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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8월)

ttoza 2010. 2. 12. 21:29

마카베오의 7인 순교자와 그들의 어머니 솔로모니(8월 1일)

 

이교예식의 강요

일곱명의 마카베오 순교자들(아빔, 안토니오스, 구리아스, 엘리아자르, 에브세보노스, 알리모스, 마르켈로스)과 그들의 어머니 솔로모니 그리고 이들의 선생님인 엘르아잘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인 BC 166년 시리아의 불경한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에 수난을 겪었다. 헬라적인 제의(祭儀 cult)에 빠져있던 이 왕은 이교의 관습들을 예루살렘과 온 유다에 도입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을 훼손(毁損)시키고는 그곳에 제우스(Zeus)의 신상을 두어 유태인들로 하여금 예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유태인들이 참된 하느님에게서 떠났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들(곧, 유태인)이 타락하는 것을 슬퍼하면서 구세주께서 오실 것을 굳건히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구십세나 되는 원로이며 서기관이고 교사였던 엘르아잘은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고문을 당한 뒤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엘르아잘의 제자인 일곱 마카베오 형제들과 그들의 어머니 솔로모니 또한 안티오키아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은 참된 하느님을 믿는다고 두려움없이 말하고는 이교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일곱 형제중 가장 나이가 많은 젊은이가 대표로 대답한 다음 형제들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뒤 다른 다섯 형제들도 차례로 고문을 당하였다. 마지막으로 일곱째인 막내가 남게 되자 안티오쿠스 왕은 그 어머니 솔로모니로 하여금 어린 소년을 설득하여 이교신에게 제물을 바치게 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참된 하느님을 고백하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유다 마카베오의 항전

결국 어린 막내마저 형들처럼 고문을 당하였다. 일곱 아들들이 모두 순교한 뒤 어머니 솔로모니는 자식들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한 다음 안식하였다. 의로운 일곱 마카베오 형제들의 순교자적인 죽음에 자극받아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eus)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한 반란을 이끌었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뒤 우상들을 치우고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淨化)하였다. (이 사건들에 관해서는 마카베오 하권 [특별히 제 7장]에 기록되어 있다.)

 

 

성 스테파노스 대보제 순교자(12월 27일, 이장 8월 2일)

 

순교자들

첫 순교자인 성인께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신 뒤, 바울로 사도의 율법선생인 가말리엘(Gamaliel, 그는 후에 사도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길가에 버려진 스테파노스 보제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루살렘 근처에 매장하였다. 40일의 애도기간이 지난 뒤,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었던 니고데모(Nicodemos, 요한 3장 2절 참조) 또한 예루살렘을 휩쓴 박해의 광풍을 간신히 벗어나 가말리엘이 사는 마을에 몸을 숨기려고 왔다. 그러나 이미 심각한 상처를 입었던 니고데모는 몇 일 후에 안식하였고, 스테파노스 보제의 무덤 옆에 묻혔다. 가말리엘과 그의 스무살 된 아들 하비브(Habib, 그도 또한 사도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또한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사제 루시안

그 후로 400년 가까이 매우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들의 무덤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카파르가말라(Caphargamala)라는 마을에 사는 한 경건한 사제 루시안(Lucian)에게 스테파노스 성인께서 세 번이나 나타나셨다. 성인께서는 아마포(亞麻布, linen)로 된 예복을 입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성인의 이름이 붉은 색과 금색 글자로 수놓아져 있었다. 성인의 머리는 길고 흰 머리칼로 덮여 있었고, 금으로 된 신을 신은 채 손에는 금지팡이를 든 성인께서 이름을 부르며 지팡이로 가볍게 루시안을 토닥거리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요한 주교에게 말해서 당신 자신의 성해를 찾도록 하여 하느님께서 그것을 통해 기적을 베푸실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 루시안 사제는 곧바로 요한 주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날 밤에 서둘러 성인께서 알려주신 곳을 파기 시작하였다.

 

향기와 기적을 일으키는 성해

오래지 않아 한 돌판이 나왔는 데, 거기에는 히브리말로 스테파노스 보제와 니고데모, 하비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매우 달콤한 향내가 그 주위에 풍겨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일흔 세 사람이나 병고침을 받았다. 요한 주교 또한 성해(聖骸)가 있는 곳으로 가 그것이 성인들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415년에 예루살렘의 한 성당으로 성해를 이장하였다. 그때 많은 비가 내려서 팔레스틴을 괴롭히던 오랜 가뭄을 멈추게 하였다. 그뒤 성인의 성해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도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성인의 관이 담긴 마차를 끌던 노새(mule)들이 콘스탄티아니스(Constantianes)라는 곳에서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8월 2일에 성인의 성해는 그곳에 안장되었으며, 그곳에는 첫 순교자인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다.

 

 

에페소의 7인 순교자들(8월 4일)

 

그리스도를 믿는 일곱 친구들

소아시아 지역 에페소의 일곱 젊은이들(막시밀리안, 람블리쿠스, 마르티니안, 요한, 디오니시오스, 콘스탄티누스, 안토니누스)은 3세기(기원후 200년대)에 살았었다. 성 막시밀리안은 아버지가 에페소 도시의 행정관이었으며, 다른 여섯 젊은이들도 그 도시의 유력한 집안 자제들이었다. 일곱 청년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친구사이였으며, 모두 함께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데시우스(Decius, 249-251) 황제가 에페소에 와서 모든 시민들더러 이교의 신들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고문과 죽음만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이어졌다.

 

황제 앞에 서서

이때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이 고발함으로써 일곱 젊은이는 황제 앞에 불려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용감히 증언하였다. 곧바로 그들의 군복을 꾸민 장식들과 허리띠가 제거되었다. 그러고 나서 황제는 자신이 전쟁에 나갔다 돌아올 동안 그 젊은이들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라고 떠났다. 일곱 청년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 산속의 한 동굴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의 순간을 기다리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전쟁에서 돌아온 황제는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이 들어가 있는 동굴 입구를 돌들로 막아버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럼으로써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게 하려는 것이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증명하다

이때 두 명의 고위관리가 동굴 입구에 왔다. 이들은 익명(匿名)의(secret)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성인들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자 했던 이들은 성인들의 이름과 그들이 겪은 고난들을 적은 금속판 두 개를 작은 함(函)에 넣어 잘 봉한 다음 돌 틈에 끼워 넣었다. 그뒤 주님께서는 이 청년들을 기적적으로 200년 동안 잠들게 하셨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the Younger, 408-450)의 통치기에 성인들은 긴 잠에서 깨어났다. 소식을 들은 에페소의 주교는 동굴로 가 작은 함을 발견하고, 그 안에 적힌 내용들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성인들을 만났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기적을 베푸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함께 기뻐하였다. 황제도 에페소에 와 성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성인들은 모든 이들이 보는 가운데 지면에 머리를 대고 다시 누워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이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보여주신 신비로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논나 성인(8월 5일)

 

남편을 위한 아내의 기도

4세기에 사셨던 성 그레고리 신학자(1월 25일)의 어머니이신 성인께서는 아버지 필로따또스와 어머니 고르고니아 사이에서 태어나셨으며, 부모님들은 성인을 경건한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양육하였다. 장성(長成)한 뒤 성인께서는 가빠도끼아의 아리안주스와 나지안조스 지역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부유한 지주(地主) 그레고리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남편인 그레고리는 이교도로서, 지고(至高)의 신을 섬기고 유태인의 의식을 지키는 한편 불(火)을 숭배하기도 하는 한 소종파(sect)의 추종자였다. 이 때문에 논나 성인은 자신의 남편이 그리스도를 믿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기도하였다. 이런 아내의 노력 속에 어느 날 남편은 자신이 꿈속에서 다윗의 시편을 노래하고 있는 환상(vision)을 보게 되었다. 이후 니케아에서 열린 제 1차 세계공의회에 참석한 남편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세례를 받고 사제가 된 다음 다시 나지안조스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교회를 위한 봉사

이와 동시에 논나 성인은 봉사자(deaconness)가 되었다. 자신의 자녀들을 기르던 것과 똑같은 열정으로 이제 성인께서는 자선사업에 자신을 헌신하셨다. 이런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에 대해 그레고리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진정으로 숭고한 것과 경건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으며,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계셨다. 그리고 자신의 물질을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 특히 곤궁(困窮)하게 된 일가친척들과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가장 믿을 만한 부(富)라고 여겼다.’

 

이상적인 아내이며 어머니가 되시다

어떤 여성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에서 뛰어난 반면, 다른 여성은 경건한 삶으로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논나 성인은 겸비(兼備)하기가 쉽지 않은 이 두 가지 덕을 모두 갖추었다. 성인께서는 검약과 경건성에서 각기 최고의 경지에 올랐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이 두 가지를 결합하였다. 성인께서는 한 가지 의무 때문에 다른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각각의 것이 서로를 보완(補完)하도록 하였다. 386년 어린 아들 케사리오스를 먼저 보내고 그 다음해에는 딸마저 잃은 어머니로서 성인의 노년은 슬픔이 많았다. 그러나 성인은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순종하며 견뎠다. 374년초 일백살의 원로인 남편(St. Gregory the Elder, 1월 1일)이 먼저 안식한 뒤, 성인 또한 같은 해 8월 5일 안식하셨다.

 

 

성 맛티아 사도(8월 9일)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맛티아 사도께서는 베들레헴의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고 전해진다. 사도께서는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때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수난을 당하신 때까지 줄곧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가운데 한 분이셨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Upper Room)에 머물며 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성령께서 내려오시기를 기다렸다. 그곳에는 약 1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곧 성모님과 (가리옷 사람 유다를 뺀) 열 한 명의 사도들, 주님의 형제(사촌)들, 그리고 맨 처음부터 주님을 따르던 여러 제자들과 주님의 무덤까지 따라갔던 여성들이었다.

 

부활의 증인

그때 베드로 사도가 무리 한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기를 가리옷 사람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죽음으로써 이제 자신들의 무리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으니, 그를 대신하는 다른 사도를 뽑아 그로 하여금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축복받은 역할을 하도록 함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바르사빠라고 하는 요셉과 맛티아가 추천되었다. 이 두 사람 모두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고 나서,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렸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뽑으셨는지 알려 주십시오. 유다는 사도직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그 직분을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사도행전 1:24-25)

 

사도의 순교

그리고 나서 제비를 뽑자 맛티아 사도가 뽑혔으며, 그는 완전(perfection)을 상징하는 열 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나서 맛티아 사도는 먼저 팔레스틴을 다니며 회개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아 인간적인 모든 욕정들을 정복하라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후 사도께서는 저 멀리 에티오피아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순교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성 수산나 순교자(8월 11일)

 

경건한 사제의 가족

성인은 사제인 가비니우스(Gavinius)의 딸이고, 경건한 로마의 주교 카이우스(Caius 283-296)의 조카였다. 성인은 엄격한 그리스도교적 경건함 속에서 자랐으며, 일찍이 젊은 시절에 하느님께 자신을 바쳤다. 성인의 가족은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의 친척이었고, 그래서 황제는 성인이 매우 덕스럽고 아름다운 처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인을 공동의 통치자인 막시미안 헤르쿨레스 황제(284-305)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한 다음,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자신의 친척인 고관(高官) 클라우디우스를 가비니우스 사제에게 보냈고 이어서 자신의 동생 막시무스도 보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그 (가비니우스 사제의) 경건한 가족과 대화를 나눈 뒤 클라우디우스의 아내 프레페디그나와 그녀의 두 아들인 알렉산더, 키디우스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자기 친척의 모든 가족과 형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을 알게 된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그들을 멀리 추방해 버렸다.

 

천사의 도움을 받다

그리고 로마에서 멀지 않은 오스티아에서 곧바로 그들(추방된 이들)을 화형에 처한 다음, 그 재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런 다음 황제는 성녀 수산나를 로마의 궁으로 데리고 와서 황후로 하여금 성녀가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게 했다. 그런데 은밀한(비밀의, 숨겨진) 그리스도인이었던 황후는 성녀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순결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황제에게는 성녀가 이교도와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공동의 통치자인 막시미안에게 성녀를 범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때 천사가 성녀를 보호하고 지켜주었다.

황제는 다시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성녀를 압박하였다. 그러자 성녀는 ‘나는 내 자신을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제물로 바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에 화가 난 황제는 성녀의 목을 잘라버렸다. 그뒤 황후는 아무도 모르게 성녀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성녀가 순교한 방은 나중에 카이우스 주교에 의해 성당으로 축성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성 카이우스 주교가 296년에 순교한 것처럼 성녀의 아버지인 가비니우스 사제도 순교하였다.

 

 

성 포티오스와 아니끼도스 순교자(8월 12일)

 

로마군의 장교

순교자 아니끼도스와 포티오스(아니끼도스 성인의 조카)는 소아시아의 니코미디아(할키돈 남쪽의 도시) 태생이었다. 아니끼도스 성인께서는 군대의 장교였는데, 당시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284-305)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기 위해 도시의 광장 한 가운데 처형도구를 세운 것에 대해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황제는 성인을 붙잡아 고문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야수(野獸)들에게 잡아먹혀 죽도록 판결하였다. 그러나 형을 집행하는 이들이 풀어놓은 사자들은 양처럼 순해지더니 성인의 발치께로 다가와 꼬리를 내리고는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종들을 보호하신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 그곳에 세워져 있던 헤라클레스 신전은 무너지고 많은 이교도들이 무너진 성벽 밑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런 혼란 속에서 한 집행관이 칼을 뽑아들어 성인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땅에 넘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시 집행관들은 성인을 큰 바퀴에 매달아 깔려죽게 한 다음 불로 태워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퀴는 멈춰 서고 불은 이내 꺼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성인을 불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양철통 속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나 양철통은 곧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주님께서는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참된 하느님을 알도록 하시려고 이처럼 성인을 보호해 주셨다.

 

머리카락 한 올도 그을리지 않는

이 때 포티오스 성인도 아니끼도스 성인에게 경의를 표한 다음, 황제를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오, 우상을 숭배하는 분이시여! 당신의 신들은 아무런 힘도 없군요.’ 이 순간 한 집행관이 포티오스 성인을 내리치려고 자신의 칼을 뽑아들자 그 칼이 도리어 그 집행관에게로 돌아서 그를 찔렀다. 사흘 뒤, 성인들이 조금도 변함없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자 황제는 거대한 용광로에 불을 지피게 하였다. 그런데 성인들의 굳센 믿음과 용기에 고무(鼓舞)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나서서 ‘우리들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나서 성인들과 함께 그들 모두 순교하였다. 그런데 성인들의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불에 그을리지 않았다. 305년에 일어난 이 기적을 보고 많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성 막시모스 모스크바의 증거자(8월 13일)

 

구원의 좁은 문

성인은 일명(一名)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the Fool for Christ)라고도 불리어진다. 성인의 부모나 태어난 때, 장소 등은 알려진 바가 없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바보의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길 중 가장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길을 걸었다. 성인께서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옷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지내면서 더위와 추위를 견뎠다.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겨울은 혹독하다. 그러나 낙원(樂園, Paradise)은 감미(甘味)롭다’

 

고난받는 백성들과 함께

성인께서는 러시아 국민들이 힘들었던 시기에 사셨다. 타타르족(Tatar)의 침입, 가뭄, 전염병 등이 고질적으로 되풀이되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은 쇠락(衰落)해갔다. 성인께서는 이런 불행한 이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너희 기진맥진(氣盡脈盡)한 이들이여, 울지 말라. 그러나 너희 안락(安樂)한 이들이여, 울라. 관용(寬容)을, 최소한의 관용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인간적인(human)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내하며 견뎌나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또 다른 모습의 예언자

또한 성인께서는 단지 위로의 말만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성인의 성난 경고와 고발은 그 당시의 힘있는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축복받은 성인께서는 종종 부자와 이름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집 안 한 구석에는 성화들을 잘 모셔두고 있다. 그러나 양심은 다 팔아먹고 없다. 모든 사람들이 성호(聖號)를 긋지만 누구나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잘못들을 다 보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속이지 않으시지만 사람들도 그분을 속일 수는 없다.' 성인께서는 1434년 11월 11일에 안식하셔서 성 보리스와 글렙 성당에 안장되셨다. 이로부터 성인의 성해에서는 기적적인 치유(治癒)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 디오미디스 순교자(8월 16일)

 

영혼의 병을 고치는 의사

성인께서는 3세기 말경 소아시아 동남쪽 길리기아(Cilicia) 지역의 타르소(Tarsus)라는 도시에 사는 한 이름난 그리스도인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의학을 공부하고 난 뒤, 성인께서는 그 지역 사람들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들 영혼의 병까지도 고쳐주셨다.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통치기(300년경)에 비디니아(Bithynia)의 니케아에 사셨던 성인께서는 황제가 가까운 니코미디아(Nicomedia)에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하셨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 성인께서는 감옥의 한 간수를 사귀었고, 그의 도움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순교자들과 신앙고백자(confessor)들을 찾아 용기를 북돋워주는 한편,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끝까지 인내하도록 격려하셨다.

 

성인의 순교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서, 성인께서는 곧 붙잡히셨으며 사슬에 묶인 채 니코미디아로 압송(押送)되었다. 끌려가는 도중 성인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 도시에 가까이 왔을 때, 성인께서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군인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고 순교의 왕관을 받았다. 성인을 호송하던 군인들이 성인이 계신 곳으로 가 보니 성인께서는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처음에 당황하여 머뭇거리던 군인들은 황제에게 가져갈 생각으로 이내 칼로 성인의 목을 쳐 잘랐다. 그러자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멀고 말았다.

 

기적을 경험한 군인들

기다시피 하며 간신히 도시를 찾아 안으로 들어간 군인들은 성인의 목을 황제에게 가져갔다. 그것을 보고 크게 노한 황제는 성인의 나머지 몸뚱아리도 가져오라고 군인들에게 소리쳤다.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간 군인들이 성인의 목을 몸뚱아리에 붙여 놓자마자 그들의 멀었던 눈들이 회복되어 보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신앙의 빛을 받은 군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한 채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많은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사흘 뒤, 전에 성인을 통하여 병을 치유한 페토로니아라는 귀족 여성이 성인의 성해를 (돈을 주고) 사서 비싼 아마포(亞麻布, linen)로 싼 다음, 예(禮)를 갖추어 장례지냈다.

 

 

성 안드레아스 군인순교자(8월 19일)

 

공정한 사령관

성인께서는 막시미아누스(Maximian, 284-305)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로마군의 지휘관으로 복무하셨다. 사람들은 성인의 용맹과 무적의 정신 그리고 공정함에 이끌려 성인을 존경하며 따랐다. 수많은 페르시아군들이 시리아 영토로 쳐들어 왔을 때, 그 지역의 통치자 안티오쿠스는 로마군의 지휘권을 성인에게 맡기면서 ‘스트라틸라티스’(Stratelates, '지휘관, 사령관‘이라는 뜻)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성인께서는 소수의 용맹한 군인들로 한 분대(分隊)를 선발한 다음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선으로 향하였다.

 

참되고 전능하신 분

당시 군인들은 이교도였으며, 성인 또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전투에 임하기전 성인께서는 군인들에게 이교의 신들은 참된 하느님이 아닌 그저 악마일 뿐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능한 분이시므로,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도울 수 있으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성인과 군인들은 전투에 나가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시기하는 사람들이 성인은 그리스도인이며 자신이 거느리는 군인들도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다고 안티오쿠스에게 고발하였다. 성인은 즉시 법정으로 불려 나갔으며, 그곳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히 선언하였다.

 

치유의 샘물

성인은 고문을 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안티오쿠스의 보고를 받은 황제는 군인들이 성인을 매우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에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인과 그 부하들을 놓아주도록 명령하였다. 이제 풀려난 성인께서는 동료 군인들과 함께 타르소(Tarsus)로 가 베드로 주교와 베뢰아의 노노스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안티오쿠스는 비밀리에 킬리키아 지역의 통치자인 셀류커스에게 사람을 보내 성인과 그 동료 군인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순교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아챈 성인께서는 평소 형제요 자녀들이라고 부르던 당신의 군인들더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피가 흐를 그 장소에서 (병을) 치유하는 샘물이 솟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그런 뒤 성인과 2593명의 군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하느님께 바치고 순교하였다. 성인의 피가 흐른 그 곳에서는 한 샘물이 솟구쳤으며,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은 모두 병이 깨끗이 나았다.

 

 

성 사무엘 예언자(8월 20일)

 

하느님께 빌어서 얻은 아기

사무엘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적어도 1146년 이전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열다섯 째이며 마지막인 판관(判官 Judge)이었다. 그는 레위(Levi) 지파의 후손이었고, 에브라임(Ephraim) 산악지대에 살며 라마다임-조핌 출신인 엘카나의 아들이었다. 예언자는 그의 어머니 한나가 하느님께 간절히 탄원(歎願)하여 얻은 아들이었다.(따라서 그는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하느님께 빌어서 얻었다’는 뜻이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께 봉헌되었다.(사무엘상 1:11) 아이가 세 살이 되자 어머니는 실로(Shiloh)에 있는 성전으로 가서 대사제 엘리(Eli)에게 아기를 맡겼다.

 

정의로운 재판관

아이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라났으며, 열두 살이 되자 하느님께서 대사제 엘리의 집안을 벌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엘리는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지르는 불경건한 행위들을 꾸짖어 고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레셋인들(Philistines)이 이스라엘을 쳐서 엘리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을 죽이고 계약궤(Ark of Covenant)를 빼앗은 날, 대사제 엘리마저 죽으므로써 사무엘 예언자가 일찍이 보았던 계시가 그대로 실현되었다. 엘리가 죽자 사무엘이 이스라엘 민족의 판관이 되었다. 하느님의 궤는 다시 되돌아 왔고, 빼앗겼던 도시들도 되찾았다. 나이가 많아진 사무엘 예언자는 자신의 두 아들(요엘과 아비야)을 판관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에 사로잡혀 아버지 사무엘처럼 올바르고 정의로운 판단을 하지 못하였다.(사무엘상 8:1-3)

 

충성스럽고 흠없는 예언자

이제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무엘 예언자에게 자신들의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세운 사울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불순종하자, 예언자 사무엘은 다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할 때, 다윗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그를 구해낸다. 사무엘 예언자는 아주 나이가 많이 들도록 장수하다가 죽었다. 그의 생애는 구약성경(사무엘상/열왕기상; 시락[집회서] 46:13-20)에 기록되어 있다.

 

 

성 꼬즈마 에똘리아의 사제순교자(8월 24일)

 

오토만 제국

준사도이며 새로운 순교자인 꼬즈마 성인께서는 그리스가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18세기초 에똘리아에서 태어나셨다. 성인께서는 처음에 아나니아 보제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셨고, 후에는 아토스산의 바토페디 수도원에서 이름난 교사들에게 배우셨다. 그후 필로테우 수도원에서 수도서원을 한 성인께서는 사제서품을 받기에 이르렀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신앙과 구원의 길로 이끌려는 열정에 불타던 성인께서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수사학(修辭學 rhetoric)을 배운 다음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당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마을들과 다뉴브(Danube) 지역, 그리고 데살로니끼, 마케도니아, 에똘리아, 케팔로니아 등 곳곳을 다니며 설교하셨다.

 

성령이 가득한 설교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찬 성인의 설교는 단순하고, 조용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듣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경건성이 거의 사라져버린 알바니아의 외딴 지역에서 설교하심으로써 난폭하며 상스러운 분위기에 젖어 사는 그곳 사람들을 진정한 회개와 새로운 삶으로 이끄셨다. 그후 성인의 지도로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들이 도시와 마을들에 세워졌다. 부유한 사람들은 성당 건물을 보수하고 성경책과 묵주(기도매듭, 꼼보스끼니), 십자가 등을 살 수 있도록 아낌없이 돈을 바쳤으며, 특별히 어린이들이 합당한 방식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세례조(洗禮槽 baptismal font)를 구입하는 일을 도왔다.

 

새로운 사제순교자

설교를 듣고는 싶으나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인께서는 사십, 오십 명의 사제들과 함께 들판과 도시의 광장 등에서 철야예배를 인도하기도 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성인의 설교를 들으며 크나큰 깨달음들을 얻었다. 사람들은 성인께서 설교하신 곳마다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세워 성인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애썼다. 1779년 65세가 된 성인께서는 터키인들에게 붙잡혀 목이 졸린 채 순교하셨다. 성인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으며, 사흘 뒤 한 사제에 의해 발견되어 합당하게 매장되었다. 1961년 세계총대주교청은 성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성 디도스 70인 사도(8월 25일)

 

헬라철학에 몰두한 청년

성인께서는 크레테 섬의 명망이 높은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어린 시절 성인께서는 헬라의 철학과 고대의 시인들에 대해 공부하셨다. 이처럼 학문에 몰두한 나머지 성인께서는 대부분의 이교도들처럼 나쁜 습관이나 욕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덕스러운 삶을 가꾸어 나가셨다. 스무 살쯤 되어 성인께서 한 꿈을 꾸게 되었는 데, 그 꿈속에서 헬라의 지혜대신에 능히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으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 꿈 뒤에 성인께서는 조금씩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처음으로 이사야 예언자의 글(특히 47장)을 읽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를 만나다

드디어 팔레스틴에서 나타난 위대한 예언자(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한 기적들에 관한 소식이 크레테에 전해졌을 때, 섬의 통치자(성인의 삼촌)는 성인을 팔레스틴으로 보내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믿게 된 성인께서는 주님이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십자가 처형,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지켜보았다. 오순절에는 성령을 가득히 받은 열두 사도들이 크레테말로 말하는 것도 듣게 되었다.(사도행전 2: 11) 성 사도 바울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성인께서는 사도의 가장 가까운 제자가 되어 선교여행에 함께 나선다. 나중에 바울로 사도에 의해 크레테섬의 주교가 된 성인께서는 바울로 사도께서 로마로 끌려갈 때, 함께 동행하여 영적인 아버지를 위한 뒷바라지를 기꺼이 하였다.

 

크레테섬을 비춘 삶

성 사도 바울로께서 순교하신 뒤, 다시 크레테의 중심도시인 고르티나(Gortyna)로 되돌아 온 성인께서는 당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돌보는 한편,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이셨다. 주님으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은 성인께서는 다이아나(Diana) 여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축제 때, 하느님께 기도하여 여신상이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지게 하였다. 또 한 번은 성인께서 제우스 신전을 짓고 있는 이교도들에 대해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 신전이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같은 기적들을 통하여 많은 이교도들을 참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끄신 성인께서는 그후 97세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아드리아노스와 나탈리아 순교자(8월 26일)

 

두 젊은 부부

성인들께서는 순교하시기 일년 전 젊은 나이(당시 아드리아노스 성인은 스물여덟 살이었다.)에 결혼하였으며,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305-311)에 니코미디아(Nicomedia, 할키돈 남쪽에 있던 도시)에서 사셨다. 황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재판을 받게 하는 사람에게는 보상을 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과 탄압, 그리고 고발이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스물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니코미디아 가까이에 있는 한 동굴에서 붙잡혔다.

 

그리스도인들의 용기에 감동한 관리

이들은 고문을 당하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당한 다음, 이름과 진술한 내용 등을 기록하기 위해 치안관(Praetor, 집정관[Consul] 밑에 있던 고대 로마의 행정, 치안 관리로서 주로 사법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앞으로 끌려왔다. 당시 치안담당 기구의 선임자였던 아드리아노스 성인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놀라운 용기를 가지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고통을 견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이 받는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당신들의 신(God)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가?’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받을 보상을 무어라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당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성인께서는 기록하던 서기에게 자신의 이름도 적어 넣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나도 그리스도인이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기쁘게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로소 되찾은 참 정신

서기는 이런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였고, 성인은 즉시 황제 앞으로 소환되었다. 황제는 성인에게 ‘너는 미쳤는가? 정말 죽고 싶은가? 어서 이리 와 너의 이름을 명단에서 지우고, 신들(gods)에게 제물을 바쳐 용서를 빌도록 하라!’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나는 정신이 나간 것이 결코 아니며, 도리어 이제 비로소 제 정신을 되찾았다’하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성인을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남편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게 되었음을 알게 된 성인의 아내 나탈리아 성인은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성녀 자신이 바로 '숨은'(

κρυπτο-: crypto-, hiding, secret)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황제는 아드리아노스 성인을 잔인하게 고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루(anvil, 대장간에서 쇠를 불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 =철침[鐵砧])위에서 두 손과 두 다리를 부러뜨려 순교케 하였다. 그뒤 나탈리아 성녀도 남편을 따라 곧 순교하셨다.

 

 

성 삐민 수도자(8월 27일)

 

어머니와의 이별

성인은 340년경 이집트에서 태어나셨다. 두 형제 아누비아스, 파이시아스와 함께 이집트의 여러 수도원중 한 수도원에 들어간 성인은 이내 수도사가 되었다. 세 형제 수도사는 매우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한 번은 세 형제의 어머니가 수도원으로 자식들을 보러 왔지만 세 형제는 자신들의 방 바깥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수도원 밖에 서서 울기 시작하였다. 삐민 성인은 방의 잠겨진 문을 통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지금 이곳에서 저희들을 일시적으로 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저 하늘나라에서 저희들과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이 말에 성인의 어머니는 땅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자식들을 보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피하다

이후 삐민 성인의 삶과 덕에 대한 소문이 온 사방에 퍼졌다. 그리하여 한 번은 그 지역을 관할하는 통치자가 성인을 만나 보고 싶어하였다. 이 때 명성(名聲)을 두려워하던 성인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일 정부의 고관(高官)이 존경심을 갖고 나를 찾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내 고요와 평화를 깨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찾은 겸손의 은총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통치자의 사신에게 방문을 정중히 거절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성인은 수많은 수도자들의 영적인 안내자인 동시에 교사였다. 그래서 성인을 따르던 수도자들은 성인의 가르침과 대답들을 글로 적어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교화(敎化)하고 훈육(訓育)하는데 썼다.

 

‘불과 물’의 비유

한 수도자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악한 생각들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고 묻자, 성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만일 우리가 한 쪽에는 불을 놓아 두고, 다른 한 쪽에는 그릇에 물을 담아 둔다면, 불이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할 때 얼른 그릇에 담긴 물을 떠 불을 바로 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시샘하는 적들이 부추기는 사악한 생각들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마치 불꽃(spark, 스파크)처럼 우리들 마음 속에 악한 욕망들을 계속 만들어낸다. 이럴 때마다 이런 악한 생각(사악한 불꽃)들을 물로써 꺼야 하는데 이 물이 바로 기도하느님을 향한 열망(열렬한 사랑)이다.’

성인은 450년경 110세의 나이로 안식하였다. 안식하자마자 삐민 수도자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성 모이시 에티오피아인 수도자(8월 28일)

 

강도들의 두목 모이시

성인은 4세기경 이집트에서 사셨다. 성인은 검은 피부를 가진 에티오피아인이었다. 젊은 시절 성인은 어떤 유력가(有力家)의 노예였으나 살인을 저지른 뒤, 그 주인으로부터 추방되어 한 강도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의 비열하기 그지없는 성향과 엄청난 육체적 힘 덕에 곧 그 강도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도적의 지도자 모이시는 그 강도의 무리와 함께 살인과 강도질 등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할 만큼 그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회개하고 수도사가 되다.

그런데 이렇게 수년동안 죄악을 일삼으며 살던 도적 모이시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임하였고, 그는 드디어 회개하였다. 성인은 그 길로 강도의 무리를 떠나 사막의 한 수도원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인은 자신을 수도자의 무리에 들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오래도록 울며 회개하였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성인이 진정으로 회개하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또한 성인을 수도원에서 쫓아내지는 않았다. 이후 성인은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 오래도록 진심으로 뉘우치며 회개하였다.

 

격정 뒤에 오는 평화

성인은 이시도르 수도원장의 영적인 지도를 따라 인간적인 욕망과 격정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수도원장은 성인에게 특별히 음식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조금 배고픈 상태로 지내도록 충고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꿈속에서 나타나는 온갖 환영(幻影)들을 극복하기 위해 성인은 밤을 새우며 하는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 뒤 성인은 다시금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바로 밤에 차례로 사막의 수도자들 방을 돌면서 물을 길어다 주는 것이었다. 성인은 특별히 이 일을 우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까닭에 물을 얻기가 매우 어려운 나이 많은 수도자들을 위해 하였다.

마침내 이시도르 수도원장은 성인을 축복하면서 이제 방탕했던 격정들이 성인에게서 모두 사라졌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성체와 성혈을 영하게 한 다음 따로 떨어져 있는 성인의 방으로 평화로이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성인은 나중에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자신을 따르는 75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성인은 강도들이 침입할 것을 미리 알고 다른 제자들을 모두 피하게 한 다음, 단 6명의 제자들과 함께 남아 수도원을 지키다가 400년경 죽음을 당하였다.

 

 

성 알렉산드로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8월 30일)

 

이단에 맞서 싸운 총대주교들

알렉산드로스, 요한, 바울로 세 분의 총대주교는 서로 다른 시대에 사셨다. 그러나 이 세 분은 각각 교회의 가르침을 왜곡(歪曲)시키려는 이단자들의 시도에 맞서서 싸우셨다. 특별히 알렉산드로스 성인(325-340)께서는 콘스탄티노플의 첫 총대주교이신 미트로파네스(6월 4일) 성인의 재임기에 주교대리로 계셨다. 총대주교가 너무 나이가 많은 탓에 성인께서는 니케아에서 열린 제 1차 세계공의회(325)에 대신 참석하셨다. 안식하시기전 미트로파네스 총대주교는 자신의 주교대리인 성인을 총대주교로 선출하도록 당부하셨다.

 

이교 철학자

재임기간중 성인께서는 아리우스주의자들 및 다른 이교도들과 논쟁을 벌여야만 하셨다. 한 번은 한 이교의 철학자를 논박하던 중, 성인께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한다. 조용하라!’라고 말하자 그 이교도는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 저런 몸짓과 동작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올바른 것임을 받아들이자 그의 입이 다시 풀렸다. 곧바로 그는 다른 많은 이교 철학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교인들은 성인에게 이같은 능력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큰 기쁨을 누렸다.

 

아리우스 이단을 물리치심

이단자인 아리우스 또한 성인의 기도로 벌을 받았다. 아리우스가 명백히 정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하자, 황제는 그가 니케아의 교부들이 가르친 것을 믿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손을 가슴에 대고 말하였다. ‘이것이 내가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자신의 잘못된 가르침을 적은 문서를 교묘히 옷 속에 숨기고 있었고, 바로 그 자리에 손을 대고 맹세한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거짓된 사악함을 눈치채지 못한 콘스탄티노스 황제(5월 21일)는 그를 교회로 받아들일 날을 정하였다. 성인께서는 이같은 이단자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밤새워 기도하셨다. 아리우스가 개선장군처럼 교회를 향하여 오던 날, 하느님의 심판이 그에게 임하였다. 그는 마치 유다처럼(사도행전 1:18) 창자가 터져 피와 오물에 휩싸인 채 죽고 말았다. 성인께서는 교회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하신 뒤, 340년 98세의 나이로 안식하셨다.

 

 

성모님의 허리띠를 할코프라티아 성당에 안치한 기념일(8월 31일) *

 

성모님의 옷

고대의 교회 전통에 따르면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시기 전에 당신의 옷(robe: 길고 품이 큰 겉옷) 두 벌을 당신을 위해 봉사하던 두 명의 가난한 유대여성에게 남기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여성은 그 옷을 잘 보관하여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가며 전해지게 하였고, 마침내 갈비우스(Galbius)와 칸디다(Candida)가 그 중 하나를 찾아 레오 황제(Leo I) 통치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블라헤르네에 있는 성당에 안치하였다.

 

성모님의 허리띠

한편 성모님의 허리띠(Girdle)는 소아시아 폰투스(Pontus)의 아마시아(Amasea) 근처에 있는 질라(Zela) 교구에서 발견되어 6세기초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황제의 집권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으며, 성 소피아 성당에서 멀지 않은 서쪽의 구리세공인들 구역에 있는 할코프라티아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흐른 뒤(9세기말쯤) 또 다른 레오 황제(Leo VI the Wise)의 부인인 조이(Zoe) 황후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는 데, 황후는 어느 날 환상 중에 성모님의 허리띠를 몸에 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황제는 곧바로 성모님의 허리띠를 찾았고, 그것이 마치 바로 어제 짠 새 것인양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한 그 안에 함께 담겨 있는 문서에는 예전에 황제(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 그것을 성당에 안치하였는가 하는 내용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허리띠를 통한 기적

 

레오 황제는 경건하게 입맞춤을 하고나서 그것(성모님의 허리띠)을 총대주교에게 주었으며, 총대주교가 그것을 황후의 이마에 갖다대자마자 그의 모든 병이 나았다. 황후와 모든 사람들은 이같은 기적을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와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고 성모님의 허리띠를 다시 원래대로 안치하였으며, 황후는 나중에 금실로 그 (허리띠가 담긴) 상자를 수놓았다.

 

*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입으셨던 옷(holy Robe)을 콘스탄티노플의 블라헤르네(Blachernae: 콘스탄티노플 북서쪽의 담장 밖에 위치한 지역)에 있는 성당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7월 2일과 10월 1일)과 구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