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오케 4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9

9세기 성화 논쟁의 끝 거룩한 성화에 대한 공경이 정식으로 교회 안에서 지지를 받은 787년의 공의회에 뒤이어서, 다시 한 번 더 성화(이콘)에 대한 공경과 공경자들 모두를 공격한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리니 여왕이 802년에 죽자, 아르메니아인 레오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815년에 그는 교회에서 성화를 신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 신자들이 성화를 공경하거나 그것에 입맞추지 못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815년의 성지주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위대한 스투디오스(Studios) 수도원의 원장인 성 떼오드르는 성화를 든 채로 거리를 행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 행진은 황제의 공격과 고문, 살인을 낳았습니다. 오로지 843년에만, 떼오도라 왕비가 주도권을 갖게 되자 메토디오스 총대주교의..

정교회의 역사 2021.02.24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8

8세기 성화 논쟁 8세기에 동방의 이소리안(Isaurian) 통치자인 레오 3세(717-741)와 콘스탄티노스 5세(741-775)는 교회를 자신들의 지배 아래 종속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얻으려고 이 두 황제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였는데, 특별히 교회의 일치를 수호하는 수도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공격은 성화(이콘)을 공경하는 이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박해의 대상자들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확히 우상숭배와 이교주의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성화에 대한 지나친 공경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753년에 열린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공경하는 것을 정식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교회와 공공건물, 그리고 사람들의 가정에서 모든..

정교회의 역사 2021.01.25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6

6세기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1세와 단성론자들 동방에 있는 정교회 역사의 6세기는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1세(527-565년 재위)의 사람됨과 정책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거룩한 일에 관계하는 사제직과 인간들을 다스리는 제국 사이의 일치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제국의 서쪽 방면을 야만적인 침입자들로부터 되찾는 것과 단성론자들을 설득하여 칼케돈 공의회의 정교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인 교회와 제국을 완전히 재결합시키고 싶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이 이끄는 군대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의 첫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시도가 대담하고 지속적이긴 했지만 둘째 목표에는 실..

정교회의 역사 2020.12.12

+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5

5세기 내적인 투쟁 5세기초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이 교회와 제국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각자의 위치에 대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전통적 칭호로써 존경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는 성모님에게서 나신 분은 영원한 하느님의 로고스가 와서 거하시는 ‘사람’일 따름이지 로고스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뜻하는 테오토코스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성 끼릴로스(444년 안식)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육신을 따라’ 성모님에게서 나신 분은 바로 거룩한 하느님의 로고스이시기 때문에 성모님..

정교회의 역사 2020.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