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가평(청평)의 구세주변모 수도원에는 한국정교회 수호성인 24인의 성해(holy relics)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성인들의 생애를 간단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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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교회 24인 수호성인들
(2009. 11 현재)
일반적인 분류
[주교]
1. 미라의 성 니콜라오스(12월 6일, ♱330)
2. 메팀나의 성 이그나티오스(10월 14일, ♱1566)
3. 모스크바의 성 이노켄티오스(3월 31일, ♱1879)
4. 뻰타폴리스의 성 넥타리오스(11월 9일, ♱1920)
[대순교자]
5. 성 게오르기오스(4월 23일, ♱303)
6. 성 빤뗄레이몬(7월 27일, ♱305)
7. 성 까떼리나(11월 25일, ♱305)
[사제순교자]
8. 성 하랄람보스(2월 10일, ♱198)
[5인 순교자들](12월 13일, ♱296)
9. 성 아프크센티오스
10. 성 에브게니오스
11. 성 마르다리오스
12. 성 에브스트라티오스
13. 성 오레스티스
[수녀순교자]
14. 아테네의 성 필로테이(2월 19일, ♱1589)
15. 상트 페쩨르부르그의 성 엘리사벹(7월 18일, ♱1918)
[수도자]
16. 에집트의 성 마카리오스(1월 19일, ♱390)
17. 메팀나의 성 테옥티스티(11월 9일, ♱885)
18. 무롬의 성 베드로(6월 26일, ♱1228)
19. 성 테오도라 아르타의 황후(3월 11일, ♱1281)
20. 라도네즈의 성 세르기오스(9월 25일, ♱1392)
21. 성 막심 그리스인(1월 21일, ♱1556)
22. 사로프의 성 세라핌(1월 2일, ♱1833)
23. 성 빠나기스 케팔리니아인 사제(6월 7일, ♱1888)
24. 아토스산의 성 실루아노스(9월 24일, ♱1938)
안식년도순
1. 성 하랄람보스 사제순교자(♰198)
2. 성 아프크센티오스 순교자(♰296)
3. 성 에브게니오스 순교자(♰296)
4. 성 마르다리오스 순교자(♰296)
5. 성 에브스트라티오스 순교자(♰296)
6. 성 오레스티스 순교자(♰296)
7. 성 게오르기오스 대순교자(♰303)
8. 성 빤뗄레이몬 대순교자(♰305)
9. 성 까떼리나 대순교성녀(♰305)
10. 성 니콜라오스 미라의 주교(♰330)
11. 성 마카리오스 에집트인 수도자(♰390)
12. 성 테옥티스티 메팀나의 수녀(♰885)
13. 성 베드로 무롬의 수도자(♰1228)
14. 성 테오도라 아르타의 왕비수녀(♰1281)
15. 성 세르기오스 라도네즈의 수도자(♰1392)
16. 성 막심 그리스인 수도자(♰1556)
17. 성 이그나티오스 메팀나의 주교(♰1566)
18. 성 필로테이 아테네의 수녀순교자(♰1589)
19. 성 세라핌 사로프의 수도자(♰1833)
20. 성 이노켄티오스 모스크바의 주교(♰1879)
21. 성 빠나기스 케팔리니아인 사제(♰1888)
22. 성 엘리사벹 뻬쩨르부르그의 공주(♰1918)
23. 성 넥타리오스 뻰타폴리스의 주교(♰1920)
24. 성 실루아노스 아토스산의 수도자(♰1938)
축일순
1월(January)
2일: 성 세라핌 사로프의 수도자(♰1833)
19일: 성 마카리오스 에집트인 수도자(♰390)
21일: 성 막심 그리스인 수도자(♰1556)
2월(February)
10일: 성 하랄람보스 사제순교자(♰198)
19일: 성 필로테이 아테네의 수녀순교자(♰1589)
3월(March)
11일: 성 테오도라 아르타의 왕비수녀(♰1281)
31일: 성 이노켄티오스 모스크바의 주교(♰1879)
4월(April)
23일: 성 게오르기오스 대순교자(♰303)
6월(June)
7일: 성 빠나기스 케팔리니아인 사제(♰1888)
25일: 성 베드로 무롬의 수도자(♰1228)
7월(July)
18일: 성 엘리사벹 뻬쩨르부르그의 공주(♰1918)
27일: 성 빤뗄레이몬 대순교자(♰305)
9월(September)
24일: 성 실루아노스 아토스산의 수도자(♰1938)
25일: 성 세르기오스 라도네즈의 수도자(♰1392)
10월(October)
14일: 성 이그나티오스 메팀나의 주교(♰1566)
11월(November)
9일: 성 넥타리오스 뻰타폴리스의 주교(♰1920)
성 테옥티스티 메팀나의 수녀(♰885)
25일: 성 까떼리나 대순교성녀(♰305)
12월(December)
6일: 성 니콜라오스 미라의 주교(♰330)
13일: 성 아프크센티오스 순교자(♰296)
성 에브게니오스 순교자(♰296)
성 마르다리오스 순교자(♰296)
성 에브스트라티오스 순교자(♰296)
성 오레스티스 순교자(♰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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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라핌 사로프의 수도자(1월 2일)
어린 프로코로스
성인께서는 1759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500km 정도 떨어진 쿠르스크 지방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이 당시는 이른바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빛이 유럽과 러시아를 가득 채우면서 무신론(無神論)과 (기독교) 박해의 어두운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던 때였다. 성인의 부모님인 이시도로스와 아가티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불행히도 아버지는 성인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릴적 성인의 세례명은 프로코로스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해에 큰 병이 들었지만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경험을 하였다.
사로프 수도원
열일곱 살이 되던 1776년 성인께서는 어머니의 축복을 받고 모스크바 남동쪽의 사로프(Sarov)에 있는 수도원으로 가 예비수도자로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성인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무엇이나 열심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예배에 참석했다가 맨 나중에 자리를 뜨는 열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성서를 읽고 기도를 드리면서 잠은 네 시간씩 잤으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엄격한 금식을 지켰다. 잠과 휴식이 부족하여 중병에 들기도 하였으나 의사를 불러오는 대신에 기도를 통해 고침을 받았다. 1786년 보제서품을 받고 ‘불꽃’ 또는 ‘불타는’이라는 뜻을 가진 ‘세라핌’을 수도명(修道名)으로 받은 성인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온 환상들을 통해 자신을 더욱 강하게 해주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항상 불타올랐다.
‘불꽃’같은 수도자
1793년 사제로 서품되신 성인께서는 일 년 뒤인 1794년 완벽한 고독 속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하느님과만 친교를 나누기 위해 수도원에서 5km 정도 떨어진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인은 난방용 장작을 패고 먹을 채소를 기르는 일 외에 모든 시간을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명상하는 데 보냈다. 축일이나 주일이 오면 수도원으로 가서 예배를 드렸으며, 몇 조각의 빵을 들고 숲속으로 돌아오다가 그 빵을 들짐승이나 새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기간에 오두막을 덮친 강도들이 도끼와 몽둥이로 성인의 머리와 허리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고, 성인께서는 다섯 달 동안의 투병생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지만 그 이후로는 허리가 굽어진 채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아야만 하는 몸이 되었다.
영적인 가르침과 예언들
1810년, 십오 년 동안의 숲속 생활을 접고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성인께서는 자신의 방에서 완전한 침묵과 기도와 명상의 생활을 계속하셨다. 그리고 오년이 지난 다음 당신 방의 문을 열고 방문자들을 맞이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침묵을 깨는 일은 없으셨다. 그리고 다시 십 년이 흐른 뒤인 1825년에 비로서 성인께서는 영적인 가르침들을 수도자들과 교인들에게 베풀기 시작하셨다. 러시아 각지에서 성인의 축복과 영적인 지도를 받으려고 신자들이 사로프로 몰려들었으며, 성인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슬픈 사람들을 위로하며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만드셨다. 또한 성인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 장차 있을 크림전쟁(Crimean War, 1853-1856)과 기근(饑饉) 그리고 한 세기 뒤에 러시아 백성들이 겪을 두렵고도 지난(至難)한 시련(곧, 공산주의 혁명) 등을 예언하셨다.
성인의 안식과 시성(諡聖)
1833년 1월 1일, 새해 첫 날이며 주일인 날에 거룩한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고 난 뒤, 성인께서는 수도원의 모든 형제들에게 축복을 하시면서 ‘너의 구원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분투하라! 승리의 월계관이 준비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방으로 가셔서 문을 걸어 잠근 채 그날 밤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돌려드렸다. 바로 다음날인 1833년 1월 2일 월요일, 동료 수도자들이 성인을 발견하였을 때는 성모님의 성화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부활성가를 부르는 자세였다. 성인께서 안식하신지 70년이 되던 해에 거룩한 성해의 이장(移葬)이 이루어졌으며, 1903년 7월 19일 러시아정교회는 황제 가족과 러시아 전역에서 몰려온 수많은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으로 세라핌 수도자를 성인으로 공표(公表)하였다.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1926년에 성인의 성해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탈취되었으며, 그 뒤 그 자취를 알지 못하다가 1991년이 되어서야 그것들이 상트뻬쩨르부르그의 무신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성인의 성해는 성인께서 오래도록 돌보셨던 디베예보(Diveyevo)의 수녀원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성 마카리오스 에집트인 대수도자(1월 19일)
누명을 뒤집어 쓴 청년
성인께서는 서기 300년경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三角洲)에 위치한 한 마을(Jijber)에서 태어나셨으며, 처음에는 낙타 몰이꾼(camel driver)으로서 일을 하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홀로 살기 위해 마을의 한 작은 집에 기거하기 시작한 성인께서는 전적으로 기도와 금욕생활에 몰두하였다. 이윽고 사람들이 성인을 사제로 만들려 하자 성인께서는 다른 마을로 도망쳤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한 임신한 소녀가 자신이 아이를 배게 된 것은 바로 마카리오스 성인이 자신을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성인을 고소하였다. 성인은 즉시 붙잡혀서 목에 남비를 두른 채 길로 질질 끌려 다니며 주먹과 욕설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신에게 거짓 누명을 뒤집어씌운 소녀와 그가 낳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몸소 일을 하였다.
사람들의 존경을 피해 달아나다
마침내 성인의 결백함이 드러나게 되자 마을사람들은 존경심을 가득 품은 채 달려와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헛된 영광을 피해 다시 메마르고 황량한 스케티스(Scetis: 오늘날의 Wadi Natrun) 사막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금욕생활에 전념하였다. 성인께서는 일주일에 그저 한 번 약간의 빵과 물을 마셨으며, 당신 방의 벽에 기대어 잠시 자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침묵과 마음의 기도를 꾿꾿하게 지속해 나가시면서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낯선 생각으로부터 당신 자신의 영혼을 지키셨다. 성인께서는 그 높은 덕(德, virtues)으로 인해 곧 에집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많은 방문객들이 스케티스 사막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땅 위의 신’
성인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기쁨과 단순한 태도로 맞아 들였고,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교훈이 되는 말 한 마디나 기도로써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후하게 제공해 주었다. 또한 성인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존중하여 포도주를 조금 내놓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당신 자신이 (손님들과 함께) 마신 포도주의 잔 수와 똑같은 날 동안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시곤 했다. 당시 사람들은 성인을 가리켜 ‘지상의 신’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섭리(攝理)로써 보호하시듯 성인께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마치 보지 않은 것처럼 숨겨주고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주었다. 성인께서는 90세가 되어 평안히 안식하셨다.
성 막심 그리스인 수도자(1월 21일)
오토만 제국 시대
본래 이름이 미하일 티볼리스였던 성인은 비잔티움 제국이 오토만 터키에게 멸망한 직후인 1470년경 아르따(Arta)에서 태어나셨다. 성인의 집안은 일찍이 총대주교를 배출한 훌륭한 가문이었는데, 성인은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로 가서 당대의 최고 지성들에 견줄만한 학문을 쌓았다. 그 후 1507년경 그리스로 돌아오는 길에 성인은 아토스산의 바토페디(Vatopedi) 수도원으로 들어가 막시모스(Maximus)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자가 되었다. 겸손하면서도 생각이 깊었던 성인은 10년 동안 학문연구와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1516년 러시아의 대공(大公)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요청해옴에 따라 시편과 여러 정교회서적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기 위해 성인은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성인은 그리스어 성경과 예식서들의 슬라브어 번역본에 있는 많은 오류들을 바로 잡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로써 타타르족의 침입 이후 이른바 ‘영적인 굶주림’ 속에 놓여있던 러시아인들로부터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러시아의 감옥에서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성과는 성인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모함할 빌미를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525년 결과적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회법정에 서게 된 성인은 이단으로 단죄된다. 이 재판 결과에 따라 성인은 볼로콜람스크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배고픔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모든 소지품을 빼앗긴 성인은 성체성혈을 받는 것과 책을 읽을 자유마저 거부당한채 오로지 기도에만 의지하면서 자신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가 성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인내하여라! 이곳에서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너는 영원한 형벌에서 해방될 것이다.’ 이같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은 성인은 감사하는 마음을 억누를 길 없어 종이 한 장 없는 자신의 방에서 석탄 조각을 분필 대신 집어 들고 방 벽에 성령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성가를 써내려갔다. 지금도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수도원들에서 성령강림절(오순절) 뒤 첫 월요일에 이 성가를 부른다.
의로운 성인의 고난과 영광
그 뒤 육년이 지난 1531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교회법적인 지위와 관련된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다시 재판을 받게 된 성인은 종신형을 언도받고 트베르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지역 주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나마 신학적 저술활동과 서신교환등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551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팔십 일세로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때가 되어서야 성인은 여러 경건한 귀족들과 성 세르기우스-성삼위 수도원 수도원장 등의 탄원에 힘입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예우를 갖춘 채 모스크바로 모셔진 성인은 그곳의 수도원에 들어가 안식을 맞을 때까지 신학적 문필작업을 계속하였다. 그 다음해(1552년) 러시아 황제 이반 4세는 러시아교회에 스며든 개신교 캘빈파의 이단사상을 논박하기 위해 공의회를 열기로 하고 막심 성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너무 노쇠하여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성인은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는 대신에 이단에 대한 훌륭한 반박문을 써서 보내 주었다. 바로 이 반박문이 정교 신앙의 위대한 증거자였던 성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성인은 1556년 1월 21일 팔십 육세의 나이로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안식한 뒤 오래지 않아 성인은 ‘러시아교회에 빛을 밝힌’ 성인으로서 존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성 하랄람보스 사제순교자(2월 10일)
연로한 사제
성인께서는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4-211) 시대에 에페소에 가까운 미안더(Meander) 강의 마그네시아라는 도시에서 사셨다. 107세의 나이에 오랫동안 그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아 온 성인께서는 이교도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고, 교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위험한 해악(害惡)을 지어낸다는 모함을 받아 그곳의 통치자 루끼아노스 앞에 끌려오게 된 성인께서는 통치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나를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니 나의 이 늙은 몸뚱아리를 당신이 가장 잔혹하다고 생각하는 고문에 처하도록 하라. 그러면 나의 주 그리스도의 힘이 결코 정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성인께서는 사제복이 벗겨진 채 쇠로 된 날카로운 (고양이나 매의) 발톱모양을 한 고문기구에 의해 살이 뜯겨져나가는 고문을 당하셨다.
성인을 통해 일어난 기적들
그러나 성인의 입에서는 단 한 마디의 비명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성인께서는 ‘내 늙은 몸의 껍질을 벗겨냄으로써 내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원한 축복을 받도록 해주시니 고맙소’ 라고 말씀하셨다. 이같은 광경을 지켜보며 성인의 굳건하기 그지없는 신앙에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화가 잔뜩 난 통치자는 성인에게 달려들어 두 손으로 그 몸을 잡아 뜯으려 하였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의 능력이 통치자의 손을 내리쳐 그의 손은 잘린 채 성인의 몸 위에 생명 없는 나무토막처럼 붙어있었다. 포악한 통치자의 고통스런 비명과 간청을 들은 성인께서는 연민(憐憫)의 정으로 그가 낫기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는 곧 회복되었다. 이 놀라운 기적과 성인께서 보여주신 원수에 대한 사랑을 체험한 루끼아노스와 두 명의 고문담당자(뽈삐리오스와 밥투스)는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거룩한 사제의 순교
이 모든 소식을 전해들은 황제 세베루스는 즉시 300명의 군인들을 마그네시아에 보내 성인을 붙잡아 사슬로 묶은 채 끌고 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성인에게 온갖 잔인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매번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채 무사하였다. 도리어 성인께서는 35년 동안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에게서 악마를 쫓아내었고, 막 죽어 땅에 묻히려 하던 한 젊은이를 살려내어 황제를 놀라게 하였다. 드디어 황제의 딸 갈리니아마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게 되자 황제는 성인의 목을 자르도록 명령하였다. 갈리니아는 장엄하게 순교한 성인의 시신을 잘 거두어 매장하였다.
성 필로테이 수녀순교자(2월 19일)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
오토만 터키가 지배하던 암울한 시대(1528년)에 태어난 성녀께서는 마치 빛나는 별처럼, 압제받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비춰주었으며, 위험에 처한 수많은 영혼들을 정의와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귀족 가문인 베니젤루(Venizelou) 집안에서 그 어머니의 오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얻은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고행과 금욕 그리고 관상(觀想 contemplation) 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열두 살이 되자, 부모들이 힘들게 청원하여 얻은 상속녀로서 성녀의 결혼은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남편은 거칠고 폭력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어서 성녀를 부당하게 학대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이 모든 것을 인내로 견디면서 그가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수도원과 자선시설들
삼년 뒤 남편이 죽자, 성녀는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식에 열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다시 십년 뒤 부모님들마저 돌아가시자 성녀께서는 자신이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다 들여 수녀원을 세우는 일에 썼다. 성녀께서는 한 환상(vision) 중에 첫 사도 안드레아 성인께서 나타나 보여주신 가르침대로 수녀원 설립을 수행하였고, 이 수녀원을 안드레아 사도께 봉헌하였다.(이 수녀원 자리가 바로 현재의 아테네 대주교좌 성당[Metropolis of Athens]이 있는 곳이다.) 또한 성녀께서는 수녀원 곁에 나란히 병원과 가난한 이들, 노인들을 위한 호스피스 시설들(hospices), 여러 가지 일터들(workshops, 요즘 ‘공방’[工房]이라고 하는 따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 그리스도교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 등 온갖 자선시설들을 건립하였다.
하느님과 그 백성들을 위한 순교
이처럼 첫 수도원 건물이 준비되자마자 성녀께서는 자신의 여종들, 다른 많은 젊은 여성들과 함께 필오테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녀의 신앙과 사랑을 시샘한 터키인들은 몸이 성치 않은 성녀를 붙잡아 감옥에 가둔 다음, 그리스도를 부정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굳센 믿음으로 이 고난을 이겨냈고, 무사히 풀려났다. 이후 성녀는 기적과 치유를 행하는 은총을 받아 전보다 두 배나 더한 열정으로 사도적인 활동과 금욕적인 수련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밤 철야예배를 드리던 수녀원에 다시 들이닥친 터키인들은 몽둥이로 성녀를 심하게 때려 거의 빈사(瀕死)상태에 빠뜨렸다. 심한 상처로 인한 고통을 놀라운 인내심으로 참아내던 성녀께서는 마침내 1589년 2월 19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안식하셨다.
성 테오도라 아르타의 왕비수녀(3월 11일)
아름다운 왕비
성녀께서는 1210년 그리스의 데살로니끼에서 태어나셨다. 성녀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고명(高名)한 행정관이요 그리스도인이었다. 성녀의 어머니 엘레니는 딸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였으며, 성녀는 인물과 마음씨 모두가 아름다운 처녀로 자라났다. 그런데 1204년 프랑크족의 제 4차 십자군원정 때 군인들은 성지(聖地)를 이슬람교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名分) 아래 비잔틴 황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면서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이때 비잔티움의 황제와 귀족들은 그 도시를 떠나 소아시아의 폰도스(Pontus)와 니케아 그리고 펠로폰네소스와 이피로스(Epirus: 그리스의 서부지역) 등으로 흩어져서 통치하게 되었다. 1230년 이런 정세 속에서 당시 이피로스 지역을 다스리던 미하엘 2세 앙겔로스(1237-1271)는 성녀를 만나게 되었고, 이내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녀께서는 황후였음에도 화려한 파티를 열거나 금은보화 등으로 치장하는 생활을 피하고 백성들에게 자선과 사랑을 베푸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였다.
고난과 인내의 세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다. 성녀의 남편이 한 귀족 출신의 과부에게 눈이 멀어 성녀를 미워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녀는 임신한 몸으로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궁궐을 나와 5년 동안 이 곳 저 곳을 헤매며 살았다. 이런 속에서도 성녀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인내심을 지닌 채 남편인 황제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남편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산의 작은 동굴을 피난처로 삼아 아기(니키포로스 왕자)를 낳아 기르고 나물을 뜯어 먹으며 살았다. 성녀는 결코 누구를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일이 없이 믿음으로 기도하였으며, 남편인 미하일 왕에 대한 사랑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배고픔에 지친 채 한 시골 사제에게 발견되었다.
다시 찾은 행복과 수도생활
성녀께서 궁전을 나간 5년 뒤 주님의 은총으로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자신의 아내(성녀)를 찾도록 하였으며, 성녀께서 궁궐이 있는 아르타(Arta)로 돌아오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성녀를 칭송하였다. 그후 황제는 회개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이 회개하였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성모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성당 두 개를 아르타에 건립하였는 데 이 성당들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성녀는 수녀가 되어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옆에 세운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경건한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철야예배와 기도, 선행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였다. 1281년에 평안히 안식하신 성녀의 시신은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앞 쪽에 안장되었으며, 그곳으로부터 고칠 수 없는 병과 악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치유 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은 성 테오도라 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성 이노켄티오스 모스크바의 대주교(3월 31일)
유망(有望)한 교구사제
성인께서는 1797년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 지역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까닭에 삼촌집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성인께서는 활기에 넘치는 지적 면모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기술적인 일, 특별히 그 가운데서도 시계를 만들고 나무로 하는 작업에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으며, 어릴 때부터 안식하시는 날까지 이같은 일을 손에서 떼어놓지 않으셨다. 결혼을 하자마자 곧바로 사제가 된 성인께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교구사제이셨다. 그러나 1823년 알라스카에 선교사를 보내기 위해 모스크바의 주교회의가 서신을 보내오자 성인의 마음은 알류샨 원주민들(Aleutians)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도적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다.
우날라스카의 선교
14개월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함으로써 마침내 우날라스카(Unalaska) 섬에 다다른 성인과 가족은 황폐하게 버려져 쓰지 못하는 한 작은 성당을 발견하였다. 당시 그곳 거주민 중 많은 사람들이 이전 세대에 온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긴 하였으나, 그동안 사제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의 기초적인 진리도 모른채 도덕적인 타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성인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당을 손수 재건하고, 기본적인 교리교육을 시행하였다. 그리고는 그곳의 언어를 배워 예식서들과 복음서의 내용을 번역하였다. 또한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위험한 배에 몸을 맡긴 채 항해하면서 설교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같은 ·10년의 노력으로 우날라스카 섬에는 단 한 명의 우상숭배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러시아교회를 새롭게 하심
그뒤 시트카(Sitka) 섬에 정착한 성인께서는 1838년 러시아 여행중에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바로 수도서원을 하였으며, 자녀들은 교회의 보살핌에 맡기었다. 그리고 1840년 캄차카와 알라스카의 주교가 된 성인께서는 시트카로 다시 돌아와 성당과 학교를 세웠다. 또한 3년동안 광활한 캄차카 반도를 3,000마일 이상 가로질러 걸으며 복음을 전하였다. 1850년 시베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야쿠츠크 지역이 성인의 관할로 합쳐지자 성인께서는 아무르강을 따라 만주 지역과 중국에까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셨다. 1868년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러시아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선출된 성인께서는 그뒤 10년 동안 학교와 자선기관, 교회조직등을 새롭게 하고, 무엇보다도 선교사업에 크나큰 영감을 불어넣으시다가 1879년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게오르기오스 대순교자(4월 23일)
훌륭한 근위대 장교
이 위대한 성인께서는 3세기에 소아시아 동부의 가빠도끼아에 있는 부유한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열 살이 되던 해에 성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리스도인인 어머니 뽈리흐로냐(Polychronia)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팔레스틴으로 돌아와 아들을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양육하였다. 잘 생기고 지적이며 예의바른 태도를 지닌 성인께서는 열여덟 살에 군인으로서 복무를 하기 시작하였다. 뛰어난 기량을 보인 성인께서는 자신의 상관을 기쁘게 하여 로마제국의 근위대 사령관으로 빠르게 진급하였으며, 머지않아 최고위직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 번은 전투에서 승리한 뒤 가빠도끼아로 돌아오는 길에 팜필리아 지방의 아탈리아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 데,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용에게 붙잡혀 있던 왕의 딸을 구출해 내고는 그 괴물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에게 주신 이 놀라운 힘을 보고 감탄한 그 곳의 이교도들 전부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함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대박해(304년경) 당시, 황제의 명에 따라 니코미디아로 가게 된 성인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낼 때가 왔음을 직감하시고는 자신의 소유를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노예들 또한 자유를 주어 풀어주셨다. 그리고는 황제와 고관들이 모인 곳 한 가운데 서서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대해 비난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도 공개하였다. 너무도 당당한 이 젊은이의 언변에 놀란 황제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는 근위병들더러 성인의 배를 창으로 찌르도록 명령하였다. 성인의 피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군인들의 창은 한 번 찌르고 나자 곧 말랑말랑한 물질처럼 흐느적거리며 휘어져 버려 못쓰게 되고 말았다.
갖가지 기적과 개종자들
그 다음날 다시 황제 앞에 서게 된 성인께서는 똑같은 굳건함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다. 그러자 군인들은 성인을 날카로운 칼들 위에서 돌아가는 커다란 바퀴 모양의 고문대에 붙들어 맸다. 이윽고 바퀴가 돌자 성인의 몸은 서서히 조각조각으로 찢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 고통을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극복하였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와 성인을 풀어주었고, 모든 상처를 깨끗이 치료해주었다. 성인께서 온전해진 몸으로 황제 앞에 다시 서자 황제의 근위대 군인이었던 아나톨리오스(Anatolius)와 쁘로똘레온(Protoleon)이 큰 소리로 자신들도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소리쳤고, 그들은 즉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성인에게 독을 먹여 죽이려던 한 마법사(魔法師)와 그 무리들 앞에서 삼백년 동안 묻혀있던 한 사람을 살려내자 그 마법사는 성인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알게 된 황제는 마법사와 다시 살아난 사람의 목도 잘라 죽여 버렸다. 이같은 성인의 기적들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인의 감옥으로 찾아와 복음의 진리를 배우거나 자신들의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용기와 인내와 은총에 대한 신뢰
황제가 성인을 다시금 아폴로 신전으로 불러내자 성인께서는 짐짓 희생제사를 바치려는 것처럼 꾸미면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십자 성호를 그음으로써 우상 뒤에 숨어있던 마귀들이 벌벌 떨면서 앞으로 나와 그리스도만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만들었다. 마귀들은 도망쳤고 우상은 땅에 넘어져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교의 사제들과 군중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성인을 끌어냈다. 이때 알렉산드라 황후가 사람들 사이로 용감하게 나서서 ‘게오르기오스의 하느님이여, 오셔서 저를 도와주소서!’ 하고 소리쳤다. 그는 숨겨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고 황후는 성인의 발 아래 쓰러져 평화로이 안식하였다. 그후 성인도 또한 목이 잘려 안식하셨다. 성인의 하인 하나가 성인의 시신을 팔레스틴으로 옮겨 갔고, 성인을 기리며 세워진 성당에서는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성인께서는 용기와 고난 속에서 갖는 인내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제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시다.
성 빠나기스 케팔로니아인 사제(6월 7일)
케팔로니아 섬
성인께서는 1801년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의 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활달한 지성(知性)과 성경 등의 거룩한 책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보여준 성인께서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고, 학교를 책임지는 일을 하셨다. 이때 성인께서는 신앙과 애국적인 열정 사이의 모순을 피하고자(* 당시 그리스 이오니아해의 섬들은 영국이 관할하고 있었으며, 1864년에 본토와 통합되었다.) 오래지않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디오스(Dios) 섬에 있는 블라헤르네(Blachernae)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그후 어머니의 간청으로 릭수리(Lixouri)로 되돌아오긴 하였지만 금욕적인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온 힘을 다하여 영적인 수련을 계속하셨다.
복음적인 삶의 실천
35세에 사제서품을 받은 성인께서는 거의 날마다 성찬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며, 무엇보다도 복음적인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다. 자선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교회로 불러들였다. 성인께서는 교구사제가 되기를 거절한 채 자그마한 성 스피리돈 수도원에 거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가슴 속에 간직해온 영적인 보물들을 오십년 동안 케팔로니아 섬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나누어주었다. 그 섬에서 사셨던 예라시모스 성인(10월 20일)과 안티모스 성인(9월 4일)을 본받아 빠나기스 성인께서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농촌지역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성당들을 돌며 예배를 드리는 일을 계속하셨다. 당신 가족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들처럼 돌보아주셨다. 성인께서 마을에 들어서면 가난한 여인들이 벌떼처럼 성인에게 몰려왔고, 성인께서는 당신의 먹을 것조차 포기하시면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성인께서는 통찰력과 예언의 은사를 받으셨으며, 사람들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그 능력을 쓰셨다. 불행한 죽음을 맞이할 사람에게는 고백성사를 하도록 권하였고, 큰 죄를 저지르려는 사람에게는 은유적인 말로 경고를 하셨다. 그러나 이같은 하느님의 풍부한 선물들도 성인의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고린토 2서 12:7)이 없었다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제가 되고 십 년쯤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극심한 신경성의(nervous) 병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하셨으며, 자신이 죄인이기에 이같은 고통이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셨다. 성인께서는 이 병으로 말미암아 말년에는 5년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지내셔야 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성인께서는 예언과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셨으며, 교인들도 성인의 집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알아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사랑과 존경으로 성인을 찾았고, 이로써 성인께서는 전체 케팔로니아 섬의 영적인 삶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결코 멈추지 않으셨다. 길고 고통스러운 병고를 십자가로 받아들이셨던 성인께서는 1888년 6월 7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이틀 밤과 이틀 낮 동안 구름처럼 몰려든 교인들이 성인의 시신에 경의를 표하였고, 이후 성인에 대한 공경과 기념은 케팔로니아뿐 아니라 그리스 전역에서 멈추지 않고 있다.
성 베드로 무롬의 수도자(6월 25일)
농사꾼의 딸과 결혼한 황태자
황태자인 성 베드로(수도명은 다비드) 성인과 황태자비인 성 페브로니아(수도명은 에프로시니) 성인은 무롬(Murom)의 기적성인들이다. 베드로 황태자는 무롬의 군주인 유리 블라디미로비치의 둘째 아들이었다. 베드로 성인은 1203년 무롬의 군주가 되었다. 군주가 되기 여러해 전, 성인은 나병(癩病, leprosy: 문둥병 또는 한센씨병이라고도 함.)에 걸렸고, 아무도 그 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성인에게 한 환상(vision)이 보였고, 그것을 통해 성인은 한 양봉업자(養蜂業者, bee-keeper: 벌을 쳐서 꿀을 얻는 일을 하는 사람)의 딸이 자신을 낫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여인이 바로 리아잔(Ryazan) 지방의 라스코바(Laskova)라는 마을에 사는 한 소농(小農)의 딸인 경건한 처녀 페브로니아였다. 페브로니아를 본 베드로 황태자는 성녀의 경건함과 지혜, 덕스러움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병이 다 나은 다음 그와 결혼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페브로니아 성인은 황태자의 병을 고치고 나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 사랑스러운 두 부부는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도 서로 변함없이 사랑하였다.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지켜주는 부부성인
그런데 거만하기 그지없는 귀족들은 평범한 집안 출신인 황태자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황태자더러 페브로니아와 헤어지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이 요구를 거절하였고, 귀족들은 이에 맞서 두 부부를 추방하였다. 베드로와 페브로니아 성인은 고향 도시를 떠나 작은 배를 탄 채 오카(Oka)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페브로니아 성인은 베드로 성인을 계속해서 위로하였다. 오래지 않아 하느님의 진노가 무롬의 도시에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드로 성인더러 페브로니아 성인과 함께 어서 돌아오라고 간청하였다. 두 부부 성인은 그들의 경건성과 자선행위로 유명하였다. 두 성인은 다비드와 에프로시니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도자가 된 뒤, 1228년 6월 25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안식하였다. 성인들의 시신은 함께 매장되었다. 베드로 성인과 페브로니아 성인은 그리스도교적인 결혼의 아름다운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자신들의 기도와 중보로써 새로이 결혼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신다. 무롬의 수도자 베드로 성인의 성해가 가평의 구세주 변모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성 엘리사벹 뻬쩨르부르그의 공주(7월 18일)
여왕의 외손녀
성녀께서는 1864년 11월 1일에 태어나셨다. 성녀의 아버지는 독일의 대공작(Grand Duke) 루드비히 4세이고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이었다. 성인의 친여동생인 알리사는 후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꼴라이 2세와 결혼한 황후 알렉산드라이다. 성녀께서는 소녀시절에 여러 가지 일로 영국을 방문하여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으며, 그와는 유창한 영어로 서신교환을 하곤 하였다. 성녀께서는 여섯 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에게서 영국식 전통교육을 받으며 자라나셨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집에서 배우셨다.
러시아의 대공비(大公妃)
성녀께서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아들인 세르기오스 대공작(大公爵)의 약혼녀로 정해졌다. 그러나 동정(童貞)의 삶을 살려던 성녀께서는 대공작도 자신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이같은 희망을 비밀리에 간직한 채 인생의 황혼까지 남매처럼 살기로 합의하였다. 당시에 개신교인이었던 성녀께서는 러시아의 문화와 신앙(정교회)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결혼한 뒤 조금 지나 정교회로 개종하셨다. 이는 단지 편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1891년 4월 25일 성 라자로 부활축일에 견진성사를 받고 엘리사벹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성녀께서는 남편이 모스크바의 시장직을 수행할 때, 순박하면서도 예민한 유머감각과 친근감을 주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였으며, 때로는 자연을 관찰하고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며 산책하길 즐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러내지 않은 채 고아원, 양로원, 감옥 등을 찾아다니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활동을 하기를 좋아하였다.
고난과 순교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성녀께서는 부상자들을 위한 구급차와 병원 등의 의료활동을 조직하여 도왔다. 그 다음해인 1905년 2월 18일 성녀의 남편인 세르기오스 대공작이 테러리스트가 던진 폭탄에 살해되었다. 성녀는 자신의 남은 삶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는 가지고 있던 보석과 예술품들을 팔아 모스크바에 있는 대저택을 샀다. 그리고 그곳에 마리아와 마르타 수녀원을 세우고 자선사업을 위한 병원과 약국, 외래환자 진료소, 고아들을 위한 교실과 도서관 등을 설치하였다. 수녀원은 1909년 2월 10일에 문을 열었고, 당시에는 수녀가 6명이었으나 일 년 동안에 30명까지 늘어났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성녀는 다음해인 1918년 4월의 사순절 셋째주일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1918년 성 세르기오스 라도네즈의 수도자 축일인 7월 18일 밤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알라파에브스크(Alapaevsky)시 외곽에 있는 광산으로 끌려가 수직갱도(垂直坑道) 안으로 던져져 순교하였다. 후에 함께 순교한 바르바라 수녀와 성녀의 성해는 예루살렘으로 보내졌으며, 겟세마네에 있는 성 막달라 마리아 수도원의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성 판델레이몬 대순교자(7월 27일)
의사가 되고픈 소년
대순교자이며 자선치료자인 성인께서는 4세기 무렵 소아시아의 니코미디아란 곳에서 사셨습니다. 그 시절 로마제국의 황제는 막시미아노스(284-305)였고, 성인의 아버지는 이름난 이교도 에브스토르기오스였습니다. 한편 성인의 어머니 에브불리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당신의 아들 또한 그리스도를 알며 자라가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성인의 어릴적 이름은 판톨레온이었습니다. 성인께서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했고, 커서는 의사가 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명한 의사 에브프로시노스에게 보내어 의술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성인은 매우 열심히 의술을 공부하여 다른 모든 학생들보다 더 뛰어나게 되었고, 이같은 소식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성인은 마침내 황제의 궁에서 일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에르몰라오스 사제
당시 니코미디아에는 에르몰라오스라는 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황제의 손길을 피해 도시 바깥의 한 작은 집에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곳에서 성찬예배와 여러 성사들을 집전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쳤습니다. 사제는 판톨레온 청년을 만나 대화하며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과 모든 병을 고치신 그분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판톨레온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성경의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하며, 사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친척의 눈을 뜨게 함으로써 이교도인 아버지의 마음을 되돌려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성인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참된 하느님을 증거하심
하지만 그 도시의 다른 의사들은 성인을 시샘하여, 성인이 제국의 신들을 부정한다고 고발하였습니다. 황제 앞에 끌려나온 성인께서는 누가 참된 하느님인지를 알아보자고 제안하며, 한 중풍병자를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이교의 사제들이 먼저 기도하였으나 환자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뒤이어 성인께서 그 불쌍한 환자를 위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자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는 마음이 완고해져서 도리어 성인을 고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4년 7월 17일 성인을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성 실루아노스 아토스산의 수도자(9월 24일)*
한 평범한 러시아 농부
성인께서는 러시아의 탐보프(Tambov) 지역에 사는 한 가난한 농사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성인께서는 ‘내가 자라면 하느님을 찾아 온 세상을 두루 다닐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성인들과 고행자(금욕주의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성인의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활활 타올랐고, 이런 사랑을 마음에 간직한 채 자연히 수도생활을 동경(憧憬)하였다. 그러나 점차 성장함에 따라 어린 시절의 생각은 차츰 옅어져 갔고, 강건한 신체를 지닌 여느 농부들처럼 평범한 세속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사람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끝내는 이것이 싸움으로 번졌고, 이 과정에서 그는 싸움의 상대를 거의 죽일 뻔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인은 다시금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며칠 뒤 성인께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뱀 한 마리가 성인의 목구멍 아래로 기어내려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네가 그 뱀을 삼키는 것이 역겹다고 느끼는 것처럼, 네가 살아가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불쾌하다.’ 성인께서는 이 계시로 말미암아 삶에 대한 당신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뒤 오로지 아토스산과 마지막 심판만을 생각하던 성인께서는 1892년 군복무를 마치고 당시 2,000명에 가까운 수도사들로 번성하던 아토스산의 빤델레이몬(Panteleimon)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자가 되었다.
‘예수’ 이름의 힘으로 악마를 이기다
이제 갓 수도생활을 시작한 젊은 수도자로서 성인께서는 쉽게 육체적 욕망을 일으키는(carnal) 생각에 사로잡히곤 하였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유혹에 이끌리기도 하였다. 그러자 성인의 고백을 듣던 영적인 아버지께서는 성인에게 ‘예수기도’(Jesus Prayer)를 하도록 권유하였다. 이후 성인께서는 45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예수기도를 통해, 온갖 사악한 상념(想念)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몰아냈으며, 도리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늘 간직한 채 살았고, 절제하고 삼가는 마음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예수기도에 전념하던 성인께서는 밤에 한 두 시간 눈을 붙이는 것으로 잠을 대신하곤 하였다. 나중에 이백 명이 넘는 일꾼들을 부릴 책임이 주어졌을 때에도 성인께서는 당신의 이같은 영적 (고행) 생활을 완화(緩和)시키지 않았다. 어느 날 영적인 투쟁에 몰두하는 성인에게 악마가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을 예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였고, 주님께서는 성인에게 ‘너의 정신을 지옥에다 두어라. 그리고 낙심하지 말아라!’(Keep thy mind in hell, and despair not!)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자신과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던 성인께서는 1938년 9월 24일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 성인에 대한 공경은 198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즈의 수도사제(9월 25일)
어린 바르톨로메오
성인께서는 1314년 러시아의 로스토브(Rostov)에서 태어나셨으며, 성인의 부모님인 끼릴과 마리아는 성인에게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지어주셨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성인께서는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다른 형제들인 스테파노스, 베드로와 달리 잘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한 수도사를 만나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은 성인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리만치 정확하게 시편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도사는 성인의 부모에게 ‘이 아이는 성삼위의 거처(居處)가 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도록 이끌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로부터 성인께서는 더욱 헌신적으로 성당에 다니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열 두 살이 되자 성인께서는 스스로 금식을 더 엄격히 지키며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수도사 세르기우스
라도네즈(Radonezh)로 이사한 뒤, 성인의 두 형제는 결혼을 하였으나 성인께서는 수도사가 되길 원하였다. 그후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성인께서는 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 형제인 베드로에게 나누어주고, 아내를 잃은 형 스테파노스와 함께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성당과 방을 짓고는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1337년 성인께서 스물 네 살이 되었을 때, 세르기우스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도서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홀로 숲에서 지내며 기도에 전념하였고, 곰에게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등 하느님의 창조물을 향한 넘치는 사랑과 금욕적인 삶을 살며 지내셨다. 그리고 나서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수도자들 열 두 명이 성인에게 와 자신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자 하는 수 없이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인 성인께서는 1354년 사제서품을 받고 수도원장이 되었다.
성삼위 수도원 - 러시아교회 영성의 보고(寶庫)
성인께서는 특별히 가난을 사랑하셔서 수도사들더러 어떤 기부나 헌금도 받지 말 것이며 개인적으로 재산을 소유하지도 말도록 엄격히 지시하였다. 이같은 수도원규칙을 어떤 수도사들은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인의 뜻을 도와주셨다. 이후 수도사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으며, 수도원은 더욱더 발전하였다. 1380년 타타르인들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성인께서는 조국 러시아를 위해 기도하였고 러시아는 승리하여 마침내 타타르인들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와 수도원과 나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신 성인께서는 1392년 9월 25일에 평화로이 안식하셨다.
성 이그나티오스 미팀나의 주교(10월 14일)
귀족출신의 아이
성인께서는 1492년에 미틸리니 섬(오늘날의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셨으며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귀족출신인 성인께서는 어렸을 때는 아갈리아노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453년 5월 29일 오토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다른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성인의 가족들도 그리스에서 가까운 미틸리니 섬으로 갔다. 성인 가족은 미틸리니 섬의 미팀나 지역에 정착하였고, 아버지 마누엘은 사제이셨기 때문에 미팀나 대주교를 보좌하는 일을 했다. 성인께서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수많은 미덕들을 지녔다. 이후 성인은 자라서 정결하고 덕을 두루 갖춘 마리아와 결혼하였으며, 당시 미팀나의 마태오 대주교는 성인에게 신품성사를 거행하였다. 성인은 시골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교인들의 영성생활을 돌보았고, 마을에 있는 성당들을 보수하거나 다시 세우기도 하였다.
시련이 닥침
그런데 전염병이 돌면서 요한 신부(곧, 성인)는 마리아 사모와 자녀들 거의 모두를 잃게 되었고, 단 한 명의 아들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가족적 비극을 겪으면서 성인은 천사의 삶인 수도자의 삶을 살고자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성인은 수도자가 되도 좋다는 영적 아버지의 축복과 아들의 허락을 받은 뒤, 1526년에 개인소유의 토지에 있던 성모님 성당에 정착하였고, 그곳에 수도자들의 방을 마련하면서 첫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뒤 경건한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수도생활을 원했으므로 첫 수도원에서 5마일(8km) 정도 떨어진 리몬이라는 지역에 둘째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성모님 수도원에서는 수녀들이, 리몬 수도원에서는 남자수도자들이 생활하였다. 또한 학교와 고아원을 설립하여 아이들이 교육을 받으며 안정되게 지낼 수 있도록 했고, 성서와 교부들의 책들을 필사(筆寫)하는 학교와 자수(刺繡: 수놓는 작업)를 배우는 학교, 비잔틴 음악학교 등도 세우셨다.
미팀나의 주교
후에 미팀나의 대주교가 돌아가지자 총대주교청의 주교회의에서는 이그나티오스 수도사제를 새로운 대주교로 선출하였다. 성인께서는 자신의 아들인 메토디오스 수도자를 두 개의 수도원을 책임지는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여 그 직을 수행케 하는 한편 자신은 대주교로서 맡겨진 양떼들을 돌보셨다. 그리고 25년 뒤 대주교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남은 생을 수도원에서 보내며 기도와 연구 그리고 수도자들의 영적인 지도에 힘쓰셨다. 자신에게 조언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는 힘과 위로를 아끼지 않으시는 한편으로 거룩한 성서와 교부들의 책을 필사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 몇 책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성인께서는 1566년 10월 14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안식하셨으며 당신의 뜻대로 성모님 수도원 안에 묻히셨다. 1584년 이장(移葬)하기 위해 성인의 무덤을 열었을 때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향내가 나와 성당 안을 가득 채웠으며 성당 밖에 있던 사람들도 그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성인의 성해(聖骸)에서는 향내가 나오고 있으며, 믿음과 경건한 마음으로 성해에 다가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는 계속해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성 넥타리오스 뻰타폴리스의 주교(11월 9일)
어린 아나스타시오스
성인께서는 1846년 10월 1일 그리스 스라키(Thrace) 지역의 셀림브리아(Selymbria)에서 태어나셨다. 성인의 부모님인 디모스(Dimos Kephalas)와 마리아(Maria)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다. 세례명이 아나스타시오스였던 성인은 어려서부터 놀라운 경건성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 초등교육을 마친 성인께서는 콘스탄티노플로 가 학업을 계속하는 한편 가게에서 일을 하였다. 스무 살이 되자 성인은 교사로서 일하기 위해 히오스(Chios) 섬으로 갔으며, 1876년 11월 7일 유명한 네아 모니(Nea Moni)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한 해 뒤에 보제가 된 성인께서는 경건한 섬사람들의 관대함과 알렉산드리아의 소프로니오스 총대주교의 배려에 힘입어 아테네에서 학업을 마치고 신학부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다. 1885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성인께서는 곧 사제서품을 받은 뒤 뻰타폴리스(Pentapolis: 고대의 주교구로 현재는 리비아의 영토임)의 대주교가 되셨다.
온유하고 겸손한 주교
성인께서는 주교로서 복음적인 덕을 기르려는 열정으로 당신의 양떼들을 돌보셨다. 그런데 이같은 성인의 순수한 열정을 시샘한 일부 사람들의 모함으로 성인께서는 크나큰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변호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성인께서는 아테네로 와 설교자로서 수 년 동안 봉사하신 뒤(1891-1894), 사제들을 양성하는 리자리오스(Rizarios) 신학교의 교장직을 수행하게 되셨다. 성인께서는 직접 사목신학을 가르치시면서 교사와 행정 책임자로서 헌신적인 본을 보이시는 한편 수도자로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그리고 학교에서뿐 아니라 아테네의 지역성당에서도 설교하고 정기적으로 성찬예배를 인도하셨다.
애기나의 수녀원
그러나 오랫동안 갈망하던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904년부터 1907년까지 애기나(Aegina) 섬에 수녀원을 위한 준비를 하신 다음, 1908년 교장직을 사임하시고 수도원으로 은퇴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몸소 정원을 가꾸시고 일하시면서 기도하셨다. 성인께서는 바깥세상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절제하셨으나 성인의 덕성과 은총에 대한 소문이 그 지역에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성인을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성인께서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가뭄이 들었을 때에는 기도하여 비가 내리도록 하셨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힘겹던 시절에 성인께서는 어떤 음식도 자신들을 위해 쌓아두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주도록 수녀들에게 가르치셨다. 또한 성인께서는 몸소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윤리, 교회사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기심으로써 서구의 영향으로 정교회 교부들의 전통이 잊혀져가던 시대에 그리스 교회를 살리셨다. 성인께서는 신체적 질병으로 인한 노년의 고통과 또 한 번의 근거없는 비난들을 인내로써 극복하시고 나서 1920년 11월 8일 아테네에서 안식하셨다. 1953년 6월 성인의 성해가 이장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1961년 성인에 대한 공경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성 테옥티스티 수녀(11월 9일)
무인도에 홀로 남겨지다
성인은 9세기경 미틸리니(Mytilene, 지금의 레스보스[Lesbos]) 섬의 메팀나(Methymnia) 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어릴 때부터 기도와 금욕적인 삶에 익숙해 있었다. 성인이 열 여덟살 무렵이던 어느 밤에 여동생과 함께 이웃 마을에 머물고 있었을 때, 악명높은 니시리스(Nisiris)가 이끄는 크레테 출신의 해적들이 그 마을을 덮쳤다. 해적들은 마을을 노략질하고, 성인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노예로 팔기 위해 끌고 갔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파로스 섬으로 옮겨졌다. 해적들이 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해변에 내려놓고 그 수를 세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값을 계산하는 사이, 성인은 섬의 숲이 우거진 곳으로 간신히 도망을 쳤다. 그 당시 그 섬에는 아직 사람이 살지 않고 있었다.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한 해적들은 성인만을 섬에 남겨둔 채 배로 떠나갔다. 뒤에 홀로 남겨진 성인은 35년 동안 그곳에서 온갖 종류의 고난을 겪으며 살았다. 여름에는 태양빛에 그을리고 겨울에는 뼈속까지 파고 드는 추위와 싸우면서 성인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들에 자라는 풀과 열매가 전부였다. 35년 동안 그 섬에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성모님의 도우심과 위로 속에 성인은 오로지 하느님과 교제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다 쏟았다.
고통과 인내의 세월
그 긴 세월이 흐른 어느날, 한 사냥꾼이 우연히 성인이 있는 곳에 오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성모님께 바쳐졌으나 이제는 퇴락(頹落)해버린 그 웅장한 성당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렴풋이 누군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에 떨면서 성녀는 자신이 벗은 몸이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였다. 사냥꾼은 곧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던져주었다. 외투를 걸치고서야 사냥꾼 앞에 나타난 성녀의 모습은 기이한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햇빛에 바래 새하얗게 되어 있었고, 피부는 비바람에 시달려 가무잡잡하게 변해 있었다. 성녀는 살 한 점 없이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는데, 그 몸과 두 손발의 뼈들이 딱딱하고 주름진 피부에 뒤덮여 있어서 마치 그녀의 몸은 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냥꾼은 성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놀랐다.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기전 성녀는 사냥꾼에게 다음번에 올 때 꼭 성체와 성혈을 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 다음에 사냥꾼은 약속한대로 성체와 성혈을 가져 왔다. 성녀는 잠시 기도한 다음, 성체와 성혈을 받았다. 그리고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사냥꾼이 다시 들렀을 때, 성녀는 이미 안식한 상태였다. 그 선량한 사냥꾼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성껏 성녀의 장례를 치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다.
* ‘제 2의 이집트인 마리아 수녀’로 비유되는 성녀의 성해가 가평의 구세주 변모 수도원에 모셔져 있다.
성 까떼리나 대순교 성녀(11월 25일)
위대한 도시의 천재적인 소녀
성녀께서는 막시민(Maximin 305-311)황제 시절, 에집트의 수도이며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귀족 세스투스(Cestus)의 딸이었다. 성녀께서는 고귀한 신분만이 아니라 뛰어난 아름다움과 지성으로 말미암아 널리 우러름을 받았다. 가장 훌륭한 대가(大家)들과 이름난 철학자들에게서 배운 성녀께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계승자들의 철학적 체계들을 완벽히 이해하였다. 또한 문학방면에서도 뛰어나, 호머(Hormer)에서 버질(Virgil: 고대 로마의 시인. 70-19 B. C.)에 이르는 모든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 위대한 도시(곧, 알렉산드리아)를 찾아오는 학자들과 외국인 방문객들에게서 배운 다양한 언어로 온갖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식을 탐구하는 중에서도 특히 의학에 정통하였던 성녀께서는 당시 18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최고로 훌륭하다는 학자들조차 그 지적인 성취를 놀라와 할 정도로 비범한 지혜의 소유자이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결(성)의 위대함을 알고 있던 성녀께서는 자신의 모든 외적(귀족, 아름다움, 부[富])이고 내적(지식과 지혜)인 조건들에 동등하게 부합되는 젊은이만을 배우자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
딸의 결심을 듣고 실망한 성녀의 어머니께서는 도시 가까이에 살고 있던 한 그리스도교 고행자(ascetic)에게 성녀를 보내면서 조언을 구하도록 일렀다. 성녀께서 그토록 찾고 있는 바로 그분(배우자)을 알고 있노라고 말한 고행자께서는 육화하신 하느님이시며, 성부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모든 순결한 영혼을 신부로 받아들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려 주었다. 드디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성녀에게 나타난 성모님께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맺은 천상의 약혼을 가리키는 표시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셨다.
우상과 세속의 지혜를 타파(打破)하심
그런데 당시의 황제가 제국 전체에서 행하는 우상숭배와 불경건한 예식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벌어지자 성녀께서는 황제 앞에 나아가 격렬한 어조로 이를 비난하였다. 성녀의 아름다운 용모뿐 아니라 그 단호함에도 놀란 황제는 급기야 로마 제국 전체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학자들과 철학자, 웅변가, 논리학자들을 불러 모아 성녀와 대결케 하였다. 그러나 성녀께서는 이 모든 상대들이 펼치는 논리의 오류와 모순들을 조목조목 반박하셨다. 한편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한 50명의 웅변가들과 황제의 부인, 그리고 황제의 절친한 친구이자 군대의 지휘관인 뽈삐리오스와 200명의 군인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나 이들 모두 분노한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성녀께서도 끝내 목이 잘려서 순교하시고 말았다. 이후 400년이 지난 8세기가 되어 성녀의 시신이 시나이산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현재도 성녀의 성해로부터는 아름다운 향기와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성 니콜라오스 미라의 주교(12월 6일)
오래 기다려 얻은 아이
성인께서는 3세기말에 소아시아 남서쪽에 위치한 리끼아(Lycia: 까리아[Caria] 남동쪽의 해안지대) 지역의 파타라(Patara)란 곳에서 그리스도인이며 오래도록 자녀가 없던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덕(德)을 사랑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열정을 간직하였던 성인께서는 경건하고 고요한 생활을 즐겼다. 신학교육을 받은 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삼촌인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성인께서는 수년 동안 철야예배와 금식, 기도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성인께서는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그 후로 자선을 베푸는 일은 성인의 가장 큰 미덕이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기적을 베푸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알려주셨다.
미라(Myra)의 주교
성인께서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온 직후 가까이에 있는 미라(Myra)란 도시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되었는 데, 천사가 주교회의에 알려서 성인을 주교로 선출하였다. 4세기초 디오클레티안 황제와 막시미안 황제의 마지막 대박해 때(305년경), 성인께서는 감옥에 갇혀서도 당신의 양떼들을 신앙에 굳건히 서도록 붙잡아주셨다.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권좌에 오른 뒤, 성인께서는 우상을 타파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셨고,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 1차 세계공의회에 참석하셔서는 다른 교부들과 함께 이단자 아리우스의 주장을 논박하고 정교의 올바른 가르침을 확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다. 성인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미라 도시에 불어닥친 흉년을 구제(救濟)하셨으며,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셔서는 모반죄(謀叛罪)로 부당하게 기소된 세 명의 로마 군인들을 변호하여 살려내기도 하셨다. 살아난 세 군인은 성인의 도우심에 감사한 나머지 모두 수도자가 되었다.
사랑이 많은 ‘좋은 목자’
살아계실 때 뿐 아니라 안식하신 뒤에도 성인께서는 곤경에 처한 배와 항해중인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도와주셨다. 이로써 성인께서는 모든 항해하는 이들의 수호자가 되셨다. 오랫동안 성인께서는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으로서 교인들에게 ‘좋은 목자’(Good Shepherd)가 되셨다. 성인의 깊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어떤 불행도, 성인께서 바로잡지 못한 어떤 부정의(不正義)도, 성인께서 제휴(提携: 행동을 함께 하기 위하여 서로 붙들어 이끎)하지 않은 어떤 불화(不和)도 없었다. 성인께서 어느 곳에 나타나시든지 성인의 빛나는 얼굴과 말할 수 없이 그윽한 평화의 기운에 주위 사람들은 매료(魅了)되었다. 평화로이 안식하신 뒤 성인을 기념하여 미라 도시에 지어진 성당 안에 안치된 성인의 성해에 공경을 표하기 위해 해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성인께서는 게오르기오스 성인과 함께 서방과 동방 모두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분이시며, 성인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당의 수는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은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별히 성인은 러시아에서는 수확(收穫)한 곡물의 수호성인으로서, 그리고 서방에서는 모든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성 아브크센티오스, 에브게니오스, 마르다리오스, 에브스트라티오스, 오레스티스
순교자들(12월 13일)
그리스도인 귀족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혹독한 박해기에 공포와 피의 통치는 로마제국의 가장 먼 구석까지 미쳤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배교(背敎)와 순교 사이에서 선택을 하여야만 했다. 당시 소아시아 동부에 있는 사탈라(Satala)라는 아르메니아인 도시에 에브스트라티오스라는 이름의 한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공작(公爵)의 지위에 해당하는 참사관(參事官)으로서 그 지역을 관할하는 상급(上級) 제국서기였다. 숨겨진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침내 순교할 결심을 굳히게 된 성인께서는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결심을 알렸다. 다음날 그 지역의 통치자인 리시아스(Lysias)가 도시 한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 죄수들을 신문(訊問)할 때, 에브스트라티오스는 담대히 그 앞에 나서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 성인은 곧 귀족임을 표시하는 의복과 허리띠를 박탈당한 뒤, 고문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날 밤 성인의 상처는 말끔히 치유되었으며, 성인의 불변하는 믿음을 목격한 동료 시민 에브게니오스도 성인과 함께 신앙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성인들의 고난과 순교
다음날 일찍이 성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 죄수들은 맨발로 또는 쇠못이 박힌 신을 신은 채로 니꼬폴리스(Nicopolis)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으며, 이틀에 걸친 행진 끝에 마침내 에브스트라티오스 성인의 고향인 아라우라까(Arauraka)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창문에 기대어 죄수들의 행렬을 바라보던 마르다리오스는 에브스트라티오스 성인이 모든 세속의 영광을 뒤로 한 채 걷는 모습을 보고는 감동하여, 아내의 격려를 받음 다음 가족들을 믿을만한 친구에게 부탁한 뒤 순교의 행렬에 동참하였다. 니꼬뽈리스에서 통치자 앞에 가장 먼전 불려나온 이는 아브크센티오스 사제였으며, 그는 신문을 당한 뒤 숲으로 끌려가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곧 성인의 시신 중 머리 부분을 찾아내어 수풀 속에 숨겼다. 다음으로는 마르다리오스가 끌려나왔으며, 그는 통치자의 물음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만 간결하게 대답하였다. 고문하는 사람들은 성인의 발목을 뚫어 끈을 꿴 다음 거꾸로 나무에 매달고는 죽도록 매질을 가하였다. 성인께서 안식하시기 전 말씀하신 아래의 기도문은 정교회의 예배(심야과, 제 3시과, 석후대과)에서 날마다 낭독되고 있다.
한 하느님이시고 한 권능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시여, 주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성령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죄지음을 주께서 아시나니 부당한 종인 나를 구하소서. 주는 영원히 축복을 받으시나이다. 아멘.
기적을 베푸시는 성인들
셋째로 불려나온 에브게니오스 성인 또한 혀와 손이 잘리고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몽둥이로 맞은 끝에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셨다. 그런 다음 통치자 리시아스는 군인들의 훈련을 지켜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오레스티스라는 이름의 한 병사가 창을 던질 때, 그의 목에 걸린 금십자가 목걸이가 통치자의 눈에 띄었다. 성인은 곧 통치자 앞으로 불려나와 머뭇거림이 없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에브스트라티오스 성인과 함께 세바스티(Sebaste)의 통치자인 아그리꼴라(Agricola)에게로 보내졌는데, 이는 리시아스가 니꼬뽈리스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인들의 체포에 반발할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닷새 동안의 행진 뒤에 세바스티에 도착한 성인 가운데 먼저 오레스티스 성인이 불려나와 고문을 당하였으며, 아직 젊은 탓에 조금 두려워하던 성인은 에브스트라티오스 성인의 격려에 힘입어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셨다. 홀로 감옥으로 되돌아 온 에브스트라티오스 성인을 밤에 세바스티의 주교인 블라시오스(Blaise) 성인(2월 11일)께서 비밀리에 방문하여 용기를 북돋워 주고 마지막으로 성체와 성혈을 받게 하였다. 다음날 에브스트라티오스 성인은 이미 준비되어 있던 불가마를 향해 성호를 그은 다음 그 속으로 들어가 구약의 세 아이들(다니엘 3장 참조)처럼 감사의 찬양을 드리며 순교하셨다. 그후 오랜 세월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 다섯 성인들은 당신들의 성해(聖骸)와 성화를 통하거나 때로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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