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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5월)

ttoza 2010. 2. 10. 22:15

성 조이 순교자(5월 2일)

 

어머니와 아들들

본래 소아시아의 프리지아 태생인 성녀께서는 카탈로스라는 이름의 부유한 이교도에게 속한 노예였으며, 하드리안 황제의 통치기(124년)에 팜필리아 지역에 있는 아탈리아(Attalia)라는 곳에 살았다. 어느 날 성녀의 두 아들인 끼리아코스와 테오둘로스는 잘못된 신들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부모님들에게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자고 제안하였다. 자신들은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해방되었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같은 제안에 성녀께서는 처음에는 더 참고 지내자고 아들들을 달랬다.

 

영혼의 주인이신 분

그러나 곧 성녀께서도 자식들의 계획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서로를 격려한 다음 자신들의 주인인 카탈로스에게로 가서, 그는 자신들의 주인으로서 단지 자신들의 몸에 대해서만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자신들의 영혼은 오직 한 분이신 주인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선언하였다. 성녀와 그 아들들의 이같은 담대함에 놀란 주인은 성녀와 그 자식들을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이며 아버지인 헤스페리오스(Hesperius)에게로 보냈다.

 

위대한 신앙의 가족

그후 조금 지나 자기 아들의 생일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카탈로스는 네 명의 그리스도인들(성녀와 그 남편, 그리고 두 아들)에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도록 하였다. 그러자 용감한 두 젊은이는 (우상에게 바쳐져) 더럽혀진 고기조각을 개들에게 던져버렸다. 이것을 본 카탈로스는 그들을 고문하는 나무틀에 붙들어 맨 다음, 쇠못으로 그들의 갈빗대를 부러뜨리도록 명령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성녀와 남편은 아들들에게 끝까지 잘 견디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이에 더욱 화가 난 카탈로스는 성녀와 헤스페리오스에게도 매질을 가하도록 하고, 이어서 넷 모두를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안에 집어넣도록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그 화덕 안에서 시편을 성가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교도들이 화덕의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네 명의 성인들은 조금도 불에 그을리지 않은 채 동쪽을 향한 자세로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누워 안식한 모습이었다.

 

 

성 디모테오와 성 마브라 순교자(5월 3일)

 

경건한 봉독자

디모테오 성인께서는 에집트의 테베(Thebes)에 가까운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봉독자로 임명된 뒤, 성인께서는 예배 시간에 성인들의 생애에 대해 읽음으로써 교인들에게 다가올 하늘나라의 선물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셨다. 304년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첫 칙령이 공포되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경건한 마브라와 결혼한 지 이제 겨우 이십일 밖에 지나지 않은 성인께서는 새로운 종교(곧,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설교자라고 고발되어 그 지역의 통치자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통치자는 성인에게 예배서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아버지가 자진하여 자식들을 죽음에 내놓지 않듯이, 나도 이 예배서들이 불태워지도록 내어 주지 않겠다’고 말하셨다.

 

신앙으로 하나가 된 부부

격노(激怒)한 통치자는 붉게 달궈진 쇠꼬챙이로 성인의 귀를 꽤뚫은 다음, 두 눈마저 도려 내어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런 다음 쇠못이 박힌 커다란 바퀴에 붙들어 매단 채 굴려서 성인의 살갗이 벗겨지게 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상처가 깨끗이 나았으며, 이후 다른 고문들도 굳건히 견뎌내셨다. 그러자 통치자는 성인을 감옥에 가둬두고는 아내 마브라를 불러 성인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남편과 잠시 대화를 나눈 마브라 성녀께서는 거룩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통치자 앞에 나가 자신도 또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통치자는 성녀의 머리칼과 손가락들을 자른 다음, 펄펄 끓는 물에 성녀를 집어 던졌다.

 

십자가 위에서 마친 삶

그러나 성녀께서는 몸에 조금도 이상이 없이 있으면서 통치자를 조롱하였다. 그러자 통치자는 정말로 물이 뜨겁지 않으지 알아보려고 물통 옆으로 다가갔다. 이 때, 성녀께서 몇 방울의 물을 튕기자 통치자는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으며, 화상을 입은 그의 피부는 벗겨졌다. 그러자 통치자는 성녀를 송진과 유황으로 붙인 불꽃으로 태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녀께서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채로 있었다. 다시 통치자는 두 부부를 십자가에 묶어 서로 마주보도록 하고는 서서히 죽도록 놔두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꼬박 9일 동안 인내로써 서로를 지탱하던 두 부부(夫婦) 성인들께서는 열흘째 되던 날 마침내 자신들의 영혼을 하느님의 품에 돌려드리고 안식하셨다.

 

 

성 벨라기아 순교자(5월 4일)

 

개종한 이교도인

소아시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낄리기아의 타르소(Tarsus)에서 태어나신 성녀께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가 통치하던 시절에 사셨으며, 유명한 이교도 집안의 딸이었다. 그리스도인인 친구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을 때, 성녀께서는 그분을 믿기 시작했으며 동정(童貞)을 보존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열망하였다. 동시에 성녀께서는 타르소의 경건한 리누스(Linus) 주교를 찾아가 그분께 세례를 받으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그뒤 성녀께서 여행을 하던 중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리누스 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성녀께서는 즉시 주교를 알아보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다. 리누스 주교가 기도하자 땅에서 곧 샘이 터져 물이 흘러내렸다. 세례를 베푸는 동안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타나 밝은 망토(mantle)로 성녀를 감쌌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살다

이후 성녀께서는 자신의 값비싼 옷을 단순하고 소박한 옷으로 바꿔 입고, 재산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하인들에게도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해주어 많은 수가 이교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다. 또한 성녀께서는 이교도인 어머니도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려고 애썼으나 완고한 어머니는 도리어 황제의 아들(황제가 입양한 양자[養子)로서 이전부터 성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성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자 원하였음.)에게 성녀가 그리스도인이며 그와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소식에 그 젊은이(황제의 아들)는 실망하여 자살하였다. 이 사건에 놀란 성녀의 어머니는 황제의 진노를 살까 겁이 난 나머지 자신의 딸을 꽁꽁 묶어 황제의 궁전으로 끌고 갔다.

 

성녀의 순교

성녀를 본 황제 또한 성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내가 된다면 세상의 온갖 것을 다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고 도리어 자신에게는 하늘의 임금이시며 신랑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청을 거절당한 황제는 분노하며 성녀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사형집행인들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채 성호를 긋고 나서 스스로 뜨거운 놋쇠 솥 안으로 들어간 성녀의 몸은 마치 향유처럼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향내가 온 도시를 가득 채웠다. 성녀의 성해(bones)만이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았고, 이교도들은 그것을 도시 바깥으로 옮겼다. 그러자 네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 성해를 둘러싸고는 새나 들짐승들이 가까이 못하도록 지켰다. 이윽고 리누스 주교가 온 뒤에야 사자들은 사라졌다. 주교는 성녀의 성해를 예를 갖추어 땅에 묻었다. 나중에 그 자리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성 이리니 대순교자(5월 5일)

 

사도시대의 이교도 페넬로페

성인은 사도시대(1세기-2세기?)에 페르시아의 마게돈(Magedon) 총독이던 이교도 리끼니오스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래의 이름은 페넬로페였다. 리끼니오스는 자신의 딸을 위해 화려한 궁을 지어주었고, 거기서 성인은 여교사 까리아와 자신의 친구들 그리고 하인들에 둘러 싸여 지냈다. 또한 날마다 아뻴리아노스라는 이름의 가정교사가 와서 성인에게 세상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데 아뻴리아노스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래서 그는 수업 도중에 성인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아울러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여러 미덕(美德, virtue)들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성인이 사춘기에 접어들자 부모는 결혼을 하게 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주님께서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성인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다. 하루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세 마리 새가 성인의 방 창을 통해 들어왔다. 처음에는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서 왔고, 다음에는 독수리가 꽃화환을, 그리고 세 번째로는 갈가마귀가 뱀을 물고 들어왔다. 이 일에 대해서 아뻴리아노스는 다음과 같이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곧, 비둘기는 처녀의 덕인 겸손과 온유함과 정결을 상징하며, 올리브 가지는 세례를 통해 받는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한다. 승리의 화환을 지닌 독수리는 앞날의 투쟁에서 얻을 승리를 가리키고, 갈가마귀와 뱀은 악마가 성인을 대항해서 일어설 것이며 이로써 성인에게 슬픔과 비탄 그리고 박해가 임할 것임을 예시(豫示)한다는 것이다.

 

성인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된 부모들

이 일이 있은 뒤 성인께서는 결혼을 포기하고, 사제 디모테오(성 사도 바울로의 제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리니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성인의 어머니는 딸의 개종을 기뻐하였으나 아버지는 성인이 이교신들에게 예배하도록 요구하였고, 성인이 거부하자 성인을 꽁꽁 묶어서는 막 날뛰는 말들의 말발굽 아래 던지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성인이 던져진 순간 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들은 성인을 전혀 다치게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 중 한 마리가 리끼니오스를 향해 달려들어서는 그의 오른 손을 물어 뜯었고, 이어 리끼니오스를 넘어 뜨린 다음 짓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성인을 풀어 주었고, 성인은 곧 기도를 함으로써 아버지가 말들에게 상처를 입지 않은채 일어남과 동시에 손도 본래대로 회복되도록 하였다. 이런 기적을 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성인의 아버지는 총독직을 사임하였고, 성인은 이때부터 아뻴리아노스의 집에 머무르면서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소식을 접한 도시의 새 총독 세데끼오스는 성인을 불러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그만둘 것과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바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고백하였다. 그러자 총독은 성인을 뱀들이 우글거리는 구덩이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였다. 구덩이 속에서 성인은 열흘을 보냈는데,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다. 주님의 천사가 성인을 보호했고, 음식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총독은 이 기적을 마법(魔法)의 장난이라 여기고는 성인을 잔인하게 고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피로 불게 물들인채 쇠톱으로 성인의 몸을 켜면서 총독은 성인을 조롱하였다. 그때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면서 눈을 멀게 하는 번개불빛이 비치더니 많은 고문자들을 쳐 넘어뜨렸다. 이어서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로부터 나타난 이런 표징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들은 죄없이 순결한 성녀의 고통을 보다못해 분노한 나머지 총독을 그 도시에서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성인의 몸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이후에도 성인은 여러 곳을 다니며 계속 그리스도를 전했고, 이로써 만명도 넘는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에페소에서 주님께서는 성인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알려주셨다. 그러자 성인은 아뻴리아노스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도시 밖의 한 동굴로 갔다. 거기서 성인은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서 동굴 입구를 큰 돌로 막아달라고 말했다. 나흘 뒤 그들이 다시 동굴을 찾아갔을 때 성녀의 몸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성 아카기오스 순교자(5월 7일)

 

그리스도인 부대장

소아시아의 카빠도끼아 출신인 성인께서는 4세기초 막시미안 황제가 다르시던 시기(時期)에(305년경) 보병대대(300-5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짐.)의 백인(百人)부대장(centurion)이었다. 그런데 성인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자 상급부대인 군단의 사령관 풀라비우스(Flavius Firmus)가 성인을 소환(召喚)하였다. 성인께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려움없이 고백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고문을 당하셨다.

 

고문과 재판

그런 다음 사령관은 성인을 스라키(Thrace)의 페린투스(Perinthus) 지역을 통치하는 지도자 비비안(Bibian)에게로 보냈으며, 성인께서는 그 통치자 앞에서도 당신이 지닌 신앙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변증(辨證)을 행하셨다. 이처럼 고문과 매질이 성인을 낙담(落膽)시키기는 커녕 도리어 성인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자 비비안은 성인의 턱을 부러뜨린 다음, 성인을 쇠줄에 묶어 비잔티움(Byzantium: 후에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이리로 옮긴 뒤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으로 압송(押送)하였다.

 

천사의 소리와 순교

호송되는 동안에 성인께서는 많은 동료 죄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으며, 천사들이 나타나 성인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였다. 비잔티움에 도착하자 재판관들은 성인의 외양(外樣)이 너무도 건강하고 온전함에 놀라 누가 성인을 호송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도중에 경험한 신비로운 일들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를 믿을 수 없는 재판관들은 성인에게 다시금 고문을 행하도록 명령하였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사들의 음성에 용기를 더욱 얻은 성인께서는 이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셨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 바깥의 한 지역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신 뒤, 스타우리온(Staurion)이라는 곳에 묻히셨다. 성인께서 안장되신 곳에는 나중에 작은 성당이 세워졌다

 

 

성 사도 요한 신학자, 복음서 저자(5월 8일)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다

성 사도 요한은 제베대오와 살로매(성모님의 약혼자인 의인 요셉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게네사렛 호수(곧,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형인 야고보와 함께 곧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부르심을 받아들인 뒤로 성 요한은 누구보다도 주님과 가까이 지냈으며, 주님께서 다볼산(Mt. Tabor)에서 변모하셨을 때 그 자리에 있기도 했다. 주님께서 붙잡혀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審問)을 받으셨을 때와 골고타 곧 해골산으로 가실 때에도 그는 슬퍼하며 따랐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성모님을 부탁하신 뒤 성 요한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셔 안식하실 때까지 돌보았다.(요한 19: 26-27 참조)

성모님이 안식하신 뒤 성 사도 요한은 제자 쁘로호로스와 함께 소아시아의 에페소와 여러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를 탔다. 그런데 배가 폭풍우를 만나 심하게 출렁거렸고, 성 요한만 빼고 끝내 모두들 뭍에 던져졌다. 성 요한은 깊은 바다 속에 남겨졌으며 결국 쁘로호로스는 영적 아버지를 뒤로 한 채 비통한 마음으로 혼자 에페소에 다다랐다. 십사일째 되던 날 쁘로호로스가 바닷가에 서있는데, 파도가 한 사람을 해변으로 밀쳐내는 것이 보였다. 달려가 보니 바로 성 사도 요한이었다. 하느님께서 성 사도를 십사일 동안이나 바다속에서 지켜주셨던 것이었다. 그뒤 선생과 제자는 함께 에페소로 가서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날마다 늘어났다.

 

기적과 계시를 전한 성 사도

이 때는 바로 네로(Nero 56-68년 재위)황제가 다스리던 시기여서 성 요한은 로마로 붙잡혀와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성 사도께서 한 컵의 독약을 마셨지만 아무렇지도 않은채 죽지 않았다. 나중에 끓는 기름솥에 던져졌지만 역시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자 로마당국은 성인을 파트모스(Patmos)섬으로 유배보냈다. 성인은 그곳에서도 그리스도를 전했으며, 그가 행한 기적들로 말미암아 많은 주민들이 복음을 믿게 되었다. 성인은 또한 이교 신전에서 악마들을 몰아냈고,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주었다.

하루는 성 사도께서 제자 쁘로호로스와 함께 황량한 고지(高地)로 올라가 사흘동안 금식하셨다. 성인께서 기도하시자 땅에 지진이 나고 천둥이 쳤다. 쁘로호로스는 두려워 땅에 엎드렸다. 성인께서는 제자를 일으켜 세우면서 당신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묵시록 1:8) 하느님의 영이 성 사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67년 무렵에 성 요한 사도의 묵시록(계시의 책)이 쓰여졌다.

 

사랑만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끈다

오랜 유배생활 끝에 성 사도께서는 다시 자유를 얻어 에페소로 되돌아왔다. 에페소에서 성인은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면서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 그들을 지켜주었다. 95년경 성 사도께서는 자신의 복음서를 썼다. 성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더러 주님을 사랑하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성 요한 사도를 교회는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는데 이는 성인께서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는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성 요한은 백살이 넘도록 사셨고 이로써 지상에서 이루어진 주님의 삶을 증언하는 증거자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당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안 성인께서는 제자들의 가족과 함께 에페소 도시의 경계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십자가 모양의 무덤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안으로 들어간 성인께서는 흙으로 그 위를 덮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선생님께 입을 맞춘 다음 명령대로 따랐다. 성 사도의 얼굴을 천으로 덮고는 무덤 안을 흙으로 채웠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다른 제자들이 매장지로 달려와 무덤을 열었으나 무덤 안은 텅 빈채로 남아 있었다.

 

 

성 이사야 예언자(5월 9일)

 

성인의 출생과 예언활동

예언자 이사야 성인은 그리스도께서 나시기 700년전에 살았으며, 왕족의 혈통에서 태어났다. 이사야 성인의 아버지 아모스는 아들을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율법 속에서 길렀다. 성년이 되자 이사야 성인은 경건한 여자 예언자와 결혼하였으며, 그로부터 아들 야숩(Jashub)을 낳았다.

성인은 예언자로 하느님께 부름받은 뒤 60여년 동안 여러 왕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거치면서 예언하였다. 성인은 예언서를 남겼는데, 이 책에서 성인은 하느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불충(不忠)함을 책망하고 있다. 그러나 성인이 남긴 여러 예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메시아 곧,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일에 대한 것이다. 성인은 메시아를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평화와 사랑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고 하고 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기적활동

성인은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며, 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분이 고난을 겪게 될 것임을 분명히 묘사하고 있다. 또한 성인은 메시아께서 부활하실 것과 그분의 교회가 온 세상에 가득히 퍼져나갈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이같은 분명한 예언으로 말미암아 성인은 ‘구약의 복음사가’라는 호칭을 듣게 된다.

성인은 또한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있었다. 예루살렘이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갇힌 이들이 목이 말라 고생하였는데 성인은 기도로써 시온산 아래로부터 샘물이 솟아나도록 하였다. 이 샘이 실로암(Siloam)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졌다’는 뜻이다. 그 뒤 예수님께서 날때부터 눈 먼 이더러 가서 씻으라고 한 곳이 바로 이 샘이었으며, 그는 그대로 하여 나았다. 한편 성인의 기도로 말미암아 히즈키야왕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15년 더 연장받기도 했다.

 

순교자로서 맞은 성인의 최후

예언자 이사야 성인은 순교자로서 최후를 마쳤다. 유대의 왕 므나쎄 시대에 성인은 왕명에 의해 목재용 톱에 썰려 순교하였다. 성인은 실로암 연못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묻혔다. 그 뒤 성인의 성해(聖骸)는 젊은 테오도시오스(Theodosius the Younger)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블라헤르네(Blachernae)의 성 로렌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오늘날 성인의 성해중 두개골의 일부가 아토스산의 힐란다르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다.

 

 

성 끼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선교사(5월 11일)

 

데살로니끼의 두 형제

성인들은 형제로서 그리스 데살로니끼의 경건하고 이름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 메토디오스는 7형제중 맏이었고, 성 콘스탄티노스(끼릴로스는 그가 수도서원을 하면서 받은 이름임.)는 막내였다. 성 메토디오스는 군인과 지방총독(비잔틴 제국에 속한 슬라브계 공국[公國] 가운데 하나의) 등을 거친 뒤 나중에 소아시아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성 콘스탄티노스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후에 총대주교가 된 성 포티오스(2월 6일)를 포함한 스승들 밑에서 미하일 황제와 함께 수업하였다. 너무도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탓에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했던 성 콘스탄티노스는 학업을 마침과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어 철학교사로 임명되었으며 성화파괴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그뒤 성인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라센인들(Saracens)에게 가서 성삼위에 대해 가르치기도 했다.

 

슬라브 알파벹의 고안과 선교

황제의 부름을 받아 카자르(Khazars)에 가서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두 형제는 그곳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른 도시에서 슬라브말을 처음 듣게 된다. 그뒤 다시 독일 주교들의 압박을 받던 모라비아인들의 요청을 들은 황제는 두 형제를 불러 선교의 사명을 맡기게 된다. 이때 성 콘스탄티노스는 슬라브 알파벹을 고안해 내어 성찬예배를 위한 여러 책들(곧, 복음경과 사도경, 시편 등)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863년) 이렇게 번역된 책을 가지고 두 형제는 모라비아로 가서 슬라브어로 예배를 가르쳤다. 그런데 이런 두 형제를 시기한 독일 주교들이 예배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로만 드려야 한다고 하자 성 콘스탄티노스는 시편과 복음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든 언어로 예배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결국 이 문제로 로마에 소환된 두 형제는 교황으로부터 슬라브어로 예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성 끼릴로스의 죽음과 선교의 지속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마에서 성 콘스탄티노스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알게된 성인은 끼릴로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서원을 하고 수도자가 되었다. 869년 2월 14일 수도사가 된지 50일이 되는 날 성인은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안식하셨다.

성 끼릴로스가 안식한 뒤 교황은 성 메토디오스를 모라비아의 대주교로 임명하여 선교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시 독일 주교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때문에 붙잡혀서 사슬에 묶인채 스와비아(Swabia)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성인은 이년 반동안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교황의 명령으로 다시 풀려난 성인은 계속해서 슬라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남은 생애동안 구약성경 전체(마카베오서만 제외)와 여러 교부문헌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885년 4월 6일 성인은 육십세의 나이로 안식하셨고, 성인의 장례식은 슬라브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 등 세 개의 언어로 진행되었다.

 

 

성 에피파니오스 키프로스의 주교(5월 12일)

 

유대인 소년

성인께서는 310년경 팔레스틴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유대인인 부모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청소년기에 훌륭한 교육을 받은 성인께서는 여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성인께서는 수도사가 되어 대 일라리온 성인(10월 21일)의 제자가 되었고, 그리스어로 된 책의 사본(寫本)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다. 성인의 금욕적인 투쟁과 아름다운 미덕은 성인으로 하여금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지니게 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사람들의 칭송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 사막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곳에 강도들이 들이닥쳐 성인을 붙잡아서는 석 달 동안이나 가두어 두었다. 이때 성인께서 회개에 대해 말하자 강도중의 한 명이 뉘우치며 돌이켰고, 그는 나중에 성인과 함께 풀려나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인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주교가 되시다

성인의 의로운 삶에 관한 소문이 수도원의 경계를 넘어 멀리 퍼져나가자 성인께서는 두 번째로 제자 요한과 함께 사막으로 가셨다. 그러나 사막에서조차 많은 제자들이 성인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성인께서는 이들을 위한 새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후 성인께서 예루살렘을 찾아 주님의 행적과 관련된 성지(聖地)들을 순례하고 나서 돌아오자 대 일라리온 성인께서는 성인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Salamis)로 보내셨다. 거기에는 마침 여러 주교들이 모여 그즈음에 돌아가신 분을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할 예정이었는데,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에피파니오스 성인이 반드시 주교로 뽑혀야만 한다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성인께서 도착하시자 곧 성당으로 안내되었고, 성인은 그들의 주교가 되는 것에 동의하셔서 367년 살라미스의 주교가 되셨다.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라’

성인께서는 신앙을 향한 열정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자선, 그리고 그의 단순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널리 알려지셨다. 또한 성인의 정결한 삶은 성인으로 하여금 성찬예배 때 봉헌물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은총을 받게 하였다. 생의 마지막 무렵 성인께서는 위대한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을 단죄하기 위해 소집된 공의회에 참석토록 소환되어 콘스탄티노플로 가셨다. 그러나 적들의 흉계를 알아차린 성인께서는 그곳을 떠나 돌아오던 배위에서 당신의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아시고는 제자들을 불러, ‘하느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부정한 생각이 마음에 스미지 못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베풀고 이틀 뒤에 안식하셨다. 403년 5월 12일 살라미스의 교인들은 성인께서 몸소 세우신 새 성당 안에 성인을 장례지냈다.

 

 

성 이시도로스 순교자(5월 14일)

 

로마군의 장교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성인께서는 데시우스(Decius) 황제가 다스리던 때(250년경) 로마 군대의 부관(副官)이었다. 누메리오스(Numerios)라는 사람이 지휘하는 함대의 일원으로 히오스(Chios) 섬을 방문한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백인대장(百人隊長) 율리우스로부터 고발당하였다. 함대의 제독(提督) 앞에 끌려나간 성인께서는 자신이 한 분이시고 참된 하느님이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고백하셨다. 누메리오스는 성인을 바닥에 눕혀 네 개의 기둥에 붙들어 맨 다음, 사람들을 시켜서 채찍으로 때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성인을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 속에 집어던졌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나오셨다.

 

아버지에게 받은 고문

성인의 아버지는 완고한 이교도였는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에집트에서 섬으로 와 성인을 굴복시키는 일을 자신이 맡겠노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성인의 마음을 돌리려 해도 소용없게 되자 그는 간악한 미움의 감정에 휩싸인 채, 아들을 야생에서 길들인 말들의 뒤에 묶고는 땅에 질질 끌며 먼 거리를 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성인의 목을 잘랐다. 이후 성인의 시신은 독수리의 밥이 되도록 산의 한 협곡(峽谷)에 버려졌다. 그러나 미로삐아(Myropea, 12월 2일)라는 이름의 한 경건한 여인이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들어가 성인의 시신을 수습한 다음,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성녀 미로삐아

나중에 미로삐아도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 그녀는 성인의 영상(影像 vision)을 보았으며, 성인께서는 환하게 비추이는 빛과 삼성송(Trisagion)을 부르는 천사의 무리에 둘러싸여 계셨다. 성인께서는 미로삐아에게 평화를 빌고, 그녀도 곧 승리(순교)의 왕관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고나서 미로삐아는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의 손에 돌려드렸다. 그러자 토굴감옥 안은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찼다. 미로삐아 성녀 또한 이시도로스 성인의 곁에 뭍혔으며, 이시도로스 성인은 곧 히오스 섬의 수호성인으로서 그리고 선원들의 보호자로서 지중해의 전지역에서 공경을 받았다.

 

 

성 테오도로스 수사(5월 16일)

 

열두 살 아이의 결심

성인께서는 4세기초 상부(上部) 에집트(Upper Egypt)의 한 귀족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경건한 생활을 해온 성인께서는 열두 살 무렵부터 날마다 금식을 지키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두 해 뒤 성인께서는 수도원으로 들어가셔서 나이가 많은 수도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셨다. 그때 성인께서는 빠꼬미오스 성인의 명성을 듣고 그분이 계신 수도원으로 가셨다. 그때부터 빠꼬미오스 성인을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현형(現形)으로 여겨 모든 면에서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거룩한 덕을 쌓는 일에 놀랄만한 진전을 보이게 되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많은 동료 수도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빠꼬미오스 성인을 본받아

성인께서 나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336년경), 빠꼬미오스 성인은 테오도로스 수도자로 하여금 새로운 예비수도자를 받아들이는 일과 수도원과 관련하여 자신을 돕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빠꼬미오스 성인의 충실한 제자로서 성인은 수도원의 형제수도자들이 덕을 기르도록 교육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다. 날마다 일을 마치고나면 빠꼬미오스 성인의 가르침을 들으러 그의 거처로 갔으며, 그리고나서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 가르침을 수도자들에게 다시 전달하였다. 346년에 빠꼬미오스 성인께서 안식하신 뒤, 테오도로스 성인은 대 안토니오스 성인과 대 아타나시오스 성인을 방문하였다. 이후 테오도로스 성인은 열심을 다하여 수도공동체를 돌보았고, 이로써 빠꼬미오스 성인 이후의 수도공동체 질서를 회복함과 동시에 수도자들의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을 새로이 불러일으켰다.

 

한 인격으로서 존재함

363년에 대 아타나시오스 성인께서 테오도로스 성인이 돌보던 수도원을 찾아와 그 질서정연한 모습과 규칙을 잘 지키는 생활에 감탄하셨다. 368년의 부활절 이후에 테오도로스 성인께서는 병이 들었다. 그리고 4월 27일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모든 수도자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우리들은 고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안식하신 분은 (비록 사람은 다르지만 그 인격에서 동일한)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빠꼬미오스 성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성인의 안식 소식을 들은 대 아타나시오스 성인께서는 수도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테오도로스 성인이 그들 가운데서 사라진 것이 아니며, 그 후계자인 오르시에시오스(Orsiesius) 수도원장과 한 인격으로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위로하였다.

 

 

성 베드로, 디오니시아, 안드레아, 바울로 순교자들(5월 18일)

 

데시우스의 박해

3세기 중반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때 람프사쿠스(헬레스폰트: 마르마라해와 에게해를 서로 이어주는 터키 북서쪽의 해협. 다르다넬스 Dardanelles 라고도 함.) 출신으로서 너그러운 마음과 열렬한 믿음을 소유한 한 젊은이가 체포되어 아비도스(Abidos)의 행정장관 앞으로 끌려왔다. 행정장관이 젊은이에게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자, 베드로라는 이름의 이 젊은이는 자신은 결코 수치스러운 창녀를 숭배하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찬양과 예배는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느님에게만 드려야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대답을 듣자 통치자는 곧 젊은이를 커다란 바퀴 모양의 고문기구에 쇠사슬로 묶고는, 바퀴 주위에 나무 토막들을 늘어놓아 그것이 움직일 때 성인의 두 팔과 다리 그리고 다른 뼈들을 부러뜨리도록 하였다.

 

트로아의 그리스도인

고문이 점점 더 심해질수록 성인의 용기 또한 더욱 더 열렬해졌으며, 도리어 박해자들을 향해 연민의 마음을 품은 채 성인께서는 자신에게 그토록 큰 인내의 힘을 주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순교자(성인)의 위대한 인내심에 의해 도리어 압도당한 통치자는 마침내 성인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뒤, 통치자는 많은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트로아(Troas: 고대의 트로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소아시아의 북서쪽 미시아[Mysia] 지역.)로 여행을 하였고, 그곳에서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붙잡아 재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세 명 중 한 명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그리스도를 부정하고는 악마의 미끼가 된 채로 죽고 말았다.

 

세 명의 젊은 순교자들

그리고 이 순간 군중 속에 있던 열여섯 살의 디오니시아가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자, 곧바로 붙잡혀서 통치자 앞으로 끌려나오게 되었고 성녀는 자신의 신앙을 당당히 고백하였다. 수호천사의 보호로 야비한 젊은이들이 범접(犯接)치 못하도록 지켜진 디오니시아는 도리어 자신을 범하려던 젊은이들을 굴복시켰다. 아침이 되자 앞서서 잡혀온 두 젊은이(안드레아와 바울로)가 함께 통치자 앞에 섰다. 이교 사제들의 선동으로 발악하듯이 소리를 지르는 군중들의 위협 앞에서도 우상들에게 제물 바치기를 거부한 안드레아와 바울로 성인은 심하게 매질을 당한 뒤, 마침내 흉포한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뛰쳐나와 이들의 처형대 앞에 몸을 던진 디오니시아 성녀 또한 다른 장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성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엘레니 모후 사도대등자(5월 21일)

 

비천한 집안 출신의 그리스도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274년 골(Gaul: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스위스, 독일을 포함한 옛 로마의 속령[屬領])과 영국을 다스렸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305-306) 황제(Caesar, 시이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 엘레니 성녀는 비천한 가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다. 당시 광대한 로마 제국은 동과 서로 반반씩 나뉘어져 각기 독립적인 황제와 공동의 통치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의 통치자였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294년 엘레니 성녀와 이혼하고 귀족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였다. 이때는 동과 서를 가릴 것 없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행해지던 시절이었으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아들이 전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다

306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성인은 곧바로 자신이 관할하는 영토 안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해 자유를 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달가와 하지 않는 동과 서의 이교도 황제들은 음모를 꾸며 성인을 죽이려 하였다. 그런데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인께서는 계속되는 일련의 전투에서 반대자들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서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뒤 성인께서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내려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이같은 결정에는 어머니 엘레니 모후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323년 로마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황제가 되자 성인께서는 밀라노 칙령의 효력을 동로마 지역까지 확대하였다. 이로써 300년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박해는 끝이 나게 되었다.

 

황제의 덕과 어머니의 신앙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성인의 높은 덕과 관용의 마음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있다. 한 번은 그의 반대자들이 황제의 모습을 새긴 석상에 돌을 던지며 비난하였고,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얼굴 부분이 파손되었다. 이것을 본 신하들은 그들에게 중벌을 내리라고 건의하였다. 당시의 국법 또한 황제 모독죄를 가장 엄한 벌로써 다스리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때 성인께서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고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얼굴에 상처가 난 것도 아니고 머리도 다치지 않았는데, 왜 그들에게 벌을 내려야 하지?’

엘레니 성녀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예루살렘에 가 주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찾아내었다.(326년) 그리고 성녀께서는 주님과 성모님이 관련된 성지(聖地)의 모든 곳에서 이교의 흔적을 씻어내고 바로 그 자리에 성당들을 세웠다. 이 모든 일을 마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성녀께서는 327년에 안식하셨다.

 

 

성 미하엘 주교(5월 23일)

 

시나다의 주교

8세기초 소아시아 중부의 프리지아(Phrygia) 지역에 있는 시나다(Synnada)에서 태어나신 성인께서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테오필락토스 성인(3월 8일)과 영적인 교분(交分)을 나누셨다. 수도자로 서원을 하고 함께 경쟁하듯이 열심히 덕의 수련을 쌓던 두 성인에 관해 전해들은 타라시오스 총대주교(2월 25일)께서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테오필락토스 성인은 니꼬미디아의 주교로, 그리고 미하일 성인은 고향인 시나다의 주교로 각각 임명하였다.(784년경) 그 가르침과 생활에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신 성인께서는 성당과 수도원들을 짓고, 더불어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수용시설과 여러 가지 자선시설들을 마련하셨다.

 

성화에 대한 논쟁

성인께서는 787년 니케아에서 둘째로 열린 제 7차 세계공의회에 참석하셔서 거룩한 성화(icons)에 대한 공경이 올바른 교리(敎理)임을 옹호하셨다. 그리고 811년 총대주교의 대표자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하셔서는 성화를 공경하는 것에 대해 교황 또한 지지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아르메니아인 황제 레오 5세(813-820)가 권좌에 오른 지 2년이 지나서 거룩한 성화에 대해 박해를 다시 시작하자. 성인께서는 곧바로 올바른 신앙을 지키려는 성직자, 수도자, 신도 등과 연합하여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성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을 체포하여 서로 다른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고, 그들 사이의 편지교환조차 금지시켰다.

 

곡물을 보호하는 성인

성인께서는 프리지아의 궁벽(窮僻)한 유배지에서 10년 이상을 보내시며 온갖 곤욕을 겪으시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폭군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또한 금욕적인 생활과 철야기도를 계속하시는 한편, 불행한 이들을 돕고 기도로 병자를 고치면서 제국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곳의 거칠고 난폭한 거주민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끄셨다. 성인께서는 기도 중에서도 특히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끼리에 엘레이손) 라는 짧고 단순한 기도의 힘으로 쥐와 메뚜기떼 등을 몰아내는 기적을 베풀기도 하셨다. 마침내 90세가 넘어 귀양살이에 지친 노구(老軀)를 이끌고 다시 교구로 되돌아 온 성인께서는 오랜 영적 친구인 테오도로스 성인(11월 11일)과 만난 지 사흘만인 826년 오순절 셋째날(수요일)에 40년 동안의 주교직을 마치고 안식하셨다. 10세기 비잔틴 황제들에 의해 아토스 산의 대(大) 라브라(Great Lavra) 수도원으로 보내진 성인의 두개골 성해는 지금껏 그곳에서 많은 이들의 공경을 받고 있으며, 약탈하는 동물들로부터 수도원의 농작물을 보호하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성 시메온 수사(5월 24일)

 

안티오키아의 소년

성인께서는 521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셨다. 그의 부모는 에데사(Edessa) 출신의 향료상(香料商)이었는 데, 특별히 어머니 마르타 성녀(7월 4일)는 아들의 출생에 대한 소식을 선구자 요한 성인에게서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요한 성인께서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과 그가 자신을 본받아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출산의 고통없이 태어나 두 살에 세례를 받고나자 아기는 곧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다섯 살 무렵 갑자기 일어난 지진(526년 5월 25일)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는 목숨을 잃고 말았고, 성인은 간신히 어머니와 함께 생명을 구하였다. 그후 얼마가 지난 뒤 성인께서는 환상 중에 그리스도를 뵈었으며, 이윽고 흰 옷을 입고 나타난 한 사람의 인도를 따라 안티오키아를 떠나 셀류시아(Seleucia)쪽으로 가 한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성인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기둥위의 고행자

이 수도원의 수도자들을 지도하던 요한이라는 이름의 수도자는 기둥 위에서 고행생활을 하는 분(stylite)이었다. 어린 시메온 성인의 지혜와 열정에 감탄한 그는 즉시 성인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고, 성인께서는 질투심으로 말미암아 오른 손이 마르는 병을 앓던 한 양치기를 고쳐줌으로써 첫 기적을 베풀었다. 일 년을 기다린 뒤, 일곱 살이 된 성인께서는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요한)를 본받아 그 곁에 작은 기둥을 하나 세우고 고행자로서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인께서는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고, 영적인 아버지보다도 더한 열의로써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예언과 기적들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성인의 명성이 두루 퍼져 나가자 축복을 받으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적인 아버지의 죽음이후에는 공동체를 책임져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돌보셨다. 페르샤인들의 침략(540년 6월)과 역병(疫病 plague)의 재난(542년) 그리고 지진의 강습(强襲)(551년) 속에서 성인은 수도원과 주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기를 쉬지 않으셨다. 이후 최고 15미터에 달했던 성인의 기둥 주위로 거대한 수도원이 건축되었으며, 수천 명의 병자와 순례객들이 성인에게 치유와 축복을 빌며 찾아왔다. 줄곳 서품받기를 거절하던 성인께서는 마침내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제서품을 받으셨고, 오래도록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중대사들을 예언하며 나라와 교회의 안녕을 위해 애쓰시다가 592년 5월 24일 71세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요한 러시아인 수사증거자(5월 27일)

 

전쟁의 포로가 되다

성인은 1690년경 러시아에서 태어나 경건한 생활을 하며 신앙속에서 자라났다. 나이가 차서 군대에 들어가게 된 성인은 피터대제(Peter I, 1682-1725 재위)의 군대에서 군인으로 복무하였고, 러시아와 터키 간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런데 1711년에 벌어진 한 전투에서 성인은 다른 병사들과 함께 타타르족(Tatars, 튀르크어를 쓰며 볼가 강 중류와 그 지류인 카마 강을 따라 동으로 우랄산맥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종족. 옛 소련의 타타르공화국, 북코카사스, 크리미아 반도, 시베리아의 일부 지역등에 살았음.)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타타르족은 성인을 터키 기병대의 한 지휘관에게 넘겼고, 그 지휘관은 성인을 소아시아의 쁘로꼬삐온이라는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터키인들은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위협하거나 달콤한 말로 꾀어서 모슬렘으로 개종시키려 하였으며, 실제로 몇 사람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인은 굴욕(屈辱)과 매를 견디면서 동시에 겸손함과 온유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주인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는 성인을 그대로 놔두었다. 이때부터 성인은 마굿간에 살면서 주인의 가축들을 보살폈다.

 

주인에게 복을 안겨준 노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성인은 터키인 주인이 지시한 것들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채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충실하게 일하는 성인을 다른 동료 노예들은 비웃어댔다. 그래도 성인은 화를 내는 법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들을 도울수 있을 때는 돕고, 또 때로는 그들의 불운(不運)을 위로해주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인의 친절함과 부드러운 성품은 주인과 다른 노예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주인은 성인에게 헛간에 딸린 작은 방을 하나 쓰도록 내주었으나 성인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그대로 마굿간에 있겠노라고 하였다. 마굿간은 바로 성인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성인은 단지 자신의 삶을 통해 주인에게 축복을 안겨주었다. 주인은 점점 부유해졌고, 그 지역에서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주인은 자신의 번영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임을 잘 알았으며, 그 사실을 머뭇거림없이 남들에게 말하곤 했다.

 

이교도들도 경의를 표하다

때때로 성인은 밤에 마굿간을 떠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에 갔으며, 입구의 나르텍스(narthex, 제단이 있는 지성소 그리고 신자들이 있는 성소와 함께 정교회 성당을 이루는 또 다른 공간. 성당의 맨 바깥쪽[출입구]에 위치함)에서 밤새 기도하곤 하였다. 그리고 토요일과 축일에는 성체성혈 성사에 참여하였다. 성인은 이전처럼 자신의 주인을 충심으로 섬겼고, 언제나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도우면서 자신의 빈약한 음식들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힘겨운 자신의 삶이 끝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성인은 사제에게 영성체를 요구하였다. 1730년 5월 27일 사제가 사과 속에 숨겨온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 다음 성인은 안식하셨다. 주인의 호의로 그리스도교식으로 치른 장례식에는 그 지역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참석하였다. 삼년 반쯤 지났을 무렵 한 사제가 꿈에 성인에 대한 계시를 본 뒤 성인의 성해는 곧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으로 모셔졌다.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났고, 정교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들도 성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 테오도시아 수녀순교자(5월 29일)

 

수녀원에서 자란 소녀

성녀께서는 8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셨다. 성녀의 부모님은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성녀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성녀께서는 콘스탄티노플의 한 수녀원에서 자라나셨다. 성녀께서는 부모님이 남기신 유산의 거의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일부로 주님과 성모님의 성화를 금과 은으로 만들도록 주문한 다음 수도자가 되셨다.

 

성화파괴의 시대

한편 레오 황제(Leo the Isaurian, 717-741)는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직에 오른 뒤, 모든 장소에서 성화를 없애버리라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한 대문(Bronze Gates) 위에는 동(銅)으로 만든 주님의 성화가 400년 이상 걸려 있었다. 730년 성화를 파괴하는 데 동참한 총대주교 아나스타시오스는 바로 이 (대문 위에 걸려 있는) 성화를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거룩한 성화를 위한 순교

이 때 성녀와 다른 몇몇 여성들이 달려들어 성화를 보호하고, 이어서 총대주교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군인들이 문에 걸쳐놓은 사다리를 밀쳐냈다. 그리고 불경건한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레오 황제는 그 여성들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다. 열렬히 성화를 보호하던 성녀께서는 군인들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갇히었다. 일주일 동안 성녀께서는 매일 일백대씩이나 매질을 당하셨다. 8일째 되는 날 군인들은 성녀를 도시 외곽으로 데리고 가면서 잔인하게 채찍질을 하였다. 그리고 한 군인이 수양의 뿔로 성녀를 찔러 결국 성녀는 순교하였다.

성녀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성 에피미아 수도원에 엄숙히 안장되었다. 이후 성녀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병자들의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성 이사아기오스 수사(5월 30일)

 

황제 앞의 탄원

성인께서는 시리아인 은둔자로서 발렌스(Valens, 364-379) 황제가 정교인들을 박해하던 때에 사막에서 사셨다. 378년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면서 다뉴브 강둑까지 몰려드는 고트족(Goths)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황제가 전쟁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성인께서는 황제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닫혀진 성당(교회)들의 문을 다시 열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를 쟁취하라고 간언(諫言)하였다. 그러나 노한 황제는 도리어 성인을 가시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에 던져 버리도록 명령하였다가 성인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자신의 앞에서 다시금 청원하며, 만일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전쟁에서 패해 도망치다가 건초더미 속에서 불에 타 죽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자 그제서야 할 수 없이 두 명의 원로원 의원에게 맡겨 보호하도록 한 다음 전장(戰場)으로 나갔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회복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패한 황제는 건초가리(haystack)에 숨었다가 적에게 들켜 그들이 놓은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성인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었다. 그뒤 즉위한 테오도시오스 황제는 이들 일련의 사건들과 성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성인을 석방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40년 동안 금기시되던 성당을 정교인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성인께서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 된 두 원로원 의원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를 다시 회복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셨다. 도시 바깥의 한 곳에 거처했던 성인께서는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참된 신앙과 영적인 삶에 대해 대화하셨으며, 황제 자신도 종종 성인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곤 하였다.

 

가르침과 자선

성인을 따르는 제자들이 늘어나게 되어 (콘스탄티노스 대제가 세운 수도원을 뺀) 진정한 의미의 첫 수도원이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졌다.(382년) 그리고 성인의 영향으로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생겨났다. 성인께서는 이들 공동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영적인 열정을 잃지 말도록 독려하셨으며, 비록 공식적인 직위는 갖고 있지 않았으나 제국의 수도에 있는 모든 수도사들의 아버지로서 존경을 받으셨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보면 부자에게 부탁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옷가지를 공급해주도록 요청하곤 하셨다.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에 대한 잘못된 고발에 본의 아니게 관련되기도 했던 성인께서는 그후 수도원에서 지내시다가 406년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에르미아스 순교자(5월 31일)

 

로마군대의 노병(老兵)

성인께서는 2세기초에 생존하셨던 노병(老兵)으로서, 소아시아 동북부의 폰토스(Pontus: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66년까지 존재했던 소아시아 북동쪽의 고대왕국. BC 66년 이후로 로마의 영토가 됨.) 지역에 있는 꼬마나(Comana)에 주둔한 로마 군대에서 오래도록 복무하셨다.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138-161) 황제의 통치기에 군복무를 마치신 성인께서는 그 어떤 퇴직금도 마다하시고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신앙을 고백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성인께서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그 지역의 통치자인 세바스티안(Sebastian)에게 고발당하셨다. 이윽고 통치자는 성인을 소환(召喚)하여 우상들에게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리스도의 군인으로 승리하시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같은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러자 통치자는 성인에게 고문(拷問)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성인을 턱을 부러뜨리고는 살갗을 도려냈다. 그리고는 성인을 불붙는 가마솥에 집어 던져 넣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그곳에서 살아 나오셨다. 그러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큰 충격으로 넋을 잃은 듯이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안되겠다 싶은 통치자는 다시 한 주술사(呪術師, magus: 고대의 메대인[Medes]과 페르시아인들 중 세습적으로 전해져온 사제계급에 속한 사람)에게 호소하였는데, 그 주술사는 성인을 해치기 위해 독약(毒藥)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 독약이 성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함을 보자 그 주술사는 곧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였고, 바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 뒤에도 에르미아스 성인은 계속 또 다른 고문을 당하였다. 성인께서는 펄펄 끓는 기름 속에 담겨졌으며, 이로써 성인의 두 눈알이 도려낸 듯이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나서 고문하는 이들은 머리를 땅으로 향한 채로 성인을 거꾸로 매달아 사흘 동안 두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군인인 성인께서는 이 모든 고문에서 승리하신 뒤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