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신학을 할 것인가?

젠더의 신학 3

ttoza 2023. 3. 24. 22:33

 

 

 

젠더의 신학 3. 타락

 

소피아 마차리오티-코스타라

 

타락 이야기는 분명합니다. 이브는 뱀에게 속았으며,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처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남자에게 주었으며 그도 또한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불순종의 행위로 인한 피할 수 없는 결과로 벌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그 벌이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3:16) 창세기의 초기역사 내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반란에 대해 직접적인 심판과 징벌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관련된 사람들 위에 있는 규정과 원칙에 따르는 맹목적 심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과 당신의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육성하고 촉진시키기 위한 신성한 행위입니다. 이브가 먼저 시작하였으며, 머뭇거리지 않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반역의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건강하지 않고 병든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하느님의 처방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다루기 힘든 성격과 기질을 위한 약으로서 노예생활’(종의 신분)이 도입되었습니다. 이제 이브의 본보기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이브, 하느님께 완전한 순종을 바친 테오토코스(하느님을 낳으신 분)의 모범을 제공합니다.

 

뱀과 나눈 이브의 대화는 창조이야기에 나오는 첫 신학적 담화입니다. 뱀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는 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 하느님에 대해 알고 비판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경 속 첫 피조물이라는 월터 브루거먼(Walter Brueggemann. 1933년생. 미국 태생의 독일계 개신교 구약성서학자)의 생각에 우리는, 이브가 기도없이 신학을 행하고 하느님과 친교함이 없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 첫 인물이라는 사실을 덧붙일수 있습니다. 타락이야기를 요약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이 바라신대로 하느님의 동산에는 상호관계와 공정함이 있다. 그런데 이제 불신이 스며들어온 하느님의 동산에는 통제와 왜곡이 있다. 하지만 그 왜곡은 단 한순간도 정원사(, 하느님)의 의지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월터 브루거먼. 창세기 성경주석[아틀란타, 조지아: 1982] 51)

 

정교 전통에서 대다수의 교부들은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게 창조되었으며, 하느님의 형상을 공유한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로서 약간의 예외가 있긴 합니다.(*시루스의 테오도리투스[Theodoretus of Cyrus. 5세기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 성경주석가, 주교]에 따르면 하느님의 형상은 통치권과 자주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타락 이후에 이 책무가 남성에게 주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이 특질은 창조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대 바실리오스 성인에 따르면, 첫 부부인 아담과 이브 안에 있는 능력과 자유의 동등성 때문에 그들은 둘다 잘못에 대해 똑같은 책임을 공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부(이를테면 성 이리네오스: 2세기 리용의 주교)에게는 남자의 잘못이 여자의 잘못보다도 더 큰데, 그것은 이브는 악마에게 유혹을 받은 반면에 아담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명령을 받은 이로서 (동등한 피조물인) 여자의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후에 남자와 여자 두 인간 사이에 있는 관계의 상태는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벌을 받아 자기 남편에게 종속되게 되었은데, 그것은 자신의 자유와 동등성을 그릇되게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완전해지도록 돕는 이에서 앞장 서서 죄를 지은 이가 되었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남성과 여성) 두 젠더 사이의 관계 속에 있는 왜곡은 원죄 이후에 곧바로 생겨났습니다. 둘다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렸으며, 아담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이브를 탓했습니다. 하느님이 이브에게 내린 벌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가 지닌 운명을 결정하였습니다: “너는 남편을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창세기 3:16) 사실 구약 성경과 이교의 세계에서 여자의 운명은 남자의 사랑 속에서 안전과 보호를 구하는 것이었으며, 남자의 역할은 여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조차도 사회 속에서 여성을 노예 다음의 둘째 자리에 두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 젠더의 신학 4. 새로운 창조 속의 여성. 초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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