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마리아 4

성 마리아 (스코브초바, 1891-1945) 5

여기 당시에 마리아가 어떠했는지, 안토니 블룸 대주교(1914-2003)가 자신이 받은 인상을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그녀는 행동이나 태도가 매우 특별한 수녀였다. 나는 그녀가 수도복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저 깜짝 놀랐다. 파리의 몽파르나스 가(街)를 걷다가 보았다. 카페 앞의 인도 위에 식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맥주 한잔이 놓여있고, 그 뒤로 수도복을 완전히 차려 입은 러시아 수녀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는 결코 그녀 가까이 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 당시 나는 젊었고, 극단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의도는 극빈자와 부랑인, 떠돌이들의 삶에 함께 하는 것이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그 일을 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이..

성 마리아 (스코브초바, 1891-1945) 4

한 친구가 ‘러시아 학생 기독운동’(RSCM: Russian Student Christian Movement)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것은 1923년에 설립된 정교 단체였습니다. 리자는 강의에 참석하고 다른 활동들에도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1926년의 몹시 추운 겨울, 가족 전체가 독감에 걸렸습니다. 모두가 회복되었지만 나스티아는 예외로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야위어갔습니다. 마침내 의사는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파스퇴르 연구소(1887년 프랑스의 의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설립된 비영리 민간연구기관. 역자주)는 나스티아를 환자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어머니인 리자가 딸을 돌보기 위해 밤낮으로 머물도록 허락하였습니다. ..

성 마리아 (스코브초바, 1891-1945) 3

리자는 푸틸로브(Poutilov)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저녁에 진행하는 학습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만 나중에 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과 다른 동급생들은 그런 배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으며, 수업은 사무원이나 관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 정도로 여길 뿐이라고 말했을 때 크게 실망하여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아직 10대였던 리자는 노동자들이 모든 면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적이길 바랬습니다. 1910년 리자는 이른바 사회민주당, 곧 볼셰비키로 더 잘 알려진 정당의 당원이었던 디미트리 쿠즈민-카라비에프와 결혼하였습니다. 리자는 18세였고, 디미트리는 21세였습니다. 그것은 ‘사랑보다는 더 많은 연민과 동정심으로 인해’ 이루어진 결혼이었노라고 나중에 리자가 말하였습니다. 디미트리는 수년 전에 ..

성 마리아 (스코브초바, 1891-1945) 2

마리아 수녀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20세기의 위대한 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곧, 악몽같은 시대에 자신의 신앙을 용감하게 살았고, 마침내는 1945년 독일의 라벤스브룩 강제수용소에서 순교자의 죽음을 맞이한 뛰어난 신학자로 말입니다. 미래의 마리아 수녀인 엘리자베타 필렌코는 1891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리가(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에서 태어났으며, 러시아 남부의 흑해 해안가 아나파(Anapa)라는 작은 도시 가까이에 있는 가족 소유지에서 자라났습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리자(Liza)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잠시동안 아나파의 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식물원과 얄타(Yalta: 크림반도 남부 연안에 있는 도시)에 있는 학교의 책임자였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