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

교회는 왜 성인을 공경하는가?

ttoza 2010. 10. 1. 22:46

교회는 왜 성인(聖人)을 공경하는가?

               교회의 성인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을 공경하는 이유

 

인간의 지상목표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던져진 화두(話頭)였다. 그리고 인간은 철학과 종교를 통해 그 해답을 얻으려 노력해 왔다.

 

오늘날 인간은 발전된 기술과 지식, 과학 등을 통해 우주의 신비를 풀어 나가고 있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궁극적 목표”에 대해서는 온전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이 물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질적 그의 목표를 발견한다면 그때 인간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삶의 다양한 주제들인 인간관계, 학업, 직업, 결혼, 자식의 생산과 양육의 문제 등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 물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 근본적 주제에 잘못된 답을 준다면 그때 인간은 그의 삶의 다양한 주제에 있어서 결코 그 본질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한 부분적인 문제는 결국 본질에서 벗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을 성서에서 찾아보려 한다.

 

주님께서는 의심이나 곡해(曲解)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베드로1서 1:16)라고 짧지만 분명하게 우리에게 그 답을 주신다. 즉, 주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닮아 거룩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구약의 창세기 1:26절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 인간 존재의 목적을 알려주는 첫 번째 표현이다.

 

이 외에도 성서에는 같은 의미의 다양한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복음 5:48)라고 하셨고 복음서 저자 요한은 그의 복음의 첫 부분에서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복음 1: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 삼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커다란 사랑을 확인한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이 여느 피조물보다 우수하고 특정한 은사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당신을 닮아 당신처럼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습에 따라 지으셨다. 여기서 “하느님의 모습”이란 하느님께서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게 인간에게만 주신 전제들, 은사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온전히 사용할 때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이 모든 은혜를 통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영예를 깨닫는다.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으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엄청난 사명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우리가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그 사명을 완수할 것이며 그 보상으로서 인간의 지력으로는 도저히 해득(解得)할 수 없는 엄청난 선물, 즉 “하느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고(창세기 1:26),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해지며”(마태오복음 5:48),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요한복음 1:12),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고”(베드로후서 1:4) 또 “하느님 성성의 참여자”가 될 것이다(히브리서 12:10).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용어, "신화"(神化, theosis 또는 deification)로 함축된다. 신화란 “하느님을 닮는 것”이고, 완전함과 동일하며, “나의 선고를 들어라. 너희가 비록 신들이요”(시편 82:6)라고 성서에서 말한 것처럼, 은총에 의한 양자,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직결된다. 이렇게 정교회 신학은 인간의 가치가 지고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사람들은 이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인생의 목표를 단순히 윤리적 향상, 즉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에 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훨씬 이상적이고 심오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잊지 말고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 출발선에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듯이 영적 투쟁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우리의 영적 투쟁은 동료 선수들과의 선의의 경주가 아닌 갖은 계략을 다해 우리의 행로를 끊으려 하는 사탄과의 아주 어렵고 힘겨운 싸움이다. 이 어렵고 힘든 싸움에서 어떤 이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어떤 이들은 출발도 하지 않은 채 출발선 앞에 그대로 서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는 사탄과의 끝없는 싸움과 투쟁에서 승리하고 무사히 결승선까지 온다.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무사히 달려온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이 주워진다. 그들은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디모테오후서 4:7-8)라는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성성(聖性: 거룩한 본성)의 참여자가 되고(히브리서 12:10) 성인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기술과 과학을 추구하며 그것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다르게 교회는 교회의 성인들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들을 통해 진정한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 사고에 젖어있기 때문에 성성(聖性)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성인들의 엄청난 영적 산물을 깨닫지 못한 채 물질적 역량에 따라 사람들의 가치를 매긴다. 정부는 독립을 가져다주거나 국가에 큰 업적을 이룬 특정 인물을 기린다. 사진을 내걸고 목 좋은 곳에 그들의 동상을 세워놓고 국가적 영웅이나 위대한 인물로 그들을 추앙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인들을 영웅이요 은인으로 공경한다. 우리는 그들에 힘입어 죄의 부패에서, 이교의 오류에서, 그리고 우상숭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오늘날 정교인(正敎人, Orthodox Christian)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1)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한 사도 바울로와 여느 사도들, 2) 세계 공의회를 개최하고 이단들의 그릇된 오류를 지적하고 단죄하며 우리 믿음의 교리를 밝혀 이단으로 빠지지 않고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보호한 성인들, 3) 정욕(情欲)에서 벗어나, 성스러운 신성의 빛 속에 온전히 신학을 하고 성스런 믿음의 신학을 전하신 교회의 교부들, 그리고 비록 신학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성스런 삶 또는 순교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손수 보여주신 복음의 숨겨진 일꾼들 4) 마지막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협력을 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테오토코스(하느님을 낳으신 분)에게 큰 빚을 지었고 그분들에 힘입어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성인들과 천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테오토코스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더구나 테오토코스 스스로 성령을 받아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루가복음 1:48)라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그분을 높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분을 높이고 복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예언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테오토코스를 따로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공경한다. 물론 테오토코스에 대한 우리의 공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테오토코스를 공경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분 아들의 위대함을 인지하게 된다. 만약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테오토코스에게 걸맞은 예우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 3차 세계공의회(주후 431, 에페소)에서 이교적 교리를 주장하다 단죄 받은 이단자 네스토리오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거나 폄하(貶下)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모님이) “원죄(原罪, original sin) 없이 출생했다”라는 그릇된 믿음이 아닌, 인간의 범주에서 그분을 분리시키지 않는 가운데 ‘빤아기아’(Panagia: 지극히 거룩한 분, 즉 테오토코스)를 공경한다.

 

하느님 은총의 결핍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학적 지식을 갖지 못한 여러 이단들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빤아기아의 위치를 왜곡하고 폄하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단들에게 빤아기아와 성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신조에 따른 그들의 대답은 그분들을 욕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신학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성령이 필요하듯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린토전서 12:3). 빤아기아와 성인들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도 역시 하느님의 성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교회 신학의 기준은 빤아기아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있다.

 

성인들은 우리를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으며, 그리스도가 단순히 사회적 개혁가나 윤리학자가 아닌 죽음과 죄, 그리고 사탄을 이긴 승리자이고 인간을 신화시키는 분임을 증거하였다. 또한 성인들은 교회가 단순히 인간의 조직이나 우리의 특정한 정신적, 감정적 필요를 충족해 주는 공간도 아님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이 우연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임을 증거하였다.

 

성인들의 증거는 개혁적이고, 혁명적이며, 쇄신적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교회의 자랑이며 대변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사회의 은인이자 개혁자로서 “세계인”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그들의 삶과 업적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하며 우리 구원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하느님께서도 “나를 존대하는 자는 소중히 여겨주겠다” 라고(사무엘상 2:30) 말씀하시며 그 보상을 약속하신다. “알아 두어라,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내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들어 주신다.”(시편 4:3). 주님께서 성인에게 베푸시는 그 영광은 예언자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내려 왔을 때처럼 직접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때 모세의 얼굴은 주님의 영광에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직접 쳐다보지 못하고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출애굽기 34:29-30, 고린토후서 3:7). 이것은 또한 첫 순교자 스테파노스 보제에게도 일어났는데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처럼 빛났다.(사도행전 6:15).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전해진다.(고린토후서 3:18).

 

하느님의 영광은 지금은 거울 속에 비쳐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지만 하느님의 사람들은 내세에서 완전하고 위대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과 얼굴을 서로 마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태양처럼 빛날 것이다.(마태오복음 13:43).

 

교회의 성인들은 생전에 하느님의 영광을 미리 맛보았다. 교회의 시낙사리온(SYNAXARION, 성인들의 간략한 전기)은 성인들을 휘감고 있던 그 빛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성 없는 피조물들도 성인들에게 복종한다. 한 마리의 사자를 심복처럼 데리고 있던 마마스 성인과 요르단인 예라시모스 성인의 전기, 사자의 발톱으로 성녀의 무덤을 팠다는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의 전기, 그리고 손으로 곰들을 먹이던 러시아 사로프의 세라핌 성인의 전기에서 우리는 맹수들이 성인들을 찾아와 그들을 돕거나 보호해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인들을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그들을 친구로 부르심으로써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으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야고보서 2:23)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인들을 높이고 공경하게끔 하셨다. 왜냐하면 성인들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은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복음 5:16)라는 말씀처럼 성인들을 통해 마침내 그 영광이 하느님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인들에게 드려야 하는 이 영광과 영예는 우리 각자가 그들에게 진 빚이다. 만약 성인을 부정하고 성인의 은총과 또 하느님과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성인의 사랑과 보호, 그리고 은총을 맛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예 그것에 대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추종자나 민족적 영웅들의 사진들을 걸어놓고 그들의 동상에 화환을 바치며 추앙하면서도 성인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아주 작은 예조차 거부하거나 왜곡한다.

 

우리가 교회의 성인들에게 예를 표한다고 해도 하느님께 드려지는 영예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드려지는 경배가 훼손될까 두려워 성인들이나 여느 사람을 사랑하거나 공경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 형제에 대한 사랑을 제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형제를 사랑한다고 해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에게 드리는 영예와 공경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서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성서의 여러 곳에서 거룩한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공경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룻은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까지 귀엽게 보아 주시고 마음을 써 주십니까?...”(룻기2:10). “세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사무엘상 20:41), “바쎄바가 엎드려 왕에게 절을 하자”(열왕기상 1:16), “천사가 칼을 뽑아 든 채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을 본 발람은 고개를 숙이며 땅에 엎드렸다.”(민수기 22:31).

 

우리는 성인들에게 드려야 할 공경 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시도록 성인들께 우리를 위한 기원이나 중보를 요청한다.

 

거룩한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교회의 오랜 관행이다. 사도 바울로는 여러 편지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속해서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성인들(saints),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한다.(에페소서 6:19, 로마서 15:30, 필립비서 1:19 참조). 마술사 시몬도 그를 위해 간구해 줄 것을 사도들에게 간청했다(사도행전 8:24).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성인은 성찬예배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찬예배 때) 잠드신 선조들, 예언자들, 사도들,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기원과 중보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받아들이시도록 간청한다.”(Κατηχ. Μυσταγωγί́α 5,9). 대 바실리오스 성인도 40인 순교자들에 대한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 우리의 기도 속에서 40인 순교자들에게 간청하자.”(Migne 31,524).

성 요한 복음서 저자의 “천사의 손으로부터 향의 연기가 성인들(saints)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요한묵시록 8:3-4). “스물 네 원로는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인들(saints)의 기도입니다”(요한묵시록 5:8)라는 말씀처럼 성인들의 기도는 하느님 옥좌로 높이 들려 올라간다.

 

성인들의 기도는 단지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받아들여진다. 그 예를 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창세기 20:17)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실 것을 주님께 간청 드렸더니 주님께서는 “내가 네 말대로 용서해준다.”(민수기 14:20)라고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무엘 예언자도 그의 백성을 위해 중보한다(사무엘 상 7:8, 12:23).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때문에 생명을 부지했거나 예루살렘을 보장받는다.(열왕기상 11:12; 열왕기하 19:34, 20:6). 주님께서는 데만 사람 엘리바즈에게 욥을 찾아가 그와 그의 두 친구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라고 지시한다.(욥기 42:8)

 

야고보 성인은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낸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성인은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간절히 기도하자 삼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그가 다시 기도하자 하늘은 비를 내렸고 땅에서는 곡식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야고보서 5:16-18)는 사건을 상기시킨다.

 

위에 언급한 성서 구절들은 왜 우리가 성인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는지 그 답을 제시한다.

 

우리가 성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다고 해서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기도에 더욱 전념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인들이 살아서 생전에만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사후에는 우리와 단절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의 아토스 성산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교회의 근대 성인 중의 한명인 러시아인 수도사 실루아노스 성인(1866-1938)은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적었다. “성인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산다. 그들은 그곳에서 성령을 통해 주님의 미와 영광을 본다. 그리고 성인들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과 발자취를 본다. 우리의 슬픔을 알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듣는다. 성인들은 지상에서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웠다. 누구든지 지상에서 사랑을 성취한 사람은 사랑과 함께 천상의 왕국에 있는 영생으로 넘어간다. 그곳에서 완전한 사랑을 이룰 때까지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성인들이 형제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면 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기도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성인들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성인들을 멀리 한 사람들에게서만 떨어져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며 성령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무척 가깝게 존재한다. 성령은 만인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따라서 성인들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면 그들은 성령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또 우리 영혼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그들의 중보(仲保, intercession)를 느낀다.”(소프로니오스 대사제의 “Γέ́ρων Σιλουανό́ς” 386쪽).

 

우리는 교인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 있거나, 이미 잠든 하느님의 성인들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의 경험과 기쁨을 느낀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사후에도 헤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자와 죽은 자 모두 거룩한 교회의 지체로서 천사들과 함께 거룩한 교회에 속하며 또 그 교회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의 각 부분이 서로 조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 어느 한 부분이 아프거나 고통 받을 때 다른 부분에 영향을 주듯 교회의 지체들도 이와 똑같다.

 

사후의 성인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단순히 중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지 1년이 지난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살려낸 것처럼(열왕기하 13:20-21) 기적도 행한다. 성인들에게 이런 기적(성인들의 주검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의 영혼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의 육체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후에도 성인들은 엘리사의 경우처럼, 또는 니콜라스 성인, 닐로스 성인, 시몬 성인, 디미트리오스 성인 그리고 그 밖의 성인들의 성해에서 기름이 흘러나오는 기적처럼 그들의 주검을 통해 많은 기적을 행한다.

 

신자는 성인들 특히 순교자들의 주검에 극진한 예를 표하며 초대교회 때부터 순교의 날을 “생일”처럼 여겼다. 우리는 신학자 요한 복음서 저자의 제자였던 폴리카르포스 성인의 순교집에서 신자들이 순교자의 유해를 “보석보다 더 귀하게 그리고 금보다 더 가치 있게”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모아 제대로 된 장지에 안장하고 그곳에 함께 모여 순교자를 기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예들을 통해 우리는 왜 정교회가 성인들은 물론 성해에 예를 표하고 공경하는지 알게 된다. 하느님의 은총은 다볼산(Mt. Tabor)에서 주님의 변모(마태오 17장 1절 이하 참조) 때 일어났던 것처럼, 의복에까지 미쳐 옷이 광채를 내기도 하고, 사도들의 그림자(사도행전 5:15)와 수건(사도행전 1:12)에 까지 미쳐 기적을 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성인들이 행한 많은 기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사도행전 3:4-9, 5:12-16, 9:11-12, 20:7-12, 28:8). 또한 성인들의 전기에서 우리는 성인들이 생전에 또는 사후에 행한 많은 기적들을 볼 수 있고 그 기적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성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지극히 크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을 휘감고 있는 영광과 영예 그리고 성화(聖化), 즉 “신화”(神化)가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성인과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성인, 시나이인 그레고리오스 성인과 요한 클리막스 성인이 신학(神學)한 것처럼 사후에도 영원무궁토록 지속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성을 완성해서 더 이상 거룩해 질 수 없다고 결코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성성과 성인에게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에 기인한다. 하느님께서는 “본성적”으로 거룩하신 분이며 성성의 완성으로서 가감이 없다. 반면에 성인들은 은총에 의해 거룩해진 존재로서 그들의 성화는 하느님의 성성에 기인하며 그 성성의 참여자다. 그들의 성화는 끝이 없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성의 완성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성에서 잃는 것 없이 모든 성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촛불의 능력을 잃지 않은 채 수많은 초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초와 같은 것이다.

 

위의 글을 종합해보면, 주님께서 성인에게 주는 영예와 인간이 주는 영예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제 7차 세계공의회(787년, 니케아)가 확인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신의 영광, 즉 예배를 드리며 하느님과 진정한 종의 관계에 있는 성인에게는 단지 공경을 표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인을 공경하거나 성인들에게 우리를 위한 중보 요청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을 성인들의 손에 맡기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성인들이나 천사들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그들은 인간을 위해 중보하고 그들의 형제와 동료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와 기원을 올릴 뿐이다.

 

이것이 정교인의 믿음이다. 이것이 오직 한분이신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고 하느님의 “친구”이자 살아있는 하느님의 형상인 성인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리고 영예이다. 성인들에 대한 정교인의 사랑과 존경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존재하는 한 성인들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단순히 자선사업을 하거나 예배에서 신자들의 감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성화시키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사명을 갖는다. 교회는 거룩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 의해 교회가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회의 거룩한 머리는 교회의 모든 몸, 모든 지체를 거룩하게 만든다.

 

성인들의 존재는 교회의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가시”가 된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영적 게으름, 나태, 불신, 그리고 완고함을 끊임없이 검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일부사람들이 정교회의 믿음에서 멀어지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때론 이것이 거룩한 교회를 부정하는 일부 사람들의 실질적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성령의 은총과 성인들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신자이길 원하지만 그리스도와 진정한 친교를 갖지 못하고 주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도 모르며 동시에 병적인 우리의 상태를 깨닫지도 못한다. 또한 교회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정도 없다.

빤아기아와 성인들에게 걸맞은 예를 갖추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올바른 영적 행로를 걷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주제에 있어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여느 신학 역시 절름발이가 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영적 성과는 물론 우리 영혼의 구원에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성인들은 이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내면의 견고한 힘을 소유할 수 있었고 수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었으며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고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고 사자의 입을 막았으며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피하였고 약했지만 강해졌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칠 수 있었다.”(히브리서 11:33-34).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라”(마태오 5:48 참조)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성인들의 중보를 통하여 성인들과 같은 살아있는 믿음과 거룩함으로 구원을 이루어야겠다.

 

성 그레고리오스 수도원 N 수도사(2008년 12월)

 

* 정교회 한국대교구 홈페이지(www.orthodox.or.kr)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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