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심판주일 성화
마지막 심판주일 성화
“주여 당신께서 영광 속에 오시는 날 만물은 다 떨고, 심판대 앞에 불의 강이 흐르고 책이 열리고 숨김이 공개될 때, 의로우신 판단자시여 꺼지지 않는 불에서 나를 구하시어 당신의 오른편에 들기에 합당하게 하소서”(금육주일 시기송)
금육(禁肉)주일 전날은 특별히 ‘영혼 토요일’로서, 교회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안고 잠든 모든 이들을 위한 합동추도식을 거행한다. 이 날은 이미 안식하신 신자들을 위한 대(大)기도일이다. 대사순절과 돌아가신 분을 위한 기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개인 구원에 관한 교리를 남기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명을 남겨주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은 이렇게 교회의 토대이며 교회의 삶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죄는 언제나 사랑 없음이며, 그로부터 분열, 고립,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나온다.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고 교회가 우리에게 전해준 새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화해의 삶이며,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다시 모이는 삶이고, 죄로 인해 깨어졌던 사랑의 회복이다. 만약 우리가 먼저 우리 안에서 이 유일하고도 새로운 사랑의 계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그분과의 화해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사랑으로서의 교회를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들을 기억해 달라고 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사랑 그 자체이시고 또 사랑이시기에 고립과 분열의 마지막 보루인 죽음마저 정복해 버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그리스도 안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따로 없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는 모두가 산 자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생명이시며 이 생명은 사람에게 빛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법이요, 그래서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지극히 당연하게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자극한다. 정말로 죽은 자들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이야말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공덕’과 ‘보상’이라는 법적 교리로 축소시키거나 혹은 단순하게 그것을 무익한 것으로 내던져 버리는 서방 그리스도인들의 개념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금육주일의 주제를 구성하는 것 또한 사랑이다. 이 날의 복음경 본문은 최후의 심판 비유(마태오 25:31-46)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때, 그분은 무엇을 척도로 삼아 심판하실까? 복음경 비유는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추상적 정의에 기초한 단순한 인도주의적 관심도, 익명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인격, 즉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과정에서 만나게 하시는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인격적인 사랑이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정치, 경제, 사회적 관심사들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유한 생애를 가지는 유일무이한 인격을 계급, 민족 등의 불특정 집단으로 대체해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인생 경력과 시민으로서의 혹은 직업적인 책임감 같은 것들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그것도 최선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의해 영감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사랑 그 자체는 다른 어떤 것이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유일한 사명을 잘 보존하기를, 또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대리자’가 되지 않기를 진정 원한다면 - 더욱이 교회는 단연코 그런 것일 수 있다 - 이 구별을 바르게 이해하고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 또 단지 잠시 동안이라 해도, 하느님께서 그분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섭리 안에서 내 인생 안에 개입시키기로 결정하신 사람 안에서, 달리 말해 나에게 어떤 ‘선행’이나 인간애를 실천할 기회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우정이 개시되게 하시려고 내 인생에 끌어들인 각각의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려는 “가능한 불가능성”(possible impossibility)이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오늘날 종종 그리스도교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사회적 행동주의와 자주 반대된다. ‘사회적 운동가’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인격이 아니라 인류와 같은 추상적인 통일체로서의 인간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인간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한 인격이기 때문이다. 전자에서 인격은 인간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하지만 후자에서 인간은 인격으로서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고려된다. 사회적 행동주의는 ‘인격적인 것’에 어떤 관심도 없으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희생시켜 버린다. 그리스도교는 이 추상적인 ‘인류’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회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그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인격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포기할 때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중대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회적 행동주의는 그 관점에 있어서 항상 ‘미래지향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에 실현될 정의와 질서와 행복의 이름으로 행동한다. 그리스도교는 이 미래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는 대신, 현재를 사랑의 결정적이고 유일한 시간으로 여기고 모든 중요성을 부여한다. 두 태도가 필연적으로 서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이 세상’에 관해 책임성을 가지고 있고, 그 책임을 잘 수행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회적 실천의 영역이며, 이는 전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의 한 줄기 광채이며 하나의 발현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제한성과 조건들을 초월하고 능가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목적과 완성뿐만 아니라 그 동기도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악에 빠진’ 이 세상에서 지속적인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승리자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인간에게 이 소명, 이 인격적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것,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이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다.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의 ‘대사순절’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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