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의 신학 – 2. 돕는 이 이브
저자: 소피아 마차리오티-코스타라
‘돕는 이’라는 단어 자체는 아담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행동을 전제로 합니다.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는 유일한 일은 낙원을 보호하고 경작하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의 첫 해석자들은 낙원에서 하는 노동은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으며, 완전을 향한 수고를 뜻하는 영적인 노력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저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완전하게, 그러나 영적으로는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리용의 이리네오스 성인(c 130-202)은 첫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지어지지 않았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들의 모든 행동이 그 어떤 도덕적 의미(중요성)도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의 잠재성으로서 형상과 닮음을 가지고 지어졌을찌라도, 그들은 영적인 노고와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형상과 닮음이 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일하라)’는 명령은 바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수고를 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들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 아담과 함께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교부들에 따르면, 이것이 창 3:16에서 이브가 남자에 의해 지배를 받도록 벌을 받은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담의 영적인 발전에 조력자가 되는 대신에 이브는 유혹하는 자가 되었으며, 아담의 타락을 초래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창조이후, 아담은 마침내 하느님이 자신에게 약속하신 도움을 발견한 것에 대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아담은 둘(남자와 여자)의 일치라는 운명을 선포하고 예언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이 본래 의도하신 ‘하나인 인간 본성’대로 인류의 얼굴을 다시 개조함으로써 한 몸(flesh, 살)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간의 혁신적인 사회학적 통찰력을 지닌 결혼제도를 갖게 됩니다. 고대의 근동에서는 여성이 자기 가족을 떠나 남편의 가족과 합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관습과 달리, 아담은 남자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아내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의 ‘몸’(flesh)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는 일시적인 덧없음과 무상(無常)의 요소를 포함하는데, 그것은 ‘살’(flesh)이 한시적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현재의 세상을 위한 제도이며, 다음의 생에까지 연장되지 않습니다. 요한 흐리소스토모스 성인에게는 남자와 여자가 전체 인류의 부분들입니다. 곧, 둘은 다른 방식으로 서로서로에게 불완전합니다. 그들은 완전해지기 위해서 다른 부분이 필요하며, 그들의 완전함은 둘의 일치에 달려있습니다. 성서적인 유형론에서 하느님은 첫 부부와 모든 세대에 오는 모든 부부의 ‘님파고고스’(νυμφαγωγός: 신부의 인도자. 경호, 호위자)입니다.
70인역 성서(셉투아진트)는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 충실하게 남아있으며, 아담(adam. 땅을 뜻하는 단어 ‘아다마’에서 옮.)이라는 단어를 안스로포스(인간)으로 번역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2:16에서만 (일반명사 아담을) 아담(Adam)이라는 고유명사로 바꾸는데, 이는 거기에서부터 남자가 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하느님의 계획이 시작됨과 더불어 여자의 창조 이야기가 도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해석자들에 따르면, 히브리어 본문에서 아담(adam)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로 쓰이지 않으며, 그것의 문자적 의미인 ‘인류’ 또는 ‘사람’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남자(Adam)의 옆구리에서 창조되지 않았으며, 첫 인간(사람)의 옆구리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자(이사 issa)가 남자(이스 is)에게서 창조되었다는 아담(Adam)의 선언은 이것이 히브리어 본문에 삽입된 사회학적 영향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해석자들에게는 이런 장애물로 인해, 첫 인간이 양성의 특징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의해 한번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형상과 닮은 모습으로 된 인간의 고유한 창조는 하느님에 의해 인류에게 주어진 크나큰 영예입니다만, 본문의 해석자들에게는 어려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비록 창 1:26의 이중의 표현, ‘베살메누 키데무테누’(besalmenu kidemutenu)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대로 서술하고 묘사하는 ‘사엘라엠’(saelaem. 형태를 만들기가 쉬운 그림. 형상)을 추상적인 ‘데무트’(demut. 유사성, 닮음)와 연결시키고 있긴 하지만, 70인역 성경의 번역은 ‘형상’과 ‘닮음’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서로 바꾸어 쓸수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부적인 해석은 ‘형상’을 창조의 행위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반면에 ‘닮음’은 하느님과 함께 작동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성취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에서 ‘사엘라엠’이라는 묘사적인 단어의 사용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과 같다는 ‘안스로포몰피즘’(anthropomorphism)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말하도록 이끌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반대로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같다는 ‘테오몰피즘’(theomorphism)입니다. 성서의 진술에서 핵심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보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처음부터 실존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창조주와 함께 무엇인가를 나누고(곧, 하느님의 숨), ‘사엘라엠’ 단어의 본래 의미에 따라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대변(대표)합니다.
성경 이후에, 타티안(Tatian, c 120- c 180. 2세기 앗시리아인 그리스도교 작가. 신학자)은 ‘형상과 닮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그리스도교 작가들 중 첫 인물이었으며, 이 용어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불멸성을 함께 갖게 하는 성령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타락 이후에 인간은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사멸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불멸하는 것도 아니라 두 가지 다 가능한 중간적 본성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존 로마니데스(John Romanides, 1927-2001) 교수에 따르면, “도덕적 완전함과 불멸성은 ...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 그리고 타락과 구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해하는 전체적 토대를 이룹니다.”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에 대한 여러 해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인간 본성의 일치를 말하는 수평적 차원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하는 수직적 차원을 함께 지닌 십자가로서 바라볼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창조물들은 마음껏 행복을 누리도록 낙원을 부여받았으며, 오직 한 가지 금지사항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먹어서는 안되는 한 과일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오직 창세기에서만 나오며,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스 성인(2세기 안티오키아의 주교)은 말합니다. “... 지식의 나무 자체는 선하며, 그 열매도 선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죽음이 생겨나게 한 것은 나무가 아니라 불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냐하면 과일 안에는 지식 외에 다른 것은 없었으며, 누군가 지식을 사려깊게 사용할때 지식은 선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지식은 이론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주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도리어 “이제 아담이 아내 이브를 알게 되자 이브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았다.”(창 4:1)라는 성경구절에서 아담이 이브를 아는 것처럼 때로는 매우 물질주의적(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주체를 포함합니다. 그런 까닭에 구약에서 하느님을 아는 것은 (내가) 하느님에 의해 알려지는 것(곧, 내가 하느님에게 알려지는 것, 또는 하느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며, 서로의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아는 것은 서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인격적 특징을 포함합니다. 같은 논리가 선과 악을 아는 경우에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악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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