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신학을 할 것인가?

정교신학의 과제

ttoza 2015. 6. 2. 21:56

 

 

 

 

5년전 그리스에서 정교신학의 미래에 관한 신학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의 주제는

"새로운 교부적 종합 또는 교부이후 신학: 정교신학은 상황적인(contextual) 것일 수 있는가?"였다.

이 회의 이후 정교회 내에서는 이른바 '교부이후' 신학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있었다.

다음의 것은 이런 비판들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 지지울라스 대주교는 2010년의 회의에 참석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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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교 신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 존 지지울라스 (페르가몬) 대주교(1931-      )의 생각

 

 

만일 ‘-이후가 교부들을 뒤에 제쳐두고서 그들의 인도없이 어떤 신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오이다. 교부들을 안내자로서 두지 않는 신학은 더 이상 정교신학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이 학술회의의) 주제는 잘못된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에게는 교부들을 지나쳐 넘어가야 할 아무런 필요성이 없으며, 오직 그들을 해석해야할 필요만이 있다... 마치 교부들이 오모우시오스’(όμοούσιος: 본질이 같은)라는 말을 도입함으로써 자신들이 성경을 넘어서 가고 있다고 믿지 않고, 다만 그저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고 믿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고백자 막시모스 성인(580년경-662)이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의지를 주장했을 때 자신이 칼케돈 공의회(451. 4차 세계공의회)를 넘어서 가고 있다고 믿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도 교부들이 쓰지 않은 용어와 생각들을 가지고 그들을 바르게 해석하더라도 이른바 교부이후신학에 관계하지 않게 된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교부적 종합은 현존하는 본문들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답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 만일 교부들이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이같은 과제는 어려우며, 플로로브스키 신부(Fr Georges Florovsky, 1893-1979)의 말대로 대담하고 용기있게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누가 그런 신학이 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교부들이 그 당시에 말한 것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여느 선생님들처럼 교부들도 자신의 제자들을 앵무새로 만드는 것은 싫어하며, 도리어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그들 자신의 언어(단어)이야기하는 것을 기뻐한다. ‘우리 자신의 언어는 우리가 속한 문화가 제기하는 물음들이며, 우리는 이런 물음들에 대해 교부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대답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이 교부들을 영원한 만고불변의 교사로서 대체할 수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교부들을 더 깊이 이해해야만 하며, 그러므로써 교부들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를 알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교부적 종합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정교신학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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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울라스) 대주교는 정교신학에 대한 교부이후적 접근을 단번에 거부하면서도 정교신학을 그저 과거의 권위를 반복하는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적으로 교부들을 따르기 위해서는 현대생활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도전들에 대해 창조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그의 접근법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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