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성화 논쟁의 끝
거룩한 성화에 대한 공경이 정식으로 교회 안에서 지지를 받은 787년의 공의회에 뒤이어서, 다시 한 번 더 성화(이콘)에 대한 공경과 공경자들 모두를 공격한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리니 여왕이 802년에 죽자, 아르메니아인 레오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815년에 그는 교회에서 성화를 신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 신자들이 성화를 공경하거나 그것에 입맞추지 못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815년의 성지주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위대한 스투디오스(Studios) 수도원의 원장인 성 떼오드르는 성화를 든 채로 거리를 행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 행진은 황제의 공격과 고문, 살인을 낳았습니다. 오로지 843년에만, 떼오도라 왕비가 주도권을 갖게 되자 메토디오스 총대주교의 지도 아래 성화들은 단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에 되돌아 왔습니다. 그 해의 사순절 첫 주일에 성화들이 정식으로 되돌아 온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마다 지켜지는 정교 (승리)주일의 시작이 있게 되었습니다.
끼릴과 메토디오스: 슬라브인들에 대한 선교
9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성 포티오스는 모라비아(Moravia) 지역으로 선교사들을 보내 슬라브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리스인 형제인 콘스탄티노스와 메토디우스는 863년 모라비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미 슬라브어 문자, 곧 지금 고(古) 슬라브어 또는 고(古) 불가리아어라고 불려지는 문자를 고안해냈고, 그 형제는 그것을 써서 교회의 책들을 슬라브어로 옮기곤 했습니다. 그들이 옮긴 책 가운데는 문자(알파벳)를 가르치는 것과 예식서와 예식을 소개하는 것, 그리고 사제가 되도록 훈련시키는 책 등이 들어있습니다.
콘스탄티노스와 메토디오스의 선교에 대해, 그들보다 더 일찍 모라비아에 온 라틴교회의 프랑크인 선교사들은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공식적인 언어는 오직 히브리어와 라틴어, 그리고 그리스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슬라브어가 교회의 예배에서 쓰여야만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스와 메토디오스는 자신들의 일,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예배 때 자기 나라의 말을 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869년에 로마로 갔습니다. 교황 하드리안 2세(Hadrian II)는 그리스인 선교사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는 869년에 죽었습니다. 죽기 바로 전에 그는 수도자가 되어 끼릴(Cyril)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는 이 이름으로 교회의 성인이 되어 알려졌고, 그가 만든 문자는 그 이름을 따서 ‘끼릴 자모’(字母 [Cyrillic])라고 불려졌습니다.
메토디오스는 빠노니아(Pannoni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선교사의 일을 하게 되자, 프랑크족인 독일인 성직자들이 독일인 루이(Louis)의 도움으로 그를 붙잡았습니다. 873년에 교황 요한이 메토디오스에게 일어난 일을 발견하고는 그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885년에 메토디오스가 죽고 난 뒤, 그가 이루어 놓은 일들은 모두 프랑크족인 독일인 권력자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대부분은 붙잡혀서, 도망치거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일부는 불가리아로 도망갔고, 성 클레멘트와 성 나움(St. Naum)은 그 곳 사람들 속에서 위대한 선교의 과업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때까지는 불가리아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의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870년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소속되었습니다. ‘슬라브인들의 복음전도자’인 성 끼릴과 성 메토디오스의 선교사역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 불가리아로부터 세르비아 땅을 거쳐서 마침내는 다음 세기들에 키에프와 북러시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필리오케 논쟁
동방과 서방 사이의 충돌은 슬라브인들에 대한 선교에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프랑크족과 독일인의 새 통치자들이 서유럽과 서방교회에서 하고자 하는 역할에 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800년의 성탄절에 샤를마뉴는 로마의 교황에 의해서 황제가 되었습니다. 792년에 이미 이 새로운 통치자는 자신의 ‘샤를마뉴의 책들’(Libri Carolini)을 교황 하드리안 1세에게 보냈습니다. 샤를마뉴가 동방교회를 공격한 이유는 동방의 황제를 불신임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새로운 신성 로마제국의 환상 속에 샤를마뉴는 서방 전체와 함께 동방 전체를 끌어넣고 싶었습니다.
808년에 로마의 교황 레오 3세는 동방에 대한 샤를마뉴의 비난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성 베드로 성당 문 위의 은으로 된 명판(銘板)들 속에 모셔져 있는, 필리오케가 빠진 신앙의 신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교황권
비록 전체 그리스도교권에 적용되는 규칙을 확립하려는 샤를마뉴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로마의 교황들은 서방 전체에 대한 교회의 지배력을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니콜라스 1세(858-867)처럼 강력한 교황들은 서방의 모든 주교들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휘둘렀으며, 권위있는 평신도의 영향과 지역의 대주교들이 좋아하는 탈중앙화를 억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가짜 교황의 교서’에 의해 도움을 받았는데, 이것은 매우 초기 교황들의 편지라고 주장되었으나 사실은 9세기 프랑크인들이 위조한 문서였습니다. 덧붙여서 이른바 ‘콘스탄티노스의 증여’(Donation of Constantine)가 알려진대로 그것의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것은 4세기에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로마의 주교들에게 어떤 권한과 특권을 주었다고 주장했는데, 거기에는 나중에 교황(속)령이라고 불려지게 된 로마 주위의 영토에 대한 세속적인 지배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티오스
861-886년부터 동방과 서방교회 사이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교회와 사회의 일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다투는 두 집단, 곧 이른바 열성파 또는 보수파와 온건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지도자를 내세우기 위해서 포티오스라는 이름의 평신도가 총대주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른바 보수파의 극단주의자들은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티오스와 그의 선출을 승인한 제국 정부를 상대로, 교회의 평화를 위해 조용히 물러난 전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로마에 호소하였습니다. 교황 니콜라스는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호소를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로 잡아, 861년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를 그곳에서 열었습니다. 교황의 사절단은 공의회에 도착해서 포티오스가 적법한 총대주교임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것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절단이 로마로 되돌아갔을 때 교황 니콜라스는 그들의 결정을 거부했고, 863년에 또 다른 공의회를 로마에서 열어 이그나티오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공포하면서 포티오스를 면직(免職)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무시되었습니다.
866년과 867년에 불가리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867년에 포티오스와 500명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연 공의회는 교황 니콜라스가 불가리아 교회의 일에 간섭한 것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같은 해에 콘스탄티노플에는 또 다른 정치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실리오스 1세가 자신의 전임자이며 후원자였던 이가 암살됨으로 말미암아 황제가 되었고, 따라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그나티오스가 포티오스를 대신하여 총대주교로서 다시 직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869년에 니콜라스의 계승자인 교황 하드리안 2세는 포티오스가 불가리아의 일에서 한 역할을 문제 삼아 다시금 그를 파문했습니다. 그러나 877년에 상황은 변하였습니다. 새 황제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포티오스는 존경하는 이그나티오스가 죽자 다시 총대주교가 되었습니다.
879년에 다시 한 번 교황의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습니다. 포티오스가 의장을 맡은 이 공의회에서는 동방에서 누렸던 로마 교황의 전통적 특권이 포티오스에 의해 명백하게 확인되었고, 새로운 교황인 요한 8세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포티오스를 정죄했던 863년과 869년의 공의회는 무효인 것으로 선언되었습니다. 787년의 공의회가 제 7차 세계 공의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신앙의 신조는 필리오케 없이 확증되었습니다.
포티오스는 10세기에 정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서 글을 쓴 위대한 신학자였는데, 특별히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현하심을 변호하면서 필리오케의 문제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는 고전적이고 교부적인 저술의 편찬자였습니다. 그는 슬라브인에 대한 선교를 후원했습니다. 그는 니콜라스의 과장된 요구에 맞서서 진정한 교회 전통을 지켰고, 그러므로써 궁극적으로 로마 교회와 교황 요한 8세와의 일치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일에서는 뛰어난 외교관이었으며, 겸손한 인격과 지혜를 갖추어 동방과 서방의 모든 집단에 속한 호의적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성 포티오스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에서 참으로 위대한 주교들 가운데 한 분이었습니다.
예식의 발달
9세기에는 또 다른 위대한 성인인 스투디오스의 성 떼오도르가 예식의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성 떼오도르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원장이였으며, 자신의 생애 동안 약 십만 명의 수도자들을 책임졌습니다. 그는 성화(이콘)에 대한 수호(守護)로 유명하며, 또한 정교회의 전례식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공적 예배의 순서이기도 한 전례식의 ‘띠삐꼰’(typikon: 전례의 규범)은 9세기 이후로 전체 정교회를 위한 표준적인 예배 순서가 되었습니다. 사순대재와 부활절을 위한 예배서인 ‘사순절 뜨리오디온’(Lenten Triodion)과 ‘꽃의 뜨리오디온’(Flower Triodion)은 거의 전부가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수도자들 작품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이는 성가 작곡자인 성 요셉입니다.
또한 9세기에 비롯된 것으로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찬식 사본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정교회에서 행하는 것과 사실상 똑같은, 신자들의 예식을 담고 있습니다.
법전
9세기말에 황제 바실리오스 1세는 민법을 새로이 편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 가운데 하나가 ‘에빠나고게’(Epanagoge: 886년 공표된 비잔틴 법률책. 더 적절하게는 ‘이사고기’[Eisagoge]라고 함. 역자주)였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일치 또는 ‘조화’의 체계를 재확인했습니다.
서방
일반적으로 말해서 9세기는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기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세기가 동방에서는 르네상스의 시기였던 반면에, 서방에서는 로마의 교황권을 중심으로 더 고조되는 중앙집권화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서방에서 눈여겨볼 유일한 신학자는 존 스콧 에리제나(John Scot Erigena, 877년 사망)로서, 그는 디오니시오스와 성 막시모스의 동방신학을 서방 교회에 소개하여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토마스 홉코 신부(1939-2015, 미국 OCA 소속의 신학자,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의 학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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