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자는 푸틸로브(Poutilov)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저녁에 진행하는 학습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만 나중에 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과 다른 동급생들은 그런 배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으며, 수업은 사무원이나 관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 정도로 여길 뿐이라고 말했을 때 크게 실망하여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아직 10대였던 리자는 노동자들이 모든 면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적이길 바랬습니다.
1910년 리자는 이른바 사회민주당, 곧 볼셰비키로 더 잘 알려진 정당의 당원이었던 디미트리 쿠즈민-카라비에프와 결혼하였습니다. 리자는 18세였고, 디미트리는 21세였습니다. 그것은 ‘사랑보다는 더 많은 연민과 동정심으로 인해’ 이루어진 결혼이었노라고 나중에 리자가 말하였습니다. 디미트리는 수년 전에 짧은 기간 감옥생활을 하였지만, 결혼할 당시에는 시인과 예술가, 작가들의 모임에 속해 있었으며, 으레 그런 모임에서는 오후 세 시에 일어나서 아침에 동이 터올 때까지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시인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상징주의적인 방식으로 시를 썼습니다. 1912년 그녀의 첫 시집인 ‘스키타이인의 파편들’이 출간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회고하기를, 다른 많은 러시아 지식인들처럼 그녀도 1917년의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혁명에 참여하였으며, 볼셰비키 혁명은 오로지 옛 전통이 창조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파괴하기 위해 “낡은 전통의 토양 위에 아주 깊고, 무자비하고, 치명적으로” 덮어 씌워졌습니다. “이토록 용감한 다리를 우리는 미래를 위해 세웠다! 동시에 이런 깊이와 용기는 일종의 쇠퇴와 죽음, 유령, 덧없음의 정신과 결합되어 있었다. 우리는 비극의 마지막 행위인 인민과 지식인 사이의 단절(파열) 속에 있었다.”
그녀와 친구들은 또한 신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인 견해가 평범한 국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의 신학도 실제의 교회 위로 아주 동떨어지게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에 성당 안에서 힘들게 엎드려 절하며 기도하는 어느 늙은 거지 노파에게서 자신들이 배울 점이 많았었노라”고 그녀는 후에 회고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에게 교회는 하나의 신념이거나 한 세트의 추상적인 가치들일뿐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여전히 자신을 무신론자로 여기곤 있었지만, 조금씩 그리스도를 향한 그녀의 초기 끌림은 되살아나고 깊어졌습니다. 허나 아직은 육화하신 하느님인 그리스도가 아니었고 영웅적인 사람인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서는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이다.”라고 그녀는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죽었다. 그는 피범벅이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때렸다... (반면에) 우리는 그 곁을 지나쳐 가면서 그의 상처에 손을 댔지만 그의 피를 묻히지는 않았다.”
문 하나가 또 다른 문을 향해 열렸습니다. 리자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자신이 버렸던 종교적 신앙 쪽으로 이끌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기도하고, 복음서와 성인들의 생애를 읽었습니다. 그녀가 보기에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혁명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단순한 말씀을 선포하고” 싶다고 1916년에 쓴 편지에서 (알렉산더) 블록에게 말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그녀의 둘째 시선집인 ‘루스(Ruth)’가 상트 뻬쩨르부르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나서 그녀는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신청을 하였는데, 그 당시 이 신학교는 학생들이 사제서품을 준비하고 있는 전적으로 남자들만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공부하길 원하는 그녀의 바램만큼이나 놀랍게 그녀가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장의 결정이었습니다.
1913년이 지나면서 리자의 결혼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후에 디미트리는 카톨릭 교인이 되었으며, 서유럽에서 예수회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살았습니다.) 1913년 10월에 그녀의 첫 아기 가이아나가 태어났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자마자 리자는 딸과 함께 러시아 남부 맨끝인 아나파 가까이의 가족 소유지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녀의 종교적 삶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한동안 그녀는 납덩어리를 꿰맨 벨트를 아무도 모르게 몸속에 숨긴 채로 차고 있었는데, 이는 첫째로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것”과 또한 둘째로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매순간마다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고 있음을 더 잘 의식하기 위해 자신을 일깨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초대교회의 금욕주의가 스스로 고행하고 금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세심하게 응답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실패로 끝날 운명의 사회혁명당에 가입하였는데, 이는 이름으로는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사회민주당보다도 훨씬 더 민주적인 정치운동이었습니다.
상트 뻬쩨르부르그로 되돌아오는 길에 리자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치유하는 이콘으로 잘 알려진 작은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이콘은 ‘슬퍼하는 이의 기쁨인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리어지는 것으로서 그 안에는 코펙(러시아의 화폐단위. 100분의 1 루블) 동전들이 함께 끼워져 있었습니다. 여기 한쪽 어두운 구석에서 기도하면서 그녀는 마치 고백성사를 준비하는 듯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너무도 강력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이제 그녀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유일하시고 모든 죄를 속(贖)하신다.”
1917년 9월에 리자는 상트 뻬쩨르부르그에 있었는데, 그때 러시아의 임시정부가 볼셰비키들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전(全)러시아 소비에트의회에 참석한 그녀는 레닌의 부하 레온 트로츠키가 그녀의 당(사회혁명당) 사람들을 해산시키면서, “당신들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당신들이 속한 곳,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집(아나파 ?)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자신이 레닌 아내의 친구임을 어떤 볼셰비키 선원에게 확신시킴으로써 가까스로 즉결처형에서 벗어났습니다. 기차역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많은 기차 차량들을 거치며 했던 힘겨운 여행에서 그녀가 보기 시작한 것은 이제 러시아가 맞닥뜨린 대재앙의 규모, 곧 테러와 닥치는대로 하는 살인, 대학살, 파괴된 마을들, 불한당(不汗黨)과 폭력배들의 지배, 배고픔과 대규모의 이동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러시아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상상력을 한때 가득 채웠던 혁명의 꿈과는 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다른 실제 혁명이란 말입니까?
1918년 2월 러시아 내전의 초기에 리자는 아나파의 부시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녀는 도시의 필수적인 서비스를 유지하고, 누구라도 총살 집행부대의 위험 속에서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여성 지도자(부시장)을 가졌다는 사실은 분명코 혁명적인 어떤 것으로 보였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만일 어느 남성(지도자)였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견해들도 불평없이 참고 따랐습니다.”
그녀는 백군(白軍: 황제를 지지하는 반[反]볼셰비키군)이 그 지역을 점령하고 볼셰비키 시장이 도망가고난 뒤 시장직무대행이 되었습니다. 또다시 그녀의 생명은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백군 세력에게 리자는 어느 볼셰비키처럼 적군(赤軍)에 속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고, 적과 협력한 것에 대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법정에서 그녀는 일어나 자신을 변호하며 말하였습니다. “나의 충성심은 보통 말하는 어느 상상속의 정부에 대한 것이 아니며, 그 누구보다도 정의가 필요한 사람들, 곧 인민에 대한 것이다. 적군이든 백군이든 나의 입장은 같다. 나는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행동할 것이다. 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애쓸 것이다.”
리자가 처형을 피할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학교 교장이었고 지금은 재판장인 다니엘 스코브초바 덕택이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나서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몇일만에 결혼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리자는 다시금 임신을 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제 내전의 물결은 볼셰비키에게 유리하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리자와 남편만이 아니라 딸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까지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하는 것처럼 그들도 결정을 내렸습니다. 곧, 외국으로 도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리자의 어머니 소피아도 그들과 함께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폭풍우의 피해를 입은 증기선을 타고 흑해를 건너 조지아로 갔습니다. 1920년 트빌리시에서 아들 유라가 태어났습니다. 한해뒤 그들은 이스탄불로 떠났고, 거기서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리자는 셋째인 딸 아나스타시아 (또는 집에서 부르는대로 하면 나스티아)를 낳았습니다. 그들의 긴 여행은 마침내 프랑스에서 끝났습니다. 그들은 1923년 파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친구들이 머무를 방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시간제 교사인 일자리를 얻었습니다만 급료가 너무 적어서 지출을 다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수입을 더 늘리기 위해 리자는 인형과 색칠을 한 비단 스카프들을 만들었는데, 흔히 하루에 열 시간 또는 열두 시간을 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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