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러시아 학생 기독운동’(RSCM: Russian Student Christian Movement)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것은 1923년에 설립된 정교 단체였습니다. 리자는 강의에 참석하고 다른 활동들에도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1926년의 몹시 추운 겨울, 가족 전체가 독감에 걸렸습니다. 모두가 회복되었지만 나스티아는 예외로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야위어갔습니다. 마침내 의사는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파스퇴르 연구소(1887년 프랑스의 의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설립된 비영리 민간연구기관. 역자주)는 나스티아를 환자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어머니인 리자가 딸을 돌보기 위해 밤낮으로 머물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리자의 헌신적인 돌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머문지 한 달만에 나스티아는 죽었습니다. 그때조차도 밤을 지새우며 나스티아 곁을 지켰던 어머니는 크나큰 슬픔에 휩싸인채 병실을 떠날수가 없었습니다. 이 몹시도 슬프고 황량한 시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그 얼마나 “회개의 의미를 전혀 몰랐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 자신의 무의미함과 볼품없음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내 영혼이 삶 전체를 이리저리 헤매며 뒷골목으로 내리달렸다고 느낀다. 이제 나는 참되고 바르며 정화된 길을 원한다. 생명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죽음을 정당화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제아무리 많은 생각도, 만일 끝까지 그리고 예외가 없이 이루어지는 사랑이기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두 단어보다 더 위대한 진술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삶 전체가 빛을 받게 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삶은 혐오스러운 짐일 뿐이다.”
그녀는 쓰기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은 “영원으로 통하는 문들을 열도록 하지만, 반면에 자연적인 실존 전부는 그 안정성과 일관성을 잃어버렸다. 어제의 규범은 폐지되었고, 욕망은 시들해졌으며, 무의미가 의미 대신에 자리를 차지하였고, 비록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다른 ‘큰 의미’가 내 등에 날개들이 움터 자라게 하였다... 무덤의 어두운 웅덩이 앞에서 모든 것은 거짓과 부패, 오염에 맞서서 다시 검토되어야 하고 측정되어야만 한다.”
딸의 장례식 이후, 리자는 “새롭고 특별하며, 넓고 모든 것을 품어안는 모성(母性)을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더 참되고 바르며 정화된 삶”을 찾으려는 결심과 의지를 간직한 채, 자신의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을 위한 어머니가 되리라는, 어머니의 돌봄과 지원, 보호가 필요한 모든 사람을 위한 어머니가 되기 위한 길, 곧 앞에 놓인 새로운 길과 삶의 새로운 의미를” 보았다고 느꼈습니다.
리자는 더욱더 사회적인 일과 사회성을 강조한 신학적 글쓰기에 몰두하였습니다. 1927년에 두 권으로 된 책, ‘성령의 수확’(Harvest of the Spirit)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많은 성인들의 삶을 다시 새롭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녀의 남편은 택시 운전을 시작하였는데, 이 일은 시간제로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 첫 딸 가이아나는 아빠(곧, 다니엘 스코브초바)의 도움에 힘입어 벨기에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자와 다니엘의 결혼생활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나스티아의 죽음으로 인한 피해가 컸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가능한대로 사회 속에서 남을 돌보는 일에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신이 강하게 이끌리는 것을 느낀 리자는 더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파리 중심부로 이사하였습니다. 아들 유리는 열네살이 될 때까지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되 언제든지 자유롭게 어머니를 찾아와서 머무를수 있고, 열네살이 되면 아빠, 엄마중 누구와 함께 살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합의가 (리자와 다니엘 사이에) 있었습니다.(사실 유리는 초기 결핵에 걸린 것이 발견되어 부모에게서 떨어진 채로 요양원에서 오랜 기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1930년 그녀(리자)의 셋째 책인 시집이 출간되었습니다. 리자는 러시아 학생 기독운동(RSCM)의 순회하는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이 일은 그녀로 하여금 프랑스 전체의 도시와 마을들 그리고 때로는 이웃 나라에 살고 있는 궁핍한 러시아 난민들과 매일 만나게 하였습니다.
지방의 여러 중심지에서 강연을 마치고난 뒤, 그 이후로 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와서 그녀(리자)가 여러 사상과 이론들로 가득찬 서류가방을 가진 지식인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 사람들과 함께 자기 자신이 신앙고백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망명자의 삶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나간 과거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시작하곤 했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줄이 마치 고백성사를 하려는 이들의 대기행렬처럼 문옆에 만들어지곤 했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마음을 털어놓고, 수년동안 짊어져온 끔찍한 슬픔과 어떤 평화도 주지 못하는 양심의 극심한 고통에 대해 말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리자는 언제나 가장 작은 자 안에 계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마태오 25:40)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을 대하는 것보다도 더한 주의와 보살피는 마음으로 자기 동료 인간의 몸을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동료에게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주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동료 인간에게 우리의 마지막 옷과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도 주어야만 한다. 일대일의 인격적인 자선과 가장 광범위한 사회적 봉사는 둘 다 동등하게 정당화되고 필요한 일이다.”
그녀는 뒤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영적인 세계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세계를 향해 돌린다면, 그는 경탄할만하고 영감을 주는 신비와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육화와 신인(新人)이신 분의 신비를 뒤돌아보면서 세상에 육화하신 하느님의 바로 그 이콘인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의 참된 형상을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매와 형제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경배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런 엄청난 계시(드러내심)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그것(하느님이 사람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느끼고, 인지하고, 이해할 때만 그의 가장 헌신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다른 신비가 그에게 계시될 것입니다... 그는 악의 힘에 의해 신적인 형상이 가리워져 있고, 일그러져 있으며, 흉하게 망가뜨려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적인 형상을 위해 악마와 싸우는 일에 참여하길 원할 것입니다.”
나중에 런던의 러시아 정교회 주교가 된 안토니 블룸(1914-2003)은 그 당시에 의사가 되기 위해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던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한 친구에게서 들었던 이 시기 마리아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러시아 난민들이 일하고 있는 르 크뢰조(Le Creusot: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 지역에 위치한 도시)의 제철소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 가서 자신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일련의 강좌를 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모두가 이렇게 울부짖듯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필요하지 않소. 우리는 잘 다려진 리넨 천(침대보, 식탁보, 베개커버 등으로 씀)이 필요하고, 깨끗이 청소가 된 우리 방이 필요하고, 잘 수선된 옷이 필요하오. 그리고나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데려오시오!’ 그러자 그녀는, ‘좋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혼자 있게 놔둡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나서 여러날동안 그녀는 방을 청소하고, 바느질을 하고, 옷을 수선하고, 다리미질을 하고, 빨래를 하였다. 그녀가 이 모든 일을 다 마쳤을 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도스토에프스키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일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다림질을 하고, 방을 청소하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소. 그런 것은 스스로 할수 있지 않은가요?’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요청에 곧바로 반응하였고, 이런 식으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었다.”
러시아 학생 기독운동(RSCM)을 위한 일이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한편으로 삶에서 그녀의 진정한 소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않은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반은 수도원적이고 반은 형제애로 뭉친’ 것으로서 영적인 삶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에 접목시키는 형태였고, 그 과정에서 ‘자유로운 교회는 기적을 행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사제인 세르게이 불가코프 신부(1871-1944)는 지지와 격려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는 정교 그리스도교로 전향하기 전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습니다. 1918년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그리고나서 5년뒤에 소련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파리에 정착하였으며, 새로이 세워진 성 세르기우스 신학교(1925년에 설립되었으며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교 신학기관이다.)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그는 결코 순종을 요구하거나 또는 상대를 조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신의 인도를 바라는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고백사제였습니다.
리자에게는 또한 자신을 지원하는 고위성직자 에블로기 게오르기엡스키 대주교(1868-1946)가 있었습니다. 그는 1921-1946년 사이 유럽 전역에 흩어져있는 수천명의 러시아인 국외거주자들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그중 프랑스에 가장 많은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만났으며, 그의 어깨 위에 모든 영적이고 물질적인 짐을 내려놓았다... 그는 남자나 여자 모두 자기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길 바랬다.”라고 레브 질레 신부(1893-1980)는 회상하였습니다. 에블로기 대주교는 리자가 행하는 사회적인 일을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으며, 그녀가 수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 세상일에 관여하고, “세상과 그 상처들에게서 마음을 떼어놓을 수도 있는 가장 미묘한 장애물조차도 완전히 제거된 모습”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을 자유로이 발전시켜나갈 것을 확신하면서 그녀는 기꺼이 그런 시도를 하려고 하였으나, 비록 그 당시 이미 홀로 살고 있었을지라도 실제로는 결혼한 몸이라는 명백한 걸림돌이 있었다고 리자는 말하였습니다. 한동안 그 장애물은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인) 다니엘 (스코브초바)가 별거중인 아내가 수도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에블로기 대주교와 만난 이후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1932년 3월 7일에 교회가 인정하는 이혼이 이루어졌습니다. 몇주일 뒤 성 세르기우스 신학교의 성당에서 리자는 수녀로 공표되었으며, 마리아라는 수도명이 주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수도자 서원식을 하였습니다. 에블로기 대주교는, 그녀가 “사회적인 봉사에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함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그 일을 “세상 속의 수도생활”이라고 단순하게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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