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실천하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원칙에 충실하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전통과 전통주의 또는 더 나아가서 전통과 근본주의의 차이가 애매모호해지면서 혼돈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는 위험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부들은 모든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였다거나, 정교 신학은 결코 바뀐 적이 없었다는 전제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정교 신학은 변화해왔으며,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연이은 세계공의회에서 교부들이 서로 합의를 이뤄야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어느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는 않습니다.’(헤라클레이토스) 오직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히브리 13:8)
아토스산 파이시오스 성인(+1994)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광신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세심한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교회의 길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율법주의자의 길과는 다릅니다. 교회는 모든 것을 관용으로써 바라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든지 또는 어떤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각각의 사람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둘째는 적당히 타협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만났을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차라리 종교 그 자체를 바꿈으로써 종교가 여전히 실천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 부끄러움도 없이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양심의 가책조차 느낄 수 없도록 여러 이유들을 둘러대면서 교회의 절대적 요구와 우리의 인간적 약함을 화해시킬 수단을 찾다가, 마침내 교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상징적으로만 이행하는 타협적 형식주의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생활 전반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이름만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친목회나 사교클럽같은 모습의 신앙공동체는 이 둘째 유형에 속합니다.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1983)는 말합니다. "세상에 자신을 짜맞추지 않으며, 그리스도교를 ‘쉬운 것’으로 만드는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명히 정교 신앙의 영광입니다. 하지만 아직 정교 신자들의 영광은 아닙니다...”(‘대사순절’에서 인용)
셋째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주 자신을 업신여기고, 욕하며, 근거없는 말로 헐뜯는 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현실주의자이고, 따라서 현실에 무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일이 그를 바꿔놓지 못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려는 이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믿는 이가 가는 길을 약화시키고 훼손하려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화와 용기, 인내를 잃지 않음으로써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계속 살아나갑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힘을 주셔서 그는 차분하면서도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한다고 아나스타시오스 알바니아의 대주교(1929년생, 그리스)는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피해 달아나지 않으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앞서 말한대로 정교 신앙의 영광이긴 하되 정교 신자들의 영광은 아직 아닌 이 현실을 우린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곧,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연대 속에 있으며, 어느 누구도 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정교 신학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는 곳 바깥으로 나와 한번쯤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는 집 주변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일로 사람들은 웃고 또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지...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고 말합니다.(시편 85:10) 떼제의 성가는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라고 노래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리석은 논쟁을 피하고... 말다툼을 하거나... 싸우지 말며... 도리어 선행에 전념해서 남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줄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권합니다.(3:9, 14) 사도 요한은 ‘눈에 보이는 자매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요한 1서 4:20) 그리고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5:45)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고유(固有)한 인격, 지난 2월에 안식하신 존 지지울라스(+2023) 페르가몬 대주교 신학자의 정의대로 ‘되풀이될 수 없고 복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하느님 모습의 형상, 이콘’으로 대하려고 힘써야합니다. 자매와 형제, 부부와 가족, 친척들 사이에서, 친구와 이웃과 지역사회, 직장과 소속되어 활동하는 단체와 조직 안에서, 그리고 신앙공동체인 교회와 신자들 사이에서 그러하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각자 자신의 돛을 높이 올리고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곳 어디든지 그분이 태초부터 계획하신대로 성령의 바람을 불어넣으시며 우리를 몰아가실 수 있도록 기꺼이 내맡겨야 합니다. ‘정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정교회가 없고 정교 신앙을 잘 모르는 지역에 사는 정교인으로서 흔히 고립되고 언제나 작은 소수집단에 속한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공격하지도 말고, 방어적이지도 말고 공격적이지도 말고, 그저 당신 자신이 되라’고 밧모섬 암필로히오 성인(+1970)은 친절하게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유일무이한 존재로 지음받은 우리들 각자가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한다면 마지막 날에 하느님은 우리들더러 ‘너는 왜 모세가 되지 못했느냐? 너는 왜 엘리야가 되지 못했느냐? 너는 왜 세례자 요한이 되지 못했느냐? 라고 묻지 않으시고, 너는 왜 너 자신이 되지 못했느냐고 준엄하게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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