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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3월)

ttoza 2010. 2. 3. 19:09

성 에브도끼아 수녀순교자(3월 1일)

 

방탕한 여인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난 성녀께서는 트라야노스 황제(96-116)의 통치때 레바논 페니키아의 헬리오폴리스에서 사셨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성녀는 방탕한 삶에 빠졌으며, 드물게 아름다운 자신의 몸으로 매춘(賣春)을 하며 살았고, 그덕에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어느날 예르마노스라는 한 수도사가 그 도시에 와서 성녀의 집 옆에 묵게 되었다. 저녁이 되자 수도사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하고, 이어서 마지막 심판에 관한 성경말씀(마태오 24:3-25:46 참조)을 읽기 시작했다. 이 두려운 내용의 말씀을 듣던 성녀의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나서 오랜 세월동안 죄에 빠져 무감각해져버린 성녀의 양심이 다시 깨어났으며,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성녀는 밤새도록 흐느껴 울었다.

 

하느님의 정의(正義)

아침이 되어 서둘러 수도사를 찾아간 성녀는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해야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 길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적당히 가르친 뒤, 수도사는 성녀의 결심이 확고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 주간 동안 집으로 돌아가 기도하며 지내도록 권하였다. 성녀는 자신의 지난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며 많은 눈물을 흘리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였다. 그러던 성녀에게 갑자기 미카엘 천사가 나타나 성녀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올라갔으며, 그곳에는 택함을 받은 이들이 나와 성녀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문밖에서는 악마가 나타나 이토록 타락한 여인의 회개를 그리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부정의(不正義 injustice)가 아닌가 하고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회개의 능력

그때 하늘 높은 곳에서 한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와 말하기를, ‘회개하는 이들을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선한 뜻'(곧, 에브도끼아[evdokia])이라고 하였다. 주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로 기쁨에 넘친 성녀께서는 그 도시의 테오도토스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곤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맡기고는 영적인 아버지(예르마노스 수도사)의 조언을 따라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이후 수도생활에 전념한 성녀께서는 불같은 열정으로 높은 신앙의 경지에 다다랐으며 나중에 그곳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하드리안 황제(117-138)시대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고서도 많은 기적을 행한 성녀께서는 끝내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성 예라시모스 요르단의 수도자(3월 4일)

 

영적인 수련의 생활

성인은 4세기 말경 리키아(Lycia)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처음 공동생활을 시작한 성인은 이후 하느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갖고 홀로 떨어져 금욕적인 삶과 기도에 전념하며 영적인 수련을 계속하였다. 다시 그곳을 떠나 성지(Holy Land)로 간 성인은 예루살렘의 성소들을 찾아 경배하고 난 뒤, 사해(Dead Sea) 근처의 거친 사막으로 가 영적인 덕을 쌓는 투쟁을 이어갔다.

제 4차 세계공의회(451년, 할키돈) 이후 팔레스타인의 많은 수도자들이 이단의 길을 걷는 힘겨운 시기에 성인 또한 그 자신의 단순함 때문에 잠시 잘못된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후 다행스럽게도 에프티미오스 성인(1월 20일)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다시 올바른 정교신앙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에프티미오스 성인과 잦은 만남을 가지는 한편, 매년 함께 사막 깊은 곳으로 가 사순절 내내 그곳에 머물며 금식과 기도로 지내다가 성지주일이 되어서야 되돌아오곤 했다. 사순절의 주중에는 일절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주일에만 영성체를 받는 극도의 금욕적인 생활이었다.

 

맹수도 변하게 한 성인의 덕

그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늘어나자 성인은 요르단강 기슭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곳에는 공동생활과 단독생활을 함께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처음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은 먼저 공동생활을 통해 순종과 영적인 덕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충분히 금욕과 겸손을 몸에 익힌 다음 홀로 수도하기 위해 주위의 시골로 떠나갔다. 주중에는 오로지 빵과 물만을 먹으며 살다가 토요일과 주일이 되면 수도원으로 함께 모여들어 성찬예배를 드리고 신비의 성사에 참여하였다. 예배후 수도자들은 예라시모스 성인과 영적인 대화를 나눈 다음, 자신의 거처에서 하는 수(手)작업의 재료들과 빵, 물병등을 받아 들고는 다시 자신들의 수도처로 떠나갔다.

한번은 성인께서 길을 가다가 큰 가시가 발에 박혀 괴로움으로 울부짖는 사자를 만나게 되었다.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이 짐승의 고통을 측은히 여겨 가시를 빼주고, 그 상처를 잘 치료해 주셨다. 그 순간부터 이 맹수는 성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짐승은 그 사나운 본성조차 변하여 빵과 채소만을 먹으며 지냈다. 요르단(Jord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수도원을 떠나지 않던 이 사자는 475년 성인께서 평화로이 안식하시자 더 이상 먹지를 않았다. 그리고 성인의 무덤으로 인도되자 즉시 자기 머리를 땅에 부딪혀 곧 죽고 말았다.

 

 

성 코논 순교수도자(3월 5일)

 

그리스도를 위해 택한 순결

성인께서는 사도시대(1세기 무렵)에 소아시아 남쪽의 산악지역인 이소리아(Isauria)의 수도에서 멀지 않은 한 도시에서 사셨다. 하루는 빛나는 옷을 입은 미하일 대천사가 성인께 나타나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신비의 성체를 성인에게 줌으로써 성인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후로 전생애를 통하여 미하일 대천사는 성인을 항상 도와주었으며, 성인으로 하여금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부모가 결혼을 하도록 강요하자 성인께서는 친구인 안나를 설득하여 남매처럼 함께 순결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성인은 자신의 거룩한 언행을 통하여 부모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고, 아버지 네스토르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뒤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악령을 굴복시키다

한 번은 도시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동굴에서 이교도의 불경한 축제가 있기 전날, 우상숭배자들이 성인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그러다 그들은 일시 다툼을 중지하더니 한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곧, 멀리 떨어져 있는 동굴까지 달리기 경주를 펼쳐서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섬기는 신을 가장 탁월한 신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성인께서는 맨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미하일 대천사의 도움으로 가장 먼저, 깨끗한 얼굴로 도착하였다. 반면에 말을 타고 출발한 이교도들은 한참이나 뒤에 처진 채 땀을 흘리고 헐떡이면서 다다랐다. 이같은 기적에 넋을 잃은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우상을 앞에 놓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우상 뒤에 숨어있던 악령을 앞으로 불러내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순교를 이룬 믿음

그러자 악령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단 한 분만이 참 하느님이신데, 바로 당신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교도들도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참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바로 (경주에서) 승리하신 코논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로부터 이소리아의 모든 주민들은 해마다 자신들의 수호성인이신 코논 성인을 기념하면서 이같이 외쳐댔다. 그 뒤 통치자 마그누스(Magnus)가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라는 제국의 칙령을 가지고 도착하여 성인을 체포하였다. 성인께서는 처참하게 매질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그치지 않고 당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성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게 된 그 지역의 주민들은 이같은 상황을 알게 되자, 큰 소리를 지르며 성인이 고문을 당하고 있는 장소로 쳐들어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통치자는 도망을 가고, 피로 범벅이 된 성인은 구출되어 집으로 모셔졌으나 이년 뒤 안식하시고 말았다.

 

 

아모리오의 성 42인 순교자들(3월 6일)

 

도시가 함락되다

838년 하느님의 진노가 성화파괴주의자인 황제 테오필로스(829-42)에게 임하였다. 이때는 바그다드의 칼리프(Caliph)가 막강한 사라센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비잔틴인들에 대해 두드러진 승리를 거둔 뒤, 프리지아(Phrygia, 소아시아 서부지역) 북부의 작은 도시 아모리오를 포위공격하던 때였다. 십삼일이 지나고 나서 내부의 배신행위로 말미암아 마을은 정복되었다. 무기를 들었건 들지 않았건 상관없이 거의 모든 주민들이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 인근 마을에서 피난 온 수많은 농부들도 마찬가지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 도시의 최고위직에 있는 관리 42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은 모두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용감하고 훌륭한 인물들이었다. 정복자들은 그들을 어둡고 악취가 나는 감옥에 가두었다.

 

고통의 시간들

그 뒤 감옥에 갇힌 이들은 눈물로 음료수를 삼고, 때때로 간수가 생색내며 던져주는 부패한 빵 몇 조각으로 연명하며 힘겹게 생존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은 허가를 얻어 길거리에서 구걸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몸과 옷은 해충으로 말미암아 상하고 헤졌으며, 서로를 알아볼 수도 없는 짙은 어둠 탓에 극도로 허약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용기와 영혼의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칼리프의 모든 시도에 맞서 저항하였다. 칼리프가 보낸 사람들이 그들에게 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이 세상에서의 온갖 육체적인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조용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자신들을 무장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어떤 예언자도 모하메드가 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반면에 구약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임을 증언하였다’

 

승리의 관을 쓴 순교자들

성인들은 이런 상태로 칠년 동안을 견뎠다. 한 점의 허물도 없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 성인들은 날마다 시편을 암송하고, 정해진 시간에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자신들은 죄인이므로 이런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845년 3월 5일, 칠년 전에 도시를 침략자들에게 넘겨주었던 배신자 바디체스(Baditzes)가 성인들을 마지막으로 회유(懷柔)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성인들은 수많은 사라센인들이 모여 있는 유프라테스 강 언덕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짧은 기도를 드린 다음 차례대로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라센인들은 성인들의 용기에 감탄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후 칼리프는 배신자 바디체스도 처형하였다.

 

 

성 테오필락토스 주교(3월 8일)

 

니꼬미디아의 주교

성인께서는 765년 무렵 태어나셔서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플로 가셨다. 784년에 그동안 영적인 아버지로 섬기던 타라시오스 성인(2월 25일)께서 총대주교직에 오르시자, 성인께서는 후에 시나데스(Synnades)의 주교가 된 미하엘 성인(5월 23일)과 함께 수도자로서 서원을 하고 금욕적인 생활과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 온 정열을 쏟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비디니아(Bithynia)의 유명한 도시인 니꼬미디아(Nicomedia)의 주교로 임명된 성인께서는 타라시오스 성인의 본을 받아 진정한 신앙에 대해 가르칠 뿐 아니라 자선사업에도 열심을 다하였다. 이전의 대 바실리오스 성인처럼 성인께서는 방문자들과 병자들을 돌볼 이층 건물을 짓게 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는 병원을 조직하여 환자들의 몸과 영혼을 치유하도록 하였다.

 

성화에 대한 박해

고아들의 아버지요 과부들의 보호자로서 성인께서는 당신의 모든 영적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랑으로 공급하였다. 매주 철야기도가 끝나고 나면 환자들이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게 하고, 성인께서는 마치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는 환자들의 상처를 닦아 주었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아르메니아인 레오 5세 황제(813-820)가 성화(icons)를 박해하기 시작하여 전 제국에 걸쳐 성화를 파괴하고, 수도자들을 고문하기 전까지는 평화로이 교회를 돌볼 수 있었다. 성화가 박해받던 815년 니키포로스 총대주교(6월 2일)는 정교회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수도자들을 콘스탄티노플에 모이게 하였으며, 이 자리에는 성인도 참석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성화를 공경하는 것이 정당함을 한 목소리로 선언하였다.

 

정교성(Orthodoxy)의 승리

황제에 대한 저항은 곧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성인 또한 수염이 뽑히고 매질을 당한 다음 머나먼 곳으로 추방되었다. 그곳 유배지에서 거의 30년을 보낸 성인께서는 820년 미하엘 2세가 새로이 황제로 즉위하며 내린 사면(赦免)의 혜택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을 잘 견뎌내시는 한편,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당신의 교회를 계속 보살피셨다. 불평없이 참으며 오래도록 병마(病魔)와도 싸운 성인께서는 840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경건한 테오도라 왕비가 올바른 정교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추방된 이들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던 해(843년)에 성인의 성해도 니꼬미디아에 되돌아왔다.

 

 

세바스티아의 40인 순교자들(3월 9일)

 

준사도 성 콘스탄티노스 황제(5월 21일)와 함께 제국정부를 동등하게 분담했던 리끼니오스(Licinius 308-23)는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협정을 파기하자마자,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칙령을 공포하고 행정장관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들을 고문하여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가빠도끼아와 소(小) 아르메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된 아그리꼴라오스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명령을 가장 충실히 수행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제 12 제국군단(고대 로마의 군단은 300-700명의 기병을 포함하여 3,000-6,0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짐.)을 자신이 살고 있던 세바스티아로 오도록 하였다.

 

40명의 그리스도인 군인들

그런데 이 군단에 소속된 40명의 젊고 용감한 군인들이 우상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선언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온 이 군인들은 신앙과 사랑으로 뭉쳐진 한 사람처럼 총독 앞에서 자신들을 하나씩 드러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실제 이름은 말하지 않은채 모두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외쳤다. 처음에 총독 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들의 눈부신 전공(戰功)을 치하하면서, 만일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여러 유익과 호의를 받게 될 것이라고 꾀었다. 그때 성인들 가운데 한 분이 모든 이를 대표하여 대답하였다.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지상의 황제를 위하여 용감히 싸웠다면 이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이 투쟁에 그 얼마나 강한 열정을 갖고 임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한 삶만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날밤 정식재판을 받기 위해 감옥에 갇힌 성인들은 무릎을 꿇고 자신들이 참된 믿음을 지키고 이 싸움에서 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렸다. 한밤중이 되어 시편을 노래하는 그들 앞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처음은 잘 시작하였다. 그러나 승리의 월계관은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7일이 지난 뒤 군단의 지휘관인 리시아스 대공(大公)이 도착했다. 리시아스는 다시 불려나온 성인들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자 다른 군인들에게 명령하여 성인들의 이빨을 돌로 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성인들에게 달려들자 마자 신적인 힘에 의해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고, 혼돈 속에 서로 치고 받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싸웠다. 이 광경을 보고 화가난 리시아스는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성인들을 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총독을 때려서 심한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의 순교

그뒤 총독은 고심끝에 성인들의 옷을 모두 벗겨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벌거벗은 채로 서 있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 잔인한 고문을 견디다못해 포기하는 이를 위해 호수 가장자리에 뜨거운 목욕탕을 마련하여 마지막 유혹처럼 남겨두었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성인들은 하나씩 얼음위로 나아갔고, 밤새도록 불어대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주님께 기도하였다. 밤이 깊어지면서 성인들의 몸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몸의 순환기능은 조금씩 떨어져갔고 견딜수 없는 고통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고통을 참다못한 한 사람이 호수를 떠나 서둘러 뜨거운 목욕탕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큰 온도의 차이로 말미암아 곧바로 죽고 말았다. 동료를 잃은 슬픔에 마음이 너무 아픈 39명의 성인들은 더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로부터 커다란 빛이 성인들에게 비추이더니 호수 전체를 덮었다. 그리곤 천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 화관(花冠)을 씌워주기 위해 내려왔다.

이때 목욕탕 옆에서 몸을 뎁히고 있던 아글라이오스라는 이름의 한 보초병이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갑자기 양심이 찔리면서 믿음의 조명을 받게된 그는 40개의 화관이 하늘에 매달린채 마치 완전의 상징인 사십을 채우기 위해 택함받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자신의 동료들을 깨운 다음 옷을 벗어 던지고는 서둘러 얼음 위로 달려가면서 자기 자신도 또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소리침으로써 거룩한 순교자의 무리에 합류하는 영광을 얻었다.

 

 

성 아나스타시아 수녀(3월 10일)

 

귀족 처녀

성녀께서는 유스티니아노스 황제(527-565)의 통치 때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셨다. 부유한 귀족의 혈통을 타고 난 성녀께서는 황제에 의해 ‘쁘로토빠트리샤’(protopatricia)라는 지위를 부여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명예보다는 하늘나라의 그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성녀께서는 조심스러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명령을 실천하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황제의 호의를 받던 성녀를 미워한 악마는 황후의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의 씨를 뿌렸다. 이제 자신으로 말미암아 추문(醜聞 scandal)이 생겨난 것을 알게 된 성녀께서는 궁정을 떠남으로써 도리어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 삼았다.

 

남장(男裝)한 수녀

성녀께서는 ‘내 영혼아 네 자신을 구원하거라. 그러므로써 이유없는 질투에 사로잡힌 황후를 구할 것이고, 너 스스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재산중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알렉산드리아로 떠났다. 그리고 그 길 도중의 뻼프톤(Pempton)이란 곳에 수녀원을 세우고 그 곳에 머물렀다. 그 뒤 몇 년이 지나 테오도라 황후가 죽자(548년), 황제는 아름답고 덕스러운 성녀와 결혼할 마음에 성녀를 수소문(搜所聞)하여 찾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성녀는 그 밤으로 수녀원을 떠나 스케티(Scetis)의 다니엘 원로(Abba Daniel)를 찾아갔다. 원로는 성녀에게 남자옷을 주어 입게 한 다음, 아나스타시오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멀찍이 떨어진 한 동굴에 거하도록 하였다.

 

인내로써 이룬 승리

원로의 말대로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아무도 동굴 안으로 들이지 않으며, 금식과 기도속에 사는 성녀에게 한 주에 한번씩 원로의 한 제자가 빵 한 덩이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와 동굴입구에 놓아두고는 갔다. 이 용감하고 관대한 성녀의 영혼은 그 후 28년 동안 원로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키며 동굴 속에서 머물렀다. 배고픔과 목마름, 밀려오는 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생활을 그만두라고 속삭이는 어둠의 영들에 대항하여 싸우던 성녀께서는 마침내 성령을 담은 그릇이 되셨다.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원로에게 알렸다. 원로가 가져온 성체성혈을 마지막으로 받아 모신 성녀의 영혼은 천사들의 인도를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성 소프로니오스 예루살렘의 총대주교(3월 11일)

 

수사학 교수님

성인께서는 550년경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나셨다. 보기드문 지적 재능과 시인적 자질을 지녔던 성인께서는 공부를 다 마친 뒤 ‘소피스트’(Sophist: 곧, 수사학[修辭學, rhetoric] 교수)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세속학문에 만족할 수 없었던 성인께서는 더 완전한 학문을 찾아 팔레스틴으로 순례여행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여러 성소(聖所, holy places)들을 찾아 공경심을 표하고 수도원과 사막에 살고 있는 고행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테오도시오스 성인(1월 11일)이 세운 수도원에 도착한 성인께서는 영적인 형제 요한 모스쿠스(John Moschus)를 만나게 된다. 578년 이미 수도사가 된 요한 형제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간 성인께서는 마침내 헛된 인간적 지혜를 더 이상 찾지 않기로 결심하고 다시 팔레스틴으로 돌아와 수도사가 된다.

 

선교의 사명을 다함

10년뒤, 다시 요한 형제와 함께 이집트 사막을 가로질러 영적인 깨달음을 구하는 여행을 한 성인께서는 603년경 페르시아의 침입을 바라보면서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뛰어난 웅변술과 신학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총대주교를 도와 일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정교회 수(數)를 10배나 더 늘리고 많은 마을과 수도원들이 정교회로 되돌아 오게 한 성인께서는 선교여행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진 당시의 종교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하셨다. 614년 예루살렘이 페르시아인들의 손에 넘어가자 성인은 요한 형제와 함께 로마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요한 형제가 안식하자 그의 시신을 성 테오도시오스 수도원으로 옮겨와 묻고, 그곳에 머무르면서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4월 1일)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하였다.

 

일생을 마지막 날처럼 사시다

627년 아랍인들의 침입을 피해 북아프리카로 피신했던 성인께서는 뒤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이단자들에 맞서서 참된 진리를 위해 싸운다. 이런 사명을 다한 성인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바로 당시 안식하신 총대주교의 뒤를 이어 그곳 교회의 최고위직을 이어받게 된다. 총대주교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들에게 써보냈던 성인께서는 전생애를 통해 외적의 침략을 겪는 고통을 겪고, 끝내 638년초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아랍 침입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본 다음 같은 해 3월 11일 안식하셨다.

 

 

성 베네딕도스 수도자(3월 14일)

성인은 480년경 로마 북동쪽 산악지대의 작은 마을 눌시아(Nursia)의 경건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로마에서 교육을 받은 성인은 노인의 지혜를 얻음과 동시에 하느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비밀리에 수비아코(Subiaco)로 숨어든 성인은 약 이천 피트(약 육백 미터) 높이에 있는 한 동굴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삼년을 보내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이때 성인은 찌르레기(blackbird)로 변장한 악마의 유혹을 받고 마침내 그 시험을 물리치기도 한다.

그뒤 다시 사막으로 거처를 옮긴 성인은 홀로 지내면서 고귀한 덕을 쌓아나갔고 이로써 그를 찾는 제자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제자들이 늘어나자 성인은 그들을 열 두 개의 수도원에 각각 열 두 명씩 나누어 거하도록 하고, 각 수도원마다 한 명씩 수도원장을 두어 수도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성장과 공동생활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리고 성인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수도사들의 물질적인 결핍뿐 아니라 마음 속의 숨은 생각까지도 들여다 보면서 그들이 나쁜 버릇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사랑으로 질책(叱責)하기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529년경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수비아코를 떠난 성인은 로마와 나폴리 사이의 고봉(高峰)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폴로신에게 바쳐진 신전이 하나 있었다. 성인은 곧 그곳의 우상들을 때려부수고 제단을 헐어버린 다음 뚜르의 성 마르땡 주교(St. Martin of Tours, 11월 11일) 이름으로 명명된 성당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는 그곳에 살던 이들을 사도적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켰다.

성인은 기근이 심할 때 기도를 통해 수도원의 밀과 기름이 풍성히 수확되도록 하기도 하고, 기도로써 죽은 아이를 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예배를 균형있게 조직하여 누구나 쉽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동방 교부들의 전통과 당시의 로마 관습에 기초하여 만든 결과였다. 한편 성인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언제나 친교하면서도 수도사들과 함께 손을 써서 작업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전쟁과 침략의 시대를 살다 간 성인은 롬바르드족에 의한 로마의 쇠락을 예견하면서 살아있는 마지막 시기 동안에 유명한 ‘규칙서’(Rule)를 썼다. 이 규칙서는 영적인 분별력과 함께 철저히 라틴적인 절제성으로 가득찬 뛰어난 기록으로서 서방의 수도자들에게는 참으로 헌장(charter)이 될만한 것이었다. 성 빠꼬미오스와 성 대 바실리오스 그리고 성 카시안 등의 거룩한 교부들의 저술과 자신이 세운 수도원에 확립되어 있는 제도 등에 기초를 둔 이 규칙서를 통해 성인은 공동으로 생활하는 수도원의 규칙과 규정들을 설명하고 있다.

성인은 자신의 여동생 성 스콜라스티카(2월 10일)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 자신의 마지막 날이 왔음을 모두에게 알려주고는 바로 심한 열병에 걸리고 만다. 성인은 몸소 성당으로 가 성체와 성혈을 영한 다음 곧추 서서 손을 들어 하늘로 향한채 기도문을 외우면서 마지막 숨을 내쉰뒤 안식하셨다.(560년경) 후에 성인의 성해에서는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롬바르드족이 수도원을 파괴한 뒤 성인의 성해는 잊혀졌다가 8세기초에 와서 몇몇 수도사들에 의해 다른 수도원(Saint-Benoit-sur-Loire)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성 아가피오스, 디몰라오스 외 6인 순교자들(3월 15일)

 

박해(迫害)의 시대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 시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大)박해의 둘째 해(305년)에 팔레스틴의 통치자는 우르바누스(Urbanus)였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모든 거주민들이 황제의 명을 따라 희생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팔레스틴의 케사리아에서 큰 잔치를 열고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맹수들의 먹잇감으로 집어 던지게 하였다.

 

원형 경기장

이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붙잡힌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등 뒤로 손을 묶인 채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원형 경기장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 가운데 디몰라오스(Timolaus)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이었고, 디오니시오스는 페니키아의 트리폴리에서 왔으며, 로물루스라고 불리는 한 젊은이는 디오스폴리스 교회의 차보제(sub-deacon)였다. 알렉산더와 파이시오스는 에집트인들이었고, 또 다른 알렉산더는 가자(Gaza) 출신이었다.

 

젊은이들이 흘린 순교의 피

처음 이들 젊은이들을 본 통치자는 그들의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에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는 그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며칠 뒤 아가피오스(Agapius)라는 또 다른 젊은이가 감옥에 다시 갇혔는 데,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미 앞서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디오니시오스라는 젊은이가 붙잡혀 왔는데 그도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동정하고 도왔다는 죄목이었다. 이들 여덟 명의 젊은이들은 모두 조금도 굴함이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담대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마치 한 사람처럼 같은 날 모두 목이 잘려 순교하였으며, 이로써 승리의 왕관을 쓰고 하늘나라에 오르게 되었다.

 

 

성 사비노스 순교자(3월 16일)

 

경건한 에집트인

에집트 나일(Nile) 지역의 헤르모폴리스에 있는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난 성인께서는 그리스도교를 지지하고 후원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같은 까닭으로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대박해가 행해졌을 때(303년경), 성인께서는 황제의 군인들이 잡고자 하는 표적이 되었다. 성인께서는 다른 그리스도인 6명과 함께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 작은 오두막집에 몸을 숨겼으며, 이곳에서 이들은 금식과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성인께서 자선을 베풀었던 한 거지의 고발로 말미암아 모두들 붙잡혔고, 엄중하게 차꼬를 찬 상태로 도시 바깥에 있는 통치자 아리아노스 앞으로 끌려갔다.

 

온전한 정신으로 믿는다

성인의 신념과 용기를 확인한 통치자는 그의 결심을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잔인하게 매질을 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성인께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그 중 한 사람이 성인이 정신을 잃었다고 소리쳤다. 그때 성인께서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는 정신이 온전하다. 내가 악마에게 희생제사를 바치기 위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정신이 혼미하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 그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통치자와 성인, 그리고 군인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갑자기 배가 심하게 요동쳤고 거의 파손된 채 간신히 건너편에 닿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증인

아리아노스는 성인을 법정에 나오게 하고는 마술(魔術)로써 폭풍을 일으켜 배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 아닌지 캐물었다. 그리고는 성인을 땅바닥에 눕히고 사지(四肢)를 붙들어 맨 다음, 불로 온 몸을 지지며 고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은 성인께서는 배를 타고 강 한 가운데로 끌려가 발에 무거운 돌을 매단 채로 던져졌다. 던져지기 전 성인께서는 자신이 사흘 뒤에 발견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삼일이 지나고 그리스도인들은 성인께서 말씀하신대로 강둑에서 성인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으며, 예를 갖추어 합당한 장례를 지냈다.

 

 

성 알렉시오스 수도자(3월 17일)

 

결혼식날 도망친 신랑

성인께서는 아르카디오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395-408)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경건한 귀족으로서 원로원 의원인 아버지 에피미아누스와 어머니 아글라이스는 오랫동안 자식을 갖지 못한 끝에 성인을 낳게 되었다. 성인께서는 어린 시절과 소년기에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부모님들은 성인의 나이가 차자 로마의 귀족가문 처녀와 혼인을 하도록 준비하였다. 그런데 결혼식날 밤 약혼녀와 한 방에 들게 되었을 때, 거룩하고 완전한 순결을 사모하던 성인께서는 약혼반지를 도로 돌려준 다음 몰래 도망을 쳤다. 배를 잡아타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긴 채 항해하던 성인께서는 한 상인무리[隊商 대상]를 만나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Edessa)로 향하였다.

 

숨겨진 ‘하느님의 사람’

그곳의 한 성당에 들어간 성인께서는 성당입구[narthex 나르텍스: 성당의 입구에 위치한 한 구역으로 신도들은 이곳을 지나 성당 안 곧 회중석으로 향한다.]에서 17년을 보내면서 다 떨어진 넝마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이 베푸는 자선과 음식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러는 동안 성인의 아버지는 사방으로 하인들을 보내 아들을 찾게 하였다. 한편 성인의 어머니는 삼베옷을 걸치고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어떤 위로도 마다하며 살았고, 약혼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슬픔을 견디며 어떤 소식이라도 있을까 애를 태우고 있었다. 마침내 오랜 기간이 흘러 사람들이 이 ‘하느님의 사람’(Man of God)의 정체를 알게 되고, 성인에게 존경을 표하기 시작했다.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 사심

그러자 성인께서는 곧바로 다시 한 번 그곳을 떠나 배를 탔는데, 바람이 반대로 불어(아니면, 하느님의 섭리로) 배는 로마의 항구에 가 닿았다. 성인께서는 뜻하지 않았던 이 결과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머뭇거림 없이 부모님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성인께서는 거지처럼 구걸을 하며 살았고, 아버지는 그가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자식을 잃은 아픔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으로 자신의 밥상에서 남은 음식들을 아낌없이 성인에게 가져다 주었고, 성인께서는 그것을 다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그곳에서 다시 17년을 보냈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알게 된 성인께서는 자신의 생애에 대해 기록한 다음 평안히 안식하셨다. 이후 성인의 유해는 교황과 황제에 의해 공경을 받았다.

 

 

성 바실리오스 사제순교자(3월 22일)

 

앙키라의 사제

성인께서는 4세기 소아시아의 갈라티아 지역에 있는 앙키라(Ancyra) 교회의 사제이셨다. 당시 그 지역의 주교였던 마르셀(Marcel)은 이단인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반대하다보니 도리어 그 반대로 너무 치우쳐서 신성(神性)의 세 위격(Persons)을 세 가지 측면(aspects)이나 양상(modalities)으로 잘못 이해하는 이단사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같은 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채 올바른 믿음을 열심히 가르쳤다. 한 번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337-360) 황제 앞에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올바른 믿음을 고백한 뒤 풀려났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권력을 잡고(360년) 이교의 신앙으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하자, 성인께서는 몇 배나 더한 열정으로 거짓 신들에 대한 신앙의 잘못을 증언하였다. 황제를 모독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성인께서는 법정에 서서 자신은 오로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한 분 임금, 곧 그리스도만을 예배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그 지역의 총독(Proconsul)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는 성인을 나무 선반 위에 묶게 하고는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성인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제가 고통의 길을 걸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

이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인들을 치기 위해 가던 길에 앙키라에 머무르자 총독은 성인을 황제 앞으로 끌고 갔다.(362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힌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제단을 뒤엎은 황제처럼 하느님께서도 황제를 그 권좌 위에서 뒤엎을 것이며, 황제의 육신은 무덤이 없이 남겨져 발에 짓밟힐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같은 말에 크게 진노한 황제는 성인의 살을 날마다 한 겹 한 겹 도려내도록 명령하였다. 여러 날 동안 이런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성인께서는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다. 다시 감옥에 갇힌 날 밤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모든 상처를 원래대로 치유해 주셨다. 다음 날 성인을 다시 법정에 세운 통치자는 성인께서 아무런 상처가 없이 깨끗한 몸인 것을 보고는 혹 황제가 그것을 알고 또다시 대노(大怒)할까 두려워하여, 벌겋게 달아오른 쇠꼬챙이로 성인의 몸을 마구 찌르도록 명령하였다. 이런 고문을 받으며 성인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의 손에 되돌려 드렸다.

 

 

성 니콘 사제순교자와 그의 199인 제자순교자들(3월 23일)

 

이탈리아 군인

성인께서는 3세기 이탈리아의 나폴리에 가까운 지역에서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인인 어머니를 부모로 태어나셨다. 장성하여 군에 들어간 성인께서는 어느 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경건한 어머니께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말씀이 생각나 성인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오셔서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성호를 긋고 용감히 일어나 전투에 임하였고, 이로써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를 찾아간 성인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씀드리고, 세례를 받을 결심을 밝혔다.

 

사제와 190명의 제자들

동쪽으로 진출한 군대와 함께 히오스(Chios)섬에 다다른 성인께서는 조용한 곳을 찾아 금식하고 기도하며 한 동안을 보내면서 세례성사를 준비하였다. 그때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성인을 해변가로 이끌어 배를 타게 하였다. 마침내 성인께서는 스라키(Thrace)의 가노스(Ganos) 산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테오도르(Theodore of Cyzicus) 주교의 인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들을 배운 다음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삼년 뒤 테오도르 주교는 성인에게 사제서품을 줌과 동시에 자신의 지도를 받던 190명의 제자들도 모두 성인에게 맡겼다.

 

시실리의 순교자들

동방에서 일어난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때(251년) 성인과 그 제자들은 잠시 동안 미틸리니(Mytilene)에 머물렀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갔으며, 그곳에서 성인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가족을 버리고 이 수도자 무리에 합류한 아홉 명의 이탈리아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성인께서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200명인 수도자들과 함께 시실리(Sicily)로 갔다가 이교도인 지방장관 퀸티아노스에게 붙잡혔으며, 심하게 고문을 당한 뒤 모두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성인과 수도자들의 유해는 나중에 메시나의 주교인 테오도시오스에 의해 발견되었고, 성인들을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다.

 

 

성 아르테몬 주교순교자(3월 24일)

 

바울로 사도를 만나다

성인께서는 1세기에 피시디아(Pisidia: 고대 소아시아 남쪽의 내륙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리끼아 북쪽에 있으며, 까리아, 리디아, 프리지아, 팜필리아 등과 경계를 이루었다.)에 있는 셀류키아(Seleucia)란 도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셨다. 성 사도 바울로께서 선교여행을 하던 중 이 도시에 들러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그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과 지위를 다 내버리고 온 마음으로 사도께 다가가 제자가 되었다. 바울로 사도께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게 되자(사도행전 13:4 참조) 성인께서도 함께 승선하였고,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많은 고난을 견디어내셨다. 그리고 사도께서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있을 때에는 성인께서도 함께 고난을 겪으시면서 온갖 박해와 채찍질을 당하셨다.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

시간이 흘러 성인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되자 사도께서는 성인을 고향 셀류키아의 주교로 임명하셨다. 이때부터 성인께서는 과부들의 보호자요, 고아들의 아버지이며, 고난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이 피할 안식처가 되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요, 집없는 이들의 거처이며 피난처로서 성 바울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도록 만드셨다.(고린토 1서 9:22 “...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날마다 경험하는 부활

성인께서는 성직자들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임하셨으며, 당신이 돌보던 양(곧, 신도)들과 함께 날마다 성찬예배를 드렸다. 또한 성인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축일이 아무런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하며,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덕을 사랑하고 기르는 이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바로 축일이고 중단되지 않는 부활절 곧, 주일이라고 가르쳤다. 당신의 덕과 사도적인 가르침으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민 성인께서는 매우 많은 나이가 되어서 안식하셨다. 이로써 교회와 신도들을 위한 오랜 수고와 노역(勞役)에 지친 성인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바치는 대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성인들을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축복과 하늘나라를 보상으로 받으셨다.

 

 

성 마르코 주교순교자(3월 29일)

 

시리아의 주교

성인께서는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다스리던 때에 시리아 아레투사(Arethusa: 오늘날의 에르- 레스탄[Er-Restan])의 주교이셨다. 거룩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성인께서는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것으로 유명하셨으며, 당신의 손으로 직접 이교의 신전을 부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교의 성당을 세우시기도 하셨다. 니케아에서 열렸던 제 1차 세계공의회 이후의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성인께서는 잠시 반(半) 아리우스적인(semi-Arian) 주교들*의 무리에 속하기도 하셨으나,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올바른 정교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오셨다. 바로 이 무렵 배교자 율리아노스 황제(361-363)가 권력을 잡고는 이교 신앙의 부활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배교자(背敎者) 황제

이처럼 상황이 바뀌자 주교를 반대하는 아레투사의 이교도들은 성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자신의 부모가 암살을 당하였을 때,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성인에 대한 고마움은 전혀 갖지 않은 채 배교자인 황제는 성인을 찾아 붙잡도록 우상숭배자들을 지원하였다. 이 때, 성인께서는 불필요하게 박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몸을 숨기셨다. 그러나 아레투사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인께서는 곧바로 돌아오셔서 이교도들에게 체포당하셨다. 우상숭배자들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든 성인에게 달려들어서는 옷을 벗기고는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인내와 순교

그뒤 그들은 더러운 시궁창에 성인을 던져 버리고는 고문하는 이들이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성인의 온 몸을 찌르도록 놔두었다. 다시 그들은 성인의 온 몸에 소금물과 꿀을 바르고 묶은 다음 높이 매 단 큰 통 속에 집어 넣어 따가운 햇볕과 말벌에 쏘이는 고통을 겪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성인께서는 올바른 신앙을 부정하거나 성인께서 부순 우상들의 신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이교도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성인께서는 이교도들을 꾸짖으시면서, 우상의 신전을 위한 작은 동전 하나가 곧 올바른 신앙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똑같은 죄라고 말씀하셨다. 이교도들 중 일부는 성인의 인내와 말씀에 감화(感化)를 받아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풀려난 성인께서는 364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지는 않되, ‘본질이 같으신’(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이라는 용어를 신앙고백에 넣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 주교들.

 

 

성 요한(끌리막스) 시나이의 수도자(3월 30일)

 

수도사가 되기까지

성인은 6세기 후반에 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과 절연(絶緣)한 성인은 충실한 지적 훈련을 받은 다음 열 여섯 살이 되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득 안고 시나이산으로 갔다. 모든 자기만족과 자기신뢰를 저버린채 겸손한 마음으로 영적인 원로 마르티리오스(Martyrius)에게 자신을 내어맡긴 성인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영적인 계단(klimax 끌리막스)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면서 성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 곧 자기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영적인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실천하려는 생각만이 충만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순종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리오스는 성인을 4년 동안 수도예비자로 머물게 했고, 성인의 나이 스무 살이 되어서야 정식 수도사로 받아들였다.

 

영적인 성숙함과 분별력

젊은 나이임에도 성인께서는 원로와 같은 성숙함과 대단한 분별력을 보여주었다. 한번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저잣거리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때 성인께서는 적게 먹음으로써 폭식(暴食)을 피하였고, 이렇게 하여 모은 돈으로 몇 가지 물건을 사셨다. 이는 수도생활의 초심자가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 중에서) 자신에게 덜 해로운 것을 택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십구 년 동안 완전한 자유로움 속에서 영적인 아버지의 기도에 힘입어 무정욕(無情慾 impassibility)의 항구에 다다르기 위한 ‘안전한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정교회 영성의 보고(寶庫)

원로 마르티리오스가 안식하자 성인께서는 자신에게 헤시카스트(hesychast: 끊임없는 내적 기도로 신적인 빛을 보게 된다고 주장한 영성가들. 10세기의 성 시메온, 14세기의 그레고리 팔라마스 성인 등이 대표적 인물)의 길을 가르쳐준 한 거룩한 원로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도원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거처를 정하고, 그 곳에 40년 동안 머물면서 기도와 철야예배를 하면서 생활하였다. 성인은 오랫동안 자신의 영적인 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하느님께서 이제 그 빛을 남들에게 전할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시자 모세라는 이름의 젊은 수도자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성인의 영적인 감화와 명성은 시나이 반도에 별처럼 빛났고 모든 수도자들은 경외심을 갖고 성인을 바라보았다. 시나이 수도원(오늘날의 성 까떼리나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서 겸손과 사랑의 본을 보여주었던 성인은 7세기 중엽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이노켄티오스 모스크바의 대주교(3월 31일)

 

유망(有望)한 교구사제

성인께서는 1797년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 지역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까닭에 삼촌집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성인께서는 활기에 넘치는 지적 면모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기술적인 일, 특별히 그 가운데서도 시계를 만들고 나무로 하는 작업에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으며, 어릴 때부터 안식하시는 날까지 이같은 일을 손에서 떼어놓지 않으셨다. 결혼을 하자마자 곧바로 사제가 된 성인께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교구사제이셨다. 그러나 1823년 알라스카에 선교사를 보내기 위해 모스크바의 주교회의가 서신을 보내오자 성인의 마음은 알류샨 원주민들(Aleutians)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도적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다.

 

우날라스카의 선교

14개월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함으로써 마침내 우날라스카(Unalaska) 섬에 다다른 성인과 가족은 황폐하게 버려져 쓰지 못하는 한 작은 성당을 발견하였다. 당시 그곳 거주민 중 많은 사람들이 이전 세대에 온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긴 하였으나, 그동안 사제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의 기초적인 진리도 모른채 도덕적인 타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성인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당을 손수 재건하고, 기본적인 교리교육을 시행하였다. 그리고는 그곳의 언어를 배워 예식서들과 복음서의 내용을 번역하였다. 또한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위험한 배에 몸을 맡긴 채 항해하면서 설교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같은 ·10년의 노력으로 우날라스카 섬에는 단 한 명의 우상숭배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러시아교회를 새롭게 하심

그뒤 시트카(Sitka) 섬에 정착한 성인께서는 1838년 러시아 여행중에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바로 수도서원을 하였으며, 자녀들은 교회의 보살핌에 맡기었다. 그리고 1840년 캄차카와 알라스카의 주교가 된 성인께서는 시트카로 다시 돌아와 성당과 학교를 세웠다. 또한 3년동안 광활한 캄차카 반도를 3,000마일 이상 가로질러 걸으며 복음을 전하였다. 1850년 시베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야쿠츠크 지역이 성인의 관할로 합쳐지자 성인께서는 아무르강을 따라 만주 지역과 중국에까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셨다. 1868년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러시아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선출된 성인께서는 그뒤 10년 동안 학교와 자선기관, 교회조직등을 새롭게 하고, 무엇보다도 선교사업에 크나큰 영감을 불어넣으시다가 1879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