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10

ttoza 2021. 3. 24. 18:10

 

아토스산의 대 라브라 수도원

 

10세기

 

문화적 르네상스

동방에서는 10세기에 일반적으로 9세기의 문화적 르네상스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교부들의 작품들도 수집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번역가 성 시메온(St. Simeon Metaphrastes)은 교회 성인들의 삶을 편찬했습니다. 또한 미카엘 프셀루스와 요한 이탈로스 같은 이들에 의해서 이교적인 고대(古代)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있었고, 그들의 극단적인 헬라화’(hellenization)는 교회와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960년 아토스 산의 성 아타나시오스(+1000년 사망)는 대 라브라(Great Lavra)를 세움으로써, 성산(聖山) 위에 위대한 수도 공동체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신 신학자 성 시메온(+1022년 사망)은 그리스도인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에 관해서 자신의 영향력 있는 논문들을 썼습니다.

 

교회와 국가

10세기에는 또한 비잔틴 사회에서 교회와 사회의 여러 측면들이 점점 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결혼과 가족들의 일에 더 많은 통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만일 어떤 결혼이 사회의 당국에 의해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정교의 교회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교회의 축복을 때에 맞추어 받아야만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전보다 더 최소한의 요구조건을 확립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네 번째 결혼 논쟁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925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니꼴라스 미스띠꼬스가 황제 레오 6세의 네 번째 결혼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정교의 교회법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교회에서 네 번의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교회의 신학은 그 표준으로서 영구적인 일부일처제를 지지합니다. ,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은 죽음에 의해서도 깨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과부와 홀아비의 재혼도 이 표준에 적합치 않으며, 비록 그같은 일이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질지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네 번째 결혼 논쟁과 함께 사람들의 관심은 최소한의 것’(minimum)에 모아지게 되고, 따라서 정교회가 신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결혼을 허락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게 됩니다.

 

불가리아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미카엘 3세를 자신의 대부(代父)로 해서 869년에 세례를 받은 불가리아의 짜르(tsar) 보리스는 마침내 결정적으로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섰고, 10세기까지 그의 교회는 동방의 비잔틴 예식 속에서 굳세게 확립되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아들인 짜르 시메온의 영도 아래서 불가리아는 강력한 국가였고, 비잔틴적인 불가리아 문화는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이 세기의 끝 무렵까지 마니교 전통에서 비롯된 이원론적이고 정신주의적인 소종파인 보고밀스(Bogomils) 이단이 퍼져나갔습니다.

 

키에프의 블라디미르

988년에 키에프 공국의 신하들이 위대한 왕자 블라디미르의 지도 아래 드니퍼(Dnieper) 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정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 바실리오스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블라디미르의 사절단이 비잔틴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신앙을 찾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비잔틴의 공주 안나(Anna)와 혼인하여 자신의 공국을 콘스탄티노플의 제국과 연합시키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책이라 점을 키에프의 왕자가 알았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 블라디미르는 진짜 영적인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토 안에 그리스도교적인 원칙을 세우고, 자신의 백성들을 정교 신앙으로써 계몽시키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당대의 그리스도인 왕자로서 개인적, 공적으로 행한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블라디미르는 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그의 할머니인 위대한 공주 올가(Olga)는 손자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 왕자의 결정과 행동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고, 그 또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예식의 발달

예전적으로 성모보호 축일(101)10세기에 비롯되었습니다. 이교도인 슬라브인들이 공격해올 때,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성 안드레아(+956년 사망)는 성모님께서 하느님 앞에서 중보하시면서, 기도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백성들을 당신의 가리개(veil)로써 지키고 계신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역사적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은 교회의 한 가운데 성모님께서 현존하시는 축일로서 주로 경축되는 성모보호 축일은, 역설적이게도 슬라브 전통을 지닌 교회에 의해 거의 하나뿐인 대중적 축일로서 지켜지고 있습니다.

 

서방

9세기 후반에 서방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 가운데 하나인 때로 접어들어 갔습니다. 새로운 침략의 물결이 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의 상대적 안전을 파괴했습니다. 교회는 평신도 군주들의 지배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았습니다. 동방과의 교류는 사실상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끌루니(Cluny) 수도원으로부터 흘러나온 개혁 운동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