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정교 여자성인
가브릴리아 원장수녀(1897-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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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때가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이 “이 지상에서 평범하고 물질적인 삶을 살도록 나를 붙들어 맸던 마지막 끈을 끊어버렸어요. 갑자기 나는 죽고 말았어요...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말았어요.”라고 적었다. 그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날 온밤을 깨어 기도할 동안, 그녀의 방 안에는 그리스도의 성화에서 흘러나오는 눈부신 빛이 가득하였다. 그 뒤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 그녀는 아테네에 있는 자신의 물리치료 시설을 폐쇄하였고, 자신의 모든 돈과 재산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절대적인 가난 속에 살 결심을 하고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러나 그곳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고한 신념을 간직한 채 인도를 향해 떠났다.(이슬람과 서구 여러 나라의 상호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비춰볼 때, 60년전 한 여성이 홀로 버스를 타고 요르단에서 이라크와 이란을 거쳐 인도로 여행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기적처럼 보인다.)
아브릴리아는 옷 한 벌과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인도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여러 치료소와 아쉬람(ashram: 힌두교도들이 수행하며 거주하는 곳) 등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물리치료를 베풀면서 5년동안 머물렀다. 그녀는 일을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차별없이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였고, 함께 자유로이 사귀었다.
인도에서 보낸 시간이 끝나갈 무렵,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라고 부르신 (주님의) 음성이 다시 그녀를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끌었으며, 그곳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은둔자적인 고독 속에 11개월을 보내게 된다. 이때 그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소명을 받았다. 1959년 그녀는 이스라엘의 베다니에 있는 성 라자로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3년의 수련기간을 보낸 뒤 가브릴리아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녀가 되었다.
그뒤 20년 동안은 수도원적인 정적과 말을 해야 하는 여행이 뒤섞인 흥미진진한 시기로서, 특별히 3년 동안의 아프리카 동쪽 지역 선교사역과 라자로 무어 신부
(Fr Lazarus Moore)의 정교 공동체와 함께 인도에서 일한 또 다른 3년이 포함된다. 영국 에섹스의 소프로니 대신부가 그녀에게 자신이 세운 여자수도원 원장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사양하였는데, 이는 점점 더 소중히 품어오던 침묵과 고독에서 벗어나 (남을 위한) 봉사를 하라고 하는 부르심 중에서 그녀가 따르지 않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1979년 그녀는 아테네의 한 아파트를 무상으로 쓰도록 제공받았는데, 그로부터
10년 이상 그곳은 그녀의 제자들에게 ‘천사들의 집’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그녀는 하루의 반나절 동안 아무런 방문자도 받지 않은 채 기도하며 보냈고, 나머지 반나절은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상담하면서 보내곤 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애기나 섬에 있는 한 은둔처로 이사하였으며, 그뒤 다시 레로스 섬으로 옮겼고, 1991년 그곳에서 ‘대 스키마’(Great Schema: 영적수련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수도자에게 수여한다.)를 받고나서 그 다음 해에 평화로이 안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