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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성인들의 생애(7월)

ttoza 2010. 2. 11. 18:43

성 꼬즈마스와 다미아노스 자선치료자(7월 1일) *

 

형제 의학도

이 두 성인은 카리노스(Carinus) 황제의 통치기인 AD 284년경 로마에서 살았다.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로서 신앙의 길에서도 한 마음이었던 성인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종이 되고자 가진 재산 모두를 주고 한 유명한 이교도에게서 의술(醫術)을 배웠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사람과 동물들의 병을 고치는 한편 어느 정도는 구실삼아 의학적인 치료와 간호법등을 사용하였다. 성인들께서는 병을 고친 뒤에는 돈이나 어떤 선물을 받는 대신에 환자들이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도록 권하였다.

 

황제를 회개시키다

성인들의 명성(名聲)은 곧 널리 퍼졌으며, 각지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성인들의 거처 주위로 몰려들어 기도를 청하였다. 그리고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영혼이 밝게 비추임을 받은 채 돌아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널리 전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소문을 들은 이교도들은 시기심에 성인들을 황제에게 고발하면서, 성인들로 말미암아 제국의 권력을 보호하는 신들(우상들)에 대한 제사의식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고 위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인들은 황제 앞에 끌려나가 심문(審問)을 당하였으나,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도리어 황제가 하느님의 진노를 사 몸이 마비되는 벌을 당한 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멈추지 않는 기적

그뒤 성인들에게 의술을 가르쳤던 이교도 선생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고치는 성인들의 모습을 보고 질투심에 불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치료에 쓰이는 식물을 거두는 계절이 되자 자신만이 아는 깊은 산 속으로 성인들을 데리고 가 차례로 돌로 쳐 죽였다. 후에 성인들의 성해를 찾아낸 사람들이 두 성인을 함께 묻었으며, 그후로도 성인들은 기적을 베풀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 우리 교회는 지역과 시기가 각각 다르나 같은 이름을 가진 한 쌍의 성인들을 세 번 기념한다. 첫째는 11월 1일이며 테오도타(Theodota)라는 여성의 아들들로서 소아시아 출신이다. 이들은 평안히 안식하셨다. 둘째는 10월 17일에 기념하는 성인들로서 아라비아 출신이고, 4세기초의 박해때 다른 세 형제와 함께 붙잡혀 고문당하고 마침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가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오늘의 성인들은 세 번째인 셈이다.

 

 

성 유베날리오 예루살렘의 총대주교(7월 2일)

 

제 3차 세계공의회

성인께서는 성도(聖都, Holy City)의 총대주교직을 38년 동안(420-458) 수행하셨다. 이 시기에는 우리 교회와 세상을 밝히신 위대한 성인들이 여러분 계신데, 특별히 성 에프티미오스 대수도자(1월 20일), 성 시메온 수도자(St. Symeon the Stylite, 9월 1일), 성 예라시모스 요르단의 수도자(3월 4일)등이 그런 분들이시고 그밖에도 많은 성인들이 계시다. 유베날리오 성인께서는 에프티미오스 성인의 친구이셨고 함께 많은 친교를 나누셨다. 유베날리오 성인께서 총대주교직을 수행하는 동안 동방교회는 위험하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제 3차 세계공의회가 431년에 에페소에서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는 네스토리오스 이단을 단죄하였는데, 이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정교(正敎)의 가르침에 반(反)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끼릴로스 성인(6월 9일)께서 이 공의회를 주재(主宰)하였고, 유베날리오 성인께서도 그 자리에 참석하셨다.

 

단성론자들

451년 할키돈(Chalcedon)에서는 제 4차 세계공의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그리스도 안의 인성(人性)이 신성(神性) 속으로 흡수되었다고 주장하는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e) 이단자들을 단죄하였다. 유베날리오 총대주교를 포함한 거룩한 교부들은 이단자 에프티히오스(Eutychius)를 정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의 두 가지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거나 혼합됨이 없이 결합되었다는 정교의 가르침을 확증하였다. 그러나 이단자들 중의 우두머리인 테오도시오스는 같은 이름의 황제 테오도시오스(Theodosius the Younger, ✚450)의 미망인으로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에브토키아의 지지를 얻어 유베날리오 성인에게 할키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용감하게 할키돈 공의회의 가르침을 이단자들 앞에서 고백하였다.

 

정교의 가르침으로 승리하다

그러자 이단자 테오도시오스는 성인의 총대주교직을 박탈하였다. 그후 성인께서는 콘스탄티노플로 물러나 계셨다. 그러나 이단자들의 총대주교좌 점유(占有, occupation)는 스무 달을 넘기지 못했다. 성인을 높이 존경하던 황제 마르키안(Marcian 450-457)이 성인으로 하여금 다시 총대주교의 직을 수행토록 배려하였고, 그래서 성인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다. 이후 성인께서는 교회의 평화를 되찾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셨다. 그리고 시메온 성인의 충고를 받아들인 에브토키아 황후는 유베날리오 성인 앞에서 회개한 뒤 다시 정교회로 되돌아왔다. 성인께서는 주교로서 오랜 세월을 봉사한 뒤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아나톨리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7월 3일)

 

철학공부

성인께서는 4세기 후반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셨다. 이 시기는 비잔틴제국의 많은 훌륭한 가문에서 나온 인물들이 그리스 철학의 지혜로 무장한 채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 열렬히 봉사하려 애쓰던 때였다. 철학공부를 다 마친 성인께서는 끼릴로스 성인(1월 18일)으로부터 보제서품을 받으셨다. 이어서 성인께서는 431년 에페소에서 열린 제 3차 세계공의회에 참석하셨으며, 그곳에서 거룩한 교부들은 네스토리오스의 잘못된 가르침을 정죄하였다.(지난 6월 10일자 정교회주보 3면의 ‘성 끼릴로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참조)

 

도케티즘(Docetism) 이단

그후 성인께서는 보제로서 알렉산드리아에 남아계셨다. 그런데 끼릴로스 총대주교가 안식하신 뒤(AD 444년) 콘스탄티노플 관구를 디오스코루스가 장악하였는데, 그는 에프티헤스가 퍼뜨리는 이단적 가르침의 지지자였다. 그 이단적 가르침은 바로 그리스도 안의 신성(神性)이 그분의 인성(人性)을 완전히 삼켜서 흡수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잘못된 가르침은 인간의 구원과 구속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그 기초에서 파괴하는 것이었다. 449년 디오스코루스와 그 추종자들은 에페소에서 이른바 이단적인 ‘강도 공의회’(Robber Council)를 열었으며, 또한 황제의 후원마저 받아냈다. 그리고 정교성의 위대한 옹호자인 플라비안 성인(St. Flavian)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에서 면직되었다.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된 성인께서는 정교성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일을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셨다. 450년 콘스탄티노플의 지역공의회에서 성인께서는 에프티헤스와 디오스코루스의 이단적 가르침을 단죄하셨다. 추방된 가운데 안식하신 고백자 플라비안 성인께서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인 451년 성인의 노력으로 제 4차 세계공의회가 할키돈에서 열렸다. 공의회의 교부들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가르치는 교의(敎義, dogma)를 확정하였다. 그분은 바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완벽하게 지니신 분으로서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시고, 뒤섞이거나 변화됨이 없이 그리고 나누이거나 분리됨이 없이 두 본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단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진리를 위해 애쓰신 뒤 성인께서는 458년에 안식하셨다.

 

 

성 안드레아 크레테의 대주교(7월 4일)

 

늦게 말을 배운 소년

성인은 다마스커스의 한 경건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일곱 살이 다 되도록 어린 소년은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성체성혈 성사를 통해 영성체를 한 뒤부터 입이 열리더니 말을 아주 잘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린 소년은 열심히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과 미덕을 겸비한 주교님

열 네 살이 되자 성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성 사바 수도원에서 수도서원을 하고 수도자가 되었다. 성인은 엄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았으며, 온순하면서도 잘 절제하는 성격으로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덕스러움과 논리가 정연한 정신적 깊이로 말미암아 탄복하게 만들었다. 훌륭한 재능과 미덕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성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래서 마침내 성인은 총대주교청의 비서(서기직)로 임명되었다. 680년 대보제인 성인을 포함한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의 대표들이 제 6차 세계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성인은 자신의 깊은 신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이단적인 가르침들을 비판하였다. 공의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은 콘스탄티노플로 불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성 소피아 대성당의 대보제로 임명되었다.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685-695)의 재위기간 동안에 성인은 크레테섬에 있는 한 도시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 새로운 직위를 맡고나서 성인의 능력과 재능은 교회의 광채처럼 빛을 내기 시작하였고, 성인은 위대한 고위성직자로서, 그리고 신학자요 교사요 성가작가로서 공헌하였다.

 

대까논의 완성

성인은 수많은 예배용 성가를 작사하였다. 그리고 성인은 이른바 새로운 성가, 곧 까논(canon)을 처음 만들기도 하였다. 성인이 지은 까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대까논’으로서 아홉 개의 오디(odes)와 250개의 뜨로빠리아(troparia)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순절에 불리어진다. 사순절 첫 주간의 석후대과에서 일부가 불리어지며, 제 5주간의 수요일 석후소과(또는 목요일 조과) 때는 전부 다 부른다.

성인은 이후 교회의 위대한 성가작가들의 시조가 되었으며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성인은 8세기초 콘스탄티노플에서 크레테로 돌아오던 도중 미틸리니(Mytilene)섬에서 안식하셨다.

 

 

성 아타나시오스 아토스산의 수도자(대[大] 라브라 수도원 설립자, 7월 5일)

 

고아인 어린 소년

성인께서는 10세기 중반에 비잔틴 제국의 트레베존드(Trebezond: 현재의 터키 북동쪽 흑해[黑海, black sea]에 접해 있는 항구도시)에서 태어나셨으며, 어릴적 세례명은 아브라함이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성인께서는 한 선하고 경건한 수녀의 보살핌 속에 자라났으며, 자신을 길러준 수녀를 본받아 기도와 금식을 실천하면서 수도자와 같은 생활습관을 익혔다. 자신의 양어머니와도 같은 수녀가 죽은 뒤, 성인께서는 콘스탄티노플의 궁정(당시는 로마노스[Romanus] 황제의 통치기임.[959-963])으로 불려갔으며, 그곳에서 이름난 수사학자 아타나시오스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고는 성인 자신이 젊은이들을 직접 가르치게 되었으나, 다른 사람의 시샘을 받게 되자 미련없이 그 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수도자의 길

그뒤 성인께서는 키미나스(Kyminas)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만나 수도자가 되고픈 생각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리고 장차 황제가 될 니키포로스 포카스(그는 수도원장의 조카임.)도 만나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이후 황제는 일생동안 성인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게 된다. 드디어 수도자가 되기로 굳게 결심한 성인께서는 키미나스 수도원으로 가 그곳에서 아타나시오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다. 금식과 철야예배, 그리고 밤낮으로 일하며 회개와 기도에 전념한 성인께서는 오래지 않아 드높은 영적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토스(Athos)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놓인 멜라노스(Melanos)라는 곳으로 가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다른 수도처(修道處)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성인께서는 더 높은 영적 수도생활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대(大) 라브라 수도원

이 당시 성인께서는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간청을 받아들여 성당과 수도원 건물들을 짓기 시작하셨다. 물론 그곳에는 병자들과 나그네를 위한 시설과 식당 등이 갖춰지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수도자가 되려는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매우 이름난 이들도 있었고, 사막의 수도자들과 수도원장들 그리고 고위성직자들도 있었다. 성인께서는 오래된 팔레스틴 수도원의 것을 표본으로 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수도규칙을 만드셨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안 성인께서는 마지막으로 영적인 가르침을 베푸신 다음 기쁨 속에서 안식하셨다.

 

 

성 시소이스 대수도자(7월 6일)

 

안토니오스 성인의 후계자

성인은 429년경 안식하기까지 홀로 수도생활을 했던 수도자였으며, 자신보다 앞서 살았던 성 대 안토니오스 성인(1월 17일)이 기도로서 일궈놓은 이집트 사막의 한 동굴에 거하면서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였다. 성인은 60년에 걸친 사막의 수도생활을 통해 최고로 높은 경지의 영적 순결을 이루었으며, 또한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부여받아 한 번은 죽은 아이를 기도로써 살려내기도 하였다.

자기 자신에게는 극도로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온화하고 사랑을 베풀기를 즐겼던 성인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친절히 맞아들였다.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성인은 언제나 겸손을 첫째로 가르쳤다. 한 번은 한 수도자가 어떻게 하느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 수 있겠는지를 묻자 성인은 ‘아들아,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너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한(열등[劣等]한) 존재로 여긴다면 그것은 위대한 일이 될 것이다. 이로써 겸손을 이룰수 있다.’ 라고 대답하였다. 또 한 번은 수도사들이 ‘만일 한 형제가 죄를 범하고 나서 회개하는데 일년이면 족합니까?’ 라고 묻자, 성인은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 그러므로 만일 죄를 지은 형제가 자신의 온 마음으로 회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단 삼일만에 받아주실 것이다.’ 라고 답하였다.

 

‘회개를 시작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성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리에 누웠을 때, 침상 주위에 몰려든 제자들은 성인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은 성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시소이스 성인은 성 대 안토니오스와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이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성인의 얼굴은 점점 더 빛으로 밝아졌고, 성인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수도사들이 성인에게 ‘누구와 이야기를 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성인은 천사들이 자신의 영혼을 (모셔 가기) 위해 왔고, 천사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수도사들이 ‘아버지시여, 당신은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자 성인은 매우 겸손한 어조로 ‘나는 아직 회개를 시작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마치자 성인의 얼굴이 한없이 밝아져서 수도사들은 더 이상 성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성인께서는 자신이 주님(그리스도)을 뵙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나서 번개와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났고, 성인께서는 안식하셨다.

 

 

성 끼리아끼 대순교자(7월 7일)

 

주일에 태어난 아기

성녀께서는 도로테오스와 에브세비아 부부의 외동딸이었다. 주일(主日, Sunday)에 태어난 까닭에 이름을 끼리아끼(Κυριακή; 그리스어로 ‘끼리아끼’는 일요일 곧, ‘주일’이다.)라고 하였다. 한번은 어떤 부유한 행정장관(magistrate)이 자기 아들과 성녀를 약혼시키길 원했다. 성녀는 젊고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성녀의 부모 또한 부유했기 때문에 행정장관은 그들의 부(富)를 지배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자신을 이미 그리스도께 바쳤으므로 결혼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화가 난 행정장관은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에게 가서 성녀와 그 부모가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하며 고발하였다. 황제가 보낸 군인들이 성녀와 그 가족을 황제 앞으로 끌고 오자, 황제는 어찌하여 자신이 경의를 표하는 신들을 공경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성녀와 그의 부모는 이 신들은 모두 거짓 신들이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대답하였다.

 

부모와 함께 겪은 고통

성녀의 아버지 도로테오스는 군인들이 지칠 때까지 고문을 당하였다. 달콤한 말이나 고문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자 황제는 도로테오스와 에브세비아를 갑바도끼아와 아르메니아 사이의 국경선에 있는 멜리띠니로 보냈다. 그리고 성녀는 자신의 사위이며 공동의 통치자인 니꼬미디아의 막시미안이 심문하도록 보냈다. 막시미안은 만약 성녀가 이교신들을 예배하면 충분한 재산도 주고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친척 중 한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그리스도를 결코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부(富)도 바라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성녀의 확고한 답변에 노한 황제는 성녀를 채찍으로 때리라고 명령하였다.

 

참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만을 위해

그후 성녀는 다시 비티니아의 주지사(州知事)인 일라리온에게 보내졌다. 역시 성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주지사는 성녀의 머리칼로 몸을 높이 달아맨 채 성녀의 몸을 횃불로 그을리며 고문하였다. 그 다음날 이교신의 신전으로 끌려 간 성녀는 영혼이 없는 우상들을 부숴뜨려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면서 우상들이 무너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모두 달아났고, 번갯불에 맞은 주지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 뒤 새로운 주지사가 고문을 계속하면서 성녀를 불 속에 던지자 불이 꺼져 버렸다. 맹수들에게 던져 넣으면 맹수들이 온순하고 얌전해졌다. 결국 칼로 죽이라고 명령하자 성녀는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군인들의 칼이 성녀의 몸에 닿기 전 천사들이 성녀의 영혼을 하늘로 모셔 올라갔다.

 

 

성 쁘로꼬삐오스 대순교자(7월 8일)

 

고귀한 신분의 로마인

세속의 이름이 네안니우스였던 성인께서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서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의 통치때에 생존하셨었다. 높은 신분의 로마인이었던 성인의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어머니 테오도시아는 이교도였다. 어린 시절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성인을 어머니가 양육하였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뒤, 티오클레티안 황제가 즉위하던 바로 그 해에 왕궁에서 일하게 된 성인께서는 빠르게 승진하며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303년 무렵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성인은 교회를 잔인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을 갖고 총독의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에 파견되었다.

 

그리스도를 만나다

에집트로 가던 도중 시리아의 아파미아(Apamea)라는 도시 가까이에서 성인은 마치 성 사도 바울로처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게 되었다. 주님의 음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네안니우스,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네안니우스는 대답하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나는 십자가에 달렸던 하느님의 아들 예수다’ 바로 그 순간 빛나는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났다. 성인은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영적인 행복감을 느꼈으며, 그 즉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변화되었다.

 

케사리아의 첫 순교자

그런데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마태오 10:36)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성인의 어머니는 아들의 달라진 태도와 더 이상 우상들에게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황제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황제를 대신하는 장관 앞으로 소환되어 온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인 박해와 관련한 황제의 칙령을 담은 문서를 읽은 다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찢어버렸다. 성인은 즉시 사슬에 결박된 채 팔레스틴의 게사리아로 이송되었다.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밤, 성인의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세례를 베풀어 주시고 쁘로꼬삐오스라는 세례명을 주셨다. 계속되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인을 바라본 많은 군인들이 이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 테오도시아도 아들의 확고한 믿음을 지켜보며 마음을 돌려 그리스도를 맞아들였다. 끝내 성인은 목이 잘려 순교하셨으며, 이것은 케사리아의 첫 순교로 기록되었다.(303년)

 

 

성 브로클로와 일라리오 순교자(7월 12일)

 

2세기의 박해

기원후 112년경 트라야노스 황제(Trajan, AD 98-117)는 칙령을 발표하여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화형(火刑)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남몰래 친구와 형제, 심지어는 자녀들까지도 찾아내 고발하려는 사람, 또는 황제에 대한 두려움이나 이교신앙에 대한 열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제국 전체에 넘쳐났다. 이때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 그곳의 통치자에게 넘기려고 소아시아의 갈라티아 지방에 있는 앙키라(Ancyra) 도시로 갔다. 이들은 앙키라 가까이 깔리뽀스(Kallipos) 마을에 살고 있는 브로클로(Proclus)라는 사람을 붙잡아 황제가 머무는 도시로 데려갔다.

 

황제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채 재판정으로 끌려간 성인께서는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황제의 강요와 맹수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굴복하는 대신에 “주께서 내 편이시라.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나니 누가 나에게 손을 대리오?”(시편 118:6)하고 노래하였다. 사흘 뒤 이번에는 (황제가 아닌) 그 지역의 통치자 막시모스(Maximus) 앞으로 끌려간 성인께서는 황제와 제국의 명령인 희생제사를 드려야 함과 그렇지 않을 경우 가장 가혹한 고문을 당할 것임을 경고받았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같은 위협에 대해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 하여라”(마태오 10:28)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셨다.

 

조카 일라리오

통치자는 격노(激怒)하여 성인을 격자(格子) 모양의 그물형 선반에 묶은 다음 잔인하게 때렸으며, 이로 인해 그 주위의 모든 이들이 성인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도, 비명도 지르지 않으셨다. 이후 온갖 고문을 다 당하신 성인께서는 처형장으로 끌려 가시다가 조카인 일라리오를 만나셨고, 그 자신 또한 그리스도인임을 군인들에게 당당히 고백한 일라리오는 즉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브로클로 성인께서는 마지막으로 용서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신 후 화살에 찔려 안식하셨다. 그뒤 일라리오 성인 또한 매를 맞고 5킬로미터 가량 피를 흘리며 끌려 다니는 고문을 당하시고 난 뒤 참수(斬首)당하시고 순교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분 성인을 함께 매장하였다.

 

 

제 4차 세계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 주일(7월 13일)*

 

그리스도론 논쟁

제 4차 세계공의회는 451년 콘스탄티노플 가까이에 있는 할키돈(Chalcedon)에서 열렸으며, 63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당시의 황제는 마르키안(Marcian)이었다. 이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이단적 가르침인 이른바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에 대해 논의하고자 열렸다. 이같은 주장을 펴는 단성론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덜 완전한) 인간적 본성은 그분의 (더 완전한) 신적인 본성 속으로 합치(合致)되거나 융합(融合, 또는 용해[溶解])되었다. 마치 각설탕이 물컵 속에서 녹아 버리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같은 신적인 결합 이후에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뿐인 본성 곧, 신적인 본성만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성론자들(Monophysites: ‘mono’는 ‘하나’[one]라는 뜻이고, ‘physis’는 곧 ‘본성’[nature]이라는 뜻임.)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단성론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희생시킴으로써 그분의 신성(神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였다.

 

공의회의 결정

공의회는 로마의 교황인 성 대(大) 레오(St. Leo the Great, 461년 안식)의 교서(敎書)인 이른바 ‘톰’(Tome)을 받아들여 단성론을 단죄하고, 앞선 공의회에서 정의한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이고 인간적인 두 가지의 완전한 본성을 지니신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본성은 서로 뒤섞이지도, 변하지도, 나누이거나 서로 분리되지도 않는다. 이 두 본성들 사이의 차이는 두 본성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도리어 각 본성의 특성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한 위격(位格, person 또는 hypostasis) 안에서 결합하였다. 이같은 공의회의 결정은 단성론자들 뿐 아니라 이미 제 3차 공의회(431년, 에페소)에서 단죄되었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추종자들도 겨냥한 것이었다.(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이 서로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는 정의는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생함으로써 그분의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 7월 13일이 주일이면 그날 기념하고 주일이 아닌 평일이면 그 다음에 오는 주일에 기념한다.

 

 

성 니코디모스 아토스산의 수도자(7월 14일)

 

젊은 수도자의 순종

성인께서는 1748년 그리스의 낙소스섬에서 태어나셨으며, 어릴 때의 세례명은 니콜라스였다. 스물여섯이 되어 아토스산에 들어간 성인은 디오니시오스 수도원에서 니코디모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서원을 하였다. 수도원에서 성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수도원의 서기(secretary)로서 일하는 것이었다. 성인께서 디오니시오스 수도원에서 생활하신지 두 해가 지나 성 마카리오스(Notaras, 4월 17일) 고린토의 대주교가 수도원을 방문하였고, 대주교께서는 자신이 아토스산의 바토페디(Vatopedi) 수도원에서 1777년에 찾아낸 필로깔리아(PHILOKALIA) 사본의 편집업무를 젊은 수도자인 성인에게 부여하였다. 이 일(‘필로깔리아’의 편집)이 성인께서 오랜 세월에 걸쳐 행하신 문필(文筆)작업의 시작이었다. 성인께서는 곧 빤토크라토르 스키티(skete; 여러 채의 작은 집으로 구성된 다소 덜 조직적인 정교회 수도생활의 한 형태. 공동생활을 하거나 독거생활을 하는 두 가지 형태가 있으며, 이 곳에 거주하는 수도자들은 주로 농사나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에 종사한다.)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한 원로(Elder Arsenius)에게 순종하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들을 연구하였다.

 

교회의 영적유산을 위해 바친 삶

1783년 정식 수도자(Great Schema)가 된 성인께서는 그후 육년 동안 완전한 침묵 속에 사셨다. 마카리오스 대주교가 다시 아토스산을 방문하여 시메온 성인(St. Symeon the New Theologian)의 작품들을 편집할 것을 요청하자 성인께서는 자신의 금욕적인 침묵생활을 포기하고 이 새로운 문필작업에 헌신하셨다. 그때로부터 안식하시기까지 성인께서는 계속해서 열심히 이 일에 매달리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안식하시기 전 문필작업과 고행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성인께서는 다른 스키티로 거처를 옮겨 머무르셨다. 그리고 그곳의 수도사들에게 자신이 편집한 저작들의 출판을 부탁하였는데, 그것은 질병으로 말미암아 성인 자신은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뒤 1809년 7월 14일 성인께서는 평안히 안식하셨다. 성인과 함께 생활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인께서는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성경의 장, 절과 페이지까지 훤히 외워서 알고 있었으며, 교부들의 작품 가운데 긴 구절을 줄줄 암송하였다고 한다. 성인께서 행한 문필작업은 방대하고 다양한데 그 가운데는 위에서 말한 필로깔리아 외에도 우리 교회의 중요한 문헌(이를테면 피달리온[PEDALION; 사도들과 공의회들의 가르침과 규범들을 모은 책])과 영적 작품(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전쟁’[Unseen Warfare])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성 블라디미르 준사도(7월 15일)

 

평화로운 통치자

러시아 백성들이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도록 함으로써 사도들과 동등하다는 칭송을 받게 된 성인께서는 올가 성인(7월 11일)의 손자였으며, 그 아버지는 스비아토슬라브(972년 안식), 어머니는 말루샤(1001년 안식)였다. 960년 무렵 태어난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볼로디미르(Volodimir)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 데, 이 이름의 뜻은 ‘평화로운 통치자’이다. 러시아민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면(裏面)에는 외적 환경도 한 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제국 내에서 폭동을 주도한 무리들로부터 큰 위협을 당하고 있던 비잔틴 황제는 러시아의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987년 8월 반란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 할 때, 어린 나이의 성인께서는 러시아의 황제로서 비잔틴 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적인 지원을 하기에 이른다.

 

드니퍼 강의 ‘사건’

이제 안정을 되찾은 비잔틴 제국은 황제의 누이인 안나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는 블라디미르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비잔틴 제국과 러시아는 새롭고 역사적인 관계에 이르게 되고 러시아의 통치자는 비로소 ‘짜르’(Tsar)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비록 상대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제껏 ‘야만인’ 통치자와 결혼한 적이 없는 비잔틴의 공주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러시아의 한 대공(大公, Prince)과 맺어진 것이다. 988년 드니퍼(Dneiper)강에서 일어난 ‘사건’은 러시아 민족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 곳에서 키에프의 대공이 바실리오스라는 세례명으로 그 신민(臣民)과 함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식이 있기 전날 블라디미르 성인께서는 온 도시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거지든 노예든 내일 강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적이 될 것이다.’

 

‘제 2의 바울로’

‘재생의 목욕’을 통하여 러시아인들은 새로워졌다. 성사적인(sacramental) 변형을 거침으로써 러시아의 영적 요소들이 가시적으로 실현되었으며, 한 민족의 영적 탄생이 이루어졌다. 이 신성한 사건을 두고 한 연대기(年代記)는, ‘우상의 어둠은 걷히고 정교성(Orthodoxy)의 새벽이 밝아왔다. 복음의 태양이 온 러시아 땅을 비춘다’고 적고 있다. 찬양송에서 ‘제 2의 바울로’(second Paul)라 표현되는 성인께서는 37년 동안 러시아 영토를 통치한 뒤 1015년 7월 15일 당신의 영혼을 주님의 품에 맡기고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마리나 대순교자(7월 17일)

 

어린 소녀에게 닥친 시련

대순교 성녀 마리나 성인은 소아시아 남쪽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사는 한 이교도 사제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나서 성인은 보모의 손에 맡겨졌는데, 보모는 성인을 정교신앙 속에서 자라게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게된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성인과 의절(義絶)하였다. 디오클레티안 황제(284-305)시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당시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성인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도우심을 굳건히 믿었던 성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절박한 운명을 차분히 준비하였다.

 

불굴의 신앙과 잇따른 기적

아리따운 소녀에게 매혹된 그 지역의 통치자 올림브리오스는 성인을 설득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하게 하고 자신의 아내가 되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런 꼬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성인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화가 난 통치자는 성인을 고문하도록 하였다. 성인을 잔인하게 때린 다음, 못을 박아 성인을 나무판에 붙들어 맨 그들은 세 갈래진 작살(삼지창)로써 성인의 몸을 찢어냈다. 그러나 이런 고문에도 성인은 굽힘없이 견뎠다. 밤이 되어 다시 감옥에 던져진 성인에게 하늘로부터 치유의 기적이 베풀어졌고, 성인의 상처들은 깨끗이 나았다. 다음날 다시금 성인을 끌어낸 이들은 성인의 옷을 벗긴 다음 나무에 묶고는 불을 질러 성인을 태우려고 하였다. 이어서 얼마 뒤 통치자는 성인을 다시금 물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솥단지 속에 집어 던져 익사(溺死)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성인이 물 속에 던져진 순간 갑자기 한 줄기 빛이 비치더니 눈처럼 흰 비둘기가 부리에 황금의 관을 문채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리고 성인을 묶고 있던 차꼬(족쇄)는 저절로 풀어졌다. 성인은 성삼위를 찬양하며 솥단지 속의 물 가운데 서있었다. 이윽고 성인은 불에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완전히 나은 몸으로 물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의 어린 암양이 된 성인

이런 기적에 놀란 사람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욱 화가 난 통치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만 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마리나 성인은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같은 대순교 성녀의 고난은 이 광경을 목격한 테오티모스라는 한 증인의 증언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성 마크리나 수녀(7월 19일)

 

성인들 집안의 맏딸

대 바실리오스 성인(1월 1일)과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성인(1월 10일)을 동생으로 둔 성녀께서는 327년에 10명의 형제중 맏딸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이름을 본떠서 마크리나로 불리게 되었는 데, 성녀의 할머니는 네오케사리아의 주교 그레고리 성인(11워 17일)의 제자였으며, 대박해때는 폰토스(Pontus, 소아시아 동북쪽의 지역)의 숲 속에서 살아오셨다. 성녀의 어머니께서는 성녀를 세속의 문화나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성경말씀,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지혜서와 잠언으로 교육하였다. 그리고 성녀께서는 아침에 일어날 때나 낮에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식사의 처음과 끝에, 잠자리에 들 때와 한 밤중에 깨어나서도 항상 시편을 외우곤 하셨다. 성녀께서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성녀의 아버지는 성녀를 한 좋은 집안의 청년과 약혼을 시켰다. 그러나 이 청년은 결혼 전에 죽고 말았고, 이 때 성녀께서는 하느님을 위해 처녀로서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열망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가족들의 보호자

세상과 관련된 모든 일을 제쳐두고 어머니를 도와 가정일을 보살피는 한편, 성녀께서는 남동생과 여동생들을 교육시키는 일까지 맡아서 하였다. 341년 아버지께서 안식하시자 성녀께서는 폰토스와 가빠도끼아와 아르메니아에 있는 드넓은 땅들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에멜리아(Emmelia)를 설득하여 함께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였다. 성녀께서는 이처럼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의 보호자요 교사로서 덕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한 곳의 가정집을 수녀원으로 만들어 귀족집안의 미망인들이 함께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였으며, 아테네에서 공부를 마치고 되돌아온 동생 바실리오스와 함께 이번에는 남자 수도원을 세워 막내 동생이며 장래 세바스티(Sebaste)의 주교인 동생 베드로가 책임지도록 하였다.

 

위대한 영혼

368년 가빠도끼아에 큰 흉년이 들자 수도원은 자선을 베푸는 본부요 모든 지역민들을 위한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었다. 379년 어머니와 대 바실리오스 성인께서 안식하셨을 때에도 성녀께서는 위대한 영혼을 지닌 모습으로 굳굳하게 이 슬픔들을 견뎌내셨다. 그후 오래지 않아 중대한 병이 든 성녀를 동생인 그레고리오스 성인께서 찾아왔으며, 성녀께서는 몸은 비록 누워있으나 영혼과 정신은 한없이 자유로운 가운데 ‘인간의 본성’, ‘창조의 의미’, ‘영혼과 몸의 부활’등 여러 신학적이고 영적인 주제들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기도와 함께 안식하신 성녀께서는 이보라(Ibora)에 있는 사십인 순교자 성당 안에 부모님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성 일리야 예언자(7월 20일)

 

‘주님의 능력’이라는 이름

일리야 예언자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며,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동정(童貞)을 지닌 채 하느님께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900년 전 길르앗의 티스베에서 레위족(Levite)으로 태어나셨다. ‘일리야’라는 이름은 ‘주님의 능력(힘)’이라는 뜻이다. 어린 시절부터 예언자는 자신을 한 분이신 하느님께 헌신하였으며, 사막에 살면서 엄격한 금식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기도와 명상에 전념하였다.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자, 그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우상숭배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참된 믿음과 경건한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잘못된 신앙과 싸우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앞선 신앙의 선조들이 전해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이교의 우상들을 숭배하고, 불경건한 왕이 받아들인 잘못된 예배에 빠져 있었다. 또한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 또한 우상숭배에 열심이었다. 이세벨은 남편인 아합왕을 설득하여 바알신의 신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민족이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본 예언자께서는 아합왕을 책망하면서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왕이 이같은 질책을 받아들이지 않자 예언자는 이스라엘 땅에 가뭄과 기근이 닥칠 것임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삼년 반 동안 온 땅에 비 한 방울이 내리지 않아 고통스런 시간들이 이어졌다. 이 기간동안 예언자는 까마귀가 가져온 먹을 것으로 살았다.

 

불마차로 하늘에 오르신 분

삼년이 지난 뒤, 예언자는 아합왕 앞에 나아가 누가 섬기는 하느님이 참 하느님인지 바알의 사제들과 갈멜산에서 겨룰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써 바알의 사제들을 제압하고 참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게 된다. 또한 예언자가 기도하자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져서 온 대지를 적셨다. 그뒤 예언자는 불타는 마차에 탄 채로 살아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예언자의 일생은 구약성경의 여러 책들에 기록되어 있으며, 주님께서 다볼산에서 변모하셨을 때는 모세와 함께 나타나기도 하셨다.(마태오 17:3 참조) 우리는 예언자께 가뭄을 없애주고 적절하고 온화한 계절이 되도록 도와주실 것을 기도한다.

 

 

성 막달라 마리아(7월 22일)

 

새로운 삶

성녀께서는 게네사렛(갈릴리) 호수가의 가버나움과 티베리아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 마그달라(Magdala)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셨다. 성녀의 어린 시절이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교회의 전승(傳承)에 따르면 성녀께서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죄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다음부터(루가 8장 2절 참조) 성녀께서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 성녀께서는 구세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동안뿐 아니라 굴욕과 모욕을 당하시던 순간에도 늘 그 곁에서 함께 있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골고다산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순간, 모든 제자들이 도망쳐 버리고 만 그때에도 성녀께서는 그곳에 끝까지 남아 성모님, 성 사도 요한과 함께 있었다. 주님께서 처형되시던 그 순간을 기록한 복음서저자들은 물론 성녀말고도 다른 이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 곧,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와 살로메 그리고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왔던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제일 먼저 말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바로 주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서 성녀가 차지하고 있던 두드러진 위치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부활의 산 증인

성녀께서는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요한 20장 11절 이하 참조) 이후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성녀께서도 용감히 그들과 함께 나서서 이곳저곳으로 다니셨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이교신앙이 지배하는 로마를 방문한 성녀께서는 당시의 티베리아스(Tiberias 14-37 A. D.) 황제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상징으로 붉은 달걀을 황제에게 건네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후 부활절이면 서로에게 부활인사를 외치며 붉게 물들인 부활달걀을 건네는 풍습이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성녀께서는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셨다. 성 사도 바울로께서도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녀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로마서 16장 6절) 나중에 바울로 사도께서 로마에 온 이후 얼마 지나 성녀께서는 성 요한 사도께서 선교하고 계시던 에페소로 옮겨가 그곳에서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안식하셨다고 한다. 성녀의 성해는 9세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이장되었으며, 십자군전쟁 시대에 로마로 옮겨져 라테란 대성당에 다시 안장되었다.

 

 

성 크리스티나 순교자(7월 24일)

 

의문에 사로잡힌 어린 소녀

성인은 3세기에 살았다. 성인의 집안은 매우 부유하였고, 아버지는 티레(Tyre) 지역의 통치자였다. 열 한 살이 될 때쯤 성인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성인의 아버지는 성인이 이교도 사제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 성인이 거하는 방에 금과 은으로 만든 우상들을 두고는 그 앞에서 향을 피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두 여종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런데 성인은 홀로 있으면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성인은 기뻐하였고, 그래서 더더욱 그것들을 창조하신 분을 알고 싶어하였다. 그러다 성인은 마침내 자신의 방에 놓여있는 우상들은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한낮 사람이 만든 것일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은 한 분이신 분, 곧 창조주 하느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성인의 영혼은 알지 못하는 하느님을 알고 싶은 열망으로 차올랐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금식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천사가 가르쳐준 진리

그러던 어느날 한 천사가 성인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 천사는 성인에게 세상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쳐 주었다. 천사는 또한 성인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부르고는 앞으로 당할 고난에 대해서도 일러주었다. 성인은 곧 방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부숴뜨려 집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런데 딸의 방을 찾아온 아버지 우르반(Urban)은 우상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물었다. 성인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종들을 통해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교하다

화가 난 아버지는 성인의 얼굴을 때렸다. 처음에는 침묵하던 성인은 나중에 자신이 우상들을 때려 부순 일과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아버지는 성인의 여종들을 모두 죽이도록 한 다음 성인을 심하게 매질하고는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다음날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인을 쇠로 만든 커다란 바퀴에 매단 다음, 그것을 돌리면서 그 밑에는 불을 놓았다. 성인의 온 몸은 불로 말미암아 참혹하게 그을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다시 성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밤이 되자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고 음식도 주어 먹게 했다. 다음날 성인이 아무런 상처가 없이 깨끗이 나은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본 성인의 아버지는 성인을 바다에 빠뜨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천사의 도움으로 성인은 무사하였다. 그뒤 성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녀를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성녀의 권유로 3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되었다. 이후 결국 성인은 급사(急死)한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은 다른 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칼로 순교를 당하였다.

 

 

성 올림비아 봉사자(7월 25일)

 

지체높은 가문의 외동딸

성녀께서는 원로원 의원인 아니키우스 세쿤두스의 딸이었으며, 외가쪽으로는 유명한 주지사(州知事, eparch)인 에브랄리오스(니콜라스 성인의 생애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의 손녀였다. 성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키우스 세쿤두스와 결혼하기전 아르메니아의 황제 아르삭(Arsak)과 결혼하였었으며, 이후 남편이 먼저 죽어 과부가 되었다. 성녀께서 아직 매우 어렸을 때 성녀의 부모는 성녀를 한 귀족과 약혼시켰다. 그리고 성녀가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귀족이 곧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성녀께서는 다시 결혼하려 하지 않고 동정으로 살 결심을 하였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막대한 유산을 상속한 성녀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 과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 시작하셨다. 또한 성녀께서는 교회와 수도원, 복지시설들(hospices)과 집없는 이들을 위한 피난처들에도 후하게 기부하였다. 경건한 넥타리오스 총대주교(381-397)께서는 성녀를 봉사자로 임명하셨다. 특별히 성녀께서는 콘스탄티노플에 오는 고위성직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런 분들 가운데는 성 그레고리 신학자와 성 에피파니오스 키프로스의 주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녀께서는 자신의 부(富)와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지 않고 도리어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선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의 적들에게도 물질적 도움을 베풀었다.

 

인내하며 살아간 마지막 날들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께서는 성녀에게 높은 존경을 표하였으며, 영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요한 성인께서 부당하게 추방된 뒤 누군가 도시의 큰 성당에 불을 질렀고, 이 일로 말미암아 성녀 또한 의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내 성녀께서는 요한 성인의 반대자들에 의해 재판에 불려 나오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혹독한 심문을 당한 뒤 비록 기소된 죄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고 성녀의 결백함이 명백하였으나 부당하게도 방화죄 명목으로 막대한 벌금형에 처해졌다. 405년 성녀께서는 니코미디아의 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곳에서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께서는 자신도 역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있는 상황에서 서신을 보내 성녀를 위로하였다. 409년 성녀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7세기초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성녀의 성해에서는 많은 기적과 치유들(healings)이 일어났다.

 

 

성 빠라스께비 대순교성녀(7월 26일)

 

금요일에 낳은 아기

성녀께서는 하드리안 황제의 통치기(117-138)에 로마에 가까운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성녀의 아버지 아가톤(Agathon)과 어머니 폴리티아(Politeia)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자녀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오고 계셨다. 부모들은 아기가 금요일에 태어난 것을 기념하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에 대해 헌신한다는 의미로 딸의 이름을 ‘빠라스께비’(그리스말로 이는 ‘금요일’을 가리킨다.)라고 지었다. 성녀께서는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흔히 하는 놀이에도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오로지 교회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였고, 집에 있을 때에도 기도와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복음의 전도자

스무살 무렵 부모님들께서 돌아가시자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성녀께서는 자신을 하느님께 성별(聖別)하기로 하고 수녀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동안 수녀원에서 완전히 순종하며 보낸 뒤, 수녀원을 떠나 도시와 마을로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이교도들이 성녀의 가르침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녀를 시샘하고 미워한 유대인들이 성녀를 고발하였고, 붙잡힌 성녀는 황제(새로운 황제 안토니누스[Antoninus the Devout, 140년경]) 앞에 서게 되었다. 우상 앞에 제물을 바쳐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황제의 꼬임에 맞서 성녀께서 당당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자, 그들은 곧 성녀를 잔인하게 고문하였다. 그러나 가슴이 도려내진 채 감옥에 갇혀있는 성녀를 천사가 찾아와 위로하고 치유해주었다.

 

눈병을 고치시는 성녀

이후 기적을 통해 황제를 개종시킨 성녀께서는 자유의 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셨다. 그러다 아스쿨라피오스(Aesculapius)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한 마을에서 다시 붙잡혀 살갗을 벗기우는 고문을 당하셨지만 하루밤새 성녀의 몸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또다시 다른 지역의 잔인한 통치자 타라시오스(Tarasius)에게 보내진 성녀께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을 고치셨다. 그러자 통치자는 성녀가 마술을 부리고 있다며 성녀를 독충(毒蟲)이 가득한 구덩이에 집어 던졌다. 그러나 천사의 보호로 성녀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채 살아났고,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 이후 여러 성당으로 나뉘어 보관되어온 성녀의 성해(聖骸)를 통하여 수없이 많은 치유의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특히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성 판델레이몬 대순교자(7월 27일)

 

의사가 되고픈 소년

대순교자이며 자선치료자인 성인께서는 4세기 무렵 소아시아의 니코미디아란 곳에서 사셨습니다. 그 시절 로마제국의 황제는 막시미아노스(284-305)였고, 성인의 아버지는 이름난 이교도 에브스토르기오스였습니다. 한편 성인의 어머니 에브불리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당신의 아들 또한 그리스도를 알며 자라가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성인의 어릴적 이름은 판톨레온이었습니다. 성인께서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했고, 커서는 의사가 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명한 의사 에브프로시노스에게 보내어 의술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성인은 매우 열심히 의술을 공부하여 다른 모든 학생들보다 더 뛰어나게 되었고, 이같은 소식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성인은 마침내 황제의 궁에서 일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에르몰라오스 사제

당시 니코미디아에는 에르몰라오스라는 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황제의 손길을 피해 도시 바깥의 한 작은 집에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곳에서 성찬예배와 여러 성사들을 집전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쳤습니다. 사제는 판톨레온 청년을 만나 대화하며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과 모든 병을 고치신 그분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판톨레온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성경의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하며, 사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친척의 눈을 뜨게 함으로써 이교도인 아버지의 마음을 되돌려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성인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참된 하느님을 증거하심

하지만 그 도시의 다른 의사들은 성인을 시샘하여, 성인이 제국의 신들을 부정한다고 고발하였습니다. 황제 앞에 끌려나온 성인께서는 누가 참된 하느님인지를 알아보자고 제안하며, 한 중풍병자를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이교의 사제들이 먼저 기도하였으나 환자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뒤이어 성인께서 그 불쌍한 환자를 위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자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는 마음이 완고해져서 도리어 성인을 고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4년 7월 17일 성인을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성 갈리니꼬스 순교자(7월 29일)

 

소아시아의 전도자

성인께서는 소아시아의 킬리키아(Cilicia) 지방에서 태어나셨으며,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양육되셨다. 우상을 숭배하는 까닭에 잘못된 길로 이끌려 가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슬퍼하던 성인께서는 마침내 도시와 농촌들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들을 이교도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도록 이끌었다. 그런데 갈라티아 지방의 앙키라(Ancyra)라는 도시에 간 성인을 사람들이 붙잡아 그리스도인들을 모질게 박해하는 총독에게로 끌고 갔다. 총독은 성인에게 고문과 죽음을 들먹이며 위협하더니, 우상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였다.

 

총독 앞에서

성인께서는 이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당신은 순교를 겁내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고난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것과 죽음을 통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총독의 하수인들은 황소의 뿔로 성인을 잔인하게 때린 다음 쇠갈쿠리로 몸에 상처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 모든 고통들을 인내와 차분한 자세로 견디셨다. 이같은 성인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총독은 날카로운 못이 박힌 신발을 성인의 발에 신기게 한 다음, 회초리로 몰아대면서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해 강그라(Gangra)라는 도시로 끌고 갔다.

 

하느님을 위해 바친 영혼

그런데 험하고 먼 길을 따라 성인을 데리고 가던 병사들이 너무도 지치고 목이 말라 절망한 나머지 하느님께 기도하여 물을 좀 마실 수 있게 해달라고 성인에게 간청하였다. 당신을 고문하던 이들이지만 연민의 정을 느낀 성인께서 기도하자 바위에서 곧 물이 터져 나왔다. 이런 기적을 보고 놀란 군인들은 성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 풀어주려 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그들이 나중에 처형될 것을 염려하여 그냥 당신을 끌고 가도록 달래었다. 강그라에 다다른 성인께서는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린 다음, 불 속으로 들어가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불에 조금도 상하지 않은 성인의 시신을 신도들이 예를 갖추어 매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