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1세와 단성론자들
동방에 있는 정교회 역사의 6세기는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1세(527-565년 재위)의 사람됨과 정책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거룩한 일에 관계하는 사제직과 인간들을 다스리는 제국 사이의 일치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제국의 서쪽 방면을 야만적인 침입자들로부터 되찾는 것과 단성론자들을 설득하여 칼케돈 공의회의 정교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인 교회와 제국을 완전히 재결합시키고 싶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이 이끄는 군대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의 첫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시도가 대담하고 지속적이긴 했지만 둘째 목표에는 실패했습니다.
단성론자들을 설득해서 정교회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유스티니아노스의 주된 시도는 칼케돈 공의회의 지지자들인 세 신학자를 공식적으로 정죄함으로써 널리 환영받았으나, 칼케돈에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서는 경멸되었습니다. 544년의 제국 법령과 553년에 열린 공의회, 곧 전통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 또는 제 5차 세계 공의회로 불려지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유스티니아노스는 공식적으로 이른바 ‘세 가지 장’(Three Chapters)을 정죄했습니다. 이것들은 씨르의 떼오도레(Theodoret of Cyr), 에데사의 이바스(Ibas of Edessa)의 불쾌한 작품들과 몹수에스티아의 떼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의 작품과 사람 자신입니다.
‘세 가지 장’의 정죄는 칼케돈 공의회를 엄격하게 지지하는 이들을 불쾌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들 세 신학자의 잘못되고 애매모호한 가르침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정죄될 만한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칼케돈의 정교신앙에 대한 단성론적인 반대자들을 달래보려는 유스티니아노스의 노력은 ‘세 가지 장’을 정죄함으로써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같은 수단으로는 교회 또는 제국과 재결합하기를 반대하는 이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제 5차 세계 공의회
‘세 가지 장’의 비(非)정교적이고 모호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에 덧붙여서, 제 5차 세계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위격적으로(hypostatically) 결합되어 있다는 정교의 교리를 주의를 기울여 명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 개의 긴 성명을 통해서 공의회는 모호함이 없이 전통적인 정교 신앙을 확증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시며, 당신 자신 안에 하느님과 사람의 두 본성을 인격적으로(또는 위격적으로) 결합시키신 전적으로 동일한 신적 인격(hypostasis)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그 두 본성이 서로 융합되거나 서로 분리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5차 공의회는 또한 오리겐(254년 사망)과 많은 비정교적인 교리가 담긴 그리스도교의 ‘정신주의적’(spiritualistic) 해설본(解說本)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그의 6세기 제자들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물질이 되지 않으신 오직 한 분뿐인 창조된 영이시고, 사람의 영혼은 (그보다) 먼저 있던 영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물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한 영화(靈化)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1세와 개혁
유스티니아노스의 통치 때에는 또한 제국 안에 있는 그리스풍의 이교주의적 잔재에 대한 일치된 공격이 있었습니다. 아테네 대학은 529년에 문을 닫았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문화가 장려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제국의 도시와 제국 곳곳에 많은 교회 건물을 지었는데, 특별히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리고 이집트의 시나이 산 위에 세웠습니다. 그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은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져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께 바쳐진 성전, 곧 장엄한 ‘아기아 소피아’(거룩한 지혜) 성당입니다. 나무에 새기고 모자이크로 만드는 성화 제작이 이때에 한창 꽃을 피웠습니다. 야만인들의 정복기에 서방에서 제국의 정부가 있던 라벤나(Ravenna)의 바실리카식 건물들도 건축되었습니다.
예식의 발전
많은 예식용 성가들이 쓰여졌는데, 그 가운데는 성탄절 시기송(콘다키온)과 성가 작가인 성 로마노스(510년 사망)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 황제 자신도 성가 ‘독생자’를 썼는데, 이 곡은 정교회 성찬예배에서 지금껏 불려지고 있습니다.
6세기에는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곳곳에 예식에 따른 예배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 확립되었는데, 이는 특별히 콘스탄티노플의 예식에 대한 실천들이 제국 여러 곳의 다른 도시들에 의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팔레스타인 중심부의 교회생활에서 이미 쓰이는 어떤 예전적 축일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축일로서는 성모님의 탄생과 성모님의 안식축일, 그리고 주님의 입당축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주님의 변모축일이 지켜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간 제국 수도의 축일 축하에 덧붙여서, 형식을 갖춘 예전적 입당과 교회의 성찬예배에서 삼성송(뜨리사기온)과 신앙의 신조를 낭송하는 것과 같은 요소들이 덧붙여졌습니다.
여러 요소들을 수렴함으로써 교회의 예전적인 의식과 경건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이 요소들이 바로 다른 교회들의 모범이 되는 콘스탄티노플적인 교회의 생성이었는데, 곧 제국 교회에 어울리는 의식의 발달과 아레오바고인 디오니시오스의 이름으로 쓰여진 신비신학의 출현, 그리고 단성론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제국 권력층의 시도들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실천들이 초대 교회의 원래 유대교적이면서 그리스도교적인 예배,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에서 발달된 기도의 규칙,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예전적인 실천과 결합되었는데, 이는 정교 역사에서 예전적인 예배의 첫 위대한 종합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섯 곳의 총대주교청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적어도 동방의 그리스도인들 마음속에서는 유스티니아노스 황제가 ‘우주의 오감’이라고 일컬었던 콘스탄티노플,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다섯 총대주교청 가운데 첫째 가는 교구로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에큐메니칼’이라는 명칭은 제국의 도시에 있는 모든 수장들의 지위에 붙여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고행자 요한(528-595)이 에큐메니칼 총대주교라는 명칭을 취했을 때, 로마의 주교(590-604)인 교황 성 대 그레고리는 그리스도교의 사목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신학자이면서 성인과 같은 명성을 얻은 사목자였던 성 대 그레고리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사순대재의 주중에 정교인들이 드리는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방
성 대 그레고리 말고도 눌시아의 성 베네딕뜨와 그의 수도원 제자들은 이어지는 서방 교회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야만 했습니다. 이 세기의 성인들 가운데에서는 성 대 그레고리와 동시대인인 성 골룸바와 캔터베리의 성 어거스틴을 말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들은 서유럽과 영국, 아일랜드의 야만인 부족들 속에서 일한 선교사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합니다.
스페인에서는 6세기와 7세기에 ‘필리오케’(filioque)라는 말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덧붙여졌습니다. 침략해 오는 야만인들, 곧 아리우스주의자들인 이들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취해진 이 행동은 나중의 교회 역사에서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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