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정교회 성인들의 생애(6월)

ttoza 2010. 2. 11. 18:35

성 유스티노스 순교철학자(6월 1일)

 

 

철학자가 그리스도를 믿다.

성인은 114년경 사마리아의 옛 도시 시켐(Sychem)에서 이교도인 그리스인 부모밑에 태어났다. 성인은 어릴적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으며,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성인은 스토아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플라톤 등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결국 이들 철학으로는 참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한번은 성인이 길을 걷다가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노인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 그 노인은 인생의 모든 의문들에 대해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또한 아무리 진리를 찾으려 해도 하느님께서 그 길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니 기도와 사랑 안에서 그분의 은총을 구하라고 알려주었다.

서른 살 무렵 성인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로 자신의 재능과 광범위한 철학적 지식을 이교도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활용하였다. 성인은 로마제국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진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과 순교

성인은 그리스도교 철학학교를 열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을 강의하였으며, 이교도 궤변론자들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이단적으로 왜곡시키는 무리들에 맞서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을 변호하였다. 또한 성인은 영지주의자 마르키온(Marcian)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비판하며 맞섰다.

155년 안토니노스 피우스 황제(138-161년 재위)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때 성인은 개인적으로 두 명의 무고한 그리스도인을 위해 변론을 하였다. 이 변론을 통해 성인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지는 비방(誹謗, 헐뜯음)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런 성인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황제는 마침내 박해를 멈추었다.

이후 성인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하게 하였다. 로마에 도착한 성인은 이전에 여러 논쟁에서 자신에게 패했던 이교도의 그릇된 고소에 휘말려 로마법정에 서야 했다. 결국 사로 잡혀 고문을 받은 성인은 165년에 순교하였다.

 

 

제 1차 세계공의회 참석 교부들 주일(6월 4일)

 

역사적 배경

정교회에서는 부활후 일곱째 주일에 제 1차 세계공의회(325년, 니케아)에 참석한 318명의 교부들을 기념한다. 4세기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끝나자 이단자(異端者, heresy)들이 교회 안에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가장 해악(害惡)을 많이 끼친 이단 사상의 하나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Arius)는 자부심과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聖)과 그분이 성자로서 성부 하느님과 동등함을 부정하면서, 구세주이신 예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그 본질이 같지 않고 다만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총대주교가 주재한 지역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의 이같은 주장을 정죄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많은 주교들에게 편지를 써서 공의회의 결정들을 비난하는 한편, 동방(the East)쪽으로 자신의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려 몇몇 주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교회의 대응과 결과들

이같은 분쟁을 조사한 성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違背)된다는 조언을 받아들여 325년 니케아에서 제 1차 세계공의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에는 박해시대에 당한 고문의 흔적을 그 몸에 갖고 있는 분들도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우리 교회의 매우 위대한 성인들이 여러분 참석하셨는데, 성 니콜라스 미라의 대주교님이나 스피리돈 성인 등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당시에 보제로서 알렉산더 총대주교와 함께 참석한 아타나시오스 성인(나중에 총대주교가 되심.)은 정교회 가르침의 순수성을 불같은 열정으로 지켜냈고 그로써 ‘대(大 the Great)’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그 연설에서 ‘병사들을 위해 전장(戰場)에서 흘린 피보다 더 나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다툼인데 그것은 후자(後者)가 전자(前者)보다 더 파괴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열일곱 명의 주교들은 끝까지 교만한 채 있었으나 그의 가르침은 거부되었고, 그 자신은 파문되었다. 거룩한 보제 아타나시오스 성인은 결정적으로 아리우스의 신성모독적인 견해들을 반박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제안한 신앙고백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신앙의 신조를 확증하였다. 그리고 교부들은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같다(consubstantial)'는 문구를 신조 안에 넣도록 요청하자 이 제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성 빠나기스 케팔로니아인 사제(6월 7일)

 

케팔로니아 섬

성인께서는 1801년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의 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활달한 지성(知性)과 성경 등의 거룩한 책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보여준 성인께서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고, 학교를 책임지는 일을 하셨다. 이때 성인께서는 신앙과 애국적인 열정 사이의 모순을 피하고자(* 당시 그리스 이오니아해의 섬들은 영국이 관할하고 있었으며, 1864년에 본토와 통합되었다.) 오래지않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디오스(Dios) 섬에 있는 블라헤르네(Blachernae)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그후 어머니의 간청으로 릭수리(Lixouri)로 되돌아오긴 하였지만 금욕적인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온 힘을 다하여 영적인 수련을 계속하셨다.

 

복음적인 삶의 실천

35세에 사제서품을 받은 성인께서는 거의 날마다 성찬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며, 무엇보다도 복음적인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다. 자선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교회로 불러들였다. 성인께서는 교구사제가 되기를 거절한 채 자그마한 성 스피리돈 수도원에 거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가슴 속에 간직해온 영적인 보물들을 오십년 동안 케팔로니아 섬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나누어주었다. 그 섬에서 사셨던 예라시모스 성인(10월 20일)과 안티모스 성인(9월 4일)을 본받아 빠나기스 성인께서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농촌지역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성당들을 돌며 예배를 드리는 일을 계속하셨다. 당신 가족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들처럼 돌보아주셨다. 성인께서 마을에 들어서면 가난한 여인들이 벌떼처럼 성인에게 몰려왔고, 성인께서는 당신의 먹을 것조차 포기하시면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성인께서는 통찰력과 예언의 은사를 받으셨으며, 사람들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그 능력을 쓰셨다. 불행한 죽음을 맞이할 사람에게는 고백성사를 하도록 권하였고, 큰 죄를 저지르려는 사람에게는 은유적인 말로 경고를 하셨다. 그러나 이같은 하느님의 풍부한 선물들도 성인의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고린토 2서 12:7)이 없었다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제가 되고 십 년쯤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극심한 신경성의(nervous) 병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하셨으며, 자신이 죄인이기에 이같은 고통이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셨다. 성인께서는 이 병으로 말미암아 말년에는 5년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지내셔야 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성인께서는 예언과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셨으며, 교인들도 성인의 집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알아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사랑과 존경으로 성인을 찾았고, 이로써 성인께서는 전체 케팔로니아 섬의 영적인 삶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결코 멈추지 않으셨다. 길고 고통스러운 병고를 십자가로 받아들이셨던 성인께서는 1888년 6월 7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이틀 밤과 이틀 낮 동안 구름처럼 몰려든 교인들이 성인의 시신에 경의를 표하였고, 이후 성인에 대한 공경과 기념은 케팔로니아뿐 아니라 그리스 전역에서 멈추지 않고 있다.

 

 

성 테오파니스 근대순교자(6월 8일)

 

배교(背敎)와 회심

성인께서는 1500년대에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갈라마타 지역에 있는 자판티(Zapanti)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테오도로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인께서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양복장이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학대하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뒤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한 성인은, 터키 궁전의 근위보병이 되기 위해 6년 동안 터키와 아랍 문학에 대한 교육을 완벽히 받았다. 그런데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신학적 의문들로 말미암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성인께서는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성삼위(Holy Trinity)와 성모님께 간청하면서 다시금 도망을 쳤다.

 

신앙을 고백함

자신이 구원받을 길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던 성인께서는 마침내 베니스(Venice)에서 가브리엘 총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신앙의 가르침을 새로이 받은 다음 테오파니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다. 그뒤 콘스탄티노플과 아테네 등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려 애썼으나, 라리사(Larissa)에서만 600대의 태형(笞刑: 매를 맞음)에 처해졌을 뿐이었다. 다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술탄의 법정으로 간 성인께서는 크고 분명한 소리로 술탄을 칭송한 다음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그에 합당한 벌을 요청하였다. 성인의 대담무쌍한 태도에 격노한 재판관은 700대의 태형과 투옥을 명하였다.

 

순교의 면류관

감옥에서 성인이 세 시간여 동안 기도하자 지진이 일어났고,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비치면서 성인의 수갑들이 풀어지고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다. 간수들은 두려움에 떨며 엎드려 성인에게 용서를 빌고, 더러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행정장관은 직접 성인을 불러 들여 ‘혹독한 죽음’의 사형을 명하였다. 고문하는 자들이 즉시 성인을 붙잡아 등에서 가슴까지 십자가 모양으로 살갗을 도려냈다. 그리고는 성인의 손을 못으로써 안장에 박고 노새에 거꾸로 매달은 다음 거리를 행진하였다. 처형대에 다다라서는 벌거벗은 채로 성인을 쇠갈고리에 매달았고,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막대기로 성인을 때렸다. 밤이 되자 큰 천둥이 치고, 하늘로부터 빛이 성인의 몸을 휘감아 둘러쌌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였고, 이에 분노한 터키인들은 날카로운 도구들을 가지고 와 성인의 얼굴과 몸을 찌르기 시작하였다. 1588년 6월 8일 성인께서는 순교하셨으며,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인을 장례지냈다.

 

 

성 바르톨로메오스 사도(6월 11일)

 

성령의 힘으로 행한 기적들

성 사도께서는 갈릴리의 가나에서 태어나셨다. 오순절 이후 사도께서는 성 필립보 사도(11월 14일)와 함께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이때 성 필립보 사도는 자신의 여동생 성 마리암나(2월 17일)를 함께 데리고 다니셨다. 사도들께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으며,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기도 하셨다. 한 도시에서는 신학자 성 요한 사도와 함께 기도의 힘으로써 이교도들이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거대한 뱀을 죽이기도 했다.

그 도시에는 또한 40년동안 눈이 먼채로 살고 있는 스타키스(Stachys)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도들로부터 고침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몰려왔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침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자 그 도시의 통치자가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스타키스의 집은 불을 질러버렸다. 재판정에서 그 통치자는 사도들이 옷속에 마법과 같은 힘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도들의 옷을 벗기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녀 마리암나가 불타는 횃불로 변하였고, 그러자 아무도 감히 성녀에게 달려들지 못하였다. 도시의 통치자는 성 사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성 사도 필립보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고 갈라진 땅이 도시의 통치자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이교도 사제들과 많은 사람들도 삼켜버렸다. 그러자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은 얼른 달려가 십자가에 매달린 사도들을 끌어내렸다. 성 바르톨로메오스 사도는 그리 높이 매달리지 않았기에 쉽게 땅위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성 필립보 사도는 죽고 말았다. 성 사도는 스타키스를 그 도시의 주교로 임명하고는 마리암나 성녀와 함께 그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시다.

성녀 마리암나가 평화로이 안식한 뒤 성 바르톨로메오스 사도는 인도로 가셨다. 그곳에서 사도께서는 마태오복음을 그곳의 언어로 번역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끌었다. 다시 대 아르메니아(Greater Armenia) 지역으로 간 사도께서는 그곳 왕의 딸을 악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왕가의 모든 가족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교도 사제들의 술책으로 인해 사도께서는 왕의 동생에게 체포되었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성 사도의 살가죽을 벗겨내는 악행을 가하더니 머리를 잘라버렸다. 이로써 성 사도는 순교하셨고 신도들은 그 시신을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 장사지냈다.

 

 

성령축일(6월 12일)

 

연관축일이란?

정교회에서는 모든 큰 축일 다음날 그 축일을 가능케 한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며 기념한다. 예를 들어 주님의 탄생(성탄절) 다음날에는 성모님을 기념하고, 신현축일 다음날에는 성 요한 세례자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연관적(聯關的)으로[SYNAXIS 시낙시스]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삼위의 한 위격이신 성령

내일(6월 12일) 우리 교회는 거룩하고, 선하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기념한다.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불의(불타는) 혀와 같은 모습으로 사도들에게 내려오셨고, 그로써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자(the Comforter)를 보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실현하셨다.(요한 14장 16절) 바로 그 성령께서는 시대를 통하여 교회 안에 머무르시면서 교회를 진리로 이끄신다.(요한 16장 13절)

오순절 전날인 토요일의 만과에서 불려지는 성가의 가사를 보면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예언을 쏟아내시며, 사제직을 완성하시고,... 교회의 모든 제도를 결합시킨다.’

오순절 저녁의 만과에서는 성령이 ‘선의 원천이며,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서 알려지셨고, 성자는 영화롭게 되신다’고 노래하며, 성령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는 분’으로서 ‘영적 선물을 주시는 살아있는 샘’이라고 한다. ‘예언자들과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영광의 왕관을 받은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성령은 바로 생명과 성화(sanctification)의 근원이시다.

 

축일예배에 관한 지침

성모송의 제 9오디는 ‘기뻐하소서, 동정으로 출산하신 여왕이시여...’라고 노래한다. 성찬예배때 입당하면서 사제나 보제는 오순절처럼 ‘주여, 힘을 떨쳐 일어나소서. 우리는 당신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리이다. 선하신 위로자여, 주님을 찬송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성가를 부른다. 그리고 삼성송의 ‘거룩한 하느님이시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옷입듯이 입었도다. 알렐루야’로 바뀐다. 오순절 한 주간은 금식이 해제된다.

 

 

엘리사 예언자(6월 14일)

 

농부의 아들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엘리사 예언자는 요르단 강 계곡의 아벨-므홀라(Abel-Mehola)라는 곳에 사는 한 부유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밭에서 일하던 그에게 엘리야 예언자(7월 20일)가 찾아와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은 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엘리야 예언자를 따라 나섰다. 엘리야 예언자가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한 뒤 하늘로 불려 올라갈 때, 그의 겉옷을 받아 가진 엘리사 예언자는 이로써 스승의 능력을 이어받게 되었다.(열왕기하 2:11-15참조) 이후 엘리사 예언자는 오십년 동안(850-800BC) 사마리아 왕국 안에서 예언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때 그는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 모두에게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것에서 돌아서 한 분이신 참 하느님을 예배하라고 끈기있게 권유하였다.

 

기적을 통한 가르침

어떤 예언자들은 말씀과 이상(visions)으로 그리고 다른 예언자들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가르쳤다면, 엘리사 예언자는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 예언자처럼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쳤으며, 이로써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활동을 미리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수넴(Shunem)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하심을 예시(豫示)하였다.(열왕기하 4:30-37) 또한 물에 빠뜨린 도끼를 다시 떠오르게 함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미리 보여주었다.(열왕기하 4:1-7) 그리고 시리아의 군사령관인 나아만을 문둥병에서 낫게 한 기적을 통하여 예언자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교도들도 구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었다.(열왕기하 5:1-27)

 

죽어서도 본분(本分)을 다하심

이처럼 거룩한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왕국은 바알(Baal) 신을 섬기는 잘못에서 벗어나 정화(淨化)되었다. 엘리사 예언자는 이스라엘 왕이 시리아인들을 정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뒤, 아주 많은 나이에 안식하셨다. 예언자가 안식하신 바로 그 해에 한 죽은 사람이 예언자의 시신(屍身)에 닿고 나서 되살아났는데, 이로써 현자(賢者) 시락(Sirach)은 ‘(엘리사는) 무덤 속에서도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다하였다’(집회서 48:13)고 칭송하였다. 배교자 율리아노스 황제때(362년) 훼손된 예언자의 무덤에서 수습된 성해(聖骸)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으며, 그곳에 예언자를 기리는 성당이 봉헌되었다.

 

 

성 예로니모스 수도자(St. Jerome 6월 15일)

 

언어에 능통한 청년

성인은 달마티아와 파노니아 사이의 국경에 위치한 스트리돈(Stridon)이라는 도시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원래 이름은 에브세비오스 이에로니모스 소프로니오스이다. 성인의 부모님들은 성인을 로마로 보내 그곳에서 세속학문을 공부하게 하였다. 처음 제국의 수도에서 어린 나이의 성인은 세상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 먹고 세례를 받은 뒤 수도자가 되었다.

372년 무렵 고향으로 되돌아 온 성인은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고, 뒤에 남겨진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수도원 생활을 잠시동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다시 동생들의 생활을 잘 정리한 성인은 동쪽으로 떠나 374년경 안티오키아 남동쪽의 한 사막에 자리를 잡았다. 5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성인은 성경에 대한 연구와 함께 엄격한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히브리어와 칼데아어에 능통한 성인은 이 기간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신학적, 영적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이때 쓴 약 120통의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라틴어 성경 ‘불가타’(Vulgata)

후에 안티오키아로 가 그곳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성인은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성 그레고리 신학자와 성 그레고리 니사의 주교 등과 함께 교제를 나누었다. 381년 로마로 간 성인은 성경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교황 다마수스 1세(366-384)의 비서가 되어 그를 도왔다. 그러나 자신을 시기하는 이들의 중상(中傷, 근거없이 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을 당한 성인은 다시금 동생, 친구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성지(Holy Land)와 니트리아 사막의 수도원을 방문한다. 그리고는 386년에 베들레헴 가까이 있는 한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 엄격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가 바로 성인의 창조적인 능력이 꽃피우게 된 시기이다. 성인은 우리 교회에 교의적이고 논증적인 작품들과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작품들, 성경에 대한 주석서들 그리고 여러 역사서들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품은 바로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옮긴 ‘불가타’(Vulgata)일 것이다. 이 성경은 서방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성인은 자신이 사랑했던 도시 로마가 410년에 고트족(Goths)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또한 411년에는 야만적인 아랍 유목민들이 베들레헴을 침략하여 성인에게 시련을 안겨주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직 성인의 수도 공동체만이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 420년 성인은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성 마누일, 사벨, 이스마일 페르시아인 순교자들(6월 17일)

 

페르시아인 세 형제

한 형제로 태어난 이 세 성인은 페르시아의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이교도였으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세 아들이 세례를 받게 한 뒤 그리스도에 대한 굳센 믿음을 갖고 자라도록 하였다. 그후 성인이 된 세 형제는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황제 알라문다르(Alamundar)를 대표하는 사신(使臣)으로서 배교자 율리아노스(Julian the Apostate, 361-363) 황제와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 파견되었다. 황제는 세 형제를 정중히 맞아들이면서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교의 희생제사에 참석하는 것을 세 형제가 거부하자 황제는 노하였다. 그는 조약을 무효화하고 외국에서 온 사절들을 일반 죄수들처럼 감금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황제는 만일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그들이 비웃는다면 양측(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는 그 어떤 평화나 협정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때 세 성인은 자신들이 국사(國事)에 관한 황제의 사신으로서 파견되었을 뿐 그 어떤 ‘신들’(gods)에 관해 논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성인들의 믿음이 너무도 확고함을 알게 된 황제는 그들을 고문하도록 명령하였다. 황제의 신하들은 세 형제에게 매질을 가한 다음 그들의 손과 발을 나무에 못박았다. 나중에는 쇠로 된 긴 못을 성인들의 머리에 박고, 손가락과 발가락 밑에는 날카로운 가시 조각을 쐐기처럼 박았다. 그런데 이렇게 고문이 가해지는 동안 세 성인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였다.

 

성인들의 순교와 잇따른 기적들

마침내 황제는 성인들의 목을 잘랐고, 그 시신을 불사르도록 명령하였다. 그 순간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 곧 땅이 갈라지면서 성인들의 시신이 그 깊은 땅 속으로 사라졌다. 그후 이틀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기도하자 다시 땅 속으로부터 성인들의 시신이 올라왔으며, 그로부터 감미로운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런 기적을 지켜본 많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362년 그리스도인들은 세 성인을 정중히 장례지냈고, 성인들의 성해로부터는 기적이 계속 일어났다. 자신의 사신들이 살해된 것과 율리아노스 황제가 대군(大軍)을 이끌고 쳐들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 황제는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여 접경지역으로 나갔다. 페르시아인들은 이 대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배교자 율리아노스 황제는 대순교자 성 메르쿠리오스(11월 24일)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30여년이 흐른 뒤 경건한 황제 테오도시오스 대제(大帝, 379-395)는 세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성당을 콘스탄티노플에 세웠다.

 

 

성 율리아노스 순교자(6월 21일)

 

디오클레티안의 박해

성인께서는 3세기말경 소아시아 동남쪽의 낄리끼아(Cilicia) 지역에 있는 아나자르부스(Anazarbus: 성 사도 바울로가 태어난 타르소[Tarsus] 위쪽에 있는 도시)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이교신앙을 가진 원로원 의원이었으나 어머니 아스클레피오도라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어서 어머니로부터 충실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성인께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의 박해기에 그 지역의 잔인한 통치자 마르시안(Marcian)에게 고발당한 성인께서는 우상에게 희생제사를 바치라는 명령을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매질과 심한 고문(拷問)을 견뎌야만 하였다. 이때 성인께서는 ‘(고문 등) 어떤 것도 어린 시절 나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법을 부정하도록 만들지 못할 것이며, 설사 나를 불태운다 해도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만들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내 안에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아들에게 용기를 준 어머니

이후 성인께서는 당신의 고향인 아나자르부스로 이송되어 그곳의 재판정에 끌려나가셨으며, 그곳에서도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포도주를 마시도록 강요당하셨으나 흔들림이 없는 태도로 이를 거절하셨다. 다시 아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의 신전으로 유명한 이시코스(Issikos) 만(灣)의 아이가이(Aigai: 지금의 아야스[Ayas])라는 도시로 끌려간 성인께서는 화형(火刑)에 처해질 것이라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받았다. 줄곧 아들을 따라온 성인의 어머니는 삼일 간의 말미를 얻어 감옥에 갇힌 아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 데, 아들이 생명을 구하도록 설득하기보다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함으로써 용감하게 순교하도록 격려하였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 영혼

어머니를 통해 성인의 마음을 바꾸려던 계획이 실패로 끝났음을 알아챈 통치자는 곧 성인을 모래가 가득 담긴 자루 속에 집어넣도록 한 뒤, 그 속에 뱀, 전갈 등 온갖 종류의 독충(毒蟲)들을 함께 넣어 바다에 던지도록 명령하였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깊은 바다 속에 던져졌으나 성인의 영혼은 높고 높은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나중에 성인의 성해가 발견되어 안티오키아 근처로 옮겨졌으며,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이 그곳에 세워져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경배하였는 데, 이는 성인으로 말미암아 특히 악마에 사로잡힌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성당은 537년 페르시아의 침입때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6월 24일)

 

뒤늦게 낳은 아기

성모님의 사촌인 엘리사벹은 나이가 들도록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나 하느님의 은혜로 마침내 아들 요한을 낳게 되었다.(루가 1:57) 모든 이들의 예상과 달리 불임(不姙)인 여성에게서 태어난 성인께서는 메시아(Messiah)가 오셔서 인간본성의 법을 새롭게 하여 신화(神化, deification)의 길을 여실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영적인 개화기(開花期)를 열었다. 예언자들 중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성인을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부르셨고,(마태오 11:11) 성인께서는 동시에 사도들 중 맨 처음 사도가 되셨다. 자라면서 영적으로 강해진 성인에게는 언제나 주님의 손길이 머물렀다.

 

사막에서 사시다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가족의 품을 떠나 사막으로 가셔서 홀로 사셨으며, 낙타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생활하셨다. 성인께서는 모든 격정과 인간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불안과 슬픔을 모른 채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사셨다. 모세와 엘리야 같은 예언자들도 사막에서 사셨지만 성인께서는 이들 예언자들보다도 더 뛰어난 분으로서 이처럼 사막으로 물러나 사는 삶을 통해 타락한 인간본성이 새로워질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것은 바로 육체를 지녔으나 순결과 금욕 그리고 하느님을 관상(觀想)하는 생활을 통해 사람도 천사들처럼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며, 이것을 위해 성인께서는 선구자로 부름을 받으신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가르침

성인께서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한 지 15년이 되는 때까지(기원후 28년 또는 29년) 이같은 천사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이윽고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과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분의 길을 예비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비록 성인의 모든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과 가르침들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채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먼저 세상의 쾌락을 끊어버리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잠시 뒤로(조용한 곳으로) 물러나, 기도함으로써 구세주께서 우리들 안으로 오실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베드로 무롬의 수도자(6월 25일)

 

농사꾼의 딸과 결혼한 황태자

황태자인 성 베드로(수도명은 다비드) 성인과 황태자비인 성 페브로니아(수도명은 에프로시니) 성인은 무롬(Murom)의 기적성인들이다. 베드로 황태자는 무롬의 군주인 유리 블라디미로비치의 둘째 아들이었다. 베드로 성인은 1203년 무롬의 군주가 되었다. 군주가 되기 여러해 전, 성인은 나병(癩病, leprosy: 문둥병 또는 한센씨병이라고도 함.)에 걸렸고, 아무도 그 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성인에게 한 환상(vision)이 보였고, 그것을 통해 성인은 한 양봉업자(養蜂業者, bee-keeper: 벌을 쳐서 꿀을 얻는 일을 하는 사람)의 딸이 자신을 낫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여인이 바로 리아잔(Ryazan) 지방의 라스코바(Laskova)라는 마을에 사는 한 소농(小農)의 딸인 경건한 처녀 페브로니아였다.

페브로니아를 본 베드로 황태자는 성녀의 경건함과 지혜, 덕스러움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병이 다 나은 다음 그와 결혼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페브로니아 성인은 황태자의 병을 고치고 나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 사랑스러운 두 부부는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도 서로 변함없이 사랑하였다.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지켜주는 부부성인

그런데 거만하기 그지없는 귀족들은 평범한 집안 출신인 황태자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황태자더러 페브로니아와 헤어지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이 요구를 거절하였고, 귀족들은 이에 맞서 두 부부를 추방하였다. 베드로와 페브로니아 성인은 고향 도시를 떠나 작은 배를 탄 채 오카(Oka)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페브로니아 성인은 베드로 성인을 계속해서 위로하였다. 오래지 않아 하느님의 진노가 무롬의 도시에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드로 성인더러 페브로니아 성인과 함께 어서 돌아오라고 간청하였다.

두 부부 성인은 그들의 경건성과 자선행위로 유명하였다. 두 성인은 다비드와 에프로시니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도자가 된 뒤, 1228년 6월 25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안식하였다. 성인들의 시신은 함께 매장되었다.

베드로 성인과 페브로니아 성인은 그리스도교적인 결혼의 아름다운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자신들의 기도와 중보로써 새로이 결혼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신다. 무롬의 수도자 베드로 성인의 성해가 가평의 구세주 변모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성 삼손 수도자(6월 27일)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나다

성인은 부유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로마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훌륭한 교육을 받은 성인께서는 의학을 공부한 뒤 병든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성인께서는 물려받은 유산들을 자선사업에 내놓고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준 다음 자신은 사막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성인께서는 이런 결심을 한 채 로마에서 동방(the East)쪽으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인을 다른 길, 곧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길로 들어서게 하셨고, 그리하여 성인께서는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의 한 작은 집에 머무르면서 성인께서는 집이 없는 떠돌이들과 가난한 이들, 병자들을 받아들여 돌보기 시작했다. 주님께서는 성인의 이런 노력을 축복하셔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셨다. 성인께서는 잘 숙련된 의사로서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분으로서 병자들을 치료하였다. 이후 성인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성인의 이런 아름다운 덕행(德行)에 관해 전해들은 총대주교는 성인을 거룩한 사제직에 임명하였다.

 

황제의 병을 고침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유스티니아노스 황제(527-565)는 자신이 오직 삼손 성인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손 성인이 자신의 손을 황제의 아픈 부위에 대고 기도하자 황제의 병이 나았다. 너무도 감사한 마음에 황제는 금과 은 등의 값진 보물들로 보답하려고 하였으나 성인은 이런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황제는 기꺼이 성인의 요구대로 행하였다.

 

‘남을 호의로써 맞이하는 분’

그후 성인께서는 남은 생(生)을 이웃을 위해 모두 헌신하셨다. 고령(高齡)이 되도록 장수(長壽)한 성인은 짧게 병을 앓은 뒤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인은 성 모키오스(St. Mocius, 5월 11일; 3세기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기간에 순교한 마케도니아 지역의 사제. 그를 기념하여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성당을 세움)순교사제를 기념하는 성당에 매장되었고, 성인의 무덤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교회는 성인에게 ‘외국인, 이방인을 호의로써 맞이한 분’(ο Ξενοδόχος 크세노도호스, the Hospitable; 그리스어에서 ξενος ‘외국인’, ‘이방인’이라는 뜻이고, δόχος ‘받아들이다, 영접하다’라는 뜻의 동사 δέχομαι에서 온 말임)이라는 칭호를 붙여 기념한다.

 

 

성 끼로스와 요한 자선치료자(1월 31일, 이장[移葬] 6월 28일)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알렉산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서 4세기초에 순교하신 두 성인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르코 성당에 숨겼는데, 이는 이교도들이 성인의 시신을 더럽혀 욕되게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흘러 테오도시오스 황제(Theodosius the Younger, 408-450)가 통치하던 때인 412년경, 당시 삼촌인 테오필로스 총대주교를 이어 막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직을 승계한 끼릴로스 성인(6월 9일)께서는 우상숭배적인 제의(祭儀)의 잔재(殘滓)들과 싸우며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는데, 특별히 카노푸스(Canopus) 근처의 메누티스(Menouthis: 오늘날의 아부키르[Abukir] 근방으로서 알렉산드리아 동쪽 2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이시스(Isis[고대 이집트의 여신] the healer) 숭배의식과 싸우고 계셨다.

 

천사가 나타남

그런데 어느날 한 천사가 끼릴로스 성인에게 나타나 끼로스와 요한 성인들의 성해(聖骸)를 거룩한 복음서 저자들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 성당은 이시스 여신의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끼릴로스 성인께서는 모든 성직자와 신도들을 불러모아 천사가 전한 말을 들려주고는 함께 성 마르코 성당으로 갔다. 알렉산드리아의 거의 모든 시민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성인들의 무덤을 열자 오랫동안 잊혀졌던 성인들의 성해는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 성령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인들의 성해를 마차에 싣고 촛불을 밝히고는, 향을 치면서 메누티스로 향해가는 내내 성가를 불렀다. 이때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이 나았고, 장님은 보게 되고 절름발이들은 걷게 되었다.

 

치유와 기적들

성인들의 성해가 복음서 저자들의 성당에 다다르자 이시스 신전에 숨어 지내던 악마가 질겁을 하며 도망쳤고, 이교의 사제들은 끼릴로스 성인의 발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는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오래지 않아 성인들의 성해가 모셔진 성당은 제국의 전역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로 붐비기 시작했다. 순례자들을 위해 많은 숙소들이 지어졌으며, 병자들은 성인들의 무덤에 입을 맞추고 성당의 등잔에 있는 기름을 바르거나 성당 바깥의 샘에서 물을 길어 마시면서 온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두 자선 성인들의 중보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소프로니오스 예루살렘의 총대주교(3월 11일) 또한 당신의 눈병을 성인들의 중보로 고친 뒤 성인들로 말미암은 기적들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