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정교회 성인들의 생애(9월)

ttoza 2010. 2. 12. 21:36

성 시메온 수도자(9월 1일)

 

새로운 수도 방식

성인은 새로운 방식의 수도생활을 창시한 수도자로 유명한 분이다. 이 수도형태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기둥 모양의 바위나 인공적으로 쌓아 만든 기둥같은 것의 꼭대기에 서서 기도하거나 명상하면서 수도하는 수도생활을 말하며, 특별히 이러한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스틸리띠스(Stylites, 곧 기둥을 가리키는 ‘스틸로스’라는 말에서 생겨난 용어로서 우리말로는 ‘기둥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한다.

성인은 390년경 시리아와 낄리끼아(Cilicia) 국경 근처의 시사(Siss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목동으로서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수도생활에 뜻을 품고 수도원에 들어가 오랫동안 수도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수도원에서 혼자 나와 초막을 짓고 수도했다. 그때 그는 초막 둘레에 담을 쌓고 출입구를 막아 버리거나, 또는 기둥 같은 것을 쌓고 그 위에서 수도하기도 하였다.

 

기둥 위에서 베푼 가르침

이렇게 기이한 수도생활을 하는 그의 이름이 점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병자들은 병을 고쳐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그는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자 이것이 한편으로는 그의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제 그는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기도도 명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인은 자신이 머무는 기둥을 더 높이 쌓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약 20년간의 말년을 보냈을 때는 그 기둥의 높이가 대략 16-18m나 되었다고 한다.

성인은 여기서 밤낮으로 쨍쨍 내려 쪼이는 햇볕을 받거나 또는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아가며 허리굽혀 절하고, 때로는 쉬지않고 기도하였다. 그러면서 하루에 두 번씩 사람들에게 나타나서는 서로가 화합하고 사랑하라고 강조하면서 가르쳤다.

이렇게 높은 덕을 쌓은 성인은 많은 우상숭배자들과 아랍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이집트,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왕족까지도 포함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인을 찾아왔다. 그들은 와서 온화하고 인자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였다. 이처럼 평생을 거룩하게 살며 많은 덕을 쌓은 성인은 459년경 깊은 기도를 하는 중에 69세를 일기로 하여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다.

 

 

성 마마스 순교자(9월 2일)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

성인께서는 소아시아의 파플라고니아 지방에 있는 강그라(Gangra) 출신으로서, 부모님인 테오도투스와 루피나는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투옥된 부모님 덕에 성인께서는 260년 감옥 안에서 태어나셨다. 부모님이 모두 감옥에서 돌아가신 뒤, 이 작은 고아 아이는 한 경건한 여성 암미아나(또는 일부에서 말하는대로 마트로나)의 손에 양육되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마마스’란 불렸는데, 이는 아기가 늘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때문이었다. 양모(養母)인 암미아나는 죽기 전, 아이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우상숭배를 거절하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우상에게 바치는 희생제사를 거부하고 동료들 또한 그 일(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하지 말도록 부추겼다는 이유로 카파도끼아 지역의 중심도시인 케사리아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성인을 만난 아우렐리안 황제는 달콤한 거짓말로 곧 소년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인의 마음이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확고함을 알게 되자 황제는 분노하며 고문을 가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하는 황제를 향해 성인께서는 도리어 이렇게 대꾸하셨다. ‘나는 결코 나의 마음과 입술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당신에게 감사한다. 그것은 이런 고문이 나로 하여금 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나의 왕 그리스도를 더욱더 사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어린 순교자의 용기

그후 불을 붙인 횃불이 성인의 몸을 그을리기 시작했고, 갈비뼈는 돌에 맞아 으스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께서는 목에 무거운 추를 매단 채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곧 성인을 건져 올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꼭대기로 옮겨갔다. 성인은 그곳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야생의 짐승들이 제공하는 젖에 의지해 사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힘을 얻은 성인께서는 산을 내려가 카파도끼아의 새로운 통치자 앞에 서셨다. 그리고 온갖 고문을 당한 뒤 성인은 불이 뜨겁게 달궈진 쇠그릇 속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그 안에서 마치 구약의 세 소년들처럼(다니엘 3장 참조)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였다. 결국 긴 창에 몸이 찔린 성인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긴 채 순교하셨다.

 

 

성 고라즈드 주교순교자(9월 4일) *

 

위대한 선교사의 꿈

성인은 1879년 모라비아(Moravia)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본래의 이름은 매튜 파블릭(Matthew Pavlik)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였던 성인은 슬라브계 그리스도인들의 기원과 성 끼릴로스와 성 메토디우스 선교사들의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1919년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국가로서 체제를 갖추게 되자, 성인은 바티칸을 방문하여 체코 언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거절되었다. 체코의 80만에 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면서 성인은 다른 몇몇 신부들과 함께 세르비아 총대주교청에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0년 성인은 정교회로 개종하였고, 그 이듬해 모라비아와 실리시아(Silesia)의 정교인들을 위해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때 성 메토디오스 선교사의 제자였던 고라즈드(Gorazd) 성인의 이름을 새로이 받았다. 이후 성인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정교회를 회복시키키 위해 고단한 여정을 계속하였다. 성인은 비판과 그릇된 고소, 고발 그리고 온갖 종류의 시련들을 인내심을 갖고 견뎌냈다.

 

교회를 위해 희생되시다.

모라비아와 보헤미아(Bohemia)에 여러 성당을 세운 성인은 성찬예배서를 체코어로 번역하고, 기도서를 체코어로 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을 세르비아로 보내어 사제가 되도록 하였다.

2차 세계대전중 7명의 체코 레지스탕스들이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고, 이들은 프라하의 정교 대성당에 숨어들었다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때 두 명의 정교회 사제가 함께 체포되었으며 나찌(Nazi) 당국은 체코의 전체 정교회에 대한 보복을 계획하였다. 고라즈드 주교는 스스로 나찌에게 출석하여 두 명의 신부를 구출해내고, 위의 사건과 관련하여 모든 책임을 짊어지기로 하였다. 1942년 6월 25일 성인은 체포되었고 고문을 당한 뒤, 9월 4일 총살되었다. 성인께서 자진하여 희생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회는 앙갚음을 받아 그후 교회는 폐쇄되었고, 사제들은 독일의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다.

 

* 성인에 대한 공경은 1961년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이후 1987년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청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미카엘 대천사 기적기념일(9월 6일)

 

기적의 샘과 성당

미카엘 대천사는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인류에 대한 선한 의지와 우리를 돌보며 지켜주는 모습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천사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증거들은 가장 확실하고 위대한 것들이다.

성 사도 요한께서 소아시아 중부의 프리지아(Phrygia)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계셨을 때, 사도께서는 대천사가 케레토파(Cheretopa: 현재 살다[Salda] 호수 근처의 카야-디피[Kaya-dipi])라고 불리어지는 곳에 나타나실 것임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는 한 샘이 기적적으로 생겨나 모든 질병을 다 고치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자기 딸의 병을 고친 한 신도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한, 작지만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졌다.

 

경건한 아르키푸스

그뒤 80년이 지나 이에라폴리스(Hierapolis) 출신의 아르키푸스(Archippus)라는 젊은이가 그곳에 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당을 돌보며 살았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곧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기적들과 성당의 샘물이 가져다 주는 은총을 악마는 싫어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그 주변의 이교도들을 충동하여 시기하게 만들었다. 이교도들은 아르키푸스를 여러 차례 모욕하거나 공격하였으며, 한 번은 밤에 샘물을 봉(封)해 버리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미카엘 대천사의 보이지 않는 힘이 이들의 행동을 막았다.

 

‘호네’-녹이는 항아리

그뒤 여러 차례 성당을 공격하려던 이교도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마지막으로 두 개의 강물을 한 곳으로 합쳐 댐을 만들고 그것이 바로 성당 위에서 거대한 호수처럼 되게 하였다. 그리고는 성당이 물에 휩쓸려 가도록 그 댐의 둑을 터뜨렸다. 그 순간 미카엘 대천사가 아르키푸스에게 나타나 그를 안심시키면서 불기둥과 같은 모양 속에서, 언덕을 찢듯이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급류와 맞섰다. 그 거대한 물살이 자신에게 다다를 즈음 미카엘 대천사는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를 쪼개어 자연스레 골짜기 같은 것이 생겨나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그 위험천만한 물결이 성당을 벗어나 그곳으로 빨려들어 가게 만들었다. 바위가 거대한 강물을 삼켜버린 이후로 그곳을 ‘호네’(Chonae: 녹이는 항아리, 도가니 또는 깔때기)라고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의 보호자이신 미카엘 대천사를 기념하게 되었다.

 

 

성 소존 순교자(9월 7일)

 

영혼의 목동

성인께서는 소아시아의 리까오니아(Lycaonia) 출신으로서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통치기(284-305)에 사셨다. 세례를 받기 전 성인의 이름은 타라시오스(Tarasius)였으며, 양치는 목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성인께서는 영적인 양떼들에게 꼴(풀)을 먹이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로써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이교도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우상의 손을 자르다

어느날 성인께서는 한 환상(幻像, vision)을 보게 되었는 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의 피를 흘리는 영상(影像)이었다. 그리하여 성인께서는 낄리끼아(Cilicia)의 폼페이오폴리스(Pompeiopolis)로 내려가셔서 이교도들이 다이아나(Diana: 로마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처녀성과 사냥의 수호신이기도 함)의 신상(神像)을 금으로 만들어 놓고 예배하는 신전으로 들어가셨다. 성인께서는 그 우상의 오른쪽 손을 잘라 여러 조각으로 부순 다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처음 이교도들이 성인을 발견하였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으며, 성인께서 자신이 한 일을 알리면서 그들에게 스스로 붙잡히시자 비로소 그들은 놀라며 크나큰 혼돈에 휩싸였다.

 

고문과 순교

성인께서는 곧바로 낄리끼아 지역의 통치자인 막시미안(Maximian) 앞으로 끌려가셨으며, 혹독한 매질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인에 대한 이런 고문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성인의 굳건한 믿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함이 드러나자, 고문하는 사람들은 다시 온통 뾰족한 못이 박힌 채 쇠로 만들어진 신을 신고 달리도록 성인을 몰아세웠다. 선행을 상징하는 이슬방울처럼 자신의 붉은 피가 땅 위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성인의 마음은 이 세상의 기쁨이 아닌 천상의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고, 그 기쁨은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너무도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신 탓에 성인의 뼈와 내장이 밖으로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 성인께서 안식하신 뒤, 고문하던 이들이 성인의 시신을 불태우려고 불을 붙이려 하자 곧, 심한 돌풍이 불고 비가 쏟아져서 그 불을 껐으며, 이교도들은 큰 두려움에 휩싸인 채 도망가고 말았다. 그리고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지냈다.

 

 

성모탄생 축일(9월 8일)

 

새로운 하와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새로운 하와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셨으며, 이로써 온 인류를 구속하는 샘(well-spring)이 되시면서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거룩함의 원형이 되셨다. 성모님의 부계(父系)는 다윗왕에게까지 닿는 귀족 가문이었고, 요아킴의 아내이며 성모님의 어머니인 안나 또한 다윗왕의 후손이면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자벹과는 서로 자매지간이었다. 부유하고 경건하였으나 나이가 들도록 자식을 얻지 못한 요아킴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쉼없이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는 두 부부에게 드디어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기쁜 소식을 알려주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안나가 비록 나이가 많지만 자식을 낳게 될 것이고, 이 아이는 세상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아이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거룩하게 구별된 삶

아홉 달이 차서 아기를 낳게 되자 안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차올랐다. 유대의 법에 따라 정결예식을 치르고 난 뒤 안나는 일어나 씻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이름을 마리아라 지어 불렀다. 아기가 여섯 달쯤 되었을 때, 어머니 안나는 아기를 땅에 내려놓아 아기가 설 수 있는가를 지켜보았다. 마리아는 일곱 걸음을 뗀 뒤 다시 어머니품에 안겼다. 그뒤 어머니 안나는 아기가 머무는 방을 거룩한 장소로 구별하여 돌보는 한편 사랑스럽고 정결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그곳에 두지 않았다. 또한 히브리인 가운데 순수하고 순결한 딸들로 하여금 아기와 함께 지내도록 하였다.

 

영원히 칭송받을 이름

아기가 한 살이 되자 아버지 요아킴은 큰 잔치를 베풀고, 사제와 율법학자 그리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아기를 사제들의 손에 건네자 그들은 성모님을 축복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 이 아기를 축복하시어 그의 이름이 영원토록 칭송을 받게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뒤 어머니 안나는 다시 아기를 거룩하게 구별한 장소에 두고 나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다.*

 

* 이 내용은 외경인 ‘야고보의 첫복음서’에 기초한 것이다. 이 저작의 역사적 가치는 확실치 않으나 상징적인 공명(共鳴)은 깊이 신학적이므로 교회는 이런 요소들을 택하여 사용해왔다.

 

 

성 미노도라, 미트로도라, 님포도라 순교자들(9월 10일)

 

아름다운 세 자매

이들 축복받은 세 자매들은 갈레리우스 막시미안 황제(c. 305-311)가 통치하던 시절에 소아시아의 비티니아(Bithynia)에서 살았다. 용모뿐 아니라 영혼까지 뛰어나게 아름다웠던 성녀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피티아(Pythia)라고 불려지는 산악지대의 한 곳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온천(溫泉)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뿐 아니라 세속과도 멀리 떨어져 있던 성녀들께서는 거룩한 덕을 쌓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서 얻는 기쁨을 맘껏 누리며 살고 있었다. 성령께서 늘 성녀들과 함께 거하셨고, 그래서 오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의 질병을 고치고자 성녀들을 찾아오곤 하였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한 신부

드디어 이들 성녀들의 명성이 당시 그 지역의 통치자인 프론토(Fronto)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통치자는 한 무리의 군인들을 보내어 성녀들을 붙잡아 자기 앞으로 끌고 오도록 명령하였다. 조사를 받으면서 성녀들께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통치자는 성녀들의 지혜와 흔들림이 없는 신념에 약간 당황하였고, 성녀들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신랑(그리스도)을 버리도록 설득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통치자는 먼저 맏이인 미노도라의 옷을 벗긴 다음 사정없이 매질을 가하였고, 끝내 성녀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그런 다음 통치자는 벌거벗은 채 피멍이 들어 죽어있는 미노도라의 시신(屍身)을 남아있는 두 자매에게 보내면서 두 동생들이 언니의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심이 흔들리기를 내심(內心) 기대하였다. 그러나 죽은 언니를 본 두 성녀는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리라는 각오가 더욱 더 강하게 굳어졌다. 따라서 남은 두 성녀도 미노도라처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횃불에 몸이 그을리고 두 손과 두 발은 쇠몽둥이에 맞아 으스러진 채 순교하였다. 그런데 고문을 당하면서 성녀들이 보여준 조용하고 기쁨에 넘친 태도로 말미암아 더욱 화가 난 통치자는 성녀들의 시신을 불에 태워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나중에 세 성녀들의 성해(聖骸, relics)에 존경심을 표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성녀들의 몸이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 맹렬한 폭풍이 불어 불을 꺼버렸다. 그래서 신도들은 성녀들에게 예를 갖추어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성 에프로시노스 수도자(9월 11일)

 

부엌데기 농부

성인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농부였으며, 수도원에 들어온 뒤로는 주방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부엌데기로 지냈다. 성인은 점차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갔으나 늘 관대한 마음으로 그런 조롱들을 받아들였다.

한편 수도원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열렬히 갈망하며 생활하는 한 경건한 사제가 있었다. 어느날 밤 잠을 자는 중에 그 사제는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감미로움으로 가득찬 천국의 한 정원으로 옮겨지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정원 한 가운데에는 에프로시노스 수도자가 달콤한 과일들을 맛보며 천사들과 함께 기쁨에 넘쳐 있었다. 사제는 에프로시노스에게 다가가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자 에프로시노스는 ‘이곳은 바로 신부님이 오랫동안 갈망해온대로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며, 저는 하느님의 자비로 이곳에 있노라’고 대답하였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고린토 1서 2: 9) 광경을 바라보던 사제는 다시 ‘그러면 이곳에 있는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조금 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에프로시노스는 사과나무에서 사과 세 개를 가지째 꺾어 사제의 외투 속에 집어넣어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사제는 조과(朝課)를 알리는 종소리에 잠을 깼다.

 

덕을 쌓으라는 표징

그리고 그 사제는 자신이 방금 본 것들이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 세 개가 가지에 달린채로 자신의 품 속에 있으면서 말할 수 없는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제는 곧바로 성당으로 가 에프로시노스 수도자가 언제나처럼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에프로시노스에게 다가간 사제는 지난 밤에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처음에 에프로시노스는 자신이 이곳에 줄곳 있었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제가 거듭하여 진실을 말해달라고 조르자 성인은, ‘신부님께서 보신 것은 모두 사실이며, 이 합당치못한 종을 통하여 그런 신비를 보여주려 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대답하였다. 곧바로 사제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수도자들에게 이야기하고 그 증거로서 사과가 달린 나무가지를 보여주었다. 수도사들은 거룩한 덕을 쌓는 일에 힘을 다하라는 이 하느님의 표징(表徵, sign)에 크게 용기를 얻었으며, 그 사과를 맛본 이들은 모든 병이 말끔히 나았다. 그러나 에프로시노스 성인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칭찬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수도원을 떠나갔다.

 

 

성 아프토노모스 주교순교자(9월 12일)

 

이탈리아의 주교

성인께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극심한 박해가 있던 때(303년) 이탈리아의 주교였다. 성인께서는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를 떠나 니코미디아 만(灣) 가장 동쪽의 비디니아(Bithynia) 마을인 소레우스(Soreus)로 피신하셨고, 그곳에서 코르넬리우스(Cornelius)라는 그리스도인의 영접을 받으셨다. 그곳에 조금 오래 머무는 동안 성인께서는 대천사 미하일의 이름으로 봉헌된 작은 성당을 세우고, 코르넬리우스를 보제로 서품하셨다. 코르넬리우스가 성당과 그 곳에 모이는 신도들을 잘 돌보는 동안, 성인께서는 리카오니아(Lycaonia)와 이소리아(Isauria) 지역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으며, 다시 돌아와서는 코르넬리우스를 사제로 세우셨다.

 

피신과 복음전파

이 시기에 니코미디아를 방문한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과 성인의 복음전파 활동이 활발한 것에 대해 분노하였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성인께서는 또다시 몸을 피해야만 하였고, 그런 속에서도 성인께서는 흑해 바닷가의 마을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다. 그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성인께서는 다시 코르넬리우스를 주교로 임명하시려고 떠나셨으며, 그 도중에도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소아시아의 서쪽 지역을 거치시면서 우상숭배를 뿌리 뽑는 한편 그리스도교 신앙을 널리 전하는 일에 헌신하셨다.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시다

그런데 어느날 새로이 세례를 받은 소레우스의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의 신전에 몰려 들어가서 그곳에 있던 모든 상(像)들을 부숴버렸다. 그러자 이를 알게된 이교도들은 복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성인께서는 그 마을로 되돌아와 성찬예배를 거행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성인께서 한 작은 성당에서 신비의 성사를 거행하시던 날, 이교도들은 몽둥이와 돌맹이 그리고 칼 등의 흉기를 들고 성당 안으로 몰려 들어가 닥치는대로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제단 앞에 서 있던 성인께서도 칼에 목숨을 잃었으며, 이로써 당신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하느님께 바치셨다.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나중에 성인의 시신을 찾아 안장하였다.

 

 

성 고르넬리오스 백인대장(9월 13일)

 

이교도 백인대장

성인께서는 사도시대에 사셨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교도로서 이탈리아 보병대대에 속한 백인대장(centurion)이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어느 날 베드로 사도께서는 머물고 있던 욥빠의 집 옥상에서 기도하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한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곧 고르넬리오스가 보낸 사람들이 케사리아에서 와 그 집에 다다랐을 때, 사도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사도행전 10:34-35) 깨달아 알게 되었다.

 

이교도들에게 임한 성령

베드로 사도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는 도중, 하느님께서 이교도들을 부르신다는 표시로 성령이 고르넬리오스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임하였다.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며 베드로 사도는 고르넬리오스와 그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후로 고르넬리오스 성인께서는 사도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스테파노스 보제가 순교하고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흩어졌을 때, 성인께서는 다른 이들과 함께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그리고 멀리는 에페소까지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한 번은 디미트리오스라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트로아(Troas) 지역의 스켑시스(Skepsis)라는 이름의 한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통치자는 성인더러 우상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위협을 가하였다.

 

선교사가 되시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짐짓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꾸미고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였고, 그 순간 바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면서 모든 우상들이 다 부서지고 말았다. 또한 통치자의 아내 에반티아와 그의 아들 디미트리안도 건물 잔해에 깔려 묻히고 말았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통치자는 곧 성인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면서, 아내와 아들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성인의 기도로 그의 아내와 아들은 무사히 살아났고, 통치자를 포함한 그의 모든 가족들과 그 도시의 주민들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성인께서는 당신의 남은 생애 동안 평화로이 지내며 장수를 누리다가 안식하셨다.

 

성 에피미아 대순교자(9월 16일)

 

마르스 숭배자들

성인께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의 통치때 할키돈에서 사셨다. 부모님은 부유하고 경건한 분이셔서 성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하셨다. 당시 프리스쿠스(Priscus)가 아시아의 지방총독(Proconsul)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는 로마신화의 군신(軍神)인 마르스(Mars)를 열렬히 숭배하는 사람이어서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할키돈으로 와 마르스 축제에 참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은 폭군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을 보존하려고 적은 수로 무리지어 외딴 집이나 사막으로 도망을 쳤다. 성인도 마찬가지로 숨은 49인의 그리스도인들 무리 속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당신의 덕과 지혜로 찬란한 해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성적인 존재

그러나 성인과 그 동료들은 곧 발견되어 총독 앞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다. 총독은 그들의 젊음과 양식(良識)을 부추기면서 자신의 말을 따라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은근히 설득하였다. 그러나 성인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이성(理性)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오직 한 분, 참 하느님을 부정하고 도리어 말도 못하고 감각도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당신들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화가난 총독은 성인과 그 동료들을 20일 동안 계속 고문하도록 명령하였다.

 

고문의 불길과 천사들

그리고 나서 그들의 믿음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과 에피미아 성인께서 그 무리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안 총독은 성인의 손과 발을 쇠바퀴로 짓이기도록 시켰다. 그러나 성인께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털끝만한 상처도 없이 보호되었다. 다음에 불길이 높이 치솟는 화로(火爐)에 던져졌으나 천사들이 나타나 성인을 지켜주었다. 이런 기적들을 지켜보던 고문 집행관 빅토르와 소스테네스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뒤 야수에게 순교를 당하였다. 그후로도 성인께서는 수많은 고문을 당하셨으나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성인을 지키시고 구해주셨다. 마침내 두 관리처럼 야수에게 던져진 성인께서는 곰이 단 한 번 물자 곧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그후 성인의 성해에는 수세기 동안 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졌으며, 7세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성 삐스티스, 엘삐다, 아가삐 순교자들과 그들의 어머니 소피아(9월 17일)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이름의 세 자매

성녀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가 다스리던 시절에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그들은 부유하고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성녀들의 어머니 소피아는 딸들에게 지어준 이름 그대로 믿음희망사랑* 속에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또한 그는 딸들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도록 길렀으며, 딸들과 함께 누구 앞에서든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숨기지 않고 도리어 명백히 드러내 고백하곤 하였다. 이처럼 타인에게 존경받을만한 훌륭한 생활태도를 간직하고 살아가던 성녀들에 대한 소문은 마침내 황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그들이 로마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 황제는 군인들을 보내어 성녀들을 자신에게로 데려오게 하였다.

 

어린 나이에 보여준 굳센 신앙심

성녀들이 매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이 때 삐스티스는 열두 살, 엘삐다는 열 살 그리고 아가삐는 아홉 살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확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이들이 서로 함께 있음으로써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로 떼어내어 심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불려나온 맏이 삐스티스는 폭군인 황제의 감언이설(甘言利說)과 회유(懷柔)하는 말을 물리치고 도리어 뻔뻔하기 그지없는 황제의 행동과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헛된 음모들을 비난하였다. 그러자 너무도 의연하고 당당한 성녀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황제는 노발대발하며 고문을 명하였다. 이때부터 성녀들에 대한 모질고 잔인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감당한 또 다른 순교

한편 황제는 어머니인 소피아에게도 또 다른 고문을 가하였다. 그것은 곧 어린 딸들이 형리(刑吏)들에게 고문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피아 성녀는 비길 데 없는 용기로써 이 고통을 견뎌냈으며, 도리어 딸들을 격려하면서 하늘에 계신 신랑(예수 그리스도)을 위해 고문을 끝까지 견디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마침내 어린 세 딸 모두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자 어머니 소피아는 그 시신들을 예(禮)를 갖추어 매장하였다. 그리고 영적인 기쁨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러나 혈육(血肉)의 정에서 오는 슬픔이 너무 컸던 어머니는 몇일 뒤 자신도 그 영혼을 하느님 품에 묻고 말았다.

 

* 삐스티스, 엘삐다, 아가삐는 그리스어로서 곧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어로는 이것을 베라(Vera), 나데즈다(Nadezhda), 류보프(Lyubov)라고 한다.

 

 

성 에브스타티오스 대순교자(9월 20일)

 

로마의 장군

성인께서는 트라야노스 황제(Trajan, 98-117)의 통치기에 로마에 살았던 장군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그 이름이 플라시다스(Placidas)였고, 아내는 타티아나(Tatiana)였다. 성인께서는 개종(改宗) 전에 비록 이교도였지만 훌륭한 덕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성인에게 하느님께서는 성 사도 바울로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곧, 어느날 숲에서 성인이 사냥을 하다가 숫사슴 한 마리를 잡을 수 있는 순간이 되었는 데, 그때 사슴의 두 뿔 사이로 해보다 더 빛나는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라고 하며, 성인의 선한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스도인이 되시다

몹시 놀란 성인은 말에서 떨어져 한 동안 정신을 잃은 채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후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나타나셔서 당신이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시라고 말했을 때, 성인의 마음 속에서는 모든 의심이 사라져 버렸다. 그뒤 성인께서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이름들을 갖게 되었는 데, 곧 에브스타티오스와 테오피스타(아내) 그리고 아가피오스(아들)와 테오피스투스(아들)가 그것이다. 믿음에서 비롯된 의로움이 성인에게 있음을 보신 주님께서는 또다시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악마가 가져올 고난, 곧 구약의 의인 욥이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이 있을 것이며,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그와 함께 할 것임을 알려주셨다.

 

성인과 가족들의 순교

곧바로 모든 재산과 아내 그리고 두 아들마저 잃게 된 성인께서는 과수원지기로서 힘겨운 삶을 사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15년의 세월이 흘러 야만인들이 로마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을 때, 황제의 명에 따라 극적으로 다시 군단(軍團)의 지휘관이 된 성인께서는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잃었던 아내와 두 아들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나 승전가를 부르며 로마로 돌아온 성인을 맞은 새로운 황제 하드리아노스(Hadrian, 117-138)는 성인에게 우상 앞에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한 성인을 아내, 두 아들과 함께 뜨겁게 달궈진 황소 모양의 동(銅)남비에 던져 넣었다. 마침내 성인과 가족들은 그 몸이 조금도 상한 데 없이 조용히 안식하였다.

 

 

성 요나 예언자(9월 21일)

 

주님의 명령

요나 예언자는 구약의 이른바 열 두명 ‘소예언자들’(minor prophets) 가운데 한 분이시다. 그는 팔레스틴 땅의 바닷가에 위치한 아조투스(Azotus) 가까이의 갓헤벨(Gath-hepher) 출신인 아미때(Amittai)의 아들이었다.(열왕기하 14:25 참조) 또다른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엘리야 예언자가 살린 사렙다(Zarephath) 과부의 아들이라고도 한다.(열왕기상 17:17-24 참조)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8세기 무렵에 살았으며 여로보암 2세(788-748 BC)에게 이스라엘 왕국이 그 옛 영토들을 회복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주님께서는 예언자에게 명령하셔서 니느웨(Nineveh)로 가 그곳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도시를 멸망시킬 것임을 알리라고 하셨다.

 

바다에 던져진 예언자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면서 요빠(Joppa)에서 배를 타고는 스페인의 다르싯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강력한 태풍을 일으키셔서 배가 거의 깨어질 지경에 이르도록 만드셨고, 선원들은 이 태풍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고는 그를 산 채로 바다에 집어던졌다. 그리고나서 신기하게도 바다는 이내 잔잔해졌다. 예언자가 물에 빠진 순간 거대한 바다괴물이 예언자를 집어 삼켰고, 예언자는 그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렀다.(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지하세계에 내려가신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사흘 뒤 바다짐승은 예언자를 다시 토해냈다.(이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니느웨로 간 예언자는 그 곳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고, 임금과 시민들 심지어는 짐승들조차도 회개에 동참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분노를 거두시고 그 도시를 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에 도리어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를 하나 자라게 하셨다가 죽게 하심으로써 예언자에게 교훈을 주셨다. 그것은 곧, 예언자가 한 식물이 시들어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면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큰 도시를 자애로써 살피시지 않겠는가 하는 가르침이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통해 당신께서는 정의보다도 자비를 더 베푸시는 분이시며, 모든 사람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함으로써 죽음에서 벗어나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아토스산 조그라푸 수도원의 26인 순교자들(9월 22일)

 

정치적 소용돌이 앞에서

미카엘 8세 빨레올로구스 황제는 자신이 *리용 공의회(1274년)에서 동의한 동서 교회의 연합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결심하였는데, 이는 라틴인들의 점령으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약화된 비잔틴 제국에 대해 교황의 정치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잘못된 교회연합에 대한 반대를 가혹하게 억눌렀으며, 요한 베코스 총대주교의 충고를 받아들여 바로 그때 당시까지 수도사들의 보호자에서 반대자로 돌아섰다. 황제는 군인들을 정교성(Orthodoxy)의 아성(牙城)이며 자신의 정치적 책략(策略)에 대한 반대운동의 중심인 아토스산으로 보냈으며, 어떤 반대도 피를 흘려서라도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된 정교성을 지키다

그 당시 조그라푸 수도원 가까이에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며 살던 한 원로가 있었는데, 그는 날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성모님께 기립찬양을 바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황제의 사신이 조그라푸 수도원으로 향하던 그 날, 성모님께서는 언제나처럼 찬양을 드리던 그 원로 수도사에게 응답하셨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씀하시고는 그 수도사더러 수도원으로 가서 다른 수도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영적으로 성숙해진 수도사들이 순교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 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수도사들 중 대부분은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26명의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탑위로 올라가 기다렸다. 정교회의 라틴화(Latinization)를 꾀하는 이들이 아첨과 교묘한 말투로써 그릇된 교회연합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26명의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서 굳건히 고백하였고, 군인들이 탑에 불을 질렀을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순교하셨다. 순교성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토마스 수도원장, 발사누피우스, 끼릴, 미카엘, 시몬, 힐라리온, 야고보(2인), 욥, 시프리안, 사바스, 마르티니안, 꼬즈마, 세르기우스, 미나스, 요아삽, 요안니키우스, 빠블로, 안토니, 에프티미오스, 도메티안, 파르테니우스, 그리고 네 명의 평신도.

 

* 리용공의회(1274): 이 공의회에 참석한 정교회 대표들이 교황의 주장을 인정하고 ‘신앙의 신조’에 ‘필리오케’(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라틴교회의 교리)를 넣어 암송하기로 동의하였으나 곧 비잔틴 교회의 성직자들과 신도들 압도적 다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며, 이어서 불가리아 정교회와 다른 정교회들의 반대도 잇따르게 된다. 이 공의회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황제의 누이가 한 다음의 말로써 요약될 수 있다: ‘정교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느니 차라리 내 동생의 제국이 망하는 것이 낫다.’ 이 공의회는 미카엘 황제의 계승자에 의해 정식으로 거부되었다.

 

 

성 실루아노스 아토스산의 수도자(9월 24일)*

 

한 평범한 러시아 농부

성인께서는 러시아의 탐보프(Tambov) 지역에 사는 한 가난한 농사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성인께서는 ‘내가 자라면 하느님을 찾아 온 세상을 두루 다닐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성인들과 고행자(금욕주의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성인의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활활 타올랐고, 이런 사랑을 마음에 간직한 채 자연히 수도생활을 동경(憧憬)하였다. 그러나 점차 성장함에 따라 어린 시절의 생각은 차츰 옅어져 갔고, 강건한 신체를 지닌 여느 농부들처럼 평범한 세속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사람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끝내는 이것이 싸움으로 번졌고, 이 과정에서 그는 싸움의 상대를 거의 죽일 뻔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인은 다시금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며칠 뒤 성인께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뱀 한 마리가 성인의 목구멍 아래로 기어내려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네가 그 뱀을 삼키는 것이 역겹다고 느끼는 것처럼, 네가 살아가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불쾌하다.’ 성인께서는 이 계시로 말미암아 삶에 대한 당신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뒤 오로지 아토스산과 마지막 심판만을 생각하던 성인께서는 1892년 군복무를 마치고 당시 2,000명에 가까운 수도사들로 번성하던 아토스산의 빤델레이몬(Panteleimon)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자가 되었다.

 

‘예수’ 이름의 힘으로 악마를 이기다

이제 갓 수도생활을 시작한 젊은 수도자로서 성인께서는 쉽게 육체적 욕망을 일으키는(carnal) 생각에 사로잡히곤 하였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유혹에 이끌리기도 하였다. 그러자 성인의 고백을 듣던 영적인 아버지께서는 성인에게 ‘예수기도’(Jesus Prayer)를 하도록 권유하였다. 이후 성인께서는 45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예수기도를 통해, 온갖 사악한 상념(想念)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몰아냈으며, 도리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늘 간직한 채 살았고, 절제하고 삼가는 마음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예수기도에 전념하던 성인께서는 밤에 한 두 시간 눈을 붙이는 것으로 잠을 대신하곤 하였다. 나중에 이백 명이 넘는 일꾼들을 부릴 책임이 주어졌을 때에도 성인께서는 당신의 이같은 영적 (고행) 생활을 완화(緩和)시키지 않았다. 어느 날 영적인 투쟁에 몰두하는 성인에게 악마가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을 예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였고, 주님께서는 성인에게 ‘너의 정신을 지옥에다 두어라. 그리고 낙심하지 말아라!’(Keep thy mind in hell, and despair not!)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자신과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던 성인께서는 1938년 9월 24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 성인에 대한 공경은 198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테클라 준사도(9월 24일)

 

부잣집 딸

성녀께서는 소아시아의 이코니움(Iconium)에서 테오클레우스라는 한 이교도 부자의 딸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자 성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타미리스(Thamyris)라는 젊은이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 이 때는 바로 바울로 사도께서 이코니움에 오셔서 성녀의 이웃인 오네시포루스의 집에 머무르시며 밤낮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던 시기였다. 사흘 동안 커튼 뒤에 숨어 성 사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던 성녀께서는 기쁨에 겨운 나머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성녀가 이 세상의 일들, 특히 결혼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변한 것을 본 아버지와 약혼자는 너무도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 새로운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온 도시에 소란이 일어났고, 마침내 사도께서는 체포되어 그 도시의 통치자 앞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다.

 

화형에 처해지다

통치자는 성 사도를 사슬로 묶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그날 밤 성녀께서는 바울로 사도를 만나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값비싼 팔찌를 풀어 감옥지기에게 주고는 허락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 사도의 발치에 앉았다. 성 사도의 몸을 묶은 사슬에 입을 맞추는 성녀에게 사도께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과 구원의 역사에 관해 말씀해주셨다. 그후 성녀께서는 성 사도와 함께 통치자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통치자는 모여든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먼저 사도 바울로에게 매질을 하게 한 다음 도시 밖으로 내어 쫓고는 이어서 성녀를 산채로 불사르도록 명령하였다.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사람들은 광적인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나무를 쌓아 단을 만들고는 성녀의 옷을 벗긴 다음 화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성녀께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다 보았고, 그 곳에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무한한 신적인 힘을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녀께서 성호를 긋고 장작단 위에 올라서자 나무에 불이 붙여졌고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런데 그 불길은 성녀의 몸을 전혀 태우지 못하였다. 도리어 하느님께서 폭우를 쏟아 부으셔서 불은 이내 꺼지고 야외극장(amphitheatre)은 물바다가 되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구출된 성녀께서는 성 사도 바울로와 함께 안티오키아 등지에서 선교하셨고, 그후 일흔 두 살이 되도록 한 동굴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지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다.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즈의 수도사제(9월 25일)

 

어린 바르톨로메오

성인께서는 1314년 러시아의 로스토브(Rostov)에서 태어나셨으며, 성인의 부모님인 끼릴과 마리아는 성인에게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지어주셨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다른 형제들인 스테파노스, 베드로와 달리 잘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한 수도사를 만나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은 성인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리만치 정확하게 시편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도사는 성인의 부모에게 ‘이 아이는 성삼위의 거처(居處)가 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도록 이끌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로부터 성인께서는 더욱 헌신적으로 성당에 다니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열 두 살이 되자 성인께서는 스스로 금식을 더 엄격히 지키며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수도사 세르기우스

라도네즈(Radonezh)로 이사한 뒤, 성인의 두 형제는 결혼을 하였으나 성인께서는 수도사가 되길 원하였다. 그후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성인께서는 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 형제인 베드로에게 나누어주고, 아내를 잃은 형 스테파노스와 함께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성당과 방을 짓고는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1337년 성인께서 스물 네 살이 되었을 때, 세르기우스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도서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홀로 숲에서 지내며 기도에 전념하였고, 곰에게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등 하느님의 창조물을 향한 넘치는 사랑과 금욕적인 삶을 살며 지내셨다. 그리고 나서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수도자들 열 두 명이 성인에게 와 자신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자 하는 수 없이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인 성인께서는 1354년 사제서품을 받고 수도원장이 되었다.

 

성삼위 수도원 - 러시아교회 영성의 보고(寶庫)

성인께서는 특별히 가난을 사랑하셔서 수도사들더러 어떤 기부나 헌금도 받지 말 것이며 개인적으로 재산을 소유하지도 말도록 엄격히 지시하였다. 이같은 수도원규칙을 어떤 수도사들은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인의 뜻을 도와주셨다. 이후 수도사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으며, 수도원은 더욱더 발전하였다. 1380년 타타르인들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성인께서는 조국 러시아를 위해 기도하였고 러시아는 승리하여 마침내 타타르인들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와 수도원과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신 성인께서는 1392년 9월 25일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칼리스트라토스 순교자(9월 27일)

 

북아프리카 출신의 군인

성인께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통치기(284-305)에 사셨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 출신인 성인은 예수께서 사셨던 시대부터 그리스도를 믿어온 가정에서 태어나셨으며, 성인의 조상 가운데 한 분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 자기 나라의 가족, 친척들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성인께서는 군인으로서 복무하셨는데, 마침 그 군대는 로마로 되돌아가던 길이었다. 동료 군인들은 병사들이 흔히 저지르는 방종(放縱)한 행동을 성인께서는 하지 않으며, 어떤 우상들도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을 주의깊게 살펴보기로 하였고, 어느날 저녁 늘 그렇듯이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하시려고 성인께서 병영(兵營)을 벗어나자 몰래 뒤를 따라 가서는, 오래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고문과 기적

그들은 곧 성인을 자신들의 최고 상관에게 고발하였고, 성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제껏 홀로 그리고 한 밤중에만 그리스도를 고백해온 성인께서는 이제 밝은 대낮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최고 지휘관은 성인의 고백을 들은 뒤, 성인을 바닥에 눕히고는 잔인하게 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성인의 입에 깔때기를 끼운 뒤 그것을 통해 물을 퍼넣었고, 마지막으로 자루 속에 성인을 집어넣어 묶은 다음 바다 속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자루는 곧 터졌고, 이어서 두 마리의 돌고래가 성인을 해안가로 옮겨와 살아나게 되었다.

 

49명과 153명의 회심자(悔心者)들

이같은 기적을 바라본 군인들 가운데 49명의 군인들이 성인에게 저지른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 또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쳐넣어졌으며, 그곳에서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의 육화(肉化)하심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약속된 보상 등의 가르침들을 군인들에게 베풀었다. 그 다음날 49명의 군인들은 다시 고문을 당하고 나서 손과 발이 묶인 채 깊은 물 속에 던져졌다. 그러나 던져지자마자 그들 모두 묶였던 줄이 풀어지고는 빛나는 새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물 위로 다시 올라왔다. 이 광경을 바라본 또 다른 153명의 군인들이 새로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윽고 최고 지휘관은 성인과 49명의 군인들 모두를 목 잘라 죽였으며, 새로이 신자가 된 이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정중히 안장하고는 그 무덤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성 그레고리오스 아르메니아의 주교순교자(9월 30일)

 

파르티아인의 후손

성인께서는 240년 무렵에 태어나셨다. 성인은 아르메니아의 왕 코스로프의 친척이며 파르티아인(Parthian: 현대의 이란지역을 포함하여 그 동쪽과 서쪽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였던 고대 파르티아 왕국의 주민)이었던 아버지 아낙(Anak)의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는 페르시아인 왕의 명령에 따라 코스로프 왕을 암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낙의 온 가족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레고리 성인과 다른 형제 하나만은 다행히 살아남아 카파도키아의 케사리아로 피신하였다. 로마의 영토였던 그곳에서 성인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구덩이에서 보낸 15년

그런데 죽임을 당한 왕 코스로프의 아들인 티리다테스(Tiridates)도 페르시아 왕에 의해 카파도키아로 추방되어 왔으며, 성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밝히지 않은 채 그의 신하로 봉사하게 되었다. 후에 로마인들에 의해 다시 왕위에 복귀한 티리다테스는 열렬히 우상숭배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시종인 성인께서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화가 났으며, 그래서 성인에게 여러 가지 고문을 가하도록 명령하였다. 마침내 성인의 다리와 뼈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가 바로 성인의 아버지임을 안 티리다테스의 분노는 더욱 타올랐고, 마침내 그는 성인을 온갖 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구덩이 속에 밀어넣은 뒤 15년동안이나 버려 두었다.

 

왕의 병을 고치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노로 이성(理性)을 잃게 된 왕은 실성(失性)한 사람처럼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꿈에서 그레고리 성인만이 자신의 오빠인 왕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동생은 곧바로 성인을 구덩이에서 구해내 왕궁으로 모셔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오랜 세월동안 형편없는 곳에서 지내야 했던 성인의 몸이 너무도 건강하고 온전하게 보존된 것에 모두들 놀랐다. 성인께서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왕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하들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에서 세례를 받게 하였다.(290년경) 새로운 사람이 된 왕은 또한 자신의 여동생을 도와 성당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많은 이교도 사제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뒤 그리스도교 사제가 되었다. 전체 아르메니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한 성인께서는 328년쯤 평화로이 안식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