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성인과 원로들

성 마리아 (스코브초바, 1891-1945) 5

ttoza 2024. 1. 30. 23:34

 

파리 제 15 행정구역 안 Rue de Lourmel의 집

 

 

여기 당시에 마리아가 어떠했는지, 안토니 블룸 대주교(1914-2003)가 자신이 받은 인상을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그녀는 행동이나 태도가 매우 특별한 수녀였다. 나는 그녀가 수도복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저 깜짝 놀랐다. 파리의 몽파르나스 가()를 걷다가 보았다. 카페 앞의 인도 위에 식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맥주 한잔이 놓여있고, 그 뒤로 수도복을 완전히 차려 입은 러시아 수녀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는 결코 그녀 가까이 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 당시 나는 젊었고, 극단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의도는 극빈자와 부랑인, 떠돌이들의 삶에 함께 하는 것이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그 일을 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질 다음 단계를 생각하는 동안 레브와 발렌티나 잰더 부부가 마련해준 방에서 살았습니다.

 

그해 여름 그녀는 러시아 학생기독운동(RSCM)을 대신하여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방문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였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그곳에서는 수도원들이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그 경험은 그녀 자신의 소명이 다른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는 확신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방문했던 수도원의 그 누구도 세상이 불타고 있음을 의식하거나, 당시의 시대가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을 위해 소리치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규모의 사회적 혼란과 파괴의 시기에는 절망적이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수도원의 문을 여는 수도적 증언을 제공하고, 그로써 그리스도의 자기겸비에 참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녀는 썼습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바람과 폭풍우로부터 잘 보호된 이 땅 위의 가정이 주는 편안함과 따스함, 그리고 오직 하나 확실하고 분명한 도구인 십자가를 담고 있는 무한하고 광활한 영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는 것이 러시아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에게 분명했습니다. “우리 주위의 환경이 이교적인 것이어서 그런 우상숭배적인 매력에 의해 유혹을 받는 까닭에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될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확고하게 그리스도교와 잘 맞으며, 그 안에서는 고통이 그 본질의 한 부분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안정되고 성숙한 것들과 세월에 의해 신성하게 되어 우리들 가슴 속에 고이 간직된 것들을 파괴하고 무너뜨립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진짜로 그리고 전적으로 가난에 대한 서원을 받아들이고, 어떤 규칙이나 규정 대신에 도리어 무정부상태, 곧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와 같은 무법상태의 삶을 찾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세상에 대해 울타리를 두른 어떤 수도적인 은둔이나 봉쇄도 찾지 않는 것이며, 반대로 세상과 그 상처들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분리시킬 수도 있는 아주 미묘한 장애물조차도 완벽하게 사라진 삶입니다.”

 

마리아 수녀는 거룩한 바보라고 분류되는 성인들에게 특별한 공경과 헌신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를테면 그녀가 특별한 관심을 지녔던 러시아의 축복받은 성 바실리오스(82일이 축일임)처럼 너무나 충격적이고 터무니없으며 별나게 행동하지만 놀랄만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마리아 수녀가 직접 그린 바실리오스 성인의 이콘에는 그의 삶의 장면들이 담겨 있습니다. ‘거룩한 바보성인들은 자유의 성인들이라고 그녀는 썼습니다.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적들 그리고 심지어는 친구들과도 일치하지 않고 상충하는 삶, 곧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로서 행동하도록 부르는데, 이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그런 삶 속에서 교회의 생명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로 살아야만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런 삶의 길이 지닌 어려움만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 위에 임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능력이 고양(高揚)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두 갈래 삶의 길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마른 땅위에 있는 것으로서 적법하고 이치에 맞으며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곳인데, 이곳에서는 사람이 측정하고 따져보고 저울질하면서 미리 계획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물위를 걷는 길로서 그곳에서는 측정하거나 앞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언제나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잠시라도 의심한다면, 당신은 물속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걷기로 결심한 물은 자포자기하고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환대하고 돌보는 일을 소명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집을 구하기 시작하였으며, 파리 시내의 한 곳(9 villa de Saxe)에서 찾아냈습니다.

 

에블로기 대주교는 마리아 성녀가 하는 활동에 대단히 헌신적으로 임하였습니다. 그녀가 건물의 임대차계약에 서명을 해야 하는데 다른 기부자들을 찾을 수 없게되자, 대주교는 그녀가 요구한 5,000프랑을 지불하였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대주교와 함께 파리 시내의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에 대해서 실망스런 어조로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지하철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고, 한 낮의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에블로기 대주교는 봤어요, 이게 바로 당신의 물음에 대한 답이랍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입한 집은 아무런 가구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 집에서 지낸 첫날, 그녀는 담요로 자신의 몸을 둘둘 싸매고는 성모님의 이콘이 걸려 있는 벽 아래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뒤 기부받은 가구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대부분 일자리가 없는 젊은 러시아 여성들이 손님으로서 오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방을 마련하기 위해 마리아는 자신의 방을 포기하였으며, 대신에 지하실 보일러 옆의 좁은 철제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윗층의 방 하나는 소성당이 되었으며, 그 안의 성화대(이코노스타시스: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짓는 성화벽같은 것)에 쓰일 성화는 마리아가 그린 반면에, 강의와 대화를 위해 쓰일 공간으로서 식당은 두 배나 크게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원래의 집은 너무 작다는 것이 곧 판명나고 말았습니다. 두 해가 지나고나서 새로운 장소를 찾아내게 되었는데, 15 행정구역 안(77 rue de Lourmel)에 있는 3층짜리 버려진 집이었으며, 그 지역은 가난한 러시아 난민들이 정착해온 곳이었습니다. 이전의 공간에서는 겨우 25명을 먹일 수 있었던 반면에, 이 새로운 곳에서는 백명을 먹일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뒤편에 마굿간이 있어서 추가로 이로운 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작은 성당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금 성당을 꾸미는 것은 주로 그녀 자신의 일이었고, 그 이콘들중 많은 것이 마리아가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수(刺繡)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건물이 세계에 몰아치고 있는 폭풍우와 같은 파도를 견뎌낼 수 있는 현대의 노아의 방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의 손님들은 자신들의 두 발로 다시 설수 있는 때가 오기까지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신조(信條: 굳게 믿어 지키고 있는 생각)각 사람은 세상에 육화한 하느님의 바로 그 이콘이다였습니다. 이런 인식과 함께 하느님의 놀라운 계시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주위의 형제와 자매들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공경해야할필요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일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그녀는 또 다른 건물을 빌렸는데, 하나는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서 쓰고 또 다른 하나는 독신인 남성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골의 건물은 요양원이 되었습니다.

 

1937년까지 제 15 행정구역 안(77 rue de Lourmel)의 건물에는 수십명의 여성들이 살았습니다. 날마다 최대 120인분의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보통은 수프에 더해서 고기와 호의적인 제빵사가 무료로 공급하는 많은 양의 빵을 포함한 주요리가 나왔습니다.

 

마리아의 하루는 늘 그렇듯이 레 알르(Les Halles: 파리의 중앙에 위치한 신선식품 시장. 1973년까지 운영되었다.)로 가서 음식을 기부하도록 간청하거나 또는 무엇이든지간에 기부되지 않는 식품들을 싸게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구걸꾼 수녀는 시장의 가판대들 속에서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그녀는 한 자루의 뼈나 생선, 너무 익은 과일과 야채들을 짊어지고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