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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11월)

ttoza 2010. 2. 15. 11:46

성 꼬즈마와 성 다미아노스 자선치료자(11월 1일)

 

자선치료자 형제

꼬즈마와 다미아노스 형제는 초대교회 시절에 소아시아의 에페소에 있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안락한 환경에서 양육되었다. 총명한 형제는 의학 연구에 비슷한 열의와 목적을 두고 있었다. 형제는 ‘치유란 지극히 높은 분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의술을 행함에 있어서 종교적 헌신으로 임했다. 의학도로서 그들은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 주었다. 그리하여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똑같이 의술의 아름다운 정신을 느끼게 했다.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치료를 해 줌으로써 ‘자선 치료자’(unmercenary, Anargyri)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치료의 놀라운 효과로 말미암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최고의 치료약 - 기도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형제는 경건한 어머니 테오도타의 돌봄 속에 자라났다. 두 성인은 특별히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들을 고치는 데 탁월하였으며, 그런 치료를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기도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써 행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구세주에 대한 형제의 사랑이 점점 강해졌다. 의학에 대한 열정도 그 다음으로 뜨거웠다. 의사로서의 큰 업적을 의미하는 기적은 주님의 권능을 통하여서만 나타났으며, 이로써 위급하고 때때로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린 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다.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적들인 이교도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일생 동안 주님을 공경하였으며, 하느님을 위하여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많은 성인들과는 달리 이 두 성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 속에 순교한 것이 아니라 평화스럽게 안식할 수 있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성인들

부모들이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교회의 위대한 성인의 이름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소아시아의 의사인 성인의 이름을 따라 꼬즈마와 다미아노스라 이름지어진 유복한 로마인 가정의 형제가 있었다. 이 두 번째 형제 성인의 생애도 원래의 꼬즈마와 다미아노스 성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성인들께서는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 순교하셨다.

세 번째 의사 성인들은 옛 아라비아에서 태어나셨다. 놀랍게도 이분들 역시 꼬즈마와 다미아노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세 번째 성인들의 생애는 자세히 기록된 바 없으나 원래의 꼬즈마와 다미아노스 성인과 같은 방법으로 봉사하였으며, 두 번째 성인들과 비슷하게 순교하셨다. (둘째 성인들의 축일은 7월 1일이고, 셋째 성인들의 축일은 10월 17일이다.)

 

 

성 아킨디노스, 비가시오, 아넴포디스토스 순교자들(11월 2일)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들

성인들은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309-379) 궁정에서 일하는 고관들이었다. 샤푸르 왕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잔인한 박해를 시작하였을 때, 참된 진리를 열망하던 성인들께서는 궁정에서 물러나 자신들의 집에 머물렀으며, 다가올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흔들림이 없이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라고 독려(督勵)하였다. 성인들은 붙잡혀서 혹독하게 매질을 당하고는 심문(審問)을 받기 위해 왕 앞으로 끌려 나갔다.

 

고문과 인내

이때 왕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욕하자 성인들께서는 기도하셨고, 왕은 곧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다시금 성인들께서는 불쌍한 마음에 왕을 위해 기도하여 그가 듣고 말할 수 있도록 고쳐주었다. 그러나 폭군인 왕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이같은 능력을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다. 도리어 왕은 성인들을 뜨거운 쇠침대에 붙들어 매었다가, 이어서 납이 녹아있는 커다란 가마솥 안으로 집어 던져 넣었다. 그러나 성인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채 그 속에서 살아 나왔다.

 

순교의 왕관

성인들이 이처럼 모든 고문을 견디는 것을 바라본 한 병사(그의 이름은 아프토니오스이다.)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곧바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성인들은 계속 더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성인들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도리어 원로원(Senate)의 뛰어난 의원(엘피도포로스) 한 사람과 다른 칠천 명의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도교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세례를 받고나서 그들 모두는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세 명의 성인들은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득실대는 구덩이 속에 던져졌으나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호되었고, 이윽고 왕의 어머니마저 하느님께로 이끌게 되었다. 마침내 성인들과 왕의 모후(母后) 그리고 스물 여덟 명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순교의 왕관을 받았다.

 

 

성 아켑시마, 요셉, 아이탈라 순교자들(11월 3일)

 

페르시아의 그리스도인들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Shapur II)가 그리스도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한 지 37년째 되던 해(378-379년)에 그는 다시금 자신의 주요 ‘마기’(magi: 고대의 메대인들[Medes]과 페르시아인들 중 세습적인 사제계급에 속하는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죽이도록 하였다. 파카(Paka)라는 도시와 헤네타(Henaita) 지역을 치리하는 아켑시마 주교가 체포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80세의 노인이지만 가난한 이들과 이방인들에게 한없는 친절을 베풀어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성인께서는 집에서 붙잡혀 아르빌(Arbil)로 끌려오셨고, 성인을 신문한 ‘마구스’(magus: magi의 단수형)는 나이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사정없이 매질을 하게 한 다음 어두운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주교, 사제, 보제

베트-카토바(Bet-Katoba)의 사제인 요셉 또한 이 무렵에 붙잡혔다. 그는 70세의 노인으로서 자신이 처음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개종할 당시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트-누하드레(Bet-Nuhadre) 지역에서 온 60세의 보제 아이탈라 또한 붙잡혔는데, 그는 잘생긴 얼굴에 예리한 언변(言辯)과 불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두 성인 모두 사슬에 묶인 채 아르빌로 옮겨져 같은 ‘마구스’ 앞에 섰다. 그들이 마법(魔法)으로 사람들을 속인다고 말하며 마구스가 죽일 듯이 위협하자, 요셉 성인께서는 ‘우리는 마법사가 아니며, 진리를 가르칠 뿐’이라고 대답하셨다. 성인의 대답에 격분한 마구스는 성인을 땅바닥에 묶게 한 다음, 열 명이 달려들어 석류나무의 가시돋힌 가지로 마구 때리도록 명령하였다.

 

40년 박해가 끝남

아이탈라 성인 또한 굳건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셨다. 그러자 마구스는 곧바로 성인을 고문하기 시작하여 두 손과 두 발을 분지르고는 온 몸이 부서지도록 때렸다. 5일 뒤 같은 방에 갇힌 다른 두 성인(아켑시마, 요셉)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당한 성인께서는 반송장이 된 몸으로 춥고 눅눅하며 어두운 감옥에 다시 던져졌다. 그뒤 다시 왕이 그 지역에 나타나자 세 성인들은 왕 앞으로 끌려나오게 되었고, 이때 아켑시마 성인께서 흔들림이 없는 확고함으로 신앙을 증언하고는 가장 먼저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이어서 요셉과 아이탈라 성인들도 강제로 끌려온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차례로 안식하셨다. 성인들이 순교한 자리에서는 도금양(桃金孃, myrtle-bush) 나무가 자라났으며, 그 지역의 주민들은 성인들이 순교한 자리에 가면 모든 질병이 낫는 기적을 오년동안 경험하였다.

 

 

성 요아니끼오스 수도자(11월 4일)

 

성화파괴주의자

성인께서는 754년 소아시아 중부 비디니아(Bithynia)의 아뽈로니아스 호수 근처에 있는 마리케이트(Marycate)에서 태어나셨다. 농사짓는 집안 출신으로서 경건한 성품이었던 성인께서는 일곱 살 때부터 돼지를 치는 일을 하였으며, 부모님의 영향으로 성화(icon)를 배척하는 이단에 빠져들었다. 열아홉 살이 되어 제국경비대에 들어간 성인께서는 매우 용맹한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로부터 십칠년 뒤 한 나이 많은 고행수도자를 통해 성화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큰 잘못임을 깨달아 알게 된 성인께서는 곧 뉘우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성화에 공경을 표하고, 회개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뒤 5년이 지난 795년 불가리아인들과 큰 전쟁을 치르고 나서 이 세상의 삶이 헛되다고 느낀 성인께서는 황제의 청을 마다하고 프루사(Prusa) 가까이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철저한 수련과정

두 해를 열심히 수도생활한 성인께서는 다시 깊은 산의 동굴로 찾아들어가 삼년동안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나서 성인은 소아시아 남부 낄리끼아(Cilicia) 지역의 험준한 산으로 들어가 다시 사년을 보내고, 곧이어 뛰어난 금욕수도자인 요르고스의 지도를 받으며 삼년을 더 영적 수련에 정진하였다. 810년이 되자 하느님께서는 이제 성인이 황야를 떠나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일해야 할 때임을 알려주셨다. 성인께서는 당신께서 처음 몸담았던 뜨리할리까(Trichalika)의 수도원에 머무르셨는데, 그곳에서 예지(豫知)와 짐승을 제압하는 힘으로 유명해지셨다. 성인께서는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죄인들과 성화파괴자들을 올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셨으며,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최고의 덕은 겸손

824년 당대의 쟁쟁한 교회지도자들 일백 명이 성인을 찾아와 ‘무엇이 가장 뛰어나 덕입니까?’ 하고 묻자, 성인께서는 필립보서의 말씀(“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2장 6-7절)을 들려주며 ‘겸손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씀하셨다. 829년 즉위한 테오필로스 황제가 성화파괴를 일삼으며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에도 성인께서는 정교의 가르침을 그래도 지켜나가셨다. 이후 성인의 가르침으로 황제는 죽기 전 그리스도의 성화에 입을 맞추었고, 842년 떼오도라 왕비에 의해 성화는 다시 원래의 교회 자리로 회복되었다. 성인께서는 846년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미하엘, 가브리엘 대천사와 천상의 모든 천사들(11월 8일)

 

천사-창조된 영적 존재

하느님만이 참되고 영원한 빛이시며, 비(非)물질적이고 끝이 없으시며, 전적으로 불가해(不可解)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로서 서로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친교를 나누신다. 무(無)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창조하셔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을 섬기게 하셨다. 신적인 본성을 그대로 닮고 영원성을 지닌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이다. 일정한 형태의 육신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천사들은 그 움직임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비록 육체적인 격정(激情)은 없더라도, 신적인 무정념(無情念)을 지닌 것은 아닌 데, 이는 그들도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으로 기우는 경향은 없을지라도 유혹에 대해 면역(免疫)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악으로 이끌리거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천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독립적인 자유를 사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무형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듯이 (잘못에 대해) 회개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호자이며 전달자인 천사

하느님의 종인 천사(angel)는 그 말의 뜻이 ‘사신(使臣)’, ‘심부름꾼’, ‘전달자’이다. 천사들은 사람들과 나라들을 지켜보고 살핀다. 사도 요한의 묵시록에는 일곱 지역교회가 각기 자신들의 천사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록 1:20 이하 참조) 우리 모든 사람들의 곁에는 ‘수호천사’가 있어서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준다.(마태오 18:10 참조) 또한 천사들은 우리가 선을 행하게 하고, 악은 피하도록 이끌기도 하신다.(출애굽기 23:20 참조) 천사 루시퍼(Lucifer)가 스스로 교만해져서(이사야 14:13-14) 하느님께 반역을 저질러 지옥의 깊은 곳으로 떨어졌을 때, 미하엘 대천사는 충성스러운 천사들에게 ‘주의를 기울입시다!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임무를 다합시다!’(성찬예배때 보제나 사제도 복음경봉독, 봉헌기도 등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이처럼 외친다.) 라고 소리쳤다. 한편 하느님의 정의는 그분의 자비와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는 데,(시편 85:10) 이런 까닭에 우리는 정의의 천사인 미하엘을 자비의 천사인 가브리엘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 예언자의 환상을 풀이해 주었고,(다니엘 8:16이하) 세례자 요한의 탄생뿐 아니라 성모님에게서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탄생할 것임을 미리 알려주었다.(루가 1장) 이처럼 창조때부터 세상 끝날까지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의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 테옥티스티 수녀(11월 9일)

 

무인도에 홀로 남겨지다

성인은 9세기경 미틸리니(Mytilene, 지금의 레스보스[Lesbos]) 섬의 메팀나(Methymnia) 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어릴 때부터 기도와 금욕적인 삶에 익숙해 있었다. 성인이 열 여덟살 무렵이던 어느 밤에 여동생과 함께 이웃 마을에 머물고 있었을 때, 악명높은 니시리스(Nisiris)가 이끄는 크레테 출신의 해적들이 그 마을을 덮쳤다. 해적들은 마을을 노략질하고, 성인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노예로 팔기 위해 끌고 갔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파로스 섬으로 옮겨졌다. 해적들이 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해변에 내려놓고 그 수를 세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값을 계산하는 사이, 성인은 섬의 숲이 우거진 곳으로 간신히 도망을 쳤다. 그 당시 그 섬에는 아직 사람이 살지 않고 있었다.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한 해적들은 성인만을 섬에 남겨둔 채 배로 떠나갔다. 뒤에 홀로 남겨진 성인은 35년 동안 그곳에서 온갖 종류의 고난을 겪으며 살았다. 여름에는 태양빛에 그을리고 겨울에는 뼈속까지 파고 드는 추위와 싸우면서 성인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들에 자라는 풀과 열매가 전부였다. 35년 동안 그 섬에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성모님의 도우심과 위로 속에 성인은 오로지 하느님과 교제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다 쏟았다.

 

고통과 인내의 세월

그 긴 세월이 흐른 어느날, 한 사냥꾼이 우연히 성인이 있는 곳에 오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성모님께 바쳐졌으나 이제는 퇴락(頹落)해버린 그 웅장한 성당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렴풋이 누군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에 떨면서 성녀는 자신이 벗은 몸이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였다. 사냥꾼은 곧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던져주었다. 외투를 걸치고서야 사냥꾼 앞에 나타난 성녀의 모습은 기이한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햇빛에 바래 새하얗게 되어 있었고, 피부는 비바람에 시달려 가무잡잡하게 변해 있었다. 성녀는 살 한 점 없이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는데, 그 몸과 두 손발의 뼈들이 딱딱하고 주름진 피부에 뒤덮여 있어서 마치 그녀의 몸은 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냥꾼은 성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놀랐다.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기전 성녀는 사냥꾼에게 다음번에 올 때 꼭 성체와 성혈을 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 다음에 사냥꾼은 약속한대로 성체와 성혈을 가져 왔다. 성녀는 잠시 기도한 다음, 성체와 성혈을 받았다. 그리고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사냥꾼이 다시 들렀을 때, 성녀는 이미 안식한 상태였다. 그 선량한 사냥꾼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성껏 성녀의 장례를 치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다.

 

* ‘제 2의 이집트인 마리아 수녀’로 비유되는 성녀의 성해(holy relics)가 가평의 구세주 변모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성 미나스 대순교자(11월 11일)

 

에집트 태생의 노병

성인께서는 막시미안(Maximian) 황제의 박해가 있던 304년 무렵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셨다. 50세 가량의 경험이 풍부한 군인이었던 성인께서는 에집트 출신으로서 소아시아 서부 프리지아의 코티아에움(Kotyaeum)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에서 복무하고 계셨다. 성인께서는 군인으로서 그 용맹함이 남달랐으며,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비롯된 지혜와 자기절제의 미덕 또한 두드러졌다. 그런데 성인께서 속한 군단(軍團, legion 기병을 포함하여 3,000-6,000명 정도의 보병으로 이루어짐)이 북아프리카의 한 지역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의식에 참석하도록 명령을 받고, 이어서 이 명령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라고 일부 선발대가 파견을 나가게 되자 성인은 분개하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함

성인께서는 곧바로 당신의 군장(軍裝)을 풀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더 이상 군인으로서 복무하기를 거절하고 근처의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그곳에서 성인은 얼마동안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기도와 영혼의 정화에 힘쓰는 한편, 야생의 동물들 속에서 침묵과 고독을 벗삼아 지냈다. 그러는 동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성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자라났고, 이제 순교의 순간이 왔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교도들의 불경건한 축제일들 가운데 한 날이 찾아왔을 때, 성인께서는 도시로 내려가 그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예배하고 있는 이런 것들은 말도 못하고 감각도 없는 나무 조각일 뿐입니다!’

 

성인은 지금도 우리를 도우신다

이교도들은 성인의 대담무쌍(大膽無雙)함에 잠시 멈칫하였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성인을 때리고는 그 도시의 책임자에게 넘겼다. 성인께서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당신께서 군대를 떠난 일이며, 우상숭배를 거부한 사실 등을 말하였다. 이후 성인께서는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셨다. 고문을 하는 사람들은 성인의 살갗을 벗기고 불꽃이 나오는 램프로 온 몸을 지졌다. 성인께서는 당신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는 마지막으로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교인들은 성인의 시신을 거둔 다음 고향 에집트로 가져가 마땅한 예를 갖추어 장례지냈다. 후에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은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고, 성인께서는 19세기초 그리스의 독립전쟁과 2차 세계대전 때에도 나타나셔서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셨다.

 

 

성 요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11월 12일)

 

‘주인님들’ 명부

성인께서는 키프로스의 아마투스(Amathus) 출신인 이름난 가문의 후손이었다.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결혼한 뒤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하느님의 뜻인지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같은 큰 슬픔과 손실(損失)을 세상적인 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610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서품되던 바로 그날, 성인께서는 그 도시의 모든 성직자들과 공직자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는 이른바 ‘주인님들’(Masters: 성인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구걸하는 이들을 이렇게 불렀으며, 이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써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들을 우리 손에 맡기셨다고 말씀하셨다.)의 명부(名簿)를 정확히 만들도록 하였다.

 

나일강물처럼 흐르는 사랑

성인께서는 이제 이렇게 만들어진 인명록에 의해 매일 그들을 먹이고 필요한 옷들을 주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성인께서는 자주 이렇게 기도하셨다. ‘주님, 당신과 제가 이 경쟁(競爭: 곧, 자선을 베푸는 일)에서 함께 승리하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온갖 좋은 것을 언제나 제게 주시며, 저는 그것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가진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저의 생명을 지탱하는 당신의 자비에 힘입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성인의 사랑과 자선은 가이 없어서(measureless), 에집트의 온 땅을 뒤덮어 물을 대고 비옥하게 하는 나일강물과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고 성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성인에게 ‘자비로운 이’(Merciful) 라는 별명을 붙여 불렀다.

 

성 요한 ‘자비로운 분’

614년 페르시아인들이 시리아 지역을 침략하고 많은 피를 흘리면서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수많은 피난민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때 성인께서는 피난민들을 형제처럼 맞이하여 위로하면서 그들을 위한 병원과 거대한 숙소를 건축하였다. 그리고는 교회의 모든 자원들을 활용하여 피난민들을 먹이고 보살폈다. 또한 곡물과 다른 음식들을 실은 배를 팔레스타인으로 보냈으며, 일꾼들도 보내 파괴된 성당들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성인께서는 수도사들을 사랑하였으며, 그들보다도 더 철저한 고행생활을 해 나가셨다. 이런 자선과 겸손한 생활과는 달리 성인께서는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e)을 주장하는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태도로 임하셨다. 619년 키프로스로 되돌아온 성인께서는 64세의 나이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요한 흐리소스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11월 13일)

 

어린 시절

성인께서는 345년경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 세쿤도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군대 지휘관이었고, 어머니 안투사 또한 귀족의 딸로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머니가 겨우 스무 살이었을 때 성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성인의 어머니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남은 생을 하느님께 그리고 어린 요한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어머니는 성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철저히 가르쳤으며, 더불어 당대에 가장 훌륭한 웅변가(orator)인 리바니우스(Libanius)을 찾아가 공부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었다. 후에 리바니우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성인을 지목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으나, 성인께서는 세상적인 명성이나 출세를 얻으려 하기보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열여덟 살에 세례를 받았다.

 

영적수련과 성직

세례후 성인께서는 매일 매일 영적인 투쟁을 하며 자신을 단련해 나가셨다. 얼마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성인께서는 마침내 오랫동안 바라던대로 세속의 모든 것을 떠나 고향 가까이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셔서 수도사들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성경을 연구하거나 기도를 하며 영적인 것만을 찾아 하루하루를 고독 속에서 보내셨다. 380년 성인은 은둔생활을 마치고 보제가 되었다. 5년뒤 다시 사제서품을 받던 날 교인들은 성인의 훌륭한 설교를 익히 들어왔던 터라 성인을 향해 ‘황금의 입’(흐리소스톰)이라고 외쳐댔다. 그후 성인께서는 사제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회일에 헌신하셨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성인께서는 하루에 3,000명의 사람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운영하기도 하셨다.

 

헌신과 인내와 겸손

397년 넥타리오스 총대주교가 안식하시자 그 후임으로 성인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너무도 겸손한 성인이 그 직을 맡지 않으려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황제와 성직자, 교인들은 마차를 보내어 억지로 성인을 콘스탄티노플로 모셔왔다. 그후 그 도시의 사람들도 성인의 설교에 감동하였다. 한편 성인은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수입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썼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성인을 시샘하고 비난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드디어 404년 황후와 그 측근들이 주동이 되어 성인을 멀리 흑해 지방으로 유배보냈고, 나중에 더 먼 곳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던 중 하느님 품에 안기게 된다. 성인께서 숨을 거두기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은 바로 ‘모든 일에 대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고백이었다.

 

 

성 필립보 사도(11월 14일)

 

‘나를 따르라’

성 사도께서는 갈릴리의 벳사이다(Bethsaida) 출신으로서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요한 1:44) 사도께서는 세상일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이 밤낮으로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묵상하였고, 일생동안 독신으로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안드레아 사도를 부르신 뒤, 필립보 사도를 발견하시고는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43) 사도께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해 곧바로 그 분을 따랐다. 그리고 나타나엘에게로 가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요한 1:45)라고 말하였다. 그 일 이후로 성 사도께서는 주님께서 이 지상의 일을 다 마치실 때까지 줄곧 따르면서 신실하게 그 분을 섬겼다.

 

소아시아의 선교사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내려오신 다음, 빌립보 사도께서는 소아시아의 서쪽 끝 지역에 복음을 선포할 인물로 뽑혔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와 그의 여동생 마리암나와 함께 리디아(Lydia)와 미시아(Mysia)를 건넌 사도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복음을 전하셨다. 그들은 주먹과 채찍으로 맞고, 감옥에 갇히거나 이교도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성인들께서는 기쁨을 잃지 않으셨으며, 자신들에게 더욱 더 힘을 주시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속에서 도리어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고백하도록 만드셨다.

 

고문과 순교

프리지아(Phrygia)의 이레라폴리스(Hierapolis)에는 뱀을 숭상하는 한 도시가 있었다. 그 도시에 사는 아시아 지방 총독의 아내가 심한 눈병에 걸렸다가 그리스도를 믿고 깨끗이 나았다. 그런데 그의 남편인 총독 니카노르(Nicanor)는 시민들이 자기 아내를 본받을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사도들을 붙잡아 고문을 가하였다. 그리고 빌립보 사도의 발목뼈를 꿰뚫어 못으로 박고는 거꾸로 매달았다. 바로톨로메오 사도 또한 큰 못으로 벽에 박혀 있었다. 이때 필립보 사도께서는 온 힘을 다해 기도하셨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땅이 갑자기 열리더니 수많은 이교도들과 이교의 사제 그리고 총독까지 모두 땅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살아남은 이교도들은 바르톨로메오 사도에게 용서를 빌고 세례를 받았으며, 예를 갖추어 필립보 사도의 장례를 지냈다.

 

 

성 구리아, 사모나, 아비보 순교자(11월 15일)

 

에데사의 사제들

구리아와 사모나 성인들은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303년경) 초기에 에데사(Edessa: 그리스 북부와 마케도니아 서쪽에 있는 도시)에서 사제였다. 그들은 감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신앙을 굳게 지키도록 격려한 죄목으로 그 지역의 통치자 앞으로 끌려왔다. 배교(背敎)하도록 설득하였으나 성인들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통치자는 이들을 황제의 칙령(勅令)에 대해 반기를 든 것으로 하여 다른 사제, 보제들과 함께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모진 고문을 가한 다음, 다시 어두운 지하감옥에 가두어 석 달 반 동안이나 거의 먹지 못한 채 굶주림 속에 지내게 하였다. 그뒤 다시금 법정에 끌려나온 성인들에게 통치자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두 성인의 순교

사모나 성인께서는 이때 이미 무릎의 뼈가 부러진 상태였고, 구리아 성인께서는 나이가 많아 군인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판결문을 듣는 동안 두 성인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이 났다. 두 성인은 동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목을 내밀어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셨다. 성인들의 순교소식을 들은 그 도시의 주민들은 모두 순교장소로 몰려가 심지어는 성인들의 피가 묻은 흙마저도 정성스레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향(香)과 향료, 시편, 성가 등으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보제 순교자

한편 아비보 성인은 디오클레티안 황제 이후에 통치한 리키니우스(Licinius)가 새로운 박해를 시작한 때(309년)에 보제였다. 성인은 에데사 지역을 몰래 다니며 신도들을 성당으로 모아 성경말씀을 읽어주고, 박해에 굴하지 말고 굳건히 신앙을 지키도록 당부하셨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지역통치자 리사니우스(Lysanius)는 곧 성인을 잡아들이도록 명령하였다. 통치자 앞에 끌려온 성인께서는 두려움없이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셨고, 이에 격노한 통치자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여 성인을 틀에 붙들어 매고는 쇠로 된 빗모양의 기구로 살갗을 갈갈이 찢어냈다. 참수(斬首)형이 너무 쉬운 죽음이라고 판단한 통치자는 성인을 서서히 타오르는 불에 화형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성인께서는 나뭇단이 불속에서 타기 시작하자 기도를 시작하시고는 곧바로 안식하셨다. 교인들은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향유와 향료를 바르고는 사모나, 구리아 성인들이 묻힌 무덤에 함께 안장하였다.

 

 

성 마태오 복음사도(11월 16일)

 

유대인들의 사도

알패오의 아들인 성 사도께서는 본래 레위(Levi)라고 불려졌었다. 사도께서는 세금을 걷는 공무원이었으며, 어느날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 뵙고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마태오 9:9; 마르코 2:14) 사도께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전후하여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직접 듣고 지켜본 증인이었다. 오순절날 성령을 가득히 받은 사도께서는 주님의 복음을 동포인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8년이 지났을 무렵, 히브리어의 지방말인 아람어(Aramaic)로 복음서를 쓰기 시작하셨다. 그후 몇 년 뒤 성 사도의 복음서는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인 성 야고보에 의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이를 바르톨로메오 사도께서 다시 옮겨 적으셨다. 이 그리스어 번역본이 당시 더 이상 복사본이 존재하지 않는 아람어 원본을 급속히 대신하게 되었다. 나중에 사도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르티아(Parthia) 지역으로 가셨으며, 그곳의 이교도들로부터 많은 시련을 겪으셨다. 사도께서는 아주 멀리 유프라테스강의 기슭에 있는 이에라뽈리스(Hierapolis)까지 가셨으며, 힘있는 가르침으로써 수많은 이교도들이 진리를 알고 개종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셨다. 후에 나이가 매우 많이 든 사도께서는 평안히 안식하셨다.

 

다른 전통에 따른 이야기

또 다른 전통에 따르면 성 사도께서는 진리를 거부하는 파르티아인들과 메데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고문을 당한 뒤, 높은 산에 있는 메마른 땅으로 가 고행과 관상(觀想)생활을 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사도에게 나타나 가늘고 긴 막대 하나를 주시며 그것을 성당 가까이 있는 미르메나(Myrmena) 도시에 심으라고 하셨다. 사도께서 그 나무를 땅에 심자마자 거기서 곧 어린 가지가 나오더니 꿀이 뚝뚝 떨어지는 맛있는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었다. 또한 동시에 그 나무의 뿌리로부터 샘물이 콸콸 솟구쳐 나와 그 물에 몸을 씻은 모든 사람들을 인간적인 욕정(passions)과 우상숭배의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성 사도께서는 그 도시의 왕에 의해 고문을 당한 뒤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성인의 성해로 말미암아 일어난 많은 기적들로 인해 마침내 왕은 회개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세례명을 마태오로 하여 개종한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전 지역에서 우상들을 모두 없애버렸으며, 자신의 모든 백성들이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이끌었다. 후에 그 도시의 주교가 안식하자 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성 사도께서 일찍이 지시한대로 그 후임 주교가 되어 교회를 다스렸다.

 

 

성 브로클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11월 20일)

 

요한 흐리소스톰 성인의 제자

성 요한 흐리소스톰의 제자였던 성인께서는 4세기초 콘스탄티노플에서 자라나셨을 것으로 여겨지며, 후에 아티코스(Atticus) 총대주교의 비서이기도 하셨다. 425년 아티코스 총대주교가 안식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브로클로 성인께서 총대주교직을 승계하길 바랐으나 시시니오스(Sisinius, 10월 11일) 성인께서 그 직을 맡게 되셨다. 온유하고 겸손한 성인께서는 새로운 총대주교의 선출을 좋게 받아들여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셨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시지쿠스(Cyzicus)의 주교로 선출된 성인께서 그 도시에 도착하시자 그곳의 시민들이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간섭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나머지 다른 인물을 자신들의 주교로 이미 선출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교 신앙의 수호자

이제 관할 교구가 없게 되었지만 당신의 사부(師父, master)셨던 요한 흐리스소톰 성인처럼 뛰어난 수사(修辭)와 웅변술을 지닌 성인께서는 제국의 도시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서 유명한 설교가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이후 시시니오스 성인께서 안식하지자 사람들은 다시 성인께서 총대주직을 맡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안티오키아의 네스토리오스가 총대주교직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자 곧바로 네스토리오스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자신의 이단적인 사상을 퍼뜨리기 시작하면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otokos]라고 부르기를 거부하였다. 온유하고 참을성이 많은 성인이었지만 이제는 정교의 신앙에 대한 열렬한 수호자로 나서서 428년 성탄절에 총대주교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설교를 공개적으로 행하였다.

 

 

부드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오스가 파문된 뒤, 막시밀리아노스 성인(4월 21일)께서 총대주교직을 승계하시자 성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총대주교를 섬겼다. 434년 총대주교가 안식하시자 마침내 황제와 모든 시민들은 성인을 총대주교로 선출하였다. 이후 성인께서는 네스토리오스 이단을 물리치는 한편 관련된 사람들이 올바른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셨다. 그리고 교회가 일치와 사랑 속에서 굳건해 지도록 애쓰셨다. 438년 요한 흐리소스톰 성인의 성해를 예를 갖추어 제국의 수도로 이장한 성인께서는 12년이 넘는 봉사를 마치시고 446년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필레몬 사도(11월 22일)

 

소아시아의 귀족

필레몬 사도는 소아시아의 프리지아(Phrygia) 지방 남서쪽에 있는 골로사이(Colossae)의 한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셨다. 그는 바울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나서 아내 압피아(Apphia), 아들 아르킵보(Archippus)와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위대한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돕고자 하는 열렬한 바램으로 충만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당신의 집에 모이게 하여 거룩한 신비의 성사들을 거행하거나 기도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거공간을 당시에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교회로서 사용하도록 하였다.(필레몬 2절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 여러분’; 골로사이 4:15 ‘님파와 그 집에 모이는 교회’ 등을 참고하라.)

 

가자의 주교

바울로 사도께서는 필레몬 사도를 주교직에 합당하다고 여겨서 팔레스타인의 가자(Gaza) 지역 주교로 서품하였고, 이때부터 필레몬 사도께서는 빛나는 가르침으로 그곳 사람들을 뒤덮고 있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하셨다. 골로사이로 돌아오셔서도 이교도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교의 사명을 중단함이 없이 계속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이교도들이 디아나(Diana: 로마인들이 아르테미스 여신과 동일시했던 고대 이탈리아의 숲과 출산의 여신)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 사도께서는 당신의 집에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한 분이신 위대한 임금 하느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사도와 가족의 순교

예배장소를 알게 된 이교도들은 미친 듯이 집안으로 뛰어들어 사도와 교인들을 붙잡아서는 그 지역의 통치자 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우상들에게 희생제사를 드리기를 거절하자 먼저 아르킵보를 채찍으로 때린 다음 악랄한 젊은이들을 시켜 날카로운 바늘로 온 몸을 찌르게 하였고, 마침내는 돌로 쳐죽이고 말았다. 필레몬 사도와 아내 압피아도 차례로 온갖 고문을 다 당하고 나서 끝내 순교하셨다. 살아남은 그들의 노예 오네시모 성인도 얼마 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 오네시모 성인은 2월 15일에, 아르킵보 성인은 2월 19일에 따로이 기념한다.

 

 

성 끼낄리아(세실리아)외 3인 순교자들(11월 22일)

 

로마의 귀족처녀

성녀께서는 3세기초 로마의 부유하고 이름이 많이 알려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리스도를 믿어 신자가 된 성녀께서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경건한 일로 보내며 생활하였다. 성녀께서 결혼할 나이에 이르게 되자 자신들의 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성녀의 부모는 성녀를 발레리안(Valerian)이라는 훌륭한 젊은이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지혜롭고 정숙(貞淑)한 언행(言行)으로 약혼자를 사로잡은 성녀께서는 그를 설득하여 함께 동정(童貞)을 지키며 살기로 결심하게 만드셨다. 교황 우르반(Urban)에게서 세례를 받은 발레리안은 자신의 형제 티부르티우스 또한 하느님께로 인도하였고, 그 형제는 매우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여 드높은 덕을 쌓기에 이르렀다.

 

한 밤중의 일꾼들

당시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지방장관인 알마티우스로부터 지독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으며 그중 많은 이들이 순교자가 되었다. 이렇게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신을 묻어주는 일조차 금지되었지만 성녀와 발레리안 그리고 티부르티우스는 한 밤중에 밖으로 나가 순교자들을 장례지내는 일을 하였고,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던 중 한 밤에 발레리안과 티부르티우스 형제가 들켜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들을 처형할 책임을 맡은 장교 막시무스(Maximus)는 형제를 데리고 이교의 신전으로 가서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였고, 끝내 그들이 거절하자 목을 자르게 하였다. 바로 그 순간 막시무스는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내려와 두 형제의 영혼을 모셔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랑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같은 놀라운 광경에 막시무스와 그곳에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날밤 성녀께서는 두 형제의 시신을 예를 갖추어 장례지냈다. 그리고 막시무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후 순교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성녀가 이들과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성녀는 곧바로 붙잡혔으나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생각에 한없이 기뻐하셨다. 이때 성녀의 증언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심에 감탄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마침내 성녀는 목이 잘려 순교하셨고, 그 놀라운 인내와 귀족인 신분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많은 주교들이 묻힌 특별한 지하무덤(까타콤 catacomb)에 안장되셨다.

 

 

성 알렉산더 네프스키 노브고로드의 대공(大公)[11월 23일]

 

지혜로운 군주

용기있고 덕망높은 그리스도교 군주인 성인은 러시아 국민들이 겪은 가장 힘들고 위태로웠던 시기에 큰 빛을 비춰준 성인이다. 1218년 야로슬라브 대공(大公)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성인은 어려서부터 군사학(軍事學)과 정부운영 등에 대해 배우며 자라났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교적 지혜와 절제, 경건과 정의로써 조절하는 법을 훈련하였다.

1228년 겨우 열 살의 나이에 형과 함께 노브고로드(Novgorod)의 군주가 된 성인의 앞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놓여 있었다. 부자들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무거운 세금과 권력자들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1231년 극심한 기근과 혹독한 겨울추위가 몰아 닥쳐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자 이 젊은 군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고 백성들을 보살폈다. 그때까지 군주로서 정당한 지위를 누리지 못했던 성인은 이 일을 통하여 비로서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기 시작했다.

 

서방의 공격을 막아내다

1236년 형이 죽고 홀로 노브고로드의 군주(Prince)가 된 성인은 이제 서유럽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스웨덴과 리투아니아 왕국이 튜튼족 기사단(Teutonic Knights)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공국(公國)들을 정복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1223년 이래로 중앙 아시아에서 압박을 가해오는 타타르인들(Tatars) 탓에 약해질대로 약해진 나라에 서방으로부터의 공격은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 침략자들과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1240년 7월 16일 밤, 성인은 네바(Neva) 강에 나타난 보리스와 글렙 성인들의 환상에 용기를 얻어 나간 싸운 결과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도 수년동안 계속되는 서방의 공격을 그때마다 막아내었다.

 

몽골의 위협 앞에서

1246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성인은 러시아의 다른 군주들과 함께 몽골의 침략자 칸(Khan) 앞에 불려가게 된다. 이 자리에서 성인은 우상에게 예배하라는 칸의 요구를 용기있게 물리친다. 그리고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당시 몽골의 수도인 카라코룸(Karakorum)에 있는 대 칸(Great Khan)에게 보내졌고, 1251년이 되어서야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타타르인들의 확고한 신임을 얻게 되고, 노브고로드와 키에프(Kiev)의 군주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1260년 타타르인들이 다시금 과중한 세금을 물리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러시아 백성들을 끌고가자 성인은 다시 몽골의 군대(Golden Horde)를 방문하여 조공(租貢)을 줄이고 강제징집을 면하도록 조치하였다. 1263년 11월 14일, 질병과 힘든 여행으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성인은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침상에서 알렉시스라는 수도명을 받은 뒤 안식하였다.

 

 

성 클리멘트 로마의 주교(11월 24일)

 

사도들의 제자

성인께서는 도미티안, 네르바, 트라잔 황제의 통치기(AD 81-117)에 로마에서 사셨다. 어떤 이들은 그가 왕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사도들의 제자(빌립보 4:3참조)였는데 특히 그 가운데서도 베드로 사도의 제자였다고 말한다. 복음을 향한 성인의 열정은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으며, 91년쯤 성인께서는 로마의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던 성인께서는 그리스인들의 지혜뿐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서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성인께서는 유명한 클리멘트 서신(Epistle of Clement)의 저자이신 데, 그 서신에서 성인은 고린토 교회의 젊은 구성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사도들이 세운 사제직을 존중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유배(流配)를 당하시다

성인께서는 네르바 황제의 절친한 친구이며 장관(Prefect)인 시시니우스의 아내 테오도라가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끌었으며, 나아가 시시니우스 자신도 기적적으로 자신의 병을 고치고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이처럼 귀족계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제국내에서 전반적으로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지자 트라잔 황제는 성인을 제국의 동쪽 변방인 크리미아(Crimea) 반도로 유배를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성인의 유배지에서는 이미 2,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유죄 선고를 받고 대리석을 캐내는 채석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성인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키며 이들을 위로하자 사막 한 가운데서 생수의 샘이 터져 나와 흘렀다.

 

바다 속으로 던져진 순교자

성인께서는 유배지에서도 한 해 동안 75개의 성당을 세우셨으며, 수많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가르쳤다. 그러자 97년 무렵 이같은 개종의 물결을 막으려고 한 잔인한 통치자(지방장관)가 파견되어 왔다. 성인께서는 고문을 당하신 다음 목에 배의 무거운 닻을 매단 채 흑해(Black Sea) 바다 속으로 던져져 교인들이 가 닿을 수 없는 깊은 물 속에 잠기셨다. 그러나 그후 700년이 훨씬 지난 860년 포티오스 총대주교가 보낸 슬라브족의 사도 끼릴로스 성인(5월 11일)께서 클리멘트 성인의 성해를 발견하였고 그 일부를 콘스탄티노플로 모셔왔다. 이처럼 가장 초기 로마의 주교 가운데 한 분인 성인과 러시아인들의 신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러시아정교가 사도전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성 까떼리나 대순교 성녀(11월 25일)

 

위대한 도시의 천재적인 소녀

성녀께서는 막시민(Maximin 305-311)황제 시절, 에집트의 수도이며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귀족 세스투스(Cestus)의 딸이었다. 성녀께서는 고귀한 신분만이 아니라 뛰어난 아름다움과 지성으로 말미암아 널리 우러름을 받았다. 가장 훌륭한 대가(大家)들과 이름난 철학자들에게서 배운 성녀께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계승자들의 철학적 체계들을 완벽히 이해하였다. 또한 문학방면에서도 뛰어나, 호머(Hormer)에서 버질(Virgil: 고대 로마의 시인. 70-19 B. C.)에 이르는 모든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 위대한 도시(곧, 알렉산드리아)를 찾아오는 학자들과 외국인 방문객들에게서 배운 다양한 언어로 온갖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식을 탐구하는 중에서도 특히 의학에 정통하였던 성녀께서는 당시 18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최고로 훌륭하다는 학자들조차 그 지적인 성취를 놀라와 할 정도로 비범한 지혜의 소유자이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결(성)의 위대함을 알고 있던 성녀께서는 자신의 모든 외적(귀족, 아름다움, 부[富])이고 내적(지식과 지혜)인 조건들에 동등하게 부합되는 젊은이만을 배우자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

딸의 결심을 듣고 실망한 성녀의 어머니께서는 도시 가까이에 살고 있던 한 그리스도교 고행자(ascetic)에게 성녀를 보내면서 조언을 구하도록 일렀다. 성녀께서 그토록 찾고 있는 바로 그분(배우자)을 알고 있노라고 말한 고행자께서는 육화하신 하느님이시며, 성부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모든 순결한 영혼을 신부로 받아들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려 주었다. 드디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성녀에게 나타난 성모님께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맺은 천상의 약혼을 가리키는 표시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셨다.

그런데 당시의 황제가 제국 전체에서 행하는 우상숭배와 불경건한 예식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벌어지자 성녀께서는 황제 앞에 나아가 격렬한 어조로 이를 비난하였다. 성녀의 아름다운 용모뿐 아니라 그 단호함에도 놀란 황제는 급기야 로마 제국 전체에서 내노라 하는 모든 학자들과 철학자, 웅변가, 논리학자들을 불러 모아 성녀와 대결케 하였다. 그러나 성녀께서는 이 모든 상대들이 펼치는 논리의 오류와 모순들을 조목조목 반박하셨다. 한편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한 50명의 웅변가들과 황제의 부인, 그리고 황제의 절친한 친구이자 군대의 지휘관인 뽈삐리오스와 200명의 군인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나 이들 모두 분노한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성녀께서도 끝내 목이 잘려서 순교하시고 말았다. 이후 400년이 지난 8세기가 되어 성녀의 시신이 시나이산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현재도 성녀의 성해로부터는 아름다운 향기와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성 스테파노 증거자(11월 28일)

 

열여섯 살의 수도자

성인께서는 8세기초 콘스탄티노플의 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성인의 부모님께서는 성인이 태어났을 때,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셨다. 예르마노스 총대주교(5월 12일)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 성인은 겸손과 온유함을 지니기 위해 노력하며 자라났다. 레오 황제(Leo the Isaurian, 717-741)가 성화공경에 대해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자, 성인의 부모님들은 이제 열여섯 살인 성인을 니코미디아(Nicomedia: 소아시아 북서쪽의 도시로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izmit])의 성 아브크센티오스 산(5세기에 아브크센티오스 성인[2월 14일]이 세운 수도공동체로 당시에는 아직 제대로 된 수도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음.)에 있는 수도자들에게 맡겼고, 성인은 아브크센티오스 성인의 다섯째 계승자인 요한 원로의 제자가 되어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도원장이 되심

그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성인께서는 가족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어머니, 여동생(두 명중 한 명)과 함께 다시 성 아브크센티오스 산으로 갔다. 성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근처의 수녀원에서 수녀가 되었고, 또 다른 여동생 하나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녀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이후 요한 원로가 안식하시자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은 한 마음으로 스테파노 성인을 수도원장으로 선출하였고, 성인의 지도하에 수도자들의 수가 스무 명이 되어 점차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성화에 대한 방어와 순교

레오 황제가 죽고(741년) 그의 아들 콘스탄틴 5세가 즉위하자 그 또한 성화공경에 대해 박해를 가하였으며,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수도자들을 가혹하게 처벌 하였다. 성인께서는 이런 위험한 시대에 힘과 용기를 얻으려고 자신을 찾아 온 수도자들에게 황제의 박해가 미치지 않는 흑해, 페르시아만, 키프로스, 시리아의 해안지역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남부 등으로 가도록 조언하셨다. 754년에 황제가 소집하여 성화뿐 아니라 성인의 성해마저 파괴토록 결정한 ‘거짓 공의회’ 뒤에도 굳건하게 정교신앙을 옹호하던 성인께서는 마침내 붙잡혀 11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 뒤, 766년(또는 764년) 53세의 나이로 참혹하게 순교하셨다.

 

 

성 안드레아 첫 사도(11월 30일)

 

처음 부름받은 사도

성 사도 베드로의 형제인 사도께서는 겐네사렛 호수 서편의 베싸이다 마을 출신이었다. 베드로 사도와 달리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던 사도께서는 직업이 어부였고,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며 사셨다. 처음에는 성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나중에 주님을 뵙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요 구세주이심을 확신한 사도께서는 자신의 형제인 시몬 (베드로)에게도 이 사실을 알린다.(요한 1:41)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알고 받아들였기에 성 안드레아 사도에게는 ‘첫 사도’라는 타이틀이 붙여지게 되었다.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도께서는 주님이 가시는 곳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그리고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히 받은 뒤로는 흑해(黑海) 연안과 그리스(곧, 마케도니아 지역)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다. 또한 아주 멀리 코카사스(Caucasus) 지역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고, 소아시아의 서부 지역인 에페소, 니케아, 칼케돈 등지로도 가셨다. 나중에 흑해 북부를 거쳐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파트라에 다다른 사도께서는 그곳 지방총독의 부인이 앓고 있던 몹쓸 병을 고쳐주셨다. 그리고나서 곧 그곳에는 커다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기게 되었다. 이후 총독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형제인 부관마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자, 다시 돌아온 총독은 안드레아 사도를 체포한다. 그러나 사도께서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셨고, 총독의 부관인 스트라토클레스를 파트라의 주교로 임명하시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사도께서는 끝내 머리를 땅으로 향한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그후 300년쯤 흐른 뒤 성 사도의 성해는 파트라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9세기 무렵 다시 파트라로 돌아온 성인의 성해는 터키인들의 침입이 있기전 로마로 옮겨졌다가, 마침내 1964년에 성인의 두개골 성해가 다시 파트라로 돌아왔다. 서방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성 안드레아 사도께서는 특별히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되고 있다. 중세시대의 스코틀랜드에는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으로 축성된 성당만 800개 이상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