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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1월)

ttoza 2010. 2. 3. 18:46

1월에 축일을 기념하는 성인들입니다. 빠진 부분은 계속 보충해 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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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대 바실리오스 게사리아의 대주교(1월 1일)

 

성인은 정교회의 세 분 대주교성인(성 대 바실리오스, 성 그레고리오스 신학자, 성 요한 크리소스톰: 1월 30일) 가운데 한 분이시다. 약 330년경 지금의 터키 곧, 예전의 소아시아의 가빠도끼아 지역 게사리아에서 사제인 아버지 바실리오스와 덕성을 갖춘 어머니 에밀리아 사이에서 나셨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두 부모님에게서 모두 열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성인은 게사리아의 가장 우수한 학교에서 공부한 뒤, 콘스탄티노플과 아테네에서 공부하셨다. 특히 당시의 아테네는 가장 우수한 학자들과 교사들이 모이는 학문의 중심지였고,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인 성 그레고리오스 신학자와 교분을 나누셨다. 유학중에도 성인은 고기나 생선은 물론이고 포도주도 입에 대지 않는 금욕생활을 하셨다. 게사리아의 에브세비오스 주교가 요청함에 따라 당시의 이단들을 대항하기 위해 애쓰셨고, 370년경 에브세비오스 주교가 안식하시자 그 주교직을 이어받아 379년에 49세로 안식하기까지 봉사하셨다.

성인은 높은 지식을 지녔으며, 고결한 성품과 뛰어난 저술로도 유명하셨다. 또한 엄격한 금욕생활과 모범적인 검소한 삶은 살아계실 때에도 성인으로서 존경을 받게 하였다. 병약한 신체조건을 지니셨음에도 이단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투쟁가로서의 면모도 지니셨고, 조직적인 두뇌 또한 갖추셔서 정교회 수도원 전통의 기초를 놓아 발전시키기도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교구에 세웠던 다양하고 광범위한 자선기관들은 그리스도교 자선단체의 모범이 되었다.

선한 목자이셨던 성인이 당시의 왕이며 우상숭배자인 율리아노스의 위협으로부터 게사리아의 신자들을 지켜낸 일화는 유명하다. 아테네에서 성인과 함께 공부했던 율리아노스왕은 페르시아를 치러 가는 길에 게사리아 지방을 지나게 되었고, 성인은 평소에 잡수시던 보리빵 세 개를 만들어 교인들과 함께 왕에게 선물로 가지고 갔다. 당시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고 왕도 마침 빵을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섬기는 신들을 섬기지 않는 데 화가 난 왕은 페르시아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도시를 불살라 버리겠노라고 고함을 지르고는 떠나버렸다. 그러나 이후 그 왕이 다시 돌아올 무렵 여자와 아이들까지 삼일간 금식을 하고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성모님 성당에 모두 모여 기도를 하자 성인의 눈에는 한 환상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율리아노스왕이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사실을 확인한 뒤 교인들은 포악한 왕을 달래기 위해 바치려고 모아두었던 금, 은, 보화들 가운데 삼분의 일만을 찾아가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느님께 바치겠노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인은 교인들의 그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그 돈과 보석들로 병원, 양로원, 고아원, 학교,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 가난한 사람과 여행자들을 위한 집들을 짓게 하였다. 이것들이 나중에 이른바 ‘바실리아드’(Basiliad)라고 알려진 자선시설들이다.

한편 성인의 부모를 포함하여 형제와 자매등 열두명의 가족중에서 여섯 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곧, 어머니인 성 에밀리아, 성 대 바실리오스, 수도성인이며 기적을 베푸는 성 나프크라티오스, 니사의 주교 성 그레고리오스, 세바스티아의 주교 성 베드로, 성 마크리나 등이다.

 

 

성 실베스트로스 로마의 대주교(1월 2일)

 

박해받는 이들의 피난처

성인은 로마의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성인은 박해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이들에게 용감히 은신처를 마련해 주곤 하였다. 성인 자신도 체포되었으나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로마의 밀티아디스(Miltiades)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밀티아디스 대주교가 안식하시자(314년) 성인께서는 그 뒤를 이어 로마의 대주교가 되셨다. 이후 성인께서는 양떼들을 돌보는 사목과 교회의 가르침들을 지켜나가는 일에서 진정한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임을 증명해 보이셨다. 성인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언제나 식량을 준비해 두셨고, 이교도들의 풍습과 교회의 관습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규정들을 만드셨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심으로써 더 유명해지셨다.

 

신앙의 자유를 얻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마에 입성하여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칙령을 발표하게 되자, 성인께서는 이제와 달리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기쁨 속에 세례를 받았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성인에게서 신앙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성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에 일곱 개의 거대한 바실리카풍(장방형의) 성당을 지었다. 그후로 이들 성당에서 주님과 거룩한 순교자들의 축일예배가 자유로이 거행될 수 있게 되었다.

 

유대교 학자들과의 논쟁

한편 당시까지도 유대교의 구슬림을 받고 있던 황제의 어머니 엘레니는 신비술(神秘術)의 대가인 잠브리우스(Zambrius)가 이끄는 12명의 율법학자들과 실베스트로스 성인을 포함한 12명의 주교들이 서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이게 하였다. 이때 성인께서는 유대인들의 질문과 공격에 응답하여 예언자들의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구약의 모든 사건들과 하느님의 약속들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었다고 대답하셨다. 또한 성인께서는 성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셨다. 이런 설명을 듣던 유대인 율법학자들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와 많은 군중들은 성인을 칭송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교회의 신성한 가르침을 지켜내던 성인께서는 335년 12월 31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말라키아 예언자(1월 3일)

 

주님의 사자(使者)

‘나의 천사’ 또는 ‘나의 사신'(使臣, messenger)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예언자께서는 레위 지파에 속하는 분으로서, 기원전 5세기 무렵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뒤 소파(Sopha)라는 곳에서 태어나셨다. 매우 젊은 나이에 예언자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기원전 450년경) 뿐 아니라 에즈라와 느헤미야 예언자의 종교적 개혁작업도 도우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제들은 또다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의무들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가르침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어겼으며, 도덕적인 상태 또한 더 나빠졌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말라키아 예언자를 보내셔서 당신의 뜻을 전하게 하셨다.

 

영원한 사제직의 수립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불충(不忠)한 히브리 사제직을 마감하시고, 예언자들이 ‘계약의 천사’(3장 1절 참조)라 부르는 분, 곧 ‘의(義)의 태양’(4장 2절)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새롭고 영원한 사제직을 세우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이제 완전하지 못한 봉헌과 희생제사는 하나뿐이며 완전한 감사성사(곧, 신비의 성체성혈성사)로 바뀌게 될 것이고, 이 성사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이 ‘해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못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1장 11절)

 

선구자 요한에 대한 예언

말라키아 예언자는 성전과 사제직과 진정한 예배야말로 다가올 메시아 왕국을 위한 영적 토대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죄와 악행이 넘쳐나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날의 도래(到來)를 희망하며 바라보았다. 그 날에는 주님의 특사(곧, 세례자 요한)가 오고(3장 1절) 어둠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도 인용하신(마태오 11:10 참조) 이 말씀을 통해 선구자 요한이 올 것임이 분명히 예언되었고, 가브리엘 천사 또한 말라키아 예언자의 말(4장 5-6절)을 빌어서 즈가리야에게 알려주었다.(루가 1:17)

 

 

성 아폴리나리아 수녀(1월 4일)

 

고귀한 집안의 처녀

레오 1세 황제(457-471) 시대에 로마의 행정장관이었던 안티무스(Anthimus)의 딸인 성녀께서는 외적인 아름다움과 지적인 면 모두에서 당대의 비슷한 또래 처녀들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불타던 성녀께서는 오래도록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동정(童貞)을 지키면서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과 또한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머무르셨던 장소들(성지[聖地])을 순례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아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다다른 성녀께서는 자신을 수행해온 많은 하인들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값비싸고 화려한 의복과 보석들과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장(男裝)한 여인

그런 다음 성녀께서는 오직 한 명의 내시(內侍)와 늙은 여종만을 거느린 채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이들의 낙원인 에집트로 향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녀께서는 육체적인 욕구를 영적인 힘으로 제어(制御)하면서 수년 동안 보냈다. 그러는 동안 끊임없이 달려드는 열대지방 모기의 공격을 인내로 버틴 성녀의 예민한 피부는 거북의 등처럼 거칠고 단단하게 변해갔다. 그 뒤 한 이름난 수도원으로 찾아간 성녀께서는 짐짓 도로테오스라는 이름의 내시인 것처럼 꾸밈으로써 그곳에 받아들여졌고, 그곳에서 밤낮으로 기도하며 영적인 수련을 더 치열하게 하기 시작하였다.

 

기도와 인내로 보낸 날들

한편 사랑하는 딸이 사라진 고통에 더해 막내딸마저 귀신에 들리자 안티무스는 그 어린 딸을 수도자들에게로 보내며 그들의 기도를 청하였다. 그러자 수도자들은 그녀를 내시 도로테오스에게로 보냈고, 성녀께서는 몇일동안 간절히 기도하여 그녀(곧, 자신의 여동생)를 온전히 낫게 해서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여동생이 집에 돌아온 뒤 곧바로 그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다. 수도자 도로테오스(곧, 성녀)를 의심한 안티무스는 머뭇거림없이 그를 불러들였는 데, 그가 바로 자신의 잃어버린 큰 딸이며 막내딸을 귀신에서 구해낸 자임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다. 성녀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말도록 가족들과 굳게 약속한 다음 다시 수도처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성녀께서 안식하신 뒤에야 비로소 수도자들은 그가 바로 남자로 변장한 아폴리나리아 성인임을 알게 되었다.

 

 

성 싱글리띠끼 수녀(1월 5일)

 

아름다움과 지성과 덕성

성녀께서는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하고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성녀의 부모님들은 본디 마케도니아 출신이셨다. 성녀께서는 어려서부터 그 외모와 지적인 능력 그리고 덕성(德性)이 놀라우리만치 고르면서도 출중(出衆)하게 발달하였고, 그래서 많은 구혼자들이 성녀를 사모하였다. 그러나 성녀께서는 이같은 세상의 온갖 유혹들을 마다하였는데 그것은 하늘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인 혼인을 하고픈 열망이 가득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신 자신의 육체적인 욕망들을 금식과 여러 가지 금욕적인 생활에 복종시키는 한편 성녀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영혼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집중하면서 밤낮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여성들을 위한 수도생활

마침내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성녀께서는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눈먼 여동생과 함께 도시를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갔다. 그리고 한 사제가 당신의 머리칼을 자르게 한 뒤, 마치 대 안토니오스 성인께서 남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만드신 것처럼 여성들을 위한 수도생활의 창설자가 되어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성별하여 바치셨다. 이미 금욕생활에 단련되어 있던 성녀께서는 수도자로서 이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사는 일에서 빠른 진보를 이루었다. 그러자 성녀의 가르침과 조언을 구하는 젊은 여성들이 성녀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성녀께서는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인 자선을 행하도록 가르치셨다.

 

가장 위대한 금욕

비록 금식으로 성녀의 몸은 약해지고 위축되었으나 성녀의 영혼은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났다. 말년이 되어 성녀께서는 스스로 원해서 행한 금욕생활에 하나를 더하여 병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셨다. 그것은 바로 계속되는 열과 폐질환이었다. 그때 성녀의 나이가 85세였다. 마치 의인 욥처럼 3년 반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성녀께서는 ‘이 모든 육신의 질병도 우리의 유익과 우리 욕망의 정화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심있게 병을 견디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금욕생활이다’라고 말하였다. 그후 마지막 순간까지 천사의 도움을 받으며 기쁨으로 낙원의 빛을 바라보았던 성녀께서는 마침내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돔니끼 수녀(1월 8일)

 

가출한 소녀

성녀께서는 4세기 중반 로마에서 태어나셨으며, 경건하고 덕을 사랑하는 가운데 양육되었다. 구세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좋은 선물들에 비할 때 이 세상의 것들이 그 얼마나 헛된 지를 깨닫게 된 성녀께서는 부모님의 집을 몰래 도망쳐 나와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하느님께서는 성녀를 이끌어 네 명의 이교도 여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으로 데려가셨다. 처음 성녀께서는 짐짓 자신도 우상숭배자인 것처럼 꾸미셨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무엇보다도 영적인 덕을 기르고,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삶의 방식대로 실천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외따로 나와 이교도 여인들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이교도들을 감탄시키다

결국 성녀의 완전한 모범에 감탄한 이교도 여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하느님의 인도를 따라 그곳을 떠난 성녀와 이교도 여인들은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였다. 항해 도중 폭풍으로 인해 배가 요동치자 성녀께서는 성난 파도위에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려 파도를 잔잔케 하셨다. 이미 천사로부터 모든 소식을 전해들은 넥따리오스 총대주교(10월 11일)께서 성녀의 일행을 맞아 주었으며, 이교도 여인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어 그 이름을 도로테아, 에반티아, 논나, 디모테아라고 지어 주셨다. 그리고 성녀와 개종한 여인들은 모두 수도원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계시의 전달자

성녀의 거룩한 삶과 월등히 지혜로운 가르침들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갔다. 병자들과 특히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성녀에게로 와 고침을 받았다. 대(大) 테오도시오스 황제(379-395)와 황후 또한 성녀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이제 기도하기에 더 조용한 장소를 찾아야만 하는 성녀에게 하느님께서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 이전의 처형장이었던 곳 - 을 보여주셨다. 오래지않아 총대주교와 황제의 도움으로 그곳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다. 성녀께서는 예언과 함께 기적과 치유를 행하셨으며, 지혜로운 가르침을 통해 제국의 도시(콘스탄티노플)를 위한 진정한 계시의 전달자가 되셨다. 이제 할 일을 다 마친 성녀께서는 병이 드셨다. 그러자 곧 도로테아(개종한 이교도 여인)를 불러 당신의 영적인 양들을 맡기시고 평안히 안식하셨다.

 

 

성 그레고리 니사의 주교(1월 10일)

 

아버지로부터 배우심

성인께서는 331년에 가빠도끼아(오늘날의 터키 동부)의 케사리아에서 태어나셨다. 성인께서는 아버지 바실리오스(원로) 성인과 어머니 에멜리아 성인의 넷째 아들이며, 마크리나 성인(7월 19일)과 대 바실리오스 성인(1월 1일)의 동생이시다. 형인 대 바실리오스 성인처럼 이름난 선생님들을 찾아 대도시로 공부하러 가는 대신에 성인께서는 수사학(修辭學, rhetoric)의 대가인 아버지(원로 바실리오스 성인)로부터 교육을 받으셨다. 어려서 세례를 받고 봉독자가 된 성인께서는 처음에는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으며, 경건한 테오세비아(Theosebeia)와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누나인 마크리나 성인과 그레고리 신학자 성인 그리고 형인 대 바실리오스 성인의 충고에 힘입어 마침내 수도생활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온유하고 겸손한 주교

370년 케사리아의 대주교가 된 대 바실리오스 성인은 ‘수도규칙’을 마련하는 한편, 니케아의 제 1차 세계공의회에서 결정한 가르침들을 따르는 이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무리에 맞서고 있었다. 이 무렵 조그만 마을 니사(Nyssa)의 주교가 된 성인께서는 이내 아리우스파 사람들로부터 고소와 고발을 당하셨으나, 침묵과 무저항으로써 두 해 동안의 시련을 넘긴 뒤 378년에 다시 당신의 주교구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379년초 대 바실리오스 성인께서 안식하시자, 온유하고 말이 없는 성인께서는 정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을 이단자들로부터 방어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셨다. 그리고 성인의 깊은 신학적 통찰력과 설득력 있는 언변에 사람들은 곧 감동을 받아 성인을 존경하게 되었다.

 

‘정교성의 기둥’

이후 성인께서는 반세기 이상 지속된 안티오키아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폰토스와 아르메니아 교회를 재조직하는 한편,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맞서서 정교회의 올바른 교리를 논증하는 글들을 쓰셨다. 무엇보다도 성인께서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세계공의회에 참석하시어 아리우스 이단자들이 펼친 논거(論據)들의 허구성을 무너뜨리시고 정교의 승리를 쟁취하셨다. 공의회의 교부들에 의해 ‘정교성의 기둥’(pillar of Orthodoxy)으로 칭송된 성인께서는 대 아타나시오스 성인과 대 바실리오스 성인의 합당한 계승자로서 여겨져 그 이후의 모든 교회 공의회와 회합에 참석하시게 된다. 교회의 평화가 회복되고 아내(테오세비아 성인)가 먼저 안식한 386년경부터 성인께서는 완전한 영적 생활에 몰두하면서 정교회 신비신학의 대작(大作)들을 저술하시고는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테오도시오스 수도원장(1월 11일)

 

성경을 사랑한 아이

팔레스틴에서 공동으로 거주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이들의 지도자요 안내자였던 성인께서는 423년 무렵 가빠도끼아의 가리소스(Garissos)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경건한 부모님들은 어려서부터 성인에게 거룩한 덕(德)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배우는 자세를 길러주었다. 아직 어릴 때 봉독자가 된 성인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순례여행을 가던 도중 유명한 기둥의 성인 시메온(St Symeon the Stylite, 9월 1일)을 찾아가 축복을 받고, 자신이 많은 양들을 돌보는 목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예루살렘을 거쳐 베들레헴으로 가던 성인께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머물렀다는 한 동굴을 찾아 거처로 삼았다.

 

금욕과 영적인 수련

이제 성인께서는 그곳에서 자기 영혼의 정화를 위해 열렬히 투쟁하기 시작하셨다. 동굴 천정에 매놓은 줄을 붙잡고 의지하면서 성인은 밤새도록 시편을 성가로 부르고 예수 기도를 하였다. 성인께서는 삼십년 동안 한 조각의 빵도 먹지 않고 다만 대추야자와 콩들 그리고 동굴에서 자라는 약간의 허브(herbs: 향내나는 식물들)에 의지하며 사셨다. 성인의 투쟁과 내면에서 비추이는 신성한 빛이 알려지면서 많은 제자들이 동굴로 모여들었고, 성인께서는 그들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앞에 죽음이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셨다.

 

수도원과 올바른 가르침의 보존

당시 성인의 수도공동체는 서로 다른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백 명 이상의 수도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네 개의 성당을 지어 각 성당들마다에서 그리스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로 예배가 드려지도록 하였고, 마지막 넷째 성당은 정신이상자들과 마귀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한 곳으로 사용하였다. 6세기초 사바스 성인(12월 5일)과 함께 팔레스틴의 수도공동체를 책임졌던 성인께서는 단성론을 주장하는 이단자들(Monophysites)과 그들을 옹호하는 황제에 맞서 싸우시다 추방되는 고난을 겪기도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 유스티노스 황제(Justin I)와 함께 올바른 정교의 가르침을 회복하셨고, 그후 온 힘을 다해 병자들을 돌보고, 기적을 행하며, 다가올 재난에 대해 예언을 하시던 성인께서는 529년 백 다섯 살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따띠안나 순교자(1월 12일)

 

성녀는 3세기초 아버지가 세 번씩이나 집정관(執政官)에 뽑힐 정도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는 비밀리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기의 딸이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도록 길렀다. 성녀는 성인이 될 무렵 그리스도와 약혼하여 동정으로 살겠노라고 결심하였다. 세속의 부(富)에 마음을 두는 대신에 하늘나라의 불멸하는 보물을 찾았다. 성녀는 로마의 한 성당에서 봉사자가 되어 금식과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면서 병든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AD 222-235)가 로마를 통치하던 당시 울피안(Ulpian)이 섭정(攝政)을 하였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자였다. 이때 따띠안나 성녀도 붙잡혔고, 아폴로 신전으로 끌려가 우상에게 경배하고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당했다. 그런데 성녀가 기도를 시작하자 갑자기 그 곳에 지진이 일어났다. 우상의 동상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부서졌고, 신전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덮쳐 이교(異敎)의 사제와 그 신자들이 많이 죽었다. 그러자 그 이교도들은 갈고리로 성녀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 그렇지만 성녀는 그 모든 것을 견디면서 주님께서 그들의 영적인 눈이 떠지게 해 달라고 용감하게 기도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성녀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고문을 가하던 사람들은 네 천사가 성녀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성녀에게 들려오는 것도 들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여덟 사람이 성녀의 발치에 엎드린채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고배한 그 여덟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처형되고 말았다.

그 다음날 성녀는 다시금 사악한 재판관 앞으로 끌려왔다. 그런데 그토록 고문을 당해 온통 상처투성이였던 성녀의 몸은 감쪽같이 치유가 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고문자들은 이번에는 성녀의 옷을 모두 벗긴 뒤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면도칼로 성녀의 몸을 조금씩 베어냈다. 그때 놀랍게도 아름다운 향기가 온 사방을 뒤덮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성녀의 몸에 매질을 가하였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자기들을 쇠막대로 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천사가 그 고문자들의 타격을 되돌려 그들을 향하게 만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중 아홉 명이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그들은 성녀를 또다시 법정으로 끌어냈다. 그리곤 성녀의 몸이 깨끗이 치유되었을 뿐 아니라 전보다도 더 아름답고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번에는 여신 다이아나에게 희생제사를 바치도록 성녀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성녀가 십자가 성호를 그은 뒤 기도를 시작하자 갑자기 귀를 먹게 할 정도로 큰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번개가 번쩍하면서 일어나 그 우상과 이교의 사제들을 쳤다. 그러자 다시 화가난 박해자들은 성녀를 높이 매달고는 쇠발톱으로 문지르면서 고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밤 성녀가 감옥에 버려졌을 때 다시 천사가 나타나 그 모든 상처를 다 치료해 주었다.

그 다음날 그 고문자들은 성녀를 서커스 경기장으로 끌고 가 굶주린 사자들이 있는 우리 속에 던져넣었다. 그런데 사자들은 성녀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고 도리어 성녀의 발치에 얌전하게 다가와 그 발을 핧았다.

이렇게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성녀를 고문하면서 하느님을 부인하도록 해보려던 고문자들은 결국 성녀의 목을 칼로 내리쳐 자르므로써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성녀의 아버지마저 딸을 그리스도인으로 길렀다고 하여 함께 처형하였다.

 

 

성 에르밀로스와 성 스트라토니꼬스 순교자(1월 13일)

 

굳건한 믿음의 보제

에르밀로스 성인께서는 리끼니우스 황제(324년 사망)의 박해시절 신기두눔(Singidunum,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보제이셨다. 성인께서는 당신을 붙잡으러 온 군인들을 기쁜 낯으로 맞이하셨으며, 원형의 야외 대극장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의 어리석은 행위들을 책망하시면서 폭군을 향해 영감어린 대답을 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고문하는 자들이 성인의 뺨을 칼로 도려냈다. 그러나 토굴에 던져진 성인에게 천사가 나타나 위로하면서 마지막까지 믿음에 흔들림이 없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황제 앞에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 성인의 믿음은 고난을 통하여 흔들리기 보다는 도리어 더 강해졌다. 그래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성인께서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평안하셨다.

 

감옥의 간수

이같은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며 믿음을 갖게 된 감옥의 간수 스트라토니꼬스는 비록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감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성인의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에르밀로스 성인을 다시금 끌어내어 무시무시한 고문을 가하고, 날카로운 삼각형 모양의 쇠침이 박힌 매로 쉴새없이 성인의 몸을 때린 뒤 독수리의 발톱에 내장이 찢겨나가도록 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울음을 터뜨린 스트라토니꼬스에게 군인들이 달려들어 그의정체를 묻자 성인께서는 당신이 에르밀로스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으며, 당신도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였다.

 

다뉴브 강을 성화한 순교자들

스타라토니꼬스는 곧바로 체포되어 매질을 당하였다. 용기를 내어 에르밀로스를 바라본 성인께서는 당신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함께 옥에 갇히자 하늘로부터 한 목소리가 들려와 내일 승리의 관을 쓰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다음날 날이 밝아오자 황제는 두 순교자들을 그물에 붙들어 매 다뉴브 강에 던져버리도록 명령하였다. 기쁨에 넘친 성인들께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라고 찬양하며 물속으로 버려졌다. 며칠 뒤 성인들의 몸으로 말미암아 성화된 강물이 두 성인을 뭍으로 밀어냈고,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예를 갖추어 성인들을 장례지냈다.

 

 

성 니나 준사도(1월 14일)

 

이베리아에 끌려온 포로

성인은 대순교자 게오르기오스의 친척이며 한 지역을 담당하는 지휘관인 자불론(Zabullon)이라는 사람의 외동딸로서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스 대제의 통치시절에 생존하였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자란 성인은 이베리아인들(Iberians, 나중에 이들은 그루지야인[Georgian]이라 불리게 된다.)에게 붙잡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코카사스 국경에 있는 그들의 영토로 끌려갔다. 그 당시까지도 이 야만인들은 우상들과 불(fire)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성인은 방해받음 없이 자신의 신앙과 고행생활을 계속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대담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이윽고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인 므츠케타(Mtskheta)에 다다른 성인은 거대한 삼목(杉木)의 발치에 펼쳐진 아름다운 정원 안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 거하였다.

 

하느님이 베푸신 기적들

오래지 않아 그 도시의 한 귀부인이 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길 성인에게 탄원하였다. 성인의 침대에 누운 귀부인의 아들을 위해 성인께서 기도하자 그의 병이 곧 나았다. 이 소문은 곧 왕비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당시 왕비 또한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열렬한 우상숭배자인 왕비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한 모든 노력이 헛되이 실패하자 마침내 성인을 찾아와 하느님께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성인께서 포도나무줄기로 만든 십자가로써 왕비를 향해 십자 성호를 긋자 왕비는 병이 씻은 듯이 나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고백하였다.

 

왕과 모든 백성의 개종

그러나 왕비의 기적적인 치유를 전해들은 왕 미리안(Mirian)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숲속 깊숙이 들어가 사냥을 하던 왕은 갑자기 짙은 구름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때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가 자신이 믿던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왕은 곧 니나 성인이 믿는 하느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곧 구름은 걷혔고, 왕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도시로 돌아온 왕은 곧 모든 이베리아인들이 세례를 받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콘스탄티노스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주교와 사제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아서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그뒤로도 성인은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지역들을 돌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개종자들을 얻었다. 성인은 이 모든 일을 다 마친 다음 왕과 그 신하들, 성직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바울로 티바의 수도자(1월 15일)

 

경건한 청년

데시우스(Decius) 황제 시절(기원후 250년 무렵),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로마제국 전역에서처럼 에집트에서도 강물처럼 흘렀을 때, 테베(Thebaid) 하류에 한 경건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학식이 많고 덕스러운 인격을 지닌 이 청년은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한 시골집으로 피신해 있던 청년은 오래지 않아 자기 제부(弟夫: 여동생의 남편)가 자신의 재산을 탐한 나머지 박해자들에게 자신을 넘길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년은 모든 재산을 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막으로 도망하였다.

 

90년의 은둔세월

그는 몇 일을 걸어 산 밑에 있는 한 동굴에 다다랐다. 그곳은 한 때 도둑들의 소굴이었던 곳으로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거대한 야자수가 그늘을 제공해 주고, 맑은 샘물도 있는 이상적인 그 공간은 마치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낙원과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 생애를 침묵과 기도 속에 보냈다. 그후 세월이 흘러 대 안또니오스 성인께서 90세가 되었을 무렵(AD 342), 성인은 한 꿈을 통해 자신보다도 더 완전하게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바울로 성인이 다른 사막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바울로 성인의 나이는 113세였다. 이제 대 안또니오스 성인께서는 자신의 지팡이를 부여잡고 바울로 성인의 수도처를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대 안또니오스 성인과 만나다

마침내 만나게 된 두 원로는 서로 사랑의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지난 90년 동안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는 바울로 성인께서 안또니오스 성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로 나타나 갓 구운 듯한 신선한 빵 한 덩어리를 성인들의 발치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바울로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이 자비하심을 보라!’고 외치셨다. 그러면서 성인께서는 ‘지난 70년 동안 하느님께서는 매일 까마귀를 보내 빵 반 덩어리씩을 주셨는데, 오늘은 안또니오스 성인께서 오시자 두 배를 주시는군요’라고 말씀하셨다. 이틀 뒤, 안또니오스 성인은 바울로 성인의 영혼이 천사들의 찬양을 들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서둘러 동굴로 달려간 안또니오스 성인은 위대한 정교성(Orthodoxy)의 고백자가 기도하는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성 대 안토니오스 수도자(1월 17일)

 

신앙심 깊은 부모의 영향

성인께서는 AD 250년 무렵 상부 에집트(Upper Egypt)에 있는 작은 마을 코마(Coma)에서 태어나셨다. 부(富)와 명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인 성인의 부모는 아들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양육하였다. 특히 성인의 부모는 아들을 몸소 교육시켰고, 따라서 성인께서는 성당에 가는 때 외에는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흔히 아이들이 즐기는 시끄럽고 난폭한 놀이에 끼어들지 않았으며, 세속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성인께서는 성당에 갔을 때 봉독되는 성경본문과 성인들의 축일 내용을 주의를 집중하여 듣곤 하였다.

 

복음의 가르침에 사로잡히다

그런데 성인께서 열두 살쯤 되었을 때,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제 성인에게는 가족의 전 재산과 돌보아 주어야 할 어린 여동생만이 남게 되었다. 어느 날,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롭고 구속(拘束)되지 않은 삶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면서 성당으로 가고 있던 성인의 귀에 누군가 읽고 있던 복음서의 한 구절이 들려왔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오 19:21) 이 말씀을 듣자마자 성인께서는 이것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확신하고는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위대한 수도자의 탄생

그후 여동생의 양육을 덕망이 높은 한 여성에게 맡긴 성인께서는 금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떠났다. 당시에 수도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홀로 금식하며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성인의 마을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성인께서도 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때부터 성인에게는 악마의 온갖 유혹과 시험이 닥쳐왔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흔들림이 없는 굳센 믿음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나갔다. 이후 성인의 영향으로 하늘나라의 자유로운 시민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세상을 등지고 사막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아리우스 이단의 발호(跋扈)를 분쇄하고자 알렉산드리아로 내려가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과 성 대 아타나시오스에 대한 지지를 분명하게 나타내기도 했던 성인께서는 수많은 수도자들과 통치자들(성 콘스탄티노스 황제 자신도 성인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의 영적인 아버지요 인도자로서 사시다가 105세의 고령에 이르른 356년 1월 17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아타나시오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1월 18일)

 

‘교회놀이’에 열중하던 아이

성인은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의 박해(297-313)가 있기 직전인 296년 알렉산드리아의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여러 가지 이교(異敎 cult)와 신앙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세계적인 도시에 살았지만 성인은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하느님과 교회에 관한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어느날 알렉산더 주교는 어린 아타나시오스 성인이 자기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의식을 흉내내며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린 아타나시오스 성인이 주교역할을 맡아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이들의 세례예식을 (짐짓 실제인 것처럼) 너무도 진지하게 행하는 것에 놀란 알렉산더 주교는 그 후로 아타나시오스 성인의 보호자(protector)가 되어 그를 돌보았다.

 

정교신앙의 수호자가 되다

학생으로서 세속적인 학문보다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덕을 쌓는 데 더 열심이었던 성인은 때때로 사막으로 가 평생의 영적 동료인 안토니오스 성인(1월 17일) 곁에 머물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보제가 된 성인은 갓 스무살의 나이에 중요한 두 가지 신학적 저술(‘이교도들에 반대하며'[Against the Pagans], '말씀이 육화하심에 대하여’[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을 완성하여 이교의 철학과 믿음이 그 얼마나 불합리하며 엉터리인가를 밝혀내셨다. 그런데 이 무렵 논쟁을 즐기고 하느님의 신비를 신앙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더 의지해 탐구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가 하느님의 말씀(곧, 예수 그리스도)은 영원한 분이 아니며 그 또한 창조된 분으로서 오로지 은유(隱喩)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따름이라는 주장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아리우스는 다시 소아시아의 케사리아로 가서 제국 전체에 이같은 혼란을 퍼뜨렸다. 이로 말미암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케아에서 세계공의회(325년)를 개최하여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명확한 교리를 확립하려고 하자, 성인은 보제로서 연로한 알렉산더 대주교를 모시고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인의 삶은 성부 하느님과 성자이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상 같은(homoousios 호모우시오스) 분이라는 진리를 지키고 선포하는 데 바쳐지게 된다.

 

고난 속에 지켜낸 진리

알렉산더 대주교가 안식하자 알렉산드리아의 교인들이 만장일치로 성인을 총대주교직의 계승자로 선출하였다. 이후 성인은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는 한편 에집트 전역과 에티오피아 국경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며 수도사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다섯 번의 추방을 감내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키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던 성인은 마침내 373년 5월 2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인이 기초를 놓은 중요한 교리적, 신학적 작업은 이후 대 바실리오스 성인에 의해 완성되었다.

 

 

성 마카리오스 에집트인 대수도자(1월 19일)

 

누명을 뒤집어 쓴 청년

성인께서는 서기 300년경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三角洲)에 위치한 한 마을(Jijber)에서 태어나셨으며, 처음에는 낙타 몰이꾼(camel driver)으로서 일을 하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홀로 살기 위해 마을의 한 작은 집에 기거하기 시작한 성인께서는 전적으로 기도와 금욕생활에 몰두하였다. 이윽고 사람들이 성인을 사제로 만들려 하자 성인께서는 다른 마을로 도망쳤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한 임신한 소녀가 자신이 아이를 배게 된 것은 바로 마카리오스 성인이 자신을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성인을 고소하였다. 성인은 즉시 붙잡혀서 목에 남비를 두른 채 길로 질질 끌려 다니며 주먹과 욕설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신에게 거짓 누명을 뒤집어씌운 소녀와 그가 낳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몸소 일을 하였다.

 

사람들의 존경을 피해 달아나다

마침내 성인의 결백함이 드러나게 되자 마을사람들은 존경심을 가득 품은 채 달려와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헛된 영광을 피해 다시 메마르고 황량한 스케티스(Scetis: 오늘날의 Wadi Natrun) 사막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금욕생활에 전념하였다. 성인께서는 일주일에 그저 한 번 약간의 빵과 물을 마셨으며, 당신 방의 벽에 기대어 잠시 자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침묵과 마음의 기도를 꾿꾿하게 지속해 나가시면서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낯선 생각으로부터 당신 자신의 영혼을 지키셨다. 성인께서는 그 높은 덕(德, virtues)으로 인해 곧 에집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많은 방문객들이 스케티스 사막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땅 위의 신’

성인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기쁨과 단순한 태도로 맞아 들였고,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교훈이 되는 말 한 마디나 기도로써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후하게 제공해 주었다. 또한 성인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존중하여 포도주를 조금 내놓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당신 자신이 (손님들과 함께) 마신 포도주의 잔 수와 똑같은 날 동안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시곤 했다. 당시 사람들은 성인을 가리켜 ‘지상의 신’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섭리(攝理)로써 보호하시듯 성인께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마치 보지 않은 것처럼 숨겨주고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주었다. 성인께서는 90세가 되어 평안히 안식하셨다.

 

 

성 에프티미오스 대수도자(1월 20일)

 

성인은 그보다 몇 년 앞서서 성 대 안토니오스(1월 17일)와 그 제자들이 에집트 사막을 가득 채웠던 것처럼, 한 때 팔레스타인 사막을 가득 메웠던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였으며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다. 성인은 378년 유프라테스강 가까이 있는 아르메니아의 도시 멜리띠니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부모인 바울로와 디오니시아는 결혼한지 오래 되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 자손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성인을 낳게 하셨다. 에프티미오스라는 이름의 뜻은 ‘좋은 원기’, ‘좋은 기분’, ‘신뢰’, ‘기쁨’이라는 뜻이다.

성인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바울로)가 죽었다. 그러자 어머니 디오니시아는 이전에 약속한대로 성인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하고 자신의 형제인 에브도히오스 신부를 통해 이제 겨우 세 살인 에프티미오스를 그 지역의 오트리우스 주교에게 맡겼다. 주교는 에프티미오스에게 세례를 베풀고 오래지 않아 그를 봉독자로 임명하였다. 주교의 보살핌 속에 덕성을 기르고 절제된 생활을 익히던 에프티미오스는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였고, 정신을 집중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곤 하였다. 또한 신현 축일로부터 부활절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깊은 사막으로 가서 예언자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을 본받아 고독과 침묵 속에 지내곤 하였다.

이같은 빛나는 덕으로 무장한 성인은 열아홉 살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동시에 그 지역의 모든 수도원을 책임지게 되어 십 이년 동안 그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성인은 예루살렘으로 옮겨 홀로 은둔(隱遁)하면서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며 살았고, 생계를 위해서는 밧줄(로프)을 꼬아 만드는 일을 하였다. 성인은 여기서 일생을 두고 영적인 동반자로 지냈던 테옥티스투스 성인(9월 3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는 매년 두 성인은 사순절 내내 사해(Dead Sea)에 가까운 사막에서 보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인도로 한 동굴을 발견한 그들은 곧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채 주위에서 자라는 향료식물(herb)만을 먹으면서 지냈다. 그러나 결국 그 지역의 목동들이 그들을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근처의 마을사람들은 성인들에게 빵을 가져왔다. 그리고 많은 수도자들이 그곳을 찾아 성인들과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홀로 은둔하며 수도하기를 즐겨하던 에프티미오스 성인은 테옥티스투스 성인을 수도원장으로 하여 공동으로 거주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한편 성인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420년의 어느 날 한 유목민(Bedouin, 베두인) 족장의 병든 아들을 십자가 성호로써 고쳐주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러 베두인들이 세례를 받고 성인의 제자가 되었고, 족장 자신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뒤 팔레스타인의 여러 유목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열렬한 선교사가 되었다. 얼마 뒤 베드로는 많은 베두인과 세례 예비자들을 성인에게 데리고 와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그리스도인이 된 베두인들은 성인의 곁을 떠나지 않은채 성인을 위해, 입구가 두 개인 커다란 물탱크와 빵집, 그리고 한 가운데 작은 기도실이 딸린 세 개의 방을 지어주었다.

또한 성인은 제 3차 세계공의회(에페소, 431년)와 제 4차 세계공의회(할키돈, 451년) 사이의 혼란스런 시기에도 교인들을 위한 진리의 시금석(試金石, touchstone)이었으며, 정교(Orthodoxy)를 지탱하는 기둥이셨다. 성인은 당신의 제자들을 두 공의회에 보냈으며, 그들은 그 두 회의의 진행과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제 4차 공의회 뒤 네스토리우스주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느슨한 결합을 주장하면서 성모님에게 주어진 ‘하느님을 낳으신 분’[테오토코스]이라는 칭호를 반대함으로써 제 3차 에페소공의회에서 파문된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파)의 온갖 위협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성인과 그 제자들은 정교의 믿음을 꿋꿋이 잘 지켜냈다.

그 뒤 90세가 된 성인은 성 테옥티스투스 수도원장을 방문하여 그의 마지막 안식을 지켜 보았고, 장례식을 치른 뒤 새로운 수도원장을 임명하였다. 성인은 자신이 하느님 곁으로 돌아갈 날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사순절을 사막에서 보내곤 하였다. 성인은 생의 마지막 삼 일 동안 지성소 안에 머물러 있은 뒤 473년 1월 20일에 평화로이 안식하였다. 수많은 수도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교인들이 사막의 교부이신 성인의 장례식에 모여들었고, 그 자리에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성인이 머무르던 동굴에 위치한 무덤에서는 오래도록 그같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전 교회는 즉시 성인을 위대한 교부들 가운데 한 분으로 공경하기 시작했다.

 

 

성 막심 그리스인 수도자(1월 21일)

본래 이름이 미하일 티볼리스였던 성인은 비잔티움 제국이 오토만 터키에게 멸망한 직후인 1470년경 아르따(Arta)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집안은 일찍이 총대주교를 배출한 훌륭한 가문이었는데, 성인은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로 가서 당대의 최고 지성들에 견줄만한 학문을 쌓았다. 그 후 1507년경 그리스로 돌아오는 길에 성인은 아토스산의 바토페디(Vatopedi) 수도원으로 들어가 막시무스(Maximus)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자가 되었다.

겸손하면서도 생각이 깊었던 성인은 10년동안 학문연구와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1516년 러시아의 대공(大公)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요청해옴에 따라 시편과 여러 정교회서적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기 위해 성인은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성인은 그리스어 성경과 예식서들의 슬라브어 번역본에 있는 많은 오류들을 바로 잡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로써 타타르족의 침입 이후 이른바 ‘영적인 굶주림’ 속에 놓여있던 러시아인들로부터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이런 성과는 성인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모함할 빌미를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525년 결과적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회법정에 서게 된 성인은 이단으로 단죄된다. 이 재판 결과에 따라 성인은 볼로콜람스크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베고픔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모든 소지품을 빼앗긴 성인은 영성체와 읽을 책마저 거부당한채 오로지 기도에만 의지한채 자신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천사가 성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인내하여라! 이곳에서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너는 영원한 형벌에서 해방될 것이다.’ 이같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은 성인은 감사하는 마음을 억누를 길 없어 종이 한 장 없는 자신의 방에서 석탄 조각을 분필 대신 집어들고 방 벽에 성령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성가를 써내려갔다. 지금도 이 성가는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수도원들에서 성령강림절(오순절) 뒤 첫 월요일에 불리어진다.

그 뒤 육년이 지난 1531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교회법적인 지위와 관련된 자신의 주장에 관하여 다시 재판을 받게된 성인은 종신형을 언도받고 트베르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지역 주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나마 신학적 저술활동과 서신교환등을 할 수가 있었다.

또다시 이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551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팔십 일세로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때가 되어서야, 성인은 여러 경건한 귀족들과 성 세르기우스-성삼위 수도원 수도원장 등의 탄원에 힘입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예우를 갖춘채 모스크바로 모셔진 성인은 그곳의 수도원에 들어가 안식을 맞을 때까지 신학적 문필작업을 계속하였다.

그 다음해(1552년) 러시아 황제 이반 4세는 러시아교회에 스며든 캘빈파 이단사상을 논박하기 위해 공의회를 열기로 하고 막심 성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너무 노쇠하여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성인은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는 대신에 이단에 대한 훌륭한 반박문을 써서 보내 주었다. 바로 이 반박문이 정교 신앙의 위대한 증거자였던 성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성인은 1556년 1월 21일 팔십 육세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안식한 뒤 오래지 않아 성인은 ‘러시아교회에 빛을 밝힌’ 성인으로서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성 디모테오스 사도(1월 22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신앙

성 사도께서는 소아시아의 로마 영토였던 리카오니아의 리스트라(Lystra)라는 도시에서 나셨다. 이교도인 아버지와 유다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도께서는 특별히 어머니 에브니끼(Eunice)와 할머니 로이스(Lois)의 보살핌 속에 경건함과 성경을 사랑하며 자라났다.(디모테오 2서 1: 5 참조) 바울로 사도께서 두 여성(디모테오 사도의 어머니와 할머니)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하신 뒤(45년경) 얼마 지나 두 번째로 그 도시를 방문하셨을 때(50년경), 성 사도께서는 젊은 청년 디모테오가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리스트라와 이코니움의 형제들이 디모테오를 추천함에 따라 바울로 사도께서는 세례를 베푸셨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심으로써 당신의 동료요 가장 가까운 제자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군인

비록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할례(割禮) 의식이 소용없게 되었지만 바울로 사도께서는 디모테오 사도가 이교도들뿐 아니라 회당의 유다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당신의 젊은 제자에게 할례를 행하셨다. 디모테오 사도는 순종과 겸손의 표본인양 온순하고 말수가 적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군인’(디모테오 2서 2: 3)답게 복음전파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코니움에서 프리지아를 거쳐 갈라티아까지 바울로 사도와 함께 여행하며 설교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나타난 환상을 따라 마케도니아에까지 이르렀고, 데살로니까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나중에는 고린토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으며 이후 아시아의 중심 도시인 에페소에서 일년 반 정도 바울로 사도와 함께 머물렀다.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

사도 바울로에 의해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진 디모테오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예배생활을 잘 조직하였으며,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서 교회의 올바른 지도자들을 임명하고 항상 양떼들을 평화와 영과 진리의 일치 속에서 인도하셨다. 바울로 사도께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곳을 방문한 디모테오 사도께서는 성 사도의 마지막을 지켜본 뒤 다시 당신의 교구(敎區)로 돌아오셨다.(디모테오 2서 4:8-9 참조) 디모테오 사도께서는 성 요한 사도를 에페소에서 만나셨으며 요한 성인께서 파트모스로 유배되신 뒤 이교도들에 의해 순교하셨다고 전해진다.

 

 

성 크세니 수녀(1월 24일)

 

집을 떠난 신부

성녀께서는 5세기 로마의 한 그리스도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며, 세례를 받을 때의 이름은 에브세비아(Eusebia)였다. 본래 성녀께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동정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희망을 가졌었으나,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성녀의 부모님께서는 딸을 위한 결혼준비를 하셨다. 그래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바로 그 날밤, 성녀께서는 두 명의 여종을 데리고 집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는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배를 탔다. 코스(Kos)라는 섬에 다다르자 성녀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크세니(Xenia, ‘외국인’이라는 뜻)라 고치고는 두 손을 들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며, 마치 하느님께서 테클라 성녀(9월 24일)에게 바울로 사도를 보내셨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제 2의 바울로를 보내셔서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길로 자신을 안내해 주도록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수도생활

그러자 그곳에 실제로 이름이 바울로인 한 원로가 나타나셨다. 그는 성녀와 두 하녀를 카리아(Caria)에 있는 밀라사(Mylassa)라는 도시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그 분이 수도원장으로 있는 한 수도원이 있었는 데, 그는 성녀의 일행에게 수도원 가까이에 있는 개인용 방(cell)들을 내주었다. 그후로 성녀께서는 오래도록 두 하녀와 함께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심으로써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성녀께서는 이틀, 사흘에 한 번씩 적은 양의 빵을 먹으면서 자신의 눈물로써 그 빵을 적시고,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로 몰려드는 제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겸손히 봉사하심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헛된 영광을 물리치셨다.

 

지상의 이방인으로 사심

성녀께서는 자신의 방 옆에 스테파노스 대순교자에게 봉헌된 성당 건물을 짓는 일을 맡아 처리하였으며, 그 곳은 곧 잘 조직된 여자수도원이 되었다. 참으로 이 지상에서 이방인으로 머물렀던 성녀께서는 자신의 동료 수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평화로이 안식하셨으며, 성녀의 영혼은 기뻐하며 하늘의 고향을 향해 떠났다. 성녀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총애(寵愛)가 성녀의 장례식때 분명히 나타났는데, 그것은 그 때 하늘에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는 십자가가 일곱 개의 별에 둘러 싸인채 나타난 것이었다. 그 별들은 또한 저마다 별로 이루어진 왕관이 감싸고 있었으며, 이런 천상의 불가사의한 현상은 성녀의 장례식 행렬을 내내 따르다가 성녀의 몸이 땅에 묻힌 뒤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성 그레고리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1월 25일)

 

인내와 기도로 얻은 아들

성인께서는 330년 아버지 그레고리오스 사제(1월 1일)와 어머니 논나 성인(8월 5일)의 세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셨다. 갑빠도끼아의 작은 도시 나지안주스의 이름있는 가문이었으나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성인의 집안에 하느님께서는 한꺼번에 세 자녀를 주셨다. 특별히 어머니 논나 성인은 둘째가 태어나기 전 아들의 형상(image)과 그 이름마저 하느님에게서 받았다. 그레고리 성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사려 깊은 양육을 받으며 자라나 비록 어린 아이지만 성숙한 지혜와 학문에 대한 강한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적인 것을 깊이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학적 천재성

성장한 뒤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갑빠도끼아를 떠나 팔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를 찾았던 성인은 대 바실리오스 성인을 만난 뒤 마침내 아테네까지 가 철학과 수사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바실리오스 성인이 먼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성인께서도 358년 서른의 나이에 갑빠도끼아로 다시 돌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이제 더 이상 세속의 학문에 대한 미련을 지니지 않게 된 성인께서는 이후 전적으로 기도와 명상, 그리고 엄격한 금욕생활에 헌신하기 시작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비를 깊이 묵상하곤 했던 성인께서는 때때로 대 바실리오스 성인께서 외따로 머무르며 영적인 수련을 하던 이리스(Iris) 강의 계곡으로 찾아가 함께 하곤 하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이가 아직 젊고 수도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음에도 두 성인께서는 우리 정교회 수도생활의 토대가 되는 ‘수도규칙’(Monastic Rules)을 함께 쓰실 수 있었다.

 

불가해(不可解)한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다

361년 배교자 율리아노스 황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에 대항하여 완벽한 언어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신앙의 신비에 대해 설명한 성인께서는 370년 아버지와 함께 대 바실리오스 성인을 케사리아의 주교로 추대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바실리오스 성인을 정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379년 대 바실리오스 성인의 안식 이후 교회가 이단자들의 교묘한 논리로 말미암아 어지러워지려 할 때마다 성인께서는 ‘신학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지혜와 명석한 논리로써 성삼위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설파(說破)하고 가르치셨다. 381년 대 테오도시오스 황제가 개최한 제 2차 세계공의회(콘스탄티노플)에서 총대주교로 선출된 성인께서는 오래도록 질병에 시달리는 몸이었지만 사랑과 헌신으로 교회와 하느님의 양들을 위해 봉사하시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은퇴한 뒤 390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크세노폰 수도자(1월 26일)

 

성인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다스리던 때(527-565년 재위,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건축하였음.)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큰 부(富)와 명성을 지닌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에게는 덕성스러운 아내 마리아와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요한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자녀에게 훌륭한 가정교육을 시킨 성인은 그들이 나이가 들자 베리투스(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유명한 법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리투스로 가던 배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파선되는 바람에 두 형제는 서로 헤어진 채 간신히 목숨만 구할 수 있었다.

요한은 티레(Tyre)에 가까운 해변에 닿았다. 이 세상 것의 덧없음을 깨달은 그는 그 지역에 있는 한 수도원에 들어갔다. 요한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아르카디우스는 동생을 잃은 슬픔에 잠시 잠겼으나, 그날 밤 꿈에서 요한이 웃음을 머금고 나타나 자신들의 아버지가 일찍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영예로운 것으로 가르치셨던 수도생활을 택하도록 권유하는 것을 보게된다. 그후 아르카디우스는 예루살렘으로 가 성지들을 순례하는 도중에 한 경건한 원로(Elder)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동생 요한이 살아서 수도자가 된 것과 자신의 부모님조차 나중에 수도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나서 그 원로는 아르카디우스를 하리돈(9월 28일) 성인이 세운 수카(Souka)의 수도원으로 데리고 가 자신이 오십년 동안 머물렀던 한 방을 보여준 뒤 그곳에서 일년동안 홀로 기도와 금식으로 지내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이년 뒤 아들들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아버지 크세노폰 성인은 자신의 가신(家臣) 한 사람을 베리투스로 보내지만, 거기서 성인의 아들들에 관한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한 그는 마침내 아테네로 가서 계속 찾아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아테네로 향해 가는 길에 잠시 들른 여관에서 그는 자기 주인의 두 아들을 따르던 하인들 중 하나가 수도자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묻는 그에게 이제는 수도사가 된 그 하인은 자신들을 태운 배가 파선한 것과 아마도 그때 자기의 두 주인(아르카디우스와 요한)이 물에 빠져 죽었으리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슬픈 소식을 안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그 가신은 어머니 마리아와 크세노폰 성인에게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모두 전해 주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크세노폰 성인은 “주님께서 주셨던 것,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기 2:10)라고 하면서 낙타털옷(마태오 3:4 참조)을 걸치고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면서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새벽녘이 되어 성인과 마리아는 자신들의 두 아들이 금관을 쓰고 보석으로 꾸민채 그리스도 앞에 서있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성지순례에 나선 두 부부는 예루살렘에서 아르카디우스의 영적 아버지를 만나 자신들의 두 아들이 살아 있으며, 곧 그들을 보게 되리라는 말을 듣게된다.

한편 하느님의 섭리로 아르카디우스와 요한은 골고타(Golgotha)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이틀 뒤 성묘(聖墓)성당(Holy Sepulchre)에 경배하고 아르카디우스의 영적 아버지(원로)를 찾아간 성인과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들을 접대하는 두 젊은 제자의 단정하며 분별력 있고 고상한 모습에 놀라 그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를 묻는다. 금욕적 생활로 말미암아 두 아들은 어느새 그렇게 변해 있었던 것이었다. 아르카디우스가 자신이 바로 크세노폰 성인의 아들임을 밝히자 두 부모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들도 수도자가 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두 형제는 부모를 떠나 원로와 함께 사막으로 들어갔다. 크세노폰 성인은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나눠준 뒤 아내 마리아는 수녀원에 머물도록 하고, 자신 또한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 이장기념(1월 27일)

 

새로운 황제의 등극

요한 성인께서는 카파도끼아의 코마나(Comana)에서 안식하신 뒤 그곳의 바실리스코스 성인과 루시안 성인의 무덤 곁에 묻히셨다. 그 다음 해(408년) 성인의 유배에 대해 책임이 있던 아르카디오스 황제와 에브도끼아 황후가 죽고 그들의 아들인 테오도시오스 2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자, 함께 유배되었던 성인의 지지자들이 점차 다시 원래의 교구(敎區)로 복귀하였다. 그러다 434년 쁘로클로스 성인(11월 20일)께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에 오르자 몇 년 동안 황제를 설득한 끝에 마침내 요한 성인의 성해를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용서와 사랑

그러나 성령의 은총으로 살아 계시던 요한 성인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성해를 옮기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성인의 성해를 옮기려던 군인들과 제국 관리들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는 데, 그것은 성인의 성해가 담긴 관이 마치 땅에 봉인(封印)이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테오도시오스 황제는 성인께서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가 성인에게 행한 박해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성인의 성해가 제국의 수도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해주어 오랜 세월동안 성인을 기다려온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는 편지를 썼다. 이같은 내용을 담은 편지가 성인의 가슴 위에 놓이자마자 관은 별 어려움 없이 움직였으며, 이어서 최고의 위엄을 갖춘 채 콘스탄티노플로 운구(運柩)되었다.

 

모든 이에게 평화!

테오도시오스 황제는 모든 원로들과 함께 성인을 맞이하였다. 땅에 엎드려 무릎을 꿇은 황제는 얼굴을 성인의 관에 대고 성인과 성인의 동료들에게 가해졌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성인의 관은 성 도마 사도 성당과 성 이리니 성당을 거쳐 마침내 황제들과 총대주교들의 안장처(安葬處)인 성 12사도 성당에 다다랐다. 그곳의 주교좌에 성인의 성해가 모셔지자 ‘모든 이에게 평화!’ 라고 말하는 성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나서 성인의 성해는 제단 아래 안치되었고, 성찬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후로 전 세계로 퍼진 성인의 성해는 은혜로운 성인의 현존을 계속해서 증언해오고 있다.

 

 

성 에프렘 시리아인 수도자(1월 28일)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소년

성인은 306년경 로마제국의 동쪽 경계지역인 시리아의 니시비스(Nisibis)라는 한 외딴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졌던 성인은 이로 말미암아 이교도 사제인 아버지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경건하고 금욕적인 주교 야고보(1월 13일) 성인의 보살핌을 받아 성경을 배우며 덕을 쌓는 수련을 할 수 있었다. 낮에는 배고픔, 밤에는 졸음과 싸우며 금욕생활을 하던 성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성인은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로 말미암아 눈물흘렸고, 때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이 너무나 놀라와 눈물지었다. 스무살 무렵 세례를 받은 성인은 때때로 사막으로 가 생활하였다.

 

회개의 삶을 가르침

한 번은 성인이 에데사((Edessa)로 순례여행을 하고 있을 때 길에서 한 창녀(요즘말로 이른바 ‘성매매 여성’)를 만났다. 성인은 짐짓 그 꼬임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고는 그 여자를 도시의 큰 길 한 가운데로 데리고 갔다. 여자가 무엇인가 이상하다 싶어 성인을 향해 왜 이런 곳으로 가느냐고 묻자, 성인은 ‘가엾은 여인이여,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두려워 하고 있구려. 그렇다면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의 행위와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 심판하실 하느님이 보고 계신 것은 두렵지가 않단 말이요?’하고 되물었다. 성인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회개하였고, 성인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참된 보제(곧, 섬기는 자)

당시 대 바실리오스 성인의 명성(名聲)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성인은 에데사에서 돌아온 뒤 케사리아로 가 바실리오스 성인을 만났다. 그리고 바실리오스 성인에게서 보제 서품을 받은 뒤 다시 니시비스로 돌아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사제직을 마다한 성인은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전쟁(338-387)이 나자 사막에서 돌아와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363년에 니시비스가 페르시아의 손에 넘어가자 이교도 왕을 피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에데사로 피신하였다. 이후 십년동안 성인은 그곳의 학교에서 가르쳤고, 자신의 저작중 상당량을 썼다. 이 작품들 가운데는 성경주석과 이단자들에 대한 논박(論駁), 신앙과 구원의 신비, 천국, 동정(童貞, Virginity), 교회의 축일들에 대한 성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372년 기근(饑饉)에 처한 도시를 위해 구호활동을 펼쳤던 성인은 그 다음 해(373년) 많은 수도자들과 고행자들에 둘러싸인채 안식하셨다.

 

 

성 끼로스와 요한 자선치료자(1월 31일)

 

경건한 의사

4세기초 알렉산드리아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끼로스 성인께서는 의사로서 활동하시는 한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治癒)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다. 성인께서는 병을 낫기 위해 당신께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로 병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곤 하셨다. 성인께서는 의학과 약만을 신뢰하기 보다는 도리어 기도를 함으로써 환자들을 고치셨고,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는 복음의 은총을 알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이 참된 생명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셨다. 이같은 성인의 기적을 보고 시샘한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라는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명령(303년경)을 따르는 그곳의 통치자에게 성인을 고발하였다. 이 때 성인께서는 아라비아 국경으로 피하여 수도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십가가 성호(sign)만으로 고침으로써 유명해지셨다.

 

귀족집안의 군인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Edessa) 출신인 요한 성인은 귀족가문의 군인이었다. 끼로스 성인이 행한 일들에 관해 전해들은 성인께서는 세상의 온갖 부와 영광을 저버리고 하늘의 왕이신 분의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에집트로 가 끼로스 성인의 제자이며 동료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질 무렵, 카노푸스(Canopus) 출신의 그리스도인 아타나시아와 그녀의 두 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두 성인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다가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 지역 통치자 시리아노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성인들은 끝까지 잘 견뎌내셨고, 마침내 모두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의 시신을 거두어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가 성당에 묻었다.

 

성인들이 베푼 기적들

5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끼릴로스 성인(6월 9일)이 이교적인 제의(祭儀, cult)를 없애기 위해 두 성인의 성해를 메누티스(Menuthis)로 옮긴 뒤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곳은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례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7세기 예루살렘의 소프로니오스 성인(3월 11일)께서는 성인들의 도움으로 두 눈이 나은 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인들이 베푼 기적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