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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2월)

ttoza 2010. 2. 3. 19:02

성 트리폰 순교자(2월 1일)

 

염소를 돌보던 소년

성인은 프리지아(Phrygia)의 람프사쿠스(Lampsacus)에서 태어나셨다. 단순하면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부모의 영향으로 성인은 어릴 때부터 성경의 덕을 몸에 익히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염소를 돌보는 겸손한 목동인 성인에게는 병을 고치고 악령을 내 쫗는 능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임하였다. 당시 고르디안(Gordian, 238-44) 황제의 딸은 오래도록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악령이 이렇게 소리쳤다. ‘트리폰만이 나를 내어 쫗을 수 있다.’ 황제는 즉시 사람들을 보내어 열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이 소년을 찾아냈다. 로마로 이끌려 온 성인은 곧 기도를 통해 악령을 몰아냈다. 황제는 감사의 표시로 여러 가지 선물을 성인에게 주었고, 성인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기쁨’의 순교자가 되시다

250년경 조용히 본래의 직업(염소를 돌보는 일)으로 돌아와 일하던 성인에게 이윽고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가 닥쳤다. 성인은 그리스도교의 전파자로서 제국의 동쪽을 책임지던 장관(Prefect) 아킬리누스에게 고발당하였다.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 앞에 순순히 나타난 성인은 니케아(Nicaea)의 법정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목과 손에 칼(죄수의 몸을 붙들어매는 형구[形具])이 씌워진 성인은 목검으로 세 시간동안이나 얻어맞았다. 이런 고문에도 불구하고 성인에게 별다른 상처가 생기지 않자, 고문하는 이들은 아킬리누스가 타는 말에 성인을 붙들어 맨 다음, 도시 외곽의 돌짝밭길을 맨몸인채로 이끌려 달리게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인의 발에 못을 박아 광장으로 질질 끌고 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 몸은 횃불에 그을렸지만 성인은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견디면서 오히려 고문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써 젊은 순교자가 겪던 이런 고통은 곧 천상의 기쁨(트리폰[Tryphon]이라는 이름은 ‘트리피’[τρυφή], 곧 ‘기쁨’[delight]이라는 말에서 비롯된다.)으로 변화되었고 모여있던 군중들의 존경을 자아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보석으로 장식된 화관이 내려와 성인의 머리에 씌어졌다. 그리고 성인은 안식하셨다. 니케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인의 유해를 그곳에 매장하려 하였지만 성인이 환상 중에 나타나 자신이 묻힐 곳은 자신의 고향이라고 알려줌에 따라 람프사쿠스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수백년동안 성인의 성해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성인에게는 특별히 정원(庭園)과 경작지등이 메뚜기나 뱀 따위의 파충류, 작은 해충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원이 많이 드려진다.

 

 

주님의 입당 축일(2월 2일)

 

모든 법에 순종하시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대로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의 어머니가 지켜야 할 40일의 정결기간이 끝나자,(레위기 12:2-4)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 주님께 바쳤다. 왜냐하면 모든 처음 난 것은 주님께 속하는 것이며,(출애굽 13:15) 따라서 어린 양이나 (가난한 가정의 경우) 비둘기 등으로 대신하여 바쳐야만 하였기 때문이다.(레위기 12:8) 이는 바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법을 주시는 분께서는 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마태오 5:17) 마찬가지로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 우리의 본성을 몸소 취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법의 명령에 순종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오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놓으신다.

 

만민에게 베풀어진 구원

예수님께서 성전에 다다르셨을 때, 그곳에는 의롭고 경건한 시메온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들을 지키면서, 성령께서 알려주신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던 분이었다. 그때, 성 시메온은 자신의 팔을 뻗어서 구세주를 안고 축복하면서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나이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나이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나이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나이다’(루가 2:29-32)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에 따라 첫 계약과 옛(낡은) 법은 사라져 없어지고, 은총의 빛에게 그 자리를 내놓은 채 물러서게 되었다.

 

우리의 죄를 속(贖)해 주시는 분

그리고 아세르(Asher) 지파에 속하는 나이 많은 과부 안나(Anna) 또한 성당에 와서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안나 성녀께서는 자주 성당에 와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으며, 금식과 기도를 하면서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 안나 또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스라엘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되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이후 헤롯의 살해의도를 알게 된 요셉과 성모님께서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에집트로 피신하였고, 갈릴리 나자렛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성 니콜라스 일본의 대주교(2월 3일)

일본의 사도인 성 니콜라스는 1836년 스몰렌스크 지방의 한 마을인 예고로브카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이 이반 디미뜨리에비치 카사트킨이었던 성인은 그 마을의 매우 경건한 보제 요한 카사트킨 부부의 자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인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성인의 어릴적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이후 자라면서 성인은 먼 곳에 선교사로 가기를 희망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을 생각했으나 이후 신비스러우면서도 폐쇄적인 일본에 대해 알고 난 뒤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1860년 성 피터스버그(St. Petersburg) 신학대학의 사학년에 재학중이던 성인은 일본의 하코다테(Hakodate)에 있는 러시아 영사관에서 근무할 신부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인은 곧 이것이 자신을 부르는 하느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학업을 마치는대로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받아 수도서원을 한 성인은 바로 보제와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극동지역으로 떠났다.

생활방식이 그리스도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더구나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던 당시의 일본은 정교회 선교를 하기에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은 외국인을 야수(野獸)로, 그리스도교는 악한이나 마법사들이 소속된 상스러운 집단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은 이후 팔년 동안 일본말과 일본의 문화, 관습, 일본 사람들의 생활방식 등을 배우는 데 전념하였다. 관청의 끊임없는 감시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노력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성인은 신도(神道)의 제사장 사와베와 일본인 의사 사카야를 정교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약 열다섯 명의 일본인들로 정교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때 성인은 개종자의 수를 많이 늘리려고 애쓰기보다는 정교 신앙을 갖게된 이들이 진정하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성인이 선교활동을 시작한지 12년이 되는 1873년에서야 일본정부로부터 정교회 선교에 대한 공식적인 허가가 내려지게 되었다. 그 해에 선교센타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도쿄로 옮기고나서 성인은 더욱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그로써 신도의 수는 곧 천 명에 이르게 된다. 이 년 뒤 1875년에는 첫 일본인 사제가 배출되었고 1878년까지 일본에는 4천여명의 정교인과 많은 정교 공동체(community)들이 생겨났다. 이토록 짧은 기간 안에 이런 놀라운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말로 진행되는 성당예배와 교육, 그리고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서적의 출판에 힘입은바 크다.

1880년 3월에 성인은 일본의 첫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후 성인은 물질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쿄에 그리스도 부활 대성당을 완공하였고, 여러 예식서들을 번역하는 한편 일본어로 된 정교신학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인은 세례예비자들과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웠고, 일본인 성직자의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열기도 했다. 비록 성인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함께 러시아교회의 전통과 예배관습 등을 일본에 전해 주긴 하였지만, 일본어를 쓰면서 일본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채 성장해 가는 진정한 일본정교회가 세워지도록 힘썼다.

1905년 러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성인은 사랑하는 조국과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인 일본민족의 앞날을 위해 고뇌에 찬 기도를 드렸다. 이 고난의 시기에 성인은 대주교의 직을 부여받게 된다. 성인이 일본땅을 밟은지 어언 반세기가 된 1911년 일본에는 한 분의 대주교와 또 한 분의 주교 그리고 사제 35명, 보제 6명, 성가지도자 14명, 교리교사 116명, 260여개의 정교공동체에 속한 3만 3천여명의 신도들이 있게 되었다.

1912년 2월 3일 76세의 나이로 성인은 평화로이 안식하였고, 1970년 성인에 대한 공경이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성 이시도로스 수도자(2월 4일)

 

요한 흐리소스톰 성인의 수제자

성인께서는 4세기말경 알렉산드리아의 매우 지체 높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셨다. 그곳의 유명한 학교에서 신학교육뿐 아니라 세속학문 등도 깊이 있게 공부한 성인께서는 교부들 가운데서도 특히 요한 흐리소스톰 성인의 가르침을 열렬히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잠시 동안 나일 삼각주 동쪽의 펠루시움에서 수사학(修辭學, rhetoric)을 가르쳤던 성인께서는 이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니트리아의 사막으로 들어가 한 해 동안 금욕생활을 하였다. 이후 다시 펠루시움으로 되돌아 온 성인께서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수사학과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활용하여 교인들을 가르치자마자 곧 이집트 전역에서 이름이 나게 되었으며, 많은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성인으로 말미암아 정교회로 개종하기도 했다.

 

영적인 조언자(助言者)

이후 한 수도원에 머무르기 시작한 성인께서는 당신의 남은 삶을 고독 속에서 보내셨다. 세례자 요한 성인을 빼닮은 엄격한 금욕생활로 영적 수련을 행하던 성인께서는 오늘날 2,000통이 넘게 남아 있는 편지를 통하여 간결하고도 심오한 영적 가르침들을 수년 동안 사람들에게 베푸셨다. 성인과 서신을 주고받은 상대자들은 당대의 모든 부류, 온갖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성인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대해 영적인 통찰력을 갖고 대답해 주셨다. 또한 성인께서는 서정시적인 어조로 성직의 존귀함을 찬양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치 않은 행동을 일삼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을 꾸짖기도 하였다.

 

교회는 고난 속에서 준비한다

세상의 권력에 대해서도 의연했던 성인께서는 지방의 행정관이나 주지사 그리고 심지어는 당대의 황제 테오도시오스 2세(408-450)에게조차도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으면서 하느님의 백성들과 거룩한 교회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이같은 권위있는 행동 탓에 성인에게는 많은 박해가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혀 동요치 않고 굳굳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과 교회는 앞날의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과 십자가 속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인께서는 449년 무렵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아가티 순교자(2월 5일)

서방(the West)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들 가운데 한 분인 성인은 시실리의 까따니아(Catania)에 있는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건한 삶을 살았던 성인은 자신의 외적 아름다움에 더하여 참된 믿음과 거룩한 성덕을 기르면서 자라났다. 251년경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가 심하던 시절, 성인이 체포되었을 당시의 나이는 채 열다섯 살이 되지 않았었다. 지방장관 퀸티니우스는 재판정에 나타난 성인의 아름다움에 끌려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거절을 당하자 한 달 동안 사악한 여인 아프로디시아에게 맡겼고, 그 여자는 성녀로 하여금 퀸티니우스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온갖 간사한 방법으로 유혹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꾀어도 성인이 굳건한 바위같은 신앙으로 흔들림이 없자 그들은 다시 퀸티니우스 앞으로 성인을 끌고 왔다.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난 몸으로서 어찌 노예처럼 구는가?' 라고 퀸티니우스가 묻자, 성녀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참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데 그것은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스스로를 완전히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지방장관은 자신이 섬기는 우상들을 성녀가 무시하자 얼굴을 때리고는 감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성녀는 만약 생명을 구하고 싶으면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성녀는 우리의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대답하면서 이 명령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성녀를 나무기둥에 매단 채 때렸다. 그리고는 쇠로 된 발톱모양의 기구로 성녀의 몸을 찢고 토치램프에 불을 붙여 성녀의 몸에 난 상처들을 그을렸다. 이 때 성녀는 지방장관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알곡은 도리깨질을 당하고 까불려서 겨를 날려버린 뒤에야 비로소 창고에 들어간다. 내 영혼도 육체의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영원한 복을 누릴수 없다’

퀸티니우스는 고문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성녀의 가슴을 도려내도록 시켰다. 그리고는 피를 흘리는 성녀를 토굴(土窟)감옥에 던져 가두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한밤중에 성녀의 수호천사가 눈부신 빛 가운데서 성 사도 베드로와 함께 나타났고, 성 사도께서는 성녀의 상처를 모두 치료해주셨다.

그 뒤로도 퀸티니우스는 성녀를 네 번씩이나 재판정으로 불러냈다. 성녀는 고문을 당할 때마다 매번 다시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되었고, 그런 상태로 다시 나타났으나 퀸티니우스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은채 성녀의 옷을 모두 벗기게 한 뒤 질그릇 조각들이 깔린 곳 위와 이글이글 불이 타오르는 석탄더미 위로 성녀의 몸을 굴리게 하였다. 그 때 갑자기 그 도시 전체에 지진이 일어나서 퀸티니우스가 거하는 궁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리고 성녀의 소식을 듣고 성난 군중들이 지방장관의 청사로 몰려가 성녀를 풀어주지 않으면 퀸티니우스를 불태워 죽이겠노라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고문을 행하던 사람들이 고문을 그쳤고, 성녀는 다시 감옥으로 돌려졌다. 감옥에서 성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굳건하게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기도하고,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 뒤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고 안식하였다.

사악한 퀸티니우스는 성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였고, 그가 타고 있던 마차의 말이 갑자기 내달았을 때 마차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성녀가 안식한지 일년 되던 해에 에트나(Etna)산이 폭발하였고, 까따니아는 집어 삼킬 듯이 흘러 내리는 용암(熔岩)으로 말미암아 도시 전체가 멸망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그 도시의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이교도들까지도 성녀의 무덤으로 달려가 성녀의 석관(石棺)을 덮고 있던 천을 들어 마치 방패처럼 밀려드는 불(용암)의 강을 향해 들고 있었다. 그러자 곧바로 용암의 흐름이 멈추었다.

그 뒤로도 수세기 동안 같은 기적이 여러 번 되풀이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성녀는 그 도시의 수호성인으로서 까따니아의 사람들에게서 열렬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성 포티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2월 6일)

 

성인은 810년 콘스탄티노플의 명문가(名門家) 중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아버지 세르기오스는 성 타라시오스(2월 25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형제 사이였고, 어머니 이리니의 남자형제는 테오도라 황후의 여자 형제와 결혼한 사이였다. 성인의 부모님들은 수도자들을 존경하고 따랐는데, 안타깝게도 성화(聖畵 icon)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던 때 순교하셨다. 그리고 당신들이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부(富)나 높은 지위보다도 더 귀한 유산, 곧 죽음 앞에서도 변치 않는 참된 믿음에 대한 사랑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성인은 교회와 세속적인 영역 모두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성인은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였고, 이로써 성인이 통달하지 못한 분야가 없었다. 또한 당대(當代)에 학문의 폭과 깊이에서 성인을 능가할 만한 이가 없었으며 성화파괴(iconoclasm)의 소용돌이 뒤에 이어진 비잔티움의 지성적 부흥기에 중심적 인물이 되었다. 성인은 마그노라(Magnaura)궁 안에 세워진 제국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신학 등을 가르쳤다.

857년 미하일 3세 황제의 삼촌인 바르다스(Bardas)가 권력을 잡고는 시이저(Caesar)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난한 성 이그나티오스 총대주교(10월 23일)의 사임을 강요하면서 지혜롭고 경건한 포티오스 성인을 그의 후계자로 선출하도록 성직자들을 압박하였다. 성인은 완강하게 자신이 총대주교에 선출되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한 신도에서 단 육일만에 모든 성직(보제, 사제, 주교)에 대한 서품을 두루 거친 성인은 858년 12월 25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에 올랐다.

매우 이례적(異例的)으로 최고의 성직에 오른 성인은 전(前) 총대주교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사랑으로 교회를 이끌면서 일치와 평화를 재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 성인은 교회 안에 남아있는 마니교(摩尼敎)와 성화파괴 이단들에 맞서 굳건한 행동을 보였으며, 성화파괴주의자들로 말미암아 파괴된 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자선기관들을 다시 복구하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야만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성 이그나티오스의 지지자들을 달래려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성인은 폭력적인 방법을 쓰려는 정부의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은채, 859년 공의회(Council)를 열어 성 이그나티오스의 총대주교직 해제를 확정하고 그를 미띨리니로 그리고 나중에는 다시 테레빈투스로 추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에 대해 적대적인 선동(煽動)행위가 그치지 않자 861년 ‘제 1차-2차’(First-Second)로 알려진 공의회가 소집되어 정교성(Orthodoxy)의 회복을 승인하고 성화파괴주의(iconoclasm)에 대한 분명한 단죄를 공포하였다. 또한 포티오스 성인의 총대주교직 임명이 정당함을 인정하였다.

한편 이그나티오스 성인을 지지했던 당시의 오만하고 야심에 찬 로마 교황 니콜라스 1세(858-868 재위)는 861년의 공의회를 기회로 삼아 권위주의적인 교황제도의 확립을 바라면서 전체 교회에 대한 수위권(首位權 supremacy)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비잔티움 교회의 내부 문제에 대한 교황의 간섭에 직면하게 된 포티오스 성인은 로마교회의 생소하고 전에 없던 관습들(이를테면 성직자의 독신제도, 토요일의 금식, 성찬예배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쓰는 것등)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성인의 대응에 화가 난 교황은 동방의 모든 주교들에게 편지를 써서 포티오스 성인이 다른 사람의 (총대주교) 지위를 불법적으로 차지했다고 고발하면서 성인의 총대주교직을 박탈한다고 공포하였다. 또한 교황은 ‘제 1차-2차’ 공의회의 결정은 무효라고 천명하였다. 더 나아가 교황은 서방교회의 주교들로 이루어진 공의회를 로마에서 소집하여 포티오스 성인의 총대주교직 박탈을 선포하고 성인에게서 서품을 받은 모든 성직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리고 미하일 3세 황제가 이같은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반대하자 865년 교황은 전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수위권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통지하였다. 그리고 나서 뒤이은 편지들을 통해 교황은 포티오스 성인이 온갖 모욕을 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해 성인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성인은 황제의 지원에 힘입어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860년 성인은 학식이 높은 친구이자 동료인 콘스탄티노스(우리가 지금 성 끼릴로스로 공경하는 분, 5월 11일)와 그의 형제 메토디오스(올림푸스산에서 온 수도자)로 하여금 남(南)러시아의 카자르(Khazars)로 예비적인 선교활동을 떠나도록 한다. 이후 삼년 뒤 모라비아(Moravia) 군주의 요청에 응하여 성인은 발칸반도에 있는 슬라브 민족의 개종을 불러 일으킨 위대한 선교활동에 두 형제를 보내게 되었다.

867년말 미하일 3세 황제가 암살되고 바실리오스 1세(마케도니아 왕조의 창시자)가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즉시 포티오스 성인의 직위를 박탈하고 수도원 감옥에 가둔 다음 이그나티오스 성인을 다시 복직시켰다. 이그나티오스 성인의 평화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티오스 성인의 반대자들은 성인이 서품한 모든 성직자들을 다시금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특별히 라틴(서방)교회의 ‘필리오케’(Filioque) 교리(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 정교회는 이 교리가 니케아 [신앙의] 신조에 어긋나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봄.)의 오류와 이 교리를 덧붙인 니콜라스 교황을 정죄하고 모든 이단에 대한 정교 교리의 승리를 선포한 867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두(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전임 니콜라스 교황의 승계자인 하드리안 2세 교황은 869년 공의회를 소집하여 포티오스 성인을 다시금 정죄하고, 867년의 공의회가 무효임을 선언하면서 공개적으로 공의회의 법령집(Acts)을 불태웠다. 라틴인들이 ‘제 8차 세계공의회’라고 부르는 잘못된 공의회(870년)에 참석한 적은 수의 주교들은 황제의 권위에 압도당한채 포티오스 성인을 정죄하고, 성인의 지지자들을 제국의 국경지대로 추방하였다.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주교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많은 사제들은 성직마저 박탈당했다.

죄인처럼 주교회의에 불려나온 성인은 자신에 대한 고발에 대해 답변할 것을 요청받자, ‘하느님께서는 침묵하는 자의 소리를 들으신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침묵을 지킴으로써 단죄받음을 피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계속해서 심문하는 자들이 대답을 강요하자 성인은 ‘나의 정당성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성인은 질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과 사람과의 모든 만남을 박탈당한 채 삼 년동안 불평 한 마디 없이 혹독한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무고한 이그나티오스 성인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않은채, 성인은 도리어 고통받는 동료들에게 편지를 통해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황제와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는 동안 자신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깨닫게 된 주교들은 황제에게 간청하여 870년 공의회의 결정들이 무효임을 공포토록 하고 포티오스 성인 또한 풀려나도록 하였다. 성인은 최고의 예우를 받으면서 궁정으로 안내되었고, 바실리오스 1세 황제는 성인을 자기 자녀들의 교사로 임명하였다. 포티오스 성인은 즉시 이그나티오스 성인과 화해하였다. 경쟁관계에 있는 두 당파의 희생양이었던 두 성인은 서로를 따뜻이 얼싸안았고, 성인은 날마다 이그나티오스 성인을 방문함으로써 노쇠한 총대주교(성 이그나티오스)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877년 10월 23일 이그나티오스 성인이 안식하시자 교회는 만장일치로 포티오스 성인을 다시금 총대주교직에 선출하였다. 879-88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383명의 교부들과 교황의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포티오스 성인의 주재로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포티오스 성인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고, 870년 공의회의 무효화가 이루어졌으며, 특별히 신앙의 신조에 첨가된 이단적인 교리를 포함한 모든 새로운 고안물(考案物 innovation)이 정죄된 가운데 두 교회(동방과 서방) 간의 친교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레오 6세(886-912 재위)는 아버지 바실리오스 1세를 이어 등극하자마자, 자신이 아버지에 대하여 꾸민 음모와 관련해서 성인의 간접적인 책임을 물어 곧바로 성인을 총대주교직에서 파면하였다. 그리고 성인은 죄인으로서 아르메니아 수도원에 감금된 채 오 년을 지내야 했다. 이 때 책 한 권 없는 자신의 방에서 성인은 ‘성령의 신비로운 발현’에 관한 글(Mystagogy of the Holy Spirit, 필리오케[Filioque] 이단에 대한 조직적인 반박문)을 쓴다. 다가올 충돌을 예상하여 이 논문을 거룩한 교회에 대한 자신의 증언으로서 남긴 채 성인은 893년 2월 6일 평화로이 안식하였다. 곧바로 성인의 무덤에서 일어난 많은 기적들로 말미암아 성인의 오랜 적들조차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성 떼오도로스 대순교자(2월 8일)

 

군대의 사령관

성인께서는 아마시아(Amasia)에서 멀지않은 한 작은 마을 출신이었다. 성인의 용기와 뛰어난 웅변술에 감탄한 리끼니우스 황제(320년경)는 성인을 군대의 총사령관이면서 동시에 헤라클리아(Heraclea) 도시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직무를 시작하자마자 성인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성인의 불을 토하는 듯한 연설에 감동한 그곳 시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성인께서는 그 도시 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던 용을 죽임으로써 당신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증해 보여주기도 하셨다.

 

우상들을 부수다

이처럼 자신의 뜻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 황제는 곧바로 성인을 궁으로 소환(召還)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도리어 금과 은으로 만든 우상들을 가지고 헤라클리아로 오도록 황제를 초대하였다. 황제는 기꺼이 그 도시에 가 매우 질서있게 정돈된 도시의 모습을 보고는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성인더러 여러 신(神)들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경건한 신앙심을 보이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공적인 희생제사를 드리기 전날, 황제의 허락을 받아 금으로 된 신상(神像)들을 집으로 가지고 온 성인께서는 그것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그 금조각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떼오도로폴리스’

태연히 희생제사 의식을 기다리던 황제는 성인이 행한 일들에 관해 전해 듣고는 놀라고, 차마 믿지 못하더니, 이내 진노하여 곧 성인을 붙잡아오게 하고는 잔혹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황소의 힘줄로 된 채찍으로 성인의 등과 배를 700대 이상 때리고, 몸의 살갗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고문을 받으면서 성인께서 내뱉은 말은 오직 ‘나의 하느님, 당신께 영광을 바치나이다!’라는 짧은 외침뿐이었다. 성인께서는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도시 밖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런데 성인께서 못박혀 있는 동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그 모든 상처를 고쳐주었다. 성인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리려던 두 병사는 성인의 몸에 아무런 상처자국도 없음을 보고는 곧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이후 성인의 성해를 통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 도시는 ‘떼오도로 성인의 도시’(떼오도로폴리스, Theodoropolis)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 니키포로스 순교자(2월 9일)

 

두 친구

발레리안과 갈리에노스 황제의 통치시절(253-260),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는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한 영과 한 마음, 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그런데 악마의 흉악한 꾀로 말미암아 그 둘의 사이가 미움으로 변하였으니, 그 하나는 사제인 사프리키오스였고 다른 하나는 신도인 니키포로스였다. 그런데 얼마가 지난 뒤, 니키포로스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과 악마가 심어준 미움으로 말미암아 등지게 된 사이에 서로 화해하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여러 차례 사프리키오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을 용서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 사프리키오스는 주님의 계명을 범한 채, 형제와 평화를 이루지도 않고서 거룩한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을 계속하였다.(마태오 5:22 참조)

 

용서와 화해

바로 그 무렵,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고, 사프리키오스는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사제이며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신앙을 본 통치자는 그의 목을 쳐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니키포로스는 만일 사프리키오스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하더라도, 만약 자신에 대한 미움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그 순교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마지막 처형의 순간에 사프리키오스의 발 앞에 엎드려 울며 그에게 용서와 화해를 청하였다.

 

겸손과 온유함

그런데 돌처럼 차가워진 마음으로 이를 거절한 사프리키오스의 목을 향하여 칼이 내려쳐지려는 순간, 하느님께서는 합당치 않은 이에게서 당신의 은총을 거두셨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사프리키오스는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겠노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순교의 면류관을 놓치지 말라는 니키포로스의 눈물어린 호소도 들은 체 만 체 하였다. 그러자 니키포로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며, 방금 사프리키오스가 부인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말하였다. 즉시 사프리키오스는 풀려났고, 니키포로스는 교만과 완고(頑固)한 마음으로 인해 순교에 대한 상을 잃어버린 이를 대신하여 처형되었다.

 

 

성 하랄람보스 사제순교자(2월 10일)

 

연로한 사제

성인께서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4-211) 시대에 에페소에 가까운 미안더(Meander) 강의 마그네시아라는 도시에서 사셨다. 107세의 나이에 오랫동안 그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아 온 성인께서는 이교도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고, 교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위험한 해악(害惡)을 지어낸다는 모함을 받아 그곳의 통치자 루끼아노스 앞에 끌려오게 된 성인께서는 통치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나를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니 나의 이 늙은 몸뚱아리를 당신이 가장 잔혹하다고 생각하는 고문에 처하도록 하라. 그러면 나의 주 그리스도의 힘이 결코 정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성인께서는 사제복이 벗겨진 채 쇠로 된 날카로운 (고양이나 매의) 발톱모양을 한 고문기구에 의해 살이 뜯겨져나가는 고문을 당하셨다.

 

성인을 통해 일어난 기적들

그러나 성인의 입에서는 단 한 마디의 비명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성인께서는 ‘내 늙은 몸의 껍질을 벗겨냄으로써 내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원한 축복을 받도록 해주시니 고맙소’ 라고 말씀하셨다. 이같은 광경을 지켜보며 성인의 굳건하기 그지없는 신앙에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화가 잔뜩 난 통치자는 성인에게 달려들어 두 손으로 그 몸을 잡아 뜯으려 하였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의 능력이 통치자의 손을 내리쳐 그의 손은 잘린 채 성인의 몸 위에 생명 없는 나무토막처럼 붙어있었다. 포악한 통치자의 고통스런 비명과 간청을 들은 성인께서는 연민(憐憫)의 정으로 그가 낫기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는 곧 회복되었다. 이 놀라운 기적과 성인께서 보여주신 원수에 대한 사랑을 체험한 루끼아노스와 두 명의 고문담당자(뽈삐리오스와 밥투스)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거룩한 사제의 순교

이 모든 소식을 전해들은 황제 세베루스는 즉시 300명의 군인들을 마그네시아에 보내 성인을 붙잡아 사슬로 묶은 채 끌고 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성인에게 온갖 잔인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매번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채 무사하였다. 도리어 성인께서는 35년 동안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에게서 악마를 쫓아내었고, 막 죽어 땅에 묻히려 하던 한 젊은이를 살려내어 황제를 놀라게 하였다. 드디어 황제의 딸 갈리니아마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게 되자 황제는 성인의 목을 자르도록 명령하였다. 갈리니아는 장엄하게 순교한 성인의 시신을 잘 거두어 매장하였다.

 

 

성 테오도라 왕비수녀(2월 11일)

 

광포(狂暴)와 혼돈의 시대

성인은 콘스탄티노플의 명망(名望)과 지체가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집안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공직의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용모와 지성을 겸비하였던 성인은 또한 경건하고 굳센 정교신앙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받았다. 830년 테오필로스 황제의 황후로 선택되자, 성인은 아내이며 동시에 황후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테오필로스 황제가 전례 없는 잔인함으로 거룩한 성화(이콘 icon)에 대해 박해를 가하자 성인은 부드러움과 인내하는 정신으로 황제의 노기를 누르러 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붙잡혀 매맞고 고문을 당한 채 추방되는 정교신앙의 고백자들(곧, 성화공경에 대한 정교의 가르침을 지킨 사람들)을 돕고 지원하였다. 그리고 참된 신앙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감과 동시에 자신의 침실에 성화를 간직하고서 남몰래 공경하였다.

 

올바른 신앙의 승리

그로부터 십 이년 뒤 테오필로스 황제는 심각한 이질(痢疾)에 걸렸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괴로워하는 남편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던 성인은 감추어 두었던 성모님 성화를 가져와 남편의 얼굴에 대었다. 잠시동안 정신이 돌아온 황제는 성화에 입을 맞추고 나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왕위의 계승권자인 미하일 3세는 이제 겨우 네 살의 어린 아이였으므로 성인이 섭정(攝政)을 맡게 되었다. 성인은 곧바로 성화를 복원시키고 추방된 정교신앙의 고백자들을 되돌아오게 하였다. 843년 이단적인 총대주교가 물러나고 성 메토디우스(6월 14일)가 총대주교좌에 올랐다. 같은 해 사순절의 첫 주일, 제국의 각처에서 모여든 정교신앙의 고백자들은 제 7차 세계공의회(787년)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이단자들을 정죄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룩한 성화에 대한 공경을 공식적으로 회복하였다.

 

소멸되지 않는 축복의 샘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자 성인은 온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어린 황제를 꾀어 성인의 섭정을 물리치게 한 남동생의 책략으로 말미암아 성인과 딸들은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858년) 그로부터 성인은 기도와 금식 등 영적인 일에 몰두하며 살다가 867년 2월 11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1453년) 성인의 성해는 스피리돈 성인의 성해와 함께 코르푸(Corfu) 섬으로 옮겨졌고,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그곳 대성당에 모셔져 오고 있다.

 

 

성 오네시모스 사도(2월 15일)

 

회심(悔心)한 노예

소아시아의 프리지아(Phrygia) 출신인 사도께서는 본디 골로사이(Colossae)의 신앙이 좋고 자선을 후히 베풀기로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필레몬 집의 노예였었다. 그런데 주인의 물건을 훔친 뒤 그는 로마로 도망을 쳤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로를 만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옛 주인인 필레몬에게로 돌아가 용서를 빌었으며, 필레몬은 이제 그를 노예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를 자유로운 몸으로 다시 바울로 사도에게 돌려보냈다.

 

고문과 추방

바울로 사도께서 순교하신 뒤, 오네시모스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붙잡혀서 로마의 총독(總督)인 테르툴루스에게로 인도되었다. 이때 총독은 오네시모스 사도로 말미암아 자기 동생의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일 때문에 특히 더 적개심(敵愾心)을 품고 있었다. 우상숭배에 대해 오네시모스 사도가 단호한 태도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자 총독은 사도를 고문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도께서는 고문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도리어 기쁨을 만끽하였으며 이같은 즐거움은 감옥에 갇혀있던 18일 동안 내내 계속되었다. 수많은 이교도들이 성인의 흔들림이 없는 믿음에 감동하는 것을 지켜보던 총독은 성인을 나폴리 가까이에 있는 포주올리(Pozzuoli)로 추방하였다.

 

영원한 자유인이 되시다

그런데 비록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금지되었으나 사도께서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전파하여 많은 이들을 구원하였다. 이같은 소식을 들은 총독은 곧바로 성인을 다시 붙잡아 차꼬를 채우고는 로마로 압송(押送)하였다. 성인께서 우상에게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총독의 명령을 거부하자, 그들은 성인을 눕히고는 그의 두 손과 발을 뻗쳐 묶은 뒤 무자비하게 매질을 가하였다. 그러나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성인의 영혼은 더욱 더 굳세어졌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총독은 성인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도록 명령하였다. 안식하신 성인의 성해(聖骸)는 그 도시의 한 경건한 여인이 수습(收拾)하였다.

 

 

성 빰필로스 사제순교자(2월 16일)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

성인께서는 서로 다른 곳 출신으로서 함께 순교한 다른 11명의 순교자들을 이끈 지도자였다. 3세기 말경 당시 시리아의 베리투스(지금의 베이루트)에서 태어나신 성인께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Catechetical School)에서 배우셨으며, 오리겐(Origen)의 계승자로서 이름이 높은 피에리오스의 제자였다. 이후 성인께서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팔레스틴의 케사리아로 가셨고, 그곳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한 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셨다. 성인께서는 그곳에 머물며 오리겐의 비유적(比喩的 allegorical)인 방법을 따라 성경을 필사(筆寫)하고 해석하는 일에 헌신하는 한편, 금욕적인 삶을 통해 온갖 육체적인 즐거움들을 극복함으로써 박해를 받기 전에도 이미 순교자와 같은 삶을 사셨다.

 

박해의 광풍(狂風)

막시미누스-다이아의 박해가 동방을 휩쓸던 307년 성인께서는 체포되셨다. 팔레스틴의 통치자 우르반(Urban) 앞으로 끌려나온 성인께서는 신문(訊問)을 받으신 다음 우상들에게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거부한 성인께서는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감옥에 갇히셨다. 이때 성인과 함께 투옥된 사람은 귀족과 같은 용모를 지니고 나이가 많았던 보제 발렌스(Valens)와 용감히 모욕을 견뎌낸 바오로(Paul)였다. 성인과 동료들이 감옥에 갇힌 지 2년이 되던 때, 이집트에서 돌아온 5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케사리아의 성문에 다다랐다. 이들은 킬리키아(Cilicia)의 광산으로 유배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동행했다가 이제 막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12명의 순교자들

성문지기들이 묻자 이들은 머뭇거림이 없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혔다. 이들은 곧 붙잡혀 그 도시의 통치자 앞으로 끌려갔으며, 신문과 심한 매질을 당한 뒤 모두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이어 빰필로스 성인과 두 동료 또한 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하셨으며,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순교한 또 다른 4명의 성인들은 18세의 젊은이 폴피리오스(팜필로스 성인의 영적인 아들), 전직 군인이었던 셀류코스, 케사리아의 통치자 집에서 집사장(執事長)일을 보던 경건한 노인 테오둘로스, 그리고 까빠도끼아 출신의 율리아노스였다. 이리하여 빰필로스 성인을 포함한 12명의 성인들이 이 무렵에 모두 함께 순교하셨다.

 

 

성 테오도로스 대순교자(2월 17일)

 

그리스도를 믿는 로마의 군인

성인은 소아시아의 폰투스에 있는 아마시아(Amasia) 출신으로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대박해(303년경)가 있던 무렵에 로마의 군인(군단병[軍團兵], legionary)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던 성인은 겁장이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순교에 대한 표지(標識, sign)를 받지 않은 까닭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은채 비밀스레 간직하고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이 속한 대대가 한 마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성인은 마을 사람들이 숲에 숨어있는 무서운 용(龍)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인은 이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순교의 영예를 안겨주실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십자가 표지로 무장한 채 숲으로 들어간 성인은 괴물이 머물고 있는 굴을 찾아냈고, 불을 토해내는 괴물의 머리를 창으로 찔러 단번에 죽이고 말았다.

 

영적인 용과의 대결

그런 다음 이제는 영적인 용, 곧 악마를 쳐부술 수 있다고 확신한 성인은 진지(陣地)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대대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한 채,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며 오직 그리스도 한 분께만 예배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함께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 군인들에게도 용기를 붇돋어 주며 그리스도의 군인답게 꾿꾿하라고 격려하였다. 그날 밤 이교신들을 모신 신전에 들어간 성인은 그 신상들을 부숴 모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 즉시 신전지기에게 붙잡힌 성인은 그 지역 통치자 앞으로 끌려갔다. 자신의 물음에 대해 성인께서 차분하게 대답하고, 고문의 위협에 대해서도 의연하게 맞서자 통치자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화를 내더니 성인을 어두운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그날 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은총이 곧 성인의 양식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보호자

다시 끌려 나온 성인에게 통치자는, 이교신을 섬기면 높은 직위의 사제직을 주겠노라고 하며 달콤한 말로 꾀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성인이 웃음으로 거절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천명(闡明)하자, 통치자는 성인을 거꾸로 매단채 쇠갈코리로 성인의 몸을 찢으며 고문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성인의 결심이 요지부동임과 이것이 도리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용기를 고양시키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통치자는 성인을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화형대위에서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에도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를 드리던 성인은 마침내 그 영혼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안식하셨다. 361년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교활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우상숭배를 실현시키고자 꾀했을 때, 성인께서는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그 위험을 피할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셨다.

 

 

성 레온 로마의 주교(2월 18일)

 

대(大) 레오 성인

동과 서의 그리스도 교회가 서로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에 로마의 교황은 오래된 (로마)제국도시의 주교이며 서방의 총대주교(Patriarch of the West)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전승의 가장 중요한 보호자요 교의(敎義, dogma: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 속에 담겨져 있는 근본적이고도 중심이 되는 가르침으로서 세계공의회와 교부들에 의해 정의됨)의 판단자라고 생각하였다. 성인께서는 서방의 로마제국이 붕괴되고 이단자들이 사방에서 교회를 위협하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중 한 때를 로마의 주교로서 봉직하셨다. 성인께서는 진리에 대한 건전한 가르침을 선포하고 거룩한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고자 전력을 다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과 서의 모든 교회로부터 성 대 레오(Saint Leo the Great: 성인께서는 ‘대’[the Great]라는 칭호가 붙은 첫 교황이다.)라고 불려지며 존경을 받는다.

 

위험에 처한 교회

성인께서는 400년에 한 귀족 가문의 자제로서 로마에서 태어나셨다. 성인께서는 젊은 나이에 로마교회의 대보제가 되어 교회의 업무에 종사하셨으며, 동시에 여러 가지 교리적인 논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인께서 고올(Gaul: 지금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가 있는 동안 교황(식수투스 3세[Sixtus III])이 안식하게 되자 로마의 모든 교인들이 만장일치로 성인을 교황직의 계승자로 선출하였다. 당시 성인의 앞에는 참으로 힘든 과제들이 놓여 있었다. (로마)제국은 야만족들의 위협을 받으며 도덕적인 타락을 경험하였고 한편으로는 이단자들로 말미암아 갈갈이 찢겨진 상태였다. 교인들은 길을 잃고 헤매며 제대로 돌봄을 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올바른 가르침의 수호자

이때, 엄격함과 함께 한없는 사랑을 품고 있었던 성인께서는 성직자들을 새롭게 일깨우고 교회의 질서를 새로이 확립하는 일부터 시작하셨다. 또한 성인께서는 흠잡힐 데 없는 생활과 충실한 예배생활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설교로 말미암아 여러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선한 목자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이런 사목적인 수고를 뛰어넘어 교회의 올바른 교의(敎義)를 수호하는 데 바친 성인의 노력 또한 이제껏 많은 이들의 존경을 자아내고 있다. 성 플라비안(St. Flavian,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가해진 잘못된 단죄를 바로 잡고 마침내 할키돈 세계공의회가 열렸을 때(451년) 성인의 편지를 들은 630명의 주교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며, 교부들의 신앙이다. 성 사도 베드로가 레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뒤 성인께서는 461년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필로테이 수녀순교자(2월 19일)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

오토만 터키가 지배하던 암울한 시대(1528년)에 태어난 성녀께서는 마치 빛나는 별처럼, 압제받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비춰주었으며, 위험에 처한 수많은 영혼들을 정의와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귀족 가문인 베니젤루(Venizelou) 집안에서 그 어머니의 오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얻은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고행과 금욕 그리고 관상(觀想 contemplation) 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열두 살이 되자, 부모들이 힘들게 청원하여 얻은 상속녀로서 성녀의 결혼은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남편은 거칠고 폭력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어서 성녀를 부당하게 학대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이 모든 것을 인내로 견디면서 그가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수도원과 자선시설들

삼년 뒤 남편이 죽자, 성녀는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식에 열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다시 십년 뒤 부모님들마저 돌아가시자 성녀께서는 자신이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다 들여 수녀원을 세우는 일에 썼다. 성녀께서는 한 환상(vision) 중에 첫 사도 안드레아 성인께서 나타나 보여주신 가르침대로 수녀원 설립을 수행하였고, 이 수녀원을 안드레아 사도께 봉헌하였다.(이 수녀원 자리가 바로 현재의 아테네 대주교좌 성당[Metropolis of Athens]이 있는 곳이다.) 또한 성녀께서는 수녀원 곁에 나란히 병원과 가난한 이들, 노인들을 위한 호스피스 시설들(hospices), 여러 가지 일터들(workshops, 요즘 ‘공방’[工房]이라고 하는 따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 그리스도교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 등 온갖 자선시설들을 건립하였다.

 

하느님과 그 백성들을 위한 순교

이처럼 첫 수도원 건물이 준비되자마자 성녀께서는 자신의 여종들, 다른 많은 젊은 여성들과 함께 필오테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녀의 신앙과 사랑을 시샘한 터키인들은 몸이 성치 않은 성녀를 붙잡아 감옥에 가둔 다음, 그리스도를 부정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굳센 믿음으로 이 고난을 이겨냈고, 무사히 풀려났다. 이후 성녀는 기적과 치유를 행하는 은총을 받아 전보다 두 배나 더한 열정으로 사도적인 활동과 금욕적인 수련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밤 철야예배를 드리던 수녀원에 다시 들이닥친 터키인들은 몽둥이로 성녀를 심하게 때려 거의 빈사(瀕死)상태에 빠뜨렸다. 심한 상처로 인한 고통을 놀라운 인내심으로 참아내던 성녀께서는 마침내 1589년 2월 19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안식하셨다.

 

 

성 에우스따띠오스 주교(2월 21일)

 

제 1차 세계공의회

성인께서는 소아시아 남쪽의 팜필리아 지역(피시디아 남쪽의 해안지대)에 있는 시드(Side) 출신이었다. 시리아 북쪽의 도시인 베뢰아(후에 알레포[Aleppo]라 부르게 됨) 주교로 서품된 성인께서는 324년 안티오키아의 필로고노스 성인(12월 20일)께서 안식하시자, 바로 그 위대한 도시의 대주교로 다시 임명되셨다. 그 다음 해, 성인께서는 니케아의 세계공의회에 참석하시어 아리우스 이단자들에 대항하며 적극적으로 싸우시는 한편, 다른 교부들과 함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성령처럼 참으로 그 본성이 하느님이신 분임을 단호히 고백하셨다.

 

아리우스 이단자들과 싸우심

그후 성인께서는 이같은 신앙을 확립하기 위해 계속해서 애쓰셨다. 그러나 이런 노력으로 말미암아 정교인들이 인정하는 지도자가 되신 반면에, 한편으로는 올바른 가르침에 반대하는 세 명의 주요 이단자들인 에브세비오스(니코미디아), 테오그니스(니케아)와 또 다른 에브세비오스(케사리아) 등의 미움과 공격을 받게 되셨다. 330년 무렵 이 세 명의 이단자들은 성인을 주교직에서 몰아낼 의도로 안티오키아에 모였다. 그들은 이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인에 대해 나쁜 말들을 지어냈는 데, 그것은 바로 성인께서 이단자(heretic)이며 사람들을 선동하였고, 특히 황제의 어머니인 엘레니 성인을 욕하였다고 거짓되게 고발한 것이었다.

 

고난과 영광스운 귀환

또한 그들은 한 방탕한 여인에게 많은 돈을 주어 이제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성직자들의 모임에 나오도록 한 다음,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안티오키아의 주교인 에우스따띠오스 성인께서 바로 그 아기의 아버지라고 말하게 하였다. 불법을 저지르는 이들의 비밀회의와 같은 모임에 의해 서둘러 공표된 성인의 주교직 박탈이었지만 마침내 콘스탄티노스 황제에게조차 사실과 다르게 그대로 보고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성인께서는 스라키(Thrace) 지역의 트라야노폴리스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몇 년 뒤 안식하시고 말았다. 이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분열되었고 그 상처는 백 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성인의 성해는 48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티오키아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인의 성해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그 도시에 입성하였으며, 마침내 성인은 정교회의 올바른 지도자로 존경을 받게 되었고 교회의 일치 또한 회복되었다.

 

 

성 폴리카르포스 주교순교자(2월 23일)

성인은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가 다스리던 서기 70년경 에페소에서 태어났다. 성인의제자였던 성 이리네오스 리용의 주교(8월 23일)에 따르면 ‘성인은 사도들의 제자였으며, 주님을 직접 보았던 이들과 친분이 있었다.’ 성인의 부모님들은 순교를 당하기 전 성인을 경건한 귀족여인 칼리스타(Callista)에게 맡겼고, 성인은 그의 돌봄을 받으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거룩한 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어린 시절 성인은 자선을 행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어찌나 충실했던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곧잘 양모(養母)의 식품창고를 텅텅 비우곤 하였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식량들이 다시 기적적으로 채워졌고, 그래서 칼리스타는 성인의 이름을 원래의 빵그라티오스 대신 ‘풍성한 열매’라는 뜻의 뽈리카르포스로 바꾸었다.

성인은 자라면서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던 성 요한 사도(신학자)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성 요한 사도께서는 성 부꼴로스(2월 6일), 성 이그나티오스(12월 20일) 등과 함께 일하고 계셨는데,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곧, 요한 사도. 요한복음 21:20-24 참조)의 가르침에 감화(感化)를 받은 성인은 성 사도 요한의 고난에도 열심히 동참하였다. 결국 성 요한 사도는 파트모스(Patmos)섬으로 추방되기전 성 부꼴로스를 즈미르나(Smyrna)의 주교로 서품하였고, 성 폴리카르포스를 그의 협력자요 동역자로 임명하였다. 이후 성 부꼴로스는 죽기 전 겸손한 폴리카르포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즈미르나 교회의 선한 목자로서 성인은 자신보다 앞선 사도들과 교부들의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특히 신적인 은총을 가득히 받은 성인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곧 기도 한 마디로 한 주일 동안 쉴새없이 타오르면서 시골지역을 집어삼킬 듯 하던 불을 끄거나, 오랜 가뭄을 멈추는 반가운 비가 쏟아지도록 하기도 하셨다. 또한 악마에 사로잡힌 사람을 낫게 하거나 병든 이들을 고쳐주기도 하셨다. 이런 기적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교도들이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서기 101년경 이그나티오스 성인이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가던 길에 즈미르나를 지나게 되자 성인은 기꺼이 나가 이그나티오스 성인을 반겼고, 이그나티오스 성인은 기쁨에 겨워 성인을 부둥켜 안고는 안티오키아의 교회를 돌봐줄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성인은 이후 50년 이상을 당신에게 맡겨진 교회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서기 154년 무렵 성인은 로마로 여행하여 교황 아나클레투스(Anacletus)와 함께 이단에 맞서 진정한 믿음을 지키는 문제를 의논하고 즈미르나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성인이 즈미르나로 돌아오자마자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는 지방총독 스트라티오스 콰드라토스(Stratius Quadratus)가 행한 혹독한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열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래도 성인은 몸에 밴 평온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와 양(신도)들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허나 마침내 붙잡힌 성인은 피에 굶주린 군중들이 고함을 질러대는 원형경기장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다. 지방장관은 성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윽박질렀다. 수많은 이교도의 무리를 탄식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성인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팔십 육 년동안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는데, 그분께서는 한 번도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신 분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어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맹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는 지방장관의 말에도 성인이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지방장관은 성인을 불에 태워 죽이겠노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이렇게 대꾸하셨다. ‘당신은 잠깐 타다가 꺼지고 말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에게 닥쳐올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자 성인의 말에 화가 난 이교도들은 소리쳤다. ‘폴리카르포스를 산 채로 불태워라!’

투기장(arena) 한 가운데로 끌려나온 성인께서는 마치 성찬예배를 행하려는 듯이 차분한 태도로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늘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추려고 애쓰는 신도들을 위해 발의 신을 벗었다. 살아있는 번제물(燔祭物)처럼 장작더미가 쌓여있는 곳 위에 올라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성인께서 ‘아멘!’하며 기도를 마치자마자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이 불을 놓았다. 거대한 불길이 마치 파도처럼 한꺼번에 타올라 성인의 몸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성인의 몸은 타지 않았고, 도리어 아름다운 향내가 고급향수의 향기처럼 퍼져 나왔다. 불길이 성인의 몸을 사르지 않는 것을 본 집행관들은 칼로 성인의 몸을 찔렀다. 그러자 피가 봇물처럼 흘러나와 불을 몽땅 꺼버렸다. 그후 신도들은 성인의 성해를 모아 한 장소에 모셨고, 해마다 그곳에 모여 성인의 행적을 기념하였다. 한편 폴리카르포스 성인의 장엄한 순교로 말미암아 한동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었다.

 

 

성 세례 요한의 참수당한 머리 발견 기념일(2월 24일)

 

두 수도사

헤롯의 생일잔치가 가장 위대한 예언자요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 성인의 피로 얼룩지고나서, 그의 제자들이 성인의 유해를 묻으려고 왔다.(마태오 14:12) 그러나 성인의 잘린 머리를 가지고 있던 헤로디아는 헤롯의 궁 근처 으슥한 장소의 땅 속 깊숙이 그것을 묻었다. 그 뒤로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 두 명의 수도사들이 동방으로부터 팔레스틴으로 와 성인의 머리가 묻힌 거룩한 장소를 찾아 경배하려고 하였다. 그런 어느날 밤, 요한 성인께서는 두 수도사에게 각각 따로이 나타나셔서 ‘헤롯의 궁으로 가라. 그곳의 땅 속에서 나의 머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에메사의 도공(陶工)

하느님 은총의 인도를 받은 두 수도사는 별 어려움이 없이 요한 성인의 성해(머리)가 묻혀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그것(머리)을 자루에 담아 자신들의 고향으로 가져가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길에서 만난 에메사(Emesa) 출신의 한 가난한 옹기장이에게 성인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이 도공(陶工)은 성인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것에 용기를 얻어 성인의 성해(머리)를 가지고 자기 고향으로 도망을 쳤다. 그후로 이 도공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죽기 전 성인의 성해를 담은 상자를 자신의 여동생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식으로 요한 성인의 머리는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계속 전달되었다.

 

수도원장 마르켈로스

그러다 마침내 마르키아노스 황제(450-457)의 통치 시절 에메사 가까이에 세워진 한 수도원의 경건한 수도원장 마르켈로스에게 다시 성인께서 나타나셨다. 마르켈로스는 별의 인도를 따라 근처의 한 동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대리석 평석(平石) 아래의 커다란 항아리 속에 들어있는 요한 성인의 성해(머리)를 발견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경배하였다. 에메사의 주교 우라니오스에 의해 대성당에 안치된 성해로 말미암아 그 도시는 많은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후 미하일 3세(842-867)의 치리와 이그나티오스 총대주교의 재임 시절에 성인의 성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이 (성인의 머리를 에메사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김이 오늘의 축일을 제정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성 타라시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2월 25일)

 

신도에서 총대주교로

성인은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약자와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저명한 법관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인은 한편으로는 어머니로부터 지고(至高)한 경건성을 배웠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뒤 780년에 집정관(執政官)이 된 성인은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784년 성화파괴주의자들(iconoclast)을 지원했던 총대주교가 올바른 정교회 신앙으로 돌아온 뒤 사임하면서 성인을 자신의 승계자로 추천하자, 자신은 그저 평범한 신도일 뿐이라며 한사코 마다하던 성인은 끝내 순종하는 자세로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곧 이단(異端)의 성행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인은 784년 성탄절에 총대주교가 되었다.

 

검소한 사랑의 목자

정교회의 수장(首長)이 되자마자 성인은 거룩한 덕성에 더하여 금식과 밤을 지새우는 철야기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 그리고 복음적인 자선행위에 몰두하였다. 성인은 주님의 본을 따라 모든 이의 종이 되려고 하였다. 소박하고 검소한 옷차림을 좋아했던 성인의 생활방식은 사치스런 옷을 즐겨 입던 당시 성직자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자선사업을 어찌나 널리 펼쳤던지 사람들은 성인을 ‘새로운 요셉’(기근 때에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한 구약성경의 인물)이라고 불렀다. 성인은 호스피스(hospice,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시설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 소박한 음식이나마 함께 나누었다.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성인은 보스포로스 해협 서안(西岸)에 그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성인은 787년 9월 24일에 니케아에서 첫 회의를 시작함으로써 제 7차 세계공의회를 주재하였고, 이로써 이단들을 분쇄함과 동시에 성화에 대한 경배(veneration)가 올바른 신앙임을 확증하였다.

 

교회의 평화를 위한 헌신

790년 오랫동안 어머니 이리니(Irene)의 섭정을 받던 콘스탄틴 6세 황제가 성숙한 나이가 되어 교회법을 어기려 하자 성인은 이에 저항하였고, 그로써 가택연금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심판이 황제에게 임하여 그 이듬해에 황제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만다. 다시 자유를 얻은 성인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참된 열매를 맺도록 독려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병에 시달리면서도 목자지팡이에 기댄 채 매일 예배를 드리던 성인은 806년 2월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포띠니 대순교자(2월 26일)

 

새로운 삶을 찾다

성녀께서는 사마리아인으로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으며,(요한 4:1-42 참조) 이 때 주님께서는 성녀가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모든 과정을 다 드러내셨다. 그 이후로 성녀께서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자신의 고향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고, 이로써 네 명의 여자 형제들과 아들 둘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이끌었다. 성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네로(Nero)의 박해시대(AD 54년 무렵)에 순교하신 뒤, 성녀께서는 당신의 아들 요세스(Joses)와 함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로 가 복음을 전하셨다. 성녀의 또 다른 아들 빅토르(Victor)는 아바르족(Avars)과 용감하게 싸운 덕에 황제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진급하였고,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뿌리 뽑으라는 명을 받고 갈릴리로 가게 되었다.

 

두 아들과 함께 당한 고문

그러나 빅토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대신에 반대로 그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곳의 군주(duke) 세바스티안과 높은 지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황제는 빅토르와 요세스를 체포하여 자신의 법정으로 끌고 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들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의 (어깨 아래쪽) 팔을 모두 자른 뒤 감옥에 처넣었다. 이어서 포띠니 성녀 또한 황제의 법정에 끌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성녀께서는 그 자리에서 황제의 딸과 그의 여러 시녀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분노한 황제는 성녀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솥 속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나 성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주님을 위해 바친 생명

다시 온갖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 성인들께서는 결국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뱀들이 우글거리는 굴에 던져진 성인들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성 베드로와 바울로 사도 그리고 많은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성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나를 믿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나서 다시금 힘을 얻은 성인들께서는 그후 삼년동안의 투옥생활을 견뎌내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폭군과 같은 황제는 성녀와 다른 성인들의 살가죽을 벗겨내게 하였고, 마침내 포띠니 성녀를 나무에 묶어 등쪽으로 성녀의 몸을 억지로 꺾어 넘어뜨림으로써 몸이 부러져 순교하게 하였다.

 

 

성 끼란나 근대순교자(2월 28일)

 

아름다운 처녀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던 성녀께서는 그리스가 오토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1700년대 중반에 데살로니끼에서 가까운 한 마을에서 경건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 터키군 근위보병(Janissary: 술탄[Sultan]을 위해 종신토록 복무하는 군인)이 세금을 걷으러 성녀가 사는 마을로 들어왔다. 성녀를 본 그 군인은 곧 사악한 욕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며 성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녀께서 그의 요구를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자 그 군인은 성녀를 그 도시의 재판관에게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다른 군인들의 거짓된 증언에 힘입어 성녀께서 자신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였으며,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약속했노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신부

이 모든 거짓 증언과 고발에 저항하여 성녀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어떤 신랑도 없으며, 그분께만 나의 순결을 바칩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며 그밖의 다른 무엇도 나에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서 성녀께서는 눈을 땅으로 향한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성녀의 가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녀는 온갖 두려움과 걱정들을 다 잊어버릴 수 있었다. 가냘픈 한 소녀의 당당한 태도에 적잖이 놀란 재판관은 성녀를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감옥을 채운 빛과 향기

더러운 욕망을 버리지 못한 그 군인은 허가를 얻어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성녀가 있는 감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는 야비한 제안을 하거나 죽이겠다는 위협을 하면서 성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녀께서 그들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자 그들은 마침내 포악하게 성녀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몽둥이로, 한 사람은 칼의 평평한 부분으로,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손과 발로 성녀를 차고 때렸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는 다시 간수가 들어와 성녀의 손을 묶어 매단 뒤, 또 다시 때렸다. 그런데 갑자기 피로 범벅이 된 성녀의 몸을 천상의 빛이 휘감더니 온 감옥 안을 비추었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나왔다. 이같은 현상을 보고 공포감에 사로 잡혀 기절할 것 같았던 간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다음,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성녀의 시신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성녀의 기적 소식을 들은 터키인들도 부끄러워하며 성녀의 장례식을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