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스 홉코 신부

토마스 홉코 신부의 정교신앙 시리즈(제 3권 성경과 교회사)

ttoza 2010. 2. 18. 10:31

 

정교신앙 시리즈 제 3권

 

성경과 교회사

 

지은이: 토마스 홉코(T. Hopko) 신부

일러스트레이션: 죤 마투지악(J. Matusiak)

 

정교신앙(THE ORTHODOX FAITH) 시리즈는 평범한 독자들에게 정교회의 신앙과 삶에 대한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정보를 주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다섯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다.

 

제 1권은 교리(DOCTRINE)에 관한 것으로서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곧, 기독교 교리의 근원, 니케아 신조의 해설에 나타난 정교회의 주요 교리들, 성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한 설명이다.

 

제 2권은 예배(WORSHIP)에 관한 것으로서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곧, 성당의 건물과 성의(聖衣)와 상징들, 성례전, 매일의 의식, 금식과 축일을 담은 교회력, 성찬예배이다.

 

제 3권은 성경과 교회사(BIBLE AND CHURCH HISTORY)로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 부분은 성경의 내용과 해석에 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교회사에 관한 것으로서 각 세기(世紀)의 주된 신학적, 예전적, 영적 발달을 강조한다.

 

제 4권은 영성(SPIRITUALITY)에 관한 것으로서 기독교인다운 삶의 주요 주제들을 다룬다. 곧, 기도와 금식과 회개, 여러 가지 미덕(美德)들, 세상에서의 증언과 하느님과의 사귐이다.

 

 

차례

 

1장 성경

 

성경

하느님의 말씀

저작권

해석

 

2장 구약

 

율법서

십계명

역사서

지혜서

시편

예언서

 

3장 신약

 

복음경

사도행전

성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

성 사도 야고보의 편지

성 사도 베드로의 편지들

성 사도 요한의 편지들

성 사도 유다의 편지

묵시록

 

4장 구원사

 

말씀과 영

역사 이전(以前)

아브라함

과월절

왕권

사제직

예언

거룩함

 

5장 교회사

 

1세기

2세기

3세기

4세기

5세기

6세기

7세기

8세기

9세기

10세기

11세기

12세기

13세기

14세기

15세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1900-1925)

(1925-1950)

(1950-1979)

 

참고문헌

 

일러두기

 

1. 성경의 책이름은 공동번역 성서(1977년)의 것을 따른다.

2. 성경본문의 인용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동번역 성서의 것을 기준으로 한 다.

3. 단, 공동번역의 ‘야훼’라는 호칭은 ‘주’ 또는 ‘주님’으로 바꾸어 표기한다.

4. 일반적으로 함께 쓸 수 있는 고유명사나 단어들은 구태여 구별하지 않고 문맥에 맞추어 적절하게 쓴다.

(예: 바울-바울로, 성경-성서, 믿음-신앙, 은혜-은총, 삶-생명-생활 따위)

 

 

 

1장 성경

 

성경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기록들을 담은 책이다.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백성들은 유다인들(Jews)로서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주신 야곱의 후손들이다.(창세기 32:28) 이 백성들은 또한 히브리인(Hebrews)이라고도 불리어진다. 그들은 영원히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성(人性)을 따라’ 나셨기 때문이다.(로마서 9:5) 하느님의 아들이신 이 분께서 나자렛의 예수님이시고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왕이시며 온 세상의 구세주이시다.(마태오 1-2장, 루가 1-2장, 로마서 8:3, 갈라디아 4:4, 히브리서 1-5장을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약 기록들은 하느님을 믿고 그 분의 거룩한 진리를 알아, 그 분의 거룩한 뜻을 행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하느님의 말씀으로 남아 있다.

 

신약에 나오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들(Christians)로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마태오 16:13-20을보라) 신약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인 것으로 확증된 거룩한 기록들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책으로서, 또는 많은 책들의 묶음으로서 두 가지 주된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구약의 기록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신약의 기록들이다.

 

하느님의 말씀

성경은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이 만들어진 채로 하늘에서 떨어졌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저 수동적인 도구일 뿐인 사람들에게 성경을 한 자 한 자 불러주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참되고 살아있는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것과 그 분의 신적인 자기계시(self-revelation)의 한 측면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경전(經典), 곧 당신의 백성과 온 세상을 위한 그 분의 진리와 의지를 참되고도 진정한 표현으로 담고 있는 기록들을 만들도록 하셨음을 뜻한다.

 

성경의 말씀들은 인간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 모든 말은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한 경전적인 증언으로 남게 하려고 영감을 불어넣어 쓰여지도록 한 인간의 말이다. 인간의 말로서 성경의 말씀들은 그것을 쓴 사람과 그것들이 쓰여진 시대와 문화의 표시를 담고 있다. 그렇더라도 인간적인 조건과 형태의 완전한 통합속에서 성경의 말씀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참으로 인간적인 형태 속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기원이 사람이 아니고 자신의 창조물을 바라보며 영감을 불어넣으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성경은 다른 어떤 책과 같지 않다. 성경 속에 있는 사람의 말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발견하며, 인간과 세상을 향한 그 분의 의지와 목적 그리고 그 분 자신에 대한 참되고 진정한 지식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성경을 통하여 사람은 하느님과 친교하는 길로 들어갈 수 있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디모테오 2서 3:16-17)

 

사람의 말 속에 담겨저 거룩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형식적인 잘못이나 내적 모순(矛盾)이 없다는 것이 정교회의 믿음이다. 성경에는 본질적이지 않은 성격의 부수적(附隨的)인 부정확함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원하고 영적이며 교훈적인 말씀은 완전하게 변함이 없으며 확실하고 참된 것으로 남아 있다.

 

저작권(著作權)

성경은 서로 다른 많은 인간 작가들의 작품이다. 성경 가운데 어떤 책은 전혀 그 글을 쓴 이를 밝히지 않는다. 또 다른 어떤 책은 그것을 썼을 여러 사람의 이름을 싣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된 저자가 실제 자신의 손으로 그 책을 썼음이 분명하다. 다른 경우에는 책의 저자 곁에 비서 같은 이가 있어서 저자를 대신해 실제로 그 책을 써주었음도 분명하다. 여전히 다른 경우들에서 성경에 지적된 저자들은 그것을 쓴 사람(또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본래 그 기록을 영감 받았고, 그래서 그의 이름이 그 책에 덧붙여졌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고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여러 경우에 교회의 전통은 성경에 있는 어떤 책의 저작권에 대해서 분명치 않으며, 많은 경우에는 성서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토론하고 있는 저작권에 대해서 셀 수 없이 많은 이론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연구는 본래 상대적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것에 의해서 성경 어떤 책의 저작권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교회는 성경 전체가 이런 뜻에서 그것의 단 한 분 저자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영감 받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교회 전통은 사람인 저자의 정체성(identity)을 신앙공동체를 위한 성경 책들의 정확한 해석과 적절한 의의(意義)에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저자의 정체성이 성경의 한 부분인 책의 진정성(眞正性)이나 정당성(正當性)을 결정한다고 보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 안에서 성경책의 가치 또는 적절한 이해와 사용은 인간인 저자에게만 의존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해석

성경은 하느님의 백성들, 곧 교회를 위한 거룩한 기록들을 담은 책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교회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계약관계에 대한 전적인 실재성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방식인 성스러운 영감 아래 만들어졌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신자들의 무리, 곧 옛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이들에게 이제와 또 영원히 변함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교회 안에 살아있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며, 하느님께서 세우셨고 그 안에 거하시고 계시며,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참여와 사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자신을 내어주신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위한 가장 깊은 신적 의미를 지닌다. 신앙공동체, 곧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디모테오 1서 3:15)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삶과 경험을 벗어나서는 누구도 성경을 참되게 이해하거나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베드로 2서 1:20-21)

 

성서학자들은 사람들이 성경의 거룩한 내용과 뜻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고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학자들은 경전의 말씀들이 지닌 뜻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만으로 그리고 그들의 학문적인 연구만으로는 아무도 성경에 대해 적합한 해석을 할 수 없다. 오직 살아 계시며 인격적인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만, 곧 성부로부터 오셔서 성령을 통해 당신의 교회 안에 살아 계신 분만이 하느님을 알려주실 수 있으며, 성경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실 수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그 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셨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18)

 

사람의 몸을 입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느님을 알려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육신(成肉身)이시며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마태오 5:17)이신 예수님만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실 분이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거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루가 24:25-27)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루가 24:44-45; 요한 5:45-47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그 마음을 열어 주시려고 성령으로서 당신의 교회 안에 영원히 계신다.(요한 14:26, 16:13)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만, 곧 믿음과 은총과 진리의 공동체 안에서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성경의 거룩한 말씀들이 지닌 뜻과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해 말하면서 사도 바울로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너울’(veil)이 성경의 참 뜻을 가리우는 데 이는 그 너울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벗겨지게 되”기 때문(고린토 2서 3:14)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 갈 때에 비로소 벗겨집니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곧,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 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로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혀 드러내었으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고린토 2서 3:15-4:4)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제공해 주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성령으로부터 직접 조명받아 “그리스도께서... 써 보내신 소개장...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새겨진”(고린토 2서 3:3) 소개장(letter)이 되게 하신다. 이리하여 구세주(Messiah)께서 오시면 직접적인 신적 영감과 가르침에 의해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는 옛 계약의 예언이 완성된다.(요한 6:45, 이사야 54:13, 에제키엘 36:26, 예레미야 31:31, 요엘 2:28, 미가 4:2, 등등)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영의 직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제 1권 교리 1장을 보라)

 

 

 

2장 구약

 

 

율법서

성경의 첫 부분을 토라(Torah)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법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다섯 권의 책을 뜻하는 오경(五經 Pentateuch)이라고도 불려진다. 이 책들은 또한 모세의 책이라고도 부른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바로 그 책들이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때로부터 모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다섯 권의 책에 나오는 사건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2000년 전부터의 어느 때엔가 일어났을 것이다.(기원전 2000-1200년 사이)

 

창세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이전(pre-history)을 담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창조 이야기와 아담과 이브의 타락, 그리고 이어지는 아담의 자손들의 아주 죄악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 이삭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지어주신 야곱의 이야기가 이어지며, 야곱의 열 두 아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열 두 부족이 에집트의 파라오와 요셉의 사이가 좋을 때 에집트에 정착하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전통적인 교회용어로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족장(族長 patriarch)들이라고 부른다.

 

출애굽기는 요셉이 죽은 뒤 에집트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로 말미암아 해방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야훼(Yahweh), 곧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3:14)라고 계시하시는 것이 나온다. 그 책은 유월절과 출애굽, 그리고 하느님께 이끌려서 이스라엘인들이 사막을 지나 여행하는 내용도 싣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선물로 주신 이야기와 하느님의 백성들의 도덕적이고 제의적인(ritual) 행위에 관해 모세에게 일러주신 여러 가지 다른 법들이 있다.

 

레위기는 더 많은 법들을 싣고 있는 책으로서, 주로 레위 지파에서 뽑힌 남자에 의해 행해지는 제사장답고 제의적인 업무들에 관계된 내용들이다.

 

민수기는 주로 백성들의 인구조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법과 광야를 지나서 약속된 땅에까지 이르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이동에 관한 더 많은 진술을 담고 있다.

 

“둘째 법”을 뜻하는 신명기는 다시금 주로 십계명과 도덕적이고 제의적인 행위에 관한 모세법의 제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법전(法典 law code)이다. 이 책은 백성들에 대한 모세의 축복과 그가 죽은 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게 될 약속의 땅에 대한 그의 환상(vision)으로써 이른바 ‘모세 오경’의 끝을 맺고 있다.

 

학자들은 율법이 모세의 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으며, 율법서들은 후대(後代)의 자료들을 담은 채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전해져온 수많은 구전(口傳)과 문서 전승의 결과를 증거로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 속에서 율법은 ‘주님께서 마치 친구끼리 말을 주고 받듯이 얼굴을 마주 대시고 말씀을 나누신’(출애굽기 33:11) 하느님의 위대한 사람인 모세와 근본적으로 관련된 채 남아있다.

 

십계명

 

1. 너희 하느님은 나 주(主 LORD)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2.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3.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5.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6. 살인하지 못한다.

 

7. 간음하지 못한다.

 

8. 도둑질하지 못한다.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출애굽기 20:1-17 )

 

역사서

성경에서 율법서를 뒤잇는 것이 역사서라고 하는 책들이다. 그 책들에는 가나안의 약속받은 땅에 정착하는 것으로부터 그리스도 이전의 1세기까지 이어져 온 이스라엘의 역사가 담겨 있다. 역사서로는 여호수아, 판관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 에즈라, 느헤미야, 에스델(Esther), 에스델(Esdras)상하, 토비트, 유딧, 마카베오상하가 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성경의 그리이스어역인 70인역(Septuagint)을 따르는 정교회의 성경책 목록에는 사무엘상하가 열왕기상하로 나오며, 열왕기상하는 열왕기 3서, 4서로 되어있다. 또한 에스델(Esther) 다음에 있는 이른바 외경(外經 apocryphal books)도 정교인들은 성경의 정경(正經)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의 외경은 비(非)정교인들이 성경과 밀접한 관계는 있으나 실제로 공인된 정경적(canonical)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록물들이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르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써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 지역 토착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승리와 모세가 지정해준 영토에 열두 부족들이 정착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판관기는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판관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때를 그리고 있는데, 그 판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들로서는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이 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인들은 종종 하느님께 신실(信實)하지 못했으며 악을 행하기조차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그리고 이웃의 다른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래서 판관기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곤 한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다.”(판관기 21:25)

 

룻기는 하느님께서 복을 주어 보아즈의 아내, 곧 다윗왕의 증조모가 된 모압 여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이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서 사울을 기름 붓도록 하시기 위해 뽑으신 예언자 사무엘의 출생과 함께 시작한다.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백성을 위한 왕이셨기 때문에 사울 때까지는 왕이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바랬고, 하느님께서는 마지못해 하시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사무엘상 8장) 사울은 곧 악을 행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양치는 목동인 다윗에게 보내어 왕으로 기름 부으셨다. 사울은 화가 나서 다윗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다윗은 쉽게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도리어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았다. 사울은 마침내 전투에서 사로잡히는 대신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다윗이 유일(唯一)한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안과 밖에서 모든 적들로 무릎을 꿇게 한 다윗왕은 자신이 세운 도시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영광스러운 왕국을 세웠다. 다윗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위대한 지혜를 지녔던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의 왕국을 더 넓혔으며, 시온산 위에 장대(壯大)한 하느님의 성전을 지었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권은 기원전 1000년에서부터 922년까지 계속되었다.

솔로몬이 죽자마자 왕국은 무너졌다.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두 개의 경쟁적인 나라가 생겨났고, 두 나라는 서로서로 그리고 주위의 다른 나라들과 끊임없이 싸움을 벌였다. 이 때는 약 300년 동안 계속되다가 바빌론 포로생활로 끝을 맺게되는 엄청난 쇠퇴(衰頹)와 죄악의 시기였다.(기원전 587-539년) 그리고 이 때는 엘리야와 위대한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많이 활동했던 때이기도 하다.

 

바빌론은 이스라엘인들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 페르샤의 황제 고레스(Cyrus)와 다리우스(Darius)에 의해 점령되었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유다인들의 재정착(再定着)과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여 다시 여는 과정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역대기상하는 바로 이와 똑같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비록 학자들은 그 책이 아마도 에즈라, 느헤미야를 쓴 사람과 같은 3세기 작가들의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에즈라에 의해서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역대기는 아담으로부터 고레스 황제 때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 있다. 그 책은 수많은 족보(族譜)를 싣고 있으며, 성전과 사제직뿐 아니라 다윗과 여러 왕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준다. 70인역(Septuagint) 성경에서 역대기는 ‘빠뜨려진 것’을 뜻하는 ‘빠랄리뽀메-나’(Paralipomena)로 불려지는데, 이는 역대기의 목적이 성경의 초기 역사서에서 빠진 것들을 채워 넣으려는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에스델(Esther)서와 이미 말한 대로 정교회에서 정경에 들어 있는 에스델(Esdras)상하, 토비트, 유딧, 마카베오상하는 신약시대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 책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다인 공동체의 재조직(再組織)과 유랑기(流浪期) 전에 있었던 위대한 국가, 또는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의 남은 자취(remnant)일 뿐인 제의(cult)와 율법에 대해 말해 주는데, 그것은 외세(外勢)에 정복당하면서도 끊임없이 투쟁하는 자취인 것이다. 성경의 역사서들은 대부분 그 속에 그려진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뒤에 기록되곤 했다.

 

지혜서

흔히 지혜서라고 불려지는 성경책으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함께 ‘예수의 지혜’, 이클리지애스티쿠스(Ecclesiasticus)라고도 하는 ‘시락의 아들’, 그리고 이른바 외경에서 온 ‘솔로몬의 지혜’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랑기의 어떤 때에 비롯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욥기는 고난을 당하는 이가 자신을 위해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 분 자신이 말로 다할 수 없으며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당신의 위엄을 스스로 지키고 계심과 맞닥뜨리면서, 그저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42:6)라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변론하는 의로운 고난의 이야기이다. 정교회에서는 이 책에서 가려 뽑은 구절들이 성대주간의 첫 며칠동안 읽혀지는데, 이는 그 본문들이 신자들이 부딪히는 가장 심오한 문제, 곧 ‘고난을 당하는 순결하신 분’의 가장 완전한 모형이실 뿐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써 고난을 받으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완성을 이룬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불려지는 잠언서는 비록 학자들이 어떤 부분들을 더 늦은 때에 쓰여진 것으로 여기고, 지금과 같은 형태는 바빌론 유랑기 이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주장할지라도 의심할 바 없이 솔로몬 시대에 비롯된 것이다. 잠언은 현명하고 의로운 사람에게 마땅한 행위들에 관한 짧은 금언(金言)들이다. 그것은 사순대재 동안 평일의 만과 때 전부 읽혀진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화되고 육화(肉化)되셨기 때문에, 잠언에서 가려 뽑은 구절들또한 교회의 많은 축일 전야식에서 읽혀진다.

 

전도서는 이 세상의 삶이 허무(虛無)한 것과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사람으로서 마땅한 의무’인 그 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혜임을 담담하게 명상하고 있는 책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설교자인 솔로몬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학자들은 전도서를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3세기쯤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 가르침 속에는 이방국가들 사이에서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이 지녔던 그리스적인 정신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그리스적인 정신과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 신약시대의 바로 전 같은 시기(기원전 3세기)에 비롯된 ‘예수의 지혜’와 ‘시락의 아들’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 속에서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난다. 방금 말한 세 권의 책 가운데서도 마지막에 쓰여졌으리라고 여겨지는 ‘솔로몬의 지혜’만이 정교회에서 예식문으로 읽혀진다.

 

‘노래들 중의 노래’, ‘찬가들 중의 찬가’라고도 불려지는 솔로몬의 아가(雅歌)는, 학자들에 따르면 어느 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가나안의 혼인 노래이다. 정교회의 전통 속에서는 아가가 사람의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신비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나 끌레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같은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교 성인들은 아가서가, 하느님과 그 분의 백성 사이의 상호관계를 혼인한 부부사이의 사랑의 관계처럼 보는 성경적 전통과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호세아, 예레미야 2-3장, 에페소 5장, 묵시록 21-22장을 보라.) 비록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혼인을 축하하기 전에 신부가 교회 안에 있는 신랑에게 다가갈 때 아가의 몇몇 구절이 불려지긴 하지만, 아가서는 정교회의 의식적인 예배에서는 전혀 읽혀지지 않는다.

 

전문적으로 말해서 비록 ‘지혜’의 책은 아니지만, 여기서 이른바 외경에서 가져온 ‘므나쎄의 기도’에 대해서 말해야겠다. 정교인에게는 성경의 한 부분인, 유다왕의 이 회개하는 기도문은 정교회의 대만과(大晩課) 예배에 들어있다.

 

시편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게 영감받아 쓴 노래이다. 비록 시편의 많은 부분들이 분명히 훨씬 후대(後代)의 다른 작가들에게서 비롯되었을 찌라도, 전통적으로는 그것을 ‘다윗의 시편’이라고 부른다. 시편의 목록과 어법은 여러 다양한 경전 전통 속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정교회는 시편집의 70인역본을 따르며, 이런 까닭으로 해서 그 번호와 드물지 않게는 정교회의 예배서에 있는 어떤 시편의 본문이 히브리어에서 옮긴 성경의 그것과 다르다.

 

정교회에서는 전체 시편집이 스무 단락(sections)으로 나뉘며, 모든 예배일과를 다 실행하는 수도원과 교회에서는 그것들이 매 주(週)마다 불려진다. 여러 시편과 시편의 여러 구절들은 정교회의 모든 예배 의식에서 쓰인다.(제 2권 예배를 보라)

 

사실상 하느님 앞에 있는 인간 영혼의 모든 상태가 시편에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곧 찬양과 감사, 축복, 기쁨, 간청, 회개, 비탄, 물음 그리고 심지어는 불평조차도 담겨있다. 많은 시편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적인 의식과 다윗 왕의 왕권에 그 촛점이 맞춰져 있다. 다른 시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행동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시편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진술들을 들려주고 있는데, 특별히 구세주께서 오실 때의 사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시편 8편을 인용하시는 것이나, 당신 자신의 신비스러운 신성과 관련해서는 시편 110편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채로 당신의 십자가 처형과 세상의 궁극적인 구원이 그려진 시편의 말씀들을 크게 외치실 때는 시편 22편을 말씀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마태오 21:16, 22:44, 27:46을 보라)

 

정교회에서는 모든 시편들이 그리스도와 영원한 구원을 이루기 위한 그 분의 선교라는 점에서 볼 때 가장 깊고도 참된 영적 뜻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이를테면 왕에 대해 말하는 시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사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관련해서 교회 안에서 불려진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노래하는 시편들은 온 세상을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불려진다. 전투에서 적들에 대한 승리를 요청하는 시편들은 오직 하나인 진짜 적, 곧 악마와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숴 뜨리신 그의 온갖 사악한 짓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빌론은 사탄의 왕국을 가리키고, 예루살렘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의인의 죄없는 고난을 슬퍼하는 시편들은 주님 자신과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날에 온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살아날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의 탄원으로서 불려진다. 그러므로 시편집은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을 위해 거룩하게 영감 받아 쓰여진 기도와 예배의 노래책으로서 영원히 남아 있으며, 무엇보다도 특별히 그 분과 관련될 때 시편이 가장 깊고도 성스러운 뜻을 갖게 되는 분이신 구세주(Messiah)에게 속한 모든 이들을 위해서 남아있다.

 

시편집의 예전적 구분

(까띠즈마[Kathisma])

 

1. 시편 1-8 11. 시편 78-85

2. 시편 9-17 12. 시편 86-91

3. 시편 18-24 13. 시편 92-101

4. 시편 25-32 14. 시편 102-105

5. 시편 33-37 15. 시편 106-109

6. 시편 38-46 16. 시편 110-118

7. 시편 47-55 17. 시편 119

8. 시편 56-64 18. 시편 120-134

9. 시편 65-70 19. 시편 135-143

10.시편 71-77 20. 시편 144-150

 

예언서

성경에는 비록 반드시 그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예언자들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열 여섯 권의 책이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영감으로 말미암아 말하는 사람이며, 그저 둘째로는 장래의 일에 대해 미리 말하는 사람을 가리킬 따름이다. 예언서들 가운데 네 권은 이른바 대예언자라고 불리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서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한 명 이상의 저자에 의한 작품이라고 믿고 있다. 이사야서는 기원전 8세기 중엽으로부터 바빌론 유배기까지를 포함한다. 이 예언서는 주님께 대한 하느님의 백성의 사악함과 불신앙 때문에 그들에게 닥친 절박한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세주가 오시면 있게 될 하느님의 구속의 때에 이방인들 뿐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에게 임할 그 분의 자비를 예언한다. 6장에 있는 예언자의 유명한 환상은 정교회의 성찬식 기도문에 들어있다. 이사야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책의 첫 부분, 곧 특별히 구원자인 왕이 오심에 관해 말하는 6장부터 12장까지의 예언과 주님의 고난받으시는 종 안에서 이루어질 모든 피조물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 맨 끝 부분의 예언이다. 이사야서 전체가 사순대재 동안 교회에서 읽혀지며, 많은 구절들이 교회의 큰 축일 전야식에서 읽혀진다. 신약성경 안에는 세례자 요한, 그리고 가장 특별히 그리스도 자신과 관련해서 된 이사야 예언의 인용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제 1권 교리와 제 2권 예배를 보라.)

 

예레미야서는 기원전 7세기의 시기를 그리고 있으며, 이사야서처럼 죄를 지은 당신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진노하심을 예언한다. 지독하게 반항적인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서 큰 고초(苦楚)를 겪으며,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까닭으로 해서 끊임없이 학대를 당한다. 예레미야서는 신약에서 많이 언급된다.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구원에 관한 메시아적인 예언은 교회의 축일예배에서 종종 읽혀진다.(이를테면 31:31절 아래 따위) 외경에서 온 ‘바룩(Baruch)’의 책과 ‘예레미야의 편지’는 이 예언서와 함께 정교회의 성경역본에 들어있다.

 

예언자이면서 사제인 에제키엘의 책은 바빌론 포로기에서 비롯된다. 다시 한 번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주님의 영광의 현존과 떠남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면서, 당신 백성의 죄 위에 드리워진 하느님의 정의로운 진노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예언자들처럼 에제키엘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당신의 거룩한 영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죽은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에 관한 감동적인 구절은 정교회의 성대토요일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무덤 위로 읽혀진다.(37장 참조)

 

부활절 전야식때 교회에서 읽혀지는 다니엘의 예언은 배교(背敎)를 강요받던 때에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가졌던 신앙심과 관련된다. 학자들은 다니엘서를 구약 가운데 가장 뒤늦게 쓰여진 책 가운데 하나로 여기면서,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의 배경인 바빌론 포로기 훨씬 뒤에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의 말씀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신성한 사람의 아들이 승리자로 오시면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구원이다. 다니엘서가 신약시대에 가까운 때에 쓰여졌으리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 책의 종말론적인 성격, 곧 하느님의 마지막 계시와 모든 창조물에 대한 그 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관련한 종말론적인 의미 때문이다. 다니엘서와 나란히 있으며 비(非)정교인에 의해 외경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세 아이의 노래’는, 그 또한 다니엘서의 한 부분인 ‘수산나’, ‘벨과 뱀’(Bel and the Dragon)이 그런 것처럼 정교회에서는 성경의 진정한 한 부분을 이룬다. ‘세 아이의 노래’는 정교회에서 조과(朝課)의 한 부분이다.

 

이른바 소예언자들의 책 가운데서 아모스와 호세아가 가장 빠른데, 그 책들은 이사야의 첫 부분처럼 기원전 8세기 중엽에 비롯된 것이다. 아모스는 백성들의 부정의(不正義)에 대항하는 하느님의 정의를 강하게 선포한 예언자이다. 호세아는 믿음이 없이 거짓 신들을 좇는 백성들의 불의(不義)한 매춘행위(harlotry)를 궁극적으로 바로 잡으실 하느님의 확고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가서는 짐작컨대 이사야와 같은 시기에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내용도 이사야서와 매우 비슷하다. 미가서에는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예언이 들어있다.(5:2-4)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는 기원전 7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이 예언서들은 예레미야를 본받아서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한 백성에 대한 선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진노를 예언한다. 예레미야처럼 이 예언서들 또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의한 이스사엘의 회복을 예언한다.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그리고 아마도 오바디야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유배(流配)에서 되돌아온 시기에 속한다. 즈가리야는 ‘승리자로서 그러나 겸손하셔서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9:9) 구세주이신 왕의 나타나심에 관한 신탁(神託)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성지(聖枝)주일에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자로서 들어가시는 것과 관련된다. 사제들의 죄악에 대해서 매서운 말라기는 자신이 예언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 전의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늦은 예언자로서,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명백히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에 관한 진술, 곧 ‘정의의 태양이 비쳐와 병을 고쳐줄’(4:2) ‘주님의 크고 무서운 날’(3:1, 4:5)을 예고하고 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사도행전 2장)과 관련해서 성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은 다니엘서의 묵시적(黙示的) 형식에 속하는 데,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구원하시면서 정의를 행하시고 당신 백성의 운명을 회복시키실 “그 크고 두려운 날”에 있을 하느님의 마지막 활동에 대해 말할 때 더욱 그러하다.(2:31-32)

 

요나서는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메시야적인 모습을 보이실 때 있을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미리 알리려고 하는 예언자적인 은유(隱喩)에 매우 가까워 보인다. 요나서는 아마도 유배기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요나서가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야적인 선교를 가리키는 한 표시로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언급될 때처럼, 이 책은 성대 토요일의 부활절 전야식때 교회에서 전체적으로 읽혀진다.(마태오 12:38, 루가 11:29)

 

여기서 서로 다른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 전통에서 온 경전(經典)의 사람과 장소 뿐 아니라 예언자들도 영어로는 그 이름이 서로 다르게 나온다는 점을 말해야만 하겠다. 정교회의 자료들은 대개 그리스어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예를 들자면 엘리야(Elijah)는 엘리아스(Elias)로, 호세아(Hosea)는 오씨(Osee)로, 하바꾹(Habbakuk)은 아바쿰(Avvakum)으로, 요나(Jonah)는 요나스(Jonas) 따위로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 따르면 구약 전체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교회의 삶 속에서 그것의 가장 깊은 뜻과 가장 완전한 성취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말해야만 하겠다.

 

 

 

3장 신약

 

 

복음경

신약성경의 첫 책들은 성 마태오, 성 마르코, 성 루가, 그리고 성 요한에 의한 네 복음이다. ‘복음’(gospel)이라는 말은 글자대로 하면 ‘좋은 소식’(good news), 또는 ‘기쁜 소식’(glad tidings)을 뜻한다. 복음경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들려주고 있지만, 어떤 것도 그 말의 고전적 의미에서 볼 때 전기(傳記)가 아니다. 복음경은 단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쓰여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주님의 부활 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나자렛의 예수님은 정말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성경 전부가 아니라 네 복음만이 언제나 성당 안의 제단 위에 놓인다. 이것은 교회의 생활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살아있는 완성이시며, 성령의 임재(臨在)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인 교회의 한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께 집중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 마태오, 성 마르코, 성 루가의 복음은 ‘공관(共觀)복음’이라고 불려지는데, 이는 그것들이 ‘같은 것을 본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 세 복음은 내용과 형식에서 매우 비슷하며, 경전연구가들 사이에서 엄밀하게 어떤 논의가 있든지 간에 어느 면에서는 본문(本文)상으로도 가장 많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 세 복음은 1세기 후반이 시작되던 어느 땐가 쓰여졌으며, 원래 예수께서 쓰시던 언어인 아람어(Aramaic)로 쓰여졌을 성 마태오복음의 일부분을 빼고는, 성 요한의 복음처럼 각각의 본문들이 그것들이 쓰여진 언어인 그리스어로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각각의 공관복음은 기본적으로 같은 이야기(narrative)를 하고 있다. 모두 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과 갈릴리에서 가르치신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저마다 주님께서 변모(變貌)하신 사건과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뒤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셔야만 한다고 하신 말씀과 더불어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시라는 사도들의 고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각 복음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 대한 설명으로써 끝을 맺는다.

 

성 마르코에 의한 복음

마르코복음은 복음경 가운데 가장 짧으며, 비록 더 논의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아마도 맨 처음으로 쓰여졌으리라 여겨진다. 이 복음을 쓴 사람은 열 두 명의 사도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며, 이 복음이 성 베드로의 ‘전통’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과 사도들을 부르신 것,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병을 낫게 하시면서 이루어지는 그 분의 가르침과 함께 바로 시작한다. 다른 모든 복음들에서처럼 이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시는 신성한 사람의 아들, 곧 하느님의 거룩하신 외아들로서 지닌 당신의 권위있는 말씀과 기적적인 일들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드러나신다.

 

성 마태오에 의한 복음

열 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성 마태오의 복음은 몇몇 사람에 의해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복음이 본래, 교회에 남아있는 그리스어 본문이 아니라 아람어로 쓰여졌다는 의견도 있다. 마태오복음은 구약경전을 통해서 다윗과 아브라함의 아들인 예수님이 참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보여주려고 쓰여졌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마태오복음은 구약을 풍부하게 참조(參照)한다. 이 복음은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예수님의 족보와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동정녀로부터 나신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과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과 설교하시고 일하신 것들을 말한다.

 

마태오복음은 이른바 ‘산상(山上)설교’(5-7장)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길고도 가장 자세하게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교회에서 구복단(九福段 beautitudes))과 주기도문처럼 예전적인 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성 마태오복음의 본문이다. 오로지 이 복음만이 부활하신 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는(28:19) 주님의 명령을 담고 있다.

 

성 루가에 의한 복음

열 두 사도 가운데 하나는 아니지만 초기의 제자들 가운데 한 분이시고, 성 사도 바울로와 함께 일함으로써 잘 알려진 내과의사인 성 루가의 복음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써 보내 드리는 것”(1:1-4)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성 루가가 데오필로(Theophilus)라는 어떤 분을 위해 쓴 사도행전과 함께 이 복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와 초기 기독교에 관한 가장 완전한 ‘역사’(歷史)를 이룬다.

 

정경(正經)에 속하는 네 권의 복음경 가운데 홀로 루가복음 만이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온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 루가에 의해 기록된 이들 사건의 출처(出處)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참된 삶과 가르침을 진정으로 증거하는 것으로서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경전’(canon)이라 불려지는 네 복음에 덧붙여서, 교회가 믿을만하고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과 특히 그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말해주는 다른 많은 문서들이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있었음을 밝혀야만 하겠다. 이들 문서들은 종종 ‘외경적’(apocryphal [구약의 이른바 외경{外經 apocrypha}과 혼동하지 말 것.])이라고 하거나, 또는 문자적으로 ‘거짓 문서’를 뜻하는 위경(僞經 pseudoepigrapha)으로 불려진다.

성 루가의 복음은 그 서술(敍述)의 상세(詳細)함이 두드러지며, 특히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큰 관심을 잘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세리와 바리사이파 사람, 잃었던 아들, 거지 라자로(Lazarus)와 부자의 이야기처럼, 부자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큰 자비를 드러내는 비유(比喩) 같은 것은 오직 루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 복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가져오셨고, 계속해서 당신의 고난에 함께 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매우 강한 강조가 담겨 있다.

 

오직 두 사람 가운데 한 제자의 이름만이 나오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Emmaeus)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루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자가 루가 자신이었다는 전통을 낳는다.

 

성 요한에 의한 복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사뭇 다르다. 이 복음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이면서 사도이신 분이 1세기말쯤 자신의 생이 끝나가던 때에 쓴 작품으로서, 의심할 바 없이 가장 늦게 쓰여진 복음이다. 부활절 밤의 성찬예배때 교회의 성구집(聖句集 lectionary) 시작부분에서 맨 처음 읽혀지는 것이 바로 이 복음인 것처럼, 대부분의 정교회 성경역본에는 이 복음이 다른 복음에 앞서서 인쇄되어 있다.

 

요한복음은 나자렛의 예수님을 구약에 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 곧 ‘한 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으시며’, ‘모든 것이 생겨나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과 같은 분으로 본다.(1:1-3) 이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게 하시며,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은총와 진리의 충만함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을 주신다.(1:14절 아래)

 

머리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사도들을 부르신 것을 설명하는 이 복음의 첫 장부터,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면서 주님이신 하느님의 외아들로 나타난다. 복음 전체를 통해서 그 분은 또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모세와 예언자들과 시편의 주님(Yahweh)과 함께 ‘나는 ...이다’(I AM)라는 신성한 이름을 받으시면서 구약의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여겨진다.(제 1권 교리를 보라.)

 

머리말을 따른다면 요한복음은 두 개의 주된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분은 이른바 ‘이적들’(signs)의 책으로서, 예수님을 메시야와 주님으로 그리는데 기적들(miracles)이 얼마나 중요한 뜻을 갖는가 하는 자세한 ‘해설’과 함께 수 많은 기적들을 적고 있는 부분이다.(2장-11장) 거의 모든 ‘이적들’이 물과 포도주, 빵과 빛, 민족들의 구원과 회당으로부터의 분리,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 죽은 이들의 부활 등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깊은 영적, 성례전적 뜻을 담고있기 때문에, 때때로요한복음은 세례의 성례전적 신비와 성령의 선물과 성찬예배를 통하여 교회의 삶 속으로 새로이 들어온 이들을 위한 ‘신학적 복음’으로서 특별히 쓰여졌다고 여겨진다. 어쨌든 뒷부분에 나오는 당신 자신과 성부 하느님과 성령, 그리고 당신을 믿는 무리들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긴 진술(陳述)뿐 아니라 ‘이적들’의 책에 담긴 내용으로 말미암아, 사도이면서 복음작가인 요한은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신학자’라는 칭호를 들으면서 존경받아왔다.

 

요한복음의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세상을 위한 그 수난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11장-21장) 여기,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긴 말씀 속에서 가장 분명하고도 깊이 있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works)에 대한 교리가 설명된다. 방금 말했던대로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말투로 당신 자신과 성부 하느님, 성령님, 그리고 당신을 믿는 이들의 모임을 관련시키신다. 그 분은 당신보다 더 크신 성부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시고, 하느님의 일을 이루시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느님을 증언하기 위해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그 분께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당신의 것이 되는 이들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난이야기는 공관복음의 것과 조금 다르며, 이같은 경우 많은 이들에 의해 어느 정도 명료화(明瞭化)나 수정을 거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복음 안에만 적혀져서 전해진 부활이야기도 있다. 이 복음의 마지막 장은 전통적으로, 주님의 수난 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뒤 잃게된, 사도 공동체에 대한 성 사도 베드로의 지도력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확증하기 위해 이 복음의 첫 끝맺음말 뒤에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성 사도 베드로에 대해서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불신(不信)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보충(inclusion)이었을 수도 있다.

 

교회의 성화(聖畵 iconography) 속에 흔히 표현된 전통이기도 한 정교회의 전통 속에서는 마태오를 사람, 루가를 수소(ox), 마르코를 사자, 그리고 요한을 독수리와 연결짓는 가장 고전적인 해석과 함께, 네 복음이 사자, 수소, 사람, 독수리로 대표되는 성경적 묵시록(黙示錄)의 ‘네 가지 생물’의 형상(images) 속에서 상징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에제키엘 1:10, 묵시록 4:7) 네 복음은 모두 함께, 그러나 제각기 독특한 문체(文體)와 형식을 지닌 채 정교회 경전의 중심으로서 영원히 남아있다.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1세기의 끝 무렵,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에 대해 데오필로에게 쓴 성 루가의 역사책 가운데 둘째 권으로서 쓰여졌다. 이 책은 주님의 승천과 유다(Judas)를 대신하여 열 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마티아(Matthias)를 뽑은 이야기로써 시작한다. 그리고는 약속된 성령께서, 부활하신 구세주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복음을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힘을 불어넣으시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오셨던 오순절(五旬節) 날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 뒤따른다.

 

사도행전의 처음 여러 장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최초로 시작되던 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도들의 사역(使役)을 통해서 세워지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세례와 함께 성령을 선물로 받고, 계속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2:42)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친 첫 순교자 스데파노 보제(補祭)의 순교에 대해 기술(記述)하고 나서, 사도행전은 박해자 사울이 열성적인 사도 바울로로 회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음으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방인들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게 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는 성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첫 선교여행에 대한 설명과, 그 당시 모든 유다계 그스도인들이 지키고 있던 모세의 법과 관련하여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조건들을 확립한 첫 예루살렘 공의회가 그려지고 있는 유명한 15장이 뒤따른다.

 

사도행전의 나머지 절반에서는 성 사도 바울로가 시리아와 시실리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와 그리이스로 가고, 다시금 에페소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선교여행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나서 성 바울로께서 예루살렘에서 붙잡히신 것과 그 곳의 당국자(當局者)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신 것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은 성 바울로께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신 것에 대해 적고, 성인께서 “거기에서 만 이년 동안 지내면서” 자신이 붙잡혀 있는 집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아주 담대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30-31)는 말로써 끝을 맺는다.

 

사도행전은 부활절로부터 오순절에 이르는 동안 교회예식의 사도적인 성구집을 이룬다. 또한 거기에서 가려 뽑은 성구들이 이를테면 성 스데파노의 축일과 같은 교회의 또 다른 축일에서 읽혀진다. 또한 성 대금요일에 그리스도의 무덤(에삐따삐오?) 위로, 그리고 사제의 장례식 전날에 밤을 새우면서 돌아가신 분의 몸 위로 사도행전을 읽는 것이 교회의 관습이다.

 

성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

서신(書信 epistles)이라고도 불리면서 성 사도 바울로가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열 네 편의 편지는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거룩한 경전 속에 포함된다. 이제 영어성경에 표준적으로 인쇄되고 교회의 전례력에서 읽혀지는 순서를 따라서 각각의 편지에 대한 해설을 할까 한다.

 

로마서

로마서는 1세기의 50년대 말쯤에 성 바울로께서 고린도에서 써보낸 것이다. 이 편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성 바울로의 교리적인 가르침에 대해, 가장 형식을 잘 갖추면서도 세밀하게 그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서는 주의깊게 연구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경전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편지에서 성 사도 바울로께서는 비신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쓰고 있다. 성 사도께서는 한 편으로 구원이 믿음과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교리를 열렬히 변호하시면서, 다른 편으로는 모세의 법이 지닌 효력과 거룩성을 지지하고 있다. 성 사도께서는 세례와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 힘있게 말씀하신다. 그 분은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큰 겸손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시고, 나아가서 큰 연민의 정과 사랑을 지닌채, ‘인성으로는’(9:5) 이스라엘에서 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있는 하느님의 진정한 공동체에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다시 접붙여지기를 요구하신다.

 

편지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행위에 관한 긴 권고이며, 끝으로 성 사도와 이 편지의 실제 기록자인 데르디오(Tertius)를 포함한 사도의 협력자들이 한 번 더 믿음의 확고함을 강조하면서 로마교회의 많은 교인들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안부(安否)와 인사들로써 끝을 맺는다.

 

로마서는 오순절에 이어지는 첫 주간동안 교회의 예전적 성구집 속에서 읽혀진다. 또한 이 편지에서 가려 뽑은 구절들이 이를테면 세례와 견진(堅振)성사 같은 여러 전례식에서 읽혀진다.(6:3-11)

 

고린토 1서

고린토에 있던 첫 기독교 공동체는 그 곳의 내적인 평화와 조화도, 또는 그 교인들의 모범이 될만한 도덕적 행동도 없었다. 1세기의 중간쯤인 50년대에 쓰여져 신약에 들어있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성 바울로의 두 편지는 구체적인 질문과 문제들에 대한 대답인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 뿐 아니라, 저자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많은 변론과 함께 사도께서 적지 않게 꾸짖으시며 책망하고 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있다. 이 편지들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성인들이 아니었으며, 초대교회도 오늘날이나 세계 역사 속의 어느 때에 있었던 교회 못지 않게 어려움이 많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짧은 인사말과 하느님께서 고린토인들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하고 나서 첫 편지는, 교회 안에서 일치하길 바라는 성 바울로의 호소로써 시작한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심각한 불일치와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사도께서는 어떠한 나누임도 있을 수 없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일치하라고 모든 이들에게 촉구하신다.(1-3장) 그리고 나서 그 분은 교회의 일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사도권과 특별히 고린토 교회에 대한 영적인 아버지로서의 권한에 대해 변호하신다.(4장) 다음으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 있는 성적(性的) 부도덕의 문제와 교인들이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법정으로 가서 이교도인 재판관 앞에 서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5-6장) 그 뒤에는 그리스도인의 혼인에 대한 조언과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한 사도의 충고가 이어진다.(7-8장) 그런 다음 사도께서는 당신께서 언제나 물질적으로 자조자립(自助自立)하셨고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았던 사실을 강조하시면서,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사도권을 옹호하신다.

 

고린토의 공동체 안에 있는 분열과 분쟁은 교회의 성찬모임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일반적인 불경(不敬)과 남용(濫用)이 있었고, 각각의 당파가 자기들끼리만 따로이 식사를 하는 곳에서 이같은 일들이 더 벌어지게 되었다. 공동체의 어떤 이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들의 우월성을 가리킨다고 여겼던 것, 예를 들면 이상한 언어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은 성령의 선물( gift)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서 이같은 분열은 교회의 어떤 작은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일어났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유를 혼란과 무질서를 일으키는 데 쓰는 교회의 여성들로 말미암아 생겨난 문제들도 있었다.

 

편지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오며 교회일치의 가장 중요한 실현(實現)이기도 한 거룩한 성찬에 대해 존경심과 분별력을 가질 것을 강조하신다. 그는 모든 이들의 교화(敎化)를 위해 많은 지체(肢體)와 많은 은총의 선물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도 한 교회의 절대적인 일치를 강조하시면서, 여러 가지 영적인 선물들 때문에 교회 안에 일어나는 분열들에 대해 경고하신다. 그는 모든 덕과 은총의 선물들 위에 있는 사랑의 절대적인 수위성(首位性 primacy)과 탁월성(卓越性 superiority)을 강조하시면서, 사랑이 없이는 그 밖의 모든 것이 헛되며 끝내는 무너지고야 만다고 말씀하신다. 사도께서는 명백히 가장 민감한 문제로 나타난 은사(恩賜 gift), 곧 이상한 언어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진정시키시면서, 모든 은총의 선물을 고루 쓸 것과 교회 안에서 무엇보다도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가르침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 그 분은 여성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또 그런 행동을 하라고 호소하신다. 끝으로 사도께서는 모든 일이 “점잖게 또 질서있게”(14:40)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신다.(10-14장)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기독교 신앙과 가르침의 중심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것의 의미에 대한 긴 진술로써 끝을 맺는다. 사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을 호소하시고, 한 번 들르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다시금 강한 믿음과 겸손한 봉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별히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강조하신다.

 

성 바울로의 사랑에 대한 찬가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고린토 1서 13장)

 

고린토 2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성 바울로의 둘째 편지 전체는,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있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에 대해 자세히 열거(列擧)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사도께서는 당신과 신앙 안에서 행하는 당신의 인도(引導)와 가르침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게 반응하는 고린토의 몇몇 사람들을 향해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변호하신다. 그 분은 믿음과 행위에 관한 자신의 권고와 훈계 때문에 교인들이 겪고 있는 ‘아픔’에 대해 변호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말을 들으며 따르라고 요청하신다.

 

성 바울로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그 분이 감당해야만 했던 모든 일에 대한 자세한 기록에 덧붙여서, 둘째 편지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갖게 되는 관계에 대한 사도의 가르침이다. 또한 특별히 눈여겨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경전의 중요성에 대해 사도께서 가르치신 것(3-4장)과 교회의 일을 위해서 돈을 기부(寄附)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신 것(9장)이다.

 

모든 서신들처럼 교회의 성구집(lectionary)의 한 부분을 이루는, 고린토 2서의 맨 끝 맺음말은 정교회 성찬예배의 성찬전문(聖餐典文) 속에서 쓰여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아버지)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고린토 2서 13:13)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인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리스트라(Lystra), 데르베(Derbe), 이고니온(Iconium)과 같은 남(南)갈라디아인들에게 보냈음직한 성 바울로의 편지는 50년대초안티오키아로부터 보내졌다. 이 가장 격렬한 서신 속에서 사도 바울로께서는,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해 받은 갈라디아인들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받는 것을 포함해서 구약의 율법에 있는 제의(祭儀)적인 규정을 잘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복음”(1:6-7 참조)을 좇아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분노와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인들’(3:1)에게 보낸 이 편지의 핵심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것은 곧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는 이들 누구에게나 성령을 주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에 대한 믿음과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성 바울로의 강한 항변(抗辯)이다.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는 육체에 대한 노예, 우주의 자연적인 영(靈)에 대한 노예, 그리고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는 율법의 제의적 규정에 대한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자유가 있다고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참다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6:16)에게는 완전한 자유와 거룩한 자녀의 권리와 새로운 창조가 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5:18)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크리스마스의 성찬예배 때 정교회의 사도경 봉독문이기도 한, 4장의 잘 알려진 구절과 함께 교회의 전례성구집 속에 포함되어 있다.(4:4-7) 이 편지는 또한 세례와 견진성사가 장엄하게 진행될 때 노래로 불려지는 구절들과 한 때 세례예비자들(catechumens)이 교회의 성례전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었던, 교회의 큰 축일 성찬예배에서 부르는 삼성송(三聖頌)을 대신하는 구절을 제공하기도 한다.(제 2권 예배를 보라.)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 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디아서 3:27)

 

에페소서

에페소, 필립비,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성 바울로의 편지들은 60년경(60 A. D.) 로마의 붙잡혀 있던 집에서 쓰여졌다고 보기 때문에 흔히 ‘옥중서신’(captivity epistles)이라고 한다. 초기의 어떤 자료 속에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에페소에 있는’(1절 참조)이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으며,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편지가 모든 교회에 있는 이들을 위한 ‘일반서신’(general letter)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긴 성 바울로의 의도(意圖)는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계획을 이해하고 있”음을 함께 나누고,(3:4)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다.(3:9) 편지의 첫 부분에서 사도께서는 그 ‘심오한 계획’(mystery)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하신다. 그분은 이같은 자신의 과제를 완수하시려고 애쓰시면서, 형용사가 넘쳐나는 긴 문장을 꾸미기 위해 많은 단어를 쓰고 계신다. 산뜻한 개요(槪要)따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래도 말씀의 주된 강조점은 분명하다. 세상이 생겨나기 전,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1:10) 이 계획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같은 하느님의 계획이 맺은 열매는 그분의 자유로운 은총의 선물에 의해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 특히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그 열매는 한 성령과 한 그리스도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1:23) 교회 안에서 주어진다. 몸의 각 부분이 함께 연결되어 조화와 일치 속에서 저마다 적절하게 기능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진리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다다를 때까지’(4:12-16) 자라간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진 채(3:19) ‘주님의 거룩한 성전과... 신령한 하느님의 집’(2:18-22)이 되는 것이다.

 

편지의 둘째 부분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심오한 진리’(5:32)의 숨은 뜻에 대해 똑똑히 설명하신다. 그 분은 건전한 가르침과 사랑, 삶의 참된 전환, 모든 부정(不淨)과 부도덕을 완전히 끝내는 것, 영적인 전투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등을 말씀하신다. 그 분은 교회를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 같은 식으로써 전체적으로 설명하신다. 그분은 모든 이들이 ‘참된 올바름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기를’ 요청하신다.(4:24)

 

에페소서는 결혼성사때 읽는 사도경 봉독문인, 5장의 유명한 구절(5:21-33)과 함께 교회의 전례성구집 속에 들어있다.

 

필립비서

이미 말한대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성 바울로의 편지는 그가 로마에서 감금되어 있을 때 쓰여졌다. 그것은 사도께서 주님 안에서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 곧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1:5) 복음 안에서 신실한 협력자였던 이들에게 보내는 가장 친밀(親密)한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당신의 생(生)이 다해감을 느끼시면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가장 사(私)적인 느낌들을 드러내신다. 그 분은 또한 필립비인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지길(1:9) 비는 기도와 함께, 당신의 “기쁨이요 면류관”(4:1)이라고 부르는 사랑하는 교인들을 격려하고 원기를 북돋으시면서 필립비 교회를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라고 칭찬하시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1:10-11)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교회구조의 발달을 암시(暗示)하는, “교회 지도자들과 그 보조자들”(bishops and deacons 1:1)에 대한 언급(言及) 말고도 필립비서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정교회의 성모님 탄생과 안식 축일에 읽혀지는 사도경이면서 그리스도인들, 특히 러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영적 삶에 큰 영향을 주었던, ‘자기를 비움’(kenosis)에 대한 성 바울로의 유명한 구절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2:5-9)

 

바울로의 다른 모든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필립비서도 교회의 표준 성구집에 들어있다.

 

골로사이서

이미 말한대로 로마에서 쓰여진 골로사이서는 골로사이(Colossae)에 있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어떤 가르침에 맞서서, 참된 그리스도교 복음으로 그 곳의 교인들을 가르치려는 분명한 의도(意圖)를 갖고 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와 천사숭배(angel worship) 같은 것들이 골로사이 교회 안으로 슬며시 들어간 듯하다.

 

영지주의는 여러 형태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물질의 선(善)이나 육체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그러므로써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진짜로 성육신하셔서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부정했던 그리스도교 초기의 이단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적 신비주의에 의해서 신성(神性)의 비의(秘意)를 알게 해 준다는 이원론(二元論)적이고 정신주의적인(spiritualistic) 철학의 한 형태로 만들었다. 하나의 단어로서 ‘그노시스’(Gnosis)는 지식을 뜻한다.

 

골로사이서에서 성 바울로는, 골로사이인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게 되기를”(1:9) 참으로 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는 정말로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2:3)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복음의 참된 핵심은 그리스도, 곧 ‘만물이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만물이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게 하신 분(1:16)의 인성(人性)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2:9) 구원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가장 실재(實在)적인(real) 방식으로써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통해서이다. 이런 구원은 세례를 통하여, 바로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1:24, 2:19)에 주어진다.

 

그래서 사도께서는 골로사이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곧, 천사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개선의 행진을 하”시면서(2:15) 모든 천사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계시다고 강조하신다. 그러면서 “헛된 철학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들어서 전해 준 것이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은 아닙니다”(2:8)라고 경고하신다. 또한 그분은 골로사이인들에게 “겸손한 체하거나 천사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이 받을 상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들은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헛된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2:18)라고 경고하신다.

 

골로사이서의 내용과 문체는 에페소서와 매우 비슷하다. 편지의 교리적 가르침에 이어서 그것이 신자들을 위해 갖는 영적 의미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분을 온전히 섬기며 사는 삶을 위한 도덕적 권고와 함께 하나하나 똑똑히 설명된다. 성 바울로의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골로사이서도 교회의 전례예식에서 차례로 읽혀진다.

 

데살로니카서

일반적으로 데살로니카에 보낸 성 바울로의 두 편지는 사도의 여러 서신들 가운데 맨 처음으로 쓰여진 것일 뿐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가장 일찍 쓰여진 문서로 여겨진다. 이 편지는 아마도 40년대 말, 데살로니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재림(再臨)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련해서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겨났다는 디모테오(Timothy)의 보고를 듣고 고린토에서 써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데살로니카 1, 2서 모두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되풀이하여 똑같은 가르침을 펴신다. 사도께서는 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을 굳세게 가질 것과 주님께로 향한 끊임없는 사랑과 봉사,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닥친 박해와 재판 앞에서 형제애(brethren)를 잃지 말 것을 강조하신다. 그분은 믿음을 거스르는 온갖 사탄의 공격이 끝나고 나면 주님께서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데살로니카 1서 5:2) 오실 것임을 단언(斷言)하신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이나 두려움이 없이, 그리고 주님께서 당장 오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몇몇 사람이 빠져버린 게으름이나 태만(怠慢)함이 없이, 계속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 먹도록”(데살로니카 2서 3:12) 해야만 한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관련해서 사도께서는, 주님께서 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데살로니카 1서 4:14)도 모두 그렇게 되리라고 가르치신다.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 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4:16-17)

 

위의 본문 전체(데살로니카 1서 4:16-17)는 정교회의 장례예배때 읽는 사도경 봉독문이다.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두 편지는 교회력에 따른 전례성구집에 들어있다.

 

디모테오서

성 바울로께서 디모테오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들은 ‘사목서신’(pastoral epistles)이라고 불려진다. 주로 이 서신들에 나타나 있는 발전된 교회구조의 모습 때문에 현대의 몇몇 학자들이 이 서신들을 2세기초의 문서로 여기긴 하지만, 정교회의 전통은 이 서신들이 1세기의 60년대초에 성 바울로께서 로마의 잡혀있던 집에서 직접 써보낸 편지라고 주장한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편지는 서로 비슷한 내용이며, ‘(사람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인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디모테오 1서 3:15) 가르쳐 주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디모테오 1서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에페소에 있는 자신의 “참된 믿음의 아들”(1:2)에게 “훌륭한 싸움을 싸우시오. 믿음과 맑은 양심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1:18-19)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교회가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2:1)과 특별히 어렵고 참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쉬운 때에 “참된 교훈”(4:6)이나 “건전한 말씀”(6:4)은 잘 보존되고 널리 전해져야한다고 강조하신다. 편지에서 사도께서는, ‘원로들이 안수할 때’(4:14) 선물로 받은 직무를 등한히 하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전문적이고 개인적인 특별한 충고를 당신의 협력자인 디모테오에게 베푸시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믿음과 행위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디모테오 1서의 많은 부분이 주교(主敎)와 보제(補祭), 그리고 사제(司祭)가 사목(司牧)의 직무를 행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자세히 그리고 있고, 과부와 노예에 관련된 특별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교인들을 돌보는 사목과 관련된 규칙들은 정식으로 교회법의 규정들 속에 통합된 채 정교회 안에 남아있다.

 

디모테오 1서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정교회에서 영성체 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의 일부가 된 성 바울로의 죄에 대한 고백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디모테오 1서 1:15)

 

디모테오 2서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다시금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1:2)에게, “내가 그대에게 안수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시오”(1:6)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그분은 ‘불경(不敬)한 수다’와 ‘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2:14, 16)을 절대 피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하는 더러운 마음과 겉치레뿐인 신앙의 소유자들에 의해 복음이 공격을 당하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 안에는 ‘건전한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하신다.(3:1-8) 첫 편지에서처럼 사도께서는 성경말씀을 굳게 붙잡고 지키면서 살아나가라고 특별히 말씀하신다.(3:15)

 

이 편지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2:15)는 성 바울로의 표현은 주교들을 위한 정교회의 정식 전례기도문이 되었다.

 

디도서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 보낸 성 바울로의 편지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편지의 내용을 짧게 줄인 것이다. 사도께서는 교회의 주교가 갖추어야 할 도덕적 덕목들을 간략히 정리해 말씀하시고, 사목자는 언제나 ‘건전한 교리에 부합(符合)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1:9, 2:1)고 강조하신다. 디도서는 교회의 지도자와 교인들이 마땅히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가를 보여준다.

 

디도서에 있는,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2:11-3:7)라는 구절은 신현(神顯)축일에 읽는 사도경의 본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각각의 사목서신은 사순대재가 시작되기 바로 전의 교회력에 나오는, 긴 사도서신의 성구집 속에 들어있다.

 

필레몬서

로마의 감옥에서 필레몬에게 써보낸 편지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당신의 ‘친애하는 동료’(1:1)에게,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교우로서... 인간적으로 보든지 주님을 믿는 신앙의 견지에서 보든지”(16절)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신의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Onesimus)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호소하신다. 사도께서는 “그대가...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 주시오”(17절)라고 말씀하시고,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에게 빚진 것이 있다면 당신께서 갚으실 것이라고 제안하신다.

 

히브리서

사실상 현대의 성서학자들 가운데 성 바울로가 히브리서의 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서신의 진짜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은 교회전통의 초기부터 있었고, 거기에는 이 서신의 착상(着想)과 교리는 분명히 성 바울로의 것이지만 실제 저자는 아마도 성 사도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는 대체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 편지는 1세기 후반에 쓰여졌으며, 교회에서는 보통 ‘성 사도 바울로의’ 것으로서 읽혀진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으로써 시작하며, “예전에는...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느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 주시기로 하셨”다고 주장한다.(1:1-2)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1:3)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신앙의 (사도요) 대사제”(3:1)이시며 “양들의 위대한 목자”(13:20)로서,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12:2)로서 사람이 되셨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도록(2:9) 그분을 보내셨다.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실 수 있으십니다.(2:14-18)

 

히브리서의 주된 주제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구약에 있는 사제들의 희생제사를 비교하는 것이다. 구약의 사제들은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동물들을 계속 잡아 희생제사를 드리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스스로를 완전하고 영원한 희생제물로 바치셨고,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9:24)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 아직은 실체가 아닌(10:1) 율법아래 있는 레위인들의 제의적인 사제직 뿐 아니라 구약의 멜기세덱(Melchizedek)이라는 신비스러운 인물 속에서 미리 그려졌던 분, 곧 하느님의 한 분 뿐인 완전하신 대사제의 온전하고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희생제사이다.(창세기 14장, 출애굽기 29장, 레위기 16장, 시편 110편을 보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신자들은 죄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겪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시려고’(12:10) 성령을 주신 하느님께 인도되고 훈련을 받아서 완전하게 된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는(7:19) 율법의 의식(儀式)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믿음(11:6)에 의해서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

 

사순대재 동안에 있는 성찬예배 때 정교회에서 읽혀지는 히브리서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차지했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경건한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사실 하느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십니다.”(12:28)라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저자의 호소로써 끝을 맺는다. 이 서신은 또한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13:8)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 사이에 사랑과 믿음, 정결, 관용, 힘, 복종, 기쁨이 넘치기를 요청한다.

 

성 사도 야고보의 편지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야고보의 편지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첫 주교이셨던 ‘주님의 형제’에 의해서 쓰여졌다.(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1:19을 보라.) 이 편지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하는 듯한, “사방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보내진 것이다.

 

야고보서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굳센 믿음을 갖고서, “자유를 주는 법”(2:12)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법”(1:25)이 요청하는 일들을 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 편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세의 법이 요구하는 제의적인 일들로부터 자유로와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선한 일을 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율법에도 전혀 얽매어 있지 않다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을 갖고있다. 따라서 저자는, 신자가 자신의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선한 일들을 행하지 않고도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에 반대하는 뜻을 매우 분명하게 적고 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지만 나에게는 행동이 있소. 나는 내 행동으로 내 믿음을 보여 줄 테니 당신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오. 당신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이여,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2:14-24)

 

이 편지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주장하는 선한 행위들 가운데 으뜸은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전쟁과 부정의(不正義)의 원인인 불공평과 이기적인 탐욕이 없이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일이다.(2:1-7) 저자는 탐욕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원수”가 되게 만들고, ‘이 세상과 짝이 되게 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4:1-4) 저자는, 부자들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착취(搾取)하여 얻은 “사치와 쾌락” 때문에 그들에게 “닥쳐 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라고 말한다.(5:1-6)

 

부(富)에 대한 경멸과 함께 야고보께서는, “온 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면서 자기의 형제를 거슬러 뽐내고, 비방하고, 저주하고, 욕설을 퍼붓고, 거짓말하고, 나쁘게 말하는 데 쓰는 “불”이요 ‘우리 몸의 한 작은 부분’인 ‘혀에 재갈을 물려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서 가르치신다.(3:1-12)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1:26-27)

 

‘모든 선한 것과 완전한 것은 위에서 빛의 아버지이신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나니’(1:17) 라는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정교회 성찬예배의 마침기도 가운데 한 부분이 되었다. 야고보서는 또한 병자를 위한 성유성사때 읽는 첫 서신 봉독문을 제공하기도 한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기쁜 사람은 찬양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5:13-16, 제 2권 예배를 보라.)

 

성 사도 베드로의 편지들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은 성 베드로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두 편지를 실제로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드로 1서는 1세기 말에, 그리고 2서는 2세기의 전반기에 쓰여졌다고 여긴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은 편지 자체의 증언들을 유지하면서, 이 편지들이 그리스도의 수(首)제자께서 1세기 후반에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에 ‘바빌론’(곧, 초대교회가 로마를 일컬으던 이름. 베드로 1서 5:13 참조)으로부터 보내신 것으로 여기고 있다.(베드로 2서 1:14을 보라.)

 

베드로 1서는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과 함께 사는 생활 속에서 겪는 고난을 굳세게 견디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며, 어떤 악의나 원한을 품지말고 ‘주님을 위해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복종’하라고 열정적으로 호소한다.(2:11-13)

 

경건(敬虔)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과 권고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2:9)인 교회 전체에 맨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으로는 하인들,(2:18) 남편과 아내들(3:1-7)에게 주어지며, 그리고는 ‘같은 원로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인 저자가 원로들에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며 부정한 이득을 탐내서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모범이 되십시오.”라고 요청한다.(5:1-4)

 

편지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사이의 유비(類比)가 계속 나타난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 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 왔습니다.(2:20-25)

 

베드로 2서는 때때로, 세례를 받아 새로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게 된 이들에게 행한 설교라고 여겨진다. 죽기 전에 저자는 하느님께서 부름받은 이들을 위해 하신 것과 그로써 그들이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1:3-4) 된 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분발케 하려고 한다.(1:13, 3:1) 저자는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과 “피를 흘리셔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게 함으로써 선택받은 이들을 곁길로 이끄는 “거짓 예언자들”과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과, 그로써 마치 “개는 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는 몸을 씻겨 주어도 다시 진창에 뒹”구는 것처럼 선택받은 이들이 죄와 무지의 생활로 되돌아 갈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2:1-22, 3:1-7) 저자는 구약과 성 바울로의 서신같은 거룩한 경전을 곡해(曲解)하는 일에 대해 특별한 경고를 하면서, “무식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 곡해하듯이 그것을 곡해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불러 들이고 있”다고 말한다.(3:16, 1:20)

 

베드로 2서 3장은 때때로, 세상의 끝날에 하느님께서 창조물들을 완전히 파괴하실 것임을 가르치는 것으로 잘못 해석된다. 정교회의 해석은 “주님의 날”에 ‘불타 없어지고 녹아 버릴’ 것은 오로지 죄와 악이며, ‘의인들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께서 맨 처음 만드신 것과 같은 ‘아주 좋은’ 세상일 것이나, 그것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에 반(反)하는 모든 것이 정화되고, 새롭게 되고, 제거된 세상일 것이라는 것이다.(3:8-13 제 1권 교리를 보라.)

 

그리스도의 변모하심에 관한 베드로 2서의 회상(回想)은 주님의 변모 축일에 읽는 서신의 봉독문이다.(1:16-18) 성 베드로와 바울로의 축일 전야식에서 읽혀지는 베드로 1서의 구절들과 함께, 두 편지에서 따온 본문들은 교회의 성구집 속에서 발견된다.

 

성 사도 요한의 편지들

성 요한의 세 편지는 제 4복음(요한복음)을 쓴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서 쓰여졌다. 이 편지들은 1세기말에 쓰여졌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꾸고 그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으로” 정말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며, 그로써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부인하는 이단적인 “그리스도의 적”들에 맞선 열렬한 논증(論證)을 전반적인 주제로서 행하고 있다.(요한 1서 2:22, 4:3, 요한 2서 7절)

 

요한 1서는 현존(現存)하는 것 가운데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장 단순하고 깊이 있게 설명한 것으로 꼽힌다. 성 삼위일체, 그리고 하느님과 사귐으로써 진리와 사랑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이 편지의 명료(明瞭)한 해설은 그것을 읽는 누구라도 어려움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해 먼저 연구를 시작하고, 특별히 성경에 대해서 그 다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요한 1서는 전체적인 내용이나 문체에서 가장 비슷한 성 요한의 복음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한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1:1-4)

 

요한 1서는 예수께서 참으로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2:2)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또 그분의 아버지와 친교를 나누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된다.(1:5-2:12)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3:1, 5:1)로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간다.(2:6) 그들은 성령의 기름부음(chrisma)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영감에 의해 진리를 알게된다.(2:20-26) 그들은 그 첫째이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인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럼으로써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은 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께서 내재(內在)하심을 누린다.(2:24-3:24)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4:7-16)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며(4:20)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2:9-11)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살인자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3:15)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한다.(5:19, 2:15-17) 요한 1서는 교회성구집의 일부를 이루며, 특별히 가려 뽑은 구절들은 성 사도 요한의 축일에 읽혀진다.

 

요한 2서는 명백히 하느님의 교회와 그 신자들을 뜻하는 “선택받은 귀부인과 그 자녀들”(1절)에게 보내진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의 계명이 강조된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속이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수고해서 얻은 것을 잃지 말고 상을 남김없이 받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느님을 모시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을 함께 모시는 사람입니다.(6-9절)

 

요한 3서는 어떤 가이오(Gaius)라는 이에게 보내는 것인데, 그의 “진실한 생활”(3절)에 대해 칭찬하면서 그로 하여금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11절)고 재촉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내 자녀들이 진리를 좇아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4절)라고 쓰고 있다.

 

성 사도 유다의 편지

성 유다의 편지를 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Jude)”가 열 두 명의 사도들 가운데 하나이고 “가리옷(Iscariot) 사람이 아닌”(요한 14:22) “야고보의 아들 유다(Judas)”(루가 6:16, 사도행전 1:13)인지 아닌지는 이제껏 의문으로 남아있다. 교회의 전통 속에서는 흔히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 것으로 여겨져왔다.

 

성 유다의 편지는 저자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쓸 필요가 있음을 발견하여’ 쓴 일반적인 서신으로서, 그는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분이 힘써 싸우라”고 호소한다.(1-3절)

 

하느님을 배반한 몇 사람이 몰래 여러분 가운데 끼어 들어 왔습니다. 그자들은 우리 하느님의 은총을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또 우리의 오직 한 분이신 지배자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로서 이미 오래 전에 단죄를 받았습니다.(4절)

 

그 가운데 몇 사람쯤은 신자들이 ‘죄악의 불구덩이에서 끌어 내어’(23절) 구원할 수도 있을, 이런 ‘조롱하는 자들’은 “자기 육체를 더럽히며 하느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스러운 천사들에게 욕설을 퍼붓”는(8절)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에 들어오긴 했지만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본능적인 욕정을 좇아서 살면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다.(18-19절)

 

유다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맞서서 싸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한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고귀한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20-21절)

 

편지에서 특별히 관심을 끌며 때때로 교회에서 읽혀지는 구절은 대천사 미가엘(Michael 9절)과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자기가 사는 곳을 버렸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한 사슬로 묶어서 그 큰 심판의 날까지 암흑 속에 가두어 두셨”다는, 악한 천사에 대한 진술이다.(6절)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 유다의 편지에는 묵시적인 음조(音調)가 결정적으로 배어있다.

 

묵시록

드러난 것을 뜻하는 ‘묵시록’(Apocalypse)이라고 불리고 또한 ‘성 요한의 계시’라고도 불리는 ‘계시의 책’(Book of Revelation)은 전통적으로, 나중에 제 4복음(요한복음)과 편지들을 쓴 주님의 제자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1세기 후반의 중간쯤에 그 기원을 둔다.

 

성 요한은 “파트모스(Patmos)라는 섬”에서 환상(vision)을 보았다. 그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곧 “주님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편지를 썼다.(1:4-10) 일곱 교회에 보낸 말씀들은 각각 특정(特定)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고 있다.(2장-3장)

 

계시의 책에 있는 일곱 편지에 이어서 사도께서는 하느님께서 하늘의 옥좌에 앉으셔서 천사들, 곧 “네 생물”과 “원로 스물 네 명”으로부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 하는 찬양을 끊임없이 받고 계신 환상을 기록하고 있다.(4장)

 

그리고 나서 일곱 봉인(封印)과 일곱 천사의 예언이 나오고, 다음으로 ‘용’과 싸우는 ‘태양을 입은 여인’,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의 환상이 뒤를 잇는다.(12장) 그 뒤에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모습이 그려진다.(13장) 그리고는 어린 양,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이들과 함께 “분노가 담긴 대접(bowls)”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가져와 쏟는 천사들의 환상이 나타난다.(14-16장) 다음에는 “대바빌론”의 멸망에 관한 마지막 예언과 함께 “사악한 창녀”의 환상이 나온다.(18장) 계시의 책은 마지막으로 구원의 놀라운 환상을 그리고 있는데, 거기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행복한’ 많은 사람들이 천상의 천사들의 큰 무리 한 가운데서 하느님과 예수님, 곧 주님의 말씀이시고 어린 양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모든 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이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려진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의인들이 영원히 다스릴 것이라고 옛 예언자들이 예언한 하늘의 예루살렘, 곧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의 모습이다.(19-22장)

 

할렐루야!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 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교회)는 몸단장을 끝냈고... (19:6-7)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1-4)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21:5)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거져 마시게 하겠다. 승리하는 자는 이것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21:6-7)

 

초기에 교회의 일부에서는 ‘계시의 책’을 신약의 정경(正經) 안에 포함시키는 일을 조금 망설였다. 이런 망설임의 이유는 명백히 책의 묵시적 상징들을 해석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문서가 사도 요한의 이름을 지니고 있고, 교회의 가르침과 교화(敎化)를 위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록 정교회 안에서 예전적으로 읽혀지지는 않지만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 되었다.

 

특히 성경, 곧 구약의 묵시적 작품들과 유다-그리스도교적 전통의 형상(images)과 상징(symbols)에 친숙하지 않으면 계시의 책을 해석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그 책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통찰력을 제공하는 해석법에 대한 전통적 접근방법이 있다.

 

계시의 책을 해석하는 잘못된 방법은, 거기에 나오는 수많은 환상들을 특수하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사건들과 같다고 보면서 이런 저런 배타적(exclusive) 의미를 그 환상들에 두는 것과 저자가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자료들을 좇아서 쓴 많은 형상들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역사적인 뜻과 보편적인 뜻 모두를 갖고 있다. 그 말씀은 분명하며, 언제나 교회 안에 있어왔고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상황과 관련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역사 속에 있었던 많은 오래된 교회들은 에페소 교회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는 스미르나(Smyrna) 교회와 비교될 수가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아마도 바로 지금 미국에 있는 어떤 교회들이 그럴터인데) 교회들은 라오디게이아(Laodicea) 교회와 같은 판정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일곱 편지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기까지 있을 교회들의 ‘본보기’(prototypical)로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계시의 책의 중심 부분에 나오는 환상과 예언들은 누구보다도, 그런 것들을 이런 저런 역사적 사건이나 사람에다 적용하려는 해석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준다. 만일 이 책의 전반적인 환상과 예언이 ‘하늘의’ 사건과 ‘땅의’ 사건, 하느님과 사람, 선한 힘과 악한 힘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여진다면, 많은 어려움이 분명코 남더라도 어떤 어려움들 또한 곧바로 사라질 것이다.

 

계시의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나 모든 것 위에, 그리고 모든 것에 앞서서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또한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게된다. 거기에는 언제나 어린 양께 속해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그분으로 옷입은 신자들이 있다. 그리고 언제나 쳐부셔야만 하는 ‘짐승들’과 ‘용들’이 있다. ‘사악한 창녀’와 ‘큰 바빌론’은 영원히 멸망되어야만 한다. ‘천상의 예루살렘’은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것(새 예루살렘)이 와서 마지막 승리가 완성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계시의 책에 있는 상징들과 형상들에 보편성과 궁극성(窮極性)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곧 구약에서 이미 드러난 것들에 적용되는 어떤 의미이다. 따라서 이를테면 바빌론의 형상은 하느님을 거슬러서 싸우는 온갖 집단과 사악함, 육욕(肉慾) 따위에 얽매인 모든 인간조직을 나타낸다. 매춘(harlotry)의 형상은 또한 자기를 만드셔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배신하고, 자기의 욕망과 탐욕을 좇아 타락하는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상징적인 숫자들 또한 변치않는 것으로 남아있는데, 예를 들면 7이 완전을 상징하는 것과는 달리 666(13:18)은 완전한 타락을 상징하고, 이스라엘 지파의 수(12)와 사도들의 수(12)를 곱한 결과인 144,000(14:3)은 모든 완성과 구원받은 이들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런 형상들을 통하여 어떤 특정한 지상의 실재(reality)보다도 더 위대한, 보편적이고 영적인 실재 속을 꿰뚫는 깊이가 드러난다. 이 책의 뜻을 파고드는 통찰력은 하느님의 영감과 볼 수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기꺼이 이해하려 하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을 지닌 이들의 정결한 마음에 의해 얻을 수 있다.

 

정교회에서 계시의 책은 매우 큰 예전적 중요성을 갖는다. 정교회의 예배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매우 의식적으로, 계시의 책 속에 드러난 거룩하고 영원한 실재를 모방하려고 해왔다. 교회의 기도와 그 신비스러운 축하는 하늘나라의 기도와 축하를 함께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영감받은 이들, 곧 구원받은 공동체의 믿음깊은 신자들이 천사들, 성인들과 함께 전능하신 성부 하느님께 끊임없는 흠숭(欽崇)을 드린다.(제 2권 예배를 보라.)

 

비록 정교회에서 한 번도 읽혀지지 않을찌라도, 계시의 책은 교회 자신의 참 삶인 거룩한 실재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성령과 신부(교회)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

(주님이신 예수께서)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신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22:17, 20)

 

 

 

4장 구원사

 

 

말씀과 영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영을 통하여 세상을 향해 행동하신다는 것은 성경과 교회의 변함없는 증언이다.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영으로써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셔서, 당신의 말씀에 참여케 하시고 영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신다. 하느님의 거룩한 모든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과 영을 받았다. 신앙의 선조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선포하였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 시편, 구약과 신약의 모든 경전들은 하느님의 영을 통하여 사람에 의해 쓰여지고 해석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경과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영에 의해 사람과 세상 속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행동하신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되는 주장과 그 복음과 삶의 정수(精髓)는 하느님의 말씀께서 나자렛의 예수로서,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세상의 주와 구세주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이 사람의 형태를 취하신 것이다. 그분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인격적인 말씀이시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말씀이시다.(요한 1:2) 그분은 모든 사람이 그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시다. 그분은 신앙의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경전의 형태로 성경 속에서 구체화한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고, 하느님 나라의 임금이시다. 그분은 당신과 함께 그리고 당신을 통하여 성령께서 세상에 오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하느님의 성령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오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믿음과 회개,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에게 오신다. 그분은 오순절(Pentecost)에 사도들에게 임하셨던 영이시고, 또한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계속해서 존재하게 되는 분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살도록, 하느님에 의해서 사람들 속에 불어넣어진 영이시다. 그분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경전을 해석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고 보존하시면서,율법과 예언서들, 그리고 거룩한 경전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으셨던 영이시다. 그분은 교회의 성례전적이고 영적인 삶의 완성을 가능케 하시면서 교회 안에 거하시는 같은 성령이시다. 그분은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계심으로써,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보증과 약속이 되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그분은 어느 날엔가, 곧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현존으로써 모든 창조물들을 완성하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시다.

 

따라서 창조물 전체, 세상의 구원과 영화(靈化), 그리고 우리가 ‘구원사’(salvation history)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영, 곧 교회와 영원한 나라 안에 계시는 성 삼위일체께 의지한다.(에페소서 1:23; 제 1권 교리와 제 2권 예배를 보라.)

 

역사 이전(以前)

성경은 창조 이야기와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시작한다. 비록 성경이 가끔 아담의 창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간의 세대(世代)를 열거하지만,(역대기 1서 1:1, 루가 4:38) 가장 적절한 의미에서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선조이며 ‘인성으로는’ 그리스도의 첫 조상인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된다.

 

창조 이야기,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통치에 대해 신성한 계시를 제공한다. 그 이야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며, 사람은 온갖 만물보다 뛰어나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는 어떻게 악의 기원이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의 가장 완전한 창조물 속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그 창조물(곧, 사람)이 자유롭게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세상에 사악함과 죽음이 생겨났다.(제 1권 교리를 보라.)

 

창세기 1-11장은 의로운 노아(Noah)처럼 약간의 예외를 뻬고는 거의 전반적으로 죄의 기록이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 이전’(pre-history)이라고 불린다. 이 장들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근원(根源)적인 반역과 함께 시작하고,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은 사람의 아들들의 첫 행위에 대해 말해준다. 이 장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과 온 땅이 “너무나 썩어 있”어서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어 있”고, “사람들이 하는 일이 땅 위에 냄새를 피우고 있”음을 보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슬퍼하셨다고 기록한다.(창세기 6:5-12) 그리고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음으로써 “이름을 날려” 보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건방짐을 상징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끝을 맺는다.(창세기 11:4) 결국 민족의 분열과 사람들이 “온 땅에”(창세기 11:9) 흩어지게 되는, 인간의 자만심 가득한 오만함이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구원의 ‘역사 이전’, 곧 죄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근본적으로 ‘대비되는 상징’(counter-symbol)이다. 아브라함이 부르심 받기 전 성경의 이 첫 장들에 나타난 사건들은,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새로우면서 마지막인 계약에 의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오셔서 구원하시는 사건들 속에서 그 적절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아담’(True Adam)이시다. 본래의 아담은 단지 “장차 오실 분의 원형(type)”이었다.(로마서 5:14)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고린토 1서 15:22, 45-49)

 

히브리어의 아담(Adam)이라는 말은 땅을 뜻하는 ‘아다마’(adamah)에서 왔다. 히브리어로 메시아(Messiah)인 그리스도(Christ)는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새 아담이신 것처럼 그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는 새 하와(Eve)이시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참 어머니’이시기 때문인데, 이것은 본래 남자를 ‘돕는 이’에게 주어진 이름의 뜻이다.(창세기 3:20) 성경적 상징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이 구원을 받는 ‘구원의 참 방주’로 그린다.(창세기 6:19, 베드로 1서 3:20-22) 그리고 오순절의 사건은 바벨(Babel)의 비극을 바꾸어 놓는데, 그 때 그리스도의 교회에 임한 성령을 통하여 모든 민족적 분열은 극복되고, “세계 각국에서 온”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하나(unity)가 된다.

이처럼 사람의 죄가 두드러진 역사 이전의 모습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 안에 사는 인간의 의로움과 대비되는 상징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그의 자손들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창세기 12:3)

 

아브라함

정확하게 말해서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Abraham)이라고 이름 지어주신 아브람(Abram)과 함께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첫 조상(patriarch)이다. patriarch라는 말은 ‘족장’(族長), ‘조상’(祖上) 등을 뜻한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과 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신약의 주요 사건들이 미리 그려졌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첫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셨고, 또한 영원히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계약을 맺으셨다.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기 12:1-3, 또한 17:1-8, 22:1-18을 보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첫 조상의 후손으로서 그분 안에서 세상의 모든 민족은 복을 받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시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약속의) 성취가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풀어질 것이기 때문에 온 백성이 당신을 복되다 할 것이라고 노래하신다.(루가 1:55, 또한 루가 1:67-79에 나오는 즈가리야의 노래를 보라.) 신약 전체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갈라디아 3:16)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본보기[典型]이다. 신약은 믿음이 구원받는데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가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창세기 15:6, 로마서 4:3)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위(works)와 일치되어 있었고, 그의 행위를 통하여 표현되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야고보서 2:21-24)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더러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하느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시면서 시험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고 자신을 맡겼다. 그는 스스로 결심하여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산으로 향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멈추시고 이삭 대신에 수양 한 마리를 주시면서,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창세기 22:12)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기 22:18) 라고 약속하셨다.

 

이사악의 희생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첫 조상인 이가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일을 하느님 자신이 직접 하신다는 본래의 상징(sign)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실 때, 어떤 수양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을 대신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제직 또한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미리 그려진다. 그것은 평화의 왕이신 멜기세덱의 사제직이다. 그것은 제물이 빵과 포도주인 사제직이다. 그것은 레위인들의 사제직에 앞서는 메시야의 사제직으로서, 그분은 “멜기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시다.(시편 110:4, 히브리서 5-10장)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또 성서의 다른 곳을 보면, “너는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히브리서 5:5-10)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여러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 오는 아브라함을 맞아 축복해 주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모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째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고 그 다음 살렘왕이라는 칭호는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이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서 영원히 사제직을 맡아 보는 분입니다.(히브리서 7:1-3)

 

신약의 계시 가운데 백미(白眉)인 것, 곧 성 삼위일체의 계시 또한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미리 형상화되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세 천사가 마므레(Mamre)의 상수리 나무 아래 있는 아브라함을 찾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천막 문에서 뛰어 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청을 드렸다.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 떡도 가져 올 터이니 잡수시고 피곤을 푸신 뒤에 길을 떠나십시오. 모처럼 소인한테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그렇게 하여 주시겠소?”(창세기 18:1-5)

 

아브라함은 그들을 주님(Lord)이라고 부름으로써 세 천사를 하나로 표현한다. 그 천사들은 그의 앞에서 먹고, 사라(Sarah)가 나이 들어 이삭을 낳을 것임을 미리 알려준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으신 이 이야기 속에서 정교회는, 신약에 나타난 성 삼위일체의 완전한 계시가 미리 형상화되었음을 본다.

 

성부 하느님과 성령을 그 어떤 인간적인 형태로써 묘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정교회의 성화(聖畵 iconography))는 전통적으로 성 삼위일체를 아브라함을 찾아 온 세 천사의 형태로 그렸다. 오순절 축일에 교회에서 가끔 쓰이는 것으로서, 가장 유명한 성 삼위일체 이콘(icon)은 14세기 러시아의 라도네즈(Radonezh)에 살았던 성 세르기우스(St. Sergius) 성인의 제자인 성 안드레이 루블료프(St. Andrew Rublev)의 작품이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희생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계시, 사제직, 심지어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일체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세상의 구원조차도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미리 형상화되었다. 참으로 아브라함에게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계약의 모든 면(面)들이 예시(豫示)되고 예언되었다.

 

과월절

구약의 전체 역사 가운데 중심이 되는 사건은 과월절(過越節 passover)과 출애굽(exodus)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은, 하느님께서 ‘하느님과 겨룬다’(창세기 32:28)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 붙이신 야곱의 아버지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악과 야곱에게 당신의 약속을 새롭게 하셨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그들과 함께 계속 지키셨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또는 가문의 지도자가 된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야곱의 아들들이 가장 어린 동생 요셉을 에집트에 노예로 팔았다. 요셉은 에집트의 파라오의 신임을 얻어서 에집트의 큰 통치자가 되었다. 기근(饑饉)이 닥쳤을 때에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에집트에 왔다.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에집트로 데려와 자기와 함께 있게 했다. 요셉이 죽고 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집트인들에 의해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창세기 24-50장을 보라.)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일으키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불붙은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 보이셨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굽기 3:13-15)

 

모세는 다시 에집트로 되돌아가서 에집트의 파라오를 상대로 많은 시도(試圖)를 하고, 또 하느님께서 에집트인들에게 보내신 많은 재앙(災殃)들을 겪은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냈다. 에집트로부터의 ‘탈출’ 또는 ‘출발’을 뜻하는 ‘엑소더스’(exodus)는 ‘과월절’이라고 부르는 밤에 일어났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끼 양을 골라 죽인 다음 그 피를 각자의 집 두 문기둥과 상인방(上引枋)에 바르라고 명령하셨다. 선 채로, 옷을 입고, 떠날 준비를 갖추고서, 밤에 어린 양을 먹어야만 한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나 주에게 드리는 과월절이다. 그 날 밤 나는 에집트를 지나가면서 전국에 있는 맏이들을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조리 치리라. 또 에집트의 신들도 모조리 심판하리라. 나는 주다. 집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이 너희가 있는 집이라는 표가 되리라. 나는 에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를 보고 너희를 쳐 죽이지 않고 넘어 가겠다. 너희가 재앙을 피하여 살리라. 이 날이야말로 너희가 기념해야 할 날이니, 너희는 이 날을 주께 올리는 축제일로 삼아 대대로 길이 지키도록 하여라.(출애굽기 12:11-14)

 

이렇게 과월절과 출애굽은 일어났다. 한밤중에 주님께서는 에집트의 맏이들을 죽이셨다. 주님께서 지나가실 때, 피로 표시를 한 집은 살아남았다. 큰 소동(騷動)이 벌어지는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홍해바다(Red Sea)를 건너서 탈출했다. 이때까지 에집트의 기병(騎兵)들은 뒤를 쫓고있었다. 바다에서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바다 위로 뻗쳤고, “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붙여 바다를 말리셨다...”(출애굽기 14:21) 이스라엘인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뒤따라오던 에집트의 전차(戰車)와 군인들은 바닷물이 덮치자 그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서 그 큰 팔을 펴시어 에집트인들을 치시는 것을 보고 주를 두려워하며 주와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출애굽기 14:31)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사막에는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었다. 모세가 주님께 기도하자, 주님께서는 백성들이 마실 물과 먹을 만나(manna), 곧 ‘하늘에서 온 빵’을 주셨다.(출애굽기 15-16장) 하느님께서는 사막을 지나면서 백성들을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는, “마치 친구끼리 말을 주고 받듯이 얼굴을 마주 대시고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던(출애굽기 33:11) 주님으로부터 십계명과, 도덕과 예배에 관한 율법을 받았다. 모세는 산꼭대기에 피어나는 연기와 구름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허락 받았고, 그 자신도 하느님의 위엄에 힘입어서 얼굴이 빛났다.(출애굽기 34:29)

 

모세는 요르단 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는 죽어서 모압 땅의 느보산(Mt. Nebo) 가까이에 묻혔다. 이곳이 그가 요르단 강 너머로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갈 땅을 바라다 본 곳이다.

 

과월절과 출애굽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뚜렷한 표로서 온 세대를 통하여 기억되었다. 그것은 시편에서 노래로 읊어졌고, 예언자들에 의해 다시금 생각나게 되었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들의 주된 축일로서 오순절과 함께 해마다 경축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완성될 구약의 주요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과월절과 출애굽의 궁극적 의미와 우주적인 목적이 드러나고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새로운 과월절’(New Passover)이시다. 그분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악의 권세로부터 구해내어 해방시키시려고 죽으신 ‘과월절의 어린 양’이시다. 진짜 ‘파라오’는 악마이다. 악마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삼는다. 진정한 해방자는 예수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와 죽음의 노예생활로부터 이끌어 내셔서 하느님 나라의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신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광야 같은 삶을 사는 동안, 참 ‘생명의 빵’(Bread of Life)이신 분, 곧 ‘하늘로부터 오신 참된 빵’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먹이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복음 6:32-58)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참된 빵’이실 뿐 아니라 ‘살아있는 참 음료’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사람이 그를 마신다면 결코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분이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요한 7:37)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한 4:14)

 

성 바울로께서는 출애굽과 모세가 내리쳐서 물이 샘처럼 흘러나온 바위를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쉽게 설명하신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고린도 1서 10:1-4)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삶의 사건들을 통해 과월절과 출애굽을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완성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때에 절정(絶頂)을 이룬다. 옛 과월절은 완성되었고 새 과월절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과월절 축제때 죽임을 당하셨다. 과월절 양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할 때, 하느님의 어린 양(Lamb of God)이신 예수께서는 성문 밖의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과월절의 큰 날, 곧 그 해(year)에는 안식일인 그 날이 일을 쉬는 날로서 지켜졌을 때, 예수께서는 돌아가셔서 당신의 모든 일을 쉬시고 무덤에 누워 계셨다. ‘안식일 다음 날’, 곧 한 주(週)의 첫 날이며 원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날에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이 모든 일은 에집트에서 가나안으로가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악함에서 의로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 땅에서 하늘로, 악마의 폭정(暴政)에서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옮겨가는 ‘새 과월절’과 ‘새 출애굽’을 위해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 백성의 진정한 과월절이요 출애굽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표시한 사람들은 죽음이 찾아올찌라도 보호받는다.

 

예수께서는 과월절 식사였던 마지막 만찬에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과월절의 잔치를 시작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옛날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과월절 잔치를 이제 더 이상 지키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기념하여 과월절 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고린토 1서 11:23-26; 마태로 26:26-29, 마르코 14:22-25, 루가 22:14-19을 보라.)

 

같은 편지에서 성 바울로께서는 또한 말씀하신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으므로 이제 여러분은 누룩없는 반죽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악과 음행이라는 묵은 누룩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내지 말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없는 빵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냅시다. (고린토 1서 5:7-8)

 

그리스도의 새로운 과월절에서도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법이 새로이 주어지는 것인데, 그 법은 돌판 위에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에 쓰여진다.(고린토 2서 3장, 예레미야 31:31-34, 에제키엘 36:26-27, 요엘 2:28-29을 보라.)

 

시나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법은 오순절에 다락방(upper room)에 모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시작된 메시야의 때에 완성된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과월절 뒤 오십일이 지나고 율법을 받는 축제였다.(사도행전 2장) 따라서 다시 한 번 메시야의 때에, 옛 사건이 새로우면서 최종적인 사건 속에서 완성된다. 곧, 모세의 외적(外的)인 법은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야고보 1:25, 2:12)이며 “성령의 법”(로마서 8:2)인 그리스도의 내면적(內面的)인 법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모세의)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로마서 8:2-4, 또한 고린토 2서 3장, 갈라디아서 3-5장을 보라.)

 

따라서 성 사도 요한께서는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요한 1:17)고 쓰고 계시다.

 

메시야의 때에 구약의 과월절-출애굽 사건의 완전한 성취와 완성이 이루어지는 속에서, 요르단 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상응(相應)한다는 점 또한 지적(指摘)해야만 한다. 더불어서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실제로 요르단 강을 건너서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고 간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그 이름이 예수(Jesus)인 여호수아(Joshua)였다는 상징적 사실인데, 이런 것은 구세주(Savior)를 뜻하는 같은 이름으로 오실 분, 곧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당신의 메시야적인 선교를 시작하신 분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과월절-출애굽의 모든 면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전부, 그리고 영원히 완성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부활절, 오순절과 주님의 날인 매 주일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다시 새롭게 되새겨진다. 교회가 모이는 때는 언제든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영원히 성부 하느님, 성령과 함께 계시는 거룩한 ‘나다’(I AM)이시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임을 당하신 분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과월절을 축하한다.(제 1권 교리와 제 2권 예배를 보라.)

 

왕권

구약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왕이 되셔야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인간인 왕(human king)을 주님께 청하였다.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한 곳에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 가 건의하였다. “당신은 이제 늙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니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사무엘이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 주시오”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에집트에서 데려 내온 이후 이날 이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 왔다. 너한테도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어라.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 주어라.”(사무엘 1서 8:4-9)

 

그래서 사무엘은, 만일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 다른 민족들처럼 산다면 그들에게 닥칠지도 모를 모든 일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자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왕은 백성들의 아들들을 전쟁에 내보낼 것이다. 그는 모든 백성들이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할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가장 좋은 짐승들과 수확물들을 가져갈 것이다. 그는 백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 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 날에 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무엘이 이렇게 말해 주었건만 백성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주께 아뢰니, 주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 주어라” 하고 대답하셨다.(사무엘 1서 8:18-22)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 그 첫 인물은 사울(Saul)로서, 그는 나중에 미치게 된다. 둘째 왕은 다윗(David)으로서 원래 목동이었지만 잘 다스렸다. 셋째는 솔로몬(Solomon) 왕으로서 그 지혜로 유명하며,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Judah) 왕국이 서로 갈라졌고, 그들의 죄 때문에 둘 사이에는 분쟁이 있었으며, 결국 그 백성들이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외세(外勢)에게 계속 종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구약의 시편과 예언자들은 오직 주님만이 왕이시라는 진실(reality)을 끊임없이 상기(想起)시켰다. 그분 한 분만이 백성들의 참 목자이시다. 그분 한 분만이 통치하시고, 또 경배와 흠숭(欽崇)을 받으실 분이시다.

 

나의 하느님, 나의 임금님, 내가 당신을 높이 받들며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기리며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높으시어라, 주님, 끝없이 찬미받으실 분,

그 높으심, 측량할 길 없음이여,”

주여, 당신의 온갖 피조물들이 감사노래 부르고

신도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들어 말하고

당신의 공적을 이야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공적을 사람에게 알리고

당신 나라의 그 찬란한 영광을 알리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당신만이 만세에 왕이십니다.(시편 145:1-3, 10-13)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라는 세속의 왕들 모두를 하늘의 거룩하신 임금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불렀으나, 그들의 호소는 대부분 별로 쓸모가 없었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하느님이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분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키엘 34:1-6)

 

구약의 시편과 예언자들은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직접 다스리실 때를 예언했다. 그분은, 다윗의 집에서 나시고 그 나라가 끝없이 계속될 왕인 메시야이신 임금(Messiah-King)을 통하여 다스리시면서, 모든 민족들의 목자가 되실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이사야 9:6-7)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킨 그 날은 오고야 만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는 현명한 왕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 ‘주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이’ 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리라.(예레미야 23:5-6)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 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미가 5:2-5)

 

주 하느님이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 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여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 오리라.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하느님이 하는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 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 하리라.(에제키엘 34:11-12, 15-16)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즈가리야 9:9-10)

 

마지막 하느님 나라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유일한 목자이시고 주님이시다. 그분은 ‘그의 나라가 결코 끝나지 않을’ 분이시다.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은 성모님의 잉태를 알리면서, 그분께 말한다.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32-33)

 

자신의 모든 생명을 바쳐, 예수께서는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셨다. 그분은 이 나라를 사람들에게로 가져오셨다. 그분은 다윗의 아들이시며,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분이시다.(마태오 4:23, 9:35)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0-21)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계실 때 사람들 가운데(in the midst of) 있다. 그분 자신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주시는 왕이시다.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가 12:32)

 

너희는 내가 온갖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 견디어 왔으니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권을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주겠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루가 22:28-30)

 

하느님 나라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설교와 비유는 그분 자신을 왕으로 말한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그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마태오 25:34)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성부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이다.(요한 18:36)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대한 복음의 진술은 그분을 왕으로서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 대한 온갖 비난과 괴롭힘은 ‘유다인의 왕’이신 그분께 가해졌다. 이 칭호는 그분께 대한 죄목이었고, 십자가에까지 따라붙은 명칭이었다. 이로써, 예수께서 재판받는 자리에 앉으신 뒤 빌라도(Pilate)가 백성들에게 “자, 여기 너희의 왕이 있다”(요한 19:14) 하고 외쳤을 때, 빌라도의 말 속에서 경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아이러니(irony)는 완성된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그분은 “왕 중의 왕이시고 군주 중의 군주”이신(디모테오 1서 6:5)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세력보다 ‘더 높이 들어 올려지신’ 분이시며,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해야 할 분이시다.(필립비 2:9-11, 또한 에페소 1:20-23) 그분은 모든 천군천사들과 함께 ‘당신의 나라에 오시는’ 세상 끝날에,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모든 악을 쳐부수시고 영원히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실 분이시다.

 

... 마침내 모든 군주의 군주이시며 모든 왕의 왕이신 어린 양(그리스도)이 이기실 것이며, 그의 부르심을 받고 뽑혀서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도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록 17:14)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 와 “진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썼으며 그분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 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의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모든 나라를 쳐부술 예리한 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쇠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를 담은 술틀을 밟아서 진노의 포도주를 짜내실 것입니다.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모든 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 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습니다.(묵시록 19:11-16)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묵시록 22:1-5)

 

사제직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멜기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신지 말했다.(위 4장 구원사의 ‘아브라함’ 항을 보라.) ‘영원한 사제’로서, 예수께서는 또한 레위인의 구약 사제직을 완성하고 성취하신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예배와 희생제사를 위한 성소를 갖춘 성막(tabernacle)을 지으라고 명령하신다.

 

내가 이 백성들 가운데서 살고자 하니 그들에게 내가 있을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설계대로 성소를 짓고 거리에서 쓸 기구들도 내가 보여 주는 도본에 따라 만들어라.(출애굽기 25:8-9)

 

성막 안에는 안뜰에 둘러싸인 성소가 있었다. 성소 안에는 ‘지성소’(至聖所)가 있었다. ‘증거판’(tables of the covenant law)을 담고 있는 특별한 궤(ark)는 헤루빔(cherubim) 둘이 둘러싸게 만들었다. 그 궤는 지성소 안에 모셔졌다. ‘계약궤’(ark of the covenant) 위에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을 하게 될 ‘속죄판’(mercy seat)이 있었다.(출애굽기 25:19-22)

 

성소 안에는 향(香)을 담는 접시와 포도주를 담아 붓는 큰 병들이 놓인 특별한 ‘젯상’이 있었다.

 

... 순금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젯상 위에는 나에게 바치는 제사떡(bread of the Presence)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출애굽기 25:29-30)

 

또한 짐승의 희생제사를 바치는 금으로 된 제단이 있었다.

 

깨끗한 올리브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일곱 개의 등잔이 놓인, 금으로 만든 등잔대가 성소 안에 있었다. 그리고 성막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는 휘장(curtains)이 드리워졌다.

 

자주빛 털실과 붉은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가늘게 꼰 모시실로 거룹(cherubim) 모양의 무늬를 놓아 가며 휘장을 짜라. 이 휘장을 칠 기둥 네 개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혀라. 거기에 휘장을 칠 금갈고리를 만들어 달고 은으로 밑받침 네 개를 만들어 기둥들을 그 위에 세워라. 휘장을 갈고리에 걸어 늘어뜨리고 그 휘장 뒤에 증거궤를 모셔라.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는 것이다.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는 속죄판으로 덮어라. 휘장 앞에 젯상을 놓고 젯상 맞은편 성막 남쪽 가에 등잔대를 놓고 젯상을 북쪽 가에 놓아라. 성막 문간을 가릴 막을 자주빛 털실과 붉은 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가늘게 꼰 모시실로 무늬를 놓아 가며 짜라. 이 막을 칠 기둥 다섯 개를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혀라. 그 기둥에는 금갈고리를 만들어 붙이고 밑받침 다섯 개는 놋쇠를 부어 만들어라. 아카시아나무로 제단을 만들어라. 길이 오 척, 나비 오 척으로 네모나게 만들고 높이는 삼 척으로 하여라. 제단 네 귀퉁이에는 뿔 네 개가 돋아나게 만들고 제단에 놋쇠를 입혀라.(출애굽기 26:31- 27:2)

 

성막에서 일하는 사제는 레위(Levi)족 출신의 남자들이어야만 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을 불러 내어 나를 섬길 사제로 삼아라.(출애굽기 28:1)

 

하느님께서는 성소 안에서 일하는 사제들이 입을 특별한 옷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다.(출애굽기 28장) 그분은 또한 사제에게 기름을 부을 때 뿐 아니라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기름으로 성별할 때를 위해서 특별한 기름을 마련하라고 명령하셨다. 또한 그분은 성소 안에서 피울 특별한 향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너는 이렇게 이런 것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그리하면 이것들이 가장 거룩한 것이 되어 거기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해지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 기름을 발라 주어 나를 섬기는 사제로 성별하여라.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기름은 너희가 대대로 성별하는 데에만 써야 한다’ 고 일러 주어라.(출애굽기 30:29-31)

너는 향을 사사로이 쓰려고 같은 배합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네가 주를 섬기는 데 쓰는 거룩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출애굽기 30:37)

 

하느님께서는 또한 예배와 여러 가지 희생제사에 관련된 법규들을 매우 자세하게 일러주셨다. 그분께서는 어떤 동물을 골라서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그분은 어떤 경우와 어떤 목적에 맞게 어떤 제사를 바쳐야 하는가를 말씀하셨다. 그분은 평화와 찬양, 감사와 자비,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의 용서와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한 제사에 관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또한 어떤 축절(feasts)을, 언제 지키고 또 어떻게 경축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셨다.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같은 특정하고 자세한 가르침들로 가득 차있다.

 

사막을 가로 질러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하느님의 백성은 성막을 함께 운반했다. 그들은 진(陣)을 치는 곳마다 성막을 세웠다. 마침내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정착한 뒤, 다윗 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세워졌다. 그리고 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희생제사가 바쳐질 성전을 세우라는 명령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탈출해 나온 지 사백 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솔로몬은 주의 전(殿 house)을 짓기 시작하였다.(열왕기 1서 6:1)

 

주님의 집(house)은 모세의 성막과 같은 형태였다. 거기에는 바깥 뜰과 성소, 그리고 ‘계약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었다. 거기에는 분향과 헌주(獻酒)와 번제를 위한 제단이 있었다. 그 곳에는 등잔대와 제사떡을 놓는 단이 있었다. 그 곳에는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필요한 온갖 기구들과 옷들이 마련되어 있었다.(열왕기 1서 6-8장을 보라.)

솔로몬은 성전공사를 마무리짓고는(기원전 960년경) 성대한 봉헌식을 행했다.

 

그리고 나서 사제들이 주의 계약궤를 성전의 밀실, 지성소 거룹의 날개 아래 마련된 자리에 안치해 놓았다.

 

궤 안에는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두 돌판 곧,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 주께서 백성과 맺은 계약의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주의 전에 차 있었다. 사제들이 그 구름이 너무 짙었으므로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주의 영광이 주의 전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솔로몬이 입을 열었다. “주께서는 몸소 캄캄한 데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여기에서 사십시오. 제가 주님을 위하여 이 전을 세웠습니다.”(열왕기 1서 8:6, 9-13)

 

그런 다음 솔로몬은 백성들을 축복하고, 주님께서 다윗에게 ‘네 아들이 짓게 될 것이다’ 라고 약속하신 성전의 건축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느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계시고, 성전에서 드리는 백성들의 기도를 받아 주시기를 빌면서 긴 봉헌기도를 바쳤다.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하느님 주여, 소인의 기도와 간청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날 당신 앞에서 울부짖으며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밤낮으로 이 전을 보살펴 주십시오. 소인이 이 곳을 바라보며 올리는 기도를 부디 들어 주십시오. 소인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부디 들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열왕기 1서 8:27-30)

 

따라서 솔로몬이 지어서 주님께 바친 성전은 하느님 백성들의 공식적인 예배와 희생제사를 위한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그 성전은 바빌론 포로기 동안에 파괴되었고, 에즈라와 느헤미야 때에 회복되었지만 다시금 외부의 침략자들에 의해 더럽혀졌고, 마침내는 기원후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주님의 영광이 모든 창조세계를 가득 채우게 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되었다. 메시야적인 왕이 오시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성전 안에서처럼 사람들 속에 거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자비와 평화의 완전하고 영원한 계약이 온전히 이루어짐에 따라 성전의 희생제사 의식은 끝날 것이다.(이사야 55:3, 61:1-11, 66:18-23, 에레미야 31:31-34, 에제키엘 34:22-31, 37:24-28을 보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영원히 세워졌다. 하느님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을 때 그분에게 가해진 고발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꾸짖으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복음 2:13-22)

 

대사제들과 온 의회는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에 대한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와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이렇다 할 증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 사람이 나타나서 “이 사람이 하느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증언하였다. 이 말을 듣고 대사제가 일어나 예수께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할 말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내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분명히 대답하여라.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것이 너의 말이다” 하시고는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오 26:59-64)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이 된다. 첫 그리스도인 순교자인 스데파노 보제는 이것을 증언했고, 자신의 증언을 위해 죽었다.(사도행전 7:44:59을 보라.) 성 사도 베드로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성 사도 바울로께서도 또한 이것을 명백히 가르치셨다.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켜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에페소 2:13-20)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린토 1서 3:16-17)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귀중한 돌 하나를 골라 머릿돌로서 시온에 두었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베드로 1서 2:4-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 곧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느님 자신이실 뿐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성전이 된다. 예수께서는 또한 한 분이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며 하나의 완전한 희생제물이신 데, 그분은 그저 다가올 ‘실재’(reality)의 그림자일 뿐인 구약의 전체 사제직을 떠맡으셔서 완성하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시어 하늘에 있는 성소로 들어가셨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는 그 어떤 다른 사제직도 없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 어떤 다른 희생도 없다.(히브리서 6-10장을 보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일하시는 성전은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에게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도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히브리서 9:11-14)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하늘의 참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 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그 하늘의 성소로 들어 가신 것입니다. 대사제는 해마다 다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가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번번이 당신 자신을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 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9:24-28)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당신은 희생제물과 봉헌물과 번재물과 속죄제물을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쳐지는 것인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에는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나중 것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것을 폐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제가 날마다 성전에서 예배의식을 거행하며 같은 희생제물을 자주 드리더라도 그 제물들이 결코 죄를 없애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펀에 앉으셔서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 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히브리서 10:5-14)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오직 한 사제직과 한 희생만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제직이고 십자가의 희생이다. 전체의 그리스도 교회는 “왕의 사제들”(베드로 1서 2:9)이다. 임명받은 교회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고린토 1서 12:27)인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독특한 사제직을 나타내고 실현한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 곧 위대한 대사제이시고 어린 양이신 분께서 다스리실 것이다. “죽었었지만 살아 계신”(묵시록 2:8) 분께서는 하느님의 거처(居處)가 될 모든 창조물들을 통치하실 것이다.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국 백성들이 그 빛 속에서 걸어 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 올 것입니다.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대문들을 닫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러 나라의 보화와 영예를 그 도성으로 가지고 들어 올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 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 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묵시로 21:22-27)

 

그러므로 구약의 성전과 사제직과 희생은 당신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성전이시고 사제이시며 희생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완성되며, 그 하느님 나라는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또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묵시록 1:6; 제 2권 예배를 보라.) 하느님 백성들을 위해 존재한다.

 

예언

구약은 예언(prophecy)으로 가득 차있다. 예언은, 세상을 향해 당신의 말씀을 말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영감을 뜻한다. 구약에는 예언서에 그 이름이 나오는 이들 뿐 아니라 모세, 엘리야, 사무엘, 나단을 포함해서 그밖에도 많은 예언자들이 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인류의 역사, 운명에 관련된 많은 예언들이 나온다. 보통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사악함과 불성실함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들이다.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닥쳐 올 비극이 예언되기도 한다. 또한 당신의 약속에 성실하시고, 영원히 노하지 않으시며, 도리어 당신 백성의 운명을 회복하시고 모든 민족을 당신의 영원한 나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자비와 관대하심이 예언된다.(위 2장 구약예언서 부분을 보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궁극적인 행동은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마지막 임금이시다. 그분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사를 완성하셔서 완전케 하시는 대사제이시다. 그분은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알게 하셔서 세상에 당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직접 가르치시고, 그러므로써 그들을 모두 예언자로 만드시는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마지막 예언자이시다.

 

따라서 성 요한의 복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저 한 예언자이거나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세상 끝 날에 하느님께서 보내실 마지막 예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오천 명을 먹이심)을 보고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요한 6:14)

 

이 말씀(샘솟는 물에 관하여)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또는 “저분은 그리스도이시다”(요한 7:40-41)

 

성 베드로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하실 때, 예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마찬가지로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한 말을 보면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내셨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예언자 하나를 세워 주실 터인데 너희는 그 예언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쫓겨 나와 멸망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사도행전 3:22-23)

 

예수님은 모세가 ‘옛 법’(Old Law)에서 말한 ‘그 예언자’(that prophet)이시다.(신명기 18:15) 그러나 모세와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조차도 ‘그 예언자’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말씀께서 사람의 몸을 입은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마지막 예언자로서 예수님은 어떤 한 예언자 이상이시다. 그분은 옛 예언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요한 3:2)이시고, ‘권위가 있게 말씀하시며,’(마태오 7:29, 마르코 1:22)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신다.(요한 14:24) 그러나 그분 자신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이시기 때문에 이런 것들 이상이시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 1:14)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6-18)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는 위대한 옛 예언자들의 예언을 완성하신다.

 

“내가 잠깐 너를 내버려 두었었지만,

큰 자비를 기울여 너를 다시 거두어 들이리라.

내가 분이 복받쳐

내 얼굴을 잠깐 너에게서 숨겼었지만,

이제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너를 건지시는 주의 말씀이시다.

“산들이 밀려 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주의 평화의 계약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너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의 말씀이다.

“너의 아들들은 모두 주의 제자가 되고

크나큰 평화를 누리리라.

네가 정의 위에 튼튼히 서서

온갖 압박에서 풀려 나리니,

두려워할 일이 없으리라.

온갖 공포가 사라져

너에게 닥쳐 오지 아니하리라.”(이사야 54:7-8, 10, 13-14)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예레미야 31:33-34)

 

예언자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며, 세상의 빛이시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4:6-7)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선물을 당신께 속한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신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제자들 또한 아버지(Father)를 알고, 그의 말씀을 말하고, ‘세상의 빛’이 되도록 하시려고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을 덮어 주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게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14-16)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 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잡혀 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오 10:18-20)

 

사람이 예언을 하는 완전한 가능성은 성령의 선물 안에 주어지는데, 그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오셨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계속 임하신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은 구약의 요엘(Joel)에 의해 이미 예언되었다.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 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사도행전 2:14-18)

 

사도 바울로께서는 사도 베드로와 의견을 같이 하시면서, 예언이 메시야의 교회에서 성령의 선물들 가운데 첫째의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prophecy)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고린토 1서 14:1)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하신 현존이 이루어짐으로써 모든 예언이 그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을 모든 창조물들에게 나타내시면서 당신의 거룩한 영광 속에서 현존하실 것이다.

 

거룩함

구약의 하느님은 거룩하신 하느님이었다. ‘거룩한’(holy)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어떤 것과 ‘떨어져 있는’(separate), ‘다른’(different), ‘닮지 않은’(unlike) 것을 뜻한다.

 

구약의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주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인격과 현존에 대한 특별히 거룩한 증거이다. 그 영광은 빛과 위엄과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 나타나며, 주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의 음성이 함께 따른다. 그것은 평화와 행복과 기쁨에 대한 깊은 확신 뿐 아니라 두려움과 매혹(魅惑)에 압도(壓倒)되는 듯한 느낌으로 그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서 창조되었다.

 

이런 식으로 모세는 과월절 전 하느님의 산인 호렙산에서 본 그분의 거룩한 영광 속에서, 그리고 에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에서 거룩한 하느님을 경험했다.

 

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출애굽기 3:2-6)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주께서 이르셨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출애굽기 33:18-23)

 

구약의 다른 선택받은 이들 또한 하느님의 신성한 거룩하심과 영광의 현존을 경험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엘리야, 에제키엘은 이샤야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경험들을 했는데, 특히 이사야의 고전적인(classic) 환상은 교회의 전례기도에서 표준적인 한 부분이 되었다.

 

우찌야(Uzziah)왕이 죽던 해에 나는 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 다녔다. 그들이 서로 주고 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 가지고 날아 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그 때 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이사야 6:1-8)

 

시편 또한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면서,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해준다고 선언한다.(시편 8, 19, 93, 104, 148편 등을 보라.)

 

구약의 주된 가르침과 구약에 나타난 모든 삶의 기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눠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 전체가 도덕과 예배에 대해 명령하고 있는 것 속에서 드러나는 그 목적이다.

 

나 주가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에 닿아 부정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나 주가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에집트 땅에서 올라 오게 한 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레위기 11:44-45)

 

사람들은 하느님을 예배함으로써 거룩해져야만 하고, 그분의 지혜와 의로우심을 얻어 가져야만 한다. 구약의 이른바 지혜문서 전체와 예언서, 시편의 모든 가르침은 근본적인 사실 하나를 중심으로 다같이 모아지는데, 그것은 곧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자신의 거룩함과 지혜, 영광, 그리고 의로우심을 본받고 또한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람의 삶이 지닌 뜻과 목적이다.

 

사람을 향하신 하느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분 홀로 율법과 예언자들의 완성이시다. 그분 홀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마르코 1:24, 루가 1:35, 4:34)이시다. 그분 홀로 완벽하게 의로우시며 전혀 죄가 없으시다. 그래서 성 베드로께서는 오순절 사건 뒤에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종 예수를 잡아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을 때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 주려고 작정하였는데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그 하느님께서 바로 그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죄 없으신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 대신에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여 마침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다 그 목격자들입니다.(사도행전 3:13-15)

 

사도 바울로께서도 그리스도는 그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지혜로우실 뿐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느님 자신의 바로 그 거룩함이요, 의로우심이며, 지혜이시라고 말함으로써 성 베드로의 가르침과 일치를 이루신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이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고린토 1서 1:22-24, 30-31)

 

하느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주님께서 변모하신 산 위에서 ‘능력과 함께 온 하느님 나라’를 본 사도들의 일관된 증언이다.(마태오 17:1-6, 마르코 9:2-7, 루가 9:28-36, 제 2권 예배를 보라.)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 1:14)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하였지만 그 얼굴에는 너무나 찬란한 광채가 빛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그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긴다면 과거의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간 있다 없어질 것도 빛났다면 영원히 계속될 것은 얼마나 더 찬란하게 빛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일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 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고린토 2서 3:7-12, 18, 4:6)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나누어 가질 수 있고, 하느님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하신 그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베드로 2서 1:3-4)

 

사람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구약의 구원사의 마지막 열매인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된다. 교회 안에는,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서 14:17)인 하느님 나라가 현존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는 이미, 지금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 끝 날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나라의 영광 속에 오실 때 모든 만물에 충만하게 될 거룩하신 하느님에 대한 끝없는 찬양이 시작되고 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묵시록 4:8b)

 

그 천사가 또 나에게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시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당신의 천사를 보내셨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자, 내가 곧 가겠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묵시록 22:6-7)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어라. 올바른 사람은 그대로 올바른 일을 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 가려고 자기 두루마리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행복하다.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란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일삼는 자들은 다 문 밖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모든 교회에 이 모든 것을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에서 돋은 그의 자손이며 빛나는 샛별이다.”(묵시록 22:11-16)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묵시록 22:20-21)

 

 

 

 

 

5장 교회사

 

 

1세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첫 세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동정녀로부터 나심과 함께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1세기에 사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다. 이 시기는 또한 교회의 생일이라고 흔히 부르는 사건인 오순절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신 때이기도 하다.

 

첫 세기 동안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그 선교 여행의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와있는 성 바울로를 뺀 나머지 사도들이 어느 곳을 여행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전통에 따르면 모든 사도들은 복음을 널리 전한 전도자들이었고, 성 요한을 빼고는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복음경과 서신들 그리고 신약 경전을 이루는 모든 책들은 1세기에 쓰여졌다. 또한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의 첫 공동체들이 소아시아와 그리이스의 주요 도시들에 세워졌고, 아마 북아프리카에도 세워졌을 것이다. 교회는 또한 로마제국의 수도(首都)에도 세워졌다.

 

교회

때때로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 교회는 처음에 도시적인 한 현상(現象)이었고, 나중에 가서야 시골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교회는 주로, 오늘날 우리가 사회의 ‘중산층’(中産層)이라고 부르는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강압적이고 견디기 힘든 세상의 형편 속에서 천상(天上)의 위로를 구하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뒤쳐진 사람들 속에 자기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세기 교회의 주요 사건은 모세법의 의식적(儀式的 ritual) 요구를 따를 의무가 없는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로마서를 보라.) 따라서 비록 그리스도 교회가 유대주의(Judaism)의 ‘옷을 입은 채’ 로마제국의 사회 속으로 들어갔지만, 모든 민족들에게서 부름 받은 하느님의 백성, 곧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시오 구세주로서 고백되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로서 유대교적인 신앙으로부터 빠르게 분리되었다.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주님이시오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죄로부터 회개하는 것,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뒤이어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이같은 조건을 다 채운 이들은 사도들이 손을 얹어 임명한 주교(主敎)와 사제들이 이끄는 지역 공동체로서 곳곳에 세워진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사도 자신들은 어떤 특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책임지는 지역의 주교들이 아니었다.

 

신약 문서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저마다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문제점들을 갖고 있었다.(위 3장 신약사도행전 아래를 보라.)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각 교회는 다른 교회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모두들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같은 교리를 가르치고 같은 덕을 행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사도행전 2:42, 44-45)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런 진술은 일반적으로 초기의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적용될 수 있다.

 

 

2세기

 

박해

2세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 많이 발전했으나, 그리스도교는 ‘불법적인 종교’라는 이유 때문에 로마 제국의 당국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이 보기에 종교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범죄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요구되는 것, 곧 지상의 황제를 임금과 주님과 신으로서 존경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국가의 법을 어겼다. 그들은 국가의 당국(當局)을 위해 기도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했지만,(로마서 13:1-7) 하느님과 그리스도께만 드려야 마땅한 영광과 예배를 세속의 왕에게 드리기는 거절했다. 그래서 로마의 법은 ‘그리스도인은 불법자이다’라고 선언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기록물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처음으로 증언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2세기에 ‘젊은 플리니’(Pliny the Younger)와 98년부터 117년 사이에 통치했던 트라잔(Trajan) 황제가 서로 주고받은 서신들이다. 이 서신들은 그리스도교가 사실상 금지되었으며,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드러나지 않아서 어린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인육(人肉)을 먹는다(‘비밀 집회’에서 행해진 성찬예배에 대한 오해임.)는 따위의 엄청난 비난을 겪지 않을지라도, 만일 붙잡히게 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기를 거절하면 처형당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세기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대부분 지역적이었으며, 지역에 있는 제국 당국의 열성에 따라 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는 널리 행해졌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로마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관용심이 있고 아량(雅量)이 있는 이들에 의해서조차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특별한 헌신에서 비롯된 완고함과 비타협적인 것 때문에 주로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특별히,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제국의 영토 안에서 법과 질서의 일치에 정치적으로 위험을 가져온다고 여겨짐으로써 박해를 받았다.

 

2세기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들로서는 주교인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Ignatius 110년경 사망), 서머나의 폴리캎(Polycarp 156년 사망)등과 철학자인 유스티노스(Justin 165년경 사망)가 있다. 신앙을 위해 순교한 이분들은, 디다케(Didache), 디오그네토스(Diognetus)에게 보내는 편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의 편지, 바르나바(Barnabas)의 편지, 헤르마스(Hermas)의 목자와 아테네의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 사르디스의 멜리토(Melito),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스(Theophilus), 그리고 2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리용의 이레니우스(Irenaeus)같은 이들의 변증적인(apologetic) 작품들과 함께, 2세기 교회의 신앙과 생활에 대해 매우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신앙의 수호: 변증가들

박해와 교회 신자들의 증가에 덧붙여서 2세기에 이룬 가장 중요한 발전은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킨 일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유대교와 이교(異敎) 신앙에 맞설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이단(異端)에도 맞선 이른바 ‘변증’(辨證)이었다. 또한 교회 교리의 발전이 있었고, 사도 이후시대의 신학이 시작되기도 했다. 각 지역 공동체에서 주교와 사제, 보제의 인도를 받는 똑같은 기초 교회의 설립이 있었고,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그리스도교 예배와 예전적인 삶의 첫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신약 교회의 거룩한 경전을 따른 교회법의 확립이 첫 발을 내딛기도 했다.

 

1세기의 끝과 2세기의 시작 무렵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잘못된 기록물들이 많이 쏟아졌다. 이 기록물들이 이른바 ‘외경’(apocryphal [구약의 외경과 혼동하지 말 것.])문서요, 이른바 ‘위경’(pseudoepigrapha)이었다.(위 3장 신약복음경 가운데서 성 루가에 의한 복음 부분을 보라.) 이들 잘못된 작품들에는 사도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었고, 그것들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과 동정녀 마리아의 삶, 사도들의 활동에 관한 수많은 지어낸 이야기와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그리스도인의 무리들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위경과 함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잘못된 가르침이 나타났는 데,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일종의 정신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이며, 지성주의적인 철학으로 변형시키는 그리스도교의 이단이었다.(위 3장 신약성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 가운데서 골로사이서 부분을 보라.) 참된 정교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이 잘못된 가르침과 싸워야만 했다. 이런 투쟁의 결과로 변증가들(apologists)의 신학이 나오게 되었는 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믿음과 본래의 복음을 지켜나갔다. 또 다른 결과로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사도적 계승의 가르침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교의 참된 믿음과 삶이 주교들의 축성 속에서 교회의 거룩한 전통의 계승을 통하여 교회에서 교회로, 세대(世代)에서 세대로,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전해진다는 가르침이며, 이 때 주교들의 가르침과 실천은 서로서로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들의 것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하나 더 그 결과를 덧붙인다면, 교회가 정확히 거룩한 경전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을 엄격하게 구분지어 확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 때도 그 결정은 문서에 담겨있는 사도적 증언의 참됨과 교회의 예배 모임에서 그것들이 어느 정도나 쓰이고 있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었다.

 

교회의 직제(Order)와 예식

2세기의 변증가들과 순교자들, 성인들의 기록을 보면, 각 지역의 그리스도 교회가 보제의 도움으로 사제가 관리하는 교회를 관장하는 주교 한 사람에 의해 이끌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그나티오스는 자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면서 모든 일을 하려고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주교는 하느님의 자리에 있어야 하며, 반면에 사제들은 사도들의 회의(council)로서 기능해야 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보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곧, 선한 일들)에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 1)

 

그러므로 한 성찬에 참여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고, 우리를 주님의 피와 일치시키는 잔도 하나이며, 사제와 나의 동료 종인 보제로부터 도움을 받는 주교가 하나인 것처럼 제단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4)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공번된(Catholic) 교회가 있는 것처럼, 주교가 있는 곳에는 그 백성들이 있도록 하시오.(서머나인들에게 보낸 편지 8, 2)

 

성 이그나티오스는 교회를 말하면서 처음으로 ‘카톨릭’(catholic)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교회란 어떤 곳인가를 말하면서 그 (양[量]이나 수[數]가 아니라) 질(質)을가리키는 형용사인데, 곧 가득하고, 완벽하고, 완성되고, 전체이고, 그 속에 하느님의 은혜와 진리와 거룩함이 충만해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음을 가리킨다.

 

디다케와 성 유스티노스, 성 이레니우스의 변증들에도 또한 그리스도교의 성례전에 대한 진술들이 있다.

 

다음과 같이 세례를 베푸시오. 이 모든 점들을 설명한 뒤, 흐르는 물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오... (디다케 7, 1)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를 빼고는 아무도 성찬을 먹거나 마시지 못하게 하시오... (디다케 9)

 

주님의 날에는 함께 모여 빵을 떼고 감사를 드리시오.(곧, 감사[thankgiving]를 뜻하는 성찬[eucharist]을 가리킴.) 그러나 먼저 여러분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여러분의 희생이 순수한 것이 되도록 하시오. 또한 자기 형제와 다툰 사람은 화해하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희생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입니다.(디다케 14)

 

성 유스티노스의 변증에 나타난 성찬식

 

주일(Sunday)이라고 불려지는 날에 도시와 시골에 사는 모든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기록들(memoirs)과 예언자들의 작품들을 읽는다. 봉독이 끝나면 인도자가 말로써 가르치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 훌륭한 것들을 본받도록 권고한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다같이 일어나서 기도를 바친다. 이미 말한대로 기도가 끝나기 전에 빵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다. 같은 방식으로 인도자는 기도와 감사를 자신의 능력에 따라 바치고,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말함으로써 동의(同意)를 나타낸다. 그리고 나서 모든 이들에게 성찬을 나누어주어 먹게 하고, 참석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보제가 따로 한 몫을 남겨둔다. 넉넉하고 기꺼운 마음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선택하고 스스로 생각한 대로 내어놓는다. 그러면 모아진 것들을 인도자에게 맡기고, 그는 고아와 과부, 병이나 다른 이유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여행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돕는데, 이는 한 마디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러나 주일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함께 모이는 날인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어둠과 물질(matter)을 변화시키셔서 세상을 만드신 첫 날이고,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성 유스티노스의 변증론 1, 67)

 

 

3세기

 

그리스도 교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죽음(185년)으로부터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때(249년)까지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며 지냈다. 데시우스가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전 제국에 걸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박해를 하기 시작했다. 데시우스에 의한 박해는 발레리안(Valerian 253-260)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당했고, 성직자들은 찾아지게 되면 죽임을 당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은 압수당하고 파괴되어야만 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몰살(沒殺)시키고,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전면적인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이 죽고 나자 그의 아들인 갈리에누스(Gallienus)는 광범위한 박해 정책을 그만두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 번 3세기말까지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이 시기에 교회 신자들이 놀라우리만치 많아졌는데, 아마도 제국 인구의 10퍼센트까지 늘어났던 것 같다.

 

타락(墮落)한 이들

데시우스와 발레리안의 박해뿐 아니라 그들의 앞뒤에 있었던 평화로운 시기로 말미암아, 3세기의 그리스도 교회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고문과 처형의 위협 속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한 그리스도인들과 평화로운 시기에 경건한 삶에서 타락해 죄된 삶으로 빠져 들어간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났다. 교회의 강경주의자들(maximalists)은 세례를 받은 뒤에 저지른 중대한 죄에 대해서는 회개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부터 ‘타락한’ 이들의 회개를 부정했으며, 참회의 기간을 거쳐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거룩한 성찬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데 동의한 주교들을 반대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많은 분열이 일어났고,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교의 더 순수하고 엄격한 모습이라고 여기는 어떤 것을 위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떠난 이들 가운데 터툴리안(Tertullian 220년경 사망)이 있는데, 그는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위대한 라틴 신학의 교부이며 여러 가지의 그리스도교 작품을 많이 쓴 작가이다. 터툴리안은 몬타누스(Montanus)의 이단적인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 운동은 2세기말에 시작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둘째 계약’(second testament)의 것보다 더 완벽한 성령의 ‘새로운 예언’의 교회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공번된 교회의 위대한 수호자는 카르타고(Cartage)의 주교인 키프리아노스(Cyprian 258년 사망)로서, 그는 ‘타락한’ 이들을 교회의 성찬에 다시 참여케 하는 것에 반대하는 로마의 이른바 ‘순수한’ 노바티안(Novatian)의 교회에 맞선 뒤에 순교하였다. 비록 터툴리안의 신학을 열심히 읽긴 했지만, 키프리아노스는 자칭 강경주의자들의 관념적인 ‘순수한’ 교회에 맞서서 사도와 주교의 계승으로 이루어진 공번된 교회를 수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이신 교회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편지 73)고 주장했다.

 

교회의 이런 일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교회에 맞서서 싸우고 저항하는 이는 자신이 교회 안에... 있다고 믿습니까? 이 일치는 우리가 마땅히 지키고 주장해야 하며, 특별히 교회를 관장하는 주교인 우리들이 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 또한 하나이고 분열되지 않은 주교직(episcopacy)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주교의 지위(epicopate)는 하나이고, 각각의 지위는 각각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지켜집니다. 교회 또한 하나이고...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4, 5)

 

교회를 어머니로서 갖지 않은 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모실 수 없습니다.(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6)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지 않은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편지 55)

 

신학의 발전

3세기에는 또한 그리스도교 신학을 가르치는 정규학교가 처음으로 생겨났다. 그 학교는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데, 판테누스(Pantaenus)가 세워서 클레멘트(Clement 215년경 사망)에 의해 발전했고, 뛰어난 신학자이며 학자인 오리겐(Origen 253년 사망)에 의해 꽃을 피웠다. 라틴 신학의 아버지인 터툴리안이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의 협력, 곧 이교도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서로 연결짓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했던 것과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인들은 그리이스 철학이 그리스도교 복음을 위한 훌륭한 준비이며 이교도들의 진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 안에서 연합되어 완성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오리겐은 자신의 제자인 성 그레고리 이적자(St. Gregory Wonderworker)에게 쓰기를,

 

나는 그대가 그리이스 철학으로부터, 잠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입문이랄 수 있는 그런 분야의 지식들을 얻기를 바라네. 그리고 기하학과 천문학에서 얻은 어떤 정보일지라도 성스러운 책들을 설명하는 일을 도와줄 것일세...

 

오리겐의 작품은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는 많은 주제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성경의 책들에 대한 매우 조직적이고 문학적인 연구를 했다. 그의 저작들은 사실상 교회 안에서 그의 뒤를 잇는 모든 그리이스 신학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오리겐의 많은 가르침은 교회에 의해서 잘못된 것으로 판정을 받았고,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그런 가르침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 저자는 553년의 제 5차 세계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정죄되었다.

 

터툴리안, 키프리아노스, 클레멘트, 오리겐과 함께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3세기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스(Dionysius 265년 사망),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235년 사망), 갑바도기아의 이적자 그레고리(270년경 사망), 그리고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 311년 사망)가 있다. 이들 모두는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학을 발전시켰고, 특별히 4세기에 논쟁을 불러일으킬 성 삼위일체의 교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로(Paul)와 안티오키아의 루시앙(Lucian) 또한 3세기말에 살았으며,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성격에 관한 자신들의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유명하다.

 

예식의 발전

3세기 교회의 표준적이고 예전적인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문서들 또한 존재한다. 이런 문서들이 이른바 시리아에서 나온 ‘사도들의 가르침’과 로마의 히폴리투스가 그리이스어로 쓴 ‘사도의 전통’이다. 앞의 것은 고위 성직자의 직무와 시리아 교회의 성례전적인 실천에 관한 규범들을 보여주고, 예식을 위한 모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뒤의 것 또한 비슷한 자료들을 보여주는데, 특히 로마 교회에 관해 더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는 세례와 견진성사, 그리고 서품식(敍品式)의 형식뿐 아니라, 교회사에서 나타난 고정된 성찬식 기도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본문이 담겨 있다.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속에 있는 세례와 견진성사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이 물로 내려가면

세례를 베푸는 사람더러 손을 그에게 얹게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전능하신 성부 하느님을 믿습니까?

세례를 받는 사람은 ‘저는 믿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곧 머리에 손을 얹어 한 번 세례를 주게 하고, 그 뒤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분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셔서 묻히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그가 ‘제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두 번째로 세례를 주게 한다. 그리고 나서 아래처럼 다시 묻게 한다.

당신은 거룩한 교회 안에 계신 성령과 몸(flesh)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러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저는 믿습니다’ 하고 대답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에게 세 번째로 세례를 베풀게 한다.

그런 뒤에 그가 물에서 올라오면, 사제는 그에게 ‘감사의 기름’(Oil of Thanksgiving)을 발라 주면서 말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거룩한 기름을 바릅니다.’

그리고 나서 각 사람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은 뒤 교회의 회중(assembly)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면 주교는 자신의 손을 그들에게 얹고서 기원하며 말한다.

오 주 하느님, 여기 당신의 종들이 새사람이 되게 하는 물통(laver)에 의해 죄의 사함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시는 분이시여,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어, 그들이 기꺼이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당신과 거룩한 교회에 이제와 항상 또 영원한 나라에서도 영광이 있을찌어다. 아멘.

그 뒤에, 축성한 기름을 바르면서 손을 그의 이마에 대고 말한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성신 안에서 거룩한 기름을 당신에게 바릅니다.’

그리고 앞이마에 날인(捺印)하고, 평화의 입맞춤을 하면서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하고 말한다.

그러면 날인을 받은 사람은 ‘또한 당신과 함께’ 하고 말한다.

그리로 나서 각 사람은 서로서로에게 이같이 한다.

그때부터 그들(세례받은 이들)은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거치기 전에 앞서서 신자들과 함께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도를 드린 뒤에는 그들로 하여금 평화의 입맞춤을 하게 한다.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속에 있는 성찬식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마음을 드높입시다.

 

주님 안에 있나이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나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당신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당신께서는 마지막 때에 그를 우리의 구세주요, 죄를 속하시는 분이요, 당신 지혜의 전달자요, 당신으로부터 나온 말씀(Logos)으로서 보내셨나이다. 그를 통하여 당신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늘에서 그를 동정녀의 태(胎)에 들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나이다. 그의 몸 속에서 그는 사람이 되시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나이다. 당신의 뜻을 이루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고통받으실 때 그는 자신의 손을 뻗치셨나니, 그것은 당신 안에서 믿음에 이른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죽음을 물리치시고, 악마의 사슬을 끊고, 지옥을 짓밟고, 의인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경계석(境界石)을 세우고, 부활을 계시하시기 위해 스스로 고난 속에 자신을 내던지셨을 때, 주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떼어내는 내 몸이니라.’ 또한 같은 방식으로 잔을 취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이니라. 할 수 있는대로 자주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이렇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당신께 빵과 잔을 가져와서 감사를 드리나니,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를 사제로서 당신 앞에 서서 예배를 드릴만한 자로 여기시기 때문이나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성령을 교회의 희생제사에 보내 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그것들을 결합시키시고, 희생제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saints)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믿음과 진리로 강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찬미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거룩한 교회 안에서 당신께 찬양과 영예가 이제로부터 영원히 있게 하소서. 아멘.

 

 

4세기

 

콘스탄틴(Constantine)

4세기는 초기 교회에 대해 벌인 것 가운데 가장 심한 박해, 곧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의 박해와 함께 시작되었다. 초기 순교자들의 가장 긴 명단이 이 시기(303-306년)에서 비롯된다.

 

디오클레티안의 퇴위(退位) 뒤 제국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312년에 콘스탄틴은 서방의 왕좌를 놓고 주 경쟁자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로마 근처의 밀비안(Milvian) 다리 전투를 앞두고서 콘스탄틴은 한 환상을 보게 되는데, 아마도 꿈에서였던 것같다. 그는 ‘이 표시로써 정복하라’ 하는 말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는 라바룸(Labarum[Chi Rho: XP])을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자기 군인들의 겉옷과 무기에 달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콘스탄틴은 곧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제국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고, 또한 교회에 많은 특전(特典)과 편의(便宜)를 줌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의 호감을 나타냈다. 콘스탄틴은 죽기 전에 비잔티움(Byzantium)의 옛 지역에 도시를 세워서 자신의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었다. 콘스탄틴 자신은 337년 임종(臨終)에 가서야 세례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진짜 십자가를 찾아낸 그의 어머니 엘레니(Helen)와 함께, 콘스탄틴은 교회의 성인으로 인정된다. 그리스도교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의 법령(法令)에 따라 380년에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내적인 투쟁

콘스탄틴이 다스리는 동안 교회는 재산을 다시 찾았고, 외부의 박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내적인 문제가 생겨나서 평화를 깨뜨렸다. 먼저, 북아프리카에는 도나티스트(Donatist) 분파가 있었다. 이 분파는 도나투스(Donatus)를 따서 이같이 불려지는 데, 그는 카르타고의 정식으로 뽑힌 주교를 거부하는 무리들 가운데 지도자격인 신학자로서 자신을 축성한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박해 시대에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풀도록 압력을 가하는 대신에 콘스탄틴은 그 논쟁에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도나티스트들의 편에 섰다가, 나중에는 그 반대자들의 편에 서서 제국의 힘을 쓰면서 자신의 결정들을 밀고 나갔다. 분열은 한때 찬란했던 북아프리카 교회의 마지막 파괴로 끝났고, 교회의 일에 제국이 끼어 들게 되는 선례를 남겼다.

 

그 다음에는 아리우스(Arius) 논쟁이 벌어졌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는 신성한 로고스(Logos),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는 하느님께서 무(無)로부터 창조하신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한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하느님은 창조되지 않은 성 삼위일체가 아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신 성부 한 분뿐이시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로고스 또는 말씀, 아들을 창조물 가운데 첫째이고 으뜸가는 것으로 만드셨다. 말하자면 그저 거룩하다고 불려질 뿐인 이 로고스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서 사람인 예수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이신 하느님과 똑같이 창조되지 않은 신성을 지닌,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 아니다. 그는 성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창조물이다. 하느님은 성 삼위일체가 아니다.

 

제 1차 세계 공의회

아리우스주의자들(Arians)에 의해 생겨난 논쟁은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니케아(Nicea)에 소집한 공의회에서 전체 교회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첫 세계 공의회로 알려진 이 공의회는 로고스,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아들이신 분은 창조되지 않으셨고 신성을 지니셨다고 선포하였다. 그분은 성부로부터 나셨으나(begotten), 그분에 의해 창조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성부와 본질이 같으시다.(homoousios) 그분은 참 하느님의 참 하느님이시고, 만물이 만들어지게 한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곧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세상의 구세주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사람이 되신 분은 바로 이 창조되지 않고 나신 하느님의 거룩한 외아들이시다.

 

제 2차 세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논쟁은 수십년 동안 거세게 계속되었다. 서로 다른 여러 곳에서 여러 공의회가 열렸고, 신앙에 대한 여러 가지 성명(聲明)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니케아의 신앙을 지킨 이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381년 오늘날 제 2차 세계 공의회로 알려진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리고 나서야 문제점들이 일단락 되었는데, 그 공의회에서는 니케아의 원래 결정이 다시 확증되고 성령의 신성(神性)이 선포되었다. 이 두 공의회의 서로 관련된 성명은 신앙의 상징인 정교회 신앙의 신조(Creed)를 포함하고 있다.

 

신앙의 신조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신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위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께로 좇아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교회의 교부들

니케아의 정교(Orthodoxy)를 지킨 위대한 교부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성 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373년 사망)와 갑바도기아의 주교들인 성 대 바실리오스(Basil 379년 사망), 그의 동생 성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394년 사망), 이들의 친구인 신학자 그레고리(Gregory 389년 사망)이다. 이들 교회의 교부들은 바른 그리스도교의 중심되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큰 고통을 무릅쓰면서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치고 설명했는데, 곧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이시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세 창조되지 않고 거룩하신 위격(persons)은 하나이며 똑같은 창조되지 않고 거룩하신 본질(nature)을 지니신다.

 

교회의 공의회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또한 교회의 직제와 규율에 관한 여러 가지 교회법(canons)이 만들어졌다. 이 법들은 서방에서 로마 교회의 수위권(首位權 primacy)을, 아프리카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동방에서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수위권을(교회법 6) 승인했고, 한편 예루살렘 교회의 존엄성을 인정했다.(교회법 7) 공의회는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속죄하는 뜻으로 하는 ‘무릎꿇기’(kneeling)의 실행을 금지시켰다.(교회법 20)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또한 여러 가지 교회법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에는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로마의 주교 다음가는 영예를 누린다”고 적혀있다.(교회법 3)

 

예식의 발전

4세기에는 많은 예식의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성 대 바실리오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407년 사망)의 이름을 딴 성찬예식의 성만찬 기도문들이 대체로 공식화되었다. 예루살렘의 성 끼릴로스(Cyril 386년 사망)의 것과 함께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교리문답식 설교들을 볼 때, 4세기의 세례와 견진성사가 오늘날 정교회에서 행하는 것과 거의 똑같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까지는 사순절(四旬節 Lent)과 부활절 축제가 잘 확립되어 있었다. 성탄절은 신현(神顯) 축일로부터 분리되었고, 그러므로써 12월 25일에 축하하는 이교도의 태양신 축제를 대신하여 독립된 교회의 축일이 되었다.(제 2권 예배를 보라.)

 

수도생활

4세기에는 또한 성 대 안토니(Anthony 356년 사망)가 에집트에서 이끈 수도생활과 시리아, 서방 등의 수도생활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 시기의 수도 성인들 가운데는 테베(Thebes)의 바울로, 빠꼬미우스(Pachomius), 힐라리온(Hilarion), 사바스(Sabbas), 에집트의 마카리우스(Macarius), 키프로스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그리고 시리아의 에프렘(Ephraim) 등이 있다. 서방의 수도 성인들 가운데는 제롬(Jerome), 요한 카시안(John Cassian), 뚜르의 마르땡(Martin of Tours) 등이 있다. 4세기의 유명한 주교 성인들로는 미라(Myra in Lycia)의 성 니꼴라오스(Nicholas), 뜨리문디(Trimunthys)의 성 스삐리돈(Spyridon), 밀란(Milan)의 암브로스(Ambrose) 등이 있다.

 

 

5세기

 

내적인 투쟁

5세기초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이 교회와 제국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각자의 위치에 대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전통적 칭호로써 존경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는 성모님에게서 나신 분은 영원한 하느님의 로고스가 와서 거하시는 ‘사람’일 따름이지 로고스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뜻하는 테오토코스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성 끼릴로스(Cyril 444년 사망)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육신을 따라’ 성모님에게서 나신 분은 바로 거룩한 하느님의 로고스이시기 때문에 성모님을 테오토코스로 부르는 것은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의 독생자께서는 모든 세대에 앞서서 성부로부터 나셨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오셔서 육신으로 나시어 동정녀로부터 사람이 되셨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과 성모님의 아들은 똑같은 분이시다.

 

제 3차 세계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회개하라는 성 끼릴로스의 호소에 굴복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431년에 에페소(Ephesus)에서는 성 끼릴로스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는 한 무리의 주교들이 공의회를 열어,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를 승인하고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물리쳤다. 이 모임의 결정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던 동방의 주교들에 의해 433년에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그 뒤, 431년의 공의회는 제 3차 세계 공의회로 알려졌다.

 

‘도둑맞은’ 공의회(The Robber Council)

또다시 에페소 공의회의 결정들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주제에 관한 논쟁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성 끼릴로스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진정한 인간성을 알맞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염려하는 까닭에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쪽에 서있는 다수의 동방 주교들과 성 끼릴로스는 공동의 이해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끼릴로스가 죽고 나자 그의 열광적인 추종자들은 다시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의 주교들과 관계를 끊고 말았다. 449년에, 스스로 성 끼릴로스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여기는 많은 무리의 주교들이 에페소에서 또 다른 공의회를 열었다. 이 공의회는 라트로시니움(latrocinium), 또는 ‘도둑맞은’ 공의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질에 대한 한 교리를 공식화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인간성이 모두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혼란과 분열이 계속되었다.

 

제 4차 세계 공의회

451년 칼케돈(Chalcedon)에서는 그리스도론의 문제를 풀기 위한 또 다른 공의회가 열렸다. 오늘날 교회에서 제 4차 세계 공의회로 인정되는 이 공의회는 성 끼릴로스와 431년 에페소 공의회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이 명백히 고백되어야 한다는 동방 주교들의 요구도 만족시켰다. 그 정의(定義)를 내림에 있어서 칼케돈 공의회는, 문자로 공식화된 로마의 성 레오 교황(Pope St. Leo)의 가르침을 가깝게 따랐다.

 

칼케돈의 정의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성육(成肉)하신 로고스이시고,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진짜(very) 아들이시다. 또한 베들레헴에서 ‘육신을 따라’ 성모님으로부터 나신 분은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거룩한 아들이시고 성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시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테오토코스이시라고 증언한다. 공의회는 선포하기를, 사람으로 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완전한 인간성을 취하셨고, 그럼으로써 죄는 없으시면서 모든 점에서 진정한 사람이 되셨다. 따라서 칼케돈의 정의를 따르면 나자렛의 예수께서는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을 지니신 한 인격(person), 또는 위격(位格 hypostasis)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신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시다. 하느님으로서 그분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본질’(homoousios)이시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모든 인간과 함께 ‘한 본질’(homoousios)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위격적인(hypostatic) 결합’이라고 불려진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한 독특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코 서로 혼합되거나 혼동됨이 없이, 그리고 또한 서로 분리되거나 분열됨이 없이 결합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신 한 인격이시다. 하느님의 아들과 성모님의 아들은 한 분이시면서 같은 인격이시다.

 

단성론자(單性論子)들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를 따르는 극단적인 제자들과 또한 그들과 관련된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성론자(monophysites)라고 불려지는 이 그리스도인들은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하였는데, 이는 공의회가 두 본성(natures)을 말하였고 그로써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실 때 오로지 한 본성만을 지니셨다고 주장하는 성 끼릴로스의 오랜 신앙고백을 위반하였다는 이유에서이다. 칼케돈의 결정을 지지하는 이들은 비록 그들의 주장이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과 다를지라도 그들의 가르침은 엄밀히 보아 같으며, 더 꼼꼼하면서도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불일치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고, 재결합을 위한 많은 시도가 5세기, 6세기, 그리고 최근에도 다시 있었지만 칼케돈의 결정을 반대하는 이들은 정교회로부터 분리된 채 남아있다.

 

오늘날 이른바 단성론자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에집트의 꼽틱(Coptic)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시리아의 야고보(Jacobite) 교회, 인도(India)의 시리아 교회, 그리고 아르메니아 교회이다. 이 교회들은 흔히 ‘보다 작은(Lesser) 동방 교회’ 또는 ‘오리엔탈(Oriental) 정교회’라고 불려진다.

 

공의회들

3차와 4차 세계 공의회에서는 규율과 관계되며 실제적인 성격을 지닌 여러 교회법들이 만들어졌다. 에페소 공의회는 첫 두 공의회(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의 것과 ‘다른 신앙’을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교회법 7) 이 교회법은 서방 교회에서 신앙의 신조에 ‘필리오케’(filioque)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쓰기 시작함에 따라,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정교회에 의해 쓰여져 왔다. 칼케돈 공의회는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에 ‘옛 제국의 로마와 동등한 특권’을 주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수도가 황제들과 원로원(senate)으로부터 존중되기 때문이다.(교회법 28)

 

서방

5세기에는 로마가 야만인들(barbarians)에게 멸망당함으로써, 서방의 그리스도교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서방의 암흑시대는 한 인물의 죽음에 바로 뒤이어서 시작되었는데, 그의 엄청나게 많고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작들은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서방 그리스도교에 가장 크고도 유일한 영향을 끼쳤으니, 그가 바로 히포(Hippo)의 주교인 어거스틴(Augustine 430년 사망)이다.

 

 

6세기

 

황제 저스티니언(Justinian) 1세와 단성론자들

동방에 있는 정교회 역사의 6세기는 황제 저스티니언 1세(527-65년)의 사람됨과 정책에 의해 좌우되었다.

 

저스티니언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거룩한 일에 관계하는 사제직과 인간들을 다스리는 제국 사이의 일치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됨으로 이해했다. 그의 목표는 제국의 서쪽 방면을 야만적인 침입자들로부터 되찾는 것과 단성론자들을 설득하여 칼케돈 공의회의 정교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인 교회와 제국을 완전히 재결합시키고 싶었다. 저스티니언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이 이끄는 군대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의 첫 목표를 이루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시도가 대담하고 지속적이긴 했지만 둘째 목표에는 실패했다.

 

단성론자들을 설득해서 정교회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저스티니언의 주된 시도는 칼케돈 공의회의 지지자들인 세 신학자를 공식적으로 정죄함으로써 널리 환영받았으나, 칼케돈에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서는 경멸되었다. 544년의 제국 법령과 553년에 열린 공의회, 곧 전통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 또는 제 5차 세계 공의회로 불려지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저스티니언은 공식적으로 이른바 ‘세 가지 장’(Three Chapters)을 정죄했다. 이것들은 씨르의 떼오도레(Theodoret of Cyr), 에데사의 이바스(Ibas of Edessa)의 불쾌한 작품들과 몹수에스티아의 떼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의 작품과 사람 자신이다.

 

‘세 가지 장’의 정죄는 칼케돈 공의회를 엄격하게 지지하는 이들을 불쾌하게 했다. 그들은 이들 세 신학자의 잘못되고 애매모호한 가르침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정죄될 만한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칼케돈의 정교신앙에 대한 단성론적인 반대자들을 달래보려는 저스티니언의 노력은 ‘세 가지 장’을 정죄함으로써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같은 수단으로는 교회 또는 제국과 재결합하기를 반대하는 이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제 5차 세계 공의회

‘세 가지 장’의 비정교적이고 모호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에 덧붙여서, 제 5차 세계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위격적으로(hypostatically) 결합되어 있다는 정교의 교리를 주의를 기울여 명료화(明瞭化)하였다. 여러 개의 긴 성명을 통해서 공의회는 모호함이 없이 전통적인 정교 신앙을 확증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시며, 당신 자신 안에 하느님과 사람의 두 본성을 인격적으로(또는 위격적으로) 결합시키신 전적으로 동일한 신적 인격(hypostasis)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그 두 본성이 서로 융합(融合)되거나 서로 분리됨이 없다는 것이다.

5차 공의회는 또한 오리겐(254년 사망)과 많은 비정교적인 교리가 담긴 그리스도교의 ‘정신주의적’(spiritualistic) 해설본(解說本 version)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그의 6세기 제자들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정죄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물질이 되지 않으신 오직 한 분뿐인 창조된 영이시고, 사람의 영혼은 (그보다) 먼저 있던 영들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물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한 영화(靈化 spiritualization)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황제 저스티니언 1세와 개혁

저스티니언의 통치 때에는 또한 제국 안에 있는 그리이스풍의(Hellenistic) 이교주의적인 잔재(殘在)에 대한 일치된 공격이 있었다. 아테네 대학은 529년에 문을 닫았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문화가 장려되었다.

 

저스티니언은 제국의 도시와 제국 곳곳에 많은 교회 건물을 지었는데, 특별히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리고 에집트의 시나이 산 위에 세웠다. 그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은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져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께 바쳐진 성전, 곧 장엄한 ‘성 지혜’(Hagia Sophia) 성당이다. 나무에 새기고 모자이크로 만드는 성화 제작이 이 때에 한창 꽃을 피웠다. 야만인들의 정복기에 서방에서 제국의 정부가 있던 라베나(Ravenna)의 바실리카식 건물들도 건축되었다.

 

예식의 발전

많은 예식용 성가들이 쓰여졌는데, 그 가운데는 성탄절 시기송(Kontakion)과 성가 작가인 성 로마노스(Romanos 510년 사망)의 작품들이 있다. 저스티니언 황제 자신도 성가 ‘독생자’를 썼는데, 이 곡은 정교회 성찬예배의 시낙시스(synaxis)에서 지금껏 불려진다.

 

6세기에는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곳곳에 예식에 따른 예배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 확립되었는데, 이는 특별히 콘스탄티노플의 예식에 대한 실천들이 제국 여러 곳의 다른 도시들에 의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교회 생활의 팔레스타인(Palestinian) 중심부에서 이미 쓰이는 어떤 예전적 축일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축일로서는 성모 탄생과 성모 안식 축일, 그리고 주님의 입당 축일이 있었다. 이 때까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주님의 변모 축일이 지켜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간 제국 수도의 축일 축하에 덧붙여서, 형식을 갖춘 예전적 입당과 교회의 성찬예배에서 삼성송(Trisagon)과 신앙의 신조를 낭송하는 것과 같은 요소들이 덧붙여졌다.

 

여러 요소들을 수렴(收斂)함으로써 교회의 예전적인 의식과 경건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이 요소들이 바로 다른 교회들의 모범이 되는 콘스탄티노플적인 교회의 생성이었는데, 곧 제국 교회에 어울리는 의식의 발달과 아레오바고인 디오니시오스(Dionysius the Areopagite)의 이름으로 쓰여진 신비신학의 출현, 그리고 단성론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제국 권력층의 시도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에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실천들이 초대 교회의 원래 유대교적이면서 그리스도교적인 예배,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에서 발달된 기도의 규칙(rule of prayer),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예전적인 실천과 결합되었는데, 이는 정교 역사에서 예전적인 예배의 첫 위대한 종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다섯 곳의 총대주교직(Patriarchates)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적어도 동방의 그리스도인들 마음속에서는 저스티니언 황제가 ‘우주의 오감’(五感 senses)이라고 일컬었던 콘스탄티노플,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다섯 총대주교직(pentarchy) 가운데 첫째 가는 교구로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는 명칭은 제국의 도시에 있는 모든 수장(首長)들의 지위에 붙여졌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고행자 요한(John the Faster 528-95)이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직이라는 명칭을 취했을 때, 로마의 주교(590-604)인 교황 성 대 그레고리(St. Gregory the Great)는 그리스도교의 사목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강력히 반대했다. 신학자이면서 성인과 같은 명성을 얻은 사목자였던 성 대 그레고리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사순대재의 주중(週中)에 정교인들이 드리는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와 관련되어 있다.(제 2권 예배를 보라.)

 

서방

성 대 그레고리 말고도 눌시아의 성 베네딕뜨(St. Benedict of Nursia)와 그의 수도원 제자들은 이어지는 서방 교회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야만 했다. 이 세기의 성인들 가운데에서는 성 대 그레고리와 동시대인인 성 꼴룸바(St. Columba)와 캔터베리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of Canterbury)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이들은 서유럽과 영국, 아일랜드의 야만인 부족들 속에서 일한 선교사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다.

 

스페인에서는 6세기와 7세기에 필리오케(filioque)라는 말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덧붙여졌다. 침략해 오는 야만인들, 곧 아리우스주의자들인 이들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취해진 이 행동은 나중의 교회 역사에서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되었다.

 

 

7세기

 

아레오바고인 디오니시오스

6세기에 아레오바고인 디오니시오스의 이름으로 나타난 신학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4차와 5차 세계 공의회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들은 예배 의식에 대한 상징적인 해설을 통하여 교회의 전례적인 경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작품들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불가해성(不可解性)과 그분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에게 그분은 절대적인 ‘타자’(他者 otherness)임을 강조하는 신비신학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작품들에 담긴 그리스도에 관한 한 가르침은 7세기에 중대한 어려움을 낳게 된다.

 

디오니시오스의 작품들에는, 성육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가지 서로 다른 활동과 작용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신인적인(theandric) 의지와 행동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이 담겨있었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 뿐인 신인(神人)의 의지를 지니셨음을 뜻한다 해서 ‘일의론’(一意論 monothelitism)이라고 불리우거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 뿐인 신인의 행동, 작용 또는 에너지만을 지니셨음을 뜻하기 때문에 ‘monenergism'이라고 불려진다. 이런 교리적 형식화가 궁극적으로 단성론자들의 분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아가서 그들을 교회에 재결합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이론은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사실 단성론자들은 거짓(Pseudo) 디오니시오스의 작품들 속에 담긴 가르침을 깊이 알고 있었다. 이들 작품들을 쓴 익명의 저자 자신은 단성론자와 매우 비슷했다.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5세기 중엽 이후에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이들의 기대했던 재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오직 하나 뿐인 신인의 의지와 행동이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고백자 성 막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 662년 사망)와 로마의 교황 성 마르틴(St. Martin of Rome 655년 사망)이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고백자 성 막시무스와 성 마르틴

자신들의 충실한 지지자들과 함께 이 두 사람은 주장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인격 속에 두 가지 별개이고 분리된 본성을 지니신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고 분리된 의지와 행동을 지니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교부들께서는 성모님의 한(one) 아들이신 하느님의 한(one) 아들이 계시다고 주장했지만, 그 한(one) 아드님께서는 하느님과 사람으로서 서로 다른 의지와 행동을 지니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같은 신적 의지와 에너지, 행동, 작용, 그리고 힘을 완전하게 갖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적인 의지와 에너지, 행동, 작용, 그리고 힘을 완전하게 갖고 계신다. 구원은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간적 의지(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인간적 의지)를 당신의 신적 의지(하느님의 의지)에 자유로이 그리고 기꺼이 복종시키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께서 정말로 인간적인 의지를 갖고 실재의(real) 사람이 되신 것은 실재의 사람으로서 성부께 완전하며 기꺼이 하는 복종을 통해 ‘모든 의(義)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마지막인 아담으로서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은 바로 당신의 진정한 인간적 행위를 통해서이다.(제 1권 교리를 보라.)

 

성 막시무스와 성 마르틴은 일의론적인 입장을 반대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단성론자들과 재결합하는 한 수단으로서 일의론을 쓰기를 몹시 바랬던 제국의 권력에 의해서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했으며, 팔과 다리가 잘렸다.

 

제 6차 세계 공의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두 성인의 가르침이 승리를 거두었다. 제 6차 세계 공의회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의 세 번째 공의회가 680-681년에 열려서 그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확증하였고,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진정한 인간성을 없애버린 채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세르기우스(Sergius) 총대주교와 로마의 호노리우스(Honorius) 교황을 정식으로 정죄하였다.

 

신학 작품들

고백자 성 막시무스는 또한 영적이고 금욕적인(ascetical)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에집트에 있는 그의 동시대인이며 시나이 산의 성 캐더린(St. Catherine) 수도원 원장인 성 요한 끌리마꾸스(St. John Climacus 649년 사망)는 영적인 삶에 관한 고전적인 작품인 ‘천국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를 썼다. 7세기에 크레테의 성 안드레(St. Andrew of Crete)는 여전히 사순대재 동안 정교회에서 읽혀지는 속죄의 카논(canon)을 썼다.

 

이슬람의 탄생

7세기에는 또한 예언자 모함메드(Mohammed)에 의한 이슬람의 탄생이 있었는데, 그는 622년에 메카(Mecca)로 도망감으로써 회교(Moslem)의 기원(紀元)을 시작했다. 이 새로운 종교의 추종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도교 제국을 공격했는데, 이 당시 그리스도교 제국은 페르시아인들과 오랜 전쟁을 벌인 뒤 매우 약해져 있었다.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가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를 갖고 있던 적들로부터 그것을 되찾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 온 것이 바로 이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제국 곳곳에서는 십자가 현양(顯揚) 축일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7세기의 30년대까지는 십자가를 공경하기 위한 9월의 특별한 날이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지켜졌다.(제 2권 예배를 보라.)

 

퀴니섹스트(Quinisext) 공의회 또는 뜨룰로(Trullo) 공의회

7세기말, 아마도 692년에 한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제국 궁전의 돔식의(domed) 방 또는 뜨룰로에서 열렸다. 거기에서는 102개의 교회법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 법들은 또한 퀴니섹스트 공의회의 교회법이라고 불려지는데, 그것은 그 법들이 아무런 교회 법령도 만들지 않았던 5차와 6차 세계 공의회의 작업을 계속해서 잇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법들이 이미 있는 저스티니언 시대의 사회 법규와 교회법을 서로 종합함으로써 정식의 교회법을 새롭게 하려고 했다. 다른 것들은 초대 교회의 실천과 훈련에 관한 규범들을 더 세심한 용어로 표현했다. 이를테면 이 법들은 혼인한 남자는 아내를 둔 채로 보제와 사제직에 임명될 수가 있지만 이미 성직을 받은 보제와 사제는 혼인을 할 수가 없다는 것에 관련된 규정을 공식화했다. 공의회는 오직 독신자만이 주교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저스티니언 시대의 법을 강화시켰다. 이 공의회는 또한 성직을 받을 수 있는 나이를 규정했으며, 성직자들과 관련된 전통적인 교회의 규율을 다시 확인했는데, 이를테면 성직자들이 세속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는 것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예식의 발전

뜨룰로 공의회의 교회법에서는 부활절 전에 40일의 금식 기간을 반드시 둘 것, 이 사순절의 평일에는 감사의 성찬예배를 드리지 못하며, 대신에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분명히 공포되었다.(교회법 52) 그 법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일에는 회개의 ‘무릎꿇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영화롭게 하도록 요청한다.(교회법 90) 이 공의회는 평신도가 성당의 성소(sanctuary)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으며, 정교인이 비(非)정교인과 결혼성사(sacramental marriage)를 올리지 못하도록 한다.(교회법 69, 72) 공의회는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는 이가 ‘훈련받지 않은 채 소리지르는 것’과 ‘교회에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는 어떤 선율’(melodies)을 쓰는 것도 금하도록 명하였다.(교회법 75) 공의회는 정당한 이유없이 ‘계속해서 세 주일’ 동안 성찬예배를 빠지는 사람을 파문하도록 요구하였다.(교회법 80) 마지막으로 공의회는 ‘낙태를 일으키는 약을 주는 사람과 임신 3개월이 지난 태아를 죽이기 위해 약을 쓰는’ 사람에게 ‘살인에 해당하는 벌’을 주도록 요구하였다.(교회법 91)

 

 

8세기

 

성화(聖畵 icon) 논쟁

8세기에 동방의 이소리안(Isaurian) 통치자인 레오 3세(717-741)와 콘스탄틴 5세(741-775)는 교회를 자신들의 지배 아래 종속시키려고 했다.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얻으려고 이 두 황제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였는데, 특별히 교회의 일치를 수호하는 수도자들을 공격하였다. 공격은 성화를 공경하는 이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의 형태를 띠었다. 박해의 대상자들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확히 우상숭배와 이교주의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성화에 대한 지나친 공경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753년에 열린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공경하는 것을 정식으로 정죄하였다. 교회와 공공 건물, 그리고 사람들의 가정에서 모든 상(像)들을 없애도록 했다. 이 공의회는 통치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권위를 얻기 위해 벌인 정치적 운동일 뿐 아니라 또한 성화 공경에 반대하는 이성적이고 잘 다듬어진 주장을 펴기도 했다. 공의회의 입장을 밑받침하는 토대는 주로 성경의 가르침에서 취한 것인데, 곧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며, 따라서 눈에 보이고 아로새긴 상(像)들은 참된 신자들이 만들거나 공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 대하여 광적으로 엄격한 회교도들(Moslems)과 가까이 접촉함으로써 이같은 주장이 나오게 되었음직하다.

 

교회의 주교들은 성화를 공경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정죄하도록 강한 압력을 받았다. 주교들이 정죄하자, 성화를 계속해서 지닌 채 공경하는 이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곧 뒤따랐다. 762년에서 775년까지는 ‘피의 10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주로 수도자들(monks)인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숨기고 공경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제 7차 세계 공의회

성상 공경을 좋게 여기는 여왕 이리니(Irene 780-802)의 통치 때인 787년에 한 공의회가 니케아에서 열렸는데, 거기에서는 교회에서 성상을 합법적이고 적절하게 쓸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지금은 제 7차 세계 공의회로 알려진 이 공의회는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St. John of Damascus 749년 사망)의 신학을 따랐다. 공의회의 결정은 성화를 만들고 공경하되(honored) 예배해서는 안된다(not worshiped)는 점을 확인하였다.

 

공의회의 주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 본질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成肉)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게 되었다.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성부를 보는 것이다.(요한 14:8) 교회에서 성화를 그리는 것과 성화를 공경하는 것이 부정될 때, 예수님의 참 인간성은 부정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창세기 1:26) 창조된 참모습으로 가꾸어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이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도 부정된다.

 

그래서 공의회에서는 거룩한 성화를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성부 하느님과 성령은 그릴 수도 없고 그려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와 테오토코스, 그리고 성인들은 성화의 형태로 그릴 수 있는데, 그것은 그분들이 하느님에 의한 인간 구원의 실재성(reality)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한 인간과 모든 창조물의 참된 변화와 성화를 보여준다. 교회에서 성화는 공경될 수 있는데, 그것은 “성화에 대한 공경은 그 성화의 원형(原形)에로 승화되며, 따라서 성화를 공경하는 이는 거기에 그려진 분의 인격(hypostasis)을 공경하는 것이다.”(제 7차 세계 공의회)

 

787년의 공의회 뒤에도 성화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성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교회(정교회!)로 되돌아 온 843년에 마침내 공격은 끝났다.

 

예식의 발전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또한 8세기 예식의 발전에도 공을 세웠다. 그는 회교국의 왕(Moslem Caliph)에게 속한 고위 성직자였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 사바스(St. Sabbas)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부활절 조과의 카논(Canon)처럼 지금까지 교회에서 불려지는 많은 전례 성가들과 정교회의 장례식에서 불려지는 성가들을 썼다. 그는 ‘8음조’(Octoechos)의 원 작곡자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일년 동안 한 주일에 하나씩 차례로 돌아가면서 여덟 개의 서로 다른 선율을 써서 교회에서 노래하는 성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제 2권 예배를 보라.) 성 요한은 ‘정교 신앙에 대한 완전한 해설’(Complete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이라고 불려지는, 정교회의 교리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논문을 쓴 인물이다. 이 논문은 ‘지식의 샘’(The Fount of Knowledge)의 제 3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모입당 축일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받아들여졌다. 크레테의 성 안드레에 따르면, 이미 이 축일은 일찍이 6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지켜지고 있었다. 따라서 8세기까지는 이 축일이 정교회의 전반적인 달력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서방

8세기에 서방에서는 야만인 부족들이 계속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는 성 보니파스(St. Boniface 754년 사망)였다. 또한 이 세기에 로마의 주교들은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소유지를 다스리는 세속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새로이 나타난 카롤링 왕가의(Carolingian) 통치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로마의 주교들과 협력해서 서방의 제국을 회복시키려고 한 이들이 바로 이카롤링 왕조의 야만인(barbarian) 통치자들이었으며, 특별히 샤를마뉴(Charlemagne)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방 제국의 정당성을 공격해야만 했다. 그들은 성화상 경배를 핑계로 해서 동방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비난하고, 니케아 신조에서 ‘그리고 아들에게서’(filioque)라는 말을 빼버렸다고 동방을 비난하면서 공격하였다. 이같은 비난들은 샤를마뉴가 792년에 로마의 교황에게 보낸 카롤링 북스(Caroline Books)에 실려있다.

 

 

9세기

 

성화 논쟁의 끝

거룩한 성화에 대한 공경이 정식으로 교회 안에서 지지를 받은 787년의 공의회에 뒤이어서, 다시 한 번 더 성화에 대한 공경과 공경자들 모두를 공격한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들이 나타났다. 이리니 여왕이 802년에 죽자, 아르메니아인 레오(Leo the Armenian)가 황제가 되었다. 815년에 그는 교회에서 성상을 신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 신자들이 성화를 공경하거나 그것에 입맞추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815년의 성지주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위대한 스투디오스(Studios) 수도원의 원장인 성 떼오도르(St. Theodore)는 성화들을 든 채로 거리를 행진하도록 이끌었다. 이 행진은 황제의 공격과 고문, 살인을 낳았다. 오로지 843년에만, 떼오도라(Theodora) 왕비가 주도권을 갖게 되자 메또디우스(Methodius) 총대주교의 지도 아래 성화들은 단지 처음이면서 마지막으로 교회에 되돌아 왔다. 그 해의 사순절 첫 주일에 성화들이 정식으로 되돌아 온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마다 지켜지는 정교주일(Sunday of Orthodoxy, Feast of the Triumph of Orthodoxy)의 시작이 있게 되었다.

 

끼릴과 메또디우스: 슬라브인들에 대한 선교

9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성 포띠오스(St. Photius)는 모라비아(Moravia)로 선교사들을 보내 슬라브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게 했다. 그리스인 형제인 콘스탄틴(Constantine)과 메또디우스(Methodius)는 863년에 모라비아에 도착하였다. 콘스탄틴은 이미 슬라브어 문자, 곧 지금 고(古) 슬라브어(Old Slavonic) 또는 고(古) 불가리아어(Old Bulgarian)라고 불려지는 문자를 고안해냈고, 그 형제는 그것을 써서 교회의 책들을 슬라브어로 옮기곤 했다. 그들이 옮긴 책 가운데는 문자(alphabet)를 가르치는 것과 예식서와 예식을 소개하는 것, 그리고 사제가 되도록 훈련시키는 책 등이 들어있다.

 

콘스탄틴과 메또디우스의 선교에 대해, 그들보다 더 일찍 모라비아에 온 라틴교회의 프랑크인(Frankish) 선교사들은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교회의 공식적인 언어는 오직 히브리어와 라틴어, 그리고 그리스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슬라브어가 교회의 예배에서 쓰여야만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콘스탄틴과 메또디우스는 자신들의 일,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예배 때 자기 나라의 말을 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869년에 로마로 갔다. 교황 하드리안 2세(Hadrian II)는 그리스인 선교사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축복해 주었다.

 

콘스탄틴은 869년에 죽었다. 죽기 바로 전에 그는 수도자가 되어 끼릴(Cyril)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는 이 이름으로 교회의 성인이 되어 알려졌고, 그가 만든 문자는 그 이름을 따서 ‘끼릴 자모’(字母 [Cyrillic])라고 불려졌다.

 

메또디우스는 빠노니아(Pannoni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가 다시 선교사의 일을 하게 되자, 프랑크족인 독일인 성직자들이 독일인 루이(Louis)의 도움으로 그를 붙잡았다. 873년에 교황 요한이 메또디우스에게 일어난 일을 발견하고는 그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885년에 메또디우스가 죽고 난 뒤, 그가 이루어 놓은 일들은 모두 프랑크족인 독일인 권력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의 제자들 대부분은 붙잡혀서, 도망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일부는 불가리아로 도망갔고, 성 클레멘트(St. Clement)와 성 나움(St. Naum)은 그 곳 사람들 속에서 위대한 선교의 과업을 이루어냈다. 이 때까지는 불가리아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의 받아들였다. 그들은 870년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소속되었다. ‘슬라브인들의 복음전도자’인 성 끼릴과 성 메또디우스의 선교사역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 불가리아로부터 세르비아(Servian) 땅을 거쳐서 마침내는 다음 세기들에 키에프(Kiev)와 북러시아(Northern Russia)에 까지 이르게 된다.

 

필리오케 논쟁

동방과 서방 사이의 충돌은 슬라브인들에 대한 선교에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랑크족과 독일인의 새 통치자들이 서유럽과 서방교회에서 하고자 하는 역할에 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800년의 성탄절에 샤를마뉴는 로마의 교황에 의해서 황제가 되었다. 792년에 이미 이 새로운 통치자는 자신의 카롤링 북스(Libri Carolini)를 교황 하드리안 1세(Hadrian I)에게 보냈다. 샤를마뉴가 동방교회를 공격한 이유는, 동방의 황제를 불신임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새로운 신성 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환상 속에, 샤룰마뉴는 서방 전체와 함께 동방 전체를 끌어넣고 싶었다.

 

808년에 로마의 교황 레오 3세(Leo III)는 동방에 대한 샤를마뉴의 비난에 반대하였다. 그는 성 베드로 성당 문 위의 은으로 된 명판(銘板 tablets) 속에 모셔져 있는, 필리오케가 빠진 신앙의 신조(creed)를 갖고 있었다.

 

교황권

비록 전체 그리스도교권에 적용되는 규칙을 확립하려는 샤를마뉴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로마의 교황들은 서방 전체에 대한 교회의 지배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니꼴라스 1세(Nicholas I 858-867)처럼 강력한 교황들은 서방의 모든 주교들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휘둘렀으며, 권위있는 평신도의 영향과 지역의 대주교들(metropolitans)이 좋아하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를 억제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가짜 교황의 교서(False Decretals)에 의해 도움을 받았는데, 이것은 매우 초기의 교황들의 편지라고 주장되었으나 사실은 9세기 프랑크인들이 위조한 문서(forgeries)였다. 덧붙여서 이른바 ‘콘스탄틴의 증여’(Donation of Constantine)가 알려진 그것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4세기에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의 주교들에게 어떤 권한과 특권을 주었다고 주장했는데, 거기에는 나중에 교황령(papal states)이라고 불려지게 된 로마 주위의 영토에 대한 세속적인 지배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티오스

861-886년부터 동방과 서방 교회 사이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콘스탄티노플에는 교회와 사회의 일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다투는 두 집단, 곧 이른바 열성파 또는 보수파와 온건파가 있었다. 교회에 대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지도자를 내세우기 위해서 포티오스라는 이름의 평신도가 총대주교의 자리에 올랐다. 이른바 보수파의 극단주의자들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포티오스와 그의 선출을 승인한 제국 정부를 상대로, 교회의 평화를 위해 조용히 물러난 전(前)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로마에 호소하였다. 교황 니꼴라스는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호소를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로 잡아, 861년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를 그곳에서 열었다. 교황의 사절단은 공의회에 도착해서 포티오스가 적법한 총대주교임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것은 잘 해결되었다. 그러나 사절단이 로마로 되돌아갔을 때 교황 니꼴라스는 그들의 결정을 거부했고, 863년에 또 다른 공의회를 로마에서 열어 이그나티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공포하면서 포티오스를 면직(免職)시켰다. 그의 행동은 무시되었다.

 

866년과 867년에 불가리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867년에 포티오스와 500명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연 공의회는 교황 니꼴라스가 불가리아 교회의 일에 간섭한 것을 정죄하였다. 그러나 바로 같은 해에 콘스탄티노플에는 또 다른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바실리오스 1세가 자신의 전임자이며 후원자(patron)였던 이가 암살됨으로 말미암아 황제가 되었고, 따라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그나티우스가 포티오스를 대신하여 총대주교로서 다시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869년에 니꼴라스의 계승자인 교황 하드리안 2세는 포티오스가 불가리아의 일에서 한 역할을 문제 삼아 다시금 그를 파문했다. 그러나 877년에 상황은 변하였다. 새 황제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포티오스는, 존경하는 이그나티우스가 죽자 다시 총대주교가 되었다.

 

879년에 다시 한 번 교황의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포티오스가 의장을 맡은 이 공의회에서는 동방에서 누렸던 로마 교황의 전통적 특권이 포티오스에 의해 명백하게 확인되었고, 새로운 교황인 요한 8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포티오스를 정죄했던 863년과 869년의 공의회는 무효인 것으로 선언되었다. 787년의 공의회가 제 7차 세계 공의회로 받아들여졌다. 신앙의 신조는 필리오케 없이 확증되었다.

 

포티오스는 10세기에 정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많은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서 글을 쓴 위대한 신학자였는데, 특별히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현(發現)하심을 변호하면서 필리오케의 문제에 대해서 썼다. 그는 고전적이고 교부적인 저술의 편찬자(compiler)였다. 그는 슬라브인에 대한 선교를 후원했다. 그는 니꼴라스의 과장된 요구에 맞서서 진정한 교회 전통을 지켰고, 그러므로써 궁극적으로 로마 교회와 교황 요한 8세와의 일치를 이루어냈다. 그는 정치적인 일에서는 뛰어난 외교관이었으며, 겸손한 인격과 지혜를 갖추어 동방과 서방의 모든 집단에 속한 호의적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성 포티오스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에서 참으로 위대한 주교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예식의 발달

9세기에는 또 다른 위대한 성인인 스투디오스의 성 떼오도르(St. Theodore of Studios)가 예식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성 떼오도르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원장이였으며, 자신의 생애 동안 약 십만 명의 수도자들을 책임졌었다. 그는 성화상에 대한 수호(守護)로 유명하며, 또한 정교회의 전례식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공적 예배의 순서이기도 한 전례식의 띠삐꼰(typikon)은 9세기 이후로 전체 정교회를 위한 표준적인 예배 순서가 되었다. 사순대재와 부활절을 위한 예배서인 사순절 뜨리오디온(Lenten Triodion)과 꽃의 뜨리오디온(Flower Triodion)은 거의 전부가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수도자들 작품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이는 성가 작곡자인 성 요셉(St. Joseph the Hymnographer)이다.

 

또한 9세기에 비롯된 것으로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찬식 사본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정교회에서 행하는 것과 사실상 똑같은, 신자들의 예식을 담고 있다.

 

법전

9세기말에 황제 바실리오스 1세는 민법(民法)을 새로이 편찬(編纂)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 가운데 하나가 에빠나고게(Epanagoge)였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일치 또는 ‘조화’의 체계를 재확인했다.

 

서방

일반적으로 말해서 9세기는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기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세기가 동방에서는 르네상스(renaissance)의 시기였던 반면에, 서방에서는 로마의 교황권을 중심으로 더 고조되는 중앙집권화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서방에서 눈여겨볼 유일한 신학자는 존 스콧 에리제나(John Scot Erigena 877년 사망)로서, 그는 디오니시오스와 성 막시무스의 동방신학을 서방 교회에 소개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10세기

 

문화적 르네상스

동방에서는 10세기에 일반적으로 9세기의 문화적 르네상스가 계속 이어졌다. 교부들의 작품들이 수집되었다. 처음으로 번안가 성 시메온(St. Simeon Metaphrastes)은 교회 ‘성인들의 삶’을 편찬했다. 또한 미하엘 프셀루스(Michael Psellus)와 요한 이탈로스(John Italos) 같은 이들에 의해서 이교적인 고대상(pagan antiquity)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있었고, 그들의 극단적인 ‘헬레니즘화’(hellenization)는 교회와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960년 아토스 산의 성 아타나시오스(St. Athanasios of Mt. Athos 1000년 사망)는 대 라브라(Great Lavra)를 세움으로써, 성산(聖山) 위에 위대한 수도 공동체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신 신학자 성 시메온(St. Simeon the New Theologian 1022년 사망)은 그리스도인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에 관해서 자신의 영향력 있는 논문들을 썼다.

 

교회와 국가

10세기에는 또한 비잔틴 사회에서 교회와 사회의 여러 측면들이 점점 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나타났다. 교회는 결혼과 가족들의 일에 더 많은 통제를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만일 어떤 결혼이 사회의 당국에 의해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정교의 교회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교회의 축복을 때에 맞추어 받아야만 한다. 동시에 교회는 전보다 더 ‘최소한의 요구조건’(minimum requirements)을 확립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것은 이른바 ‘네 번째 결혼 논쟁’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925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니꼴라스 미스띠꼬스(Nicholas Mystikos)가 황제 레오 6세의 네 번째 결혼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정교의 교회법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교회에서 네 번의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하게 만들었다. 결혼에 대한 교회의 신학은 그 표준으로서 영구적인(perpetual) 일부일처제를 지지한다. 곧,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은 죽음에 의해서도 깨지지 않는다. 더구나 과부와 홀아비의 재혼도 이 표준에 적합치 않으며, 비록 그같은 일이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질지라도 그러하다. 그러나 ‘네 번째 결혼 논쟁’과 함께 사람들의 관심은 최소한의 것(minimum)에 모아지게 되고, 따라서 정교회가 신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결혼을 ‘허락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불가리아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미카엘 3세를 자신의 대부(代父)로 해서 869년에 세례를 받은 불가리아의 짜르(tsar) 보리스(Boris)는 마침내 결정적으로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섰고, 10세기까지 그의 교회는 동방의 비잔틴 예식 속에서 굳세게 확립되었다. 특별히 그의 아들인 짜르 시메온(Tsar Simeon)의 영도 아래서 불가리아는 강력한 국가였고, 비잔틴적 불가리아(Byzantino-Bulgarian) 문화는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 세기의 끝 무렵까지 마니교(Manichaean) 전통에서 비롯된 이원론적이고 정신주의적인 소종파(sect)인 보고밀스(Bogomils) 이단이 퍼져나갔다.

 

키에프의 블라디미르

988년에 키에프 공국(公國)의 신하들이 위대한 왕자 블라디미르(Great Prince Vladimir)의 지도 아래 드니퍼(Dnieper) 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크라이나(Ukraine)와 러시아에서 정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 바실리오스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블라디미르의 사절단이 비잔틴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신앙을 찾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비잔틴의 공주 안나(Anna)와 혼인하여 자신의 공국을 콘스탄티노플의 제국과 연합시키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책(上策)이라 점을 키에프의 왕자가 알았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세례를 받고 나서 블라디미르는 진짜 영적인 회심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영토 안에 그리스도교적인 원칙을 세우고, 자신의 백성들을 정교 신앙으로써 계몽시키려고 많은 애를 썼다. 당대(當代)의 그리스도인 왕자로서 개인적, 공적으로 행한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블라디미르는 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의 할머니인 위대한 공주 올가(Olga)는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 왕자의 결정과 행동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고, 그 또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예식의 발달

예전적으로 성모보호 축일은 10세기에 비롯된다. 이교도인 슬라브인들이 공격해올 때,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성 안드레(St. Andrew the Fool for Christ 956년 사망)는 성모님께서 하느님 앞에서 중보하시면서, 기도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백성들을 당신의 가리개(veil)로써 지키고 계신(omophprion-protection) 환상을 보았다. 그 역사적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은 교회의 한 가운데 성모님께서 현존하시는 축일로서 주로 경축되는 성모보호 축일은, 역설적이게도 슬라브 전통을 지닌 교회에 의해 거의 하나뿐인 대중적 축일로서 지켜지고 있다.

 

서방

9세기 후반에 서방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 가운데 하나인 때로 접어들어 갔다. 새로운 침략의 물결이 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의 상대적 안전을 파괴했다. 교회는 평신도 군주들의 지배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았다. 동방과의 교류는 사실상 끊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끌루니(Cluny) 수도원으로부터 흘러나온 개혁 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11세기

 

대분열

11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에는 중요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당시 갈등의 직접적 원인은 남(南)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적인 예식을 행하는 것을 교황이 탄압한 것과 동방에서 라틴적인 예식을 행하는 것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탄압한 것이었다. 1053년에 교황은 두 교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보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Michael Cerularius)는 그들이 정치적 목적을 띠고 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교황의 사절단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1054년 7월 16일 교황대표단의 수석인 추기경 훔버트(Humbert)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 그는 로마의 사절들에게 보여준 무례함에 화가 났고, 그래서 오직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에게만 적용하는 아나테마(anathema)와 파문의 문서를 성 지혜(Holy Wisdom) 대성당의 제단 위에 놓았다. 동시에 추기경은 매우 조심스럽게 콘스탄티노플을 ‘가장 정교적인 도시’라고 칭찬하였다.

 

훔버트가 케룰라리오스를 아나테마하고 파문한 공식적 이유는 신앙의 신조에서 필리오케를 없앤 것과 혼인한 성직자가 예식을 행하는 것, 그리고 예식의 잘못 등이었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7월 16일의 사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훔버트를 파문함으로써 그의 행동에 대해 응수했다. 그는 라틴의 악습(abuses)을 적은 긴 문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여러 가지의 예전적 의식에 관한 것으로서 성만찬식을 위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쓰는 것 따위를 지적하고 있다.

 

비록 훔버트 추기경이 오로지 총대주교와 그의 동조자들의 인격만을 향해서 행동했고, 또한 총대주교도 훔버트 자신만을 향해서 반응했다 할지라도 1054년에 동방과 서방 사이의 일치를 회복시키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두 교회 사이의 영속(永續)하는 분열로 끝이 나고 말았다. 1966년 교황 바오로 6세(Paul VI)와 아데나고라스 1세(Athenagoras I) 총대주교에 의한, ‘1054년의 아나테마를 해제하는’ 상징적 행동과 같은 여러 가지 화해의 몸짓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교황권

11세기 중반에는 또한 교황권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흔히 이 운동은 그레고리안 개혁(Gregorian Reform)이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그 운동의 가장 유명한 지지자가 바로 교황 그레고리 7세(1073-1085), 또는 힐데브란트(Hildebrand)였기 때문이다. 그 운동은 어떤 세속의 권위로부터도 교회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교황권의 요구들을 엄청나게 늘렸다. 이것이 동방과 어떤 화해도 어렵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1089년에 두 교회 사이의 좋은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노력의 한 부분으로서, 동방은 교황 우르반 2세(Urban II)에게 신앙의 고백을 요청했다. 그는 그 요청에 응하기를 거절했는데, 이는 그같이 응한다면 로마의 주교가 다른 주교에 의해 교회 안에서 판단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록 콘스탄티노플의 니꼴라스 3세 총대주교(1084-1111)가 ‘교황으로 하여금 정교 신앙을 고백하게 하자. 그러면 그가 첫째가 될 것이다’ 하고 말했지만, 그런 일은 역사상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십자군

1095년의 첫 십자군 때까지 서방 사회에서 교황의 지도자적 위치는 잘 확립되었다. 두 교회 사이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확인한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군이었다. 십자군은 1099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회교도들을 몰아냈으며, 그 지역에 현존하는 교회 질서를 대신하여 라틴 성직제도를 세웠다.

 

키에프 러시아

11세기에 키에프 러시아에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이 꽃을 피웠다. 성 안또니(St. Anthony 1051 사망)는 키에프에 있는 동굴에 수도원(Kievo-Pecherskaya Lavra)을 세웠다. 그 수도원의 가장 위대한 성인인 성 떼오도시오스(St. Theodosius 1074년 사망)는 ‘러시아 수도원 제도의 설립자’ 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성 떼오도시오스는 영적인 삶의 복음적 형태 속에서 복음경에 나타난 겸비(謙卑)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다. 이 형태가 자기를 비우는 겸손과 형제에 대한 사랑의 삶을 뜻하는 러시아적인 케노티시즘(kenoticism)으로 알려지게 되었다.(필립비 2:6을 참조하시오.) 키에프의 동굴 수도원은 영적이고 지적인 노동과 계몽활동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자선과 사회적 관심의 중심지였다.

 

보리스와 글렙

키에프의 성인들 가운데는 성 블라디미르의 아들인 보리스(Boris)와 글렙(Gleb)도 들어있다. 그들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자신의 형제인 스비아또뽈끄(Sviatopolk)와 싸우기를 거부했다. 전투에서 이길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되자 그 두 젊은 형제는, 만일 자기들이 싸웠다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고야 말았을 자신들의 충성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기를 그만 두었다. ‘무저항의 수난자’로서 성 보리스와 글렙은 1020년에 처음으로 러시아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들은 순교자나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가 아닌,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내놓은 이로서 존경을 받았다.

 

신학적 저술들

이 시대에 동방에서 불가리아의 테오필락토스(Theophylactus)는 성경에 대해 수많은 주석을 썼다. 서방에서는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109년 사망)이 자신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신학적 논문들을 써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과 필리오케 교리에 대한 변호, 그리고 이른바 속죄에 대한 ‘만족설’(satisfaction theory)이다. 특히 ‘만족설’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성부 하느님의 정의와 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서방

11세기에 서방에서는 오늘날 ‘트라피스트회’(trappists)라고 알려진 베네딕트 수도회의 시스터션 개혁(Cistercian reforms)이 있었다. 이 개혁운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인 끌레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는 금욕적이고 신비적인 신학자이며 교회 활동가였다. 그는 십자군 운동을 장려했으며, ‘네 또는 아니오’(Sic et Non)의 유명한 저자인 아벨라르(Abelard)와 싸웠다. 또한 이때에 은둔(隱遁)적인 수도원 제도인 카르투지언(Carthusian) 운동이 시작되었다.

 

 

12세기

 

주요 흐름들

12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꼼네니(Comneni) 왕조는 서방으로부터는 라틴의 십자군들, 그리고 동방으로부터는 서서히 잠식(蠶食)해 들어오는 회교 투르크족(Turks)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알렉시우스 꼼네누스(Alexius Comnenus) 황제는 아토스 산을 정교 수도원제도의 중심지로서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에프띠미오스 찌가베누스(Euthymios Zigabenus)는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를 담은 소책자인 ‘교의(敎義)의 빠노쁠리’(Dogmatic Panoply)를 펴냈다. 비록 이 시대에 제국 안에서 신학에 대한 진짜 관심이 있긴 했지만, 동방 그리스도교권의 실제적인 신학적 저술은 전통적인 교리를 되풀이하여 소책자로 만들어내는 것에 머물렀다.

 

아테네 근처의 성 루가 교회와 다프니(Daphni) 교회의 성당 건물과 모자이크 같은 고전적인 비잔틴 기념물들과 함께 12세기에는 예술과 건축이 발달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성상화(iconography)의 아버지’인 성 알리삐우스(St. Alypius 1114년 사망)가 이 시대에 살았다. 노브고로드(Novgorod), 블라디미르(Vladimir), 수즈달(Suzdal), 쁘스꼬브(Pskov)의 여러 훌륭한 건축물과 성상화들은 이 시대에 비롯된 것들이다.

 

키에프 러시아

키에프 러시아에서 그리스도교는 계속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1124년 키에프에서 난 불로 말미암아 600개의 교회 건물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유럽과 비잔틴의 문화와 무역의 중심이 된 이 세계적인 도시의 큰 발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세기초에 블라디미르 모노마크(Vladimir Monomakh 1125년 사망) 왕자는 그의 유명한 ‘나의 자녀들에게 명함’이라는 문서를 썼는데, 이것은 자신의 아들들이 그리스도인 다운 지도자로서 살도록 가르치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비잔틴의 영향은 키에프의 그리스도교에 여전히 매우 강하게 남아 있었다. 많은 추기의 키에프 성인들의 삶을 담고 있는 ‘러시아 초기 연대기’(Russian Primary Chronicle)는 전통적으로 ‘동굴 수도원’(caver monastery)의 수도자 네스토르(Nestor)에 의해 편집되었다.

 

세르비아

세르비아인들은 통치자 네마냐(Nemanya)의 노력으로 비잔틴 황제에 의해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네마냐의 아들 라스트코(Rastko)는 아토스 산으로 도망을 가서 사바(Sava)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위대한 민족적 성인이 되어 세르비아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었다. 사바는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를 아토스 산으로 모셔와서 시메온(Simeon)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적인 삶을 살다가 생을 마치도록 했으며, 교회는 그를 ‘향유(香油)가 흘러나오는 성 시메온’(St. Simeon the Myrrh-flowing)으로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비잔틴 황제 앙겔로스(Angelos)는 세르비아인 아버지와 아들에게 아토스산의 힐란다리(Hilandari) 수도원을 주었고, 그 수도원은 성산(聖山)의 세르비아 수도원으로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서방

교황권의 중앙집권화와 세속의 통치자들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와 함께, 12세기에 서방은 휴고(Hugo 1141년 사망)와 성 빅토르의 리챠르(Richard of St. Victor 1173년 사망)에 의해 주도된 어거스틴적 신학의 빅토르 학파(Victorine school)가 융성했다. 이 때에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자신의 영향력 많은 ‘금언집’(Sentences)을 썼고, 한 편으로 더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왈덴파(Waldensians)와 알비겐파(Albigensians)의 정신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인 운동이 여향을 끼치고 있었다.

 

 

13세기

 

제 4차 십자군

13세기는 동방과 서방의 분열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4차 십자군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1204년에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다. 그들은 제단을 모독했다. 그들은 성물(聖物)들을 훔쳤다. 토마스 모로시니(Thomas Morosini)라는 한 라틴인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불려졌고, 어떤 한 프랑크인은 황제라고 불려졌다. 이제 처음으로 라틴의 서방은 그리스 백성들의 마음 속에 분명한 적이 되었다. 여러 저술들을 교황제와 마찬가지로 라틴 교회에 적대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통치는 미카엘 빨레올로고스(Michael Paleologos) 황제가 도시를 되찾은 1261년까지 지속되었다.

 

리용 공의회

미카엘 3세는 동쪽으로 터키인들의 공격을 당하면서, 서방의 라틴인들이 다시금 되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이유에서 그는 1274년 리용(Lyons)에서 열린 서방교회의 공의회에 주교로 구성된 대표단을 보내 동정을 구하면서, 무너져가는 자신의 제국을 위한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얻기를 바랬다. 서방인들은 다음 세기에 교회 일치의 고전적 방식이 될만한 것을 미카엘의 사절들에게 제안했다. 그들은 동방이 그 전례예식을 지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신앙의 신조에서 말하는 교리가 이단적인 것으로서 부정되지 않는 한 ‘필리오케’라는 말을 쓰는 것은 선택적일 수 있다. 교황은 최상의(supreme) 신분으로서 인정되어야만 한다.

 

리용의 공의회에 참석한 미카엘의 사절들은 자신들이 요청받은 것 이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교황제에 대한 로마의 방식과 역사상 처음으로 요구받은 필리오케에 대한 로마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미카엘이 바랬던 서방으로부터의 평화와 도움은 1282년에 그가 죽기까지 지속되었다. 미카엘이 죽자 리용에서 이루어진 일치의 행동들은 동방의 주교들에 의해 곧 바로 거부되었다. 황제는 교회의 장례예식 없이 묻혔다.

 

세르비아

1217년 사바(Sava)는 세르비아인들의 독립적인 민족교회를 위해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축복을 얻으려고 니케아로 갔다. 1219년에 사바 자신은 황제 떼오도르가 있는 자리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마누엘(Manuel)에 의해 ‘세르비아 영토의 첫 대주교’로서 축성되었다. 1220년 주님의 승천축일에 지트카(Zitcha) 수도원에서 열린 세르비아인들의 집회에서 새로이 축성된 사바 대주교는 자신의 동생 스테판(Stephan)을 ‘전 세르비아 영토의 첫 왕’으로 삼아 왕관을 씌워주었다.

 

뛰어난 지도력을 지닌 채, 크나큰 시련과 어려움들을 많이 겪으면서 동방 그리스도교 지역을 두루두루 널리 여행한 뒤, 1235년 1월 14일에 사바는 숨을 거두었다. 사바의 직은 아르세니오스(Arsenios)가 이어 받았는데, 그는 사바 자신에 의해서 주교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설립자이며 아버지이고 정교회 역사에서 참으로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사바 대주교는 자신의 아버지 성 시메온, 자신의 동생인 최초의 왕 성 스테파노스, 자신의 후계자 성 아르세니오스와 함께 교회의 성인으로서 시성(諡聖)되었다.

 

불가리아

13세기에는 불가리아 영토 안에 있는 교회의 수장으로서 뜨르노보(Trnovo)의 대주교가 인정됨과 함께, 불가리아인들을 위한 민족교회의 재설립이 이루어졌다.

 

러시아

러시아는 13세기에 몽골의 침략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1237년에 러시아인들을 대항해서 칸 바투(Khan Batu)가 40만의 군사를 지휘했을 때 타타르(Tatar)의 멍에가 그 땅 위를 덮쳤다. 키에프의 국가는 1240년에 멸망했다.

 

1231년에 알렉산더 네프스키(Alexander Nevsky)가 노브고로드(Novgorod)의 군주가 되었다. 북쪽의 도시공화국(city-republic)은 그곳만의 특별한 영적, 건축학적, 성화적(iconographic) 전통과 함께 그 자신의 독특한 공화제인 정부형태를 갖고 있었다. 1240년에 알렉산더는 러시아인들을 이끌고 로마 카톨릭인 스웨덴인들에 대항해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1242년에 그는 다시 한번 러시아 백성들을 이끌어서 러시아 땅을 공격하는 튜튼의(Teutonic) 기사들을 무찔렀다. 그리고 나서 알렉산더는 1247년에 칸 바투의 본부를 찾아가서 타타르의 멍에 아래 있는 러시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도록 청했다. 알렉산더는 자기 백성의 평화를 위해 칸에게 공물(供物)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는 키에프의 대군주(Grand Prince of Kiev)라는 칭호를 받고서 몽골로부터 돌아왔다. 그는 1263년에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1380년에 그는 개인적인 거룩함과 군사적인 용맹성, 그리고 그의 실제적인 지혜와 외교술로 말미암아서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정치가로서 이기심 없이 이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 대한 봉사로서 바쳤던 것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아들 다니엘(Daniel)은 타타르의 멍에 너머에 있는 북쪽의 모스크바로 가서, 1263년에서 이 세기의 끝까지 그곳에서 군주로서 봉직했다. 모스크바 공국에 재위(在位)하는 키에프의 대주교들인 성 끼릴(St. Cyril 1242-1281)과 성 피터(St. Peter 1281-1326)는 이 당시에 두드러졌던 고위성직자들이었다.

 

서방

서방교회에서 13세기는 ‘가장 위대한 세기’로 불려왔다.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는 계속해서 교황직의 특권과 권력을 지지하였다. 1215년의 제 4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는 서방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를 확정하였다.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1226년 사망)는 맨 처음의 위대한 동료들인 파두아의 안또니(anthony of Padua 1231년 사망)와 신학자 보나벤뚜라(Bonaventure 1274년 사망),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308년 사망)와 함께 자신의 프란치스꼬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스페인 사람 도미니끄(Dominic)는 위대한 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80년 사망)와 그의 유명한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74년 사망)와 함께 설교자들로 이루어진 도미니끄 수도회를 설립했으며, 특별히 아퀴나스는 20세기 후반의 제 2차 바티칸공의회 때까지 공식적인 로마 카톨릭의 신학을 지배했던 ‘숨마’(summae)를 썼다. 신비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339년 사망) 또한 도미니끄 수도회 회원이었다. 이 당시 서방교회에서는 여러 작은 종교적인 집단들과 함께 깔멜(Carmelite) 수도회가 생겨났다.

 

 

14세기

 

그레고리 빨라마스

14세기는 동방교회에서 빨라마스의(Palamite) 논쟁이 있던 때이다. 그레고리 빨라마스(Gregory Palamas 1359년 사망)는 아토스산의 수도승이었다. 그는 헤시카즘(hesychasm[hesychia는 ‘침묵’을 뜻한다.]} 이라고 불리는 기도방법을 실천하는 이였다. 이 방법에 의해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엄격한 신체적 훈련을 하는데, 그것은 보통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예수기도(Jesus Prayer)의 형식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되뇌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방식의 기도를 함으로써 헤시카스트(hesychast)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하기를 바랬고, 또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그리고 타볼산(Mt. Tabor)에서 주님의 변모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비추었던 창조되지 않은 신적 빛에 대한 영적인 환상을 보기를 바랬다.

 

1326년 그리이스의 전(前) 유니잍(uniate)이며 새로이 나타나는 서방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전통의 대표자격인 깔라브리아인 발람(Calabrian Barlaam)이 콘스탄티노플에 왔다. 발람과 서방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크게 영향받은 몇몇 비잔틴 인본주의자들은 헤시카스트적인 기도를 하는 것을 비웃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느님과 참으로 일치하게 될 가능성을 부정했다. 1333년에 그레고리 빨라마스는 발람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헤시카즘을 옹호했다. 그는 사람이 참을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다는 정교의 교리를 확립하였다.

 

본질과 에너지

1346년의 공의회는 그레고리의 가르침을 지지했다. 이 거룩한 수도자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본질(Essence) 또는 초(超)본질(Superessence)과 참으로 창조되지 않고 신성한(곧, 신적인 빛과 같은) 하느님의 행위, 작용, 또는 에너지 사이의 유명한 구분을 시도했다. 이 에너지는 신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전해지며 인간의 참여와 지식, 그리고 경험 앞에 열려있다.

 

몇 년 동안의 정치적 혼란과 신학적 논쟁이 있은 뒤, 1347년과 1351년(이 해는 그레고리가 데살로니끼의 대주교가 된 해이다.)에 열린 공의회는 성경과 정교회 전통의 입장에 정확히 맞는 것으로서 그레고리의 주장을 다시금 지지하였다. 그 때 이후로 신적인 초(超)본질과 신적인 에너지 사이의 신학적 구별은 정교회 교리의 공식적인 한 부분이 되었다. 그레고리 빨라마스는 1368년, 그러니까 그가 죽은 뒤 꼭 9년만에 정교회의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요한 5세 빨레올로고스와 로마

14세기의 지도자격인 비잔틴 황제 요한 5세 빨레올로고스(John V Paleologos 1341-1391)는 동방에서 매우 증대되는 터키의 압력 앞에 놓인 그리스인들을 서방이 와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계속해서 갖고 있었다. 1369년에 요한은 교회의 일치를 향한 정식의 시도도 없이, 개인적으로 로마교회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런 행동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 또는 정치적 운명과 관련해서 어떤 지속적인 결과도 낳지 못했다.

 

러시아

러시아인들은 계속 남쪽에서 타타르의 멍에 아래 놓여 있었다. 러시아(Muscovy)의 북쪽 삼림이 우거진 지역에서 요한 칼리타(John Kalita 1341년 사망) 왕자와 그의 섭정자(攝政者)인 대주교 알렉시스(Alexis 1353-1378)의 인도를 받던 북부 러시아인들은 자유로이 있으면서 계속 번영해 나갔다. 이 당시 북부에서 진짜 ‘러시아의 건설자’는 라도네즈의 성 세르기우스(St. Sergius of Radonezh 1392년 사망)였다.

 

성 세르기우스

성 세르기우스(St. Sergius)는 1314년에 로스토브(Rostov)에서 태어났다. 그는 1334년에 수도자가 되어 홀로 숲에 들어가서 금식하며 기도했고, 자신의 수도원 성당을 성 삼위일체 성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많은 이들이 성 세르기우스를 따랐으며, 어떤 이들은 그와 함께 수도자적인 삶을 살았고, 다른 이들은 그의 수도원 공동체 주위에서 살면서 개척자와 정주자(定住者)로서 있었다. 성 세르기우스는 지극히 겸손했다. 그는 매우 초라한 옷을 입고 살았다. 그는 끊임없이 남을 위해 일했다. 그는 먼저 본을 보임으로써만 가르쳤고, 수도자들이 자신의 지도를 거부한다고 느꼈을 때 대주교 알렉시스의 강요로 맡아보던 수도원장의 지위에서 서슴없이 물러났다. 그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였고, 침묵의 기도를 잘 실천한 이였으며, 놀라운 신적 환상을 보며 하느님과 함께 살았던 신비가였다.

 

정기적으로 대주교 알렉시우스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조언을 해주던 성 세르기우스는 1380년에 타타르인들과 전투를 벌이게 된 디미뜨리 돈스꼬이(Dimitri Donskoi) 왕자에게 축복을 해주었다. 디미뜨리의 승리로 말미암아 러시아 영토에 대한 타타르의 지배가 그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정교회에 남은 성 세르기우스의 유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의 제자 11명은 북부 러시아에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그 둘레의 땅들은 사람들이 정주(定住)하면서 개발되었다. 후대에 교회와 러시아 국가의 정치, 사회적 생활 사이의 상호관계뿐 아니라 러시아 교회의 신비적이고 영적인 삶은 라도네즈(Radonezh)의 세르기우스라는 인물과 그의 업적에 뿌리를 주고 있었다.

 

펌의 성 스테핀

성 세르기우스와 동시대인인 펌의 성 스테핀(St. Stephen of Perm 1396년 사망)은 학식이 많은 주교로서 지리안(Zyrian) 부족 속에 들어가서 선교사역을 펼쳤다. 비록 그의 사역이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지만, 성 스테핀은 지리안 문자를 만들고 교회의 책들을 토착어로 번역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잔틴 전통을 새로이 양육하는 지역교회의 생활과 결합했고, 장래에 러시아 교회에 시베리아 부족들과 일본, 알리스카 등지에서 선교를 할 수 있도록 영적 토대를 놓았다.

 

성 안드레이 루블료프

가장 위대한 러시아 성화작가이면서 아마도 정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화작가인 성 안드레이 루블료프(St. Andrew Rublev 1430년경 사망)는 14세기의 끝과 15세기의 시작 무렵에 자신의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의 수도자였다. 그는 성화작가인 그리스인 테오판(Theophanes the Greek)의 예술적 추종자였으며, 자신의 친구 다니엘 코르니(Daniel Chorny)와 함께 일했다. 루블료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삼위일체-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위해 그린 성 삼위일체 이콘으로서, 그것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를 색과 선의 완벽한 조화 속에서 그리고 있다. 이 같은 시기에 비잔틴 제국에는 교회 예술의 르네상스가 있었고, 많은 유명한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세르비아인들과 불가리아인들

세르비아인들은 스테핀 두샨(Stephen Dushan)의 통치 속에서 자신들 역사 가운데 번영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세르비아 교회는 1346년에 총대주교청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때에 오크리드의 성 끌레멘뜨(St. Clement of Ochrid 1375년 사망)는 민족 계몽을 이끈 지도자로서 불가리아인들 속에서 살면서 일했다. 같은 시기에 쭈그라포(Zoographos)의 불가리아 수도원이 아토스산에 세워졌다.

 

예식의 발달

예식면에서 14세기에는 오늘날과 거의 똑같은 교회예배의 순서가 만들어졌다. ‘성찬예배 해설’(Commentary on the Divine Liturgy)이 니꼴라스 까바실라스에 의해 쓰여졌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Life in Christ)이라는 대중적인 작품을 썼는데, 이것은 오늘날 여전히 교회 안에 실제로 남아있는 의식의 상세한 부분들을 보여주면서 예배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하고 있다. 처음으로 말씀의 예배에 앞서서 따로 떨어진 의식으로서 성찬예배 준비예식(prothesis, proskomedia)이 예식서 속에 나타나고 있다.

 

교회 예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데살로니끼의 시메온이 쓴 예식해설서들은 이 시대에 쓰여진 것이다. 시메온의 작품 속에 있는 흥미로운 주(註)는 거룩한 성찬예배가 여전히 결혼성사 속에서 정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었음과 축복된 ‘공동의 잔’이 교회에서 성체를 받도록 허락 받지 못한 이들에게만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서방

14세기의 서방은 로마 교황이 아비뇽(Avignon)에서 ‘바빌론의 포로’처럼 있는 것을 보았고,(1303-1378) 서방의 교회 안에 교황의 직위에 대한 여러 다양한 요구를 하는 이들 사이에 ‘커다란 분열’이 있음을 보았다. 시에나의 캐더린(Catherine of Sienna)은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영국의 신비적인 작가 월터 힐튼(Walter Hilton), 놀위치의 줄리아나(Juliana of Norwich)처럼 이 시대에 살았다. 14세기의 끝과 15세기의 시작 무렵에 비천한 시골에서는 ‘공동생활의 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이 발달하였다. 이 운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로서 그는 유명한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의 저자였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321년 사망)가 쓴 신곡(神曲 Divine Comedy) 작품과 지오토(Giotto 1337년 사망)의 회화들은 이 시대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15세기

 

교황권

15세기에 서방은 교황권과 교회공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떤 이들은 교황의 지위가 최상의(supreme)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교회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의 공의회 가운데 하나인 페라라-플로렌스(Ferrara-Florence 1438-1439) 공의회는 교황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터키인들에 대항해 싸우는 일에 대해 도움을 구하려고 동방교회의 대표자들이 다시 한 번 이 공의회에 참석했다. 라틴인들과 ‘동등한 관계’로 공의회에 받아 들여진 동방교회의 대표자들 가운데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요한 8세(John Ⅷ)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셉(Joseph), 그리고 그리스어로 이시도르(Lsidore)라는 이름을 가진 키에프의 대주교가 있었다.

 

플로렌스 공의회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동방의 대표자들은, 비록 깊이 논의되지 않았지만 교황권에 대한 강격한 교리와 필리오케(filioque), 연옥(purgatory)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비잔틴 황제는 (교회의) 일치를 완성시키려는 바램을 갖고 신학적 논의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에페소의 주교 마크 에브게니코스(Mark Eugenikos)를 빼고는 모든 정교회 주교들이 일치를 위한 성명서(聲明書)에 서명을 했다.

 

플로렌스의 일치는 공적으로 발표되지 않다가 1452년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 공포되었다. 1453년 5월 29일 모함메드 2세(Mohammed Ⅱ)의 지휘를 받은 터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는 이스탄불(Istanbul)이라고 다시 이름 지었으며, 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스꼴라리오스(Gennadios Scholarios)가 취한 첫 행동은 플로렌스의 일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총대주교는 이 행동을 취하면서 에페소의 성 마가(St. Mark of Ephesus)의 강한 압력을 받았다. ‘정당하지 못한 일치’라고 불려지게 된 것에 대항해서 정교(Orthodoxy)의 굳센 수호자가 된 성 마가는 그에 행동으로 말미암아서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러시아

비잔틴 제국이 회교도들(Moslems)에게 멸망당하는 바로 그때 새로이 나타나는 러시아 제국의 씨앗은 모스크바(Moscow)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군주 대 이반 3세(Ivan III the Great 1462-1505)는 노브고로드(Novgorod)를 무찔러 합병하면서 계속해서 북러시아인들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비잔틴의 공주 소피아 빨레올로고스(Sophia Paleologos)와 1472년에 결혼하여, 짜르(Tsar 옛 황제의 칭호인 케사르[Caesar]의 슬라브 형태)라는 칭호와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의 상징을 받아들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뒤를 잇는 ‘제 3의 로마’(third Rome)인 모스크바의 이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5세기의 러시아에서는 교회가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생활과 관련해서 해야만 하는 역할에 대한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의 두 지도자는 둘 다 성 세르기우스의 유산을 나누어 받았으며 교회의 성인으로 축성된 소라의 닐루스(Nilus of the Sora[Nil Sorsky, 1433-1508])와 볼로쯔크의 요셉(Joseph of Volotsk 1439-1515)이었다.

 

성 닐루스는 볼가강 건너에 살던 ‘무소유자들’(non-possessors)의 무리를 이끌었다. 그들은 때때로 ‘볼가강 건너의 사람들’(transvolgans)이라고 불려졌다. ‘무소유자들’은 교회, 그 가운데서도 수도원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과 통제를 가하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수도자들을 위한 관상적(觀想的 contemplative)이고 조용한 생활을 지배하는 겸손, 영적 자유와 함께 주된 덕목으로서 가난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성 세르기우스와 초기의 키에프적(Kievan) 영성의 신비적이고 헤시카스트적(hesychastic)이며 자기겸비적(自己謙卑的 kenotic)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었다.

 

‘소유자들’(possessors)은 성 요셉에 의해 인도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때때로 ‘요셉파’(Josephites)라고 불려졌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는 가능한대로 가장 밀접한 관계속에 있어야하며, 교회는 새로이 나타나는 러시아 국민들의 사회,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소유자들’의 이상(理想)은 교회, 특히 수도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예전적이고 제의적인 의식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금욕적인 훈련과 사회적 봉사의 삶을 백성들 속에 배양(培養)시켜야만 한다. 이런 경향 속에서 ‘소유자들’ 또한 성 세르기우스의 전통을 따랐다. 성 세르기우스와 알렉시우스 대주교는 초기 키에프의 시작 때부터 있었던 러시아 교회와 국민들의 본래적인 비잔틴 유산을 계속 이어갈 뿐 아니라, 14세기 러시아인들의 정치, 사회적 삶에서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비록 ‘무소유자들’의 정신이 언제나 러시아인들의 영성 속에 남아있긴 했지만, 그 다음 세기에 러시아의 교회와 민족적 발달을 지배한 것은 바로 ‘소유자들’의 방식이었다.

 

비잔티움의 몰락

세르비아는 1459년에, 그리스는 1459-60년 사이에, 보스니아(Bosnia)는 1463년에, 그리고 끝으로 에집트는 1517년에 터키인들에게 멸망당했다. 그 뒤 400년 동안 회교도인 터키인들이 동방에 있는 이전의 비잔틴 제국 안에서 정교도인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했다.

 

서방

서방에서는 15세기에, 이미 말한대로 공의회적인(conciliar) 운동과 여러 다양한 서유럽 국민들 사이의 민족의식의 생성에 의해서, 또한 종교개혁 시대에 앞서서 나타난 종교운동과 고대의 로마와 헬라적인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통하여 자연적인 인간에 대한 강조가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인 운동에 의해서 교황직의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런 점과 관련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519년 사망)와 라파엘(Raphael 1520년 사망) 같은 예술가와 과학자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Erasmus 1536년 사망)의 이름을 말해야만 하겠다. 더 나아가서 체코의 지도자 얀 후스(Jan Hus)를 말해야만 하겠는데, 그는 교황과 로마 교회의 (종교적) 실천들을 반대했기 때문에 1415년의 콘스탄스(Constance) 공의회에서 정죄되고 말뚝에 묶여 화형당했다. 또한 플로렌스의 열렬한 도미니꼬 수도회 수도자인 사보나롤라(Savonarola)는 교회의 사악함과 죄를 비난하고 정죄한 이유로 교황의 부추김에 의해 1498년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플로렌스의 화가인 프라 안젤리꼬(Fra Angelico 1455년 사망)가 있는데, 그의 많은 명작들은 플로렌스의 산 마르꼬에 있는 사보나롤라 수도원에 걸려있다. 또한 도나텔로(Donatello 1466년 사망), 프라 필리뽀 리삐(Fra Filippo Lippi !469년 사망), 보티첼리(Botticelli 1510년 사망) 등도 이 시대의 인물들이다.

 

 

16세기

 

공포의 이반 통치하의 러시아

러시아에서는 16세기에 ‘제 3의 로마’ 이론이 정치적 실재(reality)가 되었다. 프스꼬브(Pskov)의 수도자 필로테우스(Philotheus)는 다니엘서를 근거로 해서, 러시아의 황제국가(tsardom)가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마지막 세속통치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모스크바의 황제 바실 3세(Basil III)에게 전했다. 첫 로마는 이단(heresy)으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둘째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은 죄 때문에 멸망했다. 제 3의 로마인 모스크바가 굳건히 서있다. 더 이상 제 4의 로마는 없을 것이다.

 

공포의 이반 3세(Ivan III the Terrible) 황제는 이런 기초 위에 자신의 통치권을 세웠다. 그는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로서 1547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를 자신의 개인적인 통제 아래 복종시키면서 무자비하게 정적(政敵)들을 박해했다. 이반에게 희생된 많은 이들 가운데는 모스크바의 대주교 필립(Philip)도 있었다. 그는 미치광이 같은 통치자의 행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였기 때문에, 1568년 황제의 충실한 부하에 의해서 목이 졸려 죽임을 당했다. 그 뒤 필립은 교회에 의해서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1547-1549년 사이에 러시아 교회는 민족통합을 위한 한 수단으로서, 이전에는 그저 지역적으로만 공경되던 여러 성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경심을 활용하여 여러 다른 지역에서 나온 많은 성인들을 정식으로 축성하였다. 1551년에 ‘일백 장의 공의회’(Council of a Hundred Chapters), 곧 스토글라브 소보르(Stoglav Sobor)는 다른 동방 정교회에 대한 러시아 정교의 수위권(首位權 supremacy)을 더 강하게 주장하였다.

 

1551년 카잔(Kazan)에서 러시아가 터키인들을 무찌른 뒤, 이반은 모스크바의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Fool-for-Christ 1552년 사망)인 성 바실(St. Basil)을 기려서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안에 유명한 성 바실 성당을 지었다. 이 성당 건물은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동양적인(Oriental) 형식을 잘 결합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반의 통치 초기에 그의 영적 아버지는 실베스트르(Sylvestr) 사제였다. 이반의 초기 개혁 가운데 많은 것이 이 단순한 사목자의 인도를 받았다. 실베스트르는 도모스트로이(Domostroi) 또는 ‘가정의 교사’(Home-builder) 라고 불려지는 책의 주요 기고자였는데, 이 책에서는 러시아의 그리스도교 가정들이 정교회의 의식적(ritual)이고 윤리적인 실천에 따라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도모스트로이는 수 세대에 걸친 러시아 가정에 영향을 끼친 매우 인기있는 책이었다. 이반은 1559년 실베스트르를 추방했다.

 

마찬가지로 공포의 이반이 다스리는 동안 대주교인 모스크바의 마카리(Makarii of Moscow 1542-1563)는 ‘월간 독서’(Monthly Readings)라고 불려지는 12권 짜리 책을 썼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주석과 성인들의 일생, 설교, 그리고 영적 독서를 위한 다른 자료들을 담은 방대한 전집이었다. 이 때에 ‘무소유자’인 그리스인 성 막심(St. Maxim the Greek 1556년 사망)은 러시아 교회의 예식서들을 개정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카잔의 주교인 성 구리(St. Gury 1563년 사망)는 시베리아 부족들 속에서 선교를 하였다.

 

떼오도르의 통치 때의 러시아

이반의 아들 떼오도르(Theodore)의 통치 때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예레미야 2세(Jeremiah II)는 도움을 청하려고 모스크바에 왔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구 교회는 터키인들의 지배 아래 놓여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명백한 압제 상황 속에서 1589년 총대주교는 모스크바의 주교 욥(Job)을 전 러시아의 첫 총대주교로서 인정하였다. 새로운 총대주교를 임명하는 문서는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로서 그린 필로테우스의 예언을 거의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반 3세의 통치하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이 이론은 정교회 안에서 가장 최고위직에 있는 성직자들에 의해 드디어 공식적으로 확증되었다. 1593년에 러시아 교회는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의 주교들로부터 총대주교구로서 그 지위에 대해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러시아 교회는 정교회의 총대주교청 가운데 다섯째로 영예로운 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브레스트-리토브스크의 연합

16세기에는 러시아의 서쪽 경계선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이 형성되었다. 1569년 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시기스문트(Sigismund) 아래서 하나가 되었다. 이 왕국은 거의 전적으로 정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쪽 멀리 키에프 지역까지 러시아 영토의 여러 부분들을 차지하였다. 예수회(Jesuits) 사람들은 일찍이 이 지역에 들어와서 라틴적인 학문과 실천들을 옮겨놓았다. 결과적으로 1596년의 브레스트-리토브스크 통합(Union of Brest-Litovsk)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의 정교회 주교들은 한 세기 전에 플로렌스에서 합의한 토대 위에서 로마 교회와 통합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우니아’(unia) 안에 받아들여진, 정교 신자들의 예배를 위한 교회의 예식과 관습은 똑같이 남아 있었다. 교회의 성직자 계급제도, 교회 성직자와 학문적인 지도력은 전적으로 라틴적인 교육과 로마 교황권의 교리에 종속되었다. 1596년의 이 통합은 폴란드, 오스트리아계 헝가리,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처럼 비(非)정교회적인 정부에 의해 계속해서 지배를 받은 영토 안에서 효력을 지닌 채 남아있었다.

 

처음부터 우니아적인(uniate) 운동은 언제나 근본적인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자들은 주로, 정교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찍이 1588년에 형제단으로 조직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예레미야(Jeremiah)의 축복을 받았던 정교회 평신도들이었다. 처음에 반(反)우니아적(anti-uniate) 운동은 이반 페도로브(Ivan Fedorov)의 인쇄기계를 씀으로써 도움을 받았다. 이 사람은 그의 ‘악마적인 발명’ 때문에 이반 3세에 의해서 러시아로부터 추방되었다.

 

동방

16세기의 후반에 동방의 총대주교들은 서방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자들과 접촉했다. 예레미야 2세(Jeremiah II)는 검사해 달라며 자신에게 보내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을 주의 깊게 연구한 뒤, 루터의 가르침은 이단적이라고 힘있게 선포하였다.

 

이 같은 시기에 성 게오르기오스(St. George)와 새로운 성 요한(St. John the New)이 회교도들의 지배 아래서 순교한 까닭으로 하여 교회의 성인 목록에 들게 되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그리스인 성인들로는 라리사(Larissa)의 주교인 성 비사리온(St. Vissarion 1541년 사망)과 아테네의 성 필로테오스(St. Philotheos 1589년 사망)가 있었다.

 

서방과 프로테스탄트의 개혁

16세기의 서방은 프로테스탄트의 개혁과 로마 카톨릭의 역(逆 counter-)개혁을 경험하였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545년 사망), 요한 칼빈(John Calvin 1564년 사망), 그리고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545년 사망) 등이 유럽 대륙에서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 뿐 아니라 실제적인 남용(濫用)들도 공격하였다. 헨리 8세(Henry VIII) 왕은 1534년에 수위령(首位令 Act of Supremacy)에 의해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설립하였고, 존 녹스(John Knox 1572년 사망)는 칼빈주의 신앙을 스코틀랜드에 전해 주었다.

 

로마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61-1563)를 열어 연옥(煉獄 purgatory)과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s), 감사성사(eucharist)에서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변하는 것,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공격받고 부정된 여러 다른 입장들에 관한 교리를 정식으로 공식화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은 ‘오직 믿음만을 통한 은총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 alone)는 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성경은 유일한 교회의 권위로서, 하느님의 영감 아래 신자 개개인에 의해 직접적으로 해석된다. 교회의 성례전적 생활은 세례와 성만찬으로 축소되며, 특히 후자는 희생(제사)의 의미가 없이 주로 하나의 기념하는 식사로서 이해된다. 트렌트 공의회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과 교회의 성직자 계급제도의 권위에 관한 교리들을 강화하였다. 이 두 교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주된 공격 목표였다.

 

서방과 반(反)개혁

로마의 반(反)개혁은 예수회 사람들(Jesuits)에 의해 이끌어졌다.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로마의 교황권을 방어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1534년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 1556년 사망)에 의해 세워졌다.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1552년 사망)는 이 시대에 극동(極東 Far East)에 다다랐던 유명한 예수회 선교사였다. 네델란드의 예수회 회원인 피터 카니시우스(Peter Canisius 1597년 사망)는 독일에서

반(反)개혁을 이끌었으며, 개혁 이후 카톨릭주의(catholicism)의 표준적인 교과서가 된 자신의 유명한 교리문답(Catechism)을 썼다.

 

스페인에서는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82년 사망),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 1591년 사망)과 같은 신비적인 작가들이 로마 교회의 종교적 삶에 대한 개혁을 이끌고 있었다. 제네바에서는 그 도시의 로마 주교인 프란시스 드 살레(Francis de Sales 1622년 사망)가 영적인 삶에 대한 자신의 작품들을 쓰고 있었다. 이 같은 시기에 화가 티티안(Titian 1576년 사망)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며, 음악가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594년 사망)는 로마 교회에서 쓰였던 자신의 웅장한 음악적 작품들을 작곡해내고 있었다.

 

 

17세기

 

러시아: 불화(不和)의 시기

17세기에 러시아는 ‘불화의 시기’(time of troubles)에 접어들었다. 1598년부터 다스렸던 보리스 고도노프(Boris Godonov)가 1605년에 죽었다. 바실 쉬스키(Basil Shuiskii)가 1610년까지 다스리고 나서 폴란드인인 황제가 즉위했다. 정치, 사회적인 대변동이 있었던 이 시기에 폴란드인들이 나라의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빼앗았다. 나라의 지도자인 게르모겐(Germogen) 총대주교는 투옥되어 1612년에 굶어 죽었으며, 나중에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이반 3세의 통치가 끝나고 나서부터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과 기근, 국가적 재난에 휩싸였다. 성 줄리아나 오소르기니(St. Juliana Ossorgine 1604년 사망)는 고난받는 이들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 사랑과 돌봄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의해 축성되는 영예를 얻었다.

 

러시아: 옛 신자들의 분열

‘불화의 시기’ 뒤에 북러시아에서는 옛 신자들의 분열(Old Believer Schism)이 뒤따랐다. 미카엘 로마노프(Michael Romanov 1645년 사망)가 1613년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인 필라렛(Philaret 1633년 사망)이 1619년에 교회의 총대주교가 되었고,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1645년부터 1676년까지 매우 독실하고 경건한 신자인 알렉시스 로마노프(Alexis Romanov)가 황제로서 통치했다. 1652년에 알렉시스는 매우 대중적이고 재능이 많은 노브고로드의 대주교 니꼰(Nikon)을 러시아 교회의 총대주교로 뽑았다. 니꼰은 처음에 그 직위를 거절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로부터 그들이 복음과 교회법과 교부들께, 그리고 개인적으로 자신을 러시아 교회의 ‘주임 사목자요 가장 높은 아버지’(chief pastor and supreme father)로서 여겨 변함없이 복종하겠다는 정식 서약을 받고 나서 그 직을 받아들였다. 1653년의 사순대재 중에 니꼰은 교회와 국가를 서로 따로이 떼어놓으려는, 교회의 (종교적) 실천들에 대한 자신의 개혁을 시작했다.

 

니꼰의 개혁들은 현대적 기준에서 보아 합리적이었고 급진적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러시아의 예전적 실천들이 다른 동방 정교회의 것들과 일치하도록 조정되길 바랬다. 그것들은 예배의 형식(tests) 가운데서 말씨(wording)와 철자법(spelling)을 바로 잡도록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이 개혁으로 말미암아, 그 뒤 러시아인들은 두 손가락 대신에 세 손가락으로 십자 성호를 그어야 하고, 성가를 부르는 동안에 알렐루야(alleluia)를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불러야 하며, 비슷한 다른 변화들을 하여야만 했다. 니꼰의 시대동안 러시아에서 이루어진 이같은 개혁들이 오늘날 보면 온건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 개혁들은 러시아 교회와 국가의 ‘제 3의 로마’ 이론과 실천을 직접적으로 부정했다. 그 개혁조치들로 말미암아, (러시아인의 생각에 따른다면) 자신들의 죄 때문에 현재 터키인들 밑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동방의 총대주교청들에 러시아 정교가 종속되게 되었다.

 

1657년에 황제 알렉시스는 폴란드인들과 싸우던 전선에서 돌아와서, 혼란에 빠져 있는 자신의 교회와 국민들을 발견했다. 니꼰에 대한 반대는 스스로 ‘개혁자들’이라고 여겨지는 지역교구의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백성들 속으로 돌아가서 러시아 교회의 전통적인 의식과 관습들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요청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없는 동안 그의 섭정자로서 행동한 니꼰은 러시아 교회의 ‘주임 사목자요 가장 높은 아버지’인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이들을 알렉시스가 벌함으로써 자신의 행동들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황제는 니꼰의 행동들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황제가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자 총대주교는 1658년에 공적으로 황제를 비난한 뒤 자신의 직에서 물러났다. 그 때부터 1666년까지 러시아에는 현직(現職)의 어떤 총대주교도 없었다.

 

알렉시스는 니꼰과 화해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666년에 동방의 총대주교들은 자문을 요청받았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이 주관한 공의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 공의회는 무절조(無節操)한 가자(Gaza)의 대주교 빠이시오스 리가리데스(Paisios Ligarides)에 의해 조종되었다. 공의회는 처음에 니꼰의 교회개혁을 반대한 수백만의 신자들을 파문했다. 대주교 아바쿰(Avvacum)에 의해 이끌려진 이들 반대자들은 옛 신자들(Old Believers) 또는 옛 의식주의자들(Old Ritualists)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나서 공의회는 자신의 직위를 버리고 황제에 대해 무례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니꼰의 성직을 박탈했다. 공의회는 가장 존경을 받는 러시아 교회의 소보르(sobors)인 1551년의 ‘일백 장의 공의회’를 공식적으로 논박했다. 따라서 1666-1667년의 공의회는 ‘제 3의 로마’ 이론과 다른 모든 교회들에 대해 꾸며낸 러시아 정교의 수위권을 정식으로 포기했다.

 

니꼰은 1681년에 죽기까지 붙잡힌 채로 있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입장을 결코 바꾸지 않고, 1666-1667년의 공의회에 대한 자신의 반대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온전히 총대주교로서 존귀함을 지닌 채 교회 안에 묻혔다. 니꼰의 반대자들, 곧 의견을 달리하는 ‘옛 신자들’은 공의회를 거부하고, 공식적인 러시아 교회와 결별을 하게 되었다. 아바쿰과 같은 그들의 지도자들은 색출(索出)되어 무참하게 처형당했다. 그들은 추방되어 거친 노동을 하도록 처해졌으며, 그들의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양보를 모르는 정신을 나눠 가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애정을 느끼도록 하는 상태에 놓여졌다. 아바쿰 대주교는 1682년, ‘황제와 그의 황실에 적대적인 대역죄(大逆罪)를 저질렀다’고 하여 자신의 지지자들 세 사람과 함께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자서전은 러시아 문학의 한 고전이 되었다.

 

1682년 피터 대제(Peter the Great)가 황제가 되었다. 러시아를 서구화하려는 그의 극단적이며 과격한 시도와 전통적인 러시아적 방식에 대한 그의 맹렬한 반대로 말미암아 반대자들(dissenters)은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생각하였다. 러시아의 순수한 정교 신앙과 예식들을 보존하려는 열망 속에서 ‘옛 신자들’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옛날의 러시아적 형태를 지닌 성화와 예배 성가를 계속하여 보존하였다.

 

우니아

17세기에 러시아의 남쪽에서는, 비록 많은 영토가 러시아인들에 의해 다시 되찾아졌지만 그래도 우니아(unia)가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였다. 우크라이나(Ukraine)와 갈리시아(Galicia)에 있는 평신도 형제회들이 이 시기 동안에 우니아적인(uniate) 운동을 강력하게 거부함으로써 정교회를 잘 지켜냈다. 이들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는 콘스탄틴 오스트로쯔스키(Constantine Ostrozhskii 1608년 사망)와 1610년에 자신의 ‘동방교회를 위한 애가’(Lamentations of the Eastern Church)를 쓴 밀레티 스모트리쯔스키(Mileti Smotritskii)가 있었다.

 

피터 모길라

1615년에 키에프의 신학교가 세워졌다. 1620년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테오파네스(Theophanes)는 정부로부터 비밀리에 있는 정교인들을 위해 일곱 명의 주교를 축성하였다. 1633년에 시기스문트(Sigismund)의 계승자인 블라디슬라우 4세(Wladyslaw IV)는 기에프의 정교 대주교를 허락했다. 키에프 신학교의 지도자인 피터 모길라(Peter Mogila 1647년 사망)가 뽑혔다. 모길라는 맹렬하게 반로마적(anti-Roman)이었으나, 그 자신은 라틴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라틴의 스콜라적인(scholastic) 학습을 깊이 존경하였다. 예수회원인 카니시우스의 교리문답과 사제의 예식서 따위의 슬라브어 번역을 포함해서 그의 많은 책들로 말미암아, 교리의 형성과 예식의 실천 등에서 라틴의 영향이 정교회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모길라의 작품들은 키에프에서 열린 공의회(1640년)와 다시 몰다비아(Moldavia)의 재시(Jassy)에서 열린 공의회(1643년)에서 정교회 주교들에 의해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판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터 대제의 강력한 서구화 정책과 함께 모길라의 책들은, 정교인들의 신학과 경건에 미친 서구의 영향에 거의 200년 동안이나 포로로 붙잡혀 있게된 주요 원인이었다.

 

끼릴 루카리스

끼릴 루카리스(Cyril Lukaris 1638년 사망)는 터키인들이 끝내 자신을 물에 빠뜨려 죽게 하기 전까지, 터키인들 밑에서 일곱 번의 서로 다른 경우들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을 수행하였다. 그의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은 피터 모길라의 교리문답과 예식서들의 정교성(orthodoxy)을 지지했던 키에프와 재시의 똑같은 교회 공의회들에 의해 곧바로 정죄되었다. 끼릴의 ‘신앙고백’은 완전히 칼빈적인(Calvinist) 신앙선언이었다. 16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동방의 총대주교들의 공의회에서는 재시(Jassy) 공의회의 결정들을 확증하고, ‘동방 총대주교들의 신앙고백’을 발행하였다.

 

동방

17세기에 터키인들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분쇄하였다. 그들은 두 교회를 콘스탄티노플에 직접적으로 종속시켰고, 그럼으로써 터키 제국 안에서 비(非)그리스적인 정교인들에 대한 그리스의 ‘화나리옽’(phanariot) 통치를 확립하였다. 이 때 러시아에서는 주교인 로스또브의 성 디미뜨리(St. Dimitri of Rostov 1709년 사망)가 12권 짜리의 성인전(Lives of the Saints)이 포함된 자신의 영적 작품들을 발행하였다. 포차에브(Pochaev) 수도원의 경건한 수도원장인 성 욥(St. Job 1651년 사망) 또한 이 시대에 살았다.

 

서방

서방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개혁과 반(反)개혁의 종교적 격변(激變)으로부터 회복되고 있었다. 미국에는 영국으로부터 건너간 비국교도(非國敎徒 dissenter)들인 퓨리턴(Puritans), 회중교회파(Congregationalists), 침례교인(Baptists), 그리고 조지 폭스(George Fox 1691년 사망)에 의해 세워진 친우회(Society of Friends)의 회원인 퀘이커들(Quakers)이 정착중이었다. 1611년 영국에서는 성경의 제임스왕 역본(King James Version)이 발행되었다. 이 때 로마 교회는 얀세니즘(Jansenism) 운동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겼었는데, 이것은 은총이 하느님께 선택된 이에게만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교리였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빈센트 드 폴(Vincent de Paul 1660년 사망)이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봉사에 헌신하는 자신의 수도회(order)를 세웠다.

 

 

18세기

 

18세기에는 7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을 차지한 사람이 마흔 여덟 번이나 바뀌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다섯 번이나 총대주교직을 차지하였다. 이것은 터키인들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이 처했던 처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어떤 세르비아인들은 어떻게든 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옮겨가 거기에서 자신들의 주교구(dioceses)를 부여받기도 했지만, 터키의 지배 아래 놓인 채 남아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이 때는 바로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들 가운데 세 분이 살았던 시기였다.

 

성 꼬즈마스 애똘로스

성 꼬즈마스 애똘로스(St. Cosmas Aitolos 1779년 사망)는 현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현대 그리스 국가의 아버지라고 불려진다. 성 꼬즈마스는 아토스산의 수도자였는데, 터키의 압제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산(聖山)을 떠났다. 성인은 자신의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설교자요 교사였으며, 그의 말들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또한 이적을 행하기도 했다. 성 꼬즈마스는 터키인들의 손에 순교하였다.

 

고린토의 성 마카리오스

고린토의 성 마카리오스(St. Macarios of Corinth 1805년 사망)는 성 꼬즈마스보다 조금 젊은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아토스산에 있으면서 정교의 예식적 실천들을 엄격하게 지켜나갔다. 그는 고린토의 주교로 뽑힌 선교사요 설교자였으나, 그 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자주 받는 성체성사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강조한 것으로서 가장 유명하다. 성인은 많은 영적 작품들을 썼으며, 그 가운데 많은 것은 교인들이 성례전에 참여해야 할 필요를 주제로 하여 쓴 것이다.

 

성산(聖山)의 성 니꼬데모스

성 니꼬데모스 아기오라잍(St. Nicodemos the Hagiorite 1809년 사망)은 성 꼬즈마스, 성 마카리오스와 같은 정신 속에 있었다. 그도 또한 아토스산의 수도자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터키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 정교의 영적 부흥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고린토의 성 마카리오스가 쓴 것들을 포함해서 영적인 작품들을 편집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업은 필로깔리아(Philokalia)인데, 이것은 동방교회 교부들의 영적이고 금욕적인 저술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러시아: 거룩한 치리(治理)의 시노드

18세기는 러시아의 정교회에 매우 중대한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였다. 피터 대제가 황제의 칭호를 갖고 1725년까지 다스렸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요구와 바램에 복종시키면서,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교회를 다스렸다. 1700년에 총대주교인 아드리안(Adrian)이 죽자, 피터는 노브고로드의 야심 많은 주교 스테판 야보르스키(Stefan Iavorskii 1772년 사망)에게 선출을 약속하면서 그 직책을 맡도록 지명하였다.

 

1721년에 피터는 ‘교회의 규범’(Ecclesiastical Regulation)을 공포(公布)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화한 우크라이나인 테오판 프로코포비치(Theophan Prokopovich 1738년 사망)에 의해 쓰여졌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교회의 총대주교 직위는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그리고는 ‘거룩한 치리의 시노드’(The Holy Governing Synod)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거룩한 시노드’는 황제가 임명한 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들로써 이루어졌으며, 그것의 세속적 책임자, 곧 오버-행정장관(ober-procurator)이라고 불려지는 정부의 관리를 통하여 황제에게 종속되었다. ‘거룩한 시노드’는 피터가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서방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행정체계와 일치하는 형태를 띠었다.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교회법을 따른 정교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치는 이런 조치, 곧 황제에 의해 교회에 지워진 이 요구는 동방의 총대주교들에 의해서 정식으로 재가(裁可)받아 인정되었다. 그같은 체제는 다시금 총대주교가 러시아 교회를 위해 선출되고 비정교회적인 교회행정의 방식이 사라지게 된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거룩한 치리의 시노드’의 첫 의장으로서 피터 대제에 의해 임명될 이는 라틴화한 우크라이나인인 스테판 야보르스키였다. 이미 본 대로 그런 계획을 꾸민 이는 서구화한 남부 출신으로서 프로테스탄트적 성향을 지닌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였다. 러시아에서 그리고 터키 지배 아래서, 신학과 경건과 교회행정 면에서 라틴 또는 개혁교회적 입장을 지지하며 친로마적이거나 친프로테스탄트적이게 된 정교회 지도자들의 이런 상황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교회의 생명력 있는 전통은 역사적 환경 속에서 상실되었다. 정교회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교부적, 공의회적 정교성(Orthodoxy)의 정신과 내용에 낯선 입장들을 선택하여 수호하도록 강요당했다.

 

러시아: 뻬쩨르스부르크 제국시대

20세기까지 계속된 러시아의 뻬쩨르스부르크 제국시대의 쇠퇴기는 교회가 영적으로 재생하는 때였다. 이것은 수도원의 범주 안에서 전통적인 정교의 자료들을 처음으로 재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몰도바의(Moldavian) 수도사인 빠이시 벨리츠코프스키(Paisii Velichkovskii 1794년 사망)는 아토스산까지 여행을 하고서, 귀중한 필로깔리아를 갖고 러시아로 되돌아왔다. 수도사는 그 작품을 교회의 슬라브어(Church Slavonic)로 번역했다. 그가 시작한 뒤부터 스타르찌(startsi) 또는 장로(elders)라고 부르는 영적 인도자가 있는 러시아 교회의 전통이 발달했다. 이런 발달이 가장 하려하게 꽃을 피운 것은 19세기의 옾띠나(Optina) 수도원에서였다.

 

18세기에 러시아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은 짜돈스크의 성 티콘(St. Tikhon of Zadonsk 1783년 사망)이었다. 티콘은 보로네즈(Voronezh)의 유력(有力)한 주교였는데, 아마도 좋지 않은 건강만큼이나 크게 낙담(落膽)하고 좌절감을 느낌으로써 수도자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주교직을 포기하였다. 그는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들에 깊이 몰두(沒頭)했으며, 특히 성 요한 크리소스톰에게 열중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가장 경건한 작가들을 알고 있었다. 성 티콘은 ‘참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On True Christianity)를 포함해서 많은 책을 썼으며, 영적인 지도와 사목적인 상담 사이의 뛰어난 조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세기의 탁월한 러시아 고위성직자로는 신학 교과서의 저자인 모스크바의 대주교 플라톤(Platon of Moscow 1812년 사망)이 있다. 그는 역사적 연구를 증진시켰으며, ‘옛 신자들’이 정교회로 돌아와 함께 친교를 나누도록 계획을 세운 입안자(立案者)였다.

 

알래스카 선교

18세기 동안에 러시아 선교사들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1794년 러시아의 핀란드에 있는 발람(Valaam)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이 알래스카의 코디악(Kodiak) 섬에 도착했다. 북아메리카의 해안에 다다른 이 첫 선교사 무리 가운데서 알래스카의 성 허먼(St. Herman of Alaska)이 미국 정교회의 첫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서방

서방에서 18세기는 부흥과 선교적 확장의 시기였다. 죤(John 1791년 사망)과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88년 사망)는 영국교회 안에서 감리교(Methodist) 운동을 시작했고, 이것은 미국에서 첫 ‘대각성’(大覺醒 great awakening)이 일어나도록 영향을 미쳤다. ‘각성’(awakening)은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사이에 놓여있는 분열을 극복하는데 헌신하는 부흥사들의 운동이었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일치하도록 요청받았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58년 사망)와 조오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70년 사망)는 미국에서 일어난 이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같은 시기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유행했다. 이신론은 계몽운동(enlightenment)과 낭만주의(romanticism)의 자연적인 결과로서, 스스로를 계시하거나 사람의 일에 끼어듦이 없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채로 있는 최고의 존재(Supreme Being)의 실존을 주장했다.

 

영국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76년 사망)과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804년 사망)는 인간 이성의 범위로부터 하느님과 자유, 불멸(不滅) 등을 없애버린 철학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개인적인 신앙과 경건한 헌신, 그리고 윤리적인 행동의 종교로 축소되었다.

 

이 계몽철학은 19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 신학의 직접적 선구자였다. 이 신학은 그것의 ‘아버지’라 할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834년 사망)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는 그 시대의 ‘교양있는 비신자들’(cultured unbelievers)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그들을 ‘감정’(feeling)의 종교, 그리고 그것의 가장 위대한 표현인 예수의 종교로 불러들였다.

 

이 세기에 서방의 그리스도교권에서 이루어진 가장 영감있는 영적 성취는 바하(J. S. Bach 1750년 사망), 헨델(G. F. Handel 1759년 사망), 모짜르트(W. F. Mozart 1791년 사망), 베토벤(L. von Beethoven 1827년 사망)의 음악이었다.

 

18세기의 로마교회는 위대한 선교적 확장과 함께 유럽과 미국에서 교회와 국가를 거스르는 혁명으로 이끈 계몽운동의 정신과 큰 갈등을 겪어야 했다. 1773년에 예수회(Jesuit order)는 세속적인 압력 아래 교황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많은 예수회원들은 캐더린 2세 대제(Catherine II the Great)의 러시아로 피난을 갔다. 그녀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정신을 열렬히 따르는 인물이어서,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 수도원들의 절반을 문닫게 만들었다. 그녀는 모든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행정적이고 법적인 수단을 써서 교회의 수도 서원자의 수를 심각하게 제한했다.

 

 

19세기

 

러시아: 영적인 부활

18세기에 심어진 영적인 부활의 씨앗들이 러시아에서 꽃을 피웠다. 교회는 계속해서 국가의 지배 아래 놓여있었다. 교회가 정부의 엄격한 통제와 검열을 받고 있었고, 19세기 내내 총대주교나 어떤 종류의 교회 공의회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성인들과 선교사들, 신학자들, 그리고 당대의 작가들의 삶 속에서 신앙의 생명력은 계속하여 스스로를 화려하게 드러냈다.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러시아 성인이며, 러시아 교회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일컬어져 온 이가 바로 사로프의 성 세라핌(St. Seraphim of Sarov 1833년 사망)이다. 성 세라핌은 20년 동안 완전히 홀로 떨어져서 철저하게 기도와 금식, 그리고 영적인 훈련을 쌓은 수도자였다. 1825년 그는 자신의 은거처(隱居處)의 문을 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빛을 발하는 기쁨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신자들을 맞이했다. 성 세라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성령의 획득’(acquisition of the Holy Spirit)에 두었다. 그는 1903년에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이 시대에 살았던 옾띠나(Optina) 수도원의 가장 유명한 장로들은 레오니드(Leonid 1841년 사망), 마카리우스(Macarius 1841년 사망), 암브로시(Amvrossy 1891년 사망)이다. 짜돈스크의 성 티콘과 함께 암브로시는, 이 당시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작가였던 표도르 또스또예프스키(Fyodor Dostoevsky 1861년 사망)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준 인물로 여겨진다.

 

영적인 부흥운동 속에서 금욕적인 삶과 예수기도(Jesus Prayer)의 실천을 가르친 교사들로는 주교이면서 수도사들이었던 이그나띠 브리앙까니노프(Ignatii Brianchaninoff 1867년 사망)와 필로깔리아(Philokalia)의 러시아어 번역을 포함해서 많은 영적 작품들을 쓴 은둔자 테오판 고보로프(Theophan Govorov, the Recluse 1894년 사망)가 있다. 이 당시에 무명의 러시아 작가가 예수기도에 관해 쓴 것으로서 인기가 있던 책인 ‘순례자의 길’(The Way of the Pilgrim)이 나오기도 했다.

 

이 세기의 후반에 크론스타트의 요한 세르기에프(John Sergieff of Kronstadt 1908년 사망) 신부가 살면서 활동했다. 요한 신부는 교구사제였으며, 그의 사목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러시아인들의 목자’(All-Russian Pastor)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위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 성스러운 사제는 기도하고, 예식의 신비를 경축하고, 가르치고, 치유(治癒)했다. 그는 이 세기에 러시아 정교 속에 성찬예식의 부흥을 일으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서 자신과 함께 기도하려고 오는 이들이 성만찬식에 참례해야함을 주장했다. 신자들이 성체와 성혈을 정기적으로 받으려고 준비하는 것을 쉽고 철저하게 하기 위해, 요한 신부는 여럿이 함께 그리고 공적으로 하는 고백성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의 위대한 은인(恩人)이며 병든 이들의 치유자인 요한 신부의 영적 지혜들(counsels)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삶’(My Life in Christ)이라는 제목을 단 그의 일기로써 펴내졌다.

 

19세기 러시아의 주요 신학자들로는 위대한 성직자인 모스크바의 대주교 필라렡(Philaret of Moscow 1867년 사망)과 평신도인 알렉세이 꼬미아꼬프(Alexei Khomiakov 1860년 사망)가 있는데, 유명한 ‘하나인 교회’(The Church is one)와 같은 후자의 작품들은 정부의 검열 때문에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발행되지 못했다. 가장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현대의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꼬미아꼬프는 정교 신학과 영적 삶에 관한 전통적이며 교부적인 방법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인물이었다. 그는 정교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스콜라적인 신학의 ‘서방적 포로상태’에서 벗어나, 참다운 정교 전통의 건전한 지식과 경험을 지니고서 서방의 지적이고 영적인 세계와 만나도록 용기를 북돋았다.

 

꼬미아꼬프와 작가 또스또예프스키에 덧붙여서 러시아의 종교사상가들인 끼리브스키(I. Kireevskii 1856년 사망), 솔로비에프(V. Soloviev 1900년 사망), 페데로프(N. Federov 1905년 사망), 그리고 뜨루베쯔꼬이 형제(S. Troubetskoy 1905년 사망; E. Troubetskoy 1920년 사망)를 말해야만 하겠다. 또한 복음서들을 고쳐 쓰고, 자기 자신의 종교를 만들었으며, 정교회로부터 파문된 위대한 소설가 레오 똘스또이(Leo Tolstoy 1913년 사망)의 이름도 말해야만 하겠다.

 

러시아: 선교적 활동

서방에서처럼 러시아에서도 19세기는 선교의 세기였다. 마카리 글루카레프(Makarii Glukharev 1847년 사망) 신부는 시베리아 부족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평신도 교수인 니꼴라이 일민스끼(Nikolai Ilminskii 1891년 사망)는 성경과 정교회의 신앙서적들을 이들 부족의 언어로 옮겼다. 카잔(Kazan)에 세워진 신학교는 러시아 교회의 선교활동을 담당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도꾜(Tokyo)의 주교 니꼴라이 카사트킨(Nikolai Kassatkin 1912년 사망)은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정교 신앙으로 귀의(歸依)하도록 이끌었고, 자신이 죽을 때에는 일본어로 된 경전과 예식서들, 그리고 많은 일본인 사목자들이 있는 자치하는(self-governing) 지역교회를 남겼다. 니꼴라이 주교는 1970년에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알래스카의 성 허먼(St. Herman 1837년 사망) 또한 알래스카 원주민들에 대한 그의 헌신적 사랑과 돌봄에서 표현된 비범한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1970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덧붙여, 러시아 교회의 선교적 활동과 관련해서 요한 베니아미노프(John Veniaminoff 1879년 사망) 신부의 이름을 말해야만 하겠다. 요한 신부는 19세기초에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여행했다. 그는 경전과 교회 예식서, 그리고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The Way to the Kingdom of Heaven)이라고 불려지는 자신의 작은 책들을 알륱(Aleut)어로 옮겼다. 그는 슬라브어의 문자를 빌어서 알파벹을 만들었다. 요한 신부는 위대한 행정가요 기술자였으며, 과학자였다. 그는 교사였고, 사목자였으며, 언어학자였다. 그는 1839년에 캄차카(Kamchatka)와 알류샨 열도(列島 Aleutian Islands)의 주교가 되었다. 1868년 그는 인노센트(Innocent)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의 대주교로 뽑혔다. 대주교 인노센트는 1978년에 ‘알륱인들(Aleuts)의 교화자(敎化者)요 미국의 사도’로서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19세기에 미국에서는 정교회가 성장을 이룩했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이민자들이 옛 대륙의 전통적인 정교 국가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왔다. 1812년 캘리포니아의 포트 로스(Fort Ross)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정교회 건물이 지어졌다. 1870년 알래스카와 알류샨 열도의 첫 주교가 임명되었다. 1872년 정교 선교센터가 비공식적으로 시트카(Sitka)에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옮겨졌으며, 1879년 네스토르(Nestor) 주교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그곳에 선교센터가 세워졌다. 1898년, 나중에 피터 대제의 시대 이후 러시아 교회의 첫 총대주교가 될 티콘 벨라빈(Tikhon Belavin) 대주교가 미국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지역자치(local autonomy), 예식의 언어로서 영어를 쓰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미국사회의 달력을 쓰는 것 따위를 요청했다.

 

1867년 미국의 첫 그리스정교 교구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즈(New Orleans)에 세워졌다. 이 교구는 ‘러시아 정교회의 거룩한 시노드의 영적인 관할 아래, 그리스말을 쓰는 교회의 시작을 황제가 기뻐하는 표로’ 러시아 황제에 의해 그 교회의 성물들(vessels)을 하사(下賜)받았다.

 

동방

19세기에 동방에서는 많은 정교 그리스도인들이 터키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되찾았다. 1821년 그리스인들의 폭동을 이유로 터키 당국은 콘스탄티노플의 그레고리(Gregory) 총대주교와 다섯 명의 대주교들을 부활주일에 파나르(Phanar)의 문으로부터 목매달았다. 그리스의 독립이 이루어진 뒤, 1833년 그리스 교회의 자치적(autocephalous) 지위가 선언되었다. 그 선언은 1850년 콘스탄티노플에 의해 확증되었다. 1844년 총대주교청의 신학교가 할키(Halki) 섬에 세워졌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세르비아 정교의 자치하는(self-governing) 교구 다섯 곳과 루마니아 정교의 두 교구가 터키 제국의 경계선 밖에 세워졌다. 제국 안에서는 불가리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독립된 교회 관할권을 가지려고 애쓴 나머지 터키인들로부터 허가를 얻어냈다. 불가리아인들은 전에, 같은 지역 안에 사는 다른 정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여러 교구 안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임명한 그리스 주교들에 의해 지도를 받았다. 국적(nationality)을 근거로 해서 독립된 교회행정 체제를 세우려는 어떤 행동도 종족주의(phyletism)의 이단으로 여겨져, 1872년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죄되었다. 이 이른바 불가리아인들의 분열(Bulgarian Schism)은 불가리아의 총대주교청이 확정된 영토의 경계선 안에 세워진 1945년에 가서야 마침내 해결되었다.

 

19세기의 후반에는 애기나의 성 넥따리오스(St. Nectarios of Aegina 1920년 사망)가 살아서 활동했다. 그는 펜따뽈리스(Pentapolis)의 대주교였으며, 복음적인 설교와 겸손, 단순함, 가난,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삶의 방식으로 유명하였다.

 

서방

프로테스탄트의 서방은 선교적 확장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때는 역사비평과 성서비평의 방법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시대였다. 그 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신학자들에 의해 주로 감정, 또는 도덕적 행동의 종교로 여겨지는 시기였다. 이 당시에 자유주의자들(liberals)과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 사이에는 큰 충돌이 있었다. 특별히 미국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과학의 입문서(manual)로 쓸 것을 주장하면서, 교회 전통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온 경전의 목적과 의도들에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literally)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19세기의 서구 프로테스탄트 세계에는 이성주의자들 또는 여러 경건주의자들의 자유주의(liberalism)냐, 아니면 분파적인 근본주의(fundamentalism)냐 하는 두 가지 선택만이 주어졌다. 이 세기의 끝무렵 로마교회 안에서는 교황의 교회당국이 현대주의(modernism)의 이단으로 불려지는 로마 카톨릭의 자유주의 형태를 정죄했다. 이것은 1907년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의 뿌리는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성서비평과 종교들의 역사를 강조하는 19세기의 비판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운동 속에 들어있었다.

 

일찍이 19세기의 중반인 1854년에 교황 피우스 9세(Pius IX)는 성모님의 원죄(原罪)없는 잉태(Immaculate Conception of the Virgin Mary) 교리를 공포하였다. 1870년 제 1차 바티칸 공의회(First Vatican Council)는 트렌트(Trent) 공의회의 교리를 다시 확증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의 무오류(無誤謬 infallibility) 교의(敎義 dogma)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교의는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해 ‘권위를 가지고’(ex cathedra) 말할 때, 그것은 오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모든 카톨릭 교인들에게 구속력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바티칸의 교의는 교황이 ‘교회의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말할 때 교황의 무오류성은 구속력을 갖는다고 명백히 선언한다.

 

로마의 성인들인 아르스의 큐레(Cure of Ars) 요한 비안니(John Vianney 1859년 사망)와 리지웨의 테레사(Teresa of Lisieux 1897년 사망)가 이 시대에 살았었다.

 

동방과 서방

1848년 교황 피우스 9세가 정교인들을 향해 내 놓은 제안에 반응하여, 동방의 총대주교들은 정교의 공의회적 성격의 교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유명한 회람서신(回覽書信 encyclical letter)을 펴냈다. 모스크바의 대주교 필라렡(Philaret)에 의해 완전하게 승인된 29명의 주교들과 함께, 정교회의 모든 총대주교들이 서명한 1848년의 회람서신은 현대의 정교회 역사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서로 여겨지고 있다.

 

 

20세기: 1900-1925

 

미국의 대주교구

1898년 티콘 벨라빈(Tikhon Belavin) 주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알류샨 열도와 알래스카 주교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1900년에 이 주교구의 이름이 알류샨 열도와 북아메리카 주교구로 바뀌었다. 1905년 러시아 교회의 거룩한 시노드는 그 주교구를 대주교 관구로 승격시켰고, 티콘은 대주교가 되었다. 같은 해에 미국 대주교 관구의 중심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성 니꼴라스 대성당이 세워진 뉴욕시로 옮겨졌다. 이 때 또한 신학교가 처음으로 미네아폴리스에 세워졌고, 대주교 관구의 첫 공의회(general council sobor)가 남부 카나안(South Canaan)의 성 티콘 수도원(St. Tikhon's Monastery)에 가까운 펜실베니아의 메이필드(Mayfield, Pa.)에서 1907년에 열렸는데,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대주교는 양성중인 사제들을 위한 사목(司牧)학교를 세웠다.

 

티콘 대주교

1908년까지 티콘 대주교가 지도자로 남아 있는 동안, 미국교회는 여러 민족적 배경을 지닌 채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살고 있는 모든 정교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졌다. 대주교 관구 안의 많은 슬라브인들은 이전의 우니잍들(uniates), 곧 동방교회의 의식을 지닌 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이들이었으며, 그들은 브레스트의 연합(Union of Brest)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동유럽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왔다.(16세기브레스트-리토브스크의 연합을 보라.) 이들 슬라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1891년에 미네아폴리스의 자기 교구민들과 함께 정교회인이 된 알렉시스 토쓰(Alexis Toth 1909년 사망) 신부의 인도를 받아 정교회로 다시 돌아왔다.

 

티콘 대주교는 미국의 정교회를 위한 위대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05-1906년에 러시아 교회의 거룩한 시노드에 편지를 써서, 미국의 대주교구는 여러 민족의 모든 정교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자치적 정교회가 되어야만 하며, 교회의 예배와 활동을 위해 영어와 미국사회의 달력(곧, 그레고리안 달력)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주요 예배의식에 대한 영어번역은 이 때 이미 다 되어있었다.

 

미국교회는 여러 민족적 집단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티콘은 확신했고, 그래서 그 자신은 모든 인종의 정교인들 속에서 뽑은 성직자들과 함께 스스로 치리하는 교회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04년 시리아의 대사제(archimandrite)인 라파엘 하와위니(Raphael Hawaweeny)가 미국에 사는 시리아와 레바논 출신의 신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브루클린(Brooklyn)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세르비아의 성직자 가운데서 한 사람을 주교로 임명하려는 비슷한 계획이 세워졌는데, 그도 또한 일정한 지역의 주교구를 갖고서 신대륙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의 정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돌보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주교구별로 관할하는 정교회의 속지주의(屬地主義 territorial principle)를 보존하고, 그러면서도 여러 다양한 민족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사목적 요구들을 만족시키면서, 지역의 성직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안해낸 계획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 당시 미국에 그리스 주교가 없었고, 특별히 그리스인들의 미국 주교구를 세울 계획이 없었을지라도, 이미 1905년에 지역의 정교 성직제도와 관계없이 뉴욕주에 ‘그리스 동방정교회’(Hellenic Eastern Orthodox Church)가 만들어졌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티콘 대주교가 러시아로 되돌아간 뒤, 미국의 주교구는 1914년까지 봉사한 플라톤 로즈데스트벤스키(Platon Rozhdestvenskii) 대주교가 책임을 졌고, 그는 그 뒤 러시아로 돌아가 임시정부 아래서 거룩한 시노드의 한 일원으로 봉사했다. 플라톤은 이전에 러시아 제국에서 게오르기아(Georgia Iberia) 교회의 대리 대주교였다. 1912년 성 플라톤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신학교가 미네아폴리스에서 뉴저지의 테너플리(Tenafly, N. J.)로 옮겨졌다.

 

이 때 이 신학교의 초창기 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나중에 레온티(Leonty) 대주교가 된 레오니드 투르케비치(Leonid Turkevich) 신부가 뉴욕의 성 니꼴라스 대성당 주임신부가 되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스스로 치리하는 정교회가 될 미국의 선교적 대주교구의 운명에 대해 많은 글들을 썼다. 쿠쿨레프스키(A. Kukulevsky) 신부와 함께 그는 1917-1918년의 러시아교회 공의회에서 미국의 주교구를 대표했다.

 

러시아 교회

러시아에서 1900-1917년의 기간은 종교적 부활과 교회개혁의 시기였다. 스트루브(P. B. Struve 1944년 사망), 불가코프(S. N. Bulgakov 1944년 사망), 베르쟈예프(N. A. Berdyaev 1948년 사망), 프랑크(S. L. Frank 1950년 사망), 페도토프(G. P. Fedotov 1951년 사망) 같은 무신론적 지식인들과 다른 이들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이상주의’와 정교회로 회심하고 있던 반면에, 러시아 교회의 주교들과 지도자들은 교회의 구조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있었다. 1905년 거룩한 시노드의 오버-행정장관(ober-procurator)이며 25년 가량 교회를 실질적으로 다스려온 포베도노스트세브(K. P. Pobedonostsev)는 마침내 러시아교회의 공의회가 열릴 것이며, ‘이 위대한 일을 진행시킬’ 계획이 세워질 것이라는 황제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시민들의 세력은, 러시아교회가 자유롭게 되어 국가의 통제와 간섭이 없이 교회의 생활과 일을 해야한다는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1917-1918년의 공의회

공의회에 앞서서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여러 주교들의 의견을 듣는 조사가 이루어졌다. 많은 토론들이 있었다. 여러 가지 보고서들이 모아졌다. 많은 토의 뒤에, 각 주교구는 성직자와 평신도들 가운데서 대표자들을 보내 주교들과 함께 공의회에 참석케 하되, 정교의 신앙에 따라서 주교 홀로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관한 마지막 결정들을 내리게 될 것임이 확정되었다. 1917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러시아교회에 총대주교직을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이었다. 1917년 11월 1일 아침 밤을 새워 기도한 끝에, 한 나이 많은 수도사가 카잔(Kazan) 성모상 앞에 있는 단지 안에서 세 명의 후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그리하여 이전에 미국 대주교 관구의 수장이었던 티콘 대주교가 피터 대제의 시대 이후로 러시아 정교회의 첫 총대주교가 되었다.

 

티콘 총대주교

처음 시작부터 새로운 총대주교는, 소비에트(soviet) 국가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낳선 상황 속에서 러시아교회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1918년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 공개적이고 숨어있는 적들’ 모두를 정죄하고 파문하는 정식 교령(敎令 decree)을 발표하였다. 볼쉐비키(Bolshevik) 정부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이 교령은 그 당시에 여전히 열리고 있던 교회 공의회에 의해서 확증되었다.

 

티콘 총대주교 또한 붙잡혀서, 기근과 내란의 시기동안 가난한 이들을 먹이기 위해 축성된 교회의 성물들을 내놓도록 정부가 요구한 것을 거절한 일에 대해 재판을 받도록 보내졌다. 총대주교는 축성되지 않은 교회의 모든 재산들을 내놓았고, 마찬가지로 정부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양의 물질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바쳐서 어려운 이들을 위한 돈을 마련할 것과 또한 그것을 교회가 직접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임을 약속했다.

 

그의 투쟁과 재판 속에서, 총대주교는 타협함이 없이 교회의 권리를 지키는 한편으로 정치적 중립의 길을 따르려고 애썼다. 그는 1925년 신앙을 위한 고백자로서 죽었으며, 많은 이들에 의해 순교자요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살아있는 교회

티콘 대주교는 또한 ‘살아있는 교회’(Living Church)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했는데, 이것은 소비에트 정권을 열렬히 지지하는 극도로 자유주의적인 교인들의 집단이었다. ‘살아있는 교회’는 국가에 의해 러시아의 공식적인 교회로 인정받았으며, 국가는 그 집단을 티콘 총대주교를 따르는 신자들에 맞서는데 이용했다. 여러 면에서 ‘혁신가들’(renovationists)인 이 집단은 정교회의 가르침과 실천들을 바꾸었으며, 서방의 어떤 이들로부터는 러시아의 개혁을 일으킨 자들로서 환영받았다. ‘살아있는 교회’는 더 이상 국가에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 20세기 후반에 사라졌다. 사람들 가운데 그것을 따르는 이들은 없었으며, 좋은 신앙을 갖고 그 운동에 몸담았던 많은 성직자들이 뉘우치면서 정교회로 되돌아왔다.

 

스스로 축성받은 우크라이나인

1921년 키에프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독립자치 교회(autocephalous church)를 구성하기 위한 우크라이나 신부들의 공의회가 열렸다. 주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이 모임에서 사제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인 바실 맆키브스키(Basil Lipkivskii)를 ‘주교’로 ‘축성하였다.’ 이로써 자치하는 우크라이나 정교회(Autocephalous Ukrainian Orthodox Church)라고 불리는 ‘스스로 축성받은’ 집단이 시작되었고, 그 뒤로 이 집단은 전세계에 널리 퍼졌다.

 

미국의 교회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쉐비키 혁명에 이어서, 미국의 정교회는 혼란과 혼돈 속에 던져졌다. 1917년 이후로 미국의 대주교 관구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없었다. 혁명이 있고 나서 플라톤 대주교는 미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미국교회를 돌보라는 티콘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았으나, 어떤 종류의 공식적 문서도 갖고 있지 않았다. 1922년에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열린 미국 대주교 관구의 제 3차 공의회는 플라톤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였으나, 모스크바의 총대주교로부터 그의 공식적인 임명에 관해 공식적인 언급을 기다리자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총대주교는 소비에트 정권에 붙잡혀 있었고, 국가의 공식적 지원은 ‘살아있는 교회’에 주어졌다.

 

1923년 성직을 박탈당한 신부 요한 케드로프스키(John Kedrovsky)가 ‘살아있는 교회’의 ‘주교’로서 미국에 와서, 뉴욕의 성 니꼴라스 대성당을 포함하여 러시아 교회가 갖고 있는 재산들을 요구하였고, 법적인 판결에 의해 받아내기도 했다. 또한 이 때 테너플리(Tenafly)에 있는 신학교가 문을 닫았고, 그 재산과 도서관은 팔렸다.

 

디트로이트 공의회

1924년 미국 대주교 관구의 제 4차 공의회가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열렸다. 총대주교청으로부터 분리된 러시아 교회의 모든 주교구들은 스스로 치리하며, 지역적으로 관리하면서 자신들의 교회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고 선언한 1920년 11월 20일의 티콘 총대주교의 교령 362호에 근거하여, 이 공의회는 러시아 교회와 정상적인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 때까지 미국의 대주교 관구는 스스로 치리하는 대주교 관구(self-governing metropolitanate)가 된다고 선언하였다. 플라톤은 공식적으로 대주교로서 취임하였고, 교회는 미국 대주교 관구(American Metropolia)로 불리게 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러시아 정교 그리스 카톨릭교회’(Russian Orthodox Greek Catholic Church of America)로 통합되었다.

 

미국의 불일치

혁명 후 몇 년 동안의 혼돈으로 말미암아 미국에 있는 비(非)러시아 정교는 그들 자신의 교회 관할구역을 구성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로써 정교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같은 구역 안에 많은 교회의 ‘주교구들’이 있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2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청은 그리스 교회와 함께 미국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였고, 그것의 관할 아래 미국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in America)를 공식적으로 구성하였다. 시리아의 주교 라파엘이 1915년에 죽었고, 미국의 시리아 정교인들을 위한 새 주교로 아프티미오스(Aftimios)가 지역의 러시아 주교들과 연합한 가운데 미국에서 축성되었다. 이 당시 또한 온갖 민족적 배경을 지닌 지역의 정교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실제로 어떤 분명하고 일관된 성직자들의 지도도 없이, 새로운 세계에서 스스로 교구 공동체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리스 교회

20세기의 첫 25년 동안 그리스에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터키의 영토로부터 밀려들어왔는데, 특별히 1922년에 일어난 그리스와 터키의 전쟁 때에 그러했고, 이 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청은 신세계(미국!)를 포함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많은 교인들을 잃고 말았다. 1911년 에브세비오스 마토풀로스(Eusebios Matthopoulos) 신부는 그리스에서 조에(Zoe) 형제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그리스의 계몽을 위해 헌신하는 조직이었다. 이 형제단은 많은 학교와 조합들을 세웠으며,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 그 단체는 또한 많은 프로테스탄트적 가르침과 실천들, 경건성을 교회 안으로 옮겨왔다.

 

다른 교회들

1920년 터키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유럽 국가들의 형성되던 시기에, 막 생겨난 세르비아 정교의 다섯 주교구가 베오그라드(Belgrade)에 총대주교를 둔 하나의 민족적 세르비아 정교회로 구성되었다. 1922년 이 교회는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부카레스트(Bucharest)에 총대주교를 둔 루마니아 정교회가 1925년에 세워졌다. 이 교회는 루마니아의 국교로 남아있다.

 

중동(中東)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청(Antiochene Patriarchate)은 1898년 러시아인들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첫 아랍인 수장(首長 primate)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청은, 비록 1911년에 아랍인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공의회가 열려 교회의 행정에 참여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리스인 수장을 두고 있다.

 

폴란드 정교회는 1924년에 독립자치권(autocephaly)을 갖게 되었다. 또한 1925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정교 그리스도인들의 주교구가 두 곳 있었다. 핀란드 정교회는 1923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인도 아래 자치하는(autonomous) 교회가 되었다.

1921년 서유럽의 러시아 정교회 대리대주교 관구(exarchate)가 티콘 총대주교에 의해 임명된 에블로기우스 게오르기에프스키(Eulogius Georgievskii 1946년 사망) 대주교에 의해 이끌어졌다. 1922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청은 런던에 그리스인 대리대주교(exarch)를 임명하였다.

 

망명 시노드

볼쉐비키 혁명에 바로 뒤이어서 주요 평신도 군주제주의자(monarchist)들과 함께 한 무리의 러시아 망명교인들은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라고도 불려지는 ‘망명 러시아 정교 시노드’(Russian Orthodox Synod in Exile)를 스스로 구성하였다. 안토니 크라포비츠키(Antony Khrapovitskii 1936년 사망) 대주교가 이끈 이 집단은 마침내 세르비아에 그 본부를 세웠고, 그곳에서 지역의 교회성직자 계급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스렘스키-칼로브치(Sremski-Karlovtsy)에 있었던 까닭에, 이 집단은 또한 칼로바츠키 시노드(Karlovatskii Synod)라는 이름을 갖기도 했었다. 이 집단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청 뿐 아니라 티콘 총대주교에 의해서도 공식적으로 정죄되었다.

 

교회일치 운동

19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협력을 이루기 위한 운동이 1910년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국제 선교사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를 세움으로써 20세기의 첫 25년 동안에 더 강하게 발전하였다. 1920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주교들은 ‘온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들에게’(Unto All Churches of Christ Wheresoever They Be)라는 회람편지를 보내어, ‘여러 그리스도 교회들 사이의 더 가까운 관계와 상호 이해’를 요청하였다.

 

 

20세기: 1925-1950

 

러시아 교회

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소비에트 국가는 다시금 러시아의 정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스탈린 시대와 같은 폭력적인 숙청(肅淸)은 없었으나, 새로운 박해는 가상(假想)의 법적인 토대 위에서 ‘행정적인’ 수단의 형태로 다가왔다. 학교와 교회들이 문을 닫았는데, 1960년에 문을 열고 있던 22,000개의 교회가 1964년에는 7,000개로 줄었다. 무거운 세금과 성직자들의 등록을 제한하는 일이 뒤따랐다. 하찮고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워서 성직자들을 심한 형벌에 처하였다. 1961년 정부의 새로운 법령은 교회의 모든 법적이고 행정적인 권위를 평신도의 협의회들에 넘겨줌으로써 교구 사제들의 힘을 크게 제한하였는데, 이 협의회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건물을 쓸 권리를 지닌 지역 법인(法人)을 구성하기 위해서 소비에트 법에 의해 20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사목자들은 교회생활에 공식적으로 관계하는 일이 전혀 없이, 그저 예식을 맡아서 하는 관리(functionaries)로서 그 역할이 줄어들었다.

 

이같은 ‘행정적인’ 수단들은, 마르크스주의자(marxist)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래 전에 소련(蘇聯 USSR)에서 자연적인 죽음을 맞았어야만 하는 종교적인 믿음을 파괴하기 위한 시도(試圖)였다. 이 시대의 공식적인 무신론적 정치선전(propaganda)을 보면, 그 땅에 끈덕지게 남아있는 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직자들의 호소

국가가 교회를 새로이 박해했을 때 러시아교회의 지도자급에 있는 성직자들이 침묵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박해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교회에 관한 올바르고 합당한 행동을 바라는 가장 강력한 호소들이 칼루가(Kaluga)의 대주교 예르모겐(Yermogen)과 니꼴라이 에쉴리만(Nikolai Eshliman), 글렙 야꾸닌(Gleb Yakunin) 신부에게서 나왔다. 1945년의 공의회에서 공포(公布)된 러시아정교회의 법규(法規 statute)들 뿐 아니라 소비에트법에 근거해서, 러시아 교회의 권리를 대신하는 이들 대변자(代辯者)들은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편지를 1965년 12월에 교회와 국가의 관리들에게 공개적으로 보냈다. 그들은 덜 알려진 여러 동료들과 함께 성직을 박탈당했다. 러시아교회의 개혁과 강력한 지도력, 정당한 대우를 바라는 성직자와 평신도들 속의 동요(動搖)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빠스테르나크와 쏠제니친

성직자들에 덧붙여서, 러시아에서는 학자와 문학자들로부터도 신앙과 자유의 이름으로 여러 호소들이 터져 나왔다. 노벨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인 보리스 빠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1960년 사망)와 알렉산더 쏠제니친(Alexander Solzhenitsyn)이 바로 그들이다. 쏠제니친은 1972년에 그의 유명한 ‘사순절 편지’(Lenten Letter)를 삐멘(Pimen) 총대주교에게 보냈다. 이 편지는 국가의 통제 아래서 러시아교회가 취한 정책과 행동들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하였다. 이 편지는 러시아교회 안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청으로부터는 어떤 공식적 답변도 듣지 못했다.

 

삐멘 총대주교

1970년에 알렉세이(Alexei) 총대주교가 죽자, 삐멘 이즈베코브(Pimen Izvekov) 대주교가 1971년에 열린 공의회에서 러시아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뽑혔다. 이 공의회에서는 지역교구의 성직자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1961년의 행정적 법규들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뽑힌 뒤 여러 다른 총대주교청을 방문했던 삐멘 총대주교는 러시아 안에서 일고 있는 교회의 지도력에 대한 모든 비판에 대해 침묵을 지키면서, 계속해서 전임자들인 세르기우스(Sergius)와 알렉세이처럼 소비에트 당국과 협력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일본의 자치

1970년 알렉세이 총대주교의 마지막 행동들 가운데에는 일본정교회(Orthodox Church in Japan)의 자치(autonomy)를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청이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도 들어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주교 관구에 속해있던 일본교회의 수장인 블라디미르 나고스키(Vladimir Nagosky) 주교는, 교회가 완전히 스스로 치리하게 되자 토쿄의 대주교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는 일본의 수장을 뽑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축성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유보(留保)하였다. 다른 모든 점에서 일본교회는 완전히 독립적이다. 일본의 자치에 때맞춰서, 일본교회의 설립자인 니꼴라이 카사트킨(Nikolai Kassatkin) 대주교가 러시아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축성되었다. 1972년 본토인인 떼오도시우스 나가시마(Theodosius Nagashima) 대주교가 교회의 수장이 되자, 블라디미르 대주교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대주교 관구의 발달

미국의 대주교 관구(American Metropolia)에서는 50, 60년대에 어려움들이 있었다. 이 때의 문제는 교회의 신학적이고 영적인 발전과 더 적절한 교회생활에 대한 바램으로부터 생겨나는 내부적인 어려움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각자의 권리와 특권에 대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다툼의 형태를 띠는, 행정적이고 예식에 관한 개혁을 열렬히 바라는 면들이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말까지 교회의 대다수 사제들과 신도들 사이에서는, 대주교 관구 안에서 적절한 예식의 예배를 행하고 행정적인 질서와 영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한 한 합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이 때까지는 신학교들이 확고히 세워졌다. 성 티콘 신학교(St. Tikhon's Seminary)는 상당히 발전했다. 성 블라디미르(St. Vladimir's) 신학교는 아르세니에프(N. Arseniev), 보골레포프(A. Bogolepov), 페도토브(G. Fedotov), 플로로브스키(G. Florovsky) 신부, 베르호프스코이(S. Verhovskoy), 슈메만(A. Schmemann) 신부, 메옌도르프(J. Meyendorff) 신부 등 유럽의 유명한 학자들을 받아들였고, 1967년에는 신학사와 석사 학위를 줄 수 있는 권한을 뉴욕주로부터 받았다.

 

이레니 대주교

레온티 대주교가 1965년 5월에 죽었다. 미국 대주교 관구의 12차 협의회에서 어떤 후보도 첫 투표에서 필요한 3분의 2의 득표를 하지 못하게 되자, 행정관 대리인 이레니 베키쉬(Ireney Bekish) 대주교와 미국태생인 일본교회의 블라디미르 나고스키 주교가 대주교직을 맡을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 뒤에 이레니 대주교가 주교들의 시노드에 의해서 레온티 대주교를 잇도록 선출되었다.

 

이레니 대주교는 미국정교회의 혼란스런 상황에 대해 긴급히 토의할 것을 주장하면서, 곧바로 자신의 승계에 대해 모든 독립자치 교회의 수장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때 그의 호소는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했다. 미국교회에 대한 토론에 지도적인 총대주교들이 참석해 주길 바라는 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이레니 대주교는 1967년에 미국 대주교 관구의 13차 협의회를 주재(主宰)했는데, 이 때 바다 건너 어떤 총대주교청에 의지하거나 인정받음 없이 대주교 관구를 스스로 관리하는 미국정교회로 선언하려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감정은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비록 어떤 공식적 행동을 보이진 않았지만 협의회의 ‘비공식 투표’(straw vote)에 의해서, 압도적 다수(多數)의 대표자들이 교회(의 이름)에서 ‘러시아’(Russian)라는 이름을 떼버리고, 미국 안에서 그리고 미국을 위한 교회로서 공식적으로 나아가려는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독립자치권

60년대 후반 보통 교회일치에 관한 모임에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미국의 대주교 관구의 대표자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문제에 대한 비공식적 대화가 시작되었다. 두 교회 사이의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한 공식 협상들은 1969년에 시작되었다. 필라델피아의 키프리안(Kiprian) 대주교와 요셉 피쉬티(Joseph Pishtey), 요한 스크비르(John Skvir),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 요한 메옌도르프(John Meyendorff) 등의 여러 신부들로 이루어진 미국 대주교 관구의 공식 대표단은 미국 영토로부터 러시아 교회의 모든 교회적 관리권을 완전히 거둠과 함께, 대주교 관구를 완전하게 스스로 치리하는 상태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복작하고 예민한 문제에 대하여 각각의 교회 안에서 길고 힘든 협상과 많은 머뭇거림과 타협, 그리고 많은 모임과 토론을 갖고 난 뒤, 1970년 3월 31일 이레니 대주교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외교문제 담당 책임자인 니꼬딤 대주교는 러시아 교회가 미국의 대주교 관구를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치하는 ‘미국정교회’(Orthodox Church in America)로 인정한다는 협정에 서명했다.

 

독립자치권이 선포되다

1970년 4월 10일 알렉세이 총대주교가 죽기 6일 전, 러시아 교회의 거룩한 시노드를 이루는 14명의 주교들과 함께 그는 대주교관구를 스스로 치리하는 교회들로 이루어진 정교가족 안의 열 다섯째 독립자치 교회, 곧 ‘미국정교회’로 선포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하였다.

 

1970년 10월 20-22일 사이 성 티콘 수도원에서 열린 미국 대주교관구의 14차 협의회에서는, 미국교회를 대신하여 시트카(Sitka)의 주교 테오도시우스 라조르(Theodosius Lazor)가 이끄는 교회대표단이 정식으로 전해받은 독립자치권에 관한 문서가 공식적으로 읽혀졌으며, 그 행사는 장엄하게 경축되었다. 교회의 새로운 지위는 301명 찬성, 7명 반대, 2명 기권으로서 협의회의 회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확증되었다. 따라서 이 협의회는 독립자치하는 미국정교회의 첫 전체 공의회가 되었다.

 

성 티콘 수도원에서 열린 제 2차 공의회는 새로운 교회의 공식적인 관리법령을 채택하고, 스테핀 라스코(Stephen Lasko) 주교가 이끄는 알바니아 주교구를 공식적으로 미국정교회 안에 받아들였다.

 

성 허먼의 축성

1972년 8월 9일 미국정교회는 자신들의 첫 성인인 알래스카의 허먼(Herman) 신부의 축성을 경축했다. 1794년 핀란드의 발람(Valaam) 수도원에서 선교를 위해 처음 알래스카로 온 수도사들 무리의 한 사람인 성 허먼은 단순한 평신도 수도사로서, 알래스카인들의 보호자요 교사이며 하느님 앞에 있는 중보자로서 그들 속에 남았다. 핀란드 정교회의 파벨리(Paaveli) 대주교가 참석한 축성식은 코디악(Kodiak)에서 열렸다.

 

독립자치권의 결과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청이 신대륙에 있는 이전의 선교주교구를 15번째의 독립자치 정교회로 인정한 행동은 모든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로지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교회만이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격렬한 반대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과 그것의 미국-그리스 정교 대주교구, 그리고 그리스말을 쓰는 다른 교회들에게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청을 포함해서 모든 교회들은 미국정교회와 성례전적이고 영적인 친교를 충분히 나누고 있으며, 따라서 사실상(de facto) 인정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법률상(de jure) (인정하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총대주교청

1950년부터 1972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청은 아데나고라스 1세(Athenagoras I) 총대주교라는 당당한 인물에 의해 이끌어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고위성직자는 먼저 터키 안에 있는 총대주교청의 생존과 교회일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64년 1월 총대주교는 예루살렘에서 교황 바오로 6세(Paul VI)를 만났는데, 이것은 1439년 이후 정교와 로마 교회의 수장들 사이에 있은 첫 만남이었다. 두 고위성직자는 1967년에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에서 다시금 만났다. 1965년 그들은 1054년의 파문(anathemas)을 무효로 하며, 그러므로써 진리와 사랑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향해 서로 탐구(探究)하면서 두 교회가 함께 사귐을 갖는 시대를 가리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총대주교는 또한 개인적으로 영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아데나고라스가 비판받다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향한 그의 대담한 말과 행동들, 특히 로마교회와 그의 관계에서 아데나고라스 총대주교는 존경과 함께 공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비(非)정교인(non-Orthodox)의 마음 속에서 실제로 모든 정교성(Orthodoxy)이 일체감을 갖게 되는 반면에, 총대주교는 모든 정교회의 지도자들과 적절한 협의도 없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책임성 없이 행동한다는 이유로 정교회의 어떤 이들에 의해서 심하게 비판받았다. 교회 안의 다른 이들, 주로 그리스교회와 아토스산, 그리고 미국에 있는 이들은 총대주교의 활동방식 뿐 아니라 정교신앙을 배신하는 듯한 행동 자체도 비판하였다.

 

대(大)공의회

1961년 아데나고라스 1세는 정교인들이 맞서고 있는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고, 이미 수십 년 동안 토의해 온 정교회의 대공의회(Great Council)를 소집하기 위한 진지한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서, 모든 독립자치 정교회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첫 회의를 로데스(Rhodes)에서 열었다. 여러 번의 다른 모임들이 로데스와 스위스에서 열렸지만, 세계의 모든 정교 주교들이 참석하는 이같은 대공의회의 소집이 가까운 장래에는 거의 있을 것 같지 않다. 1967년 세계 총대주교청은 미국에 있는 정교의 관할권에 관한 문제를 같은 해 스위스에서 열린 범(凡)정교인(pan-Orthodox) 회의의 의제(議題)로 삼기를 거부하였다. 그 응답은 ‘미국에 있는 교회법적 정교 주교들의 기립회의’(Standing Conference of Canonical Orthodox Bishops in America)로 이어졌다.

 

내적인 문제들

세계 총대주교청은 계속 터키 정부와 문제를 갖고 있다. 1972년 아데나고라스 1세를 승계하기 위해 빠빠도뿔로스(Papadopoulos)인 디미뜨리오스 1세(Demetrios I) 총대주교를 서둘러 뽑은 것은 자국 영토 안에서 정교회의 일들에 대한 터키 당국의 힘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할키(Halki) 섬의 총대주교청 신학교가 터키의 법규로 말미암아 1971년 문을 닫았다. 세계 총대주교청은 또한 북부 그리스의 ‘새로운 땅들’ 안에 있는 주교구들에 대한 관할권을 놓고 그리스교회와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20세기초에 약 6,500명이었으나 오늘날에는 1,500명 정도로 줄어든 아토스산의 수도사들이 교회일치에 관한 정책을 이유로 총대주교청의 지도력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스교회

그리스교회는 40년대의 내전(內戰) 시기 이후로 그 자신의 내적인 혼란을 안고 있다. 1967년 군사 혁명위원회의 쿠데타로 말미암아, 뒤이은 (체제)전복(顚覆) 뿐 아니라 교회의 일들, 특별히 성직자 계급제도의 단계(level)에 대해 혼란을 가져왔다.

 

그리스 대주교관구

세계 총대주교청은 미국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정교회에 대한 자신의 관할권을 계속 행사하고 있다. 1959년 콘스탄티노플은 고(故) 미카엘(Michael) 대주교를 잇기 위해 야코보스 쿠쿠지스(Iakovos Koukouzis)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남부에서 있은 ‘자유를 위한 행진’(freedom marches)과 같은 국가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 새로운 수장은 빠르게 미국 정교의 대변인으로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고도로 중앙화된 행정체계와 뚜렷한 그리스적 성격을 자신의 대주교관구에 심으면서, 아데나고라스(이전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미카엘 같은 미국정교회의 전임자들이 취했던 정책들을 계속 이어왔다. 아마도 피할 도리가 없이, 야코보스 대주교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신세계(New World)에서 정교인들의 일치를 이루어 내기 위한 입장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그 자신의 대주교 관구 안의 사람들, 특별히 최근의 이민자들은 그의 친(親)미국적이고 반(反)그리스적인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점들 때문에 그를 공격하였다.

 

스코바(SCOBA)

1960년 3월 야코보스 대주교는 미국에 있는 모든 교회법적 정교 관할구역의 수장들과 함께 자신들의 더 친밀한 협력관계를 의논하기 위해 한 회의를 열었다. 같은 해 6월 7일 ‘미국에 있는 교회법적 정교 주교들의 기립회의’(Standing Conference of Canonical Orthodox Bishops in America)가 시작되었다. 비록 그 어떤 교회법적인 관할권이나 권위가 없는 협의체이긴 했지만, 스코바(SCOBA)는 신세계에서 정교인들의 일치에 대한 한 상징이 되었으며, 정교인 상호간의 활동을 조정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SCOBA의 공식적 후원 아래 이루어진 계획들 가운데 가장 결과가 좋은 것으로는 학생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역(使役)을 위한 ‘대학위원회’(Campus Commission)와 ‘정교 그리스도인 교육위원회’(Orthodox Christian Education Commission)인데, 후자는 1957년 소피 쿨롬찐(Sophie Koulomzin)의 지도 속에 시작된 종교교육의 분야에서 정교인 상호간의 활동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OCEC는 정교회 학교들을 위해 완전한 교과과정 자료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비록 독립자치의 미국정교회가 있음으로써 그 구조와 정책을 다시 생각하도록 압력을 받아 오고 있긴 하지만 SCOBA는 오늘날에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 또 비록 미국 안에 서로 겹치는 정교 관할구역이 많이 있음으로해서 생겨난 교회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긴 했지만, SCOBA는 야코보스 대주교의 주재(主宰)아래 정교인들 사이의 조정자와 대화를 위한 토론장(platform)으로서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민족적 주교구들

1966년 미국의 안티오키아 정교 그리스도인 대주교구는 안토니 바쉬르(Antony Bashir) 대주교가 죽자 필립 살리바(Philip Saliba) 대주교를 자신들의 수장으로 뽑았다. 미카엘 샤힌(Michael Shaheen) 대주교가 이끄는 톨레도(Toledo)의 작은 주교구는 1977년까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청 아래서 따로이 있었으나, 그 해에 안티오키아 대주교구와 오래도록 구별되게 있어온 관계를 해결하였다.

 

세르비아 교회가 디오니시예(Dionisiye) 주교를 물러나게 하고 사바(Sava), 피르밀리안(Firmilian), 그레고리(Gregory) 등 세 주교를 미국의 세 주교구에 임명한 1963년에 미국의 세르비아인들은 서로 갈라졌다. 디오니시예 주교는 물러나길 거부했고, 교회당국은 그의 성직을 박탈했다. 그는 성직자와 신도들로 이루어진 큰 무리를 미국에 있는 자신의 독립적인 세르비아교회로 이끌어 들였다. 비록 두 세르비아인 집단 사이의 극심한 다툼의 시기는 지났지만, 게르만(German) 총대주교가 이끄는 베오그라드의 총대주교청이 1958년 이후로 계속해서 미국의 세 주교구를 관리하고 있는 반면에, 디오니시예 집단은 여러 정교회들과 교회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남아있다.

 

미국의 작은 불가리아 주교구 또한 이 시기에 나뉘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1971년 고(故) 끼릴(Cyril) 총대주교를 대신해서 취임한 막심(Maxim) 총대주교가 있는 소피아의 총대주교청에 충실한 채 남아있는 반면에 다른 이들은 처음으로 그를 자신의 독립적인 집단을 구성하였고, 그 뒤 1976년 12월에 미국정교회에 가입하였다.

 

미국의 작은 루마니아 주교구는 저스틴(Justin) 총대주교가 이끄는 루마니아 교회의 관할권 안에 남아있으며, 한편 콘스탄티노풀의 총대주교청은 미국에 있는 알바니아인, 카르파토(Carpatho)-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의 관할구역에 대한 관할권을 계속해서 행사하고 있다.

 

미국정교회(OCA)의 또 다른 회원들

발레리안 트리파(Valerian Trifa) 주교가 이끄는 미국의 루마니아 주교구는 1960년 미국의 대주교관구에 공식적으로 가입하였고, 따라서 독립자치하는 미국 정교회의 완전한 한 부분이다.

 

본래 판 놀리(Fan Noli) 주교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고(故) 스테핀 라스코 주교의 지로 아래 있던 알바니아 주교구는 1971년 미국정교회에 합류하였다.

 

미국정교회는, 호세 꼬르떼 이 올모스(Jose Cortes y Olmos) 주교가 20,000명의 교인을 이끌고 있는 멕시코의 대리 대주교관구를 1972에 세웠다.

 

1977년 10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 5차 전미국 공의회에서 이레니 대주교는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정교회의 수장직에서 물러났다. 첫 투표에서 어떤 후보도 대주교직에 필요한 3분의 2의 득표를 못하자 그 회의는 미국태생의 두 주교를 후보자로 지명하였는데, 그들은 하트포드(Hartford)와 뉴잉글랜드(New England) 주교구의 드미뜨리 로이스터(Dmitri Royster) 주교와 피츠버그와 서(西)버지니아 주교구의 테오도시우스 라조르(Theodosius Lazor) 주교였다. 그 뒤 테오도시우스 주교는 주교들의 시노드에 의해 이레니 대주교를 이어서 다스리는 고위성직자로 선출되었고, 이로써 미국에서 태어난 주교로서 미국정교회의 수장직을 맡은 첫 인물이 되었다.

 

유럽의 교회들

1951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가 독립자치교회가 된 반면에, 1967년 알바니아의 공산당 정부는 그 곳에 정교회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에블로기우스(Eulogius) 대주교 이래로 콘스탄티노플의 관할 아래 있던 서유럽의 러시아 대리주교 관구는 1965년 세계총대주교청에 의해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청으로 ‘되돌려’졌다. 대리대주교 관구는 모스크바 관할 아래 두기를 거부하고, 독립하며 스스로 치리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971년 다시 한 번 더 콘스탄티노플에 호소하였고, 다시금 그 관할 아래 받아들여졌다. 그 대리대주교 관구의 수장은 브뤼셀의 죠오지(George of Brussels) 대주교이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청은 런던의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 대주교, 브뤼셀의 바실 크리보쉐인(Basil Krivosheine) 대주교 같은 매우 잘 알려진 지도자들로써 서유럽에 있는 대리대주교 관구를 계속 관리하고 있다.

 

1973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청은 동(東)아프리카의 정교회를 위해 네 명의 주교를 축성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둘은 본토인 지도자들인 르우벤 스파르타스(Reuben Spartas)와 테오도르 난끼아마스(Theodore Nankyamas)이다.

 

우크라이나인들과 시노드

‘스스로 축성한’ 우크라이나인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사이의 협상이 70년대에 이루어졌으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뉴욕의 조던빌(Jordanville, New York)에 있는 주요 수도원과 함께 지금은 미국을 그 중심으로 삼고있는 ‘망명 러시아 시노드’(The Russian Synod in Exile)는 다른 정교회들과 교회법외(外)적인 관계를 계속하고 있다. 이 집단의 반(反)교회일치적(anti-ecumenical)이고 반(反)공산주의적인 견해는 타협하지 않는 정교성(uncompromising orthodoxy)으로 꾸며진채 전해지고 있다.

 

교회일치 운동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교회는 1961년 뉴델리(New Delhi)에서 열린 3차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였다. 60년대에 러시아 교회는 고(故) 니꼬딤(Nikodim) 대주교의 인도로 교회일치 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런 활동은 70년대에 눈에 띠게 줄어들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공식적인 교회정책을 계속 지배하고 있는 소비에트 정부의 정치적 요구가 변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교회일치 운동에 참여하면서 전체 정교인들은, 교회일치적 대화에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의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성례전적 친교를 정교 신앙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미국 정교회의 주교들은 1973년에 이같은 주제에 대한 공식적 회칙(回勅)을 발표하였다.

 

로마교회

1959년 교황 요한 23세(John XXIII)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세계 공의회’(ecumenical council) 소집을 발표하였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라고 불려지는 이 공의회는 1962년에 시작되어 1965년에 끝났다. 요한 교황은 1963년에 죽었으며, 교황 바오로 6세(Paul VI)가 그 직을 승계하였다. 카톨릭의 모든 주교들과 많은 비(非)카톨릭 참관단(observers)이 참석한 가운데, 공의회는 로마카톨릭적 교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관한 공식문서들을 발표하였다. 이 공의회로 말미암아 로마교회 안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공의회 이후의 시기에는 혼란과 갈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변화들로는 교회권위의 로마적 체계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것과 로마 카톨릭이 교회일치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 것이었다. 로마교회 안에서 일어난 최근의 변화들로 말미암아 전체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엄청난 영향이 미쳐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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