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정교회 성인들의 생애(12월)

ttoza 2009. 11. 26. 19:15

* 12월에 축일이 있는 성인들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성인들의 축일은 대개 성인께서 안식하신(돌아가신) 날입니다. 예를 들어 순교자인 경우 순교하신 날입니다.

---------------------

 

 


 

성 요한 다마스커스인 수도자(12월 4일)


아랍치하의 다마스커스

A. D. 635년 시리아의 중심도시 다마스커스가 이슬람인들에게 함락된 뒤, 이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권리를 빼앗김과 동시에 아랍인 지배자들에게 조공(租貢, 곧 세금)을 바쳐야만 하였다. 칼리프(Caliph, 이슬람 국가의 왕) 압둘-말리크(Abdul-Malik 685-705) 시대에 그리스도인들과 관련된 모든 권한이 세르기우스 만수르(Sergius Mansur)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칼리프의 신임을 받는 인물로서 다마스커스에 사는 유력한 그리스도인 집안들 중의 한 집안 사람이었다. 675년경, 이처럼 신실하고 하느님을 잘 공경하는 가정에서 요한 성인이 태어났다. 성인은 어려서부터 자선과 친절을 베푸는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배우며 자라났는데, 이는 바로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재산을 드려 그리스도인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한 뒤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헌신하는 것을 보았던 데서 비롯된다.


이콘파괴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다

성인은 아버지가 입양한 양자 꼬즈마(Cosmas)와 함께 학식이 높은 이탈리아인 수도자에게서 철학과 당시의 모든 학문을 배웠으며, 특별히 시와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그리스어와 아랍어에 능통한 성인은 아버지를 도와 행정경험도 많이 쌓음으로써,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칼리프 왈리드(Walid 705-715)에 의해 그 직위의 승계자로 임명된다.

이후 이소리아 왕조의 황제 레오 3세(Leo III the Isaurian 717-741)가 이콘경배를 단죄하면서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자, 성인은 성경과 여러 교부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이콘에 경배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황제의 미움을 산 성인은 위조한 편지로 자신을 모함한 황제에 의해 다시 칼리프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결국 오른 손이 잘리는 중벌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날밤 성모님 성화 앞에서 기도하며 탄원하는 성인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오른 손을 원래대로 고쳐주셨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다시 회복된 자신의 손을 보고 놀란 성인은 앞으로 구세주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찬양하는 일에만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성가와 신학적 저술로 표현된 정교신앙

행정직을 사임한 성인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고나서 형제 꼬즈마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 성 사바스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성인은 가장 천한 일을 하며 겸손과 순종을 배웠다. 그뒤 성인은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성가들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부활절에 부르는 까논과 8음조의 성가중 많은 부분을 성인께서 작곡하셨다. 시적인 재능뿐 아니라 신학적인 통찰력까지 지니고 있던 성인께서는 저 유명한 작품 ‘지식의 샘’(Fount of Knowledge)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를 명백히 설명하셨다. 성인은 특별히 이콘파괴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 초기 교부들로부터 전해져 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왕도(王道, royal road)를 지켜냈다. 749년(또는 753년) 12월 4일 성인은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바르바라 대순교 성녀(12월 4일)


아름답고 지혜로운 처녀

성녀께서는 막시미아누스 황제(284-305)가 통치하던 시기에 시리아의 헬리오뽈리스(Heliopolis)에 살았던 부유한 이교도 디오스꾸루스의 딸이었다. 성녀께서는 뛰어난 미모(美貌)를 지니고 있었기에 성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딸을 가까이서 감시하곤 하였다. 어느 날 성녀의 아버지가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딸을 높은 탑 꼭대기에 있는 방에 가둔 다음 문을 잠가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에게 온갖 값진 것을 주었을 뿐 아니라 훌륭한 교육까지 시켰다. 그러나 성녀께서는 자연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성삼위이신 한 하느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온갖 세속적인 허영에서 돌아서 하늘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만을 열렬히 동경하였다.


인간을 구원하는 성삼위의 빛

한편 아버지 디오스꾸루스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창문이 두 개 달린 목욕탕이 성녀가 있는 탑 아래에 세워지고 있었다. 이것을 본 성녀께서는 일꾼들에게 창을 하나 더 내어 모두 세 개를 만들도록 시켰고, 그럼으로써 창을 통해 성삼위의 빛이 비치는 것을 상징화하였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성녀에게 호화스런 결혼계획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성녀께서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는 당신을 순결한 채로 그리스도께 바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반응에 화가 난 아버지는 목욕탕의 셋째 창문 또한 딸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자 더 폭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일에 대해 해명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성녀께서는 십자가 성호를 그으며 다시금 성삼위의 존재를 설명하였다. 분노에 찬 아버지는 자신의 칼을 빼어 들어 그 자리에서 딸의 목을 치려하였다.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

다행히도 성녀께서는 그 위험을 피해 산으로 몸을 피하였다. 허나 끝내 아버지는 딸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어 성녀를 그 지역의 통치자에게 넘겼다. 성녀께서는 통치자 앞에서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상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성녀께서는 모질고 잔인한 고문에 처해져, 살이 찢겨 나가고 옆구리가 불에 타며 머리는 큰 돌에 맞아 피를 줄줄 흘리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곤 어두운 감옥 안에 던져졌는데, 성녀의 몸은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이 온통 피멍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성녀의 몸을 말끔히 낫게 하시고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다음날 자신도 또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율리아나라는 이름의 여성과 함께 산꼭대기로 끌려간 성녀께서는 자신의 아버지 손에 의해 칼로 목이 잘림으로써 순교하셨다.





성 사바스 수도자(12월 5일)


여덟 살의 수도자

팔레스타인 사막의 수도자였던 성인께서는 439년 가빠도끼아의 무탈라스카(Moutalasca)란 곳에서 태어나셨다. 하느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까운 지역의 수도원에 들어간 성인께서는 가족들의 반대를 극복하면서 스스로 절제하는 생활과 시편암송에 몰두하였다. 사과 한 쪽을 먹고픈 욕망과도 싸워 마침내 탐욕을 물리친 성인께서는 더 나아가 금식과 철야기도 등을 통해 겸손과 순종,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조절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덕들을 익혀나갔다.


‘애늙은이’

십 년쯤의 세월이 흐른 뒤, 수도원장의 축복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간 성인께서는 그곳에서 에프티미오스 성인(1월 20일)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안내로 테옥티스토스 성인(9월 3일)의 수도원으로 가 머무르게 된다. 테옥티스토스 성인이 ‘애늙은이’(the child-elder)라고 부를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영적인 덕을 쌓은 성인께서는 469년 테옥티스토스 성인이 안식하신 뒤, 수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홀로 지내며 수도생활을 계속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프티미오스 성인의 지도를 받아 영적인 수련을 하셨다. 이때 사탄과 싸우는 성인의 무기는 오로지 십자가 성호와 예수기도였다. 그러는 동안 성인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수도사들의 수가 자꾸 늘어나 150명이 넘어서게 되었다.


교회를 위한 헌신

쉰 세 살에 사제직을 받아들인 성인께서는 테오도시오스 성인(1월 11일)과 함께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당시의 단성론 이단자들(Monophysite)과 싸우셨다. 그러는 한편으로 성인께서는 야수(野獸)를 길들이고, 병자를 고치며, 가뭄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땅을 위해 기도하셔서 단비가 내리게 하셨다. 512년과 531년 콘스탄티노플로 간 성인께서는 이단자들의 위험한 음모와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어리석은 행동들에 맞서 당시의 황제들 앞에서 올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수호하도록 간청하였다. 95세가 되어 잠시 앓아누운 성인께서는 532년 12월 5일 이내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때 이탈리아 베니스로 탈취되었던 성인의 성해는 1965년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반환되었다. 성인께서 세운 수도원은 정교회 수도원과 팔레스타인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크리티의 성 안드레아 같은 성인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정교회 예배의 기본을 이루는 규범서(Typicon, 띠삐꼰)가 확립되고, 많은 성가들이 작곡되기도 하였다.






성 암브로시오스 밀란의 주교(12월 7일)


로마 귀족의 자제

성인께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로마 귀족들 중의 한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성인은 349년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Augusta Treverorum[Trier: 룩셈부르크 국경에 가까운 모젤 Moselle 에 있는 서부 독일의 한 도시])에서 태어나셨으며, 성인의 아버지는 고올(Gaul: 고대에 라인강 남쪽과 서쪽, 알프스  서쪽, 그리고 피레네 산맥의 북쪽지역에 붙여졌던 이름. 오늘날 대부분의 프랑스와 벨기에 영토를 포함한다.) 지방을 관장하는 집정관(執政官)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성인의 어머니는 세 아들과 함께 로마로 되돌아왔다. 최고의 선생님들에게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성인께서는 법률공부를 마치자마자 발렌티니우스 1세 황제에 의해 에밀리아(Aemilia)와 리구리아(Liguria)의 통치자로 임명되어(375년) 그 지역의 수도인 밀란(Milan)으로 가서 거주하였다. ‘재판관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주교처럼 다스린’ 젊은 통치자의 지혜와 덕망 탓에 사람들은 금새 성인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밀란의 젊은 주교

당시는 제 1차 세계공의회(니케아, 325년)이후 오랫동안 아리우스파 이단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었던 시기였다. 373년 밀란의 아리우스파 주교인 아브크센티오스가 죽자 새 주교를 선출하기 위해 대성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정교인들과 아리우스파 사이에 벌어진 틈이 너무도 커서 아무런 합의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도시의 통치자인 성인에게 중재를 요청하며 사태를 해결해 주도록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온화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평화로운 정신으로 가득찬 성인의 말씀을 듣는 순간 모든 신도들은 큰 감동을 받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암브로시오스를 주교로!’라고 외치게 되었다. 자신은 이제 겨우 예비교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성인께서는 마음에 큰 부담을 느끼며 자신의 관저로 돌아온 뒤, 밤을 이용해 말을 타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주교직을 사양(辭讓)하던 서른 네 살의 젊은 법률가요 행정가는 끝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례를 받은 지 8일 만에 주교서품을 받아들였다.


서방에서 정교를 지켜내다

주교가 된 뒤, 성인께서는 당신의 모든 소유와 부(富) 그리고 세속적인 쾌락을 저버렸다. 돈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많은 부동산은 교회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성직을 온전히 감당하는 일에만 전념하셨다. 금식을 엄격히 지키면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면서 영적인 양떼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셨다. 성인께서는 25년 동안의 사목생활을 통해 서방(the West)에서 정교(Orthodoxy)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셨다. 성인께서는 많은 이교도들을 정교회로 이끌었으며,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6월 15일)도 그런 제자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성인께서는 397년 4월 4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빠따삐오스 수도자(12월 8일)


홀로 사막에서 지내다

성인은 6세기(또는 7세기) 무렵 에집트의 테베(Thebes)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부모는 경건한 신앙인들이었지만, 성인은 사막의 수도자가 되기 위해 부모 곁을 떠났다. 그리고 모든 세상적인 것들도 버렸다. 이때 성인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하느님의 완전하심(perfection)을 본받으려는 열망만이 타올랐다. 여러 해 동안 홀로 사막에서 수도하던 성인의 명성이 차츰 사람들에게 알려져 방문객들이 늘어나게 되자, 성인은 사막을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갈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의 한 구역에 자리잡은 성인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영적인 훈련을 할 수 있었다. 밤낮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성인에게 하느님께서는 기적을 행하는 은총을 주셨다.


온갖 병을 낫게 하는 능력

하루는 날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남자가 성인을 찾아와 낫게 되기를 간구하였고,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써 이 남자를 고쳐주었다. 또 한번은 수종(水腫, dropsy)으로 몸이 심하게 부어오른 한 남자에게 성당의 등잔 기름을 발라주고 십자가 성호를 그어줌으로써 낫게 하였다. 그리고 악령에 사로잡힌 젊은이를 만나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악령을 쫓아내기도 하였다. 성령이 충만한 채 그 덕(德)이 높아질수록 성인을 통한 기적은 더 많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성인께로 몰려들었다. 주님께서 명하신 가르침들을 철저히 지키며 사신 성인은 성경에 기록된 온갖 기적들을 행하는 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계속되는 기적들

이런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교회와 신자들을 깨우치고 그 믿음을 강하게 만들었던 성인께서는 수많은 수도자들과 고행자들에 둘러싸인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인의 유해는 가까이에 있는 이집트인 수도원에 묻혔다. 그뒤 1904년 고린토 근처의 한 고지대(루트라키 Loutraki)에 있는 작은 수도원의 성당건축 과정에서 성인의 성해가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그 수도원은 성인의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성모님의 모친 안나 잉태일(12월 9일)


쉼없는 기도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가장 순결한 거처를 예비하고자 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성 요아킴과 성 안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채 있었다. 이들(성 요아킴과 성 안나)이 아이를 낳지 못한 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바로 인간 본성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 데, 그것은 바로 죄와 죽음의 무게 아래에서 짓눌려 굴복당함으로써 출산의 기능이 영영 상실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성인은 자신들에게 지워진 이 불명예와 치욕을 거두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께서 정하신 준비의 시간이 꽉 찼을 때,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산에서 홀로 기도하던 성 요아킴과 자신의 집 뜰에서 고통 중에 울고 있던 성 안나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천사는 오래전 옛날의 예언이 그들 안에서 곧 이루어질 것임을 알렸다.


불가해한 기적

그것은 곧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는 새로운 계약의 참된 방주(Ark)요,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사다리이며, 불에 타지 않는 덤불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성 안나의 잉태로 말미암아 바로 이날, 죽음에 의해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본성의 불모성(不毛性, 곧 아이를 낳지 못함)은 끝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나이가 되기까지 자식 없이 살아온 성 안나가 놀랍게도 출산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씨없는 잉태의 불가해한 기적을 알리고 증언하셨으며, 동시에 지극히 거룩하신 테오토코스 동정녀 마리아의 심장과 자궁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출산을 나타내 보이셨다.


순결의 열매

성모님께서는 우연히 모든 여성들 가운데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순결을 완전하게 보존하여 지켜내리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내다보셨기 때문에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성모님의 처녀성(virginity)으로 말미암은 열매인 것처럼, 성모님 자신은 성 요아킴과 성 안나의 순결(chastity)로 이루어진 열매이다. 이와 똑같은 순결의 길을 따라 감으로써 우리 모든 수도자와 결혼한 사람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게 할 수 있다.






성 헤르만 알라스카의 선교사(12월 13일)


알라스카 선교의 시작

성인은 1756년경 모스크바 근처의 한 경건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 (성 세르기우스의) 성삼위 수도원에 들어간 성인은 얼굴의 암 때문에 고통을 겪었으나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낫게 된다. 1783년경 헤르만(Herman)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서원을 한 성인은 북극권(北極圈)에 있는 라도가(Ladoga) 호수의 발람(Valaam) 수도원에서 *나자리오스 수도원장의 영적인 지도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1793년 알라스카의 러시아-미국 합작회사가 선교사를 요청해옴에 따라 모스크바의 대주교는 발람 수도원에 이런 사정을 알리게 되었고, 나자리오스 수도원장은 허먼 성인을 포함하여 모두 10명의 수도사와 예비수도사를 뽑아 보내게 되었다. 성 피터스버그(쌍뜨 뻬쩨르부르그)를 출발한 선교사 일행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거의 1년 가까이 걸리는 여행 끝에 1794년 9월이 되어서 알라스카 남서쪽에 닿게 되었다. 그곳의 원주민인 알륫인들(Aleuts)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여서 1년도 되지 않아 7,000명이 세례를 받고 1,500쌍의 결혼성사가 거행되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아간 삶

그러나 이후 동료 선교사들이 바다에서 사고로 죽고, 다른 선교사들 또한 선교의 의욕을 잃은채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자 허먼 성인만이 홀로 코디악(Kodiak) 섬 근처의 스프루스(Spruce) 섬에 남게 되었다. 이곳에서 성인은 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부족한 물자(物資)와 엄혹(嚴酷)한 자연을 견뎌야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군데군데 헝겊을 대어 기운 옷을 늘상 입고 다녔던 성인은 금식을 오래 계속하는 한편, 먹거리로는 검은 딸기와 버섯, 그리고 약간의 야채를 썼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성인은 힘들여 일을 했고, 잠은 거의 자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쳤다. 성인은 불운한 그곳의 원주민인 알륫인들의 자상하고 애정깊은 아버지였다. 특별히 어린이들을 사랑하셨던 성인은 그 섬에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이 하느님과 성당을 사랑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리고 여름이면 근처의 여러 섬에서 온 젊은이들에게 원예(園藝) 기술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코디악 섬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성인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였으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나이가 듦에 따라 성인은 차츰 시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성인은 하느님에게서 자연을 지배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셨다.

1836년 11월 15일 성인은 81세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 성 세라핌 사로프의 수도자(1월 2일)의 영적 아버지이셨던 분.


 

 


 

성 티르소스, 레프끼오스, 갈리니꼬스 순교자들(12월 14일)


케사리아의 그리스도인

데시우스(Decius, 250년경) 황제의 박해기에 꿈브리끼우스(Cumbricius)가 소아시아 비디니아(Bithynia) 지역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와서 니꼬미디아와 니케아, 케사리아 도시들의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케사리아의 훌륭한 가문 출신인 그리스도인 레프끼오스는 이같은 잔인한 학살행위에 대해 몹시 분노하였고, 그래서 통치자를 만나 ‘이 탐욕스러운 개와 같은 인간이여,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돌과 나무를 마치 하느님인양 예배하도록 강요할 셈인가?’하고 꾸짖었다. 성인의 이런 대담무쌍(大膽無雙)함에 화가 치민 통치자는 곧 성인을 붙잡아 그의 살가죽이 천조각처럼 찢어질때까지 매질을 하게 한 다음, 목을 잘라 처형하였다.


레프끼오스 성인

레프끼오스 성인의 순교소식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동굴과 산 등으로 몸을 피하였으나 용감한 티르소스 성인만은 도리어 폭군인 통치자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으로서 피조물(被造物)이나 자연물들을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꿈브리끼우스는 우상을 섬기라는 황제의 명령을 무조건 따를 것만을 명령하였고, 성인께서 듣지 않자 성인의 손과 발을 묶은 다음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성인의 발목뼈를 부러뜨리고, 두 눈알을 도려내며, 몸 안으로 녹인 납을 부어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주님의 은총으로 보호를 받아 이 모든 고문들을 견뎌내셨다.


이교(異敎) 사제의 회심

자루에 담긴 채 바다에 던져지고, 사자들 앞에 버려지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성인께서 다시 살아 나오자, 박해자들은 성인을 비디니아의 작은 마을 아뽈로니아로 데리고 가 새로이 고문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성인의 흔들림이 없는 인내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룩한 놀라운 일들을 지켜보던 이교인(異敎人) 사제 갈리니꼬스는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한 분이신 하느님, 곧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욤감히 통치자 앞에 나서서 로마제국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가치없는 짓인지를 조롱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곧바로 붙잡힌 성인은 목이 잘려 순교하였고, 티르소소 성인은 좁은 나무 상자 안에 갇힌 채 오랜 시간에 걸쳐 톱으로 썰려서 순교하셨다.



 


 


성 하깨 예언자(12월 16일)


포로들의 귀환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Cyrus)는 바빌론 제국을 정복하였을 때(539 BC) 하느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성의 함락(586 BC)이후 노예로 잡혀있는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나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다의 총독 즈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즈라 1장)의 지도로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있다 풀려난 이들은 성도(聖都)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마자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예배를 다시 회복시켰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민족들의 반대와 위협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잃고 다리우스(Darius) 왕의 통치 때까지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예언자 하깨와 자카리아(2월 8일)를 일으키셔서 백성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하도록 일깨우셨다.


주님이 거하실 집

하깨 예언자는 제사장직을 담당하는 레위지파의 후손으로서 바빌론에서 태어났으며,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때 함께 귀환하였다.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즈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그들이 겪은 가뭄은 성전건축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벌로서 주님께서 보내신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모든 영광과 광채 속에 이 성전 안에 거하실 것임을 예언자의 입을 빌어 예고하셨는 데, 이는 바로 영속하는 영적 성전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영적인(spiritual) 성전

이처럼 유대인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가 성전을 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다그치는 예언자께서는 또한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속박에서 해방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산에 가서 나무를 찍어다가 나의 성전을 지어라. 나는 그 집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리라.”(하깨 1:8) 그러나 이번에는 돌과 목재, 못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곧 우리의 양심과 영혼과 마음으로 산 돌(living stones)이 되어 영적인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신다.(베드로 1서 2:5)


 


 


성 다니엘 예언자(12월 17일)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들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597 BC) 성전의 성물들을 몽땅 빼앗은 다음, 유다의 왕 여호야긴과 많은 귀족들을 거느린 채 고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이들 포로에 섞여있던 여덟 살의 다니엘과 동료 세 명(아나니야, 미사엘, 아자리야)은 모두 귀족출신의 잘 생긴 청년들로서 바빌론 왕의 신하가 되기 위해 궁정 환관(宦官)의 지도를 받으면서 칼데아(Chaldean: 고대 바빌론 지역) 언어와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면서도 다니엘은 율법의 모든 가르침들을 한 점 흠없이 지켰다.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는 왕의 식탁에서 제공되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으면서 도리어 금식과 기도로 자신들을 단련하였고, 채소와 물만을 먹으면서도 궁정의 다른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였다.(다니엘 1장 참조)


꿈의 해몽가

하느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소년에게 지혜와 지식의 은총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바빌론 왕국의 그 어떤 지식인들보다도 뛰어났으며, 특히 다니엘은 꿈과 환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받아 가지고 있었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지 삼년쯤 지났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꾼 꿈으로 말미암아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리하여 왕국의 모든 마술사와 술객(術客)들, 점성가들에게 자신의 꿈 내용을 알아내 풀이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꿈의 내용조차 알아내지 못하자 모두 죽이도록 하였다. 이때 다니엘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왕 앞에 나아가 왕이 꿈에서 본 형상(形象)의 우의(寓意, allegory: 사물에 빗대어 어떤 의미를 나타냄)가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가리킴을 명쾌하게 해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전 바빌론 왕국의 통치자요 모든 재사(才士)들을 거느리는 자리에 앉혔다.


사자굴에서 살아나오다

느부갓네살 왕의 죽음(562 BC) 이후, 메대인(the Mede: 페르시아의 고대 메디아에 살던 원주민) 다리우스가 권력을 잡게 되자, 그는 다니엘을 모든 태수(太守, satrap: 고대 페르시아의 지방장관)들을 다스리는 세 정승(政丞)들 중 으뜸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다른 태수들과 정승들이 다니엘을 시기한 나머지 교묘한 계략을 세워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그를 사자굴 속에 던져 넣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다시 한 번 더 당신의 신실한 종을 지켜주셨다. 다리우스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 올리고, 대신 그를 모함하였던 적들로 사자의 밥이 되게 하였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되돌아 온지 이 년쯤 되어 다니엘 예언자는 팔십 세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c. 534-530 BC)


 

 


 


성 아나스타시아 대순교자(12월 22일)


‘부활’이라는 뜻의 이름

‘부활’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성녀께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로마제국의 서쪽을 통치하던 시기(284-305)에 로마에서 사셨다. 성녀께서는 부유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 이교도의 딸이었지만 경건한 어머니 파우스타(Fausta)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 그 영혼 속에 심겨져 있었다. 성녀의 어머니께서는 딸을 지혜가 넘치고 성경에 통달하였으며 덕망이 높은 흐리소고누스(Chrysogonus)에게 맡겨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게 하였다. 그런데 성녀의 아버지는 성녀의 뜻과는 반대로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푸블리오스와 결혼하게 하였다. 그후 성녀께서는 병을 구실로 하여 남편과 잠자리를 피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성녀의 영혼은 하늘에 계신 신랑[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동정(童貞, virginity)으로 천사와 같은 삶을 살고픈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의 후원자

그러면서 한편으로 성녀께서는 밤이면 허름한 평민처럼 꾸민 채 하녀 한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있는 감옥을 방문하곤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 페르시아 원정길에 배가 파선되어 남편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성녀께서는 역시 감옥에 있는 영적인 아버지 흐리소고누스의 허락을 받아 당신의 많은 재산을 자선사업에 기부하고는 다시 여러 감옥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를 고백하다 갇혀있는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셨다. 당시 로마의 감옥에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흐리소고누스 성인께서 황제의 명에 의해 참수형을 당한 뒤, 다시 로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떨어졌다.


테오도티 성녀와 함께

하루 밤사이에 많은 이들이 칼과 불에 의해 그리고 또는 물에 집어넣어져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같은 광경을 바라본 성녀께서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지 않았다. 곧바로 로마의 대사제 앞으로 끌려 나온 성녀께서는 그의 온갖 위협과 유혹을 견뎌내었고 마침내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서둘러 비티니아(Biyhynia)의 니케아로 간 성녀께서는 그곳에서 경건한 과부 테오도티(7월 29일)와 함께 감옥을 다시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았다. 테오도티 성인께서 붙잡혀 세 아들과 함께 불화로 속에서 순교하신 뒤, 성녀께서는 감옥에서 한 달 내내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지나셨다. 그리고 마침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배되어 있던 팔마리아(Palmaria) 섬에서 약 200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성녀의 성해는 겐나디오스 총대주교때(5세기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녀의 이름을 지닌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에브게니아 수녀순교자(12월 24일)


남장(男裝)한 수도사

성녀께서는 코모두스 황제(180-92) 시절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필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인 이교도였는데, 황제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에집트로 이주한 필립 장관은 사랑하는 딸 에브게니아를 위해 당시 가장 훌륭한 교사들을 고용하였다. 이런 교육과정을 통해 성 사도 바울로의 서신을 접하게 된 성녀께서는 곧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밤을 틈타 내시(內侍 eunuch)인 두 하인 쁘로따스, 히아신뜨와 함께 도시 바깥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찾아 나섰다. 그뒤 다시  남자 수도자들의 모임에 대해 들은 성녀께서는 머리칼을 자르고 남자 옷차림으로 꾸민 다음(성녀는 자신을 에브게니우스 곧, 남자라고 소개하였다.) 그 공동체의 지도자인 헬레누스(Helenus) 주교를 찾아갔다. 이미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던 주교께서는 그들 셋(곧, 에브게니아 성녀와 쁘로따스, 히아신쓰)을 받아들여 세례를 베풀고, 수도자들의 무리에 들게 하였다.

3년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고행과 영적인 투쟁을 수행한 에브게니아 성녀는 곧 다른 형제 수도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여자이기에 그 연약함을 극복하려고 더욱 열렬히 노력한 성녀에게 다른 수도사들은 얼마전 안식한 수도원장의 뒤를 이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런 요구를 물리칠 수 없었던 성녀께서는 성경말씀대로(마르코 9: 35) 수도원에서 필요한 일들 가운데 가장 천하고 힘든 일들, 곧 물을 길어나르고 세탁을 하고 땔나무를 준비하는 일등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면서 성녀께서는 수도원에서도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방에 기거하였다.


순결한 영혼을 순교의 제단에 바치다

그뒤 알렉산드리아의 한 상류층 부인의 시샘과 모함으로 말미암아 필립 장관 앞에 소환되어 오게된 성녀께서는 마침내 아버지인 장관께 자신의 진짜 존재(자신이 남자 수도사가 아니라 실은 여자이며 바로 오래도록 그 행방을 찾던 사랑하는 딸이라는 사실)를 알리게 된다. 이런 놀라운 사실과 기적같은 재회에 감격한 아버지 필립과 어머니 클라우디아, 성녀의 두 남자형제, 그리고 다른 많은 이교도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아버지 필립은 곧 주교로 서품되어 일년 동안 그 거대한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필립을 시기하는 이교도들이 황제에게 고발하자 황제는 다른 사람을 장관직에 앉혔고, 그 새로 임명된 장관은 성당에서 기도중인 필립 주교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 어머니, 쁘로타스, 히아신뜨와 함께 로마로 되돌아온 성녀께서는 다시 로마의 장관에게 불려가서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라는 명령과 함께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12월 25일 토굴감옥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성 시몬 아토스산의 수도자(12월 28일, 시모노 페트라 수도원 설립자)


동굴 속의 수도자

성인께서는 13세기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약화되고 십자군들의 침입이후 나뉘어져서 니케아(Nicaea)로 옮겨가 있던 시대에 아토스산에서 수도자로 사셨다. 이 세상의 덧없음을 버리고 성산(聖山, Holy Mountain)으로 간 성인께서는 영적인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부지런히 덕을 쌓았고, 마침내 그 분의 허락을 받아 홀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바다로부터 300미터나 곧추 솟은 높은 위치에 있는 아토스산 서쪽의 작고 습기찬 동굴을 은둔처로 삼은 성인께서는 밤낮을 그곳에서 보내며 악마의 공격을 이겨내고, 믿음과 희망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로 무장한 채 영적인 수련을 계속하셨다.


새로운 베들레헴

그런데 성탄축일을 몇 일 남겨둔 어느 밤, 갑자기 하늘의 한 별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성인이 있던 동굴 맞은쪽의 가파른 바위산 위로 떨어져 내려와 머물렀다. 그리고 그같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마치 베들레헴의 별처럼 그 별이 바위산 위에 자리를 잡자 하늘로부터 ‘시몬, 내 아들의 충실한 종이여 의심하지 말라. 이 표징을 보고 다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말라. 그것은 수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내가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를 원하는 까닭이다.’ 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머뭇거림이 없이 ‘새로운 베들레헴’을 세우기 위한 일에 온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셨다.


기적을 베푸는 기름

그 험준한 곳에 수도원을 세우는 동안 하느님의 종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주어져서 다른 일꾼들이 모두 놀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단 수도원 건물이 지어지고 나자 꾸준히 수도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한 번은 바닷가로 쳐들어 온 사라센(Saracen: 시리아와 아라비아 사이의 사막에 살았던 유목민족의 일원) 해적들 중 하나가 성인을 공격하려고 달려들다가 별안간에 눈이 멀고 팔은 마비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그를 위해 기도해 주셨고, 완전히 고침을 받은 그와 함께 해적일당은 모두 수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성인께서 베푼 기적과 예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적인 가르침들은 오래도록 성인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종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었다. 이후 성인께서는 평화로이 안식하셨고, 그 무덤으로부터 흘러나온 향기나는 기름이 많은 기적을 일으킴으로써 성인은 ‘향유를 쏟아내는 분’(Myroblitis 미로블리티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 멜라니 로마의 수녀(12월 31일)


로마의 귀부인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내에서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되어 제도화되기 시작하던 4세기 무렵, 로마 귀족출신의 많은 여성들이 에집트에 있는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들은 특히 성 예로니모스(6월 15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 세상의 모든 허영을 던져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여인들 가운데에는 아셀라, 파비올라, 마르켈라, 파울라와 그녀의 딸 에프스토키움, 멜라니와 그녀의 손녀 멜라니(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녀임.)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재산과 명예, 편안한 삶을 포기한 채 로마나 성지(Holy Land) 등에서 금욕생활과 자선활동에 헌신하였다.


세상의 허영을 등지고

성녀 멜라니는 383년 출생하여 겨우 열네 살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뜻에 따라 가까운 친척 삐니안(Pinian)과 결혼하였다. 성녀께서는 결혼직후부터 동정의 삶을 살기를 바랬으나 남편의 뜻에 따라 첫 딸을 낳았다. 그리고 403년에 둘째를 아들로 낳게 되었으나 미숙아(未熟兒)로 낳아 아기는 출생직후에 죽고 말았다. 이후 딸마저 죽고 삐니안의 아버지도 죽게 되자 성녀와 남편 삐니안은 호화로운 자신들의 대저택을 떠나 로마 가까운 곳에 있는 한 가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행자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병자와 죄수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거룩한 삶을 실천하다

당시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성녀와 삐니안은 황후의 도움을 받아 8,000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주면서 한 사람당 각각 금화 세 개의 하사금(下賜金)을 주었다. 그리고 믿을만한 대리인을 고용하여 제국 곳곳에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게 한 다음, 금과 보석, 값비싼 그릇들과 비단등을 봉헌하였다. 토지등을 팔아서 생긴 돈은 자선사업에 기부하였다. 나중에 성지(聖地)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생활을 하던 성녀께서는 439년 예루살렘에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