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제가 되어다오

어느 러시아인 사제의 일기 14

ttoza 2024. 2. 17. 19:23

 

미하일 네스테로브의 '철학자들'(1917년. 왼쪽이 빠벨 플로렌스키이고 오른쪽이 세르게이 불가코프이다.)

 

57. 우리는 (외경, 또는 제 2경전. 영어로는 Wisdom of Sirach) 집회서 36(1-17)에서 러시아를 위한 아름다운 기도를 만들어낼수 있습니다. 본문을 조금 인용한다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보소서... 기적을 거듭 행하시고 놀라운 일을 다시 보여 주시며... 하루 속히...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의 거룩한 도성, 당신의 안식처인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신 예언을 이루소서.”(1, 5, 7, 12, 14)

 

58. 우리는 거짓된 이상(理想)에 의해 이 얼마나 멀리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려졌는가! 이런 식으로 많은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선()이라는 바른(하지만 좁은) 개념에서 출발하여, 그들은 다름아닌 악마와 같은 미움과 거짓, 살인으로 끝을 내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런 이상을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인 이상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면, 민족주의라는 이상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도 비슷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59. 우리의 모든 내적 삶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작동되고 활기를 띄게 됩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이런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사랑은 세계나 우리의 친구, 사랑하는 이처럼 사랑스러운 객체의 구체적인 느낌과 인상들에 의해 공급되고 양육됩니다. 만일 그것들이 외적인 증거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으며 시들거나 말라죽지 않을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일찌기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요한 1:8)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느낌과 인상을 받을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에 대한 명상과 기도, 복음말씀을 읽는 것 등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기르는 양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거칠고 천박하며, 속되고 수용력이 없을 수 있으며, 자주 그러합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성인들의 삶과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빛을 가지고 있지만 질적으로 더 부드러우면서, 성스럽지만 순전히 인간적인 영혼의 프리즘(prism: 광선을 굴절시키거나 분산시킬 때 쓰는, 유리나 수정 따위로 된 다면체의 광학 부품)을 통과함으로써 다스려진 빛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60. 우리 자신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여 어떤 일반적인 견해나 생각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그 반대의 방식으로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경험하지도 않은 채 다른 이들의 경험에 대해 그저 말로 판단만 하고 말 것입니다. 허나 불행하게도 이런 것이 영적인 물음들 속에서 정확하게 우리가 보통 행하는 것입니다.

 

61. 만일 우리가 가장 지독한 무신론의 관점을 취한다하더라도, 신자들의 입장이 무신론의 시각보다는 여전히 더 안전하고 확고합니다. 무신론은 전적인 파산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그밖의 모든 것뿐 아니라 희망과 약속들을 빼앗겨버리기보다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데요?

 

62. 특별히 만일 내가 몸소 집전을 하지 않는다면, 만과(晩課: 저녁에 드리는 기도)는 분명히 어렵고 심지어는 따분하기까지 합니다. 나는 또한 예배에 참석하는사람들을 대신해서 지루함을 느낍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잘 참석하고는 있지만 기도는 형편없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들 사이에 놓인 이 정사각형 모양의 빛나는 마루바닥을 없애고, 우리들 상호간의 소원(疏遠)함을 끝내기 위해,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느끼고 싶고, 진정으로 함께 드리는 기도를 갈망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저에게 가까이 서있으면서 기도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제가 잘 알고 있거나 또는 선하고 신앙심이 깊은 영혼이라고 제가 느끼는 이들이 바라는 바를 위해 몰레벤(Moleben: 감사하거나 중보를 비는 짧은 예배. 보통 특정한 사람이나 가족을 위해 거행된다. 그리스정교회의 용어로 하면 빠라클리시스에 해당된다고 할수 있다.)이나 빠니히다(Panikhida: 죽은 이를 위한 추도식. 이 두 기도식을 위해 사제는 자신의 주위에 서있는 사람들과 함께 성당 한 가운데에 놓인 작은 탁자 앞에서 집전한다. 다른 한편으로 만과 때는 사제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성화대[iconostasis 이코노스타시스] 뒤의 지성소 안에 있으며, 이로써 상대적으로 회중에게서 떨어져 있게 된다.)를 거행하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능동적일 때 기도하는 것은 쉽고, 다른 사람의 기도에 조용히 참여하는 것은 왜 훨씬 더 어려울까요? 이것은 허영심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다른 이의 빛에 의한 영향 아래서 불붙은, 일종의 형광성(螢光性)이거나 차용(借用)된 빛의 광채 같은 것 말입니다.

 

63. 거의 언제나, 성당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에, 저는 가족 기도를 하는 것과 교회에서 행하는 다른 예식들을 가정에서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아주 많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제가 영국의 일반적인 관습에 대해 읽은 것이 그런 필요성에 대한 제 확신을 더 분명히 해줍니다. 우리는 성경,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복음서를 성인전, 교부들의 저작들, 그리고 또한 빠벨 플로렌스키(1882-1937)와 세르게이 불가코프(1871-1944) 같은 우리의 현대 신학자들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교부들과 바울로 사도의 고린도서 가운데 일부를 제 아내에게 읽어주었고, 그녀는 매우 열심히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확고한 습관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간단한 경험이후에조차도 저는 (막혔던 것이) 열림을 감지하며, 이상하게 마음이 들뜨고 고무됨을 느낍니다.

 

64. 종교의 어떤 외적 형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냥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하는 것으로서, 친밀하게 종교에 연결된 것으로서, 마치 몸이 영혼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65. 이런 것들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만이 기도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약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더라도 하느님을 향한 모든 분투(奮鬪)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생생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경험을 낳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잊지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그것 자신의 만족과 보상을 동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입증(검증)을 발견합니다.

 

66. 신자들의 무관심은 비신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