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순절

사순절 둘째주일(성 그레고리 팔라마스 주일)

ttoza 2015. 3. 6. 17:57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1296 - 1359)

 

* 정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대재 둘째주일에 그레고리 팔라마스(데살로니까의 대주교) 성인을 기념한다. 원래 성인의 축일은 11월 14일(성인이 안식하신 날)이지만 이 날 다시 기념하는 까닭은 14세기에 교회가 그의 적들을 단죄하고 그 가르침을 옹호함으로써 (이콘에 이은) 정교성(Orthodoxy)의 둘째 승리를 이룬 것을 기리기 위함이다.

 

(성인의 생애)

성인께서는 1296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셨다. 원래 소아시아에서 사셨던 귀족 출신의 부모님들은 터키인들의 침입을 피해 이주해 오셨으며, 경건한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빨레올로고스, 1282-1328)는 이들을 궁정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직책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아버지는 열심히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때로는 원로원에 앉아 있을 때에도 아주 기도를 깊이 하는 바람에 황제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인께서 아직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수도자 서원을 하고 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 또한 수녀가 되기를 원했지만 일곱 명의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시키기 위해 나중으로 미루었다. 제일 맏이인 성인은 아주 명성이 드높은 세속 학문의 교사에게서 배웠으며, 몇 년이 지나자 철학적으로 생각함에 있어서 매우 뛰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스승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지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젊은 성인의 진정한 관심은 하느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성인은 도시의 이름난 수도자들과 사귀었으며, 필라델피아의 테올립토스(Theoleptus)를 자신의 영적 아버지고 삼게 되었는데, 그는 성인에게 명징(明澄)한 정신의 상태와 마음의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1316년 무렵, 성인은 세상의 온갖 허영들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와 두 여동생, 두 남동생과 많은 하인들이 성인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인과 두 남동생은 아토스산(Mt Athos) 자락으로 가 그곳의 바토페디(Vatopedi) 수도원에 자리를 잡았으며, 아브크센티오스(Auxentius) 산에서 온 니코디모스 원로의 지도를 받았다. 성인은 기도생활에서 빠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어린 시절부터 실천해온 순종과 겸손, 온유함, 금식, 철야기도 등의 영적인 덕들과 몸이 영을 따르도록 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금욕적이고 포기하는 생활 덕분이었다. 성인은 밤이나 낮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오 하느님, 저의 어둠을 밝혀 주소서!'라고 쉼없이 기도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어린 시절부터 모든 신뢰를 두었던 성모님께서 사도 요한을 성인에게 보내시어 이 생에서나 다음 생에서도 성인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삼 년뒤 니코디모스 원로와 동생 테오도시오스가 죽자 성인과 둘째 동생 마카리오스는 함께 대 라브라(Great Lavra)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성인은 성가대원이 되었다. 수도원에서 성인은 모든 복음적 덕을 실천하려는 열정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 형제 수도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성인은 석 달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서 생활할 정도로 치열한 금욕적 삶을 사셨다. 이렇게 함께 수도하는 생활을 삼 년 동안 한 성인의 영혼은 홀로 거하는 광야의 달콤한 물을 갈망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래서 한 은둔처로 옮겨가 비잔티움의 그레고리(Gregory of Byzantium)라고 불리는 이름난 수사의 지도를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격정들(passions)이 정화됨에 따라 성인은 기도 속에서 창조세계의 신비들을 바라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독과 내면의 고요함을 통해 성인의 지적 능력은 언제나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머무를 수 있게도  되었으며, 그 곳에서 성인은 주님이신 예수님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간청하였다. 또한 그러므로써 성인 자신이 바로 모든 기도 자체가 되었고, 달콤한 눈물이 마치 두 개의 샘인냥 성인의 두 눈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터키 해적들의 쉴새 없는 습격으로 말미암아 성인과 그 동료들은 곧 수도처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열 두 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성인은 주요 성지들을 순례하고 나서 시나이 산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이 가능하지 않았다. 대신에 성인은 데살로니까에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장래의 총대주교인 이시도로스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시도로스는 신도들이 예수기도를 실천하여 수도자들의 경험에서 유익한 것을 얻도록 하려고 힘쓰고 있었다. 1326년 성인은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한 환상을 통해 이것이 참으로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다. 그뒤 성인께서는 베뢰아(Beroea: 그리스 북부의 도시) 지역에 은둔처를 세우려고 떠났으며, 그곳에서 전보다도 더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 한 주일의 5일 동안 성인께서는 홀로 머물면서 금식하고, 철야예배를 드리며 뜨거운 눈물로써 기도하였다. 성인께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성찬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타났으며, 이때 함께 수도생활을 하는 동료들과 공동식사와 형제적인 사랑을 나누고 영적인 주제에 대해 대화하곤 하였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마음 속에서 그 분과 더 가까이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성인께서는 콘스탄티노플로 가 여동생들을 데리고 와서는 자신의 은둔처 가까이에서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 세르비아인들의 습격이 점점 더 심해지자 성인께서는 아토스산으로 다시 되돌아 가기로 결심하였다. 성인은 대 라브라 수도원 위쪽에 있는 성 사바(St Savas) 은둔처에 머물기 시작하였으며, 그곳에서 이전보다도 더 고립된 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과 홀로 대화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성인은 아주 드물게 수도원에 갔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아주 가끔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곤 하였다. 그 무렵에 성인은 여전히 외적인 하느님에 대한 관조(觀照)에서 더 나아가 성령의 빛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다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신화(神化)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성인은 어느날 꿈속에서 자신이 하늘에서 부어진 우유로 가득 차오르고, 그것이 넘쳐 흐르면서 포도주로 변하여 주위를 놀라운 향기로 가득 채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성인에게 한 징조로 여겨졌다. 그것은 이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드러내신 신비들을 형제들에게 가르칠 때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이때 성인께서는 여러 편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한 글을 쓰셨으며, 1335년에 에스피그메누(Esphigmenou:아토스산의 한 수도원)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생활하던 200명의 수도사들은 성인의 열정이나 영적인 바램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일 년 뒤에 성인은 자신의 은둔처로 되돌아갔다.

 

당시에 칼라브리아(Calabria: 이탈리아 반도 가장 남쪽의 지역)에서 온 발람(Barlaam)이라는 수도사가 사변적인 사상가로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특별히 성 디오니시오스(아레오바고인)의 신비적 저술들에 대해 완전히 철학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경험이 아닌 차가운 이성의 대상으로 삼아 설명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이 교양있고 세련된 인문주의자(발람)는 자신이 알고 있던 몇몇 평범한 수도사들에게서 기도의 방법, 곧 영적인 삶에서 감각적 요소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 몹시 놀랐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잡아 수도사들을 비방하면서 그들이 이단이라고 비난하였다. 헤시카스트(hesychast) 수도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성인의 도움을 청하였고, 성인은 이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여러 편의 글을 쓰게 되었는데, 이 작품들 속에서 성인은 수도(자, 원)적인 영성을 교리적으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발람의 고발에 대해 대답하였다.

 

성인은 금욕적인 생활(ascesis, 아스끼시스)과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속의 모든 신비에서 나오는 결과이며, 각 사람에게 세례 때 주어진 은총이 그들 자신 안에서 꽃피우도록 돕는 방법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또한 헤시카스트 수도사들이 흔히 쓰는, 지성(知性)을 마음 안에 고정시키는 방법이 올바르고 확실하다는 것을 옹호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화하심 이후로 우리는 성령의 은총을 우리의 몸 안에서 찾아야 하며, 이 몸은 신비의 성사들에 의해 성화되고 성찬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접목되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창조되지 않은 은총은 다름아닌 바로 그 하느님의 영광이며, 다볼산에서 변모하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발현되었을 때 제자들을 압도한 그것이다.(마태오 17:1-8 참조) 이제 격정들에서 정화된 마음 속에서 빛나면서, 그 은총이 참으로 우리들을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고, 빛으로 밝혀주며, 신화시키고, 모든 이들의 부활 이후 성인들의 몸에서 빛날 똑같은 영광을 보증하고 약속해준다. 이처럼 신화의 완전한 실재성을 단언하여 주장하면서도 성인은 하느님이 그 본질에서는 절대적으로 초월해 계시며, 인간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부인하지 않았다.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더 정확한 방식으로 성인은 하느님의 접근할 수 없는 본질과 영원하고 창조적이며 그분의 뜻에 따라 발현되는 에너지 사이를 구분하였다. 곧, 이 신적인 에너지로 말미암아, 그러나 신적인 본질의 일치에는 그 어떤 분리도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창조된 존재들이 그분의 존재과 생명과 빛 안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신다. 성인에게 하느님은 철학적 개념이 아니며, 도리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살아계신 인격이시며,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삼키는 불길'(신명기 4:24)이시고, 우리를 하느님을 닮은 자로 만드시기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시다.

 

발람에 대한 성인의 뛰어난 답변은 처음에 아토스산을 관할하는 행정당국에 의해 성산(聖山)의 문서(Tome)로서 받아들여진 뒤 뒤이어 교회가 받아들였으며, 교회는 1341년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열린 두 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발람(과 곧이어 유럽의 문예부흥[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게 될 철학적 인본주의)을(를) 단죄하였다.

 

발람이 정죄되고 난뒤 이탈리아로 떠남으로써  이제껏 있었던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레고리 성인이 데살로니까에서 아토스산의 은둔처로 되돌아오자마자 - 성인은 외따로 떨어진 그곳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써오고 있었다 - 성인의 오랜 친구인 아킨디노스(Akindynos)가 발람이 주장했던 것의 핵심들을 다시 말하고, 성인이 했던 하느님의 본질과 에너지들 사이의 구분을 하나의 새로운 시도로서 단죄하였다. 처음에는 발람과 그레고리 성인 사이에서 심판관처럼 행세하였던 그는 전통의 정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은채 그저 틀에 박힌 말만을 되풀이하는 융통성이 없는 보수주의자일 뿐이었다. 동시에 알렉시스 아포카브코스 공작과 성인의 친구인 요한 칸타쿠제노스(1341-1347: 황제의 최측근으로 제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 사이의 경쟁관계에서 비롯된 끔찍한 내전이 일어났다. 요한 칼레카스 총대주교는 아포카브코스 공작 편에 서서 아킨디노스로 하여금 그레고리 성인을 이단으로 모함하도록 부추겼으며, 그 결과 성인은 단죄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4년동안 갇혀있는 기간에도 성인은 자신이 할 일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성인은 수많은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아킨디노스에 반대하는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1346년 요한 칸타쿠제노스가 주도권을 잡게 되자 섭정을 하던 그의 아내 안나(Ann of Savoy)는 성인을 옹호하고는 총대주교를 물러나게 하였다. 이어서 새로운 이시도로스 총대주교(1347-1350)가 임명되었고, 헤시카스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새로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논란이 계속되다가 1351년 인문주의자인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를 단죄한 세째 공의회가 열리고서야 마지막으로 해결되었다. 공의회의 결정문에서는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들과 은총의 본질에 대한 성인의 가르침들이 정교회의 바른 신앙규범으로 인정되었다.

 

1347년 이시도로스 총대주교는 성인을 데살로니까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 도시가 칸타쿠제노스 황제에게 반대하는 열성분자들의 손에 있었던 까닭에 성인은 자신의 교구에 제대로 착좌(着座)할 수 없었다. 한동안 림노스(에게해 북쪽의 섬)에서 피신해 있은뒤 - 당시 이 섬에 전염병이 생기자 성인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 마침내 환호를 받으면서 데살로니까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

 

생애의 말년에 성인은 콘스탄티노플로 항해하던 중 터키인들에게 붙잡혀 1년동안 포로로서 소아시아에 억류되었다.(1354-1355) 그러나 터키인들은 어느 정도의 자유는 허락하였는데, 이런 상태에서 보여준 성인의 (폐쇄적이 아닌) 열린 정신으로 말미암아 성인과 무슬림 종교학자, 에미르(Emir: 오스만 투르크의 장군이며 이슬람교의 수장인 직책. 아랍국가들에서 높은 지위의 귀족에게 붙이는 칭호) 오르한(Orkhan)의 아들 등이 함께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신학적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그뒤 세르비아에서 지불한 몸값 덕분에 풀려난 성인은 데살로니까로 돌아와 사목자로서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죽기전 성인은 오래도록 병으로 고통을 겼었으며, 1359년 11월 14일 안식하셨다. 안식하신 성인의 얼굴은 마치 스테파노스 첫 보제순교자의 얼굴처럼 빛났다.(사도행전 6:15) 1368년 교회는 성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성인께서는 현재까지도 많은 기적들을 행하고 있으며, 디미띠리오스 성인과 함께 데살로니까의 수호성인으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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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의 생애와 교리논쟁, 헤시카즘 등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박노양이 번역한 '동방교회의 신비신학자: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존 메이엔도르프 지음: 누멘, 2009) 66-117쪽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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