 욕망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거나 또는 속죄와 회개 속에서 몹시 괴롭고 힘든 일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붉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십자가와 죽음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