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니꼴라이 벨리미로비치(1881-1956)
서방은 혼란과 아수라장의 격통 속에 있고, 반면에 동방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복종 속에 있다.
서방은 계속해서 지식의 나무를 포식하면서 점점 더 지식에 대한 허기를 느낀다. 동방은 생명의 나무 아래 앉아 있지만 그 열매에 다다를수가 없다.
서방은 조직에 대한 열광과 조증(躁症)이 있고, 동방은 유기체에 대해 열광한다.
서방은 끊임없이 외적인 일을 벌이는 반면에 그 내적 가치는 하나 둘씩 사라져간다. 동방은 부단히 그 내적인 가치를 일구는 반면에 외적인 것은 쇠락하여 사라져간다.
서방은 가공할 바벨탑을 쌓아올리는데, 그러나 이 탑이 깎아서 다듬지않은 돌로 만들어진 까닭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곧 무너지고 말 것만 같다. 동방은 땀을 흘리며 돌에 돌을 덧붙여 가장 아름다운 돌들로 창조하려고 애쓰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구조적 건축물로 완성하지는 못한다.
서방에서는 사물들이 개발되고, 빛을 발한다. 반면에 사람은 어둠속에서 갈수록 더 야수처럼 되고 얼굴을 베일로 가리운다. 동방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함양(涵養)되고 빛나는 반면에 사물은 황무지에서 잊혀지고 그곳의 잡초들 속에서 번성한다.
서방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작품을 믿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의 작품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믿는다. 동방은 하느님을 믿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작품을 없애버리고, 사람의 작품은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서방에 일치가 없는 까닭인데, 일치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방은 결코 일치를 성취할 수 없다. 그리하여 동방은 내적 일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내부의 작동방식에 적용하길 원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서방의 활동이 아주 자주 전쟁으로 치닫는 것이며, 동방의 활동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굴복으로 변하는 것이다.
당신은 왜 일이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지 묻는가?
왜냐하면 서방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고, 동방은 예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는 서방은 사람을 인정하지만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반면에 동방은 하느님을 인정하지만 사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서방이 그 자신을 혼란의 심한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이유이며, 동방이 운명에 대한 체념 속에 있는 자신을 보게되는 까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방과 서방 둘 다를 그 품 안에 두시기 위해 당신의 두 팔을 뻗치시지만 그렇게 하실 수가 없다. 그분은 열반과 피안지향성 탓에 동방을 품으실 수가 없고, 칼 때문에 서방을 품으실 수가 없다.
동방과 서방 모두가 당신의 영혼 안에 있다. 혼란과 체념은 같은 들판에 뿌려졌다. 지식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는 서로 곁에 나란히 서서 자란다. 동방과 서방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이것은 양자가 함께 기거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동방과 서방이 갈등 대신에 동거와 공존을 선언한다면 우리들 안에 평화가 지배하게 될 것이고, 세상에는 혼란과 운명에 대한 체념 대신에 긍정적이고 차분하며 절제된 또 다른 힘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생명의 나무를 알도록 하라. 그러면 동방과 서방 모두의 질병에서 치유될 것이다.
당신은 건강하고 완성된 인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건강하고 완성된 인격은 낙관적이다.
그리하여 활동과 신앙, 곧 이 질병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반대쪽 측면은 혼란의 격심한 고통과 운명에 대한 포기라는 쓰레기장 속에서 마침내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