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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10월)

ttoza 2010. 2. 15. 11:40

성 로마누스 성가작가(10월 1일)

 

경건한 보제

성인은 5세기 후반에 시리아의 에메사(Emesa)에서 태어나셨다. 베리투스(지금의 베이루트)에 있는 성당의 보제가 된 성인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통치하던 496년경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게 되었다. 성인의 덕스러운 삶은 그곳의 교인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으며, 성인은 임명받은 시루스(Cyrrhus)의 성모님 성당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아름답고 좋은 음성을 갖지는 못하여서, 창조주를 아름다운 음성으로 찬양하면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고 싶은 바램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성모님이 가져다 주신 선물

그러던 어느 성탄절날 블라헤르네(Blachernae: 콘스탄티노플의 한 구역 이름)에 있는 성당에서 성탄절 철야예배를 보고 있는 중에, 성모님께서 손에 한 두루마리를 들고 나타나셔서 성인에게 그것을 주시며 먹게 하셨다. 성인이 그 두루마리를 조금 먹자말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성인의 입을 가득 채웠고, 설교단(ambon)으로 걸어 올라간 성인은 천사와 같은 음성으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성탄절 시기송(콘다키온)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동정녀께서 본체를 초월하는 분을 낳으시니 땅은 범접(犯接)할 수 없는 분에게 동굴을 제공하고 천사들은 목자들과 함께 영광을 드리며 박사들은 별따라 길 떠났도다 태초부터의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아이로 태어나셨음이니라”

 

한 해를 성가로 장식하다

이날 성인에게 주어진 은총은 평생토록 지속되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인은 예전(禮典)에 따른 한 해의 축일 가운데 대부분의 축일을 아름다운 성가로 장식하였다. 천(千) 개 이상의 시기송들이 성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성인은 555년 이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 현재까지 85개의 작품이 남아 있으며 이 가운데 59개는 의심할 바없이 성인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 기쁘리아노스 주교순교자(10월 2일)*

 

이름난 마법사

성인께서는 데시우스(Decius, 249-251) 황제의 통치때에 안티오키아에서 사셨다.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인 성인께서는 철학자요 마법사(魔法師)로서도 명성이 드높았다. 그 무렵 안티오키아에는 뛰어나게 아리따운 처녀 유스타(Justa)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에데시우스(Aidesius)는 이교(異敎)의 사제였다. 어느날 유스타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려고 온 보제 프라일리우스(Praϋlius)의 설교를 듣다가, 설교말씀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머뭇거림이 없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스타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자 차례로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들 세 사람은 마침내 옵타투스(Optatus) 주교를 찾아가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성녀 유스타는 주님께 자신의 순결을 바쳐 남은 삶 전체를 정결과 금식, 기도로 보내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런데 아글라이다스(Aglaidas)라는 한 이교 청년이 성녀를 열렬히 사모(思慕)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구애(求愛) 행위가 거절당하자 그는 실망한 나머지 (당시 아직 그리스도를 모른 채 마법사로 활동하던) 기쁘리아노스에게 청하여 성녀가 좋아할 만한 마술적인 매력이 자신에게 생겨나도록 해달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마법책을 참조하면서 자신의 명령을 따르던 악마들에게 요청도 해 보았으나 성녀의 마음을 유혹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하늘의 신랑 그리스도에 대한 성녀의 사랑이 너무도 견고하였기 때문이었다.

 

성녀 유스티나와 함께

도리어 기쁘리아노스 성인께서는 유스타 성녀를 유혹하도록 자신이 보낸 악마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 성호(聖號) 앞에서 패퇴(敗退)하는 것을 보고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자신의 마법(魔法)보다 더 강함을 인정하였다.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 성인께서는 안티무스(Anthimus) 주교에게 세례를 청하면서 이제껏 행해온 자신의 마술들을 버리는 한편 책들은 공개적으로 모두 불태워버렸다. 나중에 주교가 된 기쁘리아노스 성인께서는 유스타 성녀를 유스티나(Justina)라는 이름의 봉사자(deaconess)로 임명하였다.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때 함께 붙잡힌 두 성인께서는 다마스커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니코미디아(Nicomedia)에 있는 황제 앞에서 참수(斬首)로 순교 당하셨다.

 

* 같은 이름의 라틴 교부로서 잘 알려진 순교자인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e)의 주교 기쁘리아노스(9월 16일, 258년 안식)와 혼동하지 말 것.

 

 

성 하리티니 순교자(10월 5일)

 

노예인 소녀

성녀께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가 다스리던 시기에 폰투스의 아미수스(Amisus)에서 사셨다. 성녀는 노예로서 한 주인에게 팔렸는 데, 그 주인인 클라우디우스는 성녀를 마치 자신의 딸처럼 여기며 길렀다. 성녀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구원의 복음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지역의 통치자인 도미티우스 백작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작은 성녀의 주인에게 편지를 보내 성녀를 자신에게 보내도록 명령하였고 이로써 실제로 성녀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이같은 조사의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에 깊은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녀의 용기

클라우디우스는 비탄(悲嘆)에 잠겨 슬피 울었다. 그러나 성녀는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는 확신으로써 그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래서 성녀께서는 클라우디우스를 위로하며, ‘주인님,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세요. 왜냐하면 제가 이제 저의 죄와 당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희생제물로서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성녀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시녀여, 하늘의 왕국에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나서 주인은 성녀를 백작에게 보냈다.

 

증언과 순교

성녀께서는 집정관의 재판정에 서서 조금도 두려움없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다. 통치자는 성녀를 부끄럽게 할 목적으로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으로 성녀의 머리가 곧바로 자라나자 이번에는 머리가죽을 벗기고는 석탄을 쌓아 불을 붙였다. 또한 불이 붙은 쇠꼬챙이로 가슴을 찔러 휘돌리고 양쪽 옆구리를 불로 지진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으로 성녀는 다시금 통치자 앞에 나타났다. 이후에도 온갖 고문을 다 당한 다음, 성녀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품에 안겨드리고 안식하였다. 성녀의 시신은 다시 바다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해변에서 발견되었고, 클라우디우스는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성 세르기오스와 성 박호스 대순교자(10월 7일)

 

젊은 두 장교

성인들께서는 (갈레리우스) 막시미안 황제(3세기말)의 통치기에 사셨다. 당시 황제는 성인들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정예군대에 속하는 상급장교로 임명하였다. 황제가 우상들에게 공적인 희생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 날, 젊은 두 장교들(성인들)만이 참여를 거절하였다. 황제는 이런 행동을 공개적인 명령불복종으로 여기고 해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성인들을 법정으로 불렀다. 성인들은 ‘우리는 지상에 있는 군대 안에서만 당신에게 충성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감각도 없는 우상들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해 불과 칼로 위협한다 해도 한 분이시고 참되신 하느님으로부터 절대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놀림감이 되시다

황제는 곧바로 성인들에게서 군대기장(軍隊紀章)을 벗기고 여자의 옷을 입히도록 명령하였다. 이런 옷을 입고 성인들께서는 길거리로 끌려다녔으며, 목에는 무거운 쇠로 된 도구를 두른 채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그런 다음 황제는 성인들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군대 주둔지를 따라 끌고 다니다가 마침내 잔인하기 그지없는 동방의 통치자인 안티오쿠스의 본부가 있는 유프라테스의 한 도시에까지 이르도록 명령하였다. 성인들께서는 통치자의 위협과 달콤하게 꼬이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평정(平靜)을 유지하였다. 세르기오스 성인이 따로이 갇혀있는 동안 박호스 성인은 황소의 힘줄로 만든 고문도구로 잔인하게 매를 맞은 다음 순교하셨다.

 

기쁨으로 받아들인 순교

다음날 다시 끌려나온 세르기오스 성인에게 통치자는 배교(背敎)하도록 설득하였으나 그같은 노력이 실패하자 잔인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날카로운 못이 안에 박힌 신발을 성인에게 신긴 뒤 자신의 마차 앞에서 15킬로미터를 달리게 하여 한 요새에 이르도록 하였다.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한다는 기쁨으로 고양(高揚)된 성인께서는 시편성가를 부르면서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밤새 천사의 도움으로 모든 상처가 깨끗이 회복되었고 다음날 온전한 몸으로 다시 통치자 앞에 설 수 있었다. 목이 잘려 순교하기 전 성인께서는 자신의 처형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후에 성인의 순교지에는 성당이 건립되었고, 그곳은 동방에서도 크게 공경을 받는 성소가 되었다.

 

 

성 벨라기아 수도자(10월 8일)

 

안티오키아의 이름난 창부(娼婦)

성인은 본래 5세기 후반 안티오키아에서 살았던 창녀였다. 그 도시의 유명한 창녀였던 그는 춤과 음탕한 쾌락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富)를 쌓았으며, 그것으로 값비싼 옷과 자극적인 향수를 구해 자신의 몸을 치장하고는 또 다시 새로운 희생물을 낚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에워싸 호위하는 많은 노예와 하인들을 거느리고서 사치스러운 마차에 올라앉아 도시를 돌아다니곤 하였다.

어느날 안티오키아의 대주교가 에데사의 거룩한 주교 논누스(Nonnus) 성인을 초청하여 자신의 대교구에 속한 몇몇 주교들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하였는데, 논누스 성인은 대단히 영감어린 가르침을 베풀던 분이었다. 그런데 성 줄리안 성당에서 논누스 성인이 말씀을 하고 있던 차에 벨라기아가 자신의 종복(從僕)들을 데리고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주교들과 다른 경건한 신도들은 벨라기아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논누스 성인만은 벨라기아를 바라보고는 눈물지으며 말하였다. ‘아아, 게으르고 경솔한 백성들이여 슬프도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데는 열심도 없고 주의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화살처럼 날아가는 이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몸을 가꾸기에 바쁜 이 불쌍한 여인을 위해서 심판의 날에 그 누가 변명을 해줄 것인가!’ 그리고나서 논누스 성인은 벨라기아의 회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고독과 눈물로써 일군 새로운 삶

그 다음날 성찬예배때 복음경의 말씀에 대해 논누스 성인이 가르치고 있을 때 벨라기아도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마지막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 대한 성인의 가르침은 마치 날카로운 검(劍)처럼 벨라기아의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벨라기아는 논누스 성인에게 편지를 써 자신이 회개할 수 있도록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성인의 대답을 들은 벨라기아는 한 걸음에 성당으로 달려가 논누스 성인의 발 아래 몸을 던졌다. 그리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로마나(Romana)라는 이름의 수녀가 벨라기아의 새로운 삶을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었다. 벨라기아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노예들은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나서 허름한 옷으로 남장(男裝)을 한 다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성지(聖地, Holy Land)로 떠나 올리브산(Mount of Olives)에서 엄격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년동안 작은 방에 거하면서 벨라기아는 자신의 육체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인간적 정욕과 투쟁하였다. 고독하게 홀로 살았음에도 벨라기아의 빛나는 영적 투쟁의 소문은 팔레스틴의 다른 수도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벨라기아가 여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벨라기아 성녀가 평화로이 안식하자 성녀의 성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여든 각처의 수도자들은 논누스 성인의 한 제자를 통해 벨라기아의 실제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하느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렸다. 그것은 바로 어떤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도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회개의 길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과 롯 의인(10월 9일)*

 

75세에 고향을 떠나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기 약 1200년 전쯤 칼데아(Chaldees: 서남아시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페르시아만에 있는 고대의 한 지역)의 우르(Ur)에서 태어났다. 그는 셈(Shem)의 자손이었고, 사라(Sarah)와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창세기 12:1-3 참조)을 굳게 믿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내와 조카 롯,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유물과 하인들을 거느리고는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Canaan)을 향해 떠났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신 다음 이 계약의 한 상징으로서 모든 남성들에게 할례(割禮, circumcision)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순종으로 표현된 믿음

그 뒤 아기를 낳지 못하던 늙은 부부에게 주어진 아들 이삭은 바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다는 첫 신호(sign)였다. 그러므로 이삭은 하느님께서 거룩한 선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인물이면서 바로, 미래의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한 예표(豫表)이기도 하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燔祭物)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대해 한 마디의 불평이나 반대의견도 없이 그대로 따름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한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다시금 받게 된다. 175세까지 살아 장수를 누린 아브라함은 안식한 뒤 가나안 땅에 묻혔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조카 롯은 요르단강 유역의 기름진 계곡으로 들어가 소돔(Sodom)에 정착한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죄스런 삶을 이어가자 하느님의 진노가 그 도시에 임하게 된다.(창세기 19: 1-29 참조)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불의 심판이 임하던 날,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롯의 아내는 곧바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주님의 부르심을 따를 때에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눈썹만큼도 갖지 말고 온 마음으로 주님만을 따르라는 교훈이기도 하다.

 

* 아브라함과 롯은 그리스도의 다른 선조들과 함께 성탄절 전 주일에 다시 기념되기도 한다.

 

 

성 에블람비오스와 에블람비아 순교자(10월 10일)

 

4세기초의 박해

성인들께서는 막시미안(Maximian, 293-305) 황제의 통치기에 소아시아의 니코미디아에 사셨다. 303년에 니코미디아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두 성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도시 가까이에 있는 산으로 피신하였다. 어느날 에블람비오스 성인께서는 빵을 구하려고 니코미디아 도시로 내려오셨으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알리는 벽보가 거리의 벽에 나붙은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 있던 성인을 이교도들이 붙잡아 시당국으로 끌고 갔다.

 

우상에게 명령하심

황제 앞에 선 성인께서는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심문을 계속 당하던 중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바꾸어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칠 의도가 있는 듯이 보이게 되자 사람들은 성인을 우상의 신전으로 데리고 갔다. 신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칠 것처럼 마르스(Mars: 로마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그리스신화의 아리스[Ares])의 동상 앞으로 나아간 성인께서는 우상을 향해 큰 소리로 명령을 하였으며, 말도 못하는 동상은 바닥으로 넘어져 산산조각이 난 채 부셔지고 말았다. 자신들이 바보처럼 돼버렸다고 생각한 우상숭배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 성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용감한 남매 ‘전사’(戰士)

성인께서 고문을 당하고 있는 동안 여동생인 에블람비아가 와서는 자신도 오빠와 함께 고통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성녀의 기도를 들으셨다. 드디어 성녀도 함께 붙잡혔고, 고문하는 자들은 두 성인을 함께 묶어 기름이 펄펄 끓어 넘치는 커다란 솥 속으로 집어던졌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 용감한 두 남매 ‘전사’(戰士)가 고문을 겪도록 허락하심으로써 한편으로는 당신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보여주셨는 데, 그것은 바로 두 성인이 아무런 해(害)도 입지 않은 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놀라운 기적에 200명의 우상숭배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러자 황제는 곧 두 성인의 목을 잘라 죽였고, 성인들은 축복받은 순교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성 테오판 성가작가(10월 11일)

 

성 사바스 수도원

성인께서는 778년 팔레스틴의 한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남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이름이 나있었다. 성인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신앙과 세속의 학문으로 가르쳤다. 그런 다음 부모님은 자식들을 성 사바스 수도원으로 보내 배움을 완성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학문중의 학문’이요 ‘예술중의 예술’인 수도생활을 잘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테오판 성인의 겸손과 순종하는 자세는 형인 테오도로스만큼이나 성숙한 것이었고, 성가작가로서 지닌 재능과 열정 또한 대단하였다. 그후 두 형제는 모두 사제가 되었다.

 

성화에 대한 박해

그런데 당시는 아르메니아인 황제 레오(813-820)가 성화를 공경하는 이들에 대해 새로운 박해를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성화를 옹호하는 주교들에 대한 공격이 일어났으며, 성당 안에 그려진 성화들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뒤이어서 아랍인들이 제국 안으로 침입하여 팔레스틴과 성 사바스 수도원을 점령해 버렸다. 이같은 상황에서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명을 받은 성인께서는 형인 테오도로스와 함께 황제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그러나 도리어 두 형제는 황제로부터 고문을 당한 뒤 추방되었다. 그뒤 잠시 성화를 옹호하는 미하일 2세(820-829)의 치세기(治世期)에 평화가 찾아왔으나, 그의 아들 테오필로스(829-842)가 권좌에 오른 뒤 성화에 대해 전례없이 혹독한 박해가 다시 이어졌다.

 

정교신앙의 수호자

성인과 형인 테오도로스는 다시금 고문과 배고픔, 목마름, 조롱, 감옥생활을 겪고나서 한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고통과 황제 앞에서 당한 위협 속에서도 두 형제는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두 형제는 이마에 낙인이 찍히는 형벌을 당한 뒤 아파미아(Apamea)로 추방되었고, 형인 테오도로스는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테오판 성인께서는 다시금 데살로니끼로 추방되었으나, 그곳에서도 성인께서는 정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우셨다. 경건한 테오도라 왕비가 즉위한 뒤 842년에 성인께서는 니케아의 대주교가 되셨으며, 신도들을 돌보는 한편 많은 시적인 성가들을 작곡하며 남은 생을 평화로이 지내시다가 안식하셨다.

 

 

성 안드로니꼬스와 성 타라호스 순교자(10월 12일)

 

경건한 군인과 귀족

이 성인들은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통치하던 304년경 고통을 겪으시고 순교하셨다. 타라호스 성인은 로마의 시민이며 군인으로서 이소리아(Isauria: 고대 소아시아 남쪽의 울퉁불퉁하고 고립된 지역으로 현대 터키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지중해에 접해 있음.)의 클라우디오폴리스 출신이었고, 안드로니꼬스 성인은 에페소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킬리키아의 폼페이오폴리스에서 드러났으며, 이내 그곳에서 붙잡혀 먼저 타르소(Tarsus)로, 다음으로는 몹수에스티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나자르부스라는 도시로 끌려가 통치자 막시무스 앞에 서게 되었다. 이때 나이가 많은 타라호스 성인은 돌에 맞아 턱이 부러졌는데, 이는 통치자가 아무리 위협해도 조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통의 시작

함께 붙잡힌 프로부스(Probus) 성인은 통치자의 위협과 달콤한 꾐에 대해 ‘내가 지금 흘리고 있는 피는 더높은 투쟁을 위해 기쁨으로 바르는 기름이며 향료’라고 대답하였다. 셋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안드로니꼬스 성인은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렬한 희망을 표현하였다. 그러자 고문을 가하던 이들은 성인을 교수대(絞首臺) 같은 곳에 매단 다음, 날카로운 칼날로 두 손과 두 발을 자르고 옆구리를 불에 지지고 나서는 그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몇일 뒤 다시 불려나온 타라호스 성인은 머리를 땅으로 향한 채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로 위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고문을 당하였다. 이어서 고문하는 사람들은 식초와 후추, 소금을 섞은 물을 성인의 코로 흘려넣었다.

 

거룩함 앞에 멈춰선 맹수들

몇일동안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도 성인들이 흔들림없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자 막시무스는 드디어 세 성인을 원형경기장으로 끌고가 맹수들의 앞에 세워놓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하루 종일 굶주렸던 곰 한 마리가 안드로니꼬스 성인의 앞에 와 서더니 마치 위로라도 하듯이 혀로 성인의 상처를 핥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한 암사자는 타라호스 성인의 주위를 뱅뱅 돌뿐 성인에게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 이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들은 모두들 놀라고 두려워하는 눈빛이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는 격노한 나머지 세 성인의 목을 자르도록 검투사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날 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인들의 주검을 한 산의 동굴로 옮겨 장사지냈다.

 

 

성 꼬즈마 성가작가(마이우마의 주교, 10월 14일)

 

세상의 학문과 하느님의 학문

성인은 7세기 후반에 태어났으며 매우 어린 나이에 부모가 모두 죽어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성인은 다마스커스의 요한(12월 4일) 성인의 아버지인 세르기우스의 양자가 되었는데, 양부(養父)인 세르기우스는 그 도시에서 높은 지위와 큰 부(富)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세르기우스는 자신의 아들 요한과 입양한 아들 꼬즈마가 이탈리아의 시실리 출신인 한 수도자(그 또한 꼬즈마라는 이름을 가졌었다.)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이 수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전부를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교육을 받는 동안 두 젊은이는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을 서서히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머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두 젊은이가 지닌 문법과 철학, 음악, 천문학, 기하학 등에 대한 지식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 뒤 두 젊은이는 팔레스틴의 성 사바(St. Sabas) 수도원*에서 함께 수도사가 됨으로써, 이 세상의 지혜에 대한 자신들의 연구를 마감하고 ‘학문 중의 학문’이며 참된 철학인 고행과 기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신학을 성가로 표현하다

요한이 먼저 사제가 되고나서 예루살렘의 주교회의(synod)는 꼬즈마 성인을 설득하여 예루살렘에 속한 교회인 마이우마(Maiouma)의 주교직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직을 맡은 성인은 자신의 영적인 양떼들을 사랑으로 오래동안 잘 돌보다가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특히 성인은 많은 시적인 성가곡들을 작곡하였으며 그중 주된 것들은 우리 주님의 축일과 관련된 것들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성인은 교부들의 신학적 가르침에 담긴 진수(眞髓)를 성가에 담아 표현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이로써 교인들이 성당에 함께 모여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때 교부들의 가르침을 모든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성 사바 수도원- 5세기부터 6세기초까지 생존했던 사바tm 성인이 세운 수도원. 이 수도원은 정교 수도원 제도와 팔레스타인 교회의 역사에서 독특한 중요성을 지닌다. 많은 성인들이 이 곳에서 나왔으며, 특히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마이우마의 주교 성 꼬즈마, 크리티의 성 안드레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금도 정교회 예식을 규정하는 이른바 '띠삐꼰'(Typikon)이 이곳에서 발전되어 나왔고, 정교회 성가들 중 중요한 것들 또한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성 루끼아노스 사제순교자(10월 15일)

 

홀로 행한 영적 훈련

성인께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4)의 통치 기간에 사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성인께서는 자신이 태어난 안티오키아를 떠났으며,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마카리오스라는 이름의 명성이 자자한 영적 스승을 찾아 에데사(Edessa)로 가 그분에게서 신앙을 배웠다. 세례를 받고 수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낸 성인께서는 아무런 동료도 없이 오직 홀로 금식과 철야예배와 눈물을 벗삼아 지냈다. 그리고 영적 스승을 통해 성인께서는 특별히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성경을 사랑한 사제

이후 성인의 덕성 깊은 생활을 익히 알게 된 안티오키아의 교회는 성인을 불러 들여 사제직에 임명하였다. 성인께서는 안티오키아에 유명한 성경주석학교(School of the Exegetes)를 세운 뒤,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어구(語句)에 충실하고 글자의 뜻 그대로 엄밀하게 성경을 해석하도록 가르쳤으며,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이단자들이 고치거나 바꾼 성경책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성인께서 학문적인 활동을 통해 끼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 알게 된 공동의 통치자 막시미안 황제는 성인을 붙잡아 자신이 거하던 도시 니꼬미디아로 데려 오게 하였다. 니꼬미디아에 도착한 성인께서는 고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배교(背敎)를 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다시금 용기를 갖고 하느님을 믿도록 열정적으로 권유하였다.

 

토굴감옥에서 맞이한 순교

우상숭배자들이 고안해낸 고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영원한 형벌이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성인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가르치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섰으며 용기있게 순교를 기다리게 되었다. 황제는 성인을 자신의 재판정으로 부르기 전 자신도 또한 성인의 설득력 있는 언변에 넘어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자신과 성인 사이에 휘장(揮帳, curtain)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인을 이런 말 저런 말로 회유(懷柔: 잘 구슬리고 달램)하였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자, 성인을 토굴감옥에 던져 넣어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라고 명령하였다. 신현(神顯, Theophany)축일에 다른 도시의 제자들이 가져온 빵과 포도주로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한 성인께서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들을 끝까지 거부한 채 견디시다가 그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셨다.

 

 

성 호세아 예언자(10월 17일)

 

하느님과 이스라엘

‘구원’ 또는 ‘구출’, ‘석방’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거룩한 예언자 호세아는 브에리(Beeri)의 아들로서 잇사갈(Issachar) 지파에 속하였으며, 요아스(Joash)의 아들 여로보암(Jeroboam, 786-746)의 통치기와 그 이후 이스라엘(또는 사마리아)로 분열된 북왕국(남쪽은 유다왕국임)의 왕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살았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호세아 예언자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해석하여 들려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예언자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목적을 보여주었다. 곧, 주님께서는 예언자더러 자신에게 불성실하게 될 한 창녀와 결혼을 하도록 명령하셨는데,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하느님과 맺은 신성한 계약을 성실히 지키지 않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회개하고 돌아오라

예언자는 비탄(悲嘆)에 잠긴 어조(語調)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실망하셨으며, 준엄한 형벌이 불성실한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자신의 예언에 담아 전하였고, 이는 곧 외국 군대의 침입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징벌하신다.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너무도 큰 까닭에 당신의 맹렬한 진노를 차마 쏟아내실 수는 없으시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호세아 1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금 황야로 이끄실 것이고, 마치 잘못을 범한 아내에게 하듯이 달래며 부드러운 말로 말씀하실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영원한 신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와 그 분의 평화와 사랑과 보호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이렇게 되는 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곧, 오늘날의 교회)을 향해,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것이다.(호세아 2:21)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런 화해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음의 힘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실 때만이 진정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호세아 예언자는 확신하며 증언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완수한 다음 호세아 예언자는 평화로이 안식하셨고, 자기 조상들의 땅에 묻혔다.

 

 

성 루가 복음사도(10월 18일)

 

지혜를 구한 젊은이

성인께서는 안티오키아의 이교도 가정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온 세상을 다니며 지혜를 구하던 성인께서는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셨고, 특별히 의술을 익혀 의사가 된 한편으로 그림을 그리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성인께서 쓰신 복음서를 보면 그가 그리스어에 능통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성인은 또한 히브리어와 아람어도 알고 있었다. 교회에는 성인에 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그 첫째는 성인께서 주님이 둘씩 짝지어 보내신 70인 사도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 전승에 따르면 성인께서는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예루살렘에 있었고, 나중에는 클레오파(10월 30일)와 함께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후에 성 사도 바울로를 만나 그의 둘째 선교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사랑하는 의사’

그러나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성인께서는 주님께서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42년경) 내과의사로서 일하던 때에 사도 바울로를 만나게 되고, 성 사도의 열정적인 설교에 감동되어 모든 특권을 다 저버린 채 사도를 따라나서 영혼을 돌보는 ‘사랑하는 의사’(골로사이 4:14)가 된다. 성인께서는 바울로 사도와 함께 트로아(Troas)에서부터 필립비(Philippi)까지 여행하면서 새로운 교회들을 세웠고, 홀로 마케도니아에 수 년동안 머무르며 그곳 신도들을 돌보기도 하셨다. 후에는 예루살렘, 케사리아 그리고 로마까지 성 사도를 동행하면서 그런 과정들을 사도행전의 말미에 기록하기도 하였다.(사도행전 27-28장 참조)

 

첫 성화작가

바울로 사도께서 순교하신 뒤, 성인은 이탈리아와 달마티아, 마케도니아에서 복음을 전하셨고, 에집트의 우상숭배자들도 교화시키셨다. 그리스로 다시 돌아와서는 테베(Thebes)의 주교가 되어 사제들과 보제들을 서품(敍品)하고 성당들을 세우는 한편, 영혼과 육신의 환자들을 기도로 치유하셨다. 이때 우상숭배자들이 80세가 넘은 성인을 잡아 잔인하게 고문한 다음, 나무에 매달아 처형하였다. 그뒤 성인의 무덤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말미암아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성인께서는 첫 성화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성모님 생전에 그 성화를 처음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께서는 성화작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진다.

 

 

성 요한 불가리아(릴라 수도원)의 수도자(10월 19일)

 

어린 나이에 쌓은 덕들

성인은 10세기 중반 불가리아인 왕 피터 1세의 통치때에 소피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한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일찍이 어린 나이에 그리스도교의 미덕들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고, 조금 나이가 들자 곧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자신에게 나타난 환상(vision)을 따라 성인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매우 어린 나이인 성인의 조카 루가(Luke)도 거룩한 삶을 열망하며 성인의 지도를 따라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다시 세속의 집으로 되돌아 오게 된 조카는 이 세상의 악에 물들기 전에 잠깐동안 병이 들었다가 곧 숨을 거두고 만다.

 

왕에게 행한 충고와 조언

홀로 수도생활을 하던 성인은 강도들의 공격을 받게되자, 외따로 있는 은신처를 떠나 험준한 릴라(Rila) 산맥에서 새로운 수도처를 찾게 되었다. 성인은 이윽고 바위가 툭 튀어나온 산꼭대기의 한 동굴을 자신의 은둔처로 정해 세속의 모든 헛된 것들에서 벗어나 살게 되었는데, 이곳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불가리아의 피터 왕이 성인에 관해 듣고 사람을 보내 만나보려 하였으나 성인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이 직접 성인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은 단지 멀찍이서 성인이 거하는 동굴을 쳐다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왕은 성인에게 금과 식량들을 보내면서 아주 겸손한 태도로 세속의 유혹들을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며 성인의 기도를 요청하였다. 성인은 금과 왕이 보내온 것들을 모두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왕에게 편지를 써서 눈물로 회개할 것과 다가올 죽음을 항상 기억하도록 충고하고, 백성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많이 베풀어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시고 영원한 왕국을 허락하시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릴라 수도원: 불가리아인들의 영적 샘

요한 성인의 편지를 받아든 왕은 마치 최고의 보물을 대하듯이 그 편지에 입을 맞추고 존경을 표하였다. 그리고 국사(國事)를 돌보며 피곤할 때마다 성인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곤 하였다. 한편 요한 성인은 안식하기까지 릴라의 동굴에 머물렀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까이 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해오자 성인은 먼저 가까운 곳에 성당을 짓게 하고, 이어서 수도자들이 머물 방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곧 그곳은 거대한 수도원이 되어 오늘날까지 릴라 산맥에 웅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요한 성인의 성해 또한 그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후에 터키인들이 불가리아를 지배할 때에도 성인이 세운 수도원은 불가리아인들의 영적인 중심지였으며 불가리아 정교회 문화의 주된 원천이 되었다.

 

 

성 일라리온 수도자(10월 21일)

 

안토니오스 성인의 제자

성인께서는 293년에 가자(Gaza)에서 멀지 않은 팔레스틴의 타바타(Thabata)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우상을 숭배하던 성인의 부모님은 성인이 문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 그곳에서 성인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서의 가르침들을 알게 되었고, 특별히 이집트 전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안토니오스 성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뒤 마침내 그분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안토니오스 성인께서는 말의 갈기로 만든 겉옷과 짐승의 가죽으로 된 외투를 이제 열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일라리온)에게 주고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가자의 마이우마(Maiuma) 가까이에 있는 사막으로 보내 고행생활에 정진하도록 하였다.

 

엄격한 금식

성인께서는 그곳에서 엄격한 금식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한편 젊음의 욕정들을 몰아내셨다. 곧, 해가진 다음 고작 열 다섯 개의 무화과 열매를 먹는 것이 성인의 하루 식사 전부였다. 낮에는 기도하거나 또는 아주 메마른 땅에서 일하면서도 시편을 계속 노래하였다. 이때 악마가 사나운 맹수의 모습으로 나타나 마치 안토니오스 성인에게 그랬듯이 이 젊은 수도자를 위협하면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위협이 헛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인께서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그음으로써 악마의 공격을 방어하시거나, 악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비웃으심으로써 그 싸움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틴에 심은 수도생활

성인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이같은 금욕적 수련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을 행하는능력을 풍부히 받게 되었다. 성인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을 낫게 하였다. 그후 성인의 명성은 팔레스틴 전체와 이집트, 시리아까지 퍼져나갔다. 당시 아직 수도생활이 시작되지 않았던 팔레스틴과 시리아에서 성인은 마치 안토니오스 성인께서 이집트에서 하시던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셨다.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 361-3)의 폭정시대에 리비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그리고 다시 키프로스로 다닌 성인께서는 가는 곳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곳의 한 동굴에서 80세가 되도록 기도에 전념하시던 성인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고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아베르기오스 준사도(10월 22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성인께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가 통치하던 시대에 소아시아 서쪽의 프리지아 살루타리스에 있는 이에라뽈리스(Hierapolis)의 주교이셨다. 당시 황제는 이름난 철학자이긴 하였으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자이기도 하였다. 황제는 자신의 신하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제국 전역에서 우상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이로써 제국의 종교(곧, 우상숭배)에 맞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레라뽈리스의 주민들 또한 이 악마적인 축제에 참석하여 의무적으로 희생제물들을 바쳤으나, 성인께서는 홀로 집에 머물며 하느님께서 무지한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눈물로써 기도하였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

그러던 중 한 천사가 성인에게 나타나 아폴로(Apollo)와 다른 이교신들의 제단을 때려 부수라는 명령을 하자,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굳건해진 성인께서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달려가 모든 말 못하는 우상들을 땅에 뒤엎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아침, 성인께서는 도망가기는커녕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는 시장으로 가 당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또한 우상들을 때려 부쉈던 바로 그 지팡이로 정신이상에 걸린 세 남자를 올바른 정신으로 회복시켜주었다. 그러자 성인을 공격하려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같은 큰 능력을 받은 분이 있는가 하며 성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날 하루에만 오백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복음전파를 위해 바친 여생

성인이 행한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듣게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더러운 영에 사로 잡혀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딸을 위해 성인을 로마로 오도록 했다. 로마에 이르러 곧바로 황궁(皇宮)으로 간 성인을 본 악령은 공주의 목소리를 빌어 자기가 원래 있던 곳인 프리지아(Phrygia)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성인께서는 악령더러 우상숭배에 쓰는 거대한 돌도 함께 가지고 사라지라고 명령하였다. 악령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돌을 짊어진채로 높이 하늘로 사라졌고, 공주는 몹쓸 병이 씻은듯 나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악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월한 힘을 분명히 보여주는 한 표시였다. 이후 프리지아로 다시 돌아온 성인께서는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고, 병자를 고치고, 악령을 몰아내는 일을 계속하시다가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마르기아노스와 마르티리오스 순교자(10월 25일)

 

총대주교의 비서

두 성인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아리우스(Arius)*를 추종하는 황제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II, 337-361)의 재위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살았다. 성인들의 학문과 친절한 마음, 그리고 경건한 삶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성인들께서는 당시의 총대주교인 성 바울로(St. Paul the Confessor, 11월 6일)의 비서(Notaries public: 일종의 문서공증인)로 임명되어 일하셨는데, 총대주교께서는 350년경 아르메니아로 추방되어 머무는 동안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하셨다. 그러나 성인들께서는 추방이나 죽음등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그 (신적인) 본질이 같으시다’는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결정사항을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셨다.

 

아리우스 이단과의 싸움

성부와 성자의 ‘일체이시고 나누이지 아니하시는’ 같은 신적 본성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은 두 성인에게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어서, 두 성인은 이 가르침을 갑옷의 가슴받이처럼 자신들의 몸에 지녔으며, 이로써 악마와 이단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인들은 후에 체포되어 칼로 죽임을 당하였고, 콘스탄티노플 도시의 멜란디시아(Melandissia) 문 밖에 묻혔다. 다시 교회의 평화가 회복되고 나서,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은 두 성인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립하였다.

 

* 알렉산드리아의 사제로서 ‘성자 하느님은 성부 하느님보다 열등하며, 다만 창조물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니케아에서 소집된 제 1차 세계공의회는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라고 증언하는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성 디미트리오스 대순교자(10월 26일)

 

훌륭한 가문의 군인

성인께서는 갈레리우스 막시미안 황제(기원후 306년경)의 통치 시기에 데살로니까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성인의 가정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도 아주 이름난 가문들에 속하는 집안이었는 데, 성인은 단지 이같은 훌륭한 조상의 명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선조들을 뛰어넘는 미덕과 지혜, 선한 마음 등으로 말미암아 더더욱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성인께서 지니셨던 군사기술과 지식 탓에 동방제국의 황제(Caesar)라 불리던 갈레리우스는 성인을 데살리(Thessaly)의 로마군 사령관 겸 헬라(Hellas)를 관장하는 지방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지위와 영예에도 불구하고 성인께서는 여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을 가장 의미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

한 번은 황제가 스키티아인들(Scythians)에 대해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서 로마로 돌아가던 길에 데살로니까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 그는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다음 우상들에게 희생제사를 바치려 하였다. 이 때 성인의 업적을 시샘하던 이교도들이 성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고하며 비난하고 나섰다. 성인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고 여긴 황제는 크게 화를 내며 성인을 즉시 잡아오도록 명령하였다. 끌려와 공중목욕탕의 지하에 있는 한 불결한 방에 갇힌 성인은 비록 그곳이 습기차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환경이었지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생각에 도리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스토르와 리에오스

바깥 경기장에서는 황제가 부른 반달(Vandal)족 출신의 거인 리에오스(Lyaios)가 힘자랑을 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했다. 이 순간 네스토르(Nestor)라는 그리스도인 젊은이가 성인에게로 가서 거인을 상대해 싸울 수 있도록 보호해 달라고 청하였다. 성인께서는 어린 네스토르의 이마와 가슴에 성호를 그어주고는 마치 골리앗 앞의 다윗처럼 그를 내보냈다. ‘디미뜨리오스의 하느님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외친 다음 엄청난 힘으로 달려드는 리에오스의 공격을 피한 네스토르는 단칼에 거인의 심장을 찔러 버렸다. 뜻하지 않은 이런 상황에 도리어 분개한 황제는 참된 하느님을 인정하는 대신 군인들을 보내 성인을 창으로 찔러 숨지게 하였다. 그리고 네스토르는 목을 쳐 죽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성인의 몸에서는 향내를 내는 기름이 흘러나왔으며, 성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기적은 마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성 아나스타시아 로마인 수녀순교자(10월 29일)*

 

로마의 한 수녀원

성녀께서는 3세기 중반의 데시우스 황제와 그의 계승자인 발레리안 황제의 시절, 프로부스(Probus)가 통치자로 있던 로마에서 살았다. 성녀께서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다 소유하였었다. 그러나 성녀께서는 당신을 이 세상에 얽어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혜롭고 덕성이 높은 수녀 소피아가 지도하는 로마의 한 작은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에 전념하였다. 육체의 욕망을 거스르며 열렬히 투쟁하는 성녀의 모습을 시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악마는 성녀가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성녀를 큰 시련 앞에 내던지기로 작정하였다.

 

사탄의 음모 앞에서

곧, 성녀께서 그 도시의 우상들을 예배하기를 거절하며 그로써 결국 뻔뻔스럽고도 불경건하게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를 경멸한다는 소식이 통치자 프로부스에게 보고되었다. 프로부스는 성녀께서 수도원으로 쓰던 한 집으로 군인들을 보내 성녀를 붙잡았다. 소피아 수녀는 한 훌륭한 제자를 잃는 슬픔에 울먹였으나, 이내 아름답고 다채로운 빛깔의 옷으로 장식한 신부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바친다는 생각으로 기뻐하였다.- “호화스런 칠보로 단장한 공주여/ 화사한 옷 걸쳐 입고/ 들러리 처녀들 거느리고 왕 앞으로 오너라”(시편 45:13-14)

 

순교의 피를 흘린 아리따운 처녀

성녀께서는 통치자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 믿음이 흔들리기는 커녕 도리어 그리스도 하느님과 완전하게 하나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더욱 굳건해진 성녀를 바라보던 통치자는 화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고문을 가하던 이들에게 더욱 가혹한 고문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자 성녀에게 매질을 가하던 이들은 거대한 바퀴 모양의 기구 위에서 성녀의 뼈가 부러지게 하였으며, 가슴을 도려내고, 마침내 성녀의 혀를 잘라버렸다. 이로써 성녀께서는 순교하셨고, 소피아 수녀가 성녀의 성해를 거두었다. 오늘날 성녀의 성해 중 대부분은 아토스 성산의 그리고리우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 성녀를 디오클레티안 황제 시절에 순교한 같은 이름의 성녀 아나스타시아 파르마코리트리아(St. Anastasia Pharmacolytria, 12월 22일)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성녀는 같은 시기에 꼭 같은 환경에서 순교한 성녀 아나스타시아(10월 12일)와 동일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 헬렌 세르비아의 왕비(10월 30일)

 

지혜롭고 경건한 왕비

성인은 13세기에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가문들 가운데 하나인 안주(Anjou) 가(家)에서 태어나, 루르(Loire) 계곡의 평화로운 풍경들 속에서 자라났다. 성장하여 성인은 세르비아의 왕인 우로쉬(Urosh) 1세(1243-76)의 아내가 되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가 시실리의 왕인 안주의 챨스(Charles of Anjou)와 맺은 동맹관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세르비아의 왕비로서 성인은 지혜롭고 경건한 왕비의 본을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성인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 또한 모두 성인이 되었다.* 성인의 남편(세르비아의 왕)은 안식하기 전 수도서원을 하고 시메온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사가 되었다. 그뒤 성인은 자신의 모든 지성과 통찰력 그리고 힘을 다해 경건한 생활을 하는데 헌신하였다. 말뿐 아니라 생활방식도 성인은 매우 검소하면서 엄격하였지만 마음만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성인은 배고픈 사람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기도이외에 성인의 첫째 관심사는 바로 그런 굶주린 이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성인은 고아들을 찾아내어 보호해 주었고, 수도원과 성당들을 건축하였으며, 백성들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의 두 아들이 형제적인 사랑과 일치 속에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아들에게 남긴 영적 교훈

나이가 들어 자신의 죽음이 다가옴을 안 성인은 엘리자벹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서원을 하고 수녀가 되었다. 성인은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인 드라구틴 성인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교훈을 남기고 평화로이 안식하였다. - ‘이곳 지상에서의 우리의 덧없는 삶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며 무정한 죽음일 뿐이다. 네가 오늘은 여기에 있지만 내일은 또 어디에 있을지 알지 못한다. 오늘은 네가 왕이지만 내일은 신하가 될 것이다. 오늘은 부(富)를 자랑하지만 내일은 빈곤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재판관 중의 한 사람이지만 내일은 피고인이 될 것이다.’ 성인이 안식하고 난 뒤 3년이 지나서 라스(Ras)의 주교 바울로에게 나타나셨다. 바울로 주교는 완벽하게 보존된 성인의 성해를 발견하여 그라다츠(Gradats)의 수도원 성당으로 옮겼으며, 그 성해는 이곳에서 오늘날까지 신도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

 

* 첫째 아들인 드라구틴(Dragutin) 성인은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밀루틴(Milutin) 성인에게 물려주고 보스니아에 있는 자신의 영지(領地)로 돌아가 기도와 자선의 삶을 살다가 죽기전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라는 이름의 수도명으로 수도사가 되었다. 둘째 아들인 밀루틴 성인은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왕좌에 42년동안 머물며 세르비아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데살로니까, 소피아, 예루살렘, 시나이산과 아토스산 등에 자신의 재위기간과 같은 수(42개)의 성당들을 건축하였으며, 성당 옆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들(호스피스, hospices)을 건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