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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 2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 2 영혼이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 곧 가장 가깝고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최고의 아버지라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영혼 안에 있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 영혼에 기쁨을 가져옵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알게 된 영혼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 앞에 한 나라를 가져다 놓더라도 그는 그 나라를 가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큰 달콤함과 기쁨을 그에게 주기 때문에, 왕..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 1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 1 영적인 삶을 사는 한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을, 그리고 모든 현상과 징후들 안에서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보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지 그는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과 모든 것에서 그분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육신적인 삶을 산다면, 그런 사람은 그저 육신적인 일을 할 뿐입니다. 그는 어떤 것에서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며, 더구나 하느님의 신적인 힘이 가장 놀랍게 드러나는 것들 속에서조차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것 속에서 그리고 어디서나, 어느 때든지 육신과 물질을 볼뿐입니다. “세상에 저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시편 35:2) 성 요한 크론스타트(1829-1909)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4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4 누구라도 주님의 종이 된 사람은 자기 주인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불신(不信)이 낳은 딸입니다. 거만한 영혼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노예입니다. 본질적으로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는 상태에 이르러 어둠을 두려워하고야 맙니다. - 성 요한 끌리마코스(579-649. 시나이의 수도자)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2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2 만일 피할수 없는 죽음과 죄인을 기다리는 영원한 고통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를테면 만일 그가 매일 저녁마다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또한 아침마다 지난밤을 어찌 지새웠는지,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면 말입니다. - 아바 도로테오스(565년 안식. 팔레스타인 가자의 수도원장)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1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1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에 빛을 비추어주며, 악을 소멸시키고, 악으로 기우는 격정들을 약화시키며, 영혼의 어둠을 몰아내어 정결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정점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 주위에서는 어떤 좋은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누구라도 사악한 타락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든 종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두려움도 전혀 알지 못하며,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고, 두려움에서 오는 어떤 떨림도 그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 성 에프렘 시리아인 수도자(373년 안식. 보제, 성가작가, 신학자)

하느님과 관계맺기 10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섭리가 모든 피조세계를 돌보고 조정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미리 생각하시고 고려하시며,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돌보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베드로 1서 5:7)라고 말한 하느님의 아버지와 같은 돌보심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른 신앙과 영적인 사랑을 수단으로 해서, 악으로 인해 분리된 사람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구세주께서 고통을 겪으셨으며,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요한 11:52) - 성 막시모스 고백자(580년경-662)

젠더의 신학 5

젠더의 신학 – 5. 새로운 창조 속의 여성. ‘순종’ 소피아 마차리오티-코스타라 4세기 교부 니사의 그레고리 성인은 에브노미오스(Eunomius: 성부 하느님과 동일본질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인 형태의 아리우스주의를 주장한 분파의 지도자. 키지코스의 주교. 4세기말 사망)의 이단에 맞서서 쓴 고전 15:28에 대한 긴 설교에서 ‘굴복’(ύποταγή 이포타기)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 단어가 전쟁에서 승리자에게 예속됨과 자연과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힘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고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속과 지배에 대해서 그는 또한 피할수 없는 필요성이 있는 노예제와 마지막으로는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굴복시키는 교인들을 말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