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의 신학 – 5. 새로운 창조 속의 여성. ‘순종’
소피아 마차리오티-코스타라
4세기 교부 니사의 그레고리 성인은 에브노미오스(Eunomius: 성부 하느님과 동일본질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인 형태의 아리우스주의를 주장한 분파의 지도자. 키지코스의 주교. 4세기말 사망)의 이단에 맞서서 쓴 고전 15:28에 대한 긴 설교에서 ‘굴복’(ύποταγή 이포타기)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 단어가 전쟁에서 승리자에게 예속됨과 자연과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힘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고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속과 지배에 대해서 그는 또한 피할수 없는 필요성이 있는 노예제와 마지막으로는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굴복시키는 교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요점은 위에서 말한 이같은 의미들을 성부 하느님께 대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굴복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롭게도 그레고리 성인은 전체 설교 속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성부에 대한 성자의 순종과 같은 의미로 여성의 경우에 순종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에 의해 반박된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에 따르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순종은 성부에 대한 성자의 순종과 비슷한 것이며, 자유와 ‘동등한 영예’(όμοτιμία, 오모티미아)를 전제로 합니다. 크리소스톰 성인은 4세기 가정이라는 환경 안에서 여성에 대해 가해지는 착취와 비하(모멸, 굴욕)에 맞서서 혁명적인 사회학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으로써 그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격들의 서로 다른 기능과 관련된 주어진 질서의 파괴를 지지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 질서를 그것의 보다 높은 수준에 따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인) 성삼위의 인격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같은 계명 또한 베드로 사도의 첫째 서신에 나옵니다.(베드로전 3:1-7) ‘굴복’(ύποταγή 이포타기)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울로 사도의 것과 일치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주어진 질서를 존중하도록 부름받았으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윤리적인 명령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여성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를 남성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요청받는데, 그러므로써 성실하지 않은 남성이 변화될 것입니다. 남성 또한 자기 아내를 존중하고 영예롭게 대하도록 요구받는데, 왜냐하면 남성은 하느님 은총의(을 아내와 함께 상속받을) 공동상속자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과 아내의 조화로운 영적 삶이 방해를 받지 않게 됩니다.
바울로 사도의 에페소 서신에서(5:22-33) 우리는 결혼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발견하는데, 이 구절은 교회에서 결혼성사때 봉독합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원형은 정교 신학이 결혼을 통한 결합과 두 배우자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델입니다. 33절의 끝부분(“...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은 여성들에 의해 오해되어 왔으며, 그에 따라 결혼예식의 (성경구절을 봉독하는) 그 부분에서 남편의 힘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신부가 신랑의 발등을 밟는 대중적인 민간의 풍습을 낳았습니다. 사회가 그 구절(에페소 5:33)에 부여한 의미와는 반대로 순수한 교부적 이해는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의 에페소서에 대한 자신의 열 번째 설교 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두려움은 노예에게 적합한 것이며 또 때로는 노예에게조차도 적합하지 않은 것이지만 만일 여성이 자기 남편 때문에 두려워 떤다면 참된 결혼의 결합을 이룬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의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혼성사에서 사도경은 에페소 5:22-33절을 읽습니다. 이 본문의 앞에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21절)라는 구절이 앞서 나옵니다. 성서 본문에 대한 비평적인 연구판을 보면 이 구절은 22-33절 본문의 시작이며, 앞선 본문의 끝구절이 아닙니다. 이런 배경아래서 볼 때, 여성이 남성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다른 성경 본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상호복종(예속)의 정신 속에 있는 것입니다.(“...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원로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섬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벧전 5:5) 고린토 전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동등한 순종을 그리스도와 성부 하느님 사이에서처럼 같은 도식(圖式)으로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한 크리소스톰에 따르면 머리로서의 남자와 몸으로서의 여자 이미지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이 아닌 한 육체 안에 있는 둘(남성과 여성)의 일치(통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바울로 사도의 저술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쓰여진 시대와 사회를 고려하지 않은채 시도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가 자기 시대의 로마-유대적인 사회적 토대와 예수의 복음이 이 세계에 가져온 새로운 ‘창조’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바울로 사도는 이 기존의 토대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상(理想)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하여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지 그리스도인 자매, 형제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당신의 사회적 분위기처럼 여성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 이상으로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남성들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에페소 본문(5:22-33)의 핵심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굴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인데, 그것은 에페소서의 메시지가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 사이의 관계를 원형으로 해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 속에 있는 상호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바울로 사도에 따르면, 결혼에서 남성과 여성을 계층적(위계적, 서열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이런 형태의 신학적 배경을 가집니다.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듯이 남성은 가정이라는 몸의 머리이며, 따라서 남성은 자기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합니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순종은 고대부터 확립되었으며, 유대의 문화와 그 주변의 문명에서도 일반적인 표준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그 당시의 사회질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 또한 그런 시도를 하지 않고 있음에 비추어보아 분명합니다. 다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불완전한 현실을 지상의 하느님나라로 변모시키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실천하라고 요청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백하게도 남성들에게 주된 노력이 요구되는데, 이는 그들 시대의 기준을 넘어서서 받아들일만한 일반적이고 보통인 본보기와는 다르게 자신들의 아내를 존중하고 영예롭게 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가 이미 정해진 사회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용은 오직 사회적 기풍이 그리스도교적인 정신과 모순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는 남성이 혼인관계 밖의 다른 성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기 아내를 소유하는 당시의 전형적인 모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의 서신에 대한 첫 해설자중 하나인 오리겐(185-253)은 한 부부로서의 관계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부는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속하고,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므로 어떤 계층이나 계급도 없다고 믿습니다. 크리소스톰 성인은 에페소 5:22-33과 고전 7:1-7에 있는 젠더 문제에 대해 바울로 사도의 서신에 나타난 명백한 모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바울로 사도가 구원과 덕, 윤리 등에 관련된 영적 주제를 말할때면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완전한 평등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고찰할 때면 그는 기능과 역할을 달리 구별하면서 남성에게 우선권을 부여합니다. 같은 해석이 이구메니오스(트리키스, 6-7세기?)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데, 그 또한 사회질서와 계층적 문제에서는 남성이 우선권을 가지지만 부부로서의 관계에서는 절대적인 평등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키루스의 주교 테오도리토스(5세기)는 젠더 문제에 대해 바울로 사도의 저작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 핵심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그는 바울로 사도를 시대에 앞선 인물로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가 사회적 기득권에 반대하며 남성을 위한 법을 제정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교부신학을 통틀어서 표현된 것처럼 덕과 영성의 문제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평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교부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며 흔히 남성보다 더 위대한 성공을 거두는 그리스도의 용사요 선수임을 받아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여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속에서 지녔던 역할과 참여의 모습은 동시대의 로마 작가들 작품 속에 나타납니다. 2세기에 그리스도교의 적이었던 철학자 켈수스(Celsus)는 그리스도교를 ‘여성의 종교’라고 부르고 있으며, 리키니우스 황제(263-325)는 여성이 그리스도교 성당을 방문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새로운 신앙을 방해하고 통제하려고 하였습니다.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나온 이런 증거들이 새로이 형성된 그리스도교 속 여성의 중요한 자리를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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