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의 역사

+토마스 홉코 신부의 교회사 7

ttoza 2021. 1. 7. 11:33

 

고백자 막시모스 성인(662년 안식)

 

성 마르티노 로마의 교황(655년 안식)

7세기

아레오바고인 디오니시오스

6세기에 아레오바고인 디오니시오스의 이름으로 나타난 신학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4차와 5차 세계 공의회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작품들은 예배 의식에 대한 상징적인 해설을 통하여 교회의 전례적인 경건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작품들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불가해성과 그분의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에게 그분은 절대적인 타자’(他者)임을 강조하는 신비신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들에 담긴 그리스도에 관한 한 가르침은 7세기에 중대한 어려움을 낳게 됩니다.

 

디오니시오스의 작품들에는,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가지 서로 다른 활동과 작용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신인(神人)적인 의지와 행동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뿐인 신인(神人)의 의지를 지니셨음을 뜻한다 해서 일의론’(一意論 monothelitism)이라고 불리우거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 뿐인 신인의 행동, 작용 또는 에너지만을 지니셨음을 뜻하기 때문에 ‘monoenergism'이라고 불려집니다. 이런 교리적 형식화가 궁극적으로 단성론자들의 분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아가서 그들을 교회에 재결합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이론은 열렬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실 단성론자들은 거짓(또는 위[僞], pseudo) 디오니시오스의 작품들 속에 담긴 가르침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 작품들을 쓴 익명의 저자 자신은 단성론자와 매우 비슷했습니다.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5세기 중엽 이후에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이들의 기대했던 재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재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오직 하나 뿐인 신인의 의지와 행동이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고백자 성 막시무스(662년 사망)와 로마의 교황 성 마르티노(655년 사망)이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고백자 성 막시무스와 성 마르티노

자신들의 충실한 지지자들과 함께 이 두 사람은 주장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인격 속에 두 가지 별개이고 분리된 본성을 지니신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르고 분리된 의지와 행동을 지니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부들께서는 성모님의 한(one) 아들이신 하느님의 한(one) 아들이 계시다고 주장했지만, 그 한(one) 아드님께서는 하느님과 사람으로서 서로 다른 의지와 행동을 지니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같은 신적 의지와 에너지, 행동, 작용, 그리고 힘을 완전하게 갖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적인 의지와 에너지, 행동, 작용, 그리고 힘을 완전하게 갖고 계십니다. 구원은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간적 의지(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인간적 의지)를 당신의 신적 의지(하느님의 의지)에 자유로이 그리고 기꺼이 복종시키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께서 정말로 인간적인 의지를 갖고 실재의(진짜) 사람이 되신 것은 실재의 사람으로서 성부께 완전하며 기꺼이 하는 복종을 통해 모든 의()를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마지막인 아담으로서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은 바로 당신의 진정한 인간적 행위를 통해서입니다.

 

성 막시무스와 성 마르티노는 일의론적인 입장을 반대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단성론자들과 재결합하는 한 수단으로서 일의론을 쓰기를 몹시 바랬던 제국의 권력에 의해서 유배되고, 감옥에 갇혔으며, 고문을 당했고, 특히 막시모스 성인은 혀와 오른팔이 잘렸습니다

 

6차 세계 공의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두 성인의 가르침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6차 세계 공의회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의 세 번째 공의회가 680-681년에 열려서 그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확증하였고,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진정한 인간성을 없애버린 채 그분에 대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세르기우스 총대주교와 로마의 호노리우스 교황을 정식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신학 작품들

고백자 성 막시무스는 또한 영적이고 금욕적인 주제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그의 동시대인이며, 시나이 산의 성 까떼리나 수도원 원장인 성 요한 끌리마꾸스(649년 사망)는 영적인 삶에 관한 고전적인 작품인 신성한 상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를 썼습니다. 7세기에 크레테의 성 안드레아(712년 또는 726년 안식)는 여전히 사순대재 동안 정교회에서 읽혀지는 속죄의 까논’(canon: 정교회에서 부르는 성가로서,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형태를 띠고 있다. 역자주)을 썼습니다.

 

이슬람의 탄생

7세기에는 또한 예언자 모함메드에 의한 이슬람의 탄생이 있었는데, 그는 622년에 메카로 도망감으로써 회교(Moslem)의 기원을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종교의 추종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도교 제국을 공격했는데, 이 당시 그리스도교 제국은 페르시아인들과 오랜 전쟁을 벌인 뒤 매우 약해져 있었습니다.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를 갖고 있던 적들로부터 그것을 되찾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 온 것이 바로 이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제국 곳곳에서는 십자가 현양 축일이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7세기의 30년대까지는 십자가를 공경하기 위한 9월의 특별한 날(지금은 새로운 개정 축일표에 따르면 14. 역자주)이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지켜졌습니다.

 

퀴니섹스트(Quinisext) 공의회 또는 뜨룰로(Trullo) 공의회

7세기말, 아마도 692년에 한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제국 궁전의 돔(dome)으로 이루어진 방 또는 뜨룰로에서 열렸습니다. 거기에서는 102개의 교회법 규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법들은 또한 퀴니섹스트(5, 6차라는 뜻. 역자주) 공의회의 교회법이라고 불려지는데, 그것은 그 법들이 아무런 교회 법령도 만들지 않았던 5차와 6차 세계 공의회의 작업을 계속해서 잇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법들이 이미 있는 유스티니아노스 시대의 사회 법규와 교회법을 서로 종합함으로써 정식의 교회법을 새롭게 하려고 했습니다. 다른 것들은 초대 교회의 실천과 훈련에 관한 규범들을 더 세심한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이를테면 이 법들은 혼인한 남자는 아내를 둔 채로 보제와 사제직에 임명될 수가 있지만, 이미 성직을 받은 보제와 사제는 혼인을 할 수가 없다는 것에 관련된 규정을 공식화했습니다. 공의회는 오직 독신자만이 주교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유스티니아노스 시대의 법을 강화시켰습니다. 이 공의회는 또한 성직을 받을 수 있는 나이를 규정했으며, 성직자들과 관련된 전통적인 교회의 규율을 다시 확인했는데, 이를테면 성직자들이 세속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는 것 따위가 그렇습니다.

 

예식의 발전

뜨룰로 공의회의 교회법에서는 부활절 전에 40일의 금식 기간을 반드시 둘 것, 이 대사순절의 평일에는 감사의 성찬예배를 드리지 못하며, 대신에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분명히 공포되었습니다.(교회법 52) 그 법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일에는 회개의 무릎꿇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영화롭게 하도록 요청합니다.(교회법 90) 이 공의회는 평신도가 성당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으며, 정교인이 비정교인과 결혼성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교회법 69, 72) 공의회는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는 이가 훈련받지 않은 채 소리를 내는 것교회에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는 어떤 선율을 쓰는 것도 금하도록 명하였습니다.(교회법 75) 공의회는 정당한 이유없이 계속해서 세 주일동안 성찬예배에 빠지는 사람을 파문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교회법 80) 마지막으로 공의회는 낙태를 일으키는 약을 주는 사람과 임신 3개월이 지난 태아를 죽이기 위해 약을 쓰는사람에게 살인에 해당하는 벌을 주도록 요구하였습니다.(교회법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