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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홉코 신부의 정교신앙 시리즈(제 1권 교리)

ttoza 2010. 2. 17. 21:02

정교신앙 시리즈 제 1권

 

교리

 

지은이: 토마스 홉코(T. Hopko) 신부 *

일러스트레이션: 존 마투지악(J. Matusiak)

 

* 이 시리즈의 저자 토마스 홉코 신부(V. Rev. Fr. Thomas Hopko, 1939 - 2015)는 러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성 블라디미르(St. Vladimir's Orthodox Theological Seminary, Crestwood, NY.)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포드햄 대학(Fordham Uni.)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알렉산더 슈메먼(Fr. Alexander Schmemann), 존 마이엔도르프(Fr. John Meyendorff) 등 이름난 정교 신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196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1968-2002년까지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에서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을 가르친 그는 학장(1992-2002)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그후 은퇴하여 펜실베니아에 살던 그는  성 블라디미르의 명예학장으로서 여전히 왕성한 저술, 강연활동을 펼쳤으며, 특별히 인터넷의 정교회 방송(http://ancientfaith.com)을 통해 정교회의 신앙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교신앙(THE ORTHODOX FAITH) 시리즈는 평범한 독자들에게 정교회의 신앙과 삶에 대한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정보를 주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다.

 

제 1권은 교리(DOCTRINE)에 관한 것으로서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곧, 기독교 교리의 근원, 니케아 신조의 해설에 나타난 정교회의 주요 교리들, 성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한 설명이다.

 

제 2권은 예배(WORSHIP)에 관한 것으로서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곧, 성당의 건물과 성의(聖衣)와 상징들, 성례전, 매일의 의식, 금식과 축일을 담은 교회력, 성찬예배이다.

 

제 3권은 성경과 교회사(BIBLE AND CHURCH HISTORY)로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 부분은 성경의 내용과 해석에 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교회사에 관한 것으로서 각 세기(世紀)의 주된 신학적, 전례적, 영적 발달을 강조한다.

 

제 4권은 영성(SPIRITUALITY)에 관한 것으로서 기독교인다운 삶의 주요 주제들을 다룬다. 곧, 기도와 금식과 회개, 여러 가지 미덕(美德)들, 세상에서의 증언과 하느님과의 사귐이다.

 

 

 

차례

 

1장: 그리스도교 교리의 원천들

 

계시

전통

성경

예식

공의회들

교부들

성인들

교회법

교회의 예술

 

2장: 신앙의 상징

 

니케아 신조

신앙

하느님

창조

천사들

악령들

사람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육화(肉化)

구속

부활

승천

심판

하느님의 나라

성령

교회

성사들

영원한 생명

 

3장: 성 삼위일체

 

참고문헌

 

일러두기

1. 성경의 책이름은 공동번역 성서(1977년)의 것을 따른다.

2. 성경본문의 인용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동번역 성서의 것을 기준으로 한 다.

3. 단, 공동번역의 ‘야훼’라는 호칭은 ‘주’ 또는 ‘주님’으로 바꾸어 표기한다.

4. 일반적으로 함께 쓸 수 있는 고유명사나 단어들은 구태여 구별하지 않고 문맥에 맞추어 적절하게 쓴다.

(예: 바울-바울로, 성경-성서, 믿음-신앙, 은혜-은총, 삶-생명-생활, 성령-성신, 복음경-복음서, 성부-아버지, 성자-아들 따위)

 

 

 

 

1장: 그리스도교 교리의 원천들

 

 

계시

매일 아침의 조과(朝課) 예배에서 정교회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집에서 그대들을 축하하리라.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시편 118: 26-27) 그리스도교 교리의 첫 토대는 이 성경 말씀 속에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God has revealed Himself to us)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피조물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가장 내밀(內密)한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내밀한 본질을 피조물들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인 본질과 의지에 대해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보여주셨다.

하느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의 성취와 완성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구약에 나타난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계시의 완성이시다. 예수님은 참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축복받으신’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붙인 첫 칭호는 랍비(Rabbi)인데, 이 말은 글자대로 하면 선생님(teacher)을 가리킨다. 영어로 된 신약성경에서 교사(Master)라는 말 또한 학교선생님이나 교사의 자격을 가진 분처럼 가르친다는 뜻으로 예수님께 붙여졌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말 그대로 학생이나 생도(生徒 pupils)를 뜻하는 제자(disciples)로 불려졌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신다. 그분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들을 완전하게 드러내신다.

 

예수님이 선생님으로 오시는 것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의 한 측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말의 그리스도(Christ)는 히브리말로 메시야(Messiah)인데, 이 말은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오시면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이다.(이사야 54:13; 요한 6:45)

 

예수님은 신성한 선생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오신다. 그분은 많은 사건들 속에서 당신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임을 선포하셨다. 그분은 평범한 유다인 교사처럼 하지 않으시고 ‘권위있게’ 말씀하셨다.(마태오 7:29)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은 바로 하느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라면서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까지 믿는 것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였다. 나는 그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요한 12:44-50)

 

예수께서는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가르치셨으며, 사실 당신 자신의 인격으로써 더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다. 그분은 스스로를 진리(요한 14:6)요 빛(요한 8:12)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육신을 취하신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로고스(Logos)로서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려고 나자렛의 예수로 사람이 되셨다고 하셨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요한 1:1-18을 보라. 정교회에서 부활절예배 때 읽는 복음경)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육신을 취하시어, 당신의 현존과 말씀, 행위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시려고 오신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과 그분의 복음(Gospel)을 선포하려고 보내심을 받는데, 이 복음은 문자대로 하면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 또는 ‘좋은 소식’을 뜻한다. 예수께서 보내시는 이들은 사도(apostles)라고 불려지는데, 이 말은 말 그대로 ‘보냄을 받는 이들’을 뜻한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靈感)을 받는데, 성령은 진리의 영(요한 15:26)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을 가르쳐 ‘모든 민족으로 제자가 되게’ 하신다.(마태오 28:19)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다’(사도행전 2:42)고 한다. 교리(Doctrine)는 문자적으로는 ‘가르침’(teaching)이나 ‘교훈’(instruction)을 뜻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또한 그리스도교회의 가르침도 된다. 그 가르침은 각 시대와 세대에 의해 하느님의 참된 가르침으로서 받아들여진다. 또한 그 가르침은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이 빛을 받아 구원받게 되는 영원한 생명의 가르침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선포된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기계시, 곧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되는 계시가 가장 중요한 계시라고 하더라도, 진리를 향한 인간의 모든 참된 노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점이 언급되어야만 하겠다. 삶의 의미에 대한 모든 참된 통찰력은 그리스도교의 복음 속에서 완전한 해답을 얻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은 이교(異敎) 신앙에 대한 동경과 여러 철학자들의 지혜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사실상 한 분이신 하느님의 진리에 이르는 마땅하고 참된 방법들(ways)이라고 가르쳤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하느님의 조명을 받아 진리를 위해 봉사하고 사람들을 풍성한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서,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여 사람들을 비추는 신성한 빛에 의해 영감을 받은 모든 이들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빛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육신을 취하신 나자렛 예수이시고,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 성인들의 삶, 교부들의 지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나타난 신성한 계시는 바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행동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나타내셨으며,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당신 자신을 계속 나타내 보이신다.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계시의 행동을 보고자 한다면, 사악하고 그릇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정화해야만 한다. 또한 진리와 서로서로를, 그리고 하느님의 선한 창조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애를 써야만 한다. 정교의 신앙에 따르면 그릇된 것과 죄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신성한 은총 앞에 스스로를 열어놓고 모든 악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한다면, 우리는 경전들을 적절하게 해석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셨고 계속해서 계시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참 하느님과 진정한 친교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전통

하느님 백성들의 계속 이어지는 삶을 ‘거룩한 전통’(Holy Tradition)이라고 부른다. 구약에 나타난 거룩한 전통은 그리스도께서 나실 때까지는, 성경의 구약 부분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속되는 삶 속에서 표현된다. 이 전통은 메시야께서 오시고 그리스도 교회가 생김으로써, 완성되고 승화(昇華)된다.

 

신약 혹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또한 사도전통, 교회의 전통이라고 불리운다. 이 전통에 대해 쓰여진 주된 부분이 성경의 신약에 있는 문서들이다. 복음서들과 사도교회의 다른 문서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을 이루며, 후대에 발전된 모든 것들의 주요 원천이요 영감을 준 근원이기도 하다.

 

이같은 그리스도교 전통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전통(Tradition)이라는 말은 엄밀하게 말해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진’(passed on) 것과 ‘넘겨진’(given over)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전통’(Holy Tradition)은 그리스도의 사도들 때로부터 바로 오늘날로,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넘겨진 것이다.

 

비록 기록된 문서들을 많이 담고 있긴 하지만, 거룩한 전통이 반드시 기록된 것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저 하나의 커다란 문학작품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이 곳에서 저 곳으로, 그리고 세대(世代)에서 세대로 옮아간 전체교회의 삶과 경험 전부를 가리킨다. 전통은 성령에 의해 영감받고 인도되는 교회 자신의 삶 바로 그 자체이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것이 성령의 은총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거룩한 전통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모든 것이 반드시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의 어떤 것은 그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이거나, 또는 어떤 영원한 가치가 없이 단순히 인간적인 관습과 전통인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이 그 자체로 죄이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것들이 본래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쓰이지 않는 한, 교회의 삶에 매우 긍정적이고 도움을 주는 것일 수가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단지 세속적이고 인간적이며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과 천상적(天上的)이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관계된 것 사이의 차이를 잘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교회 안에는 거룩한 전통에 속하지도 않으면서 긍정적인 인간적 전통에도 들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죄일 뿐이며 잘못된 이런 것들은 악한 세계로부터 교회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지상의 한 제도(制度)로서 인간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교회는 거룩하지 못한 구성원들의 죄에 대해서는 면역(免疫)기능이 없다. 교회의 삶 속으로 몰래 스며들어오는 이런 죄와 잘못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참되고 거룩한 전통에 의해 단죄되고 심판받는다.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도 성서가 가장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교회의 예식에 참여하는 생활과 그에 따르는 기도가 있고, 그 뒤로는 교리적인 결정들과 교회공의회에서 승인된 규정들, 교부들의 저술들, 성인들의 삶, 교회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악이나 건축처럼 창조적이고 영감이 깃든 예술적 표현들과 함께 성화적(聖畵的) 전통이 있다.

 

거룩한 전통의 모든 요소들은 실제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 하나도 홀로 생겨난 것은 없다.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의 전체적인 삶과 외따로 떨어질 수 없다. 모든 것은 온 시대와 세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회의 살아있는 생명 속에서 생생하게 존재한다. 교회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계속 살아나가는 한, 교회의 거룩한 전통은 계속해서 자라고 발전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성경

하느님의 계시를 글로 기록한 책, 또는 책들을 성경(Bible)이라고 한다. 성경은 또한 거룩한 경전(Holy Scriptures)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서 경전(經典)이라는 단어는 단지 기록물을 뜻한다.

 

성경은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성경은 두 개의 계약(testaments 또는 covenants)으로 나뉘어진다. 이 단어들은 ‘협정’(agreements), ‘조약’(pacts) 등을 뜻하며, 또는 ‘(거래)관계’(deals)라고 말할 수도 있다. 두 개의 기초적인 계약은 옛 계약과 새 계약으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것은 저마다의 경전을 갖고 있다. 하나의 책으로서 성경 안에는 서로 다른 많은 문서들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법, 예언, 역사, 시, 이야기, 금언(金言)들, 기도, 편지와 상징적인 환상들이다.

 

 

구약

구약 경전은 오경(五經 Pentateuch)이라고 부르는 다섯 권의 율법책과 함께 시작하는데, 오경은 다섯 권의 책을 뜻하는 말로서 법이라는 뜻을 지닌 토라(Torah)로도 불려진다. 이 책들은 때때로 모세의 책들이라고도 불려지는데, 그것은 이 책들이 출애굽(exodus)과 모세의 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는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책들이 있다. 시편, 잠언, 욥기처럼 지혜서(Wisdom books)라고 불려지는 것들과 구약의 예언자들 이름을 달고 있는 여러 예언서들이 바로 그런 책들이다. 예언자(prophet)는 직접적인 신적 영감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오직 이차적(二次的)으로만, 예언자라는 말은 장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정교회는 또한 이른바 외경(外經)이라고 부르는 책들을 구약의 정경(正經)으로 보는데, 여기서 외경(apocryphal)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비밀의’ 또는 ‘숨겨진’ 문서들을 뜻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다루거나, 또는 그것들이 전혀 신적인 영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신약

신약성경의 중심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에 의한 4복음서인데, 이 복음서를 기록한 분들을 복음서저자(evangelists)라고 부른다. 그리스말로는 복음(Gospel)을 에방겔리온(evangelion)이라고 하는데, 이미 보았던 대로 이 말은 ‘기쁜 소식’ 또는 ‘좋은 소식’을 뜻한다.

 

신약성경에는 또한 성 루가에 의해 쓰여진 사도행전이 있다. 사도 바울로의 서신(epistles: 단지 편지라는 뜻임.)인 열 네 편의 편지도 있는데, 이 가운데서 히브리서 같은 것은 사도에 의해 직접 쓰여진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의 편지가 세 편 있으며, 사도 베드로의 것이 두 편, 사도 야고보와 사도 유다의 것이 각각 한 편씩 있다. 마지막으로 아포칼립스(Apocalypse)라고도 불려지는 묵시의 책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성 사도 요한의 것으로 여겨진다.

 

정교인들에게 성경은 신적 가르침을 적은 주된 원천인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책에 영감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디모테오 2서 3:16과 베드로 2서 1:20을 보라.) 이것이 바로 성경의 영감(inspiration)에 관한 교리인데, 이를테면 하느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사람들이 참으로 인간적인 언어로써(모든 언어는 인간적이다!) 그분의 말씀을 기록했으며, 그런데도 그것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Word of God)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말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인데, 그것은 그 속에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된 자기-계시(self-revelation)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말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중심은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의 인격,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정교회에서는 성경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해석되는데, 그것은 성경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이르며, 또한 그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루가 24:44) 이런 사실 때문에 정교회에서는 성경 전부가 아니라 오직 네 복음을 담은 복음경만이 교회의 제단 위에 올려진다. 이는 바로 성경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식

말 그대로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함께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나 집단을 뜻하는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을 때, 이 모임을 교회의 예식(liturgy)이라고 부른다. 예식(liturgy)이라는 말은 특별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두를 위해서 공동의 일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의 신성한 예식은 하느님의 백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공동작업이다.

 

구약의 백성들이 하던 예식은 모세의 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와 해마다 드리는 축제와 금식들, 그리고 집과 회당에서 지키던 사적인 기도와 예배였다. 회당(會堂 Synagogues)은 말 그대로 모이는 집을 뜻한다. 그것은 성전이 아닌데, 이는 모세의 법에 따라 예루살렘에만 오직 하나의 성전이 있어서 그곳에서 제사장이 드리는 예배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회당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와 경전연구,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묵상하였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예식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그 중심을 두며, 주로 구약의 예식을 따르는 삶을 ‘그리스도화’(christening)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구약의 예식적인 삶을 새롭고 영원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구약의 기도와 경전들, 시편들이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읽혀지고 노래로 불려진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희생이 성전에서 이루어졌던 구약의 희생제사를 대신한다. 그리고 주님의 날인 일요일이 유다인들의 옛 안식일인 토요일을 대신한다.

 

유다인들의 축일 또한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를테면 과월절과 같은 축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축하는 날로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오순절은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는 성령의 강림을 축하하는 날이 된다. 그리스도교의 예식을 따라 이루어지는 전례력(liturgical year) 또한 구약을 본보기(prototype)로 해서 이루어진다.

 

구약의 예식에서 기본적인 토대를 빌어, 교회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와 견진, 성만찬, 결혼성사, 고백성사, 성유성사, 신품성사 등의 예전적인 삶에 독특한 그리스도교적 형태와 의미를 담으면서 발전시켰다. 덧붙여서 아주 풍부한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성가들, 축사(祝辭 blessings)들과 함께 신약의 사건들과 성인들을 기념하는 그리스도교의 특별한 축일들을 발전시켰다.

 

그리스도교의 성사(聖事)적이고 예식적인 삶의 생생한 경험이 그리스도교 교리의 주된 원천이다. 교회의 예식 속에서 성경과 거룩한 전통은 생명력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교인들의 살아있는 경험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기도와 성사적인 예배를 통하여, 메시야의 시대를 위해 이미 예고된 대로 사람들은 ‘하느님에 의해 가르침받는다.’(요한 6:45)

 

예식의 생생한 경험에 덧붙여서 예배와 성사의 본문들은 글로 쓰여진 교리의 자료들을 제공하는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것 속에서 공부하고 관상(觀想)하기도 한다. 정교회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성사적이고 예식적인 본문들(성가들, 축사들, 기도들, 상징들, 예배식들[rituals])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형식적으로 어떤 잘못이나 변형(變形)을 담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정교회의 참된 가르침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도 좋다. 교회의 축일에 담겨진 어떤 역사적 정보는 부정확하거나 단지 상징적일 따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축일에 담겨진 교리적이고 영적인 의미는 참되고 바른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경험과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공의회들

교회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많은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다. 교회는 언제나 첫째는 사도들, 다음으로는 주교들과 같은 임명받은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모든 신자들 속에서 하느님의 영감을 통하여 의견의 일치를 이끌어냄으로써 어려움들을 해결하고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곤 했다.

 

역사상 교회의 첫 공의회는 비(非) 유다인들인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조건들을 결정하기 위해 사도시대의 교회 안에서 열렸다.(사도행전 15장을 보라.) 그때부터 전(全) 역사를 통하여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기 위해 공의회들이 열렸다. 주교들은 사제(presbyters) 또는 원로(elders)라고도 부르는 자기 교구의 신부들(priests)과 교인들을 정기적으로 만났다. 그래서 매우 초기의 교회역사에서는 일정한 지역을 맡고 있는 주교들이 어떤 표준적인(regular) 토대 위에서 공의회를 통해 서로 만나야만 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법이 되기도 했다.

 

교회의 역사에서는 때때로 모든 주교들이 참석하도록 요청받는 공의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런 경우 물론 모든 주교들이 다 참석할 수는 없었으며, 따라서 그 공의회들 모두가 거룩한 전통을 지닌 교회에 의해 자동적으로 승인되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정교회의 역사에서는 어떤 경우 실제로 참석한 주교들의 수가 매우 적을 때도 있긴 하지만, 오직 일곱 차례의 공의회만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전체교회의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왔다. 이 공의회들을 가리켜 ‘일곱 세계공의회들’(Seven Ecumenical Councils)이라고 한다.

 

세계공의회들에서 이루어진 교의적(敎義的, 교의[敎義 dogma]는 공식적인 가르침을 뜻한다.) 정의(定義)와 종교법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영감을 받았으며,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뜻을 잘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것들은 정교회의 교리를 형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자원들이다.

 

일곱 차례의 세계공의회와는 달리 다른 여러 지역공의회들도 있는데, 그런 공의회들의 결정 또한 세계의 모든 정교회들의 승인을 받았으며, 따라서 정교회의 신앙과 삶을 참되게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지역공의회들의 결정들은 대부분 도덕적이거나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들 또한 정교회의 가르침을 드러낸다.

 

 

일곱 세계공의회들

1차: 니케아 I(325년) - 하느님의 아들의 신성을 정의하면서 신앙의 신조(the Creed)의 첫 부분을 형식화(形式化)하다.

2차: 콘스탄티노플 I(381년) - 성령의 신성을 정의하면서 신앙의 신조의 둘째 부분을 형식화 하다.

3차: 에페소(431년) - 그리스도를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모님을 ‘하느님을 낳으신 분’(테오토코스[Theotokos])으로 정의하다.

4차: 할키돈(451년) - 그리스도를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으 로 정의하다.

5차: 콘스탄티노플 II(553년) - 성삼위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다시 확증하다.

6차: 콘스탄티노플 III(680년) - 예수님의 인간적인 의지와 행위의 실재성(reality)을 강조함 으로써 그분의 참 인간성을 확인하다.

7차: 니케아 II(787년) -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된 표현인 성화상(icons)의 정당성(正當性, propriety)을 확인하다.

 

 

교부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리를 수호하고 설명하였던 신학자와 영적 교사들 같은 성인들이 많이 있다. 이 성인들을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가르침은 교부적인 가르침이라고 한다.(교부적[敎父的 patristic]이라는 말은 ‘아버지’라는 뜻의 그리스말에서 온 것이다.)

 

어떤 성 교부들은 변증가들(apologists)이라고 불려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앙을 비웃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항해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술들을 변증론(apologies)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대답’ 또는 ‘변명’, ‘변호’, ‘항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른 성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교리의 어떤 부분들은 취하고 다른 부분들은 부정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생명을 망쳐놓는 교회의 어떤 이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을 수호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질시킴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integrity)을 파괴하는 이들을 이단자(異端者,

heretic)들이라고 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이교(異敎 heresy, 또는 이론[異論])라고 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이교(heresy)는 ‘선택’(choice)을 뜻하며, 따라서 이단자(heretic)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의견에 따라 그리스도교 전통 가운데 어떤 것은 거부하고 어떤 것은 취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선택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완전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쪼개어지게 하며, 공동체 안에는 분열이 일어나게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교전통에서는 이단론의 교사들을 단지 틀렸다거나 무지하다거나, 또는 잘못 인도되었다고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죄를 지었다고 본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저 잘못된 길로 들어섰거나 잘못을 저지른 경우, 또는 예상되는 잘못에 대해서 반대나 비판도 받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진리라고 가르친다면, 단어의 참된 의미에서 그는 이단[heretic]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많은 성인들과 더욱이 거룩한 교부들조차도 그들의 가르침 속에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되었다거나 또는 부정확한 것으로 여기는 요소들이 담겨있다. 그렇더라도 그런 사실 때문에 그들이 이단자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 교부들이 모두 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론에 대항했던 수호자들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교사들로서, 더 깊고 완전한 방식으로 신앙의 의미를 발전시키면서 설명했다. 또 다른 분들은 영적 삶에 대한 교사들이어서, 기도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의 의미와 방법을 신자들에게 일러주었다. 영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일에 열중했던 분들을 ‘금욕적’(ascetical) 교부들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금욕주의’(asceticism)라는 말이 ‘영적인 수련자들’(spiritual athletes)의 훈련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는 방법에 대해 열중했던 분들을 ‘신비적’(mystical) 교부들이라고 부르며,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참되고 경험적인 일치를 이루는 일을 ‘신비주의’(mysticism)라고 정의한다.

 

모든 성 교부들은 그들이 신학적이거나 사목적(司牧的)인 교부, 또는 금욕적, 신비적 교부 등 어떤 형태로 분류되든지 간에, 자신들의 가르침을 바로 자기 자신의 살아있는 그리스도교적 경험에서 이끌어냈다. 그들은 이처럼 실재적(實在的)이며 생생한 지식을 바탕 삼아 신학적 가르침과 영적 삶의 방법들을 방어하고, 묘사하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빛나는 지성에 덧붙여서 영혼의 순결과 의로운 삶을 함께 엮어나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그들을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이라고 부른다.

 

교부들의 작품들에 오류(誤謬)가 없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것들 속에는 완전한 교회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삶에 대한 성서적이고 예전적인 토대 위에 이루어진 교부들의 작품은 정교회 안에서 큰 권위를 가지며, 교회의 교리를 탐구하는데 첫째가는 자원이기도 하다.

 

시대가 흐르면서 교회의 보편적 승인과 칭송을 듣는 몇몇 교부들의 작품들은 특별히 중요한데, 그런 것으로는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 리용의 이레니오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대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 신학자 그레고리, 요한 크리소스톰, 알렉산드리아의 끼릴로스, 예루살렘의 끼릴로스, 고백자 막시모스, 다마스커스의 요한, 콘스탄티노플의 포티오스, 그레고리 빨라마스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에집트의 안토니오스, 에집트의 마카리오스, 요한 끌리막스(John of the Ladder), 시리아의 이사악, 시리아의 에프렘, 신(新)신학자 시메온 등과 같은 금욕적이고 영적인 교부들의 저술들이 중요하다.

 

때때로 우리들이 교회 교부들의 작품들을 읽기가 어려운 데, 그것은 그 작품들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흔히 복합적이거나 그들이 글을 쓰는 방식이 오늘날 우리들의 것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영적이고 금욕적인 작품들은 수도원적인 환경에 알맞게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수도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해하여 그대로 따라 살기 위해서는 새로이 바꾸어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더라도 교부들의 작품들을 직접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읽을 때는 천천히 한 번에 조금씩,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처럼 읽어나가야 한다. 교부들 가운데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작품들이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이어서,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여 읽기만 한다면 많은 이득을 얻을 수가 있다. 또한 영적인 작품들에서 가려 뽑은 명문집(名文集)인 필로깔리아(Philokalia)가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영어로 번역되어 있어서, 영적인 삶에 대한 더 깊은 안목(眼目)을 얻으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깊게 읽어나갈 경우 많은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제 4권 영성을 보라.)

 

 

성인들

교회의 가르침은 진정한 신앙인이랄 수 있는 성인들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 성인들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기 11:44; 베드로 Ⅰ서 1:16) 성인들의 삶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확실성과 진리를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참된 선물인 거룩함을 보여준다.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여러 부류의 성인들이 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매우 특별하게 존경을 받는 성 교부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거룩함에 깃든 특별한 측면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성인으로 분류되는 많은 분들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도들이 있고, 독특하게 복음을 말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기록하는 복음작가들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겪는 고백자들(confessors)이 있고, 신앙을 위해 죽는 순교자들도 있다. 수도자들(수사와 수녀들) 가운데서 나오는 성인들(holy ones)이 있고, 평신도 가운데서 나오는 ‘의인’(의인, the righteous)도 있다.

 

덧붙여서 교회의 예식서들에는 성사로써 임명받은 성직자들 가운데서 나온 성인들을 위한 특별한 제목이 있으며, 거룩한 통치자들과 정치인들을 위한 또 다른 특별한 제목들도 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된 이들(fools for Christ's sake)을 따로이 분류해 놓기도 한다. 이런 분들은 사람들이 그토록 필요로 하는 것들(이를테면 옷, 음식, 돈, 집, 안전, 사회적 명성 등)에 대해 전혀 관심을 주지 않음으로써 하늘나라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던 분들이다. 그들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고린토 1서 4:10; 3:18)하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에 따라 산 것이다.

 

정교 전통 안에는 성인들의 삶에 관한 자료가 많이 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신앙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데 매우 쓸모있게 이용될 수 있다. 성인들의 삶 속에는 하느님과 사람과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생각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오늘 우리들의 시대와는 아주 다른 때에 쓰여졌기 때문에, 주의깊게 읽어나가면서 본질적인 점과 일부러 꾸며낸 부분, 또 때로는 상상에 의해 덧칠한 부분들을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중세때는 성인들의 삶을 그 앞의 시대에 있었던 문학작품을 본따서 그리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좀 덜 알려진 성인들의 삶을 그보다 일찍 살았던 같은 부류의 성인들의 삶처럼 아름답게 꾸미기조차 했다. 또한 특별히 비범(非凡)한 종류의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사건들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덧붙이는 것도 하나의 풍습이었는데, 그럼으로써 그 성인의 참된 거룩함을 확증하고, 성인의 영적인 선(善)과 진실성에 힘을 더하며, 성인의 이야기를 듣고 읽는 사람들이 삶 속에서 성인의 여러 가지 덕들(virtues)을 본받도록 북돋아 주고자 한다. 많은 경우들에서는, 성인을 비방하는 이들 앞에서 성인의 윤리적인 의로움과 결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적적인 이야기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후대에 경건함과 열정을 지닌 이들에 의해 덧붙여진 부분과 성인들의 삶 속에 있는 건전한 진리의 핵심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따라서 성인들의 삶 속에 담겨진 본질적인 진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마땅히 기울여져야만 한다. 또한 교화(敎化)와 즐거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재미를 얻기 위해서 기적적인 요소들이 성인들의 삶에 덧붙여졌다는 사실 때문에, 성인들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기적적 사건들은 문학적인 목적이나 또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교훈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다고 결론내려서는 안된다. 다시 한 번 더 말하거니와 성인들의 삶에 관해 주의깊게 읽어나간다면, 기적적인 일들 속에 들어 있는 진정으로 참된 것을 거의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거의 성인들의 실제 삶 자체에서처럼, 교회의 전통 안에서 생겨난 성인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들로부터 그리스도교의 현실적인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법들

정교회 전체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교리와 실천면의 표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교회법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세계공의회에서 나온 것, 지역공의회에서 나온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등이 있다. 카논(canon)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규칙(rule), 규범(norm) 또는 판단의 수단(measure of judging)이 아니며, 인간의 법체계에서 이해되고 기능하는 법들과 쉽게 동일시(同一視)할 수 없다.

 

교회법들은 먼저 교의 또는 교리적인 성질의 것들과 실제적이고 윤리적이거나 구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들로 구별된다. 그 다음으로는 변하여 바뀌는 것들과 변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바뀌어서는 안되는 것들로 구별된다.

 

교의적인 교회법들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조항(條項 article)을 말하고 있는 공의회의 정의(定義)들인데, 예를 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에 관한 것 따위가 그러하다. 비록 이같은 교회법들이,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교회전통의 성장과 변화속에서 새롭고 다른 언어로써 설명되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의 교회법들 또한 바뀔 수 없는 것들에 속한다. 도덕에 관련된 교회법은 그 의미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그 행위는 어떤 식으로로 정당화될 수 없다. 교회의 성사(聖事 sacrament)들을 함부로 행하는 것을 금하는 교회법이 바로 이같은 종류의 것이다.

 

덧붙여서, 바뀔 수 있고 교회생활을 통해서 실제로 바뀌어 온 매우 실제적인 성질의 교회법들도 있다. 또한 바뀔 수도 있으나 교회가 그대로 보존하기를 바래서 바뀌지 않은 채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교회법들도 있다. 전자(前者)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사제는 서른 살이 넘어서 그 직에 임명되어야 한다는 교회법을 들 수 있다. 비록 이같은 교회법이 표준적인 것으로 남아있고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잘 지켜오지 못했다. 반면에 주교들을 혼인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교회법은 후자(後者)의 좋은 예이다.

 

교회법들이 그리스도교적 삶에 핵심을 이루는 것들을 제대로 나타내느냐 나타내지 못하느냐하는 것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주어진 때와 조건 속에서 교회법들을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들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들이 어리둥절해 하거나, 또는 모든 교회법들을 똑같은 힘과 가치로써 무조건 강요하든지 아니면 모든 교회법들이 의미가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교회법은 곧 ‘교회의’(of the Church) 것이며, 따라서 사법적 의미의 ‘실정법’(positive laws)으로 이해될 수 없다. 둘째로, 교회법은 분명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법이 아니며, 따라서 교회의 신앙과 삶 속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면(面 aspect)을 다 담고 있지는 못하다. 셋째로, 대부분의 경우 교회법은 교회생활 속의 어떤 특수한 교의적 또는 도덕적 물음이나 잘못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났기 때문에, 보통은 그 법의 특별한 제정뿐 아니라 그 법을 실제로 있게 한 역사 속의 어떤 특별한 논쟁의 표시를 담고 있다.

 

그것만은 홀로 취한다면, 교회법들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여 실망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법 모두를 지키도록 강제(强制)하거나 교회법을 완전히 폐기(廢棄)시켜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교회규법적이고 영적인 정교 생활의 전체성(wholeness) 속에서 교회법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교회법들은 그 적절한 자리와 목적을 얻게 되며, 교회 안에 계신 하느님의 살아있는 진리를 찾는 일에 한 풍부한 샘이 됨을 보여준다. 교회의 법들을 바라볼 때 핵심이 되는 요소는 기술적인(technical) 연구와 영적인 깊이에서 생겨나는 그리스도적 지식과 지혜이다. 그리고 그 법들을 쓸 때도 어떤 다른 ‘방식’(key)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면, 그것은 정교 신앙에 따라서 비정교적(非正敎的)이며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 될 것이다.

 

 

교회의 예술

정교회는 음악, 건축, 조각, 바느질 작품[자수], 시(詩) 등과 같은 교회 예술뿐 아니라 성화에 관한 풍부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런 예술적 전통은 창조를 통해 사람과 세계에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인간의 창조성에 관한 정교회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세상을 매우 사랑하시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서 그분 자신이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예술적 표현들과 하느님의 축복, 영감들이 함께 녹아 들어가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에 관한 그리스도교적인 환상(vision)의 가장 깊은 진리들을 참되게 표현하는 거룩한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케 한다.

 

성화(icon)는 가장 높은 수준의 정교적인 예술작품이다. 성화상은 색과 선으로 표현되는 복음의 선포요, 교리적 가르침이며, 영적인 영감이다.

 

전통적인 정교 성화는 거룩한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사진으로 복사하는’(photocopy) 방법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성인이나 사건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초상화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거기에 그려진 인물이나 사건의 영원하며 거룩한 실재성과 의미, 그리고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다. 신적인 영감과 은혜로운 자유 속에서 성화는 그 주제(인물 또는 사건)를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성이 깃든’ 것으로, 지상의 것이면서 천상적인 것으로, 물질적인 것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십자가를 지면서’ 은총과 빛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것으로 그린다. 이런 방식으로 성화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의 외형(外形)만을 단순히 재현(再現)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실주의’(realism)를 표현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정교 성화들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써,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실제적인 내용과 쓰임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림의 형태와 스타일, 방식을 통하여 정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끊임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샘이 된다.

 

성화말고 정교 그리스도인다운 세계관을 탐구하는 원천이 되는 것으로는 음악적 표현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최근에 교회 안에서 음악의 예전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정교 성화상의 신학적 의미가 다시 찾아지고 있는 것처럼, 정교 음악의 전통적이고 교리적인 의미가 다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후자(정교음악)의 경우 그 과정이 너무 느려서 일반인들에게는 훨씬 더 어렵고, 한편으로는 훨씬 덜 분명하다.

 

전통적인 정교건축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며,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과 세계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나눔에 대한 강조 속에서 드러난다. 둥근 지붕을 한 천장, 건물의 형태와 설계, 성화상들의 배치, 제의(祭衣)의 사용 등, 이 모든 것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한다. 전통적인 정교회의 건축과 예술작품들은 창조와 3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정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다.

 

거룩한 성화들과 교회의 예식에서 부르는 성가들을 공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영적 훈련이 된다.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생활에 대한 예술적 표현들을 주의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분의 은혜로운 역사들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다. (제 2권 예배를 보라.)

 

 

 

2장: 신앙의 상징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것은 이 신조가 니케아에서 열렸던 제 1차 세계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던 제 2차 세계공의회(381년)에서 정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조(信條 creed)라는 말은 ‘나는 믿는다’는 뜻의 라틴어 credo에서 왔다. 정교회에서는 신조가 흔히 ‘신앙의 상징’(The Symbol of Faith)으로 불려지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신앙을 ‘모으다, 소집하다’(bringing together)와 신앙의 ‘표현’ 또는 ‘고백’을 뜻한다.

 

초대교회 때는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이 많이 있었으며, 서로 다른 ‘신조’가 많이 있었다. 이 신조들은 본래 세례와 관련해서 언제나 쓰였다. 세례를 받기 전에 신자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 말해야만 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신조는 대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곧 그분은 메시야이시며 주님이시라는 단순한 신앙고백이었다. 공개적으로 이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신자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그분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생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신앙고백들이 생겨났으며, 그 모든 것들은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서로 다른 형태와 표현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서로 다른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이같은 신앙고백의 형태들은 보통, 신앙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고 이단적인 가르침들이 발달하는 곳에서 더 세밀하게 다듬어졌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성경에서는 말씀[Word] 또는 로고스[Logos]라고도 불린다.)의 본성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에 의해 지음받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은 영원하시고, 거룩하시며,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많은 공의회가 열려서, 하느님 아들의 본성에 대한 여러 신앙고백들을 만들었다. 논쟁은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휩쓸면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정교회에 의해서 합당한 신앙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니케아에서 연 공의회의 결정이었다. 이 공의회는 오늘날 제 1차 세계공의회라고 불려지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우리는) 믿나이다.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성신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거룩한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논쟁에 뒤이어서 일어났으며, 그것과 필연적으로 관련된 문제가 성령에 관한 논쟁이었다. 니케아에 이어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공의회(오늘날 제 2차 세계공의회라 불려짐.)의 결정이 니케아 신조에 덧붙여졌다.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신을 (우리는) 믿나니, 성신은 성부께로 좇아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이 전체적인 신앙의 상징이 마침내 온 교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세례를 받을 때 신자(또는 그 신자의 대부모[godparent])가 하는 공식적인 신앙고백에는 (‘우리는 믿는다’[We believe]라는 표현 대신에) ‘나는 믿는다’(I believe)라는 1인칭형이 쓰인다. 또한 정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정교회의 성체성혈 성사에 참여하려 할 때에도 이 신앙의 신조는 정식의 신앙고백으로서 쓰인다. 마찬가지로 이 신조는 정교인들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고, 각각의 교인들이 자신들의 세례와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신분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정식으로 받아들여 새롭게 하는 정교회 성찬예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신앙의 상징’은 예식에서 1인칭으로 된(영성체[Holy Communion] 바로 전에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는) 유일한 부분이다. 예식의 모든 다른 노래들과 기도들은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복수형이다. 오직 신앙고백만이 ‘나는’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앞으로 알게될 것이지만, 그것은 신앙이 먼저 개인적인(personal) 것이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협동적이고 공동체적이기 때문이다.

 

정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정교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말로만이 아니라 니케아-콘스탄티노플적인 신앙의 상징에 담긴 본질적 의미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신앙고백이 뜻하는 모든 것과 함께,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날까지 정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신조로부터 명백하게 발달되었고 이 신조를 토대로 하여 세워진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신앙

 

나는 믿는다

신앙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기초이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교회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지녔던 근본적 가치이다. ‘아브라함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이를 갸륵하게 여기셨다.’(창세기 15:6)

 

예수께서는 신앙에 대한 똑같은 명령을 하시면서 당신의 성무(聖務 ministry)를 시작하신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마르코 1:15)

 

온 생애를 통해 예수께서는 신앙을 요구하셨는데, 그것은 당신 자신과 성부 하느님, 복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이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근본이 되는 조건이 신앙인데, 그 이유는 신앙이 있어야만 희망과 사랑, 온갖 선한 일,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선물과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교회의 가르침이다.

 

성경에서는 신앙이 고전적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곧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리 11:1) 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신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두 가지 의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첫째로는 누군가 또는 어떤 것에 대한 (‘in') 신앙이며, 이것은 실재적이고 참되며 (가짜가 아닌) 진짜이고 가치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인식(또는 인정)하는 신앙이데, 이를테면 하느님과 그리스도, 성삼위, 교회에 대한 신앙같은 것이다. 둘째로는 신뢰 또는 의존의 뜻을 지닌 신앙이다. 예를 들어 이런 뜻이라면 우리는 단지 하느님과 그분의 현존, 선하심, 진리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임재(臨在)를 신뢰하며, 확신을 갖고 그분의 약속들을 의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같은 두 가지 형태의 신앙이 다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과 마음과 영으로써 어떤 것을 믿어야만 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만 한다.

 

신앙은 때때로 이성에 반대되며, 믿음은 지식에 반대된다. 정교성(正敎性, Orthodoxy)에 따르면 신앙과 이성, 믿음과 지식은 사실상 서로 다른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면서도 언제나 서로 함께 관계되어 있으며, 결코 서로에게 맞서거나 각자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첫째,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지 못한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다. 곧, 그

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떤 것을 믿을 수는 없다. 둘째, 사람이 믿고 신뢰하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 암소의 신성(神性)을 믿는지 또는 나무로 만든 상(像)을 신뢰하는지 질문을 받게 된다면, 그는 그것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그 나름이 이유가 있어야 하며, 지식 위에 세워져야 하며, 결코 맹목적(盲目的)이어서는 안된다. 셋째, 지식 그 자체는 흔히 신앙 위에서 생겨난다. 절대적인 회의주의(scepticism)를 갖고 있다면 지식을 이룰 수 없다. 만일 어떤 것이 일단 알려져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어떤 믿음과 지식의 대상들은 실제로 ‘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주며’ 정신과 감각들은 거짓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것의 모든 글로 쓰여진 말들과 관련해서,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역사와 관련해서는 글을 읽는 이에게 믿음을 지닌 행위가 요구된다. 그는 글을 쓴 이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믿어야만 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신뢰에 대한 어떤 지식과 이유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매우 흔하게도 우리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마침내 자기 자신의 지식을 갖게되고 전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직 무엇인가를 신뢰하며 믿을 때뿐이다. 어떤 것의 존재와 의미를 설명해 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믿음의 빛 속에 들지 않는 한, 어떤 대상이든지 언제나 흐릿하고 의미 없는 채로 남아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고통과 죽음의 현상도 어떤 다른 종교나 철학을 믿든지 또는 전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이와 그리스도를 믿는 이 사이에서는 서로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신앙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스스로 믿어야만 한다. 아무도 남을 대신해서 믿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이성, 경험과 확신 때문에 같은 것들을 믿고 신뢰하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신앙의 공동체와 신앙의 조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와 조직은 반드시 개인적인 신앙고백 위에서 시작되고 또 그것을 토대로 하여 유지된다.

 

이같은 이유로 정교회에서는 세례와 교인이 되는 공식적 의식뿐 아니라 공동의 기도와 성찬예배에서도 신앙의 상징이 언제나 1인칭으로 쓰인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가 그러는 것처럼 기도하고, 봉헌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고, 묻고, 복을 빌고, 기뻐하고, 우리 자신과 서로서로를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를 각 사람이 정직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확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복음서의 아이 아버지가 한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 주십시오.’(마르코 9:24)

 

우리의 신앙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나날의 삶 속에서 표현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따라 행동해야만 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의해 그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리석음에 동참하시는지를 그저 보기 위해, 어리석고 불필요한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을 꾀거나’ 또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가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신앙으로 살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돕고 길을 인도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널리 나타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앙이 성장하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신앙의 힘이 작용해야만 한다. 각 사람은 자신이 가진 믿음이 아무리 작고 약하며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신앙의 정도에 따라 살아야만 한다. 자신의 신앙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그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며, 그분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전에는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많은 일들이 가능하게 된다.

 

 

하느님

 

한 분이신 하느님, 전능하신 아버지

그리스도교회의 근본이 되는 신앙은 참되며 살아계신 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신명기 6:4-7)

 

모세의 법에 나오는 이 말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첫째이고 가장 큰 계명으로서 인용하신다.(마르코 12:29) 그리고 그 말들은 ‘너희 하느님은 나 주다 … 너희는 내 앞에서 감히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신명기 5:6-7)

 

한 분이신 주님이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분께서는 당신 이름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셨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주님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굽기 3:13-15)

 

하느님의 이름은 Yahweh인데, 이 말은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또는 I AM WHAT I AM 또는 I WILL BE WHAT I WILL BE) 또는 단지 ‘나는 존재한다’(I AM)는 뜻이다. 그분은 참되고 살아계시며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신실하시며 참되시다. 그분은 그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들려 주신다. 그분은 그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영을 주신다. 그분은 ‘주님’(Adonai)이라고 불리우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 Yahweh는 결코 백성들이 부르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 이름이 지닌 외경(畏敬)스러운 신성함 때문이다. 오직 대사제만이 한 해에 한 번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안에서 Yahweh 라는 거룩한 이름을 감히 불렀다. 그밖의 모든 경우에 Yahweh는 전능하신 주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만군(萬軍)의 주 하느님으로 불려졌다.

 

경전들과 신구약 성경의 성인들이 겪은 경험에 따르면 Yahweh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분께서는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람 그 무엇과도 절대적으로 다르시다는 것을 뜻한다. (‘거룩한’[holy] 이라는 말은 글자의 뜻대로 하면 전적으로 ‘분리된’, ‘다른’ 것을 뜻한다.)

 

성경적이고 정교적인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 고 말하는 것조차, 그분은 너무나 유일무이(唯一無二)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존재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는 확언(確言)에 의해 더 세심하게 다듬어져야만 한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은 ‘실존을 초월하여’(above existence) 또는 ‘존재 너머에’(above being) 계신다. 따라서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밖의 모든 것이 ‘존재’(is) 하듯이 하느님께서도 ‘존재’(is) 하신다거나 하느님께서는 그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똑같은 ‘존재’(being)의 고리에 연결되어 있는 ‘최고의 존재’(supreme being)이시라고 말하기가 매우 머뭇거려지게 된다.

 

이와 똑같은 뜻에서 정교의 교리에서는 하느님의 통일성(unity) 또는 유일성(oneness) 또한 ‘하나’(one)라는 수학적이거나 철학적인 개념과 단순히 동등한 것이 아니며, 사람이 그같은 실재(reality)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어떤 관념(더 나아가서는 가장 훌륭한 관념)과 단지 동등한 그분의 삶, 선하심, 지혜, 모든 능력들과 가치들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느님에 관해 지나치게 명백하거나 지나치게 실증주의적인(positivistic) 개념 또는 관념에 대해 경고하면서, 정교회는 성인들이 겪은 생생한 하느님 체험의 토대 위에서 지금껏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펴고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삶과 선(goodness), 진리, 사랑, 지혜, 지식, 통일성, 정결(purity), 기쁨, 단순성이신 분처럼 완전하시며 절대적으로 존재하신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거룩하며 참되고 선하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완전성과 초(超)완전성(super-perfection)이신 분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찬식에서, ‘…하느님, 형용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으며, 보이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언제나 계시고, 영원히 한결같으신 분’이라고 정식으로 고백하는 바로 그 하느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신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이 하느님이시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로 알려지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예수님 이전에는 아버지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감히 하느님께 기도한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면 이렇게 기도하거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시

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또는 우리 모두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인 것입니다.(갈라디아 4:4-7; 정교회의 성탄절 사도서신 봉독문)

 

따라서 자연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쉽게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선물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교의 성찬예배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떳떳하고 단죄됨이 없이 하늘에 계신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구약에 있는 하느님 백성의 삶과 신약에 있는 교회의 삶 속에 나타난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계시를 잘 살펴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어떤 속성과 고유한 성질들을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과,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한 그분의 모든 행동들 속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본성이 사랑임을 표현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람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요한 1서 4:7-10, 16)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5)

 

사랑이신 하느님으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생명과 구원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고 온유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사람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고,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갖도록 하시기 위해 이런 일을 하신다. 이처럼 은혜로운 하느님의 속성들은 흔히 성찬예배가 시작될 때 부르는 시편 가사(歌詞)의 찬양 속에서 되새겨진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속으로부터 그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베푸신 모든 은덕 잊지 말아라. 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네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 네 목숨을 구렁에서 건져 주시고 사랑과 자비의 관을 씌워 주신다. 네 인생에 복을 가득 채워 주시어 독수리 같은 젊음을 되찾아 주신다.(시편 103편 1-5)

 

 

창조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정교회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모든 만물의 창조주’ 이심을 믿는다.

창조한다는 것은 무(無)로부터 지어냄을 뜻하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케 한다는 것, 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찬식에서 다시 한 번 더 빌어 쓴다면 ‘비존재(non-existence)로부터 존재(being)케 하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정교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사람들을 비존재로부터 존재케 하셨다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경전적 묘사는 우선적으로 창세기 1장에 나온다. 창조에 대한 교리적 주안점(主眼点)은 하느님 한 분만이 창조되지 않으시고 영원히 계시다는 것이다. 하느님 말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말하자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실존의 첫 토대를 창조하셨고, 그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아마도 수백만 년이 흐른 뒤. 베드로 2서 3:8을 보라.) 이 첫 실존의 토대 위에는, 하느님께서 그 토대에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다른 피조물들이 생겨났다.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 다녀라 …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창세기 1:20,24)

 

따라서 비록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모든 것들의 창조주이시지만 시간 속에서, 그리고 생명을 낳는 잠재력과 힘을 주셨고 미리 앞서서 당신께서 지으신 수단들에 의해서 점진적(漸進的)으로 일하신다.

정교신앙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 곧 하늘과 땅과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 자신도 ‘매우 좋다.’(very good 창세기 1:31) 하느님께서는 창조세계를 기뻐하시며, 그것으로 하여금 다른 어떤 목적이 아니라 오직 당신 자신의 거룩하고 창조되지 않은 실존에 참여하여 당신 자신의 거룩한 ‘생명의 숨’(breath of life 창세기 1:30; 2:7)에 의해 살게 하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신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이 돋아났다.

바닷물을 독에 담으시고

깊은 땅 속 창고에 넣어 두셨다.

온 세상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땅 위에 있는 사람들아,

모두 그 앞에 조아려라.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

한 마디 명령에 제 자리를 굳혔다.(시편 33:6-9)

 

창세기의 설명뿐 아니라 위에서 옮겨 쓴 시구(詩句)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영의 현존과 행동을 알아채야만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당신의 거룩한 말씀(‘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과 ‘물 위에 휘돌고 있던’(창세기 1:2) 당신의 거룩한 영에 의해 만드셨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Word)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오순절에는 성령께서 예수의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게 되는 신약에서야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성삼위를 앞서서 언뜻 보고 있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창조된 물질세계의 선함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정교 그리스도교 안에는 어떤 이원론(二元論 dualism)도 없다. ‘영’은 좋고 ‘물질’은 나쁘며, ‘하늘’은 선하고 ‘땅’은 악하다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물질세계를 당신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또한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창조된 물질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질 때는 그것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능력으로써 모든 일을 하신다.

 

당신의 선한 창조세계 전부를 사랑하시면서, 성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이 세계 안에 머물러 계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이 바로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 omnipresence)하심은 정교회의 가르침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창조주의 신적인 속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실이 정교회 예배의 시작기도로 쓰이는 하느님의 영을 부르는 기도 속에서 직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오, 하늘의 임금이시여, 위로자시여, 진리의 성령이시며, 어디에나 현존하시며, 온갖 것을 채워주시는 이여, 행복과 생명을 주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 안에 머무르시어 우리의 불결하게 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시고, 선하신 이여! 우리 영혼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in heaven, 또는 글자 그대로 ’하늘들에‘[in the heavens])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한다는 사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땅의 표면이나 바다 위 또는 공중(空中)의 어느 곳으로 움직이든지 하늘들이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 그들을 감싸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아버지이신 참 하느님께서는 이방신들처럼 어떤 특정한 장소에 얽매여 있지 않으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려고, ‘하늘들에 계신’(in the heavens) 아버지께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한 분이시고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적인 돌보심과 보호로써 모든 것을 품어 안고 모으시면서 모든 것에게, 곧 모든 것의 전면(全面)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전면에’(over all)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또한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through all and in all) 계신다.(에페소 4:5)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완성하신다’(에페소 1:10, 23)

 

따라서 사도 바울로께서도 아테네인들에게, 사람들이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 가는데 그것은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셨다.(사도행전 17:27-28) 시편 139편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증언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의 창조세계 안에 계신 하느님의 무소부재하신 사실과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향해 있는 우리 자신의 현존이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 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에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어둠보고 이 몸 가려 달라고 해 보아도, 빛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 달라 해 보아도,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시편 139:7-12)

 

 

천사들

 

유형 무형한 만물(萬物)

보이는 물질적 창조세계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성경은 그것을 때때로 ‘하늘들’(the heavens)이라고 부르고, 또 때로는 ‘하늘들 위에’(above the heavens)라고 말한다. 거룩한 경전에 나타난 상징적인 묘사가 어떠하든지 간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분명히 물질로 이루어진 물리적 세계의 일부분은 아니다. 그 세계는 공간 안에(in space)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물리적인(physical) 차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그 세계가 어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없으므로, 물리적으로 창조된 우주의 공간적이고 일정한 위치를 지닌 ‘장소’들(places)로 이루어진 은하(銀河 galaxy)들 안에서 여행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그 어떤 ‘장소’(place)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으나 창조된 세계가 순수하게 영적이며, 창조된 물질적 공간들로 이루어진 지도 위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덜 실재적이거나 참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은 전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창조세계는 물질적으로 창조된 우주와는 사뭇 다르게 존재하며, 두말 할 것도 없이 창조되지 않으신 하느님의 절대적인 초월적(super-divine) 현존과도 전적으로 다르게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창조세계의 실재(reality)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부정확하게) 천사들이라고 불려지는, ‘몸을 지니지 않은 힘의 무리들’(hosts of bodiless powers)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히 말해서 천사들(이 말은 글자대로는 ‘전달자들’, ‘심부름꾼들’[messengers]을 뜻한다.)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가 없거나(incorporeal) 몸을 지니지 않은 힘들 가운데 한 등급(等級 rank)에 지나지 않는다.

정교의 경전과 전통에 따르면 몸을 지니지 않은 힘들 또는 무리들(Hosts, 싸바오[Sabaoth]는 글자 그대로 ‘군대들’ 또는 ‘떼’, ‘단’[團] 또는 ‘병’[兵]들을 뜻한다.)에는 아홉 개의 등급이 있다. 곧, 천사들과 대천사들, 권품(權品)천사들(principalities), 능품(能品)천사들(powers), 역품(力品)천사들(virtues), 주품(主品)천사들(dominions), 좌품(座品)천사들(thrones), 헤루빔과 세라핌이 바로 그것이다. 후자의 것들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는 외침을 끊임없이 울리면서 하느님께 흠숭과 영광을 드리는 장면에서 그려지고 있다.(이사야 6:3; 묵시록 4:8) 위의 등급에서 중간에 있는 천사들은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반면에 천사들과 대천사들은 이 세상과 관련해서 일하는 주님의 훌륭한 일꾼들, 전사(戰士)들, 그리고 심부름꾼[使者]들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천사들과 대천사들은 영적인 악에 대항해 싸우고, 하느님과 이 세상 사이를 중개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교회의 삶 뿐 아니라 구약과 신약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보여주며,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천사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준 천사 가브리엘(Gabriel, 이 말은 글자대로는 ‘하느님의 사람’을 뜻한다. 다니엘 8:16; 9:21; 루가 1:19, 26 참조)과 하느님의 영적 군대에서 으뜸이 되는 전사(warrior)인 천사 미하엘(Michael, 이 말은 글자대로 하면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니엘 11:13; 12:1; 유다서 9절; 묵시록 12:7 참조)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몸을 지니지 않은 힘들이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는 물질적인(physical) 방식으로 그려진다.(이를테면 ‘여섯 날개의’[세라핌], ‘수많은 눈을 가진’[헤루빔], 또는 ‘사람의 형상으로’ 따위를 말함.)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상징적인 묘사들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본래부터도 그렇고 정의(定義)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천사들은 몸(body)이나 그 어떤 종류의 물질적 성질들(properties)을 갖고 있지 않다. 천사들은 엄밀하게 영적인 존재들이다.

 

 

악령들

 

악한 영들

정교 신앙에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좇아 일을 하는 창조된 영적 힘들이 있는 반면에 하느님을 거역하면서 악을 행하는 것들도 있다. 이런 존재들이 바로 귀신들 또는 악마들(devils, 이 말은 글자대로는 ‘떼어 놓거나 잡아 찢어서 파괴하는 이’ 라는 뜻이다.) 인데, 그들은 교회 성인들의 삶을 통해서뿐 아니라 구약과 신약 성경안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사탄(Satan, 이것은 문자적으로 적[enemy] 또는 대항자[adversary] 라는 뜻이다.)은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인 악마에게 붙는 하나의 고유명사이다. 그는 창세기 3장에서 나타나는 (하와를 꾀는) 뱀의 상징과 동일시되며, 욥과 예수님을 유혹한 자와도 동일시된다.(욥기 1:6; 마르코 1:33)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속이는 자’와 ‘거짓말장이’, ‘거짓말의 아비’(요한 8:44), 그리고 ‘이 세상의 통치자’[또는 권력자, 요한 12:31; 14:30; 16:11) 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종들을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 자기의 약령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떨어졌다.’(루가 10:18; 이사야 14:12)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들어가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팔아 넘기게 꾄 자가 바로 이 사탄이다.(루가 22:3)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교회의 성인들께서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인간 자신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사탄의 힘들을 알고 있었다. 그분들은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될 때 사탄은 힘을 잃고 결국은 파멸하고 만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는 그 어떤 중도(中道)도 없다. 궁극적으로 그리고 주어진 어떤 순간에, 사람은 어느 한 편을 택함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하든지 아니면 악마와 함께 하든지 하게 된다.

 

궁극적인 승리는 하느님과 그분께서 함께 하시는 이들의 것이다.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마침내 파멸하고 만다. 이같은 깨달음이 없이는,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과 사탄, 선한 천사들과 악한 천사들 사이에 벌어지는 우주적인 영적 싸움의 실체(reality)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는 생명의 가장 깊은 실재성들(realities)에 따라 분별하면서 살아가는 정교 그리스도인이라고 참되게 불리울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악마는 ‘붉은 옷을 입은 신사’이거나 어떤 다른 종류의 몸집이 큰 유혹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그는 교활하고 꾀가 많은 영적 존재로서 대부분 속임수와 비밀스런 행위를 통해 행동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와 힘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가장 큰 승리로 삼는다. 따라서 악마는 예수님과 모든 위대한 성인들에게 했던 것 말고는 어떤 다른 방법도 없기 때문에, 오직 자기가 속일 수 있는 사람들만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악마는 자신의 싸움에서 가장 훌륭한 성과를 오로지 잘 숨은 채로 남아있는 것과, 간접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여기면서 최고로 만족해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 다닙니다.(베드로1서 5:8)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와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에페소 6:11-12)

 

사람

사람은 하느님의 특별한 창조물이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받은’(창세기 1:26) 유일한 존재이다. 그는 창조의 마지막 과정에서(엿새째 되는 날), 그리고 하느님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는 ‘생명의 숨’을 쉬도록(창세기 2:7), 하느님을 알도록, 그리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을 다스리도록 지음받았다.

 

사람은 두 가지 성(性)으로 창조되었으니, 곧 ‘자식을 낳고 번성하도록’(창세기 1:28) ‘남자와 여자로 지어졌다.’(창세기 1:27; 2:21) 따라서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sexuality)은 하느님께서 ‘참 좋다’고 부르시는(창세기 1:31) 창조세계에 속하며, 본래는 전혀 죄가 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뜻하셨던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에 속한다.

 

하느님의 형상이며 창조세계에 대한 지배자로서, 그리고 창조되지 않으신 창조주 곁에 있는 공동의 창조자로서, 사람은 창조세계 안에서 하느님을 ‘나타낼’(to reflect) 과제와 온 우주를 통 털어서 그분의 현존과 의지와 힘들을 널리 펼 과제,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낙원으로 변화시킬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뜻에서 사람은 하늘의 몸을 지니지 않은 힘들, 곧 천사들보다도 더 높은 운명을 안고 창조되었음에 틀림없다. 이같은 확신이 정교 그리스도교에 의해 확인되는데, 그것은 단지 창조세계(이것은 천사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를 다스리기 위해서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에 대한 경전적 강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참으로 완전한 사람이시면서 마지막 아담이신 분(고린토 1서 15:45),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경전에서 쓰고 있기 때문에 더 직접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비 2:9-11)

 

사람은 어떤 창조물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삶을 살기 위해서, 심하게는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봉사하는 천사들보다도 더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헤루빔보다 더 고귀하시고 세라핌에게 비할 수 없이 더 영화로우신’ 분으로 환호하며 맞이할 때 확인되는 것이 바로 이 확신이다. 왜냐하면 인간이신 성모님에게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서 영광을 받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루가 11:28)이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따라, 사람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존엄성을 보게 된다. 우리는 사람을 하느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로서 알게 되며, ‘유형 무형한 모든 것들’이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정교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계시의 빛 속에서만 인간적일 수 있다(be human)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고 알 수 있다. 거룩한 말씀이시며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사람됨(manhood)의 실제적인 의미를 드러내신다. 완전한 사람이시고 마지막 아담이시며 ‘하늘에서 오신 사람’으로서, 예수께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우리에게 해주신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로께서 쓰신 것처럼, 아담은 ‘앞으로 오실 이(곧,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型 type) 또는 모습(figure)’으로서 그 중요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로마서 5:14)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고린토 1서 15:45-49)

 

정교신학에 따르면,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신성(神性)에 깃든 온갖 영적 속성들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거룩한 교부들에 따르면, 그것은 거룩한 은총에 의해서 본래 하느님 자신인 온갖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자유롭고 영적이며 개인적인(personal) 존재시라면, 남자든 여자든 사람도 그와 똑같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매우 힘이 세시고 창조적이어서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신다면, 그분의 형상과 모습을 따라 지어진 사람들도 세계를 다스려야만 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독재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스런 친절과 봉사로써 다스리시고 권위를 나타내신다면, 그분의 창조물들도 똑같이 행해야만 한다. 만일 하느님 자신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랑이시고 자비이시며 불쌍히 여기심(compassion)과 돌보심이라면, 그분을 닮도록 지음받은 피조물들도 그와 똑같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하느님께서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영원히 사시며, 모든 창조세계와 함께 언제나 완전하게 기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과 행복 속에서 존재하신다면,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하느님과 온갖 창조세계와 함께 기쁘고 조화로운 친교를 나누면서 영원한 삶을 살도록 지음받는다.

 

정교 교리에 따르면, 인간 존재와 생명은 그 발전과 성장이 결코 완성되거나 끝나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하느님을 닮은 형상으로 지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은 다함이 없으며 끝도 없다. 신적인 원형(元型 Archetype)이 그 신성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인간의 형상도 그 인간성, 곧 창조주의 은총에 의해 다다를 수 있는 것에 어떤 한계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영원히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속에 다시 오셔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실 세상 끝날의 하느님 나라에서조차, 영원히 더욱 더 하느님처럼 되도록 지어진다.

 

따라서 정교신앙을 지닌 성 교부들께서는 사람이 이룬 성숙과 발전의 단계가 어떠하든지, 그리고 그가 지닌 힘과 지혜와 자비심과 지식과 사랑이 어떠하든지, 계속해서 그의 앞에는 참여하여 살아야 할 지극히 복되신 성삼위 안의 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생명이 무한하게 놓여 있다고 가르치셨다.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의 본성 안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영원히 나아간다는 사실은 사람이 지닌 삶의 의미를 이루며,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으로서 남는다.

 

여기서 또한 말해야만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뜻(will)이며, 하느님을 되비추는 존재인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인간적 삶과 행위를 위해서 필수적(必須的 essential)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성(sexuality)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존재와 삶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 말이 하느님 안에 어떤 종류의 성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뜻하시며 만드신 그런 모습으로 되려면 인간의 삶이 (남성과 여성으로) 유성적(有性的 sexual)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자와 여자, 남성과 여성은 존재와 삶과 사랑의 일치 속에서 더불어 살도록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다. 남자는 새롭고 완전한 아담(Adam)이신 그리스도를 되비추는 존재로서, 인간의 활동들에서 지도자가 되어야만 한다. 성모님과 (새로운 하와인) 교회가 (새로운 아담인) 그리스도에 대해 갖는 관계에서 상징화되듯이, 여자는 남자의 ‘협력자’로서 ‘인류의 어머니’가 되어야만 한다.(창세기 2:18; 3:20) 남자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고, 그의 존재를 완성하며, 그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자로서 여자는 남자의 도구가 아닌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권리를 지닌 한 인격체이며, 하느님의 본성을 나눠 가진 이로서 남자에게는 꼭 필요한 보조자(complement)이다.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여자(곧, 하와)없이 남자(곧, 아담)가 있을 수 없다. 둘은 인간의 본성과 삶의 완성을 위해, 완전한 사귐과 조화 속에서 함께 존재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다른 점들은 실제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생물학적이거나 육체적인 차이들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하나의 똑같은 인간성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존재양식’(modes of existence)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성자와 성령께서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하나인 같은 신성 안에서 서로 다른 ‘존재양식’으로서 존재하는 것과 똑같다. 남성과 여성은 육체적인 일치뿐 아니라 영적인 일치 속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진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가치들과 능력들을 하나인 똑같은 인간성 안에서 함께 표현해야만 한다. 남자에게는 속하지만 여자에게는 속하지 않는 가치나 힘들은 없으며, 반대로 여자에게는 속하지만 남자에게는 속하지 않는 가치와 힘들도 없다. 모든 사람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 곧 당신의 창조물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온갖 거룩한 가치들 안에서 영적인 완전함을 이루도록 요청받는다.

오늘날의 세상 속에 존재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적대(敵對)와 경쟁들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그들의 상대적 ‘존재양식’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자들에 대한 남자의 그 어떤 포학(暴虐), 곧 그 어떤 억압과 노예상태도 있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이 남자가 되려고 하고, 창조질서 안에서 남성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드는 그 어떤 시도(試圖)도 있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존재의 공동체 안에서, 그것이 지닌 자연적인 창조질서와 차이점들을 인정하면서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만 한다. 곧,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성 안에서 다양한 존재양식의 차이를 지닌 본성의 하나됨(oneness)을 이루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신성 자체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인 인격들이 각각 있으면서 하느님의 공통된 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성삼위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들을 지닌 채, 본성과 존재의 완전한 일치가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안에는 질서(order)가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용어를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있는 본성의 차이를 뜻하는 것으로 쓰지 않고 단지 신적인 인격들이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사람과 세계에 관계하는 방식(way)으로 쓴다면, 거기에는 심하게는 계급(hierarchy)이 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자체 안에서는 성부 홀로 ‘신성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표현(expression)이시며, 그분께 ‘종속’(從屬)된다. 그리고 성부, 성자와 한 본질이시며 완전하게 동등하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뜻을 완성하시는 ‘셋째’ 인격이시다. 이 신성한 세 인격들은 완전하게 동등하시다. 이것이 교회의 교의(敎義 dogma)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똑같은 것이 아니며, 그 세 인격들 사이에는 존재와 활동에서 ‘우선권들’(priorities)이 있는 질서있는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신성(Godhead)의 완전함과 완전한 일치를 파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성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하고 거룩하게 한다.(이 책의 3장 성 삼위일체 부분을 보라.)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삶이며, 창조질서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존재와 활동을 위한 신적인 원형(元型)이요 본보기(Pattern)이다.

 

죄라는 말은 글자의 뜻 그대로 하면 ‘목표를 못 맞히다, 표적을 빗나가다’(missing the mark)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이, 되어야 할 존재가 못되고 해야 할 일을 못한 것을 뜻한다.

 

본래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형상이 되고,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과 일치하는 삶을 살며,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도록 지어졌다. 사람이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타락’(fall)이라고도 불려온 그의 죄이다.

 

사람의 ‘타락’은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召命)을 다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의 뜻이다. 사람은 악(뱀)의 꾐에 빠져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하느님처럼’ 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정교전통에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이 실제적으로 악을 맛본 것, 곧 그가 악 자체를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해석한다. 때때로 이 사건(열매를 따먹은 것)은 (신학자 그레고리의 해석에서처럼) 사람이 자신에게 가능한 것 이상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한 것, 다시 말해서 아직 자신의 능력 안에 들지 않은 것을 행하려고 시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창세기 이야기에 대한 여러 해석들의 자세한 내용들이 어떠하든지, 사람이 그 본래의 소명에 대해 실패했다는 것이 정교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사람은 교만과 시기심, 그리고 하느님께 겸손한 감사를 드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꾐에 빠지게 되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만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라는 ‘목표를 못 맞혔다.’ 그는 하느님의 법을 어겼다.(요한 1서 3:4을 보라.) 그럼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과, 돌보고 잘 기르도록 주어진 창조세계를 망가뜨렸다. 그의 죄(그리고 죄들)로 말미암아 사람은 자신과 모든 창조세계를 악과 죽음의 법칙 아래에 들게 한다.

 

성경과 정교신학에서는 죄, 악, 악마, 고통, 죽음 따위의 요소들이 언제나 함께 나아간다. 결코 다른 것 없이 어느 한 가지가 있지 않으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람의 반역과 그분과의 친교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은 공동의 결과이다. 이것이 창세기 3장과 아브라함의 소명 때까지 이르는 그 뒤의 장(章)들의 주된 의미이다. 죄는 여전히 더 많은 죄를 낳으며, 심하게는 더 큰 악을 낳기도 한다. 죄는 우주적인 부조화(不調和)와 모든 사람과 사물의 궁극적인 타락과 죽음을 가져온다. 사람은 여전히 창조된 하느님의 형상으로 남아 있지만,(이것은 바뀔 수 없다.) 자신의 형상을 순수하게 지키고 거룩한 모습을 지니는 데는 실패한다. 그는 악 때문에 자신의 인간성을 망치고, 그것을 빗나가게 하며 변질시킴으로써, 그것이 본래 뜻했던 하느님의 순수한 모상(模相 reflection)이 될 수 없게 한다. 세상 또한 좋게, 사실상 ‘매우 좋게’ 남아 있지만, 창조된 주인(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슬픈 결과들을 나누어 받고 그와 함께 치명적인 고통과 타락을 겪는다. 따라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떨어지고, ‘사악함 속에 놓이게 된다.’(요한 1서 5:19; 또한 로마서 5:12을 보라.)

창세기 이야기는 상징적인 용어로써 사람의 원시적이고 본래적인 가능성들과 실패들을 영감어리게 그린 것이다. 그 이야기는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그것보다는 악을 증가시키고 배양하며, 창조세계를 악마의 왕국으로 변질시킴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한 번 더 구원받기까지 ‘고생하면서 신음하는’ 우주적인 무덤이 되게 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로마서 8:19-23) 아담의 모든 자손들, 곧 인류에 속한 모든 이들은 이 비극적인 운명을 안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채 근본적으로는 선한 이 세상 속으로 태어나는 이들조차도, 악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의 악한 여러 종들의 사악한 열매로 가득 찬 이 죽음의 우주 속에 곧바로 던져지게 된다.

 

‘사람과 이 세계는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근본적인 명제(命題 message)이다. 하느님께서는 맨 처음부터 구원의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 속에서 완성되기 위해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그리스도의 선조인 아브라함이라는 인격 속에서 시작하는 약속이다.

 

주께서 아브람(나중에 아브라함이라고 부르게 됨.)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기 12:1-3; 또한 22:15-18)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왔으며, 그들에게서 육신을 따라 구원자이시며 창조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셨다.(루가 1:55, 73; 로마서 4장; 갈라디아서 3장을 보라.)

구약의 전체 역사는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후손들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죄와 죽음을 이기시리라는 것을 예상하여 일어났다. 하느님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그의 이름은 ‘하느님과 싸우는 이’를 뜻하는 이스라엘[Israel]로 바뀌었다.)이 맺은 계약들, 이스라엘의 열 두 부족들, 요셉 이야기, 유월절과 출애굽과 모세가 하느님의 법을 받은 것,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어간 것,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을 건설하고 성전을 세운 것, 판관들과 왕들과 예언자들과 사제들 등등 구약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들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메시야 예수님의 탄생과 삶, 죽음과 부활, 승천과 영광을 받으심 속에서 그 최종적인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분은 성부로부터 오셔서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의 무덤을 열어 모든 창조세계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기들의 주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이 고백은 시작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마태오 16:15-16)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께 대해서 해야만 하는 신앙의 첫 행위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성모님의 아기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 이름은 글자의 뜻 그대로 하면 ‘구세주’를 뜻한다.(예수라는 이름이 히브리말로는 ‘여호수아’인데, 그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요르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끈 인물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오 1:21; 루가 1:31)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바로 이 예수이시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세상에 약속된 분인 메시야이시다.

 

그러나 누가 메시야인가? 이것이 또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듣게 되는 둘째 물음인데, 이번에는 당신의 제자들에게가 아니라 당신을 비웃으면서 말로써 책(責)잡으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누가 메시야인가?’ 하고 그분은 그들에게 물으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대답을 할 수 있다거나 또는 메시야가 누구인지 실제로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잠잠케 하고 당신의 ‘때’(the hour), 곧 세상의 구원을 위한 시간을 시작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그리스도(곧, 메시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고 다윗이 읊지 않았느냐?(시편 110편)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마태오 22:41-46)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다윗을 감동시킨 분과 똑같은 성령에 감동된 사도들과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그분의 말씀에 담긴 뜻을 이해하였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이것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곧, 그분은 구약의 주(Yahweh) 하느님과 같으신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이미, 어떻게 해서 Yahweh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아도나이(Adonai), 곧 주님이라고 불렸는지를 보았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Yahweh라는 단어가 쓰여있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히브리말로 Yahweh라는 단어가 쓰여진 곳에서, 그리고 유다인들이 아도나이(주님)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그리스어 성경은 단지 끼리오스(Kyrios), 곧 주님이라고 썼다. 따라서 메시야를 달리 부르는 말인 ‘다윗의 아들’은 끼리오스(주님)라고 불려진다.

 

유다인들, 그리고 사실은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Lord)이라는 말은 하느님 한 분에게만 적합한 말이었다. ‘하느님은 주님이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들에게 드러내셨다.’(시편 118편) 이 주님과 하느님이 Yahweh이시고 또한 메시야이신 예수이시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요한 14:28)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또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주장하시기 때문이다.

‘한 분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첫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지키려고 했던 주된 신앙고백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고 주장하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함께 계신다. 이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성 교부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형식화된 복음의 선언이다.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이 부분에서는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시어 태어나시기 전, 하느님의 말씀(Word) 또는 로고스(Logos)라고도 불려지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 계신다. 그분은 ‘외아들’(Only-begotten)이라고 불려지는데, 이 말은 성부 하느님에게서 나신 오직 한 분이라는 뜻이다. Begotten이라는 말은 단지 ‘낳다’(born 또는 generated)는 뜻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다. 곧, 창조 이전에, 시간이 생기기 전에 나신다. 시간은 창조 이후부터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시작이나 끝이 없이, 영원히 무시간적(無時間的)인 실존 속에서 시간 이전에 존재하신다.

 

영원(永遠 Eternity)이라는 말은 끝이 없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상태, 곧 과거도 미래도 없이 그저 언제나 변치 않는 현재를 뜻한다. 하느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현재’(now)이다.

 

세상의 창조 이전,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 속에서 성부 하느님은 영원하고, 시간에 매이지 않으며, 언제나 현재적으로 존재하는 세대(世代) 속에서 당신의 외아들을 낳으셨다. 이것은 비록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태어나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시지만, 그분의 나오심은 영원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어떤 ‘시간’도 없었다. 이것이 정확히 이단자 아리우스(Arius)가 가르친 것이다. 이 가르침은 제 1차 세계공의회에 의해서 정식으로 단죄되었다.

 

비록 성부에게서 나시고 자신의 기원을 성부께 두고 있긴 하지만, 외아들이신 성자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셨다. 또는 창조되지 않으시고, 영원하시며, 신적인 분으로서 좀 더 정확하게는 언제나 ‘존재하고 계시다.’ 그래서 성 요한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

 

하느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요,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세대’ 속에서 언제나 성부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성자는 참으로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빛이시니, 그분에게서 나신 분은 틀림없이 빛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니, 그분에게서 나신 분도 참 하느님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의 창조질서로부터, 태어난 것은 태어나게 한 것과 틀림없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누군가 다른 것의 바로 그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그는 그와 똑같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을 낳고, 새는 새를 낳고, 물고기는 물고기를 낳고, 꽃은 꽃을 낳는다.

 

그렇다면 만일 하느님께서,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신적 존재의 완전성 속에서 한 아들을 낳으신다면, 그 아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아들이라는 사실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성부와 같을 것임에 틀림없다.

 

성자는 ‘성부와 한 본질로서 (성부께서) 낳으셨고 지음받지 않으셨다.’ (성부께서) ‘낳으셨고 지음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태어나셨지만 창조되지 않으셨다’ 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하느님 외에 존재하는 유형무형한 모든 것은 그분에 의해 창조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물이 아니다. 그분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거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분은 성부의 존재와 본성으로부터 태어나셨고, (성부께서) 낳으셨다.

 

정교인이 이해하는 신적인 계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본래 영원하신 성부이시며, 그분은 언제나 당신의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아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 자체에 속하는 일이다. 만일 그분께서 참되고 완전하신 신성을 지니셨다면 그분이 그런 존재일 것이라는 것도 하느님의 본성에 속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성 안에서 영원히 혼자가 아닐 것이고, 오히려 사랑과 선이신 그분의 존재는 (사도 바울로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이라고 부른[골로사이 1:13]) 거룩한 아들을 낳으심으로써 자연스레이 ‘넘쳐 흐르고’ (신성을) ‘재생산’ 하실 것이라는 것도 하느님의 신적인 본성에 속하는 일이다.

 

따라서 창조된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무로부터 만드신 모든 것 사이에는 끝없이 깊은 구렁(abyss)이 놓여 있다.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지 않으신다. 그분은 무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영원히 성부의 거룩한 존재로부터 태어나셨다. 그분은 ‘하느님 편에’ 속하신다.

 

태어나셨지만 지음받지 않으신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이시다. ‘한 본질의’(of one essence) 라는 표현은 단순히 다음을 뜻한다. 곧, 성부 하느님이신 분은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본질(essence)이라는 말은 라틴어 esse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존재하다’(to be)는 뜻이다. 사물의 본질은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답을 준다. 성부인 것은 성자인 것이다. 성부께서 신성을 지니시듯이, 성자도 신성을 지닌다. 성부께서 영원하시고, 성자도 영원하시다. 성부께서는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자도 창조되지 않으신다. 성부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성자도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 성부와 일체이시며’ 라고 말하면서 고백하는 것이다.

 

언제나 성부와 함께 계시듯이, 성자께서는 또한 그분과 함께 한 생명, 한 의지, 한 능력, 한 행동을 이루신다. 성부께서 어떠하시든지 성자께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성부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성자께서도 마찬가지로 그 일을 하신다. 하느님의 신적인 현존 밖에서 이루어진 본래의 행위는 창조의 행위이다. 성부께서는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의 상징에서 고백하듯이 창조의 행위에서 성자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있게 된’ 분이시다.

 

성자께서는 창조 때, 성부의 뜻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행동하신다. 창조의 신적인 행위, 그리고 사실상 계시와 구원과 영화롭게 하는 일에서 세상을 향한 모든 행위는 성부께서 뜻하시는 것이며, 성자께서는 (성령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것이다.) 동일한 신적 행동으로써 그 일을 이루신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과 성 요한의 복음서에 있는 아래의 특별한 계시를 만나게 된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2-3)

 

또한 사도 바울로의 똑같은 가르침이 있다.

 

“…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성자)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로사이 1:16-17)

 

따라서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히브리 1:2; 2:10; 로마서 11:36) 라고 고백된다.

 

신앙의 상징(곧, 신조)은 계속된다. ‘…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신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을 취하시어 태어나셨다. 이것이 정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교리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전체 삶은 이 사실 위에 세워진다.

 

신앙의 상징은, 하느님의 아들께서 오신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가장 중대한 성서적 가르침인데, 곧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찬예배를 드릴 때마다 중심되는 봉헌기도 부분에서 인용된다.)

 

당신의 완전하신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취하실 필요가 있음을 알고 계셨다. ‘육신을 취하신’(incarnation) 이라는 말은 사람의 본성과 몸과 영혼 전체를 취한다는 의미에서 ‘육화’(enfleshment)를 뜻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요한 1:14, 16)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자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육신을 취하셨다’는 주장은 성자가 우주의 ‘저 위’ 어디엔가 계시다가 지구 위로 내려 오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것은 일종의 성서적인 진술방식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 전적으로 ‘다른’ 하느님의 신적 현존으로부터 오셨다는 것, 곧 창조된 물질적 우주 안에 있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선과 한계를 넘어선 곳으로부터 오신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말과 주장의 상징적 성격을 다시 기억해야만 한다.

 

성자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다는 주장은 또한, 육화하시기 전 하느님의 아들은 이 세계에는 전혀 계시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성자께서는 언제나 ‘이 세계 안에’ 계셨는데, 그 까닭은 ‘세상이 이 말씀(성자)을 통하여 생겨났기’ 때문이다.(요한 1:10) 그분은 언제나 세상 속에 현존하셨는데, 그것은 그분이 몸소 사람들의 생명이며 빛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서 4장)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이로서 모든 사람(그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서도)은 이미, 그 자신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형상인 거룩하신 성자의 반영(反影)이다.(골로사이 1:15; 히브리 1:3) 따라서 경전에서 하느님의 부르는 대로 성자 또는 말씀 또는 형상 또는 광휘(光輝 Radiance)께서는 당신의 모든 ‘창조된 형상들’ 속에 언제나 현존하심으로써 ‘이 세상 속에’ 언제나 계셨는데, 그것은 그 형상들의 창조주로서 뿐 아니라 모든 창조물들이 바로 그 존재를 나누어 갖고 되비추도록 만들어진 그런 분으로서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는 육화하심으로써 몸소 세상에 오시고 사람이 되신다. 그러나 육신을 취하시기 전에라도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들 속에서,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당신의 창조적인 행동들과 그 능력에 의해서 언제나 세상 안에 계셨다.

 

이것에 덧붙여서 구약의 성인들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 곧 이른바 신현(神顯 theophany, 이 말은 ‘신성의 나타남’을 뜻한다.)들은 당신의 아들(또는 로고스)에 의해, 아들을 통하여, 아들 안에서 성부께서 나타나신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모세나 엘리야 또는 이사야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시고 창조되지 않은 아들에 의해 중재(仲裁 mediation) 되는 것이다.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약의 예언자들과 성인들에게 임한 하느님의 말씀과 구약의 모세율법에 있는 바로 그 말씀들(이것은 히브리말로 ‘말씀들’이라고 불려지며, 영어에서 말하듯이 ‘명령들’[commandments] 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거룩한 말씀인 당신의 아들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들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이사야 예언서에서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것에 대한 구약의 증언을 듣게되는 데, 거기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이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형태를 띠고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 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 오지는 않는다.”(이사야 55:10-11)

 

그러므로 사람인 예수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기 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요 말씀이신 분께서는 창조 세계 속에서,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람 속에서 나타나는 당신의 현존과 행동들로 말미암아 이 세계 안에 계셨다. 그분은 현존하셨고 행동하셨다. 구약의 성인들에게 일어난 신현(神顯)들 속에서 또한 그러하셨고, 말과 글을 통한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그러하셨다.

 

 

육화(肉化)

 

…성신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사람으로 나셨다.(마태오 1장; 루가 1장) 교회는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이 구약의 예언(이사야 7:14)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종교들과 철학들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구원을 향한 갈망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직 하느님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사람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바로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동정녀에 의한 탄생은 그같은 처녀성(處女性 virginity) 자체만의 그릇된 우상화 때문이거나, 정상적인 인간의 성(sexuality)을 죄스런 것으로 여겨 물리쳐 버리려는 것 때문에 필요한 것이 전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동정녀에 의한 탄생은, 태어나시는 분이 그저 구원을 필요로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어서는 안되는 필요에 따라서라고 이해된다. 세상의 구세주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단지 육신으로부터 나온 아담의 후손 가운데 하나이어서는 안된다.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시고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나신다.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단순한 사람’(mere man)이 아니라는 것이 정교회의 정식 가르침이다. 그분은 사실 인간의 정신과 영혼과 몸을 지니시고 전체적으로 완전하신 사람, 곧 실제적인 사람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과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모님께서는 마땅히 테오토코스(Theotokos,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뜻한다.)라고 불려져야 한다고 정식으로 고백한다. 왜냐하면 성탄때 정교회에서 노래하듯이, 성모님에게서 나신 분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오늘 동정녀께서 본체를 초월하는 분을 낳으시니 땅은 범접(犯接)할 수 없는 분에게 동굴을 제공하고 천사들은 목자들과 함께 영광을 드리며 박사들은 별따라 길 떠났도다 태초부터의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아이로 태어나셨음이니라.(성탄절 시기송)

 

나자렛의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또는 더 정확하게는, 사람의 몸을 취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시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참 사람이시다. 그분은 태어나셨다. 그분은 부모님께 순종하면서 자라셨다. 그분은 지혜와 키(stature)가 자라갔다.(루가 2:51-52) 그분은 ‘형제들’과 함께 가족적인 삶을 사셨는데,(마르코 2:31-34)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형제들은 ‘평생 동정녀’로 고백되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난 자식들이 아니라, (아버지인) 요셉의 사촌들이거나 자식들이었다. 한 사람으로서 예수께서는 성장과 발달, 무지와 배움,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로, 슬픔과 아픔과 실망 따위의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인간의 온갖 유혹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을 몸소 짊어지셨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잠시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셨다가 마침내 영광과 영예의 관을 받아 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고 또 다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공포에 싸여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실 수 있으십니다.(히브리 2:9-18)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죄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 사람들과 같아지셨다.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우리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베드로 1서 2:22; 히브리 4:15)

 

예수께서는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셨고, 성부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완전한 사람, 곧 새로우면서 마지막인 아담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다하셨다. 그분은 창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신적인 뜻(initiative)에 대해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적 반응을 하시면서, 사람들이 하려다가 실패한 모든 일들을 하셨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사람으로서 아담, 곧 전(全)인류의 삶을 ‘되풀이하셨으며,’ 사람과 이 세상을 성부 하느님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죄의 권세와 악마와 죽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허락하셨다.

 

구세주이신 메시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과 가능성들(expectations)을 완성하셨으며, 인간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모든 것을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완벽함 속에서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시며,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시고, 예언자들의 성취이시며, 당신 자신이 마지막 예언자이시며, 왕이시고 선생이시며, 구원의 대사제이시고 완전한 희생제물이시며, 새로운 유월절이시고 모든 창조물에게 성령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느님과 자신은 같으며,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했던 것, 곧 부활이요 생명이며,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빵이며, 양 우리의 문이요 선한 목자이며, 신성한 사람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 자신(곧, ‘스스로 있는 자’[I AM])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야-왕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신 당신 자신의 역할 때문이다.(요한복음)

 

육화(肉化)교리의 수호

정교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사실, 곧 하느님의 아들께서 실제적인 사람으로서 이 땅에 나타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고 수호되었다. 신앙에 대한 첫 가르침과 첫 방어는, 나자렛 예수께서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시며, 메시야 자신(곧, 그리스도)은 사실상 사람의 형태를 취하신 참 주님이시오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사도들과 함께 시작된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는 참으로 그리스도시요 하느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참 인간으로서 육신을 지니신 채 살다가 죽어서 죽은 자들에게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주장해야만 했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요한 1서 4:2-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요한 2서 7절)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기에 신앙의 수호자들(변증가들과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주된 증언과 과제로서,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사셨고 죽으셨으며, 성부 하느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셔서 이 세상의 유일한 왕이시요 주님이시며 하느님으로서 영광을 받고 계시다는 교리를 지키는 것을 삼았다.

 

세계공의회들

3세기와 4세기에, 비록 예수께서 참으로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말씀이시지만 아들과 말씀 자신은 완전한 신성을 지니지 않으시고 단지 한 창조물에 지니지 않으며, 혹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양(高揚)된 창조물이라 하더라도 만들어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한 피조물이라는 가르침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아리우스주의자들(Arians)의 가르침이었다. 이런 가르침에 맞서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대 바실리우스,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신학자 그레고리 등과 같은 교부들이 제 1차, 2차 세계공의회들에서 내린 신앙에 대한 정의(定義)를 수호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말씀이신 분(나자렛의 예수요 이스라엘의 메시야-그리스도로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시고 육화하신 분)께서는 창조물이 아니며, 참으로 성부 하느님, 성령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해 보존했던 신앙이 바로 이 성삼위일체(3장 삼위일체를 보라.) 교리였는데, 그것은 예수께서는 정말로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시며 성부, 성령과 함께 한 본질로서 성삼위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가르침이다.

 

동시에 4세기에는 교회가 아뽈리나리우스(Appolinarius)라는 사람의 가르침을 물리칠 필요가 있었는데 그는 중장하기를, 비록 예수께서 정말로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말씀이라 할찌라도 단지 인간의 몸을 취하셨을 뿐 완전히 인간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닌 말씀(Word) 속에 육화가 놓여있다고 했다. 이것은 예수께서는 어떤 실제적인 인간의 혼(soul)이나 인간의 정신 또는 인간의 영(spirit)을 갖고 계시 않았으며,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자께서는 집(temple) 안에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과 육체 속에 단지 머무르셨다는 가르침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공의회들의 모든 성명(서)들을 포함해서 정교회의 온갖 공식적인 교리적 진술들은 언제나,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온당한(rational) 혼(soul)과 몸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사람이 되셨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단어의 완전한 뜻에서 실제로 사람이 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real) 사람이셨고(was) 이시며(is),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고(has) 되고 있는(is) 모든 것을 가지시고(having) 되신다.(being) 이것은 복음서와 일반적으로 신약의 경전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 (히브리 2:14-17)

 

네스토리우스 논쟁

5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을 참되게 이해하는 것에 대한 길고도 힘든 논쟁이 벌어졌다. 431년 에페소에서 열린 제 3차 세계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의 가르침을 따라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은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변호하는데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 매우 분명하게 이 사실을 옹호(擁護)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따르는 교회 안의 몇몇 사람들이 동정녀 마리아는 테오토코스(Theotokos, 이미 교회의 신학에서 쓰고 있던 용어임.) 라고 불려져서는 안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동정녀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하셔서 된 인간 예수를 낳으셨지 성자 자신을 낳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히 나신 하느님의 아들과 베들레헴에서 동정녀로부터 나신 사람의 아들 사이에는 불일치(division)가 있으며, 비록 그 양자(兩者) 사이에 분명코 어떤 실제적인 ‘관련’(connection)이 있다 하더라도 성모님은 그저 사람을 낳으셨을 뿐이라는 주장이 펼쳐졌다. 그런 자격으로 성모님은, 그 말(테오토코스)에 대한 어떤 상징적이고 지나치게 경건한 체하는 과장에 의해서만 테오토코스라고 불려질 수 있으며, 그보다는 그분을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메시야를 낳으신 분) 또는 안트로포토코스(Anthropotoios, 하느님의 아들께서 육화하여 된 사람을 낳으신 분) 라고 부르는 것이 도리어 교의적으로 정확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와 에페소 공의회의 교부들은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물리치면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테오토코스라는 말은 전적으로 정확하며, 만일 그리스도교 신앙이 적절하게 고백되고 그리스도교적인 삶이 마땅하게 이루어지려면 이 용어가 잘 지켜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수호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요 말씀이신 분과 성모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불일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아이는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들이시다. 그분(그밖의 다른 이는 없음.)은 아이로서 성모님에게서 나셨다. 그분(그밖의 다른 이는 없음.)은 성모님에게서 나셔서 육신을 취하셨다. 그분(그밖의 다른 이는 없음.)은 베들레헴의 여물통 안에서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의 아들과 성모님의 아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connection)이나 ‘결합’(conjunction)이 있을 수 없는 데, 그것은 그 양자가 사실상 동일한 인물(person)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께서 성모님에게서 나셨다. 하느님의 아들은 신성을 지니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성모님은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을 낳으셨고, 사람이신 하느님을 낳으셨다. 그러니까 성모님은 참으로 ‘테오토코스’이시다. 성 끼릴로스와 에페소공의회의 외침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은 한 아들이시다!’

 

칼케돈 공의회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같은 가르침은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제 4차 세계공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더욱 다듬어지고 세세히 설명되어졌다. 이런 일들이 필요했던 것은 다름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분의 참된 인성이 두드러지지 않게 표현되고, 마침내는 거의 부정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 4차 공의회에서는 잘 알려진 (신앙의) 정식(定式 formulation)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완전한 본성(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한 인격(person 또는 hypostasis)이시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로마의 교황인 성 레온의 편지에 힘입어서 제 4차 공의회는,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성부 하느님의 신성과 관련이 있는 어떤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성부와 한 본질’ 이시라고 주장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었는데, 여기서 ‘성부와 한 본질’ 이라는 것은 단순히 성부 하느님이신 분은 또한 성자이시며, 성자께서는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오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참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또한 공의회는, 육화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틀림없이 모든 인간과 똑같이 되셨다고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성(humanity)에 관한 한 모든 인간과 ‘한 본질’(of one essence)이시라고 고백했다. 이 가르침은 복음서와 신약의 문서들에 기록된 사도적 신앙에 꼭 들어맞는 가르침으로서 수호되었고, 지금도 수호되는데, 이를테면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비 2:6-8; 또한 히브리 1장-2장, 요한 1장을 보라.)

 

다음의 것이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루어진 신앙에 대한 정의 속에 있는 중요한 문구이다.

 

다음의 것이 우리가 한 목소리로 가르치는 성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한 분(인격)으로 고백되어야만 한다. 그분은 신성과 인성 모두를 완전하게 갖추신 분으로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고, 온당한(rational) 영혼(soul)과 (인간의) 몸을 지니시고서 신성으로는 성부와 한 본질(essence)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한 본질이시다. 우리와 똑같으신 분이지만 죄만은 짓지 않으셨다. 모든 세대에 앞서 신성을 따라 성부께서 낳으셨고, 이 마지막 때에 우리 사람들과 우리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따라 테오토코스이신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세상에) 태어나셨다. 이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은 두 가지 본성(natures)을 지니셨지만 그것들이 섞이거나 변하지 않으시고 나누이거나 분리되지도 않으신다고 고백되어야만 한다. (곧, 각 본성에 고유한 특질(特質)들이 변하거나 없어지도록 신성과 인성이 함께 녹아드는 일이 없이, 그리고 아들이 들이고 오직 한 분인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되도록 두 본성이 분리됨이 없이) 그리고 그런 결합(union)에 의해서 제거되는 본성들의 특성(distinction)이 없이, 도리어 각 본성의 독특한 성질(property)이 보존되어 한 인격과 위격(位格 Hypostasis) 안에서 결합되는데,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성자이시며 외아들이시고 말씀이신 하느님이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이는 곧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분에 관해서 이미 말한 바요, (이를테면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Immanuel])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요, 교부들의 신조(Creed)가 우리에게 전해준 바이다.

 

얼마간의 그리스도인들은 칼케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은 채, 그 공의회의 결정들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공의회가 육화(肉化) 이후의 ‘두 본성’을 주장함으로써 (그러나 강하고도 굳세게 두 본성의 ‘결합’이 주장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잘못된 가르침을 사실상 소생(蘇生)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단성론자(單性論者 monophysites, 육화 이후의 ‘한 본성’을 뜻하는 말로부터 옴.) 라고 부르며, 그들은 오늘날까지 칼케돈적인 정교에서 떨어져 나간 채 꼽띡(Coptic) 교회와 에티오피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맥(脈)을 이어오고 있다. 바라기는 언젠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런 논쟁이 해결되어,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 대한 해석에 관해서 (동방 정교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 교인들, 개신교인들 같은) 칼케돈을 지지하는 이들이 칼케돈을 거부하는 이들과 신앙의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앞날에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칼케돈공의회는 성 끼릴로스의 반(反) 네스토리우스적인 가르침과 에페소의 제 3차 세계공의회에서 이루어진 결정들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이 지금도 변함없는 정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이다. 정교의 생각으로는 제 4차 공의회의 가치(virtue)가, 하느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서 테오토코스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을 때 하느님이시기를 그만두시거나 또는 자신의 신성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며, 도리어 당신의 육화하신 인성 속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구원 자체가,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서 완전하게 결합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고 사람이 사람인 결합, 그리고 그 둘이 서로 녹아 들거나 변하지 않으며 서로 나뉘거나 따로 떨어짐이 없이 완전한 일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결합이다.

 

유스티노스 황제와 제 5차 세계공의회

6세기에 비잔틴 황제 유스티노스(Justinian)는 칼케돈공의회를 따르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삼위 가운데 한 분으로서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말씀이시라는 것을 실제로 믿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제 4차 공의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그 공의회의 정의(定義)가 네스토리우스의 잘못을 다시 도입(導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싶어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황제는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오늘날 제 5차 세계공의회로 알려진 공의회를 열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에 관한 정교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기울여졌다. 다음의 글들이 이 공의회의 중요한 결의들(texts) 가운데 일부분이다.

 

만일 누군가 그 표현을 이런 뜻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한 인격만이’ 있으며, 그것이 많은 위격들(hypostases)의 결합이라고 이해하고, 따라서 그가 만일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두 위격들이나 두 인격들을 끌어들이려 하고, 두 인격을 끌어들인 뒤 존엄과 영예 또는 예배의 의미에서 한 인격(one Person)을 말한다면, …(그리고) 이런 불경건한 뜻에서 (한 위격과 인격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하면서 거룩한 칼케돈공의회를 비방한다면… 그를 정죄하시오.

 

만일 누군가 진정한 말의 뜻에서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며 평생동정녀이신 진정한 말의 뜻에서…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며 평생동정녀이신 성모님을 테오토코스라고 부르지 않으려 하고… 그분은 그저 사람을 낳았을 뿐이며 말씀이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에게서 육화하지 않으셨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불경건한 뜻을 따라 거룩한 칼케돈공의회가 성모님을 테오토코스라고 주장한 것처럼 여겨 공의회를 비방한다면… 그를 정죄하시오.

 

만인 누군가 ‘두 본성으로’ 라는 표현을 쓰면서 우리의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으로 나타나셨음을 고백하지 않고, 그런 표현으로써 혼합됨이 없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결합이 이루어진 두 본성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곧 다시 말해서) 말씀(Word)의 본성이 육체의 본성으로 바뀌지 않고 육체의 본성이 말씀의 본성으로 바뀌지도 않은 채, 각 본성이 본래대로 남아 있으면서 위격적인(hypostatic 곧 한 인격 안에서) 결합을 이룬 것을 부정하여, 그같은 표현(‘두 본성으로’ 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신앙인의 모임을 분열시키려 한다면… 그를 정죄하시오.

 

만일 누군가 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고 성삼위 가운데 한 분이심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를 정죄하시오.

 

칼케돈공의회가 참으로 정교적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기 위해 유스티노스 황제는 오늘날까지 정교회의 모든 성찬예배에서 불려지는 교리적인 성가를 썼다. 그 성가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느님이요 완전한 사람이신 분으로 고백한다.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영생하시는 독생자시여,

당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평생 동정 성모님에게서 육신을 취하시고,

본성에 변함없이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시므로써 죽음을 죽음으로 멸하셨나이다.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광받으시는 그리스도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e) 논쟁

7세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고, 고백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말미암아 신자들 사이에 계속 분열이 일어났다. 그때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하느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뒤에 그분은 오직 하나의 행동과 의지(곧, 말씀이 변해서 된 육신[Word-made-flesh]의 신인양성적[神人兩性的 theandric]인 행동과 의지) 만을 갖고 계셨다고 했다. 단의론자들(Monothelites)이라고 불려졌던 이 사람들은, 하느님과 사람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One Person) 안에 결합되면서 그분의 한 인격은 인간적이고 신적인 의지와 행동을 함께 융합(融合)시켰고, 그래서 그 두 가지 것(인간적이고 신적인 의지와 행동)은 더 이상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680년에서 681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제 6차 세계공의회가 열렸다. 그의 가르침 때문에 감옥에 갇혀 고문은 당한 고백자 성 막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완전한 신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시고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게 결합된 것과 똑같이, 마찬가지로 그분은 당신의 각기 다른 두 본성을 따라서 실제적인 인간적 행동과 의지 그리고 실제적인 신적 행동과 의지 둘 다를 갖고 계셔야만 하며, 본성 자체처럼 이 두 가지 의지와 행동들이 하나로 녹아들거나 섞여서 자신의 고유한 본래의 특성과 성질들을 잃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공포(公布)하였다. 이같은 결정은,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육화하신 뒤에도 완전히 신적인 분으로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고유한 신적 행동과 의지를 계속 갖고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과, 그분이 육화하시면서도 완전한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에 또한 완전한 인간적 행동과 의지를 갖고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같은 각각의 행동과 의지들의 (나누임이나 분리가 아니라) 구별(distinction)이 육화하신 구세주 안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음의 것이 제 6차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신앙에 대한 정의 가운데 한 부분이다.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분 안에는 두 가지 본래적인 의지와 두 가지 본래적인 활동이 나뉘거나 녹아듬이 없이 그리고 바뀌거나 서로 떨어짐이 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본래적인 의지들은 서로서로 맞서지 않는다(하느님께서 금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인간적인 의지는 뒤를 따르되, 저항하거나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신적이고 전능한 의지에 복종하면서 따른다…[…] 이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흠없이 활동하는 육신이, 신성화(神性化) 되었지만 그 자신의 상태와 성질을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분의 인간적인 의지도 비록 신성화되었지만 (신성에 의해) 억눌림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보존되었다… 우리는 똑같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참된 하느님 안에 있는 두 개의 본성적인 활동들을, 말하자면 신적인 활동[또는 행동]과 인간적인 활동[또는 행동] 찬송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피조물 속에 있는 하나의 본래적인 활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삼위 가운데 한 분이시며, 육화하신 뒤 그 분의 두 본성들은 당신의 하나인 위격[또는 인격] 안에서 빛났고, 그 한 위격 속에서 그분은 기적도 행하시고 고통도 견디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두 의지와 두 활동들이 그분 안에서 가장 알맞게 서로 협력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성화 논쟁

8, 9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에 대한 물음이 교회의 성화들을 공경하는 것에 대한 논쟁 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이 때에는 황제들과 세속의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성화를 공경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는 일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며 구약의 율법에서는 사람들더러 ‘새긴 상들’(graven images)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므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형상들을 그려서 공경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다마스커스인인 성 요한(St John Damascene)과 성 떼오도르 스투디온(Theodore Studion)의 인도를 받아 성화를 공경하는 것을 수호하던 이들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는 것이라고 했다. 거룩한 경전들을 말하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께서 육화하심을 믿는다면 성화들을 공경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 인간의 혼과 몸을 지니신 실제의 사람이시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도 (성화들이) 그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거룩한 성화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육화’를 ‘환상’(fantasy)으로 축소시키며,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의 참된 인간성을 부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필립보(Philip)와 나누신 대화 가운데 있는 말씀을 근거로 들었다.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요한 14:8-9)

 

성화상을 경배하는 것이 정당함을 옹호하는 이들은 또한 성 사도 요한과 바울로의 말씀들을 예로 들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요한1서 1:1-2)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고린토2서 4:4)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사이서 1:15-20)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천사의 칭호보다 더 높은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더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히브리 1:1-3)

 

787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 7차 세계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씀과 형상으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거룩한 성화들을 만들어도 좋다고 하면서도, 그것들은 예배되어서는 안되고 (왜냐하면 하느님 한 분만이 예배를 받으실 분이기 때문에.) 다만 공경하며 존경해야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제 7차 공의회는 성화들을 공경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다음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글로 썼든지 또는 말로써이든지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교회 전통들을 변함없이 지킨다.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복음을 선포한 역사를 따라서 (어떤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익한 전통이다. 무엇보다도 특별히 이 전통 속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께서 육화하심이 그저 ‘환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내 지는데, 그 까닭은 이것들(성화들)이 서로서로를 가리키고 있으며 의심할 바 없이 상호간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후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신성과 인성에 관한 가르침들이 신(新)신학자 시메온(Simeon the New Theologian, 1022년 사망)과 데살로니끼의 대주교인 그레고리 빨라마스(Gregory Palamas, 1359년 사망) 같은 성인들에 의해 증언되고 수호되었는데, 그분들은 교회의 성령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살아있는 친교를 나눔으로써 사람이 진정으로 성화되고 신화(神化 deification)하는 것에 대한 자신들의 가르침 속에서 이런 일을 하였다.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고, 지극히 복되신 성삼위의 창조되지 않은 존재와 생명과 빛에 참여함으로써 성부 하느님과 참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과 참 사람이 아니시라면 이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삶 속에서 겪는 구원과 구속에 관한 인간의 경험이다.

 

 

구속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비록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고, 고통을 겪거나 죽음을 당하시지 않아도 되었지만, 기꺼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으며,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기꺼이 고통과 죽음에 내놓으셨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구세주이신 그분의 과업이었다.

 

주님의 영을 내려 주시며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재를 뒤집어 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 주어라.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어라.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이사야 61:1-3)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주-하느님(Yahweh-God)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이 일을 하셔야만 했다.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이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믓해 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이사야 53장)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수 세기 전에 쓰여진 이사야 예언자의 이 말씀들은 그분의 메시야적인 선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분의 선교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죄가 없으시지만 당신 자신을 죄인들과 함께 세례받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한 몸이 되어야할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그것은 곧,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자’이면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 마태오 3:17)이신 분으로서 갖는 소명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기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당신을 메시야로서, 곧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날 그 순간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당신의 선교에 대해서 바로 말씀하신다.(마태오 16:16-23; 마르코 8:29-33) 제자들은 이런 말씀에 크게 놀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한 산 위에서, 신적인 영광 속에 휩싸인 채 변모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곧바로 보여주신다. 그러면서 그분은 다시 한 번 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태오 17:1-23; 마르코 9:1-9)

 

악의 권세들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늘어날 것이다. ‘세상의 왕들은 주님과 그 기름부은 자(Christ)를 거슬러 들썩거린다.’(시편 2:2) 그들은 그분을 죽일 이유들을 찾고 있었다. 정식의 이유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이었는데, 곧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요한 10:31-38)하며 그들은 예수님께 반문(反問)했다. 그러나 그보다 깊은 이유들은 더 개인적인 것이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고, 그들의 완고함과 어리석음, 위선, 죄를 드러내셨다. 이런 이유로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굳어지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하였다.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승인 아래 그 당시의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곧, 대사제 가야파[Caiaphas]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의 손에 맡겨졌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고통과 죽음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고통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 왜냐하면 “죄의 대가는 죽음”(로마서 6:23)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 바울로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쓰기를,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을 자가 되”셨는데,(갈라디아 3:13)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기 때문’(고린토 2서 5:21)이라고 하고 있다.

 

성부께 복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겪은 고난과 죽음은 당신의 창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넘쳐나는 신적인 사랑을 드러내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 자신은 단 한 순간도 하느님 자신의 의(義)와 축복과 생명이기를 그친 적이 없으시지만, 모든 것들이 죄를 짓고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신 것은 바로 이 깊이, 곧 그보다 더 낮고 더 천한 것은 찾아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런 깊이까지 이르신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서 그분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종이 되셨으며, 종으로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단지 죽음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런 가장 깊은 겸손(degradation)으로부터 사람의 영원한 들어올려짐(exaltation)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정교회의 역사를 통털어 수많은 방식으로 거듭거듭 표현되었던 정교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보상’(atonement)의 교리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구속’(redemption)의 교리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다시 찾아지기 때문(곧, 하느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서 다시 얻게 되기 때문) 이다.(사도행전 20:28; 고린토 1서 6:20)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비 2:5-11)

 

인간 삶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는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선생님이요 주인이시다. 그분은 하느님 자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이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사이 1:15) 이시다. 그분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골로사이 2:9)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성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요한 14:9) 그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오,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 이시다.(히브리 1:3) 그분은 “세상의 빛” 이신데,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한 8:12; 1: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곧 그분을 빛으로서 바라 모는 것이고 모든 것을 그분의 빛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진리’로 아는 것이고(요한 14:6), 그분 안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을 때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되고, 창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바램을 충족시켜 드리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디모테오 1서 2:3-4) 하느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구원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창조물들을 비추시는데, 그분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심 받은 하느님의 영이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 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5-17)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첫 단계(aspect)는 그분에 의해 조명(照明)되는 것이며, 진리의 영, 곧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보내시는 성령의 인도로써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성 사도 요한과 바울로의 서신들 속에서 증언되고 있다.

 

우리는 그 은총의 선물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성서에는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아서 그분의 의논 상대가 되겠느냐?” 고 하였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고린토1서 2:13-16)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또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 주게 하셨습니다.(에페소 1:8-10; 3:9)

 

여러분과 라오디게이아에 있는 교우들은 물론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음에 힘을 얻고 사랑으로 결합되어 풍부하고도 완전한 이해력을 가지고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 속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로사이 2:1-3)

 

그러나 여러분은 그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또 진리로부터 거짓말이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이며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버지까지도 부인하며 그와 반대로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버지까지도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것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살아 있으면 여러분은 아들과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에 관해서 지금까지 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시는 한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가시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요한 1서 2:20-27; 3:24)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 구원의 첫 양상(aspect)은 진리이신 분(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진리를 진리의 영에 의해 보고, 알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과 힘이다. 그것이 바로 지식과 지혜의 선물이요 조명(照明)의 선물이다. 그것은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것처럼, ‘하느님에 의해 가르침 받는’ 상태이다.(이사야 54:13; 예레미야 31:33-34; 요한 6:45) 따라서 정교회에서는 세례와 견진을 통해 교회의 구원하는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룩한 조명’(holy illumination) 이라고 부른다.(제 2권 예배를 보라.)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고린토 2서 4:6)

 

하느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분이신 예수님

사람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유일하며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인 행동의 둘째 양상은 죄를 용서함으로써 인간과 성부 하느님이 화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redemption)이며 엄격히 말해서는 보상(atonement)인데, 곧 죄로부터 풀려나고 죄로 말미암아 벌로부터 자유로와져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6-11)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모두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고린토 2서 5:17-19)

 

죄의 용서는 구약에 예언된대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징조(sign)들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예레미야 31:34)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들을 짊어지신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며, 자신을 통해 모든 죄들이 용서되도록 하시려고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이시다. 그분은 또한 위대한 대사제로서, 사람들이 죄에서 깨끗해지고 잘못들을 용서받게 하는 완전한 희생제사를 드리신다.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서 당신의 자신의 생명, 곧 자신의 몸을 완전한 희생물로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다.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 왔습니다.(베드로 1서 2:22-25)

 

하느님의 아들께서 대사제로서 영원하신 성부께 봉헌과 희생제사를 바치는 것이 신약성경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자세히 그려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히브리 5:7-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일하시는 성전은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에게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도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먼젓번 계약 아래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유산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히브리 9:11-15)

 

경전에 따르면 인간의 죄와 온 세상의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 곧 당신의 몸과 당신의 피(‘하느님의 피’[사도행전 20:28])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바침으로써 용서받는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구속’이고, ‘속죄’(ransom)이며, ‘배상’(expiation)이고, ‘화해’(propitiation)인데,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잘못과 죄를 사하여 깨끗이 하기 위해 필요한 ‘값을 치르셨다.’(고린토 1서 6:20; 7:23)

 

그리스도교 교리의 역사에서는 세상의 속죄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 ‘값을 치르시는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어떤 이들은 ‘지불’(payment)이 악마에게 이루어졌다고 말해왔다. 이것이 인간의 죄 때문에 악마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어떤 ‘권리들’을 받았다는 견해이다. 하느님께 반역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악마에게 팔았고’, 그럼으로써 ‘악한 자’(Evil one)가 ‘이 세상의 통치자’(요한 12:31)가 되도록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를 희생하심으로써 악마에게 (진) 빚을 갚으시고, 인간들을 그(악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신다.

 

다른 이들은 말하기를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불’(payment)은 성부 하느님께 이루어져야만 했다고 말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은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치러야만 했던 마땅한 형벌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셨다. 그분의 법은 깨졌고, 그분의 정의는 침해를 당했다. 인간은 적당한 벌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치러야만 했다.(또는,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벌로써도 그분의 정의를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태어 나시어, 인간이 짊어져야할 벌을 대신 받으셔야만 했다. 그분은 인간이 하느님께 저지른 잘못에 대해 (벌을 받음으로써) 하느님께서 적당한 만족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대신 내놓으셨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당신의 피를 (하느님을) 만족시키는 희생으로서 바치셨다. 죄지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해 완전하고도 모자람이 없는 값을 치르신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분노는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무례한 짓은 벌을 받는다. 세상은 창조주와 화해하게 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 ‘값을 치르셨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답하면서, 4세기의 신학자 성 그레고리(St. Gregory the Theologian)는 자신의 둘째 부활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사실과 교의(dogma)를 살펴보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시한 것이지만 내 생각에는 조사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흘린 그 피는 누구에게 바쳐졌으며, 왜 그 피를 흘려야만 했는가? 여기에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대사제이시고 희생제물이신 분의 값지고 잘 알려진 피이다.

 

우리는 죄 아래서 팔려 ‘악한 자’(Evil one)의 노예가 된 채 붙들려 있으면서, 사악함을 주고받는 것으로 즐거움을 누렸다. 이제, 속전(贖錢 ransom)이 노예 상태에 있는 이만을 위해 치러졌으므로, 누구에게 이것(몸값)이 바쳐졌으며 무슨 이유로 그리 되었는지를 나는 묻는다.

 

만일 ‘악한 자’에게라면, 저런! 불법행위에 대해서 (값을 치렀구만)! 만일 도둑(악마)이 하느님으로부터 뿐 아니라 하느님의 한 부분(그리스도)인 포학(暴虐)함에 대해서 그처럼 빛나는 대가를 받는다면, 우리를 모두 홀로 남겨둔 그는 참으로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부 하느님께 (몸값이) 바쳐진다면 나는 먼저 ‘어떻게?’ 라고 묻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압제를 당한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어떤 원칙에서 하느님의 외아들의 피가 아버지를 기쁘게 했는가하고 묻겠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삭조차도 받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이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그분은 인간을 희생제물로 삼는 대신에 양을 마련해 주심으로써 바치려 했을 때 그분은 인간을 희생제물로 삼는 대신에 양을 마련해 주심으로써 희생물을 바꾸시지 않았는가?(창세기 22장을 보라)

 

성부께서 성자를 받으시지만 요구하거나 간청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보다는 육화하심으로써, 그리고 인성은 하느님의 신성에 의해 성화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분은 스스로 우리를 해방시키시며, 폭군(곧, 악마)을 정복하게 하시고, 당신 아들의 중보로써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신다. 그 아들 또한 이런 것을 성부의 영광을 위해 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께 복종함이 명백하다.

 

정교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지불’(payment), ‘속전’(ransom)같은 말이 도리어 은유적(隱喩的)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곧, 그것은 악마와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고, 하느님의 분노 아래 놓여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여 되찾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법률적이고 사법적이며 경제적인 의미에서 ‘값을 치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속임수와 포학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권리를 얻을 악마에게 ‘값을 치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당신(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기뻐하시고 당신 안에 있는 창조물들로부터 ‘만족’을 얻으셨다는 뜻에서 성부 하느님께 ‘값을 치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도리어 실재 자체(Reality Itself)에 ‘값을 치르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죽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값을 치르셨다’.(로마서 5장-8장; 갈라디아 2장-4장을 보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악과 죄로부터 깨끗하게 씻으셨다. 그분은 ‘당신 자신의 영토 안에서’ 그리고 ‘당신 자신의 바램에 따라’ 악마를 물리치셨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로마서 6:23)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물질적이고 도덕적이며 사법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유로운 뜻에 따라 이루신 그분의 죄없으시고 순결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죽음을 물리치시고 그것(죽음)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근원과 길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 곧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새로운 과월절 양이신 분 안에서 맞는 부활절(곧, 새로운 과월절) 축일에 노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시고

무덤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베푸셨나이다!

(부활절 찬양송[Easter Troparion])

 

그리고 이것이 성 대바실리오스 성찬예배에서 교회가 기도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비록 모든 세대에 앞서 계신 하느님이셨으나 세상에 모습을 보이셨고 또 인간들 가운데 사셨으며, 거룩하신 동정녀로부터 육신을 취하시고, 자기를 비우시어 종의 형상을 지니고, 우리와 같은 비천한 모습을 갖추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어려움 없이 대하게 하셨나이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생겨나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생겼으며, 주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거룩하신 평생 동정녀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되 율법에 따라 태어나게 하시어 아담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그의 육신속의 죄를 단죄 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 구원의 계명을 주셨고 우리를 우상들의 미혹에서 해방하셨고, 참 하느님이요, 아버지이신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셨고, 우리를 당신을 섬기는 성스러운 직임을 주셨으며, 거룩한 민족으로 삼으셨나이다.

우리를 물로 씻으셨고 성령으로 성화시키셨으며, 죄 때문에 죽을 운명인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또한 그는 십자가를 거쳐 저승에 내려 가시어 손수 모든 일들을 이루셨고, 죽음의 고통들을 멸하시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모든 육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이는 생명의 조물주께서 사멸에 묶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나이다.

그로써 그는 이미 잠든 이들 가운데 첫 열매요, 죽음에서 태어난 첫 아들이 되셨으며, 앞으로도 만물의 첫째가 되시리이다 …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의 봉헌기도 중에서)

 

죽음을 멸하신 예수님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며 구속하시는 행동의 셋째이면서 마지막인 측면(aspect)은 가장 깊으면서도 가장 포괄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에 의해 죽음을 멸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 자체를 생명의 작용(act)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처해있는 영적인 상태인 저승(Sheol)을 하느님의 낙원으로 다시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이 죽게(사라지게) 된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죽을 수가 없게 되고, (도리어)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 섰다.(요한 5:24)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11:25-26)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34-39)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에 이르게 됩니다. …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골로사이 2:9-15, 3:1-3)

 

이것이 교회 전통 속의 여러 가지 수단들(곧, 성사들과 성가들, 신학, 성화상 등)을 통해 계속해서 되풀이 되고 있는 신약경전들의 가르침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간이 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며 악마에게 종살이하던 것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이 죽어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 속에서 죄는 더 이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인간의 죽음 속에서 악마는 더 이상 인간을 붙잡지 못한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고, 사악하고 잘못되며 악마적이고 죄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 다시 살아남으로써 죽음에 처해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잠시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셨다가 마침내 영광과 영예의 관을 받아 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 …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히브리 2:9-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사람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고린토 1서 15:20-22, 56-57)

 

 

부활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된 선언이다. 그것은 교회의 설교와 예배 그리고 영적인 삶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고린토 1서 15:14)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첫 설교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셨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 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사도행전 2:22-24)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버리는 능력과 그것을 다시 얻는 능력을 모두 갖고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7-18)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생명’에 대한 어떤 경쟁도 없으며, ‘능력’에 대한 경쟁도 전혀 없다. 하느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능력, 하느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은 모두가 똑같은 능력이며 생명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거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이신 것처럼 아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요한 5:26)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경전에서 강조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바치셨다는 것, 곧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놓으셨다는 것, 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머뭇거림없이 온전하게 하느님께 드렸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하느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시 되돌려 주셨다.)

 

정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실적인 죽음과 실제적인 부활을 믿는다. 그러나 부활은 그저 육체적인 소생(蘇生 resuscitation)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복음경과 교회 그 어디에서도, 예수께서는 죽으신 다음 생물학적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죽기 전에 하셨던 것과 똑같이 걸어서 돌아다니셨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경은, 예수께서 (무덤 밖으로) 나가시도록 하기 위해 천사가 무덤 입구에 놓여진 돌을 옮겼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께서 그 곳에 계시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 천사는 돌을 옮겼다.(마르코 16장; 마태오 28장)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새롭고 영광스러운 형상을 취하신다. 그분은 서로 다른 장소들에 곧바로 나타나신다. 그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루가 24:16; 요한 20:14) 그러자 그분은 당신이 유령(ghost)이 아님을 보여주시려고 먹고 마신다.(루가 24:30, 39) 그분은 남들이 당신의 몸을 만져보도록 하신다.(요한20:27, 21:9) 그리고 그분은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는 제자들 한 가운데 나타나시고는,(요한 20:19,26) 다시금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지신다.’(루가 24:31)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살아나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분의 인성은 생명과 신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모습 속에 깃든 인성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곧, 그리스도)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고린토 1서 15:42-49)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인성의 부활 가운데 첫 열매인 셈이다. 그것은 구약의 성취이기도 한데, 경전에 따르면 `“어찌 이 목숨을 지하(Sheol, 곧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시며 당신만 사모하는 이 몸을 어찌 썩게 버려 두시리이까?”(시편 16:10; 사도행전 2:25-36) 라고 쓰여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기대와 희망은 충족된다. “죽음아, 네가 퍼뜨린 염병은 어찌 되었느냐? 스올아! 네가 쏜 독침은 어찌 되었느냐?”(호세아 13:34)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 주시리라. 이것은 주께서 하신 약속이다. 그 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 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주님이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이사야 25:8-9)

어서 주께로 돌아 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 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신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 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호세아 6: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주가 하는 말이다.’(에제키엘 37:12-14)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어제 나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오늘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는다.

어제 나는 그분과 함께 죽었고, 오늘 그분과 함께 살아난다.

어제 나는 그분과 함께 묻혔고, 오늘 그분과 함께 일어나게 된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께 우리 자신들을 … 하느님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며 가장 적절한 것인 우리 자신들을 바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셨으니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되자.

우리를 위해 그분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그분을 위해 우리도 하느님처럼 되자.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분은 더 나쁜 것을 떠맡으셨다.

우리가 부요(富饒)하게 되도록 그분은 가난해지셨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되찾도록 그분은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우리가 높아지도록 그분은 내려 오셨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승리하도록 그분은 유혹을 받으셨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그분을 모욕을 받으셨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분은 죽으셨다.

죄 때문에 타락하여 버려진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려고 그분은 승천하셨다.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속죄물(Ransom)과 화해(Reconciliation)의 상징으로 바치신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자.

살기 위해 우리는 육화하신 하느님, 곧 죽음을 당하신 하느님이 필요했다. 깨끗이 씻음받으려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음에 처해졌다.

그분과 함께 죽음을 당했으므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으므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화롭게 되었다.

성혈(聖血 Blood) 몇 방울이 모든 창조세계를 새롭게 다시 만든다!

신학자 성 그레고리의 부활절 식사(式辭 Orations) 가운데서

 

 

승천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죽음에서 부활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뒤에 그분은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마르코 16:19; 또한 루가 24:50과 사도행전 1:9-11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인간) 구원을 위해 그분이 이 땅에서 행하신 선교활동의 마지막 행위이다.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려고 ‘하늘에서 내려’ 오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다음 상처입고 영광을 받으신 인성을 영원히 지니신 채 성부께로 돌아가신다.(이를테면 요함 17장을 보라.)

 

승천의 교리적 의미는 인간 본성의 영화(glorification), 곧 하느님과 인간의 재결합(reunion)이다. 그것은 실로 결코 다함이 없는 신성의 깊이 속으로 인간이 뚫고 들어감을 뜻한다.

 

우리는 이미 ‘천국’(the heavens)이, 교회의 한 성인께서 부르신 것처럼 창조되지 않고 비(非)물질적이며 신적인 ‘하느님의 영역’(realm of God)에 대해 성경 속에서 싱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보았다. 성 베드로께서 그리스도교의 첫 설교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사도행전 2:33),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이와같은 것을 뜻한다. 곧, 인간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인데,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은 맨처음 창조때 인간에게 주어진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완전한 일치를 이룸을 가리킨다.(에페소 1-2장을 보라.)

 

성 사도 베드로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창조되었다.(베드로 2서 1:4) 그리스도의 승천이 인성을 위해 완성한 것은 바로 이 ‘신성에 참여함’ 인데, 그것이 정교 신학에서는 ‘테오시스’(theosis, 문자적으로는 신화[deification] 또는 신성화[divinization]를 뜻한다.) 라고 불려진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라는 상징적 표현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된 우주의 어디엔 가에 육신적인(physical) 예수께서 물질로 된(material) 왕좌(王座)에 앉아 계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로 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대사제들이 자기 자신들과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지성소’(holy of holies)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이, 한 분이시고 영원하시며 완전하신 대사제(High Priest)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위해 단 한번뿐인 영원하며 완전한 희생제사로서 스스로를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 바치신다.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뿐인 영원하고 완전한 지성소, 곧 바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 속으로 (단번에) 들어가신다.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 가신 위대한 대사제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히브리 4:14)

 

우리에게는 이렇게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가 필요합니다. 다른 대사제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한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히브리 7:26-27)

 

위에서 말한 요점을 말하면 우리는 하늘에서 전능하신 이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대사제를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 성전의 일을 맡아 보시는데 그 성전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참다운 성막입니다.(히브리 8:1-2)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하늘의 참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 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그 하늘의 성소로 들어 가신 것입니다.(히브리 9:2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당신의 원들이 당신의 발 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히브리 10:12-13; 시편 110:1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사람이 본래 창조되었을 때의 목적이랄 수 있는 신적인 영화로움(divine glorification) 속으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들어가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일(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영광을 받으신 것)은 육신을 취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바치심으로써 스스로를 비우신 성자께서 (하느님에 의해) 들어 올려지심으로 가능하게 된다.

 

 

심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11)

 

천사들의 이 말이 주님의 승천을 지켜보는 사도들에게 들려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속에 다시 오실 터인데, 그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히브리 9:28)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 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4:16-17, 정교회의 장례식에서 읽는 사도경 봉독문)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구약에서 예언되고 예수님 자신께서 예고하셨던 ‘주님의 날’, 곧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예를 들면 다니엘 7장; 마태오 24장) 세상의 마지막이 되는 정확한 시간은 예수님에 의해서조차도 예언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깨어있어 선한 일을 함으로써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할 것이다.

 

진리이시며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 그 자체가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이런 뜻에서 모든 사람들과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더 정확하게는 자신들이 궁극적(窮極的)으로 심판 받게될 그같은 실재(그리스도와 그분의 활동들)의 충만한 현존 속에서 이미 살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으니, 무지(無知)와 죄에 대한 변명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요한 9:39)

 

이런 점에서, 마지막 심판 때에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마태오 25:41; 묵시록 20장) 이같은 경우를 당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판은 올바르다”(요한 5:30) 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에제키엘 8:22) 하고 되물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디모테오 1서 2:4) 신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도록 하시려고 당신의 능력으로써 온갖 일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 이제 모든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다. 만일 누군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눔으로써 주어지는 생명의 선물을 거절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저 이 거절을 존중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창조물들의 자유를 지켜주실 수 있을 따름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토록 바란다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악마들이나 천사들과 함께’ 살도록 허락하신다. 이런 일에서조차도 그분은 사랑이 많으시며 공정하시다. 왜냐하면 만일 “태워버리는 불”(히브리 12:29)이시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기쁘게 하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빛”(디모테오 1서 6:16) 이신 하느님의 현존(現存)이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디모테오 2서 4:8) 지 않는 이들의 마음 속에 미움과 고통(anguish)을 만들어 낸다면, 당신의 창조물들을 몽땅 다 때려 부수시든지 아니면 당신 자신을 파괴하시든지 하는 것 말고는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계속 존재하실 것이고 당신의 창조물들도 존재케 하실 것이다. 그분은 또한 영원히 당신의 얼굴(His Face)을 숨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지옥의 교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지는 않으시면서 심술궂기만한 방법에 의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괴롭히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벌을 받고 또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시고’, 그러므로써 그들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뜻도 아니다.(왜냐하면 사실상, 만일에 사람이 하느님을 미워한다면 그는 [하느님과 사람의] 분리를 좋아할 것이지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리어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모든 이들, 곧 성인(聖人)들과 죄인들이 똑같이 영원토록 존재하게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모든 이들은 죽음에서 일어나 영원한 생명에 들게 된다. “그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 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요한 5:29) 마지막에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God will be all and in all [고린토 1서 15:28])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과 하느님의 현존이 천국(paradise)일 것이다. 하느님을 미워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계시는 것이 지옥일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교부들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의인들을 위해 한 빛이 나타나셨으니 그 빛을 받는 이는 큰 기쁨을 맛본다. 그리고 의인의 빛은 영원하다. …

한 빛만은 피하도록 합시다. 그것은 슬픔의 불꽃을 내는 샘이므로 …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땅에 주신 정화(淨化)하는 불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불(Fire)이라고 불려진다. 이 불은 물질적이고 사악한 성질의 것들은 어느 것이나 없애버린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이것에 불을 붙이길 바라신다. …

나는 또한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앙갚음하는 불을 알고 있다 … 그분은 악마와 그의 졸개들을 위해 준비된 것, 곧 주님의 얼굴(Face of the Lord)로부터 나오면서 영원토록 사악한 이들을 괴롭히는 끌 수 없는 불을 모든 죄인들에게 쏟아 부으신다. 왜냐하면 비록 누군가가 벌을 내리시는 분에게나 어울릴 생각, 곧 그같은 불이 조금 더 자비로왔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다고 할찌라도, 이 모든 것은 파괴하는 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신학자 성 그레고리)

… 지옥(Gehenna)에 떨어진 이들은 사랑의 매로써 벌을 받을 것이다. 이런 사랑의 고통은 그 얼마나 쓰고 비참할 것인가! 자신이 사랑을 거슬러 죄를 지었음을 아는 이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고통을 만들어 낸 이들에게보다도 더 큰 고통이 다가온다. 사랑을 거슬러 죄를 지은 마음을 붙잡는 슬픔은 그 어떤 아픔보다도 더 가슴을 찌른다. 지옥에 있는 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빼앗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반대로 사랑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곧 꾸지람을 받는 이에게는 고통으로서 그리고 축복을 받은 이에게는 기쁨으로서 작용(作俑)한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따라서 인간의 마지막 심판과 영원한 운명은 오로지 인간이 하느님과 자신의 형제들을 사랑하는가 안 하는가에 달려있다. 달리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 또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다. 또는 인간이 사랑이며 빛 자체이신 분을 사랑하느냐 안 하는냐에 달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인간이 하느님 (창조세계와 모든 것들, 그리고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이’ 안에서도 드러나신 하느님) 자신인 생명을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지막 심판의 조건들(conditions)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스스로 그것(심판의 조건, 상태)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 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 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 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다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마태오 25:31-46; 금육[禁肉]주일에 읽는 복음경 봉독문)

 

심판하실 분은 성부 하느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한을 받으셨다.(요한 5:27) 따라서 인간과 세상은 ‘구름 위에 앉아 계시는’ 하느님에 의해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사람이신 분, 곧 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겪으시고 마침내 승리하신 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세상은 당신 자신이 배고프셨고 목말랐으며, 나그네였고 헐벗었으며, 감옥에 갇히셨고 상처를 입으셨으나 모든 이들의 구원이신 분에 의해 심판받는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으로서 마땅히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을 하실 수 있는 권위를 받으셨는데, 그것은 그분 홀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이 겪는 비극의 심연(深淵)을 아시는 성부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종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궁지에 몰리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는 유다인들이 누리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까지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대하시니 말입니다. 율법을 가지지 못한 채 죄를 지은 사람들은 율법과는 관계없이 망할 것이고 율법을 가지고도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로마서 2:6-13)

 

 

하느님의 나라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예수님은 다윗왕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들이시며, 그분에 대해서는 이미 천사에 의해 예언되었다.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32-33)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영원한 왕권과 주권(主權)을 받으셨다. 그분은 성부 하느님과 함께 ‘왕 중의 왕이요 주님 종의 주님이시라는 칭호를 가진 분이 되셨다.(신명기 10:17; 다니엘 2:47; 묵시록 19:16)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의 임금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시려고 오셨다. 그분의 첫 공적(公的)인 말씀은 그분에 앞서서 왔던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마태오 3:2, 4:17)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당신의 전(全) 생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말씀하셨다. 산상수훈(山上垂訓)과 같은 설교들과 많은 비유들 속에서 그분은 영원한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 간다.…

(마태오 5-7장)

 

겨자씨, 누룩, 값진 진주, 잃어버린 동전, 밭에 묻혀 있는 보물, 고기잡는 그물, 혼인잔치, (하느님) 아버지의 집, 포도원 …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들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만찬의 밤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숨김없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온갖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 견디어 왔으니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권을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주겠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루가 22:28-30; 성 대 목요일 밤에 읽는 봉독문)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 18:36)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 놀림을 받으실 때 이 사실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말씀하시며, 겸손한 가운데 당신의 참다운 신적 왕권을 드러내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지막 때에 능력과 함께 올 것인데, 그 때에 주님께서는 모든 창조세계를 채우시면서 참으로 ‘전부가 되실’(all, and in all 골로사이 3:11) 것이다. 일반적인 정교의 가르침에서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려지는 교회는 이미 신비하게 이런 경험을 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오직 한 분이신 왕과 주님으로서 인정되고, 영광을 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신다. 그리고 교회의 성인들께서 하느님의 나라와 같다고 보신 그분의 성령은 완전한 은총과 능력을 지니신채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세계에 주어졌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신적인 실재(Divine Reality)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현실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서 14:17) 영적이고 신적인 실재인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신앙의 성사적(聖事的)인 신비들 속에서 경축되며,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경전들과 공의회들, 교회법들, 성인들 속에서 증언된다. 그것은 마지막 때에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마지막인 사실이 될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속에 오셔서 성령으로써 모든 것을 채우실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all and in all 고린토 1서 15:28) 것이다.

 

 

성령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께로 좇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성령은 성부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Lord)이라는 호칭을 갖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신성을 지니셨고, 언제나 성부, 성자와 함께 존재하신다. 또한 성삼위의 일치 속에서 영원히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령이 계시지 않았다면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성령은 창조 이전에 계신다. 그분은 성자께서 그러시는 것처럼 끝없이 영원한 발현(發現 procession) 속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신다. 그분(성령)은 신적으로 즉각적이면서 영원한 운동 속에서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오신다.’(요한 15:26)

 

정교의 교리에 따르면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근원이신 것처럼 성령의 근원이시고 영원한 원천이시다. 그러나 교회는 마찬가지로 성부께서 성령과 성자를 소유하시고 내놓으시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그것은 성자는 ‘낳으시고’(born) 성령은 ‘발현하는’(proceeding) 것 사이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하느님께 영감받고 성삼위적인 삶을 참으로 경험한 성인들께서는 성령의 발현과 성자의 출생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셨다. 우리로서는 둘(성자와 성령) 사이의 다른 점이 성자의 신적인 인격, 행동들과 성부와 관계된 성령 사이의 차이점에 놓여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서로(성자와 성령)와 세상에 대한 관계의 차이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발현’(procession)과 ‘출산’(generation)을 포함하여 하느님과 신성에 대한 모든 말들과 개념들은 그것(말, 개념)들이 표현하는 실제적인 신적 현실을 신비롭게 경험하기 이전에는 너무 강하게 주장되어서는 안된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려고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감지(感知)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삼위일체적인 실존의 본질은 창조된 정신과 입술로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그리고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런 말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실재(Reality)에게는 그같은 말들이 적합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또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회는 성령께서 성부 ‘그리고 성자’(filioque)로부터 나오신다고 덧붙임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신앙의 신조에서 (정교회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는데, 그같은 교리적 덧붙임은 성경적이 아니며 하느님에 대한 정교의 이상(vision)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정교회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령의 신성을 확증하고 성부, 성자와 함께 그분(성령)께 예배하며 영광을 돌려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정교회는 정교의 전통 속에서 신(Deity, Godhead)이라고 불려지는 신적 실재가 성삼위(Holy Trinity) 이심을 증언한다.(이 책의 3장 부분을 보라.)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와 함께 영원히 계신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모든 활동에서 성령은 필수적으로 (함께) 일하신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창세기 1:2) 모든 생물들과 특별히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사람을 위한 ‘생명의 숨’(breath of life)이 바로 이 영이시다.(창세기 1:30; 2:7) 일반적으로 말해서 히브리어로 영은 주님(Yahweh)의 ‘숨’(breath) 또는 ‘바람’(wind)이라고 불려진다. 만물을 살아있게 하시는 분이 바로 이 분(성령)이신데, 그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우주가 존재하며 살아있도록 떠받치고 유지하신다.(이를테면 시편 104:29; 욥기 33:4을 보라.)

 

성령께서는 또한 성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영감을 불어 넣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사제들과 왕들에게 기름을 발라 임명하신 분이시고, ‘때가 찼을 때’ 나자렛 예수께 ‘내려와 머무르시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Messiah)는 만드셔 세상에 그분은 알리신 바로 그 영이시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메시야로서 처음 나타내셨을 때,(epiphany,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나타남’, ‘명시’[明示], ‘시위’[示威] 등을 뜻한다.)성령께서는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 분 위에 내려와 머무르시면서 드러나셨다.(요한 1:32; 루가 3:22. 또한 마태오 3:16과 마르코 1:9을 보라.) 그런데 여기서와 경전들의 다른 부분들에서 뿐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심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지적할 점이 하나 있다. 곧, ‘~처럼’, ‘~같이’(as, like)라는 단어들이 경전에 기록된 사건들을 부정확하게 ‘물리적, 물질적’(physical)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점인데, 그런 경우 성경 자체는 사실상 매우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써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뒤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는데, 적접적으로 당신 자신에게 관계된 메시야에 대해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바를 곧바로 말씀하신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이사야 61:1; 루가 4:18)

 

전(全)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충만(充滿)’ 하셨으며, 성령의 능력으로써 당신의 메시야적인 지위에 따르는 온갖 이적(異蹟)들을 행하시고, 악마를 물리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말씀을 전하셨다.(루가 4:11)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조차도 “성령을 통하여”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히브리 9:14) 그리고 예수님과 다른 모든 이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도 바로 이와 똑같은 성령을 통해서이다.(에제키엘 37:1-4)

 

오순절에 성령께서는,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불의 혀’와 같은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 위에 내려 오신다.(사도행전 2:1-4) 우리는 다시 한 번 ‘~처럼’, ‘~같이’ 라는 표현이 쓰임을 보게된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심은 이 땅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선교가 마지막으로 완성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메시야이신 임금의 때에 하느님의 영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라는 것은 구약에 있는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요엘 2:28; 사도행전 1:14) 그것은 바로 완전한 자비와 평화를 위한 마지막이면서 영원한 계약이 이루어지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에제키엘 34:37; 예레미야 31-33장; 이사야 11:42; 44, 61)

 

그리스도 교회는 성령에 의해 산다. 성령만이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보증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사람과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그 목적을 완성할 수가 있다. 창조와 구원과 마지막 영화(榮化) 속에서 인간과 세상을 향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든 행동들은 성부로부터, 성자(말씀)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같은 성자를 통하여, 같은 성부께 대해 이루어진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다.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서 8:11)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3; 또한 요한 14:25; 요한 15:26을 보라.)

 

성령은 신적이 아들됨(divine sonship)의 영이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서 8:14; 또한 갈라디아 4:6)

 

성령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인격적인 현존이며, 하느님 나라의 봉인(封印)이요 보증이고, 하느님께서 사람 속에 신적으로 거하시는 능력이다.

 

여러분 자신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이 아닙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써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 자신에게서 났다고는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격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린토 2서 3:2-6)

여러분은 자신이 하

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고린토 1서 3:16; 또한 로마서 6:19)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에페소 2:18-22; 또한 베드로 1서 2:4-9)

 

성령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온갖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그분의 신적인 본성과 생명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도 그분이 하신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로마서 5:5)이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 가야 합니다.(갈라디아 5:22-25; 6:8)

 

 

교회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

교회(church)라는 말은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하려고 부름받은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세상과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하려고 선택되어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경전들 속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로마서 12:1; 고린토 1서 10:12; 골로사이 1장)과 그리스도의 신부(에페소 5장; 묵시록 21장)라고 불려진다. 그것(교회)은 또한 살아있는 하느님의 집(Temple)에 비유된다.(에페소 2장; 베드로 1서 2장) 그리고 “하느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디모테오 1서 3:15)이라고 불려진다.

 

하나인 교회

교회는 하나인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와 성령도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인 교회만이 있을 수 있고, 많은 교회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같은 교회의 통일성(unity)이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인 교회는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교의 교리에 따르면 교회는 나누이지 않는다. 곧, 사람은 교회 안에 있거나 또는 교회 밖에 있을 수는 있으나, 교회를 나눌 수는 없다.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의 통일성은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인간의 자유로운 통일성이다. 그같은 통일성은 어떤 인간적인 권위나 법적인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확립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한 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이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한, 그들은 하느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정교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인 정교회 안에는 하느님의 교회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완전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과 오로지 죄와 그릇된 인간의 선택들(이단들)에 의해서만 인간은 이 (교회의) 통일성 밖으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정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정교인들은 주장하기를, 만일 사람들이 받아 들여서 따른다면 하느님과 그들의 완전한 일치(unity)를 가로막게 되고, 그럼으로써 교회의 진정한 일치를 깨뜨리게 될 어떤 형식적인 장애물들(서로 다른 집단들로 갈라지게 하는)이 있다는 것이다.(이를테면 로마 카톨릭의 교황제도 같은 것.)

 

교회의 일치 속에서 우리는 창조된 목적에 맞는 존재가 되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나눔으로써 영원히 거룩한 삶으로 자라갈 수가 있다. 교회의 일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깨지지 않으며, 단지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교회의 일치는 복되신 성삼위의 일치이며, 하느님과 함께 사는 모든 이들(곧, 거룩한 천사들과 죽은 의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성령의 능력에 따라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일치이다.

 

거룩한 교회

하느님께서 거룩하시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의 거룩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며 사는 정도만큼 거룩하다.

 

이 땅위의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다. 죄와 잘못 때문에, 신적인 일치로부터 분리되는 것처럼 신적인 거룩함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 땅위에 있는 교회의 구성원들과 제도들은 그 자체만으로 거룩한 교회(전체)와 동일시될 수가 없다.

 

이 땅위에 있는 교회의 신앙과 삶은, 교회의 본질적인 일치를 유지하면서 그(것)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 때문에 분명히 ‘거룩하다’고 확증될 수 있는 교리들과 성사들, 경전들, 예배들, 성인들 속에서 표현된다.

 

공번된 교회

교회는 또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 대한 그것(교회)의 관계 때문에 공번되다. ‘공번된’(catholic)이라는 말은 ‘꽉 찬’, ‘완전한’, ‘전체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만이 홀로 충만하고(full) 완전한(total) 실재(reality)이시다. 하느님 안에서만 모자람이 없다.

 

때때로 교회의 ‘공번됨’(catholicity)은 시간과 공간 전체에 미치는 교회의 ‘보편성’(universality)으로 이해된다. 교회가 ‘보편적’(universal) 이라는 것은 (왜냐하면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있기 때문에.) 사실이지만, ‘보편적’ 이라는 말이 교회를 정의하기 위해 쓰일 때 ‘보편성’은 ‘공번된’ 이라는 용어의 진정한 뜻이 못된다.(일찌기 2세기의 첫 수십년 동안) 본래 교회를 정의하기 위해 쓰였던 ‘공번된’(catholic) 이라는 말은 양(quantity) 보다도 질(quality)에 대한 정의였다. 교회가 ‘공번되다’ 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가(how)를 정의한다는 뜻이다. 곧, 충만하고 완전하며, 모든 것을 표함하고(all-embracing) 모자람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교회가 세계에 퍼지기 전에조차 교회는 공번된 것으로 정의되었다. 사도들이 세운 원래의 예루살렘 교회나 안티오키아, 에페소, 고린토, 로마의 초기 도시 교회들(city-churches)은 공번된 교회였다. 이 교회들은 오늘날 각각의 그리고 모든 정교회처럼 공번된 교회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가 되는 데 근본적으로 모자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 자신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각 교회 안에 완전히 계시되시고 현존하시며, 교회의 사도적인 가르침과 사목(ministry)과 성사들을 통해 지역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러므로써 교회가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참여하기 위해 더 이상 그 무엇도 필요치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번되다고 믿는 것은 하느님의 충만함이 교회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세상에 주시는 ‘풍부한 생명’ 가운데 아무 것도 교회에 부족함이 없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요한 10:10) 달리 말해서 그것은 교회가 정말로,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임을 정확히 고백하는 것이다.(에페소 1:23; 또한 골로사이 2:10)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

‘사도로부터 이어온’(apostolic) 이라는 말은 사명(mission)을 가진 것, 곧 어떤 과제를 완수하려고 ‘보내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모두 ‘사도적(apostolic)인데, 그 까닭은 둘 다 성부에 의해 세상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 의해 어떻게 보내졌으며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어떻게 보내졌는가 하는 것은 경전 속의 수많은 경우들을 통해 되풀이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신앙의 대사제(apostle)" 이시라는 것이 명백히 기록되어져 왔다.(히브리 3:1)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 자신은 당신의 사도들(apostles)을 뽑아 보내셨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1-22) 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도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그리스도 교회의 첫 토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도적이라고 불려진다. 첫째, 그것(교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와 성령 위에,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채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진 사도들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지상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교회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이 세상에서 그 분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뜻과 일들을 행하도록 하느님에 의해 보내지기 때문이다.

 

정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 것처럼 교회를 믿는다. 교회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백하는 신앙의 신조 가운데 한 부분을 이룬다. 교회 자체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적인 실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된다. 곧,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신적인 공동체인 것이다.(마태오 16:18)

 

교회와 교회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타락하고 죄많은 세상의 한 가운데에 있는 거룩하고, 신비스러우며, 성사(聖事)적이고 영적인 실재인 교회가 없이는 하느님과 충만하고 완전한 친교를 이룰 수가 없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시는 선물이다. 그것(교회)은 구원의 선물이요, 지식과 조명(照明), 죄의 용서, 어둠과 죽음에 대한 승리의 선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친교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느님 편에서 주저함이 없이 단번에 모두 주어진다. 그것(교회)은 세상 끝날까지 정복할 수 없으며 무너뜨릴 수 없는 채로 영원히 남아있다. 사람은 죄를 짓거나 교회를 거슬러서 싸울 수 있고, 신자들은 잘못된 길에 빠져서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가 있지만,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인 교회 자체는 영원히 남아 있다.(디모테오 1서 3:15)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기르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서 남편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소 1:22-23; 2:18-22; 5:25-27, 29-32)

 

 

성사들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열려진다.(마태오 28:19, 정교회의 세례성사에서 읽는 복음경 봉독문)

 

세례(baptism)라는 말은 물 속에 ‘잠김’ 또는 ‘가라앉음’을 뜻한다. 세례는 구약에서 실행되었고, 더 나아가서 일부 이교(異敎)의 종교들 속에서조차도 죽음과 재생의 표시로서 실천되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생명과 회개(글자대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옴을 준비하는 바램과 행동들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다.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 사람마다에게 주어진 부활절의 개인적인 경험이며, 죽어서 ‘새로 나게 될’ 실제적인 가능성이다.(요한 3: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로마서 6:3-5; 정교회의 세례성사에서 읽는 사도경 봉독문; 또한 골로사이 2:12; 3:1을 보라.)

 

세례의 경험은 근본적인 그리스도교적 경험이며, 모든 그리스도교적 삶을 위한 제 1의 조건이다. 교회 안의 모든 것은 세례에 그 기원(origin)을 두고 있고 세례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생겨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에 뒤이어 ‘성령의 선물의 날인’(the seal of the gift of the Holy Spirit)이 따르는데, 이것은 오순절에 대한 인간의 개인적 경험으로서 ‘견진의 신비’(성사) 라고 한다. 그리고 이같은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신비들의 완성과 성취는 교회의 성찬예배를 통해 하느님과 나누는 거룩한 친교의 신비 속에서 이루어진다.

 

세례와 견진을 통해 정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진 사람들만이 정교회 안에서 거룩한 성찬을 바치고 또 받게 된다. 거룩한 성찬을 바로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이다. 그 자체로서 그것은 단지 각각의 신자들을 위한 ‘성화(sanctification)의 수단’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각 개인들이 자기 자신의 사적(私的)인 양심과 믿음과 실천들에 따라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도리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같은 믿음과 같은 희망과 같은 세례를 가짐으로써 모든 것을 품어 안게 되는 거룩한 친교의 행위이다. 곧, 그것(성찬)은 한 하느님과 한 주님, 한 그리스도와 한 성령께 예배하면서 한 마음, 한 정신, 한 입으로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행위이다.

 

정교회 안에서 거룩한 친교에 참여하는 것은 정교의 신앙을 지닌 모든 이들(산 자와 죽은 자 모두)과 함께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며, 정교의 모든 측면들(역사, 공의회들, 종교법들, 교의[dogma]들, 훈련[방법]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정교의 전통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해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것’ 이고, 정교회의 하루하루 삶에 대한 책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정교회는 어떤 교회이고 이 땅 한 가운데서 정교회는 무엇을 나타내는가에 대해 기꺼이 심판 받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정교회의 ‘거룩한 친교’ 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써서 교회의 삶에 따라 살아간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성직자들과 신실(信實)한 친교를 나눔으로써 교회의 가르침과 (영적인) 훈련에 충실하게 되는데, 성직자들은 교회(Body)의 각 구성원들로서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들에 대해 성사적으로(sacramentally) 책임을 지며, 어느 곳, 어느 때든지 교회의 정체성과 연속성에 대한 성사적 상징들(images)이다. 누군가 혼인하여 가족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영원하며, 이 결합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혼(matrimony)의 성사적 신비 속엣 축성되어, 영원하며 거룩한 것으로 된다. 사람이 병이 들어 아프게 되면, ‘교회의 원로들(priests)을 청하여 기도해 주도록’ 요청하며, 원로들은 성유성사(holy unction)의 신비 속에서 아픈 이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준다.(야고보 5:14) 누군가 죄를 짓거나 교회의 삶에서 벗어나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는 고백성사를 통해 회개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아 다시 거룩한 (교회) 공동체의 ‘거룩한 친교’ 속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누군가 죽게되면, 그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 자매들의 기도와 중보(intercessions)로써 교회의 한 가운데에 계시는 창조주께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삶은 하느님 자신 속에 있는 충만하고 새로운 삶인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이루어지며, 교회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신비스런 현존으로서 인간과 함께 있다.(제 2권 예배를 보라.)

 

그러므로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하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고백이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로사이 3:1-4)

 

따라서 교회 안에서, (우리의) 삶 전부는 세례로 말미암은 새로운 탄생 속에서 시작하는 삶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진 삶’ 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신비들은 바로 이 새로운 삶 속에 담겨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것(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은 세례의 성수(聖水)로부터 흘러나온다.

 

 

영원한 생명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정교회는 단지 영혼의 불멸만을 믿거나, 오직 영적인 실재만이 선하여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지는 않는다. 경전들의 가르침을 따라 정교인들은 인간의 몸과 물질로 이루어진(material and physical) 온갖 피조물이 선함을 믿는다. 따라서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앙 속에서 정교회는 구원을 위한 어떤 ‘다른 세계’(other world)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하느님에 의해 다시 살려져서 영광스럽게 되어 하느님 자신의 신적인 현존으로 가득 찬 바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기대하고 있다.

 

세상 끝날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온전히 드러내실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 자신으로써 가득 채우실 것이다.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천국(paradise)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미워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지옥(hell)일 것이다. 그리고 의인들과 함께 모든 창조세계는 그분께서 오심을 기뻐하며 반길 것이다.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이사야 35:1)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이사야 65:17-18)

 

다가올 것들에 대해 예언자들과 그리스도교의 사도들이 보았던 것들은 똑같다.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 다시금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묵시록 21:1-5)

 

하느님의 나라가 모든 창조물들을 채우게 되면, 온갖 것들은 새로워질 것이다. 이 세상은 다시금 본래 창조되었던 모습을 되찾은 낙원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우주의 마지막 운명에 관한 정교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전부 다 파괴될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제 2의 창조행위를 통하여 ‘무로부터’(out of nothing) 모든 것을 새로이 창조하실 것이라는 주장이 이따금 있기도 하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성 베드로의 둘째 편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래와 같은 본문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베드로 2서 3:10)

 

그러나 성경은 ‘제 2의 창조’에 대하여 전혀 말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고 성경이 계속해서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정교 전통은 위의 성경본문과 같은 것을 하느님에 의한 창조세계의 실제적인 절멸(絶滅 annihilation)을 가르치는 것으로는 전혀 해석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본문들은, 심하게는 의인들을 포함해서 창조세계가 견뎌야만 하는 대(大) 재난(catastrophe)을 은유적으로(metaphorically) 그리고 있다고 이해하며, 그것(대재난)은 창조세계가 정화되고 정결케 되어 완전해짐으로써 구원받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정교전통은 사악한(ungodly) 이들이 겪을 ‘영원한 불’, 곧 파괴된 그들의 존재가 겪게될 영원한 상태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정교는 ‘사악한 이들을 파괴하는 불의 심판’을, 온 세상을 창조하셔서 그것이 ‘참 좋다’(very good) 고 하신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이 세상을 경멸(輕蔑)하심으로써 창조세계가 몽땅 다 파괴될 운명에 놓여있음을 뜻하는 것으로는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창세기 1:31; 또한 고린토 1서 3:13-15; 히브리 12:25-29; 이사야 66장; 묵시록 20-22장)

 

 

 

3장 성 삼위일체

 

성 삼위일체

성 삼위일체의 교리는 단지 사람들이 ‘믿어야만 하는 신앙의 조항’(條項)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교회가 훌륭한 신자들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교의(dogma)가 아니다. 성 삼위일체의 교리는 학자들의 발명품이 아니며, 지적(知的)인 사색과 철학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니다.

 

성 삼위일체의 교리는 인간이 하느님을 가장 깊이 있게 경험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이 교리는 신앙 속에서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의 참되고도 생생한 지식에 의해 생겨난다.

 

아래의 설명들을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교회의 성인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신 것 가운데 일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말과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과 이런 말과 개념들의 뒤에 있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실재를 아는 것은 서로 별개(別個)의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한 모든 말과 개념을 넘어서서, 그분과 생생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소 2:18-22)

 

계시된 삼위일체

구약에서 우리는 당신의 말씀과 영을 통해 세상에 대한 행동을 취하시는, 한 분이신 주님(Yahweh)이요 하느님이신 분을 보게 된다. 신약에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다.’(요한 1:14) 하느님의 외아들께서 나자렛의 예수로서 사람이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그리스도로 만드는 성령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신다.(사도행전 2:17)

 

우리는 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또는 말씀)과 성령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피해서는 성경도 교회의 역사로 읽을 수가 없다. 서로를 향해서 그리고 인간과 이 세상을 향해서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과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에 대해 변함없는 확증을 갖지 못하는 한, (우리는) 신약의 기록과 정교회의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들(신약의 기록과 정교회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잘못된 삼위일체 교리들

하느님에 대해서 교회가 대답해야 할 주된 물음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물음이다. 정교 전통에 따라서 물리쳐야만 하는 잘못된 교리들이 많이 있다.

 

첫째로 잘못된 교리는, 성부만이 홀로 하느님이시고 성자와 성신은 피조물들로서 천사와 인간과 세상처럼 ‘무에서’(from nothing)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회는 대답하기를,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들이 아니며 창조되지 않았고 성부와 함께 거룩하시며, 존재하는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신적인 행동을 할 때 성부와 함께 행위하신다고 말한다.

 

또 다른 잘못된 교리는, 하느님 자신은 한 분으로서 단지 서로 다른 형태로 세상에 나타나시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성부로서, 그 때에는 성자로서, 그리고 이제 다시 성령으로서 나타나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교회는 다시 한 번 더 대답하기는, 성자와 말씀은 성령께서 그러신 것처럼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요한 1:2) 고 말하고, 그러면서도 세 분은 영원히 서로 다르시다(distinct)고 한다. 성자는 ‘하느님의’(of God) 아들이시고, 성령은 ‘하느님의’(of God) 영이시다. 성자와 성령은 단지 하느님의 어떤 측면들(aspects)이 아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들의 삶과 실존(existence)이 없이 그저 (하느님의) 모습들(aspects)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성부께 기도하시고 그분께 복종하면서 행동하실 때, 그 모든 것이 사실상 그 어떤 실재(reality)가 없는 단순한 환영(幻影 illusion)이며, 어떤 이유나 진리가 전혀 없이 세상 앞에서 행하는 일종의 신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것인가?

 

셋째로 잘못된 교리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갖는 관계들을 가리키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생각과 말씀은 성자라고 불려지고, 반면에 하느님의 생명과 행동은 성령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사실상 (참된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아들과 하느님의 영이라는 ‘실재들’은 없다. 둘 다(아들과 영) 단순한 하느님의 양상들(aspects)을 가리키는 은유들(metaphors)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교리에서는 성자와 성령께서 자기들 자신의 실존과 생명을 전혀 갖지 못한다. 그럴 경우 그들(성자와 성령)은 실재적이 아니며(not real), 그저 환영들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잘못된 교리는 성부가 한 하느님이시고, 성자는 다른 하느님이시며, 성령은 또 다른 (제 3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세 명의 하느님들’(three gods)은 있을 수 없으며, 창조되거나 만들어진 ‘신들’(gods)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교회는 말한다. 더군다나 성부는 ‘더 높고’(higher) 다른 신들(성자와 성령)은 ‘조금 낮은’(lower) ‘하느님들'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 하느님 이상으로(다른 하느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나 ‘신성의 등급’(degrees of divinity) 따위는 모두 모순(矛盾 contradictions)이며, 신적인 계시나 논리적인 사고 어떤 곳에 의해서도 옹호(지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계시지만 (그분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세 분의 하느님으로서 완벽하게 결합되어 계시며, 그러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잃고 하나로 융합(融合)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교회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시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지켜 나가는가?

 

한 하느님, 한 아버지(성부)

무엇보다도 먼저,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Father)께서 계시기 때문에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계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고 교회가 겪은 가장 깊은 경험이다.

성경에서는 ‘하느님’(God)이라는 말이 거의 예외가 없이 주로 아버지(성부)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인다. 그래서 아들(성자)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시고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데, 둘 다 성부 자신의 존재에서 비롯된 초(超)시간적(timeless)이고 영원한 행위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성자와 성령은 둘 다 하느님과 하나이고, 결코 그분(성부)으로부터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적인 일치는 성부와, 성부 자신과 별개(別個)이며 그분(성부) 안에서 모두 함께 완전하게 결합되어 있는 성자와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한 하느님: 하나인 신적 본성과 존재

성부이신 분은 또한 성자와 성령이시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성부에게서 나신 성자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성부와 ‘한 본질’(of one essence)이시면서 하느님의 신적인 본성을 공유(共有)하신다.

 

따라서 성부께서 ‘형용할 수 없고, 무한하고, 보이지 않으시며, 영원하신 분’ 인 것처럼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찬예배식) 성자와 성령도 똑같이 그러하시다. 성부 하느님께 속하는 온갖 신성의 특징들(생명, 사랑, 지혜, 진리, 복되신, 거룩하심, 능력, 순결, 기쁨 등)은 마찬가지로 똑같이 성자와 성령께로 속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의 존재와 본성(nature), 본질(essence)과 실존(existence), 생명은 절대적으로 똑같다.

 

한 하느님: 하나인 신적 활동과 의지

성 삼위일체의 존재가 하나이기 때문에, 성부께서 무엇을 뜻하시든지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로 같은 뜻을 지니신다. 성부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성자와 성령도 또한 같은 일을 하신다. 성자와 성령의 의지나 활동이 아닌 성부 하느님의 의지나 활동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 자신 속에서, 영원히, 그리고 또한 창조와 계시, 육화와 구속, 성화와 영화 속에서 세상을 향한 삼위일체의 의지와 활동은 신적인 성부로부터, 신적인 성자를 통하여, 신적인 성령 안에서 하나이다. 하느님의 모든 활동은 곧 세 분(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이다. 성삼위 가운데 어느 한 분도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위격(person)들과 떨어진 채 행동하지 않으신다. 각자의 활동은 바로 (성삼위) 전체의 활동이며, (성삼위) 모두의 활동은 곧 각자의 활동이다. 그리고 신적인 활동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한 하느님: 하나인 신적 지식과 사랑

성삼위의 각 위격(person)은 다른 위격들과 함께 하나이기 때문에, 각 위격은 같은 진리를 알고 같은 사랑을 한다. 각자의 지식은 모두의 지식이고 각자의 사랑은 모두의 사랑이다.

성삼위의 각 위격은 이같은 절대적인 완전성과 지식과 사랑으로써 다른 위격을 알고 사랑하며, 각자가 상대방에 대해서 그리고 모두가 모두 안에서 알려지지 않은 지식은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없다. 따라서 만일 인간들이 피조물로서 지닌 지식이 완전한 일치 속에서 정신들(minds)을 결합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의 피조물다운 사랑이 나누인 것(the divided)을 한 마음과 한 영혼, 더 나아가서는 한 육체 속으로 함께 이끌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아는 분들(knowers)과 사랑하시는 분들(Lovers)이 영원하며 신적일 때 하나(oneness)인 것은 비교할 수 도 없으리만치 완전하며 절대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세 가지 신적 위격들

정교의 용어법(用語法)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가지 신적 위격들(persons)로 불려진다. 위격(person)은 여기서 단순히 실존과 생명의 주체로서 정의되며, 전통적인 교회의 용어로는 히포스타시스(hypostasis)에 해당된다.

 

실재의 존재, 본질 또는 본성으로서 ‘무엇인가?’(what?) 하는 물음에 대답하며, 실재의 위격(person)으로서 ‘어느 것인가?’(which one?) 또는 ‘누구인가?’(who?) 하는 물음에 대답한다. 따라서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 라고 물을 때 우리는, 하느님은 신성을 지니셨고(divine) 완전하시며 영원하시고 절대적 … 이시라고 대답하고, ‘하느님은 누구이신가?’(Who is God?)라고 물을 때는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라고 대답한다.

 

교회의 성인들께서는 하느님의 삼위께서 일체가 되시는 것(tri-unity of God)을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서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우리는 세 사람을 본다. ‘그들은 무엇인가?’ 하고 우리는 묻는다. ‘그들은 사람이다.’ 라고 우리는 대답한다. 그들 각자는 사람으로서 같은 인성을 지니고 있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되는 같은 인간적 본성(곧, 창조되었고 유한[有限]하고 물질적[physical]이며 이성적[rational]이고 … 따위)을 갖고 있다. 그들은 무엇(what)인가 하는 점에서 그 세 사람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who)인가 하는 점에서 그들은 셋이고, 그들 각자는 절대적으로 독특하며 서로 (상대방과) 다르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따라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 사람이 비록 각 사람이 똑같은 인간적 본성과 형태를 지니고서 언제나 변함없이 인간으로 있다할지라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여, 그것은 절대적인 완전함(곧, 형용할 수 없고 무한하고 보이지 않으시며 영원하신 분)으로서 정의되는 하느님이시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누구인가?’ 하고 묻고는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일체라고 대답한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라고 했을 때, 각자가 절대적으로 유일(唯一)하며 별개(別個)인 세 위격들이 있다. 비록 각자가 똑같은 신적 본성과 형태를 지닌 채 여전히 신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각각의 것은 다른 것(상대방)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엇(what)인가 하는 점에서는 하나이지만, 그들은 누구(who)인가 하는 점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셋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이면서 누구인가(곧, 창조되지 않고 신적인 위격들) 하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인 신적 삶과 지식, 사랑, 선, 능력, 의지, 행동 따위뿐 아니라 자신들의 영원하고 무한하며 크기와 형태를 가늠할 수 없고(sizeless and shapeless) 본질을 초월한 실존 속에서 나누이지 않은 채 완전하게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정교 전통에 따르면 신성을 지닌 분이 세 분이시라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이다. 곧, 똑같은 신적 완전함에 의해 살며 행동하시는 분이 셋이지만, 그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인격적(또는 위격적 personal) 차별성과 독특성에 따라 살면서 행동하신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같은 신성을 지니고서 각각 신적이시지만, 각자는 자기 자신의 신적인 방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창조되지 않은 신성이 세 개의 신적 주체들(subjects)을 지닌 것처럼 각각의 신적 행동은 세 개의 신적인 행위자들(actors)을 지닌다. 따라서 하느님의 모든 행동에는 세 개의 신적인 측면들(aspects)이 있게 되지만 그 행동은 똑같은 것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하느님과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곧, 형상[Image]과 말씀]과 그분의 한 성령을 알게 된다. 당신의 한 완전한 신적 생명을 지니신 살아계신 한 하느님이 계시며, 그분은 위격적으로(personally) 성자이시고 당신의 한 생명의 영과 함께 계신다. 하나의 신적인 진리를 지니신 참 하느님이 한 분 계시며, 그분은 위격적으로 성자이시고 한 진리의 영과 함께 계신다. 한 지혜와 사랑을 지니신 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이 한 분 계시며, 그분은 위격적으로 성자이시고 지혜와 사랑의 한 영과 함께 계신다. 이같은 보기는 무한히 계속 들 수 있다. 곧, 한 분이신 신적인 성부께서는 당신의 신성이 지닌 모든 면을 당신의 거룩한 외아들 (성자) 안에서 인격화하시며, 성자께서는 성부의 하나뿐인 거룩한 영에 의해 인(위)격적으로 활동케 된다. 우리는 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행동들 속에서 그분의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생생한 암시들(implications)을 보게될 것이다.

 

창조에 나타난 성 삼위일체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자(말씀)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계시며, 그것들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에 의해 존재케 하신다. 따라서 정교의 교리에 따르면 우주 자체는 말씀과 영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말씀은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계셔서 그것들이 존재케 하시며, 영은 모든 존재와 생명의 능력으로서 만물 안에 계신다.

 

이런 사실은 하느님의 특별한 창조물인 사람 안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졌고,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아들(곧, 창조되지 않고 절대적인 성부의 모습) 안에서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표현된 하느님의 유일한 모습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논리적’(logical) 이다. 곧, 그는 하느님의 로고스(Logos [곧, 성자와 말씀])에 참여하며, 그러므로써 그는 창조되지 않으신 성자께서 신성(神性)의 차원에서 그러시는 것처럼 피조물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본성을 알고, 사랑하고, 반영하면서 자유롭다.

 

사람은 또한 ‘영적’(spiritual)이다. 곧, 그는 하느님의 영이 거하시는 특별한 성전(temple)이다. 하느님의 생명의 숨이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 안에 불어넣어진다. 그러므로 피조물 가운데서 사람만이 하느님을 본받고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받도록 능력이 주어진다. 사람은 영원하신 성자를 닮고 신성을 반영하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다른 어떤 피조물들과도 달리 성령으로 말미암아 힘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한 성인께서는,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하느님의 영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인성을 완성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라야 비로소 그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을 닮아서 하느님의 참된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나 활동의 삼위일체적인 차원들을 보게 된다. 곧, 하느님의 말씀과 영이 사람과 세계에 들어가서, 그(것)들로 하여금 성부 (하느님)께서 바라셨던 그런 존재의 모습이고 또 그런 모습이 되도록 허락하신다.

 

구원 속의 성 삼위일체

인간이 자신의 창조된 독특성 속에서 스스로를 완성하지 못함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특별한 행동을 취하신다. 성부께서는 당신의 아들(말씀)과 당신의 영을 다른 임무를 지워서 보내신다. 말씀과 영은 구약의 성인들에게 오셔서 성부를 알게 하셨다. 말씀은 영으로 감동을 받은 율법 (히브리어로는 ‘말씀들’[words]이라고 불려짐.) 속에 스스로를 육화시키신다. 영은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다. 따라서 율법과 예언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영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분적이 계시들로서, ‘때가 찼을 때’(fullness of time)의 완전한(total) 계시를 미리 드러내주고 그것(완전한 계시)이 나타남을 준비하는 ‘그림자들’(신약에서 부르는 것처럼) 이다.

 

때가 차고 세상은 준비가 되었을 때 말씀과 영은 한 번 더 오시는데, 그것은 더 이상 자신들의 단순한 행동과 힘이 아니며, 이제는 인(위)격적으로 세상 속에 거하시면서 자기 자신들의 인(위)격 속에서 오시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다. 오직 한 분이신 성자께서는 사람, 곧 나자렛의 예수로서 나신다. 그리고 그 분 안에 계신 영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져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함으로써 그분의 완전함을 따라서 영원히 발전하게 하신다.(에페소 4:13)

 

그러므로 신약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현현(顯現 epiphany), 곧 성 삼위일체께서 완전하게 나타나심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성부께서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이른다.

 

교회 안의 성 삼위일체

교회의 섦은 성 삼위일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며, 하느님의 아들의 신성화(神性化)된 인성을 지닌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 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옷을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디아 3:27) 교회의 일치는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일치인데, 곧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하느님의 살아있는 한 성전 그리고 하느님의 한 백성과 한 가족에 참여하는 것이다.

 

한 몸 안에는 각기 많은 지체(肢體)들이 있다. 많은 ‘산 돌들’(living stones)이 살아있는 성전을 이룬다.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신 한 가족을 이룬다.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의 독특한 다양성은 성령의 현존에 의해 보증된다. 각각의 독특한 인격은 성령의 영감에 의해 참된 사람이 되며,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참된 아들이 된다. 따라서 교회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한 성령께서는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의 완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각 지체에게 주시며, 하느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면서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가능성을 주신다.(고린토 1서 12장을 보라.)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presons)이 완전히 결합된 한 유기체(organism)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교회는 삼위일체 자체의 한 반영(反影 reflection)이다. 왜냐하면 독특하며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하느님 자신의 한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 한 영혼과 한 몸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교회가 부름받는 것은, 한 본성을 지닌 많은 사람들처럼 본래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진리와 사랑의 자유로운 일치 속에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삶 속에서 훨씬 더 완전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운명지어진 모든 인간의 소명(召命 vocation)을 가리키는 원형(prototype)이 된다.

 

성사(聖事)들 안의 성 삼위일체

교회의 성사들은 하느님과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각 사람은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인성을 이룬다. 세례를 받고나서 각 사람은 (작은) ‘그리스도’(christ) 곧,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아들이 되는 견진성사(chrismation) 속에서 하느님의 ‘성령의 선물의 봉인’을 받는다.

 

결혼성사에서는 둘이 일치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새로운 일치를 이루고, 성 삼위의 일치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반영한다. 왜냐하면 한 진리와 사랑 안에서 결합된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족은 사실상 하느님 나라의 한 가족, 그리고 하느님 자신(복되신 삼위일체)의 피조물적인 표현(created manifestation)이기 때문이다.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는 용서받고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재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성부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새로운 삶을 한 번 더 새롭게 한다.

 

성유성사(聖油聖事)에서는 성령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을 겪고 죽게 하며, 그럼으로써 고침을 받아 성부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한다.

 

사제적 자체, 곧 교회의 성직은 같은 성령에 의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며, 성령께서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성부 하느님의 행동과,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친교를 누릴 수 있는 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신다.

 

마지막으로 ‘신비들 가운데 신비’ 인 감사성사(Holy Eucharist)는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끄는 실제적인 경험이며, 성자께서는 복음의 말씀 속에 그리고 당신을 기념하며 먹는 당신 몸과 피의 과월절 음식 속에 현존하신다. 성찬예배의 이런 움직임(말씀이며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부께로 향하는)은 하느님, 곧 복되신 삼위일체 안에서 삼위일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영원한 이동(移動)에 대한 생생한 성사적 상징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의 기도조차도 신성(Godhead)의 셋째 위격 안에서 이루어진 삼위일체의 계시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람들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힘을 주신 성자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기도는 이 땅 위에 떨어져 있는 우리 영혼들이 멀리 계신 하느님을 향해 지르는 외침이 아니다. 그것(참된 기도)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께서 성부께 드리는 기도이며,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기도이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서 8:15-16, 26)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계신 성 삼위일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새로운 명령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는 것이다.(마태오 5:48)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사람은 성령의 은총이 없으며, 하느님의 완전성을 본받으면서 신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으로써,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마르코 10:27)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삶이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 수 있고,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할 수 있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더, 그리스도인의 삶은 삼위일체적인 삶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느님 자신의 생명과 사상, 진리, 자유, 선, 거룩함, 지혜, 지식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essence)은 ‘성령을 받는 것’(the acquisition of the Holy Spirit)이며,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인간이 ‘신화’(deification, 이른바 테오시스[theosis]) 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을 정교회 안에서 발전시킨 것은 바로 이같은 확신과 경험이다.

 

교회의 성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참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복되신 성 삼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주장에서 모두 일치한다. 그것이 바로 신화(神化)하는 사람들의 삶이다.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 가장 작은 부분에서조차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친교할 수 있게 되는 성부 하느님의 삶을 살도록 부름받고 있으며, 바로 자신들 안에 계시면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분들(성부, 성자)과 친교가 가능하게 된다.

 

영원한 생명 속의 성 삼위일체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느님의 영광 속에 오실 세상 마지막 때에, 그분(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창조세계가 성부 하느님을 알도록 하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만물을 가득 채우실 것이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다. 다시금 우리는 성 삼위의 현존과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교회가 한 구성원으로서 오늘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것은 다가 올 세계의 삶 속에서 힘있게 나타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진수(眞髓 essence)는 성 삼위일체의 생명이며, 이것은 신앙의 신비 속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과 똑같은 것이다.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묵시록 21:22; 22:3, 17)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 속에서, 성 삼위(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계신 성부)께서는 모든 창조세계를 가들 채우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빛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성부(하느님)를 알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같은 지식은 하느님의 영이 (우리들) 안에 거하심에 의해서만,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충만함’(에페소 1:23; 2:22)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러분 모두 오시오! 세 위격이신 하느님, 곧 성부 안에서 성령과 함께 계신 성자를 찬양합시다.

창세전에 성부께서는 성자를 낳으시어, 당신과 함께 영원하며 또한 왕위에 오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부 안에 계셨고, 성자와 함께 영광을 받으십니다.

한 능력, 한 본질, 한 신성을 찬양하며 외칩시다.

오 거룩하신 하느님, 성령의 협력을 통하여 성자에 의해 만물을 만드신 이여.

오 거룩하신 권세시여, 당신을 통하여 우리는 성부를 알고 당신을 통하여 성령께서 이 세상에 (들어) 오시나이다.

오 거룩하신 불멸(不滅)이시여, 영이시여, 위로자시여, 당신은 성부께로부터 나오시며 성자 안에 계시나이다.

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순절의 만과[晩課]에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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